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1화 : 드디어 터진 한중 쟁탈전

랜덤 이미지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1화 : 드디어 터진 한중 쟁탈전


드디어 터진 한중 쟁탈전

허창이 한바탕 불난리를 치르고 조용해졌을 무렵, 조조를 대신해 한중으로 간 조홍은 그곳을 지키던 하후연과 장합을 만났다. 그곳 사정을 소상히 들은 조홍은 하후연과 장합을 남겨 험한 길목을 지키 게 하고, 자신은 데려온 장졸들과 더불어 나아가 적을 맞았다.

이때 장비는 뇌동과 함께 파서를 지키고 있어 조홍과 먼저 부딪 친 것은 마초였다. 군사들을 이끌고 하판에 이른 마초는 오란을 선 봉으로 삼아 앞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조홍의 군사가 뜻밖으로 많은 걸 본 오란은 원래 조용히 물러나 마초와 의논한 뒤 싸우려 했다. 그러나 오란을 따라갔던 아장 임기 가 부득부득 우겼다.

“적은 방금 도착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였소. 먼저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놓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돌아가 마맹기(馬孟起)를 보

겠소?”

그러고는 드디어 창을 끼고 말을 몰아 나가 조홍에게 싸움을 걸 었다. 조홍은 그게 한중에서의 첫 싸움이라 허술하게 맞설 수 없다 생각했다. 몸소 칼을 빼들고 말을 박차 달려 나갔다. 겁 없이 덤벼들 기는 해도 임기는 애초에 조홍의 맞수가 못 되었다. 말과 말이 어울 리기를 세 번도 넘기지 못해 조홍의 칼에 임기의 목이 떨어졌다. 조홍이 그 좋은 기회를 그대로 넘길 리 없었다. 임기를 목 벤 기세 를 타고 군사를 몰아 오란의 본진을 덮치니 오란은 제대로 싸워보지 도 못하고 대패해 쫓겨갔다.

“너는 어찌하여 내 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함부로 적과 맞섰느냐? 첫 싸움에 져서 우리 편의 사기를 떨어뜨린 죄가 얼마나 큰지 알고 나 있느냐?”

쫓겨온 오란을 마초가 꾸짖었다. 오란이 머리를 조아리며 궁색한 핑계를 댔다.

“임기가 내 말을 듣지 않고 가볍게 나갔다가 나까지 이 꼴로 만들 어 놓았습니다.”

“이제부터는 험한 곳에 의지해 굳게 지킬 일이요, 함부로 나가 싸 워서는 아니 된다.”

마초는 엄한 말로 그렇게 오란을 단속하는 한편 사람을 성도로 보내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인지 아닌지를 물었다. 못 보던 조홍이 나 타난 걸로 미루어 조조가 대군을 보냈음을 짐작하고 한 일이었다. 조홍은 마초가 더 움직이지 않자 무슨 속임수가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대로 밀어붙이는 대신 남정으로 물러나 마초의 움직임을 살폈다. 장합이 조홍을 보러 와서 물었다.

“장군께서는 이미 적장을 목 베어 첫 싸움에 이기셔놓고도 어찌 하여 군사를 도로 물리셨습니까?”

“마초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따로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았소. 거기다가 내가 업군에 있을 때 점술이 귀신 같다는 관로가 말하기를, 이곳에서 큰 장수 한 사람이 꺾인다 했는데, 그 말이 갑자 기 마음에 걸리는구려. 그 때문에 가볍게 나아가지 못했소이다.”

조홍이 머뭇머뭇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장합이 크게 웃으며 말 했다.

“장군께서는 반평생을 싸움터에서 보내셨으면서도 어찌하여 한낱 점쟁이의 말에 그토록 마음을 쓰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한번 싸워 보겠습니다. 이 장합이 비록 재주 없으나 지금 이끌고 있는 군사만 데리고 가서 파서를 빼앗아보지요. 만약 파서가 우리 손에 들어온다 면 촉군(蜀郡)전체를 빼앗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파서를 지키는 장수는 바로 장비외다. 결코 등한히 볼 장수가 아 니니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되오.”

조홍이 엄하게 장합을 말렸다. 그러나 장합은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장비를 두려워하나 내가 보기에는 어린애일 뿐입

니다. 이번에 가서 반드시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그렇게 큰소리를 치며 보내달라고 졸라댔다. 조홍이 마지못해 물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때는 어쩌겠는가?”

“마땅히 군령에 따라 벌을 받겠습니다.”

장합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조홍도 더는 말릴 수 없었다. 장합에게 군령장을 써놓게 한 다음 군사를 이끌고 파서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 했다.

이때 장합이 이끌고 있던 군사는 모두 합쳐 삼만이었다. 장합은 그들을 세 개의 진채로 나누어 험한 산기슭에 자리 잡게 했는데, 그 하나는 암거채(岩渠)라 불렀고, 다른 하나는 몽두채(頭)라 했 으며, 나머지는 탕석채(石)라 이름했다. 그날 장합은 그들 세 채 의 군사들을 각기 반으로 쪼개 절반은 자신이 파서로 데리고 가고 나머지는 남아 진채를 지키게 했다.

장합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은 곧 장비의 귀에도 들어갔다.

장비가 급히 뇌동을 불러 물었다.

“장합이 온다는데, 그놈을 때려잡을 무슨 좋은 수가 없겠나?” 뇌동이 제법 머리를 짜내 대답했다.

“낭중은 땅이 거칠고 산이 험하니 군사를 감춰둘 만한 곳이 많습 니다. 장군께서는 군사를 이끌고 정면으로 나가 싸우십시오. 그때 제가 미리 감추어둔 군사를 내어 곁에서 도우면 장합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비는 그 말을 그럴듯하게 여겼다. 곧 날랜 군사 오천을 뽑아 뇌 동에게 주며 알맞은 곳에 숨어 있게 하고 자신은 일만 군사와 더불 어 낭중으로 나아갔다.

장비가 장합의 군사와 마주친 것은 낭중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양군이 마주 벌여서 진을 친 뒤 장비가 말을 달려 나가 싸움을 돋우었다.

“장합은 어디 숨었느냐? 어서 나와 목을 바쳐라!”

장비가 그렇게 소리치자 장합도 지지 않고 창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왔다. 곧 한바탕 무서운 싸움이 어우러졌다. 하지만 어차피 끝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는 싸움이었다. 둘이 어울린 지 서른 합쯤이 나 되었을까, 갑자기 장합이 이끄는 군사들 뒤편에서 함성이 크게 일었다. 산 뒤쪽에 촉병의 깃발이 펄럭이는 걸 보고 놀란 장합의 군 사들이 지른 소리였다.

장합도 그걸 보고는 더 싸울 마음이 없었다. 한차례 용을 써서 장 비를 물러나게 해놓고는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비가 그런 장합을 뒤쫓으며 그 군사들을 마구 죽였다. 거기다가 다시 뇌 동이 앞에 뛰쳐나와 양쪽에서 들이치니 장합이 견뎌낼 도리가 없었 다. 군사고 뭐고 뒤돌아볼 틈도 없이 제 한목숨 건져 달아나기 바 빴다.

장비와 뇌동은 그런 장합을 밤새도록 쫓아 그의 진채가 있는 암 거산(岩山) 아래에 이르렀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장합의 군사들 이 얼른 그를 맞아들인 다음 뒤쫓아오는 장비의 군사들에게 통나무 와 돌을 굴렸다. 적이 험한 산기슭에 의지해 굳게 지킬 뿐 나와 싸우 지 않자 장비도 더는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군사를 다시 암거산에 서십 리쯤 떨어진 곳으로 물려 진채를 내렸다.

다음 날 장비는 일찍부터 군사를 이끌고 장합의 진채 아래로 가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장합은 계책을 바꾸어 싸움을 받아주지 않았다. 일부러 크게 피리를 불고 북을 울리며 산 위에서 술만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장비는 군사들을 시켜 큰 소리로 그런 장합을 욕하게 했다. 그래 도 장합은 조금도 동하지 않고 진채에서 나오지 않았다.

장합이 그렇게 나오니 장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욕질로 목쉰 군 사들을 데리고 자기 진채로 돌아갔다.

다음 날도 장비가 다시 군사를 몰고 산 아래로 가서 싸움을 걸었 으나 전날과 다름이 없었다. 장합은 무슨 소리를 해도 진채에 처박 혀 나오려 하지 않았다.

참다 못한 뇌동이 군사를 몰아 산 위로 올라갔다. 산 위에서는 다 시 통나무와 바윗덩어리가 사태 난 듯 굴러떨어졌다.

놀란 뇌동이 급히 군사를 물렸으나 이번에는 장합의 다른 진채인 탕석채와 몽두채에서 군사들이 쏟아져 나와 뇌동의 군사를 덮쳤다. 그러잖아도 통나무와 바윗덩이에 적지 않이 꺾인 뇌동의 군사는 그 두 채의 군사들을 당해내지 못해 턱없이 머릿수만 줄어든 채 쫓겨오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장비는 단념하지 않고 다음 날 또 군사를 이끌고 산 아래 로 가서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장합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장 비는 군사들을 시켜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다 퍼부었지만 산 위 에서는 욕설로만 답할 뿐 아무도 내려오지는 않았다.

일이 그렇게 되자 장비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계책이 나지 않았다. 하릴없이 욕질만 주고받는 사이에 그럭저럭 오십여 일이 지 나갔다. 변한 것이 있다면 장비가 진채를 바로 암거산 아래로 옮긴것과 그도 장합처럼 술을 마시게 된 것 정도였다.

장비는 매일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한 뒤에 산 아래 앉아 장 합에게 욕을 퍼붓는 일로 날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비가 보낸 음식을 가지고 온 사자가 그 꼴을 보고 돌아가기 바쁘게 유비에게 일러바쳤다. 장비의 못된 술버릇을 알고 있는 유비는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곧 공명을 불러놓고 걱정스레 물었다.

“장비가 또 술을 퍼마셔 댄다니 실로 큰일이외다. 어찌하면 좋겠 소?”

“원래 그런 거 아닙니까? 싸움터에서는 술을 좋아하는 걸 걱정할 게 없습니다. 성도에는 잘 담근 술이 많으니 차라리 한 쉰 독쯤 보내 주시지요. 그걸 세 수레에 실어 장장군께 내려보내 흠뻑 마시게 해 드리십시오.”

공명이 빙긋이 웃으며 그렇게 대꾸했다. 유비가 정색을 하고 나무 라듯 말했다.

“내 아우는 그전부터 술을 마시면 실수가 많은 아이오. 그런데도 군사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오히려 익덕에게 술을 보내라는 것이오?” 그제서야 공명이 웃음을 거두며 그 까닭을 밝혔다.

“주공께서는 익덕과 여러 해 형제로 지내셨으면서도 여지껏 그 사람됨도 모르십니까? 익덕은 원래 성질이 굳세고 거친 사람이나 전에 이 땅을 차지할 때는 엄안을 의롭게 놓아준 적도 있습니다. 결 코 용맹만 있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 렇습니다. 익덕이 장합과 오십여 일이나 마주하고 있으면서 술만 마 시고 취한 뒤에는 장합의 진채가 있는 산 아래 앉아 욕설이나 퍼붓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결코 술이 마시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동안에 벌써 장합의 계략에 떨어져 패하 고 말았을 것이니 주공께서는 걱정 마시고 술이나 보내드리십시오.” 그래도 유비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 한참 있다가 조용 히 말했다.

“비록 그렇다 해도 너무 믿어서는 아니 되오. 위연을 함께 보내 익덕을 돕게 하는 게 좋겠소.”

공명도 그것까지는 마다하지 않았다. 곧 위연을 불러 술을 가지고 가장비를 도우라는 영을 내렸다. 그러나 술을 실은 수레에는 ‘군전 공용미주(軍前公用美酒)’라고 크게 쓴 깃발을 내걸게 해 장합의 부아 를 돋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술을 가지고 장비의 진채에 이른 위연은 그 술이 유비가 보낸 것 과 아울러 자신이 도우러 온 걸 알렸다. 장비는 절하며 술을 거두어 들인 뒤 엄숙한 얼굴로 위연과 뇌동에게 말했다.

“이제 거진 때가 된 것 같다. 그대들을 각기 한 떼의 군마를 이끌 고 좌우의 날개가 되었다가 군중에 붉은 기가 세워지거든 바로 군사 를 몰아 나가라.”

그러고는 가져온 술을 장막 앞에 펼쳐놓게 한 다음, 크게 깃발을 벌여 세우고 북을 울리게 하며 마셔대기 시작했다.

장합이 풀어놓은 세작이 그 꼴을 보고 산 위로 올라가 알렸다. 그 말을 들은 장합은 산꼭대기에서 장비가 있는 곳을 내려보았다. 정말 로 장비가 군막 앞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 앞에는 군사 둘이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장합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장비가 나를 속이려 드는 게 너무 지나치구나!’

그러나 너무도 드러내놓고 속이려 드니 그게 꼭 자신을 얕보는 것 같아 그냥 참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 바람에 갑작스레 조심성 을 잃어버린 장합이 영을 내렸다.

“오늘 밤 산을 내려가 장비의 진채를 급습한다. 몽두, 탕석 두 진 채에서도 모두 나와 좌우에서 돕도록 하라 이르라!”

딴에는 눈앞에 사람이 없는 듯 날뛰는 장비를 혼쭐내준다고 내린 결단이었지만, 실은 그게 바로 장비에게 말려드는 첫걸음이었다. 그날 밤 장합은 달빛이 희미해지기를 기다려 산 옆구리를 타고 재빨리 장비의 진채 앞에 이르렀다. 저만큼서 장비의 군막을 살펴보 니 대낮같이 등불을 밝혀놓고 장비가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합은 이때다 싶었다. 큰 고함 소리와 함께 앞장서 똑바로 장비 를 향해 짓쳐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장비가 꼼짝 않고 앉 아 있는 것이었다. 허나 이미 내친김이었다. 장합은 그대로 말을 몰 아 장비에게로 다가간 뒤 한 창을 내질렀다.

창을 받고 풀썩 엎어지는 것은 뜻밖에도 짚으로 만든 인형이었다. 그제서야 속은 걸 안 장합은 얼른 말 머리를 돌렸다. 그때 장막 뒤에 서 연주포 소리가 크게 나더니 한 장수가 달려 나와 길을 막았다. 부 릅뜬 고리눈에 호랑이 수염을 세운 장비였다.

“이놈 장합아, 네 어디로 달아나려느냐?”

장비가 벼락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창을 끼고 박차 똑바로 장합을 덮쳤다.

훤한 불빛 아래 장합은 장비를 맞아 서른 합이 넘게 버티었다. 속으로 믿는 바는 나머지 두 진채에서 구원병이 오리라는 것이었다. 헛된 기다림이었다. 몽두, 탕석 두 진채에서 오던 구원병은 이미 위연과 뇌동 두 장수에 의해 으깨진 깨강정이 되어 흩어지고, 오히 려 그 진채마저 차례로 위연과 뇌동의 손에 들어가버렸다.

뿐만 아니었다. 오게 되어 있는 구원병이 오지 않아 불안해지기 시작한 장합의 눈에 다시 산 위에서 이는 불길이 들어왔다. 함성 소 리로 미루어 자신의 진채마저 장비의 군사들에게 빼앗긴 것임에 분 명했다.

그렇게 되자 장합도 더 버틸래야 버틸 수가 없었다. 죽기로 길을 뚫어 와구관(關)을 바라고 달아났다. 진채 셋을 모두 잃어버렸 을 뿐만 아니라 데려간 군사도 셋에 하나가 성하지 못했다.

싸움에 크게 이긴 장비는 곧 그 소식을 성도에 전했다. 유비는 장 비가 장합을 여지없이 쳐부쉈다는 말을 듣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비로소 장비의 술이 다만 장합을 산 위에서 끌어내기 위한 계책 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고 공명의 밝은 눈에 다시금 탄복했다.

한편 와구관으로 쫓겨간 장합은 거기서 군사를 수습해보았다. 삼 만 중에 이만이 줄어 있었다. 남은 만 명으로는 곧 밀어닥칠 장비를 막아낼 자신이 없어 조홍에게 급히 구원을 청했다.

장합의 전갈을 받은 조홍은 몹시 성이 났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억지를 써서 군사를 끌고 나가더니 이 무슨 꼴이냐? 험하고 요긴한 길목을 적에게 내줘버린 것만도 용서못할 일인데 이제 다시 구원병까지 청해?”

마치 장합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꾸짖은 뒤 사람을 보내 전하게 했다.

“구원병은 보내줄 수 없다. 어서 나가 싸워 네 힘으로 적을 쳐부수라!”

그 소리를 들은 장합은 막막했다. 그러나 앞서 한 짓이 있어 두 번 다시 사정해보지도 못하고 홀로 장비를 막아볼 궁리를 시작했다. 한참 궁리한 끝에 짜낸 계책이 매복이었다. 장합은 군사를 나누어 관 앞 산속에 숨어 있게 하며 영을 내렸다.

“내가 나가 싸우다가 거짓으로 져 달아나면 장비는 반드시 내 뒤 를 쫓을 것이다. 장비가 이곳을 지나거든 너희들은 일제히 달려 나와 그 돌아갈 길을 끊으라.”

그리고 자신은 남은 군사들을 데리고 장비를 맞으러 나갔다. 하지 만 앞서 달려온 것은 장비가 아니라 뇌동이었다. 장합은 뇌동과 맞 붙어 몇 합 싸우다가 못 견디는 것처럼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뇌동이 제꺽 그 계책에 걸려들어 제 죽을 줄도 모르고 장합을 뒤 쫓았다. 그러나 와구관 앞 산속에 들기 바쁘게 미리 숨어 있던 장합 의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돌아갈 길을 끊어버렸다. 뇌동은 그 제서야 속은 줄 알았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달아나던 장합이 어느새 되돌아와서 허둥거리는 뇌동을 덮쳤다. 뇌동은 손발 한번 제 대로 놀려보지 못하고 장합의 한 창에 찔려 말 아래로 떨어졌다. 뇌동의 졸개가 급히 돌아가 장비에게 그 일을 알렸다. 뇌동이 죽 었다는 말을 들은 장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달려가 장합과 맞붙었다. 장합은 장비와 몇 번 창칼을 부딪다가 다시 거짓으로 져주며 달아났다. 그러나 장비는 뇌동과 달랐다. 장합을 가볍게 뒤쫓 지 않고 그 하는 양만 살폈다.

장합은 장비가 따라오지 않자 되돌아가 한 번 더 싸움을 걸었다. 장비가 다시 나오자 몇 번 싸우는 체하다가 달아나며 장비를 유인하 려 했다.

일껏 되돌아와 싸움을 걸어놓고도 금세 달아나는 장합을 보고 장 비는 비로소 그게 계책인 줄 알아차렸다. 뒤쫓는 대신 군사를 거두 어 자기 진채로 돌아가버렸다. 진채로 돌아간 장비가 위연을 불러놓 고 말했다.

“장합이 매복계를 써서 뇌동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나까지 속이 려 들었다. 아무래도 그놈의 계책을 거꾸로 이용해 그놈을 때려잡아 야겠다.”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위연이 못 미더운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장비가 제법 생각 깊은 얼굴로 말했다.

“내일 내가 먼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거든 너는 날랜 군사만 뽑 아 뒤에 처져 있거라. 내가 속은 것처럼 장합을 뒤쫓으면 그가 숨겨 놓은 군사들은 좋아라 달려 나와 내 뒤를 끊을 것이다. 그때 너는 군 사를 나누어 그들을 쳐부수고 좁은 길목을 막은 뒤, 여남은 수레쯤 의 짚단과 마른 풀을 날라 골짜기를 불살라버려라. 나는 그 틈을 타 장합을 사로잡고 죽은 뇌동의 원수를 갚겠다.”

장비를 다시 봐야 될 만큼 단수 높은 계책이었다. 위연은 두말 없이 장비가 시키는 대로 채비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장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군사를 이끌고 와 구관으로 나아갔다. 장합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와 장비를 맞았 다. 여남은 번이나 어울렸을까, 장합이 또 전날처럼 거짓으로 져 달 아나기 시작했다.

장비가 속은 체 그런 장합을 뒤쫓자 장합은 신이 났다. 이제야 장 비를 꾀어들였다 싶어 한편 싸우며 한편 쫓기기를 한참이나 거듭 했다.

그럭저럭 장비가 장합의 군사들이 숨어 있는 골짜기를 지났을 때 였다. 장합이 갑자기 되돌아서서 장비에게 덤벼들며 골짜기 양편에 숨어 있는 자기편 군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어서 나와 장비를 에워 싸라는 신호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복병들이 막 움직이려 할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위연이 날랜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들어 그들을 골짜기 안으로 되쫓아버렸다. 그리고 미리 끌고 온 수레로 골짜기 입구를 막더니 불을 질렀다. 수레에 실린 짚과 마른 풀에 붙은 불은 눈깜짝 할 새에 골짜기에 있는 잡초와 나무로 옮아 붙었다. 그 불길이 얼마 나 거센지 골짜기 안으로 쫓겨간 장합의 군사들은 아무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장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데리고 있던 군사들을 휘몰아 허둥 대는 장합을 들이쳤다. 볼 것도 없이 장합의 대패였다. 장합은 죽을 힘을 다해 한 가닥 길을 뚫고 와구관으로 쫓겨 들어갔다.

하지만 장합도 어지간한 장수였다. 곧 정신을 차려 쫓겨 들어온 졸개들을 수습한 뒤 굳게 성을 지켰다. 장비와 위연이 연일 와구관을

에워싸고 두들겼으나, 힘을 다해 싸워 잘 버텨냈다.

장비는 위연과 더불어 수십 기만 거느리고 몸소 와구관 양쪽을 뒤지며 샛길을 찾아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 장비의 눈에 작은 등짐 을 진 남녀 몇 사람이 문득 들어왔다. 산허리에 난 길 옆 칡덩굴에 매달려 황급히 달아나는 것이 장비의 군사들을 보고 놀라 숨으려는 것 같았다.

“와구관을 뺏고 못 뺏고는 저기 있는 저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장비가 채찍을 들어 그들을 가리키며 위연에게 말했다. 그리고 얼 른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멍해 있는 위연을 버려둔 채 군사 하나를 불러 영을 내렸다.

“너는 저기 보이는 저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겁주지 말고 이리 데려오너라.”

그 말은 들을 군사가 얼른 달려가 미처 달아나지 못한 촌사람들을 장비에게로 데려왔다.

한동안 좋은 말로 그들을 안심시킨 장비가 이윽고 물었다.

“너희들은 어디서 오는가?”

“저희들은 모두 한중에 사는 백성들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대군이 엉켜 싸워 낭중으로 가는 관도가 막혔다는 소리를 듣고, 하는 수 없이 길을 바꾸고 있는 중입니다. 곧 창계를 지나고 재동산 회근천(檜川)을 따라 한중으로 들어가 집으 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별로 숨기는 기색 없이 그렇게 밝혔다. 바로 장비가 찾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저 길을 따라가면 와구관 하고는 거리가 어떻게 되느냐?”

장비가 반가운 기색을 지으며 바로 그렇게 물었다. 

“재동산 샛길로 따라가면 바로 와구관 뒤가 됩니다.”

촌사람 가운데 하나가 별날 것도 없다는 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 러나 그 말을 들을 장비는 몹시 기뻐했다.

“저 사람들을 진채로 데려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주라. 대접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장비는 곁에 있는 군사들에게 그렇게 영을 내린 뒤 위연을 불러 말했다.

“너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관을 들이쳐라. 나는 가볍게 차린 기마 대를 이끌고 재동산으로 나아가 관 뒤를 치겠다.”

그러고는 경기 오백을 뽑아 재동산 샛길로 나아갔다. 조금 전에 잡아둔 백성들을 길잡이로 앞세웠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한편 장합은 기다려도 끝내 구원병이 오지 않자 몹시 걱정이 되 었다. 머리를 싸매고 어찌할까를 궁리하고 있는데 다시 사람이 뛰어 들어와 알렸다.

“위연이 관 아래로 몰려와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합은 곧 갑옷 입고 말에 올라 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미처 위연과 부딪치기도 전에 다시 급한 전갈이 왔다. 

“관 뒤 서너 줄기 샛길에 불길이 일고 있는데 어느 쪽 군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에 장합은 위연을 제쳐놓고 그리로 먼저 달려갔다. 속으로는 은근히 조홍이 보낸 구원병이기를 바랐으나 아니었다. 깃발이 갈라서며 나타난 장수는 생각지도 못한 장비였다.

장비를 본 장합은 깜짝 놀랐다. 싸움이고 뭐고 없이 뒤돌아서서 내빼기 바빴다. 하지만 거친 산길이라 말이 닫기에는 좋지가 않았 다. 거기다가 뒤에서는 장비가 바짝 뒤쫓아 장합은 할 수 없이 말을 버리고 걸어서 산꼭대기로 치달았다.

장합이 한 줄기 샛길을 찾아 간신히 몸을 빼내고 보니 뒤따르는 군사는 기껏해야 열 명이 넘지 않았다. 장합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걸어 걸어 남정으로 향했다. 거기 있는 조홍을 만나볼 생각 을 하니 그저 아뜩할 뿐이었다.

조홍은 겨우 군사 여남은 명만 데리고 나타난 장합을 보자 속이 상해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그렇게 가지 말라 하였거늘 너는 부득부득 우겨 군령장까 지 써놓고 갔다. 이제 대군을 모두 잃은 주제에 무슨 낯으로 너만 살 아서 돌아왔느냐?”

그렇게 장합을 꾸짖고는 문득 좌우의 군사들을 돌아보며 매섭게 소리쳤다.

“여봐라, 저자를 끌어내 목 베어라!”

행군사마 곽회(郭)가 그런 조홍을 말렸다.

“삼군을 모으기는 쉬워도 좋은 장수 하나를 얻기는 어렵다 했습 니다. 장합이 죄가 크다 하나 위왕께서 매우 아끼는 장수이니 함부 로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그에게 다시 군사 오천을 주고 지름길로 가맹관을 쳐서 빼앗게 하십시오. 그래서 서촉의 군사를 그곳으로 몰리게 하면 이곳 한중은 절로 평온해질 것입니다. 만약 이번에도 공을 세우지 못하면 그때 앞서의 죄를 함께 물어 장합을 벌하시도록 하십시오.”

성난 중에도 조홍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잠시 숨결을 가다듬은 다음 장합을 보고 엄히 말했다.

“다시 네게 오천 군마를 줄 터이니 가서 가맹관을 뺏으라. 이번 일을 또 그르치면 그때는 어김없이 군령을 시행하리라!”

이에 장합은 그날로 오천 군마를 이끌고 가맹관으로 달려갔다. 가맹관을 지키고 있던 촉의 맹달과 곽준도 오래잖아 장합이 군사 를 이끌고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곽준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성곽에 의지해 굳게 지키자 했으나 맹달은 달랐다.

“멀리서 온 적은 먼저 그 날카로운 기세부터 꺾어놓아야 하오. 나가 싸우도록 합시다.”

그렇게 우기며 군사를 이끌고 관을 내려가 장합을 맞았다.

하지만 맹달은 아직 장합의 적수로는 모자랐다. 거기다가 장합으 로서는 그 싸움에 목이 걸린 판이라 있는 힘을 다하니, 맹달은 제대 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묵사발이 나 되쫓겨 들어왔다. 그러잖아도 은 근히 장합을 두려워하던 곽준은 맹달이 그 지경으로 쫓겨오자 더욱 겁이 났다. 얼른 성도에 글을 보내 급한 소식을 알렸다.

가맹관이 위급하다는 소리를 들은 유비는 공명을 불러 물었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공명은 대답 대신 여러 장수와 모사들을 불러 모아놓고 짐짓 걱정스레 말했다.

“지금 가맹관이 몹시 위태롭다니 아무래도 낭중에 있는 익덕을 불러와야겠소. 그래야 장합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아니 됩니다. 익덕은 와구관에 머물면서 낭중을 지키고 있는데 그 땅 또한 매우 요긴한 길목입니다. 그를 빼와서 그곳이 위태롭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기 있는 여러 장수들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보내 장합을 쳐부수도록 해야 합니다.”

법정이 당연히 그렇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성 도에는 많은 장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명이 뜻 모를 웃음 을 지으며 그런 법정의 말을 받았다.

“장합은 위의 이름난 장수요. 결코 가볍게 볼 인물이 아니외다. 익 덕을 빼고는 그를 당해낼 만한 사람이 없소.”

완전히 성도에 남아 있는 장수들을 무시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문 득 장수들 중에서 한 사람이 분을 못 이긴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 나 왔다.

“군사께서는 어찌하여 여기 있는 뭇 장수들을 그토록 깔보시오?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한번 나가보겠소. 반드시 장합의 목을 베어 바치겠소이다!”

그 소리에 놀라 모두 그를 보니 그는 바로 늙은 황충이었다. 공명 이 그런 황충을 비웃듯 말했다.

“한승(漢)이 비록 용맹스럽다 하나 이미 늙으셨소. 장합을 당해 낼지 실로 걱정되오.”

“지나치신 말씀이오. 내가 비록 늙었지만 두 팔은 아직 쌀 석 섬 을 들어올릴 만한 힘이 드는 활을 당길 수 있고, 온몸의 힘을 모으면 천 근 무게도 거뜬히 들어올릴 만하다. 어찌 장합 같은 조무래기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단 말씀이오?”

황충이 백발을 곤두세우며 더욱 소리를 높였다. 공명은 그런 황충 의 속을 한 번 더 긁었다.

“그래도 장군은 이미 칠순에 가깝지 않소? 늙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그 말에 황충은 더 참지 못했다. 언뜻 몸을 날려 뜰로 내려서더니 시렁에 얹힌 큰 칼을 뽑아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듯한 몸놀림 이 조금도 늙은이 같지가 않았다. 황충은 칼춤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한바탕 칼솜씨를 보인 뒤에 다시 벽에 걸린 강한 활을 내려 두 손 으로 우지끈 꺾어버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그제서야 공명도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다 조용히 물었다.

“알겠소. 그런데 장군께서는 부장으로는 누구를 데려가고 싶으

시오?”

그러자 황충이 대뜸 대답했다.

“엄안을 데려가겠소이다. 그 역시 늙었으나 어떤 젊은이에 못지않 음을 내가 아오. 만약 이번에 일을 그르친다면 먼저 허옇게 센 이머 리를 내놓으리다!”

늙은이라고 얕보는 데 격했는지 황충의 기세와 각오는 전에 없이 대단했다. 사람의 잠재력을 한껏 끌어내 쓰려는 공명의 계책이 잘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유비도 황충이 그렇게 나서는 걸 보자 흐뭇함을 이기지 못했다.

그날로 황충과 엄안에게 대군을 주며 가맹관으로 가서 장합을 막게했다.

은근히 자기가 갔으면 하고 바라던 조운이 공명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지금 장합이 스스로 앞장서 가맹관으로 덤벼들고 있으니 군사께 서는 결코 아이들 장난으로 보아 넘겨서는 아니 되십니다. 만약 가 맹관을 잃게 되면 익주 전체가 위태롭게 되고 맙니다. 그런데도 군 사께서는 어찌하여 두 늙은 장수만 보내 그같이 큰 적에 맞서게 하 셨습니까?”

“그대는 두 사람이 늙었다고 하지만 내가 헤아리기로 한중 땅은 반드시 그들 두 노장에 의해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공명은 조금 전 황충을 충동질할 때와는 딴판으로 그렇게 조운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조운은 아무래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 른 장수들도 대개 그와 같아서 한결같이 그 결정에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형편은 가맹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황충과 엄안이 가맹관 에 이르자 그들을 본 맹달과 곽준은 속으로 공명을 비웃었다. 

‘이번만은 공명이 잘못한 것 같구나. 이곳은 매우 긴요한 길목인 데 어찌해 이런 늙다리들을 보냈단 말인가!’

황충이 그 눈치를 모를 리 없었다. 가만히 엄안을 불러 말했다.

“그대는 여기 사람들이 하는 짓을 눈여겨보았소? 저들은 우리 두 사람이 늙었다고 속으로 저마다 비웃고 있소. 이래 가지고는 아무 일도 안 될 것이니 먼저 저들이 놀랄 만한 공을 세워 모두 마음으로 우리를 따르게 해야겠소.”

“오직 장군의 영만 기다리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켜주십시오.”

엄안도 은근히 분한 듯 지그시 이를 물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 자 황충은 무언가 엄안과 의논을 맞춘 뒤에 곧 군사를 이끌고 관을 나갔다.

성도에서 새로 군사가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걱정했던 장합은 황 충이 허옇게 센 머리와 수염을 날리며 진 앞에 나와 서자 자신도 모 르게 깔보는 마음이 들었다. 한참을 소리내어 웃다가 황충을 보고 빈정거렸다.

“너는 낫살이나 처먹었으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느냐? 그 주제에 싸움은 무슨 싸움을 한다고 이리 나섰느냐?”

황충이 성을 이기지 못해 버럭 소리질러 꾸짖었다.

“이 더벅머리놈이 내 늙었음을 너무 깔보는구나. 내 몸은 늙었을 지 몰라도 이 손에 있는 보도는 아직 늙지 않았다!”

그러고는 말을 박차 장합에게 덮쳐갔다. 장합도 지지 않고 맞서, 곧 말과 말이 엇갈리며 두 사람의 병기가 맞부딪쳐 불똥이 튀었다. 그렇게 한 스무 합을 싸웠을까, 홀연 장합의 등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일었다.

장합이 놀라 돌아보니 엄안이 이끄는 촉병들이었다. 원래 엄안은 황충과 짜고 황충이 장합과 맞붙어 있는 동안 샛길로 장합의 뒤를 돈 것이었다.

황충과 엄안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앞뒤에서 짓두들기니 장합은 혼자서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형편없이 무너져 밤새도록 쫓긴 끝에 백 리나 물러나서야 겨우 진채를 세울 수가 있었다.

황충과 엄안도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죽지 않을 만큼 장합 의 군사들을 두들겨 쫓은 뒤에는 곧 군사를 거두어 자기 진채로 돌 아갔다. 그리고 싸움에 이긴 장수답지 않게 군사들을 한곳에 묶어두 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 조홍은 장합이 또 싸움에 져 쫓겨났다는 말을 듣자 화가나 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장합을 잡아들여 목 베라고 펄펄 뛰는 걸 곽회가 다시 말렸다.

“장합을 너무 몰아대면 반드시 서촉으로 투항해버릴 것입니다. 오 히려 새로 장수를 보내 돕게 하는 한편 그가 감히 딴마음을 먹지 못 하도록 단속하게 하십시오.”

듣고 보니 조홍도 겁나는 소리였다. 곽회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곧 하후돈의 조카 하후상(尙)과 항복한 장수 한현의 아우 한호 에게 오천 군사를 내어주며 장합을 돕게 했다.

하후상과 한호는 그날로 길을 떠나 장합의 진채에 이르렀다. 하후 상과 한호가 싸움의 형편을 묻자 장합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충은 비록 늙었으나 영웅이라 할 만하오. 거기다가 엄안이 또 곁에서 돕고 있으니 결코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될 것이오.”

전번 싸움에 어지간히 혼이 난 모양이었다. 한호가 그 말을 듣자 이를 갈며 말했다.

“그 늙은 도적놈은 내가 잘 아오. 전에 장사에서 한 주인을 섬긴 적이 있는데, 그놈이 위연과 배가 맞아 성을 들어 유비에게 바쳤소 이다. 거기다가 그놈은 그때 내 형님까지 함께 해쳤으니 더욱 용서할 수 없는 놈이오. 이번에는 반드시 형의 원수 갚음을 하고야 말겠소!”

그러고는 하후상과 함께 장합과는 따로이 진채를 세우고 싸움부터 서둘렀다.

이때 황충은 매일처럼 사람을 풀어 근처의 지세며 크고 작은 길 을 샅샅이 알아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길을 익혔을 즈음 엄안이 황 충을 찾아와 말했다.

“이쪽 길로 가면 천탕산이 나오는데 그곳은 조조가 군량과 마초 를 쌓아둔 곳입니다. 거기를 뺏어 조조의 군사들에게 군량과 마초를 끊어버린다면 한중을 얻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황충이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고 대꾸했다. 

“장군의 말씀이 바로 내 뜻과 같소.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그러고는 진작부터 꾸며뒀던 계책을 일러주었다. 듣기를 마친 엄 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갈래 군사를 거느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황충은 엄안을 빼돌린 뒤에야 하후상과 한호의 군사들을 맞아 싸움 을 시작했다. 황충이 말을 타고 진채 앞에 나서자 먼저 진문 앞에 나 와 있던 한호가 큰 소리로 욕을 퍼부어댔다.

“이 의리를 모르는 늙은 도적놈아. 어서 목을 내놓아라! 형님의 원통하신 넋이 구천에서 너를 기다린 지 오래다.”

그러고는 눈에 불을 켜고 말을 박차 달려 나갔다. 하후상은 한호 가 자칫 실수라도 할까 두려웠다. 아직 황충과 한호가 제대로 어울 리기도 전에 다시 말을 박차 달려 나갔다.

한꺼번에 두 장수를 맞게 된 황충은 그들 모두와 각기 여남은 합씩 창칼을 맞댔다. 그러나 아무래도 혼자서는 두 사람을 당하기 어려웠던지 곧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후상과 한호는 신이 났다. 그대로 이십 리를 뒤쫓아 황충의 영 채를 빼앗아버렸다. 영채까지 빼앗긴 황충은 하는 수 없이 나뭇가지 와 풀로 영채를 엮어 군사들을 쉬게 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하후상과 한호가 다시 뒤쫓아와 싸움을 걸었 다. 황충은 또 나가 맞섰으나 이번에도 둘을 한꺼번에 당해내지는 못했다. 몇 합 부딪기도 전에 쫓겨 달아나니 하후상과 한호는 여전 히 신이 나서 뒤쫓았다.

이긴 기세로 몰아붙인 하후상과 한호는 그날 다시 황충의 영채를 휩쓸어버렸다. 나뭇가지와 풀로 엮은 두번째 영채였다. 하후상과 한 호는 뒤에 처져 있던 장합을 불러 어제 뺏은 영채를 지키게 하고 자 신들은 그날 뺏은 영채를 근거로 다시 싸움을 서둘렀다. 장합이 그 런 그들을 일깨워주었다.

“황충이 이틀간이나 잇달아 져서 쫓겨간 데는 반드시 속임수가 있을 것이오. 가볍게 추격하지 마시오.”

그러자 하후상이 장합을 개 나무라듯 나무랐다.

“당신이 그따위로 겁이 많으니 어찌 싸울 때마다 지지 않을 수 있 겠소? 아니면 우리 두 사람이 잇달아 공을 세우는 게 배라도 아프시 오? 여러 소리 말고 우리 두 사람이 다시 큰 공을 세우는 걸 구경이 나 하시오!”

젊은 장수들이 함부로 해대는 게 분했으나 패장인 장합은 할 말 이 없었다. 벌겋게 단 낮으로 말없이 돌아갔다.

다음 날이 되었다. 하후상과 한호가 몰아치자 황충은 다시 이십리나 쫓겨났다. 하후상과 한호는 그 이십 리를 뒤쫓아 군사를 멈추 고 밤을 지낸 뒤 날이 새기 바쁘게 또 황충을 덮쳐갔다.

어찌 된 셈인지 황충은 이제 싸워보지도 않고 되돌아 달아났다. 마치 강한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같이 쫓기기를 몇 차례 거듭한 뒤 드디어 황충은 가맹관까지 쫓겨 들어갔다.

황충이 되쫓겨 들어오자 뒤따라온 하후상과 한호가 군사를 풀어 가맹관을 에워싸고 들이치기 시작했다. 며칠이나 싸울 때마다 이긴 다음이라 그 기세가 실로 엄청났다.

그러나 황충은 완전히 겁먹은 사람처럼 관 안에 처박혀 굳게 지 킬 뿐 나가 싸울 생각을 안했다. 이래저래 높아지는 것은 하후상과 한호의 기세뿐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