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2화 : 서천은 절로 다가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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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2화 : 서천은 절로 다가오고


서천은 절로 다가오고

마초가 조조에게 여지없이 져 멀리 농서로 쫓겨갔다는 소문은 한 중 땅에도 전해졌다. 그곳의 주인 한녕 태수 장로(張魯)는 크게 놀 랐다.

원래 장로는 패국 풍인 사람이었다. 그 할아비 장릉(張陵)이 서천 으로 건너가 곡명산(鵠鳴山)에 자리를 잡고 도서(道書)를 지어내 사 람들을 홀리니 거기에 속은 그곳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았다. 장릉이 죽은 뒤에는 그 아들 장형(張衡)이 아비의 일을 이어받았는 데, 장형은 백성들 중에 자신의 도(道)를 배우려는 이가 있으면 쌀 닷 말을 거두고 받아들여 세상 사람들은 그의 무리를 ‘쌀도둑[賊]’ 이라 불렀다.

장로는 장형의 아들이었다. 장형이 죽은 뒤 역시 아비의 일을 이어받아 한중에 자리 잡고 스스로를 사군(師君)이라 했다. 뿐만 아니 라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도 칭호를 주어 자신의 도를 배우러 오는 자는 귀(鬼)이라 이름하고 그 우두머리는 좨주(祭酒)라 불렀으 며 무리를 아주 많이 거느린 좨주는 특히 치두대좨주(治頭大祭酒)라 했다.

무리를 다스림에 있어서도 아비나 할아비 때와는 크게 달랐다. 모 든 일에 정성과 믿음을 으뜸으로 삼았으며 도를 앞세워 어리석은 백 성들을 속이는 걸 엄히 막았다.

병든 사람은 제단을 쌓고 조용한 방안에 거처함과 아울러 제단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했다. 그다음 병이 낫기를 비는데 이때 주로 비는 일을 맡아 보살피는 이를 감령좨주(監令祭酒)라 했 다. 비는 법은 병든 사람의 이름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을 적 은 글인 삼관수서(三官手書)를 세 통 써서 한 통은 산꼭대기에 묻어 산과 하늘에 고하고 다른 한 통은 땅에 묻어 땅에 고하며 나머지 한 통은 물에 넣어 물귀신에게 고하게 했다.

그런 다음 병이 나으면 쌀닷 말을 내어 고마움을 나타냄과 아울 러 의사)란 집에다 음식물을 차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음대 로 집어먹게 했다. 의사는 치두대좨주가 나그네를 위해 지은 집으로 거기 차려진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집어먹으면 하늘의 벌을 받아 죽 는다는 말이 있었다.

무리 가운데서 법규를 어긴 자가 있을 때 벌하는 것도 특이했다. 어떤 죄를 지어도 세 번까지는 반드시 용서하고 그래도 행실을 고치 지 않으면 비로소 형벌을 내렸다. 또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은 관부의 벼슬아치가 오지 않고 모든 일은 좨주들이 맡아서 처리했다. 그렇게 한중 땅을 차지하고 버티기 삼십 년, 조정에서는 길이 멀어 그곳을 정벌하지 못하고 장로에게 진남중랑장을 내리고 한녕 태수로 삼았 다. 그렇게 하여 한중을 다스릴 권한을 주고 조공만 바치도록 해줌 으로써 정벌을 대신했다. 후한말처럼 어지러운 천하에서나 있을 법 한 일이었다.

그 장로가 천하를 떨쳐 울리는 조조의 위세에 놀라 무리를 모아 놓고 의논을 시작했다.

“서량의 마등은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 마초도 이번 싸움에 져 멀 리 쫓겨갔다 하니 다음으로 조조는 틀림없이 우리 한중을 향해 쳐들 어올 것이다. 나는 스스로 한녕왕(漢寧王)이 되어 우리 군사를 이끌 고 조조에게 맞서 싸워 보려는 바,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무리 가운데 염포(閻圃)란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한중은 호수만으로도 십여 만이 되는 백성을 거느리고 있는 데 다 재물은 많고 곡식은 넉넉합니다. 또 사방의 지세가 험해 지키기 좋을 뿐더러 이제 마초가 조조에게 패한 바람에 자오곡(子午谷)을 거쳐 한중으로 도망온 서량의 백성들도 수만 호나 됩니다. 제 어리 석은 소견으로는 익주의 유장)이 어둡고 약하니 그 땅부터 먼 저 손에 넣는 게 좋겠습니다. 서천 마흔한 고을을 아울러 바탕을 든 든히 한 뒤에 왕을 칭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자못 통이 큰 구상이었다. 장로는 크게 기뻐하며 아우 장위(張) 와 의논하여 서천을 칠 군사를 크게 일으켰다.

익주목(牧) 유장은 자를 계옥(季玉)이라 하며, 한때 인망 높던 유언(焉)의 아들이요, 한나라 노공왕(魯恭王)의 후손이었다. 장제 (章) 원화(和) 연간에 경릉陵, 봉지 이름. 원래는 서천에 있지 않았 던 듯)이 서천으로 옮겨지매 그리로 따라와 살게 되었는데, 뒷날 그 아비 유언은 벼슬이 익주목에 이르렀다. 흥평(興平) 원년 유언이 병 들어 죽자 서천 태수 조위 등이 그 아들을 받들어 익주목에 오르게 하니 그 아들이 곧 유장이었다.

유장은 일찍이 장로의 어미와 아우를 죽인 일이 있어 장로와는 수로 지냈다. 따라서 특히 믿는 방희(龐羲)를 한중과 가까운 파서 ( 西)태수로 삼아 평소에도 장로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방희는 장로가 군사를 일으켜 서천을 뺏으러 온다는 말을 듣자 급히 그 사실을 유장에게 알렸다. 유장은 원래 겁이 많고 마음이 약 한 사람이었다. 그 같은 전갈을 받자 크게 걱정하며 자기 밑의 벼슬 아치들을 끌어모아 놓고 앞일을 의논했다. 문득 한 사람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 나와 말했다.

“주공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세치 썩지 않은 혀로 장로가 감히 우리 서천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 겠습니다.”

유장이 반가운 눈길로 보니 그는 익주의 별가(別駕)로 있는 장송 (張松)이란 사람이었다. 재주는 있으나 생김이 괴이쩍어 얼굴은 깎 아낸 듯 비딱하고 머리통은 뾰족했으며 코는 찌그러지고 이빨은 가 만히 있어도 잇몸까지 드러나 보였다.

거기다가 키는 다섯 자로 겨우 난쟁이를 면했고, 목소리도 구리종 같이 댕댕거려 도무지 볼품이 없었다. 그래도 때가 때인지라 그의 재주 하나에만 기대를 걸고 유장이 물었다.

“별가는 어떤 좋은 생각이 있길래 장로를 달래 이 위태로움을 풀수 있다는 것인가?”

장송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 허도의 조조는 중원의 군웅들을 비로 쓸듯 하여 여 포와 원소, 원술이 모두 그에게 멸망당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이 번에 다시 마초를 쳐부수었으니 이제 하늘 아래 그에게 맞설 자가 없어졌다 할 수 있습니다. 주공께서 예물을 갖춰주시면 제가 허도로 가서 조조를 달래 장로를 치도록 만들겠습니다. 조조가 군사를 일으 켜 한중으로 밀려들면 장로는 그에 맞서기도 힘겨울 판에 어찌 감히 우리 중蜀中)을 넘볼 수 있겠습니까?”

생김과는 달리 그럴듯한 말이었다. 유장은 크게 기뻐하며 금은 보 석과 비단을 예물로 갖춰 장송에게 주고 허도로 가서 조조를 달래보 도록 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그날로 종자 몇 기를 딸린 채 길 을 떠난 장송이 몰래 품안에 감추고 간 서천의 지리도본(地圖)이 다. 산세와 지형 외에도 성곽과 관의 위치에다 거기에 딸린 백성들 과 군사들의 머릿수까지 기입해둔 일종의 군사 지도였기 때문이다. 한 권력 체계가 붕괴하기 시작하면 그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조 짐이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 체계 를 지탱하고 있던 지식인 계층의 이반(反)이다. 이른바 눈알 파랗 고 머리칼 노란 학자들이 말하는 ‘지식인의 탈주’ 또는 ‘충성의 전이 (轉移)’ 현상이 그러하다. 장송이 어쩌면 자기가 속한 권력 집단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그런 지도를 누구에겐가 주려고 그려간 것은 바로 그 ‘지식인의 탈주’의 한 예가 될 것이며, 그런 뜻에 서 유장의 서촉은 이미 내부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고 보아 틀림이 없다.


어쨌든 유장이 조조에게 예물을 갖춰 사람을 보냈다는 소문은 이 미 제갈량이 서천에 풀어놓은 세작들에 의해 곧 형주에 전해졌다. 진작부터 그 땅에 남다른 기대를 걸고 있던 제갈량으로서는 바짝 긴 장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이에 제갈량은 다시 허도에도 세 작을 풀어 장송과 조조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염탐케 했다.

한편 여러 날이 걸려 허도에 이른 장송은 역관에 짐을 풀고 매일 승상부로 찾아가 조조에게 보기를 청했다. 이때 조조는 마초를 두드 려 쫓은 뒤라 마음이 한껏 우쭐하고 느긋해져 있었다. 날마다 술잔 치를 벌이며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어 나랏일마저 조조의 승상부 안에서 의논되고 결정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서천에서 왔다는 사자가 조조에게 그리 크게 보일 리 없어 장송은 사흘 만에야 겨우 자신이 온 것을 조조에게 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람의 장막에 둘러싸인 조조를 만나기는 쉽지 가 않아 장송은 다시 조조를 가까이서 모시는 벼슬아치들에게 뇌물 을 주고서야 겨우 조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조조도 옛날의 조조가 아니었다. 지혜롭고 재주 있다는 자들에 둘 러싸여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숨은 인재에 대한 갈증이 모두 사라 졌는지 당상에 높이 앉아 장송을 맞아들였다. 장송은 조조의 그런 거만함에 자못 속이 뒤틀렸으나 떠맡은 일이 있는지라 꾹 참고 절부 터 올렸다.

“네 주인 유장은 어찌하여 해마다 조공을 올리지 않느냐?”

막 절을 끝낸 장송에게 조조가 대뜸 꾸짖듯이 물었다. 장송의 볼 품없는 생김이 조조에게 더욱 얕보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길이 거칠고 험한 데다 도적들이 가로막아 조공을 올릴 수가 없 었습니다.”

장송은 조조가 그 도적들에 대해 물어주기를 은근히 기다리며 대 답했다. 그러자 조조는 성부터 냈다.

“내가 이미 중원을 깨끗이 쓸듯 했는데 도적은 무슨 도적이 있단 말이냐?”

도적이 누군가를 묻고 있다기보다는 도적이 남아 있다는 말 자체 가 조조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장송은 더욱 속이 뒤틀렸다. 조 조의 말을 비웃듯 대답했다.

“남쪽에는 손권이 있고 북쪽에는 장로가 있으며 서쪽에는 유비가 있습니다. 그중에 세력이 적은 자라도 갑옷 갖춘 병사만 십만이 넘 을 것인데 승상께서는 어찌 천하가 태평한 듯 말하십니까?”

그러지 않아도 볼품없는 생김 때문에 장송이 별로 달갑지 않던 조조는 충동질에 가까운 그 말에 더욱 기분이 상했다. 갑자기 소매 를 떨치고 일어나 후당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대는 사신으로 와서 어찌 그리도 예를 모르시오. 첫마디부터 승상의 심기를 건드려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오? 다행히도 승상께서는 그대가 멀리서 온 낯을 보아 죄를 묻지는 아니하셨으나 그대는 되도록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외다. 이곳에 더 머뭇거리며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는 반드시 큰 화를 입을 것이오!”

조조가 성난 얼굴로 방을 나간 뒤 좌우에서 그렇게 장송을 나무 랐다. 장송이 껄껄 웃으며 여럿에게 들으라는 듯 빈정거렸다. 

“알겠소이다. 우리 서천 사람들은 남에게 아첨하는 소리를 하지 못해 그리되었소.”

“그대가 사는 서천의 사람들은 아첨을 모른다니 그게 무슨 말인 가? 우리 중원에는 아첨꾼만 살기라도 한단 말인가?”

장송의 빈정거림에 누군가 큰 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장송이 그 사람을 보니 눈썹이 엷고 눈이 가늘며 얼굴이 희고 정신이 맑아 보 였다. 장송이 그 이름을 묻자 양수(楊修)라 대답했다.

양수는 동탁과 이각, 곽사의 난리 때 한실을 위해 여러 가지로 공 을 세운 태위 양표(楊彪)의 아들이었다. 부친 양표는 원소, 원술과 친척인 탓에 조조에게 내침을 당했으나 그는 승상 문하의 창고를 맡 아보는 주부(主簿)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는 게 많고 말을 잘했으며 식견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런 양수를 한눈에 알아본 장송은 마음속으로 어려움을 느껴 적 당히 말을 둘러댔다. 자칫하면 양수의 말재주에 넘어가 낭패를 보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양수 또한 자신의 재주를 믿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얕보아온 터 였으나 장송만은 달리 보였다. 천하의 조조를 면전에서 빈정거리는 그의 말투에 은근히 감탄하며 그 자리에서는 더 장송을 몰아세우지 않고 데리고 나와 자신이 일을 보는 서원으로 이끌었다.

주인과 손님이 각기 자리를 잡은 뒤에 양수가 조조를 대신하듯 새삼 말했다.

“촉 땅의 길은 거칠고 험하다는데 멀리서 오시느라 괴로움이 크셨겠소.”

“주인의 명을 받았으니 끓는 물에 뛰어들고 불을 밟게 된다 한들 어찌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장송도 조조와 만났을 때와는 달리 예의 바르게 말을 받았다. 양수가 다시 물었다.

“그래, 촉은 어떤 땅입니까?”

“촉은 나라의 서쪽에 치우친 고을로 옛날에는 익주라 불렸습니다. 길은 금강(錦江)이 있어 험하고 땅은 검각(閣)에 이어져 보기에 씩 씩합니다. 그 땅을 한 바퀴 도는데 이백팔정, 길의 거리 단위. 역을 설치할 정도의 거리)이요, 가로지르면 삼만 리가 좀 넘지요. 거기에 닭 울음과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을 수 있을 만큼 저자와 거리들이 잇 대어 있으며, 밭은 기름지고 경치는 아름다운 데다 가뭄과 물난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 나라는 넉넉하고 백성들은 잘 살아 음 악을 즐기며, 그 땅에서 난 것들은 산처럼 쌓여 있지요. 하늘 아래 촉을 따라갈 만한 땅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장송의 그 같은 말에 양수가 다시 물었다.

“촉의 인물은 어떠합니까?”

“글로는 저 유명한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있고, 장수로는 복파장군 (伏波將軍) 마원(馬)이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데는 중경(仲景)같 은 의자가 있고, 앞일을 미뤄 내다보는 데는 군(君)같이 숨어 사는 복술가(術家)가 있지요. 또 세 가지 가르침, 아홉 갈래의 유파 [三九流]에 있어서도 각기 그 무리에서 빼어난 사람이 수없이 많 으니, 어찌 촉의 인물들을 이 자리에서 모두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유계옥(玉) 밑에는 공만 한 이가 몇이나 됩 니까?”

속으로 감탄한 양수가 묻기를 거듭했다. 그 물음 속에는 촉의 힘 을 은근히 가늠해보려는 뜻도 있었다. 장송이 그걸 알고 더욱 야단 스레 떠벌렸다.

“문무를 아울러 갖추고 지혜와 용맹을 함께 지녔으면서도 충의에 가득한 이만도 백은 넘습니다. 하물며 저같이 재주 없는 무리겠습니 까? 구태여 말한다면 이 장송 같은 무리는 수레에 실어 나르고 말 [斗]로 되어야 할 만큼 많아서 일일이 손꼽을 수조차 없을 지경입 니다.”

“공의 벼슬은 무엇이오?”

“분에 넘치게도 별가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으나 일을 감당해내기 어렵습니다.”

장송이 그렇게 답해놓고 문득 양수에게 물었다.

“이런 걸 물어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공의 벼슬은 무엇입니까?” “승상부의 주부로 있습니다.”

양수가 왠지 떳떳찮은 얼굴로 대답했다. 장송이 양수의 그런 기색 을 놓치지 않고 슬쩍 퉁겼다.

“오래전부터 듣기로 공은 대를 이어 높은 벼슬을 해온 명문의 후손이라 했습니다. 마땅히 묘당에 올라 천자를 받드셔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구구하게 승상부의 한낱 이름없는 벼슬아치가 되셨습니까?”

그러자 양수의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가득 떠올랐다. 잠시 말이 없다가 문득 아픈 곳을 건드린 데 부아가 난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비록 낮은 벼슬자리에 있으나 승상께서는 내게 군사를 부 리는 데 중히 쓰이는 돈과 곡식을 모두 맡기셨소. 거기다가 아침저 녁으로 승상께 가르침을 받아 배우고 깨우칠 게 매우 많은 까닭에 그 자리를 맡았소이다.”

그 말을 들은 장송이 껄껄 웃더니 말했다.

“내가 듣기로 조승상은 글에 어두워 공자, 맹자의 가르침조차 잘 알지 못하고, 무(武)에 있어서도 대단한 게 없어 손자, 오자의 병법 조차 통달하지 못했다 그럽디다. 오늘날처럼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오직 우격다짐의 패도(道) 때문이라던데 무얼 가르치고 깨우 쳐줄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공 같은 큰 재주를 일깨우고 열어 줄 수 있다니요?”

이제는 조조까지도 깎아내리는 판이었다. 양수가 그런 장송의 기 를 꺾어보려는 듯 엄한 얼굴로 말했다.

“공은 변방의 한 모퉁이에 계셨으니 어찌 승상의 크나큰 재주를 알 수 있겠소? 내가 공께 꼭 보여드릴 게 있소.”

그리고 부리는 사람을 시켜 선반에서 책 한 권을 내려오게 했다. 장송이 받아보니 책 겉장에 ‘맹덕신서(孟德新書)’란 넉 자가 크게 쓰 여 있었다.

장송은 그 책을 받아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살폈다. 모두 열세 편 으로 되어 있는데 한결같이 군사를 부리는 법에 관한 글이었다.

“공은 무슨 뜻으로 이 책을 내보이시오? 이게 무슨 책이오?”

읽기를 마친 장송이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양수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며 답했다.

“이것은 승상께서 옛일을 돌아보고 이제 일에 견주어 손자가 그 러했듯 열세 편으로 된 책 한 권을 만들어보신 것이오. 공은 승상이 재주 없다 하셨으나, 이만하면 어떠시오? 뒷세상에 남겨 전해줄 만 하지 않소?”

“무어요? 이 책은 우리 촉에서는 키가 석 자 되는 어린아이도 모 두 외고 있는데 신서(新書)는 무슨 놈의 신서란 말이오? 원래 전국 시대 어느 이름 없는 선비가 쓴 것을 승상이 도적질에 능해 자기가 지은 것인 양 베껴 써놓고 그대를 속였을 뿐이외다.”

장송이 전보다 더욱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그런 엄청난 소리를 했다. 양수도 그건 너무하다 싶었던지 불끈하며 따지듯 물었다. 

“이것은 승상께서 깊이 감추어두신 책으로 비록 쓰기는 마쳤으나 아직 세상에 내놓은 적이 없소. 그런데 촉에서는 어린아이들까지 줄 줄 될 수 있다니 그건 사람을 속여도 너무 지나친 게 아니오?” 

“속이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정히 믿지 않으신다면 내가 한 번 외워 보이지요.”

장송이 그렇게 말하고 그 자리에서 『맹덕신서를 외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낭랑하게 외는데 단 한 자도 틀린 데가 없었다. 양 수는 깜짝 놀랐다. 장송의 말대로 조조가 남의 글을 도둑질한 것은 아니라는 것쯤 양수도 짐작은 했지만, 한번 훑어본 책을 그대로 내 리 욀 수 있는 그 엄청난 기억력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은 한번 본 것은 결코 잊는 법이 없으니 참으로 천하의 기재 (奇)외다!”

양수는 그렇게 탄복하고 장송이 돌아가려 할 때 스스로 나서서 말했다.

“공은 잠시만 숙소에서 기다려주시오. 내가 다시 한번 승상께 말 씀드려 공을 만나보게 하겠소이다.”

이에 장송은 양수에게 감사하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결과를 기다렸다.

양수는 곧 안으로 들어가 조조를 찾아보고 말했다.

“얼마 전에 승상께서는 어인 까닭으로 장송을 소홀히 대접하셨습니까?”

“말투가 공손하지 못해 일부러 그랬네.”

조조가 아직도 언짢은 듯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양수가 딱하 다는 어조로 다시 물었다.

“승상께서는 예형 같은 사람도 용납하셔 놓고 어찌하여 장 송은 용납하지 못하십니까?”

“예형은 문장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라 내가 차마 죽이지 못했지만 장송이란 자는 무어 보아줄 만한 재주가 있어야지.”

여전히 일없다는 표정으로 조조가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입은 흐르는 물 같고 말재주는 어디에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제가 승상께서 지으신 『맹덕신서』를 보여주었더 니 한번 훑어보고는 그대로 내리 외워 보이더군요. 그렇게 많이 알 고 기억을 잘해내는 사람은 실로 세상에 드물 것입니다.”

거기까지만 하고 그쳤어도 조조가 장송을 보는 눈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글재주만 있지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양수라장 송이 한 소리를 모두 곧이곧대로 조조에게 말해버렸다.

“또 장송이 말하기를 그 책은 전국시대의 어느 이름 없는 선비가 쓴 것으로 촉에서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훤히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의 두뇌가 남보다 뛰어남을 믿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 는 데는 바로 그 자부심을 건드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 다. 그런데 양수는 장송의 재주를 추켜세우는 데 바빠 바로 그런 조 조의 자부심을 건드려버린 셈이었다.

“옛사람의 생각이 우연히 내 생각과 맞아떨어지는 수도 있지 않겠나?”

조조는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속으로는 심기가 몹시 상한 듯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쓴 책을 꺼내더니 갈가리 찢어 불살라버리게 했 다. 그래도 양수는 눈치 없이 조조에게 권했다.

“그 사람을 다시 불러보시고 조정의 높은 기상을 느끼도록 해주십시오.”

조조는 그런 양수의 권유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체했으나 그 목 소리에는 이미 독기가 서려 있었다.

“내일 서쪽에 있는 교장(場)에서 내가 군사를 점고하고 있을 테 니 그대는 장송을 데리고 그리로 오도록 하라. 저에게 우리 군사들 의 굳세고 씩씩한 모습을 보인 뒤 그 주인에게 돌아가 전하도록 해 야 한다. 내가 곧 강남으로 내려가 서천을 차지하리라고.”

하지만 양수는 조조가 그나마도 다시 장송을 보겠다고 하는 게 다행스러웠다. 자신이 아는 장송의 재주라면 얼마든지 조조의 마음 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여겨 두말없이 조조의 명을 따랐다.

다음 날이었다. 양수는 장송을 데리고 서편에 있는 교장으로 갔 다. 조조는 오만의 호위병을 그곳에 벌려 세우고 장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조가 가장 아끼는 부대라 그런지 실로 그 위용은 보는 이 를 놀라게 할 만했다.

장졸들의 갑옷은 번들거리고 그 안에 받쳐 입은 전포도 울긋불긋 찬란하기 그지 없었다. 북소리 징소리에 하늘이 내려앉을 듯한데 창 과 칼은 햇빛을 받아 번쩍이고 정기는 사방으로 줄을 지어 흩어지고 모이는 군사들을 따라 펄럭였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마치 사람과 말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았다.

장송은 찌푸린 눈으로 그런 호위병들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 조 조가 장송을 부르더니 벌려 선 군사들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그대의 서천에서도 일찍이 이 같은 영웅들을 보았는가?”

어느 정도 장송의 기가 질렸으리라 믿어 물은 것이지만 조조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장송은 곁에서 듣는 사람이 민망할 만큼 차갑게 대꾸했다.

“우리 촉에서는 일찍이 이처럼 대단한 군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인의로 백성을 다스리는 걸 보아왔을 뿐입니다.”

그 말에 조조는 낯빛이 싹 변했다. 그러나 장송은 조금도 두려워 하는 빛이 없었다. 급해진 양수가 눈짓으로 장송을 말려 더는 조조 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하게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천하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풀이나 지푸라기쯤으로도 안 본다. 나의 대군이 이르면 싸워서 이기지 않음이 없고 쳐서 빼앗지 못함이 없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살고 나를 거스르는 자는 죽게 됨 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장송의 말에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조조가 위협하듯 그렇게 물 었을 때였다. 장송은 양수의 눈짓도 못 본 체하고 오히려 빈정거림 까지 섞어 맞받았다.

“승상께서 군사를 몰아 이르신 곳마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시고 치면 반드시 빼앗으신 것은 저도 잘 압니다. 지난날 복양에서 여포 를 치실 때며, 완성에서 장수와 싸우실 때며, 적벽에서 주유(周 瑜)와 부딪치셨을 때며, 화용도에서 관우를 만나셨을 때, 그리고 동 관에서 수염을 자르고 입은 옷을 벗어 던지실 때와 배를 뺏어 타고 화살을 피하며 위수를 건너실 때가 그렇습니다. 이는 모두 하늘 아 래 승상께 맞설 자가 없음을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늘어놓는 게 모두 조조가 가장 참담하게 진 싸움들이고 보니 조 조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더벅머리 선비 놈이 어찌 감히 나의 아픈 곳만 건드리느냐!”

크게 노한 조조가 그렇게 장송을 꾸짖은 뒤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무엇들 하는가? 어서 저놈을 끌어내다 목을 베어버려라!”

놀란 양수가 나서서 조조를 말렸다.

“장송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그는 멀리 촉으로부터 조공을 바치러 들어온 사람입니다. 장송을 죽이셨다가 멀리 있는 그곳 백성들의 인심을 잃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래도 조조는 성난 기색을 풀지 않은 채 장송을 목 벨 것만 재촉 할뿐이었다. 순욱이 다시 양수의 편을 들었다.

“양덕조(楊德祖)의 말이 옳습니다. 사신을 목 베어 서천 사람들의 원망을 사서는 아니 됩니다.”

그제서야 조조가 영을 바꾸었다.

“저 더벅머리 선비 놈의 버러지 같은 목숨을 붙여줘라. 하지만 몽 둥이질로 저놈의 요망한 입을 다스린 뒤에 내쫓아야 한다!”

그 순간이 바로 스스로 다가온 천하의 삼분의 일을 몽둥이질해 내쫓는 순간이라는 것을 조조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조조에게 흠씬 두들겨맞고 그날 밤으로 허도를 나선 장송은 서천 으로 돌아가는 길을 잡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냥 돌아갈 수는 없 어 발길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원래 서천의 주와 현을 모두 조조에게 바치려고 왔건만, 조 조가 이렇게 사람을 함부로 대할 줄 누가 알았으랴. 내가 올 때 유장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으니 아무 얻은 것 없이 이대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서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내가 듣기로 형 주의 유현덕은 인의로 널리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라 하니, 차라리 그쪽을 거쳐 돌아가는 길을 잡아보는 게 낫겠다. 가다가 유현덕을 만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기나 하자. 그를 만나보면 그다음에 내가 할 일도 절로 가늠이 설 것이다.’

그리고 말 머리를 돌려 형주로 향했다.

장송이 그 종자들과 함께 형주 땅으로 가다가 영주 초입에 이르렀을 때였다. 문득 한 떼의 인마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데 줄잡아 오백 기는 넘어 보였다. 앞선 장수가 가벼운 차림으로 말을 달려와

공손하게 물었다.

“오시는 분은 익주의 장별가張駕)가 아니십니까?”

“그렇소이다.”

차림이나 말투로 보아 자신을 해치러 온 것 같지는 않아 장송이 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 장수가 황망히 말에서 내리더니 더욱 목 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스스로를 밝혔다.

“조운이 군사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기다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말에 장송도 얼른 말에서 내려 답례를 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상산의 조자룡 장군이 아니시오?”

“그렇습니다. 주공 유현덕의 명을 받들어 먼 길을 가시는 대부를 마중 나왔습니다. 잠시 말을 쉬게 하시고 우리 주공께서 특히 저를 시켜 보내신 술과 드실 것을 거두어주십시오.”

조운이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보자 따라온 군사들이 장송 앞에 엎드려 술과 고기를 올렸다. 장송은 속으로 은근히 놀랐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유현덕은 너그럽고 어질며 나그네를 잘 대접 한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그러고는 기꺼이 보내온 음식을 받은 뒤 조운과 더불어 술잔까지 나누었다.

조운은 그 뜻밖의 마중을 유비의 덕으로 돌렸으나 실은 모든 것 이 제갈공명의 솜씨였다. 진작부터 허도에 심어둔 세작들을 통해 장 송이 당한 일을 듣고 그같이 안배를 해둔 터였다.

장송이 조운과 술 몇 잔을 나눈 뒤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형주땅으로 들어서니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앞에 한 역관이 보이 는데 문 밖에 백여 명의 사람이 두 손을 모은 채 서서 기다리다가 북을 치며 장송을 맞아들였다.

한 장수가 말 앞에 나타나 예를 표하며 말했다.

“형님의 명을 받들어 이 관아무개가 마당을 쓸고 술을 마련해 기 다린 지 오래됩니다. 아무쪼록 대부께서는 먼 길을 오시느라 더께 앉은 먼지를 털어버리시고 이곳에서 하룻밤 편히 쉬도록 하십시오.” 

장송은 더욱 감격했다. 얼른 말에서 내려 답례를 한 뒤 관우, 조운 과 더불어 역관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기 바쁘게 술과 밥이 들어왔다. 한눈에 정성을 다해 마련한 것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정갈하면서도 푸짐한 상차림이었다. 거기다가 조조에게 모진 매까지 맞고 쫓겨난 장송이 고 보니 그 환대가 어느 때보다 돋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장송은 관 우와 조운이 번갈아 권하는 술잔을 흥겹게 받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 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장송은 일찍 아침상을 물리고 말에 올랐다. 관우와 조운 이 오백여 기와 더불어 장송을 호위하듯 뒤따랐다. 그런데 겨우 사 오리나 갔을까, 다시 한 떼의 인마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게 보였 다. 유비가 엎드린 용[伏龍]이라는 제갈량과 새끼 봉[鳳雛]이라는 방 통을 데리고 몸소 장송을 맞으러 달려 나온 것이었다.

유비는 장송을 알아보자 먼저 말에서 내려 장송이 다가오기를 기 다렸다. 그가 유비라는 것을 알아본 장송도 황망히 말에서 내려 유비 앞으로 나아갔다.

“오래전부터 대부의 높으신 이름은 우렛소리처럼 들어왔습니다만 한스럽게도 구름 낀 산이 첩첩이 막혀 있어 가르침을 들을 길이 없 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 이곳을 지나 돌아가신다는 말을 들었기로 이렇게 나와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몸이 어리석다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비록 보잘것없는 고을이나 잠시 이곳에 쉬어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덕분에 오랜 우러름과 사모함에서 온 제 마음속의 목마름을 풀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서로 예가 끝난 뒤 유비가 청했다. 조조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 큼이나 다른 정중함이었다. 감격한 장송은 기꺼이 유비의 청을 받아 들였다. 곧 말에 올라 유비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형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부중에 이른 뒤에도 유비의 정중함과 은근함은 한결같았다. 장송 을 당(堂) 위로 불러앉히고 잔치를 열어 정성껏 대접했다.

술잔이 오간 지 한참이 지났으나 유비는 한가로운 얘기만 늘어놓 을 뿐 서천에 관한 일은 입 끝에도 올리지 않았다. 유비의 환대가 서 천 때문이라 짐작하고 있던 장송 쪽이 오히려 은근한 조바심이 일지 경이었다.

“지금 황숙께서 다스리는 형주는 몇 군이나 됩니까?”

기다리다 못한 장송이 다른 얘기 끝에 슬쩍 퉁겨보았다. 곁에 있 던 공명이 어두운 얼굴로 유비를 대신해 그 말을 받았다.

“형주는 동오로부터 잠시 빌려 쓰고 있는 땅일 뿐입니다. 그것도 동오에서는 걸핏하면 사람을 보내 내놓으라고 야단이지요. 다행히 우리 주공께서 손씨가)의 사위인 까닭에 그럭저럭 버텨 이렇게 몸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동오는 여섯 군, 여든한 고을을 차지하여 백성들은 억세고 나라 는 넉넉하건만 그래도 만족할 줄 모른단 말씀입니까?”

장송이 담박 의기가 동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돋우었다. 이번 에는 방통이 나서서 대꾸했다.

“우리 주공은 한 왕실의 황숙이시건만 오히려 한 조각 땅도 차지 하지 못하고 다른 자들은 모두 한을 좀먹는 도적들이건만 힘으로 넓 은 땅들을 차지하고 있소이다. 무얼 좀 아는 사람이면 마땅히 불평 을 품을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제서야 유비가 그 얘기에 끼어들었다.

“두 분께서는 더 말씀 마시오. 내게 무슨 덕이 있다고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겠소?”

마치 땅을 차지하는 다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오히 려 그 말을 받는 장송이 더 열을 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명공께서는 한실의 집안 어른이시요 인의로 안 팎에 널리 알려진 분이십니다. 주나 군을 차지하시는 것은 말할 것 도 없고, 나아가 대통을 이어 천자의 자리에 앉으셔도 분에 넘 치는 일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소리였으나 그래도 유비는 작은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겸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자신을 크게 보아주는 장송 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공의 말씀은 너무도 지나치시오. 이 비가 어찌 그런 말씀을 감당할 수 있겠소?”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이나 장송을 위해 잔치를 베풀면서도 서천의 일은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

이윽고 장송이 떠나는 날이 되었다. 유비는 십리 밖 정자에다 다 시 크게 잔치를 벌여 떠나는 장송에게 마지막 정을 나타냈다. 

“고맙게도 대부께서 버리시지 않고 사흘이나 머물러주시어 많은 가르침을 받았소이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 높으신 가르침 을 듣게 될는지…..”

유비가 술을 가득 부은 잔을 장송에게 권하며 그렇게 말끝을 흐 렸다. 그리고 이내 주르르 눈물을 쏟는 것이 그냥 해보는 소리 같지 는 않았다. 장송은 또 한 번 감격했다.

‘현덕이 이토록 너그럽고 어질며 또 선비를 사랑할 줄 아니 어찌 그냥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이 사람을 달래 서천을 차지하 도록 만들어야겠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뒤 유비에게 말했다.

“저 역시 아침저녁으로 황숙을 뒤따르며 모시고 싶으나 한스럽게 도 가까운 날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떠나기 전에 한 말씀 올 리려 하니 부디 어리석다 물리치지 마시고 마음에 새겨들어주십시 오. 제가 보니 형주는 동쪽으로는 손권이 호랑이처럼 웅크리고 있고 북쪽으로 조조가 또한 고래처럼 버티고 앉아 삼키려고 노리는 땅입 니다. 아무래도 오래 매달려 있을 만한 곳이 못 됩니다.”

“나도 그런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으나 발자취를 옮겨 디딜 만한 땅이 없으니 어찌하겠소?”

유비가 한숨 섞어 반문했다. 이미 제갈량이 융중에서 나올 때부터 자신의 앞날은 오직 서천 땅에 달려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유비이 고 보면 그 같은 반문은 이미 의뭉스러움을 지나 음흉함에 가까웠 다. 그러나 유비에게 흠뻑 반해버린 장송에게는 갈 곳 없는 유비의 처지가 안타깝기만 했다. 끝내 유비는 한마디도 그 일을 말하기 전 에 장송 스스로가 먼저 유비에게 서천을 칠 것을 권했다.

“익주는 지형이 험해 지키기 좋으면서도 안으로는 기름진 들이 천리에 뻗어 있어 백성들은 살기 좋고 나라의 살림도 넉넉합니다. 거기다가 또 그 땅의 배움 많고 재주 있는 선비들도 황숙의 덕을 사 모해온 지 오래됩니다. 만약 명공께서 형주와 양주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몰아오신다면 패업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실도 다 시 일으키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유비는 여전히 의뭉을 떨었다.

“그런 큰일을 이 비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소? 익주목 유장 또한 한실의 종친으로서 촉 땅에 은덕을 베푼 지 오래이니 다른 사람이 그곳을 흔들리게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제가 주인을 팔아 영달을 구하는 것은 아니나 이제 명공을 만났 으니 하는 수 없이 마음속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유장이 비록 익주 의 주인이라고는 해도 생각이 밝지 못하고 마음이 약해 어진 이를 뽑아 쓸 줄 모르고 재주 있는 이도 부릴 줄 모릅니다. 거기다가 장로 가 북쪽에 자리 잡고 앉아 이제 침범할 뜻을 드러내니 그곳 백성들 의 인심은 이리저리 흩어져 밝은 주인을 얻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길을 나선 것도 실은 조조에게 항복하여 서천의 평안을 얻고자 함이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 역적 놈이 오만방자하여 어 진 이를 깔보고 선비를 우습게 알기에 특히 명공을 찾아뵈러 온 것 입니다. 명공께서는 먼저 서천을 차지하여 기틀을 삼으신 뒤 북쪽으 로 한중을 빼앗고 이어 중원을 거두어들이신다면 기울어진 조정을 바로잡으심과 아울러 청사(史)에 길이 크신 이름을 드리우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명공께서 정말로 서천을 차지할 뜻이 있으시다면 저 는 개나 말이 그 주인을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 않듯 힘을 다해 안에 서 호응하겠습니다.”

유비의 미지근한 대꾸에 장송이 더 몸이 달아 있는 대로 속을 다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유비는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자신에게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는 인의까지 챙겼다.

“그대의 두터운 정은 매우 고마우나 유장은 나와 같은 종친이니 어찌하겠소? 내가 만약 그를 친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침뱉 고 욕할 것이오.”

“대장부가 세상을 삶에 있어 공을 세우고 대업을 이루고자 함에 는 말을 채찍질해 남보다 앞서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이번에 서천을 차지하시지 않아 그 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버린다면 그 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을 것입니다.”

장송이 한층 열을 올려 유비가 그로부터 듣고 싶어 하던 말을 해 주었다. 대의와 명분까지도 장송에게서 얻어낸 뒤에야 비로소 유비 는 진작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내가 들으니 촉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거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산과 강이 가로놓여 있다 했소. 비록 그 땅을 쳐서 빼앗을 생각이 있다 해도 무슨 좋은 계책이 있어 험하고 거친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겠소?”

그러자 장송은 소매 속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 유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명공께서 베푸신 따사로운 정에 보답하고자 이걸 드리겠습니다. 훑어보시면 촉으로 가는 길은 대강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진작부터 망설이면서 소매 안에 만지작거리던 물건이었다. 만약 유비가 한 범용한 군벌로서 처음부터 자신의 야망을 위해 서천을 탐 내고 있음을 장송에게 보였더라면, 장송은 그 지도를 찢어 없앨지언 정제 손으로 받쳐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비는 애써 기쁜 빛을 감추고 장송이 준 지도를 펴서 찬찬히 살폈다. 지도에는 촉으로 들 어가는 길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깝고 이며 넓고 좁은 데다 산과 물 이 험한 곳과 군사를 부림에 있어서 요지인 곳, 그리고 곳곳의 성읍 에 있는 곡식과 돈이며 지키는 장수의 이름과 군사들의 머릿수까지 하나하나 모두 적혀 있었다.

“명공께서는 되도록이면 빨리 일을 시작하십시오. 제게 뜻을 함께 하는 벗으로 법정(法)과 맹달(孟)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도 반드 시 명공을 도울 것입니다. 제가 돌아가면 먼저 그들을 보낼 테니 명 공께서는 그 두 사람이 형주로 오거든 마음을 터놓고 함께 앞일을 의논하도록 하십시오.”

무엇에 내몰린 듯 장송이 아직도 말없이 지도만 들여다보고 있는 유비에게 재촉하듯 말했다. 그제서야 유비도 두 손을 모으며 고마움의 뜻을 나타냈다.

“푸른 산은 늙지 않고 맑은 물은 길이 흐를 것이외다. 뒷날 일이 뜻대로 이뤄지면 반드시 이 큰 가르침에 두터운 보답을 하겠소.” 

상대편이 감동되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 편에서 스스로 바치게 만드는 것, 보기에 따라서는 음험한 계략 같기도 하지만 유 비에게는 어쩌면 타고난 인품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송이 펄쩍 뛰며 손을 저었다.

“이 송(松)은 밝은 주인을 만나 기쁨을 이기지 못해 알고 있는 바 를 모조리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어찌 뒷날의 보답을 바라 그리했겠 습니까?”

그러고는 서둘러 작별을 고했다. 제갈공명은 운장에게 군사를 이 끌고 장송을 호위하게 했다. 유비를 위해 장송이 그 누구보다 소중 함을 잘 아는 운장은 한낱 부장이나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두 말 없이 장송을 호위하여 수십 리 밖까지 바래다주고서야 돌아왔다. 익주로 돌아간 장송은 먼저 가까운 벗인 법정부터 찾았다. 법정은 자를 효직(直)이라 하며 우부풍군 사람이었다. 일찍이 어진 선비 로 우러름을 받던 진(眞)의 아들인데, 그 또한 재주와 지식으로 널리 이름을 얻고 있었다.

장송은 그 법정을 보고 말했다.

“조조는 어진 이를 가볍게 보고 선비를 함부로 대접하니 걱정은 같이 나눌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일세. 하지만 유 황숙은 그와 달라 나는 이미 그분께 익주를 바치기로 했네. 그 때문 에 자네와 함께 의논하고자 왔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나도 유장이 무능함을 보고 마음속으로는 유황숙을 생각해온 지 오래일세. 우리 두 사람이 모두 한마음이니 새삼 의논할 게 무엇 있 겠나?”

법정이 선뜻 그렇게 대답했다. 장송뿐만 아니라 법정까지도 원래 의 주인에게서 충성을 거둔 지 오래였던 듯했다. 뜻이 같음을 안 두 사람은 곧 구체적으로 유비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상의하기 시작했 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맹달이란 사람이 법정을 보러 왔다.

맹달은 자를 자경(慶)이라 쓰는데 법정과는 한 고향 사람이었 다. 언제나 그러했듯 스스럼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장송과 법 정이 남 몰래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 걸 보았다.

“나는 이미 자네들 두 사람의 마음속을 알고 있네. 자네들은 우리 익주를 남에게 갖다 바치려는 게 아닌가?”

맹달이 불쑥 큰 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아 직 맹달의 속을 모르는 장송이 달래듯 말했다.

“실인즉 그러네. 자네도 알겠지만 이미 유계옥은 글렀으니 누구에 겐가 이 땅을 맡겨야 백성들이 보존되지 않겠나? 그러지 말고 우리 와 함께 훌륭한 주인을 찾아 이 땅을 바치도록 하세.”

그러자 맹달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유현덕이 아니면 이 땅을 바칠 수 없을 것이네. 도대체 자네들은 누구를 생각하고 있나?”

“바로 자네와 같네!”

법정과 장송이 가슴을 쓸며 한꺼번에 대답했다. 그동안 서로 말은 안했어도 세 사람이 마음속에 감추고 있던 생각은 결국 같았다. 이에 세 사람은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웃고 다시 의논에 들어갔다.

“자네는 내일 유장을 보러 가야 하지 않는가? 그래 어떻게 일을 해나갈 셈인가?”

법정이 그렇게 묻자 장송은 미리 생각해두었던 대로 대답했다. 

“나는 자네들 두 사람을 유황숙께 보낼 사신으로 천거하겠네. 그 대들은 형주로 가서 유황숙 밑에 있으면서 나와 손발을 맞추도록 하세.”

“알겠네. 그리만 되면 일은 한결 수월해지겠지.” 법정과 맹달은 두말 없이 장송의 뜻을 따랐다.

법정과 맹달은 원래 서천 사람들이 아니었으나, 기근을 피해 그곳 으로 옮겨 산 뒤로 오래 유장을 섬겨온 터였다. 벼슬은 그리 높지 않 아도 유장이 믿고 기대는 그들까지 그 모양이니 이미 유장의 서촉은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집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유비 쪽에서 보 면 서촉은 부르기도 전에 절로 다가온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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