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15화 : 허창을 태우는 한신(臣)들의 충의 [7권 끝]
허창을 태우는 한신(臣)들의 충의
점을 친 관로가 네 글자로 된 글귀 넷을 내놓았다.
“삼과 팔이 가로세로 엇갈리고三八縱橫]누런 돼지가 호랑이를 만나면[猪遇] 정군 남쪽에서[軍]한 팔을 꺾여 잃게 된다 [傷折一股].”
조조는 다시 자신의 복록이 길고 짧음을 점쳐보게 했다. 이번에도 관로는 네 글자로 된 글귀 넷을 뽑아냈다.
“사자궁 안에[] 신위가 평안하구나[以安神位]. 왕도가 새로 이 일어나니 [道] 자손이 매우 높고 귀하게 되리라[孫極貴].”
그러나 조조는 앞뒤의 글귀가 모두 뜻이 뚜렷하지 않아 관로에게 그 자세한 풀이를 물었다. 관로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 했다.
“멀고 아득한 하늘의 운수를 미리 다 알기는 어렵습니다. 뒷날을 기다려보시면 절로 겪게 될 것이니 너무 일찍 알려 하지 마십시오.”
이에 조조는 더 캐묻지 않았으나, 관로가 마음에 들어 그냥 돌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대를 태사(太史)로 삼아 이 몸 곁에 있게 하고 싶다. 어떤가?
여기서 벼슬살이 한번 해보지 않겠는가?”
조조가 그렇게 묻자, 관로가 한마디로 잘라 마다했다.
“명은 엷고 상(相)은 궁해서 그같이 높은 벼슬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찌 준다고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명이 엷고 상이 궁하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제 이마에는 주골(骨)이 없고, 눈에는 안정(眼睛)이 또렷하지 못하며, 코에는 양주가 없습니다. 또 다리에는 천근(根)이 없고, 등에는 삼갑(甲)이 없으며, 배에는 삼임(三)이 없으니, 태 산의 귀신들을 다스릴 수 있을 뿐 살아 있는 사람은 다스리지 못합 니다.”
삼갑이니 삼임이니 하는 관상에 쓰이는 말들을 알아듣지는 못했 으나 관로의 대답이 너무 분명해 조조는 더 권하지 못했다. 한참 있 다가 또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 나의 상은 어떠한가?”
“이미 사람으로서는 더 오를 수 없을 만큼 높은 자리에 올랐는데 상을 보실 까닭이 무에 있습니까?”
그 같은 대꾸에 조조가 더욱 궁금해져 두 번 세 번 거듭 물었으나 관로는 다만 빙긋이 웃을 뿐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어진 조조가 그다음에는 자신이 거느린 문무 관원들을 불러들여 놓고 물었다.
“이 사람들은 상이 어떠한가?”
“모두가 세상을 다스릴 만한 분들입니다.”
관로는 그렇게만 말하고 더 깊은 것은 밝히지 않았다. 조조가 이 번에도 거리낌 없이 말하라고 두 번 세 번 졸랐으나 관로는 끝내 입 을 열지 않았다. 조안(趙)의 일 뒤로는 가볍게 남의 상을 말했다가 천명을 거스르게 되는 걸 꺼려해온 탓이었다.
“그럼 동오와 서촉의 앞날은 어떠한가?”
관로가 사람의 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히는 걸 꺼리자 조조는 나라로 바꾸어 물었다. 그것까지 마다할 수가 없었던지 가만히 점괘 를 뽑아보던 관로가 대답했다.
“동오는 한 사람의 대장을 잃을 것이요, 서촉은 지금 군사를 내어 천자의 경계를 침범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얼른 믿을 수가 없었다. 들은 것은 관로가 용하다 는 소문뿐 그 스스로는 아직 이렇다 할 신통함을 구경하지 못한 까 닭이었다. 그런데 홀연 합비에서 사람이 와 알렸다.
“동오의 육구(口)를 지키던 장수 노숙이 죽은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깜짝 놀랐다. 관로의 말이 반쪽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조조는 남은 반쪽을 알아보려고 얼른 사람을 뽑아 한중으로 보냈다. 며칠 안 돼 급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유비가 장비와 마초를 보내 하판(下)에 군사를 내게 하였습니다. 관을 뺏으려 드는 것 같습니다.”
과연 관로의 점이 모두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관로의 용함에 놀라기보다는 유비에게 화부터 먼저 냈다. 지난번 한중을 차지한 기세로 서촉까지 휩쓸어버리려다 두었더니 그새 힘을 길러 거꾸로 한중을 넘보지 않는가.
“크게 군사를 일으킬 채비를 하라. 내 몸소 한중으로 가 유비를 사로잡으리라!”
조조가 그렇게 소리치며 주먹을 부르쥐고 일어났다. 그때 관로가 나서서 가만히 말렸다.
“대왕께서 함부로 움직여서는 아니 되십니다. 내년 봄에는 허도에 큰 불이 날 것인즉, 대왕께서 여기 계셔야 탈없이 그 불길을 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는 성난 중에도 그 말을 아니 들을 수가 없었다. 겪어 알게 된 까닭이었다. 곧 스스로 가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먼저 조홍을 불러 말했다.
“너는 군사 오만을 이끌고 가서 동천을 지키고 있는 하후연과 장
합을 도우라.”
그리고 또 하후돈을 불러서 말했다.
“그대는 군사 삼만을 이끌고 허도로 가 수시로 순찰을 돌며 뜻밖 의 변고에 대비하라.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거기다가 장사 왕필(必)을 따로 불러 허도의 어림군을 도맡아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업군에서 움직이지 않으니, 이로써 허도의 불 에 대한 대비는 빈틈없이 갖춰진 셈이었다.
주부 사마의(司馬懿)가 왕필을 어림군 총독으로 삼은 일에 걱정을 나타냈다.
“왕필은 술을 좋아하는 데다 성품이 너그러워 이번 일을 맡아 하기 어렵습니다. 앞일에 미리 대비하는 데는 성품이 차고 꼼꼼해야 됩니다.”
“왕필은 내가 가시밭길 같은 어려움을 겪을 때부터 나를 따라다 니며 애쓴 사람이다. 사람이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며, 마음이 굳기가 돌이나 쇠와 같으니 오히려 이번 일에는 꼭 맞는 사람이야.”
조조는 그렇게 사마의를 타박 준 뒤 왕필로 하여금 어림 군마를 이끌고 허도의 동화문(門)밖에 진치고 있게 했다.
이때 허도에는 경기(紀)란 사람이 있었다. 낙양 사람으로 자를 계행(行)이라 하며 전에 승상부연을 지낸 적이 있었다. 뒤에 시중 소부가 되었는데 사마직(司馬), 위황(晃) 등과 매우 가깝게 지 냈다.
위황은 조조가 왕으로 높여 봉해지고 출입할 때 천자의 수레와 의장)을 쓰는 걸 보고 마음에 불평이 가득 일었다. 제위를 넘보 는 조조의 야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라 여겨 조조를 미워해오 다가 마침내 일을 일으켰다.
건안 이십삼년 정월이었다. 경기는 위황과 더불어 남몰래 의논했다.
“역적 조조의 간악함이 날로 심해가고 있네. 머지않아 반드시 천 자의 자리를 빼앗고 말 것이네. 우리는 모두 한나라 신하인데 어찌 조조의 역적질을 돕고 거들 수 있겠는가? 마땅히 조조를 없앨 방도 를 짜보아야겠네.”
그러자 위황이 또 한 사람을 끌어들였다.
“내가 한 몸처럼 여기는 벗 가운데 김위(金)란 사람이 있네. 옛 적에 승상을 지낸 김일제(金日磾)의 자손으로, 일찍부터 조조를 쳐 없앨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내가 알고 있네. 거기다가 이번에 어림 군을 맡은 왕필과도 매우 가깝게 지내니, 만약 이 사람만 끌어넣는 다면 우리 일은 다 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네.”
“그가 이미 왕필과 친하다면 어찌 우리가 꾸미려는 일에 끼어들 겠나?”
경기가 문득 걱정스레 물었다. 위황도 그게 마음에 걸리는지 김위 를 끌어들이는 데 신중해졌다.
“가서 한번 말해보세.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그를 떠볼 수도 있 을 것이네.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우리 일에 끼워넣든지 말 든지 하세.”
이에 두 사람은 그 길로 나서 김위의 집으로 갔다. 김위가 반갑게 그들을 맞아들여 후당으로 데려갔다. 주인과 손님의 예를 끝내고 자 리를 잡아 앉기 바쁘게 위황이 말했다.
“자네가 왕장사(長史)와 특히 친하다기에 우리 두 사람이 부탁 할 게 있어 이렇게 왔네.”
“부탁이라니 무엇인가?”
“듣자 하니 위왕은 머지않아 대위를 물려받아 천자가 될 것이라 하네. 그리되면 자네나 왕장사도 틀림없이 높은 벼슬에 오르지 않겠 나? 바라는 바는 그때 우리를 못 본 체하지 말라는 것일세. 은근히 손잡고 도와주면 그 은혜는 꼭 잊지 않겠네.”
속은 감추어놓고 김위를 떠보려고 하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들은 김위의 낯빛이 싹 변하더니 이내 소매를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마침 시중드는 사람이 차를 끓여가지고 들어왔다.
“차는 무슨 놈의 차야?”
김위는 그렇게 내뱉으며 차를 땅바닥에 쏟아버렸다. 심기가 상해도 이만저만 상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 사람아, 오래된 친구를 어찌 이리 야박하게 대하나.”
위황이 짐짓 놀란 체하며 한 번 더 김위의 속을 떠보았다. 그러자 김위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내가 자네들과 가깝게 벗한 것은 자네들이 한조(漢朝)의 훌륭한 신하들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네. 그런데 이제 자네들은 한조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조조에게 빌붙어 역적 질이나 도울 작정인가? 그리하고도 무슨 낯으로 나와 벗삼고자 하 는가!”
“하늘이 정한 운수가 이러한데 그러지 않고 어찌하겠나?”
경기가 곁에 있다가 위황을 거들어 마음에 없는 소리를 보탰다. 그 말에 김위는 더욱 화를 내었다.
“하늘이 정했다니 그 무슨 돼먹잖은 소리들인가! 정말 상종 못할 사람들이로군.”
그렇게 소리치고는 돌아앉아버렸다. 그제서야 경기와 위황은 정 말로 김위가 충성되고 의로운 마음을 지녔음을 믿고 드디어 찾아간 까닭을 사실대로 밝혔다.
“우리는 기실 역적을 쳐 없애려고 자네를 찾아왔네. 이제 한 말은 자네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한번 떠본 것뿐이네.”
“나는 여러 대에 걸쳐 한조의 신하로 산 집의 자손인데 어찌 역적 을 따를 리 있겠나? 나를 너무 작게 보았네그려.”
김위가 그렇게 반가워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 자네들은 한실을 바로잡기 위해 무슨 좋은 계책이 있는가?”
그 말에 위황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비록 이 한 몸을 던져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 으나 아직 역적을 죽일 계책은 정하지 못했네.”
김위가 자청하여 어려운 일을 떠맡고 나섰다.
“내가 때를 보아 바깥에서 호응하여 왕필을 죽이고 그 병권을 뺏 어보겠네. 그런 다음 천자를 받들어 모시고 한편으로는 유황숙과 연 결하여 밖에서 우리를 돕도록 한다면 조조를 없애는 것도 어렵지 않 을 것이네.”
두 사람이 들어보니 자기들이 속으로 바란 것 이상이었다. 두 사 람은 김위의 손을 덥석 잡으며, 입을 모아 그의 충의와 지모를 추켜 세웠다.
“이제 한실은 다시 일어나게 되었네. 덕위(德偉, 김위의 자)가 아니 었다면 어찌 그런 일을 꿈이라도 꿔보겠나?”
그러자 김위가 다시 두 사람을 더 끌어들였다.
“내게 마음으로 벗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조조와는 아비 죽인 원수 사이일세. 지금은 성 밖에 살지만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날개로 쓰는 게 어떻겠나?”
“그게 누군가?”
경기와 위황이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태의 길평의 아들들일세. 맏이는 이름이 길막이요, 자를 문연 然)이라 하며 둘째는 이름이 길목이요, 자는 사연(思然)이라 쓰네. 지 난날 조조가 동승의 의대조衣帶) 사건으로 그 아버지 길평을 죽 였을 때 그들 둘은 멀리 시골로 달아나 겨우 죽음을 면했네. 이제 몰 래 허도로 돌아와 있는데 그들에게 조조를 치는 일을 도와달라면 아 니들을 리가 없을 걸세.”
그 말을 들은 경기와 위황은 크게 기뻐했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믿을 만하다 싶어 어서 보자고 재촉했다. 김위가 곧 사람을 보내 길 막과 길목 형제를 불러오게 했다.
오래잖아 길씨(吉氏) 형제가 오자 김위는 모든 걸 털어놓고 도움 을 청했다. 그 말을 듣기 바쁘게 둘은 눈물을 쏟으며 원한에 찬 맹세 의 말을 내뱉었다.
“돕다 뿐이겠소? 이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맹세코 조조 그 역적 놈을 죽이겠소!”
그렇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다 모이자 일은 좀더 구체적으로 짜여져 갔다. 김위가 그 대략을 말했다.
“정월 보름 밤이면 성안은 집집마다 큰 등을 내걸어 대보름을 경 축할 것이네. 그때 경소부府, 경기)와 위사직(韋司直, 위황) 두 사 람은 각기 집안의 장정들을 끌어모아 왕필의 병영 앞으로 나오게. 그리고 왕필의 병영에서 불이 일어나거든 길을 나누어 밀고 들어와 왕필을 죽여버리도록 하게.”
“왕필을 죽인 다음에는?”
경기와 위황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고 물었다.
“나와 함께 대궐 안으로 들어가 천자를 오봉루(五鳳樓)로 모시고 백관을 불러모아 역적을 치라는 분부를 내리시게 하면 될 것이네. 그때 문연然, 길막) 형제분은 성 밖에서 짓쳐들어와 불길을 신호 로 백성들을 부추겨주게. 나라의 역적을 죽이자고 소리치며 백성들 과 더불어 길을 막아 바깥의 구원군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 야 되네. 그러면 오래잖아 천자께서 조서를 내려 그들 구원군을 항 복하게 만드실 것이네. 대강 허도 성안이 안정이 되면 얼른 군사를 휘몰아 업군으로 가세. 조조를 사로잡고 곧 사신을 보내 유황숙을 모셔들이면 일은 끝나는 것일세. 보름날의 거사는 이경 무렵으로 하 는 게 좋겠네. 부디 조심하여 전의 동승처럼 화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네.”
듣기에는 조금도 빈틈없는 계책이었다. 이에 다섯 사람은 피를 섞 어 하늘에 맹세하고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남지 않은 대보름 이라 거사에 동원할 장정이며 병기들을 채비해두려 함이었다.
그럭저럭 정월 대보름이 가까웠다. 경기와 위황은 각기 삼사백 명 쯤 되는 집안 장정들을 모아 마련해둔 창칼을 나눠주고 때가 오기만 을 기다렸다. 길막과 길목 형제도 채비를 갖추고 기다리기는 마찬가 지였다. 역시 삼사백 명의 이웃 백성들을 모아 사냥을 간다는 핑계 로 떼를 지어 성문 부근에서 서성거렸다.
자기편의 준비가 대략 갖춰진 걸 본 김위가 왕필을 찾아가 말했다.
“이제 천하는 안정이 되고 위왕의 위엄은 사방에 두루 떨쳐 울리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지금은 원소절(節)을 맞았으니 그냥 보낼 수 없습니다. 크게 등불을 밝혀 천하가 태평함을 널리 보이게 해야 합니다.”
왕필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성안 백성들에게 영을 내렸다.
“집집마다 등불을 달고 색실을 꼬아 치장하여 이처럼 좋은 명절 을 경축하도록 하라.”
드디어 정월 대보름 밤이 되었다. 그날 밤 하늘은 맑고 달과 별도 함께 밝았다. 온 성안의 거리는 다투어 내건 울긋불긋한 등불로 눈 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어찌나 흥겹게 노는 지 어림군도 그걸 막지 못하고 궁궐 안의 물시계[玉漏]도 시각을 대 어 그치게 할 수 없었다.
왕필도 어림군의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병영 안에서 술판을 벌였 다. 서로 권커니 작커니 하는 가운데 이경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갑 자기 병영 안에서 함성이 들리며 사람이 달려와 알렸다.
“병영 뒤편에 불이 났습니다.”
왕필이 놀라 장막을 나가 보니 이미 불길이 어지러이 하늘로 치 솟고 있는 데다 함성이 잇달아 터져나왔다. 왕필은 그제서야 군사들 이 잘못하여 불을 낸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꾸민 일인 것을 눈 치챘다. 얼른 말에 올라 남문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경기와 위황이 움직인 뒤였다. 왕필의 병영에 서 불이 나는 걸 보고 집안 장정들을 몰아 짓쳐들던 경기는 황급히 남문으로 달려 나가는 왕필을 만났다. 경기가 시위에 화살 한 대를 먹여 날리자 화살은 보기 좋게 왕필의 어깨에 꽂혔다.
왕필은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으나 겨우 말 고삐에 매달려이번에는 서문 쪽으로 달아났다. 등 뒤에서는 뒤쫓는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시끄러웠다.
다급해진 왕필은 얼른 말에서 뛰어내려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 였다. 그리고 간신히 김위의 집을 찾아가 대문을 두드렸다. 평소 가 까이 지내는 사람이라 그 집에 몸을 숨기려는 생각에서였다.
이때 김위는 몰래 사람을 놓아 왕필의 병영에 불을 지르게 해놓 고 자신은 집안의 장정들을 끌어모아 경기와 위황을 도우러 가고 없 었다. 아낙네들만 남아 집을 지키다가 왕필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자 벌써 김위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줄 알았다. 김위의 아내가 대 문께로 달려 나와 빗장도 열지 않고 물었다.
“벌써 왕필을 죽이고 돌아오시는 길입니까?”
그 말을 들은 왕필은 깜짝 놀랐다. 비로소 김위가 경기, 위황 등과 함께 일을 꾸민 줄 알고 황급히 조휴(曹休)의 집으로 달려갔다. “김위가 경기, 위황 등과 더불어 일을 꾸며 난리를 일으켰소!” 왕필이 어깨로 피를 쏟으며 달려와 그렇게 알리자 조휴는 크게 놀랐다. 곧 갑옷 입고 말에 오르더니 천여 명 군사를 모아 성안을 지 키려고 달려 나갔다.
성안은 이미 사방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 불길은 오봉루까지 옮아 붙어 헌제는 궁궐 깊이 몸을 피하고, 조조의 심복 장수들만이 죽기로 궁문을 지키고 있었다. 경기와 위황 편에서 보면 최초의 차 질이었다. 군사가 넉넉하지 못하면 천자라도 먼저 차지하여 그 힘을 빌려야 되는데 그게 안 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난리를 일으킨 상대방의 세력과 규모를 알 길 없는 조휴로서는 허도가 온통 반란군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들리느니 그들의 성난 외침뿐이었다.
“역적 조조를 죽여라!”
“조조와 그의 개들을 모두 때려잡고 한실을 다시 일으키자!” 만약 조조가 관로의 말을 들어 미리 하후돈을 보내놓지 않았더라 면 자칫 일은 경기와 위황이 꾸민 대로 될 뻔도 했다.
이때 조조의 명을 받아 삼만군을 이끌고 불의의 재변으로부터 허 창을 지키러 온 하후돈은 성 밖 오리쯤 되는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날 밤 성안에서 불길이 오르는 걸 보자마자 대군을 몰아 성을 에워 싸게 한 뒤 자신은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성안으로 짓쳐들어갔다.
하지만 그때 경기와 위황은 이미 조휴와 싸우기에도 힘에 부치는 상태였다. 원래 몇 백 안 되는 집안 장정들만 데리고 시작한 일인 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시간이 흐를수록 조휴의 일천 군사 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그만큼이나마 버틴 것도 순전히 어둠 속의 혼전이었던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날 샐 무렵 하여 더욱 기 막힌 소식이 들어왔다.
“김위 어른과 길막, 길목 형제분이 모두 적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경기와 위황은 마침내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알았 다. 몸을 빼내 뒷날을 기약하기로 하고 한 가닥 길을 앗아 성문을 빠 져나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하후돈의 대군이 철통같이 성을 에워 싼 뒤였다. 두 사람은 끝내 산 채로 붙들리고, 그 둘을 따르던 백여 명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하후돈은 성안의 불을 끄고 일을 꾸민 다섯 사람의 집안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인 뒤 조조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성난 조조가 사 람을 보내 하후돈에게 영을 전하게 했다.
“경기와 위황 및 모반을 꾀한 다섯 사람의 가족은 늙고 젊고를 가 리지 말고 모조리 저잣거리로 끌어내 목을 베라! 그리고 그날 밤 허 도에 있었던 벼슬아치들은 모두 업군으로 끌고 오도록 하라!”
이에 하후돈은 먼저 경기와 위황을 저잣거리로 끌어냈다. 둘은 사 로잡혀 죽으러 끌려가면서도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경기가 소리 높여 멀리 있는 조조를 꾸짖었다.
“이놈 조조야. 내가 살아서는 너를 죽이지 못했다만, 죽어서는 반 드시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네 간악한 머리를 부수리라!”
듣다 못한 망나니가 칼로 그런 경기의 입을 찔렀다. 그러나 경기 는 흐르는 피로 땅을 적시면서도 조조를 욕하여 마지않다가 목이 떨 어지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죽음 앞에서 씩씩하기는 위황도 경기에 못지않았다. 경기가 죽어 가는 동안도 위황은 얼굴과 이마를 땅에 짓찧으며 소리소리 외쳤다.
“한스럽구나! 조조를 죽이지 못하고 내가 먼저 죽는 게 참으로 한 스럽구나!”
그렇게 거듭거듭 소리치며 이빨이 다 부서질 때까지 이를 갈다가 마침내 숨이 끊어졌다. 뒷사람이 그런 두 사람을 시를 지어 찬양했다.
충성스런 경기, 어진 위황, 耿紀精忠韋晃賢
맨손으로 무너지는 하늘을 떠받들려 했네. 各持空手欲扶天
누가 한실의 운수 다했음을 알았으랴. 誰知漢祚相將盡
가슴 가득 한을 품고 죽음길을 갔네. 恨滿心胸喪九泉
하후돈은 그들 다섯의 가솔들까지 모조리 죽인 뒤에야 그날 밤 허도에 있었던 벼슬아치들을 모두 잡아끌고 허도로 갔다. 조조는 그 들을 군사들을 조련하는 교장(敎場)으로 끌고 간 뒤, 오른편에는 붉 은 기를 세우고 왼편에는 흰 기를 세워놓고 말했다.
“경기와 위황이 모반을 꾸며 허도에 불을 질렀다. 그때 그대들 중 에는 불을 끄려고 밖에 나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문을 닫아 걸고 나 오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을 끄려고 나온 자는 붉은 기 아래 서고, 불을 못 본 체 들어앉아 있었던 자는 흰기 아래로 가서 서도 록 하라!”
그러자 끌려온 벼슬아치들은 거의가 붉은 기 쪽으로 우르르 몰려 갔다. 속으로 생각해보니 불을 끄려고 나왔다면 조조가 벌을 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정직하게 흰기 아래로 가서 선 것은 셋 중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저놈들을 모조리 잡아 내려라!”
조조가 문득 붉은 기 아래 모여선 벼슬아치들을 가리켜 소리쳤다. 벌을 면하려고 붉은 기 아래로 몰려갔던 사람들이 저마다 놀라 애처 로운 소리를 냈다.
“위왕 전하, 저희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저희들은 불을 끄러 나갔는데, 어찌하여 도리어 벌을 주려 하십니까?”
“억울합니다. 불을 끄려 한 것도 죄가 됩니까?”
그러자 조조가 그런 그들을 차갑게 흘겨보며 말했다.
“그때 너희들의 마음은 불을 끄는 데 있지 않고 역적들을 돕는 데 있었다. 어찌 나를 속이려 드느냐?”
그러고는 그들 모두를 장하漳河) 가로 끌어내 목 베게 하니 이때 죽은 자가 삼백 명이 넘었다. 실로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러나 흰기 아래선 자들에게는 상을 주어 허도로 돌려보냈는데 이유 인즉 이러했다.
“너희들은 겁은 많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역적 편에 빌붙으려 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걸 내게 대한 충성으로 여겨 상을 내 린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음미해보고 싶은 것은 조조의 잔인함과 포악함을 증명해 보이는 듯싶은 이 사건의 이면에 숨은 뜻이다. 조 조가 관로의 말을 들어 보냈다고 하나, 특별한 실력자도 없는 허도 에 삼만의 대군과 일급의 장수인 하후돈을 보낸 것은 그만큼 그곳에 서 자라고 있는 병란의 조짐을 조조가 느꼈다는 뜻이다.
원래 허창은 천자가 계신 곳일 뿐만 아니라 조조의 승상부가 있 어서 당시의 정치 중심지였다. 그런데 조조가 위왕이 되어 따로 업 군에 자리 잡고 앉자 일은 묘하게 되었다. 조조가 신임하여 허창을 지키도록 남긴 몇몇을 빼면 허창에 남은 벼슬아치들이란 이름뿐인 천자인 헌제와 마찬가지로 현실 세력에서 소외된 이들이었다. 실권 을 잡고 있는 조조의 측근들은 조조를 따라 모두 업군으로 옮아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허도에 남은 벼슬아치들이 업군에 있는 조조와 그 심복들 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으리라고는 보지 않아도 넉넉히 알 수 있 고, 또 그들이 천자를 끼고 무슨 일을 벌이려 들 수도 있다는 것 역 시 얼마든지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조가 구태여 업군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람이 무른 왕필을 치안의 최고 책임자로 앉힌 것 은 일종의 함정 수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남은 반대 세력을 이 기회에 한꺼번에 쓸어버리려고 일부 러 경비를 느슨하게 해주었다가 반대 세력이 멋모르고 걸려들자 그 들을 뿌리 뽑은 것은 물론 내심으로 은근히 그들에게 동조하던 이들 까지 모두 없애버린 셈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가혹하기 그지없는 조 조의 뒷마무리도 끔찍한 대로 어느 정도 이해는 될 수 있다.
그걸 뒷받침해주는 게 뒤이은 조조의 관제) 정비였다. 그 난 리통에 화살을 맞은 왕필이 끝내 죽고 말자 조조는 그를 후하게 장 사 지내주고 곧 허창의 관직부터 정비했다. 조휴로 하여금 어림 군 마를 도맡아 다스리게 하고, 종요(鍾繇)를 상국으로 삼는가 하면 화 흠을 어사대부로 세워 다시는 허도가 그런 일로 동요함이 없게 했 다. 그다음 한 일은 제후의 등급을 새로 정한 것이었다.
후(侯)의 작위는 육등 십팔급으로 하여 관서의 제후 십칠급은 모 두 금도장에 자줏빛 인끈[金紫綬]을 쓰게 하고 또 관내외(關內外) 에도 후侯) 십육급을 세워 은 도장에 검은 인끈[銀印黑綬]을 쓰게 했으며, 다시 오대부(大) 십오급을 두어 구리 도장에 고리 모양으 로 꼰 인끈[銅印鑼組]을 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