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6화 : 네 번을 사로잡혀도 기개는 꺾이지 않고
네 번을 사로잡혀도 기개는 꺾이지 않고
다음 날이었다. 맹우는 황금과 좋은 구슬, 보배스런 조개껍질, 상 아, 물소뿔 따위 값지고 귀한 것들을 잔뜩 싸지고 만병 백여 명과 노 수를 건너 제갈량의 대채로 찾아갔다. 그들 일행이 물을 건너 북쪽 언덕에 내리자마자 북소리 피리소리 요란한 가운데 한 떼의 군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앞선 장수는 협곡에서 홀연히 사라진 마대였다. 맹우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마대가 그런 맹우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며 어찌하여 왔는가?”
“저는 맹획의 아우 맹우로 승상을 뵈오러 왔습니다.”
맹우가 겁먹은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마대는 그런 맹우를 진채 바깥에 있게 하고 사람을 뽑아 공명에게 보냈다.
때마침 공명은 마속, 장완, 여개, 비위 등과 더불어 남만을 평정할 계책을 짜내고 있었다. 홀연 마대에게서 사람이 와서 알렸다.
“맹획이 아우 맹우를 보내 금은보화를 올려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이 마속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대는 맹우가 왜 왔는지 알겠는가?”
마속이 잠깐 생각하다 조용조용 말했다.
“감히 큰 소리로 떠들 수가 없겠습니다. 제가 남몰래 종이에 써서 승상께 올릴 것이니 승상께서 헤아리신 바와 같은지 살펴주십시오.”
공명이 그렇게 하기를 허락하자 마속은 종이에다 무언가를 써서 공명에게 바쳤다. 그걸 본 공명이 손바닥을 쓸며 크게 웃고 말했다.
“맹획을 사로잡을 계책을 내가 이미 세워두었다. 그대의 보는 바 가 실로 나와 꼭 같구나!”
그런 다음 조운을 불러 무언가 귀에 대고 영을 내려 보냈다. 또 위 연을 불러 낮은 소리로 무언가를 시켰고 왕평, 마충, 관색도 차례로 불러 남몰래 분부를 내렸다.
공명의 은밀한 영을 받은 장수들은 각기 거기 따라 정한 곳으로 떠나갔다. 공명은 그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맹우를 불러들였다. 맹우는 공명의 장막 앞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제 형 맹획은 승상께서 살려주신 은혜에 깊이 감격하고 있으나, 마땅히 바쳐올릴 게 없어 약간의 금과 구슬, 보석 따위로 우선 그은 혜에 보답하고자 저를 보냈습니다. 적으나마 거두시어 장졸들에게 내릴 상으로 써주십시오. 천자께 올릴 예물은 뒤이어 따로이 이를 것입니다.”
그러자 공명은 맹우가 바친 걸 담담히 거둬들이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대의 형은 어디 있는가?”
“승상의 크신 은혜에 감사드리고자 은갱산(銀坑山)으로 보물을 거두러 갔습니다. 오래잖아 돌아올 것입니다.”
그 같은 맹우의 대답에 공명이 또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대는 몇 사람이나 데려왔는가?”
“어찌 감히 많이 끌고 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백여 명인데 모두 가 예물을 지고 온 자들입니다.”
맹우가 왠지 황망해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공명이 문득 맹우에게 그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들어온 만인(人)들을 보니 모두 푸른 눈에 얼굴은 검고, 머리칼 은 누른데 수염은 붉었다. 귀에는 금귀고리를 달고 헝클어진 머리에 맨발이었으나, 하나같이 키가 크고 힘꼴깨나 써 보였다.
공명은 그들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자리에 앉게 하고 장수 들을 불러 술대접을 하게 했다. 장수들이 은근하게 술을 권하니 만 인들도 흐뭇해 잔을 받았다.
한편 맹획은 아우를 공명의 진중으로 보내놓고 소식 오기만을 기 다렸다. 오래잖아 맹우를 따라갔던 졸개 중에 둘이 돌아왔다는 전갈 이 왔다. 맹획은 그 둘을 불러들여 일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제갈량은 예물을 받고 크게 기뻐하며 따라간 사람들을 모두 장 막 안으로 불러들이고 소와 말을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작은 대 왕(맹우)께서 저희에게 가만히 이르시기를 오늘밤 이경쯤 쳐들어오시면 좋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때 안에서 호응하고 밖에서 들이치면 대사를 이룰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맹획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곧 만병 삼만을 일으켜 세 갈래로 나누고 각 동의 추장들을 불러 영을 내렸다.
“모든 군사들은 불씨와 쏘시개를 마련해서 떠나 촉군 진채 앞 에 이르거든 불을 질러 군호를 삼으라. 나는 중군을 들이쳐 반드시 제갈량을 사로잡으리라.”
맹획이 워낙 큰소리를 치니 만장蠻將)들도 아니 믿을 수가 없었 다. 모두 그가 일러준 계책에 따라 해가 지자마자 노수를 건넜다. 맹획은 특히 믿는 만장 백여 명을 이끌고 똑바로 공명의 대채를 덮쳐갔다. 가는 도중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바로 진채 앞에 이르러도 가로막는 촉군은 하나도 없었다.
채문에 이른 맹획은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말을 박차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진채는 텅 비어 있고 촉군은 하나도 눈 에 띄지 않았다.
맹획은 얼른 중군으로 달려가보았다. 공명의 장막을 들치고 들어 가보니 공명은 없고 아우 맹우와 그 졸개들만 술에 취해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맹획의 속셈을 미리 알아본 공명의 솜씨였다. 공명은 마속과 여개 에게 만인들을 맡아 대접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악인(樂人)을 불 러 재미난 잡극을 상연케 했다. 그리하여 만인들이 그 잡극에 정신 이 팔려 있는 사이에 술에다 몰래 잠드는 약을 타 마시게 하니 모두 취하여 쓰러진 게 마치 술을 너무 마셔 죽은 것 같았다.
“일어나라, 어떻게 된 일이냐?”
맹획이 그들을 걷어차며 소리쳐 물었다. 그중에서 겨우 깨어난 졸 개 하나가 말은 못하고 손가락으로 입만 가리켰다.
그제서야 맹획은 또 공명의 계략에 떨어진 걸 알았다. 급히 맹우 를 비롯한 백여 명 졸개들을 구해 물러나려는데 갑자기 앞에서 큰 함성과 함께 불길이 일었다. 그 갑작스런 사태에 만병들은 싸워보지 도 않고 달아나기 바빴다. 그런 만병들을 개 돼지 잡듯 하며 한 떼의 군마가 밀려들었다. 앞선 장수는 촉의 왕평이었다.
맹획은 깜짝 놀랐다. 급히 왼편에 있는 저희 부대로 달아나려는데 다시 불길이 하늘을 찌를 듯 솟으며 한 떼의 군마가 덮쳐왔다. 앞선 것은 촉장 위연이었다.
맹획은 급했다. 이번에는 오른쪽에 있는 저희 부대로 달아나려 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서도 불길이 치솟으며 한 떼의 군마가 덮쳐왔다. 조운이 이끄는 촉군이었다.
그 세 갈래 군마가 맹획을 에워싸고 들이치니 맹획은 사방을 돌 아봐도 달아날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모든 군사를 내동댕이치 고 말 한 필로 제한 몸만 빼내 노수로 달려갔다.
맹획이 노수가에 이르니 마침 수십 명의 만병이 작은 배 한 척을 저어오고 있었다. 맹획은 소리쳐 그들을 불렀다. 그들도 맹획을 알 아보고 배를 맹획이 선 언덕에다 대었다.
맹획은 말을 끌고 배에 올랐다. 이제 살았다 싶었으나, 그게 아니 었다. 맹획이 배에 오르자마자 한소리 신호와 함께 그때껏 자기 졸 개들인 줄만 알았던 배 안의 군사들이 우르르 덮쳐 맹획을 꽁꽁 묶어버렸다.
맹획을 사로잡은 것은 마대였다. 공명으로부터 계책을 받고 군사들을 만병처럼 꾸며 배와 함께 기다리다가 급한 맹획을 꾀어들인 것 이었다.
이때 공명은 뒤에 남겨진 만병들을 달래고 있었다. 저희 우두머리 홀로 달아나버린 걸 알자 만병들은 대개 항복하며 목숨을 빌었다. 공명은 항복한 군사들을 하나하나 위로해주며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자 군사들을 시켜 아직도 타고 있는 불 을 끄게 했다.
오래잖아 마대는 맹획을, 조운은 맹우를, 위연 · 왕평 · 마충 · 관색 은 여러 동의 추장들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공명은 그중에서도 특히 맹획을 손가락질하며 웃음 섞어 물었다.
“너는 먼저 네 아우로 하여금 예를 갖춰 거짓 항복을 하게 했지만 어찌 나를 속일 수 있겠는가? 이번에 또 너를 사로잡았으니 이제는 내게 항복하겠는가?”
그러나 맹획은 또 억지를 썼다.
“이번에는 내 아우가 먹는 것을 못 참고 당신이 쓴 독에 걸려 큰 일을 그르쳤을 뿐이오. 만약 내가 오고 아우가 밖에 남아 군사를 이 끌고 왔더라면 반드시 성공했을 거외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지게 만든 것이오, 내가 힘이 모자라 진게 아닌데 어떻게 항복할 수 있 겠소?”
“이번으로 너는 벌써 세 번째 사로잡혔다. 그런데도 어찌 항복하 지 않는가?”
공명이 맹획의 억지를 별로 성내는 기색 없이 받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제서야 맹획도 할 말이 없는지 머리를 수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그때 공명이 다시 뜻밖의 소리를 했다.
“나는 또 너를 놓아 보내주겠다.”
맹획이 얼른 그 말을 받아 다짐했다.
“만약 승상께서 우리 형제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나는 집안사람들 과 가까운 장정들을 끌어모아 다시 한바탕 크게 싸워보겠습니다. 그 때 가서 또 사로잡힌다면 승상께 항복하여 죽을 때까지 마음 변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또 너를 사로잡게 되면 나도 더는 가볍게 용서하지 않을 것 이다. 너는 그걸 잊지 말고 조심할 것이며 부지런히 병서를 읽어라. 가깝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좋은 계책을 내어 때늦게 뉘 우치는 일이 없게 하라.”
공명은 선뜻 그렇게 말하고 무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맹획과 맹우를 놓아주고 각 동의 추장들도 모두 풀어주어라.”
이에 맹획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다시 한번 공명에게 엎드려 절 하고 물러났다.
이때 촉병은 이미 노수를 건넌 뒤였다. 맹획의 무리가 노수를 건 너보니 남쪽 강 언덕에도 촉병들이 가득 벌여 서 있고 깃발은 위세 좋게 휘날렸다. 맹획이 그 한군데 영채를 지나려니 마대가 높이 앉 아 있다가 칼끝으로 맹획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번에 또 사로잡히면 결코 가볍게 놓아주지 않겠다. 잊지 말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기 진채가 있던 곳에 이르니 어느새 그 진채는 조운이 차지하고 있었다. 역시 병마를 늘여 세우고 큰 깃대 아래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조운이 또 칼을 빼들고 을러댔다.
“승상께서 너를 이토록 보아주었으니 너는 결코 이 큰 은혜를 잊 지 말라. 그걸 잊을 때는 이 칼이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맹획은 한층 더 간이 오그라붙었다.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곳을 지났다.
하지만 그 같은 일은 거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병이 머무르고 있 는 곳을 벗어나 어떤 산 언덕으로 오르는데, 위연이 일천 정병을 이 끌고 그 언덕 위에 있다가 말 고삐를 당기며 큰 소리로 겁을 주었다.
“내 이미 네 소혈 깊이 들어와 험하고 요긴한 길목은 다 차지했 다. 그런데 너는 아직 어리석고 미욱하게 우리 대군에게 맞서려 드 느냐? 이번에 또 사로잡히면 네 시체를 부수어 천 토막 만 토막을 만들 것이요, 결코 가볍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바람에 또 한차례 진땀을 뺀 맹획은 머리를 싸쥐듯 하고 자기 근거지로 달아났다.
한편 노수를 건넌 공명은 진채를 세우는 일이 끝나자 삼군에게 크게 상을 내렸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을 자신의 장막으로 불러 모 아 그토록 쉽게 맹획을 세 번째로 사로잡게 된 까닭을 들려주었다. “맹획이 두 번째로 잡혀왔을 때 내가 그에게 영채 구석구석까지 보여준 것은 바로 그로 하여금 우리 영채를 야습하게 만들기 위함이 었다. 나는 맹획이 병법을 제법 익혔음을 알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병마와 군량이며 병기 따위를 자랑하는 체하면서 실은 그에게 우리 의 허실을 보여주었다.
곧 우리의 빈틈을 드러내어 그곳을 공격하게 만든 것인데, 바로 우리 진채가 불에 약한 것을 보여 그가 불로 우리를 공격하게 한 것이다.
과연 맹획은 아우를 보내 거짓 항복으로 우리들 마음을 놓게 하 는 한편 그 아우의 내응을 받아 불로 우리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이미 알고 기다리는데 어찌 일이 제 뜻대로 될 리 있겠는가? 다만 이번에 세 번째로 사로잡고도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내 바 람이 그를 마음으로부터 복종케 하는 데 있지, 그런 무리를 죽여 없 애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들에게도 뚜렷이 밝혀두거니 와, 수고롭더라도 그대들 또한 그 뜻을 알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 도록 하라.”
그 말을 들은 장수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모두 공명 앞에 엎드 리며 입을 모아 말했다.
“승상께서는 지(智), 인(仁), 용(勇) 셋을 모두 갖추셨습니다. 설령 자아()나 장량(張良)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 니다.”
그 같은 장수들의 추켜세움을 공명이 겸양으로 그들에게 되돌렸다. “나 같은 것이 어찌 그 같은 옛사람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그대들의 힘에 의지한 것이니 공이 있다면 함께 이룬 것일 뿐 이다.”
그 말에 거기 있던 장수들치고 흐뭇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 근거지인 은갱동에 돌아간 맹획은 세 번이나 공명에게 사로 잡혔던 한을 씻고자 싸울 채비가 한창이었다. 변두리 여덟 지방] 아흔세 골[]이며 만방) 여러 부락에 사람을 보내 금은보화를 나누어주고 군사들을 불러모았다. 칼과 방패를 함께 쓰는 군사며 사냥꾼에 이런저런 오랑캐 장정들이 모여 군사는 금세 수십만이 되 었다.
맹획은 날을 재촉해 그들에게 싸울 채비를 시켰다. 여기저기서 끌 어모아도 구름이 모이고 안개가 둘러싸듯 모두 맹획을 둘러싸고 시 키는 대로 따랐다. 실로 놀랄 만한 맹획의 솜씨였다.
염탐 간 군사들이 그 일을 알아내 공명에게 전했다. 그러나 공명 은 조금도 걱정하는 빛 없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게 바로 모든 만병들이 다 모이는 것이다. 그들에게 내 힘을 보여주리라.”
그러고는 작은 수레에 올라 부근을 살피러 갔다. 겨우 수백 기만 앞세운 채였다.
얼마를 가다 보니 앞에 한 강물이 가로막는데 그 이름은 서이하 (西)였다. 물살은 느렸으나 배도 뗏목도 보이지 않아 공명은 군 사들에게 뗏목을 엮게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뗏목이었다. 군 사들이 나무를 찍어 뗏목을 엮었으나 물에 띄우자마자 가라앉아버 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공명이 여개를 불러 물었다. 여개 또한 그 까닭은 몰랐으나 달리 물을 건널 방도는 알고 있었다.
“듣기로 서이하 상류에 산이 하나 있는데 거기 대나무가 많다고 합니다. 굵은 것은 몇 아름 되는 것도 있다 하니 군사들을 보내 그대를 쪄오게 하지요. 그걸로 물 위에 다리를 놓고 군마가 건너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 같은 여개의 말에 공명은 곧 군사 삼만을 뽑아 그 산으로 보냈 다. 군사들이 대 수십만 그루를 쪄 물에 떠내려 보내자 공명은 하류 에서 그걸 건져 강폭이 좁은 곳에다 대나무 다리를 놓았다.
대나무 다리는 넓이가 여남은 길이나 되었다. 공명은 그 다리를 진채의 문으로 삼고 먼저 강 북쪽 언덕에 가로로 길게 진채를 세웠 다. 도랑을 깊이 파고 흙담을 높이 쌓은 든든한 진채였다. 그리고 다 시 그 다리와 이어져 강물 남쪽 언덕에도 진채를 세웠다. 역시 가로 로 길게 세 개의 큰 진채를 세워 그 대나무 다리로 북쪽 언덕의 진 채와 연결되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 모든 일을 끝낸 공명이 기다리고 있을 때 맹획이 수십만 만병 을 이끌고 달려왔다. 지난날의 한과 분함을 한꺼번에 씻어버리려는 듯한 기세였다.
맹획은 칼과 방패 든 군사 일만 명을 앞장세워 공명의 진채로 밀 려들었다. 맹획이 와서 싸움을 건다는 말을 들은 공명은 네 마리 말 이 끄는 수레에 올라 진채 밖으로 나가보았다. 머리에는 선비들이 쓰는 윤건이요, 몸에는 흰 학창의에 손에는 깃털부채를 들고 수레에 앉은 그를 장수들이 빙 둘러쌌다.
맹획의 차림 또한 거창했다. 몸에는 물소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걸 치고, 머리에는 붉은 투구를 썼다. 왼손에는 방패요, 오른손에는 칼 을 들고 터럭 붉은 소를 탔는데 입은 끊임없이 거친 욕설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쳐라! 모두 나아가라!”
갑자기 맹획이 그렇게 영을 내리자 만여 명의 만병들은 각기 칼 과 방패를 휘두르며 촉군에게 덤벼들었다. 계략이고 뭐고가 통하지 않는 마구잡이 싸움으로 몰아가려는 뜻 같았다.
공명은 급히 군사를 물려 본채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진채의 모든 문을 굳게 닫게 한 뒤 누구도 나가 싸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만병들은 모두 벌거벗은 알몸뚱이로 진채 앞까지 와 쌍욕을 퍼부 어댔다. 꼴같잖은 것들한테 바가지 바가지 욕을 얻어먹자 촉의 장수 들은 불끈했다. 모두 공명에게 달려와 졸랐다.
“부디 저희들을 내보내주십시오. 죽기로 싸워 저것들을 짓밟아버 리겠습니다.”
그러나 공명은 허락하지 않다가 장수들이 두 번 세 번 조르자 조 용히 말했다.
“만방의 사람들은 왕화(化)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이라 지금 저렇게 미친 듯 덤벼들 때는 바로 맞서선 아니 된다. 굳게 지키며 며 칠을 기다려 저들의 미친 듯한 기세가 숙진 뒤에 맞서는 게 좋다. 내 게 묘한 계책이 있으니 그대들은 가볍게 나가지 말라.”
이에 장수들도 더는 우겨대지 않고 며칠을 굳게 지키기만 했다. 며칠 뒤 높은 언덕에서 만병들의 진채 깊숙한 곳을 살피던 공명 은 마침내 그들의 기세가 풀어졌음을 알아차렸다. 곧 모든 장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자, 이제는 한번 나가 싸워보겠는가?”
“좋습니다. 나가 싸우겠습니다.”
장수들이 모두 기꺼이 나섰다.
공명은 먼저 조운과 위연을 불러 귀에 대고 무언가 나직이 일러 주었다. 계책을 받은 두 사람이 일어서 나가자 공명은 다시 왕평과 마충을 불러들였다. 그들에게도 무언가 귀엣말로 계책을 일러준 공 명은 마지막으로 마대를 불러 말했다.
“나는 이제 이곳의 세 진채를 버리고 강물 북쪽으로 물러나려 한 다. 우리 군사가 물러나거든 그대는 얼른 부교를 끊어버리고 하류로 옮겨가라. 거기서 기다리다가 조운과 위연이 강을 건너오거든 호응 하면 될 것이다.”
그다음 공명은 또 장익을 불러 말했다.
“우리 군사가 물러나더라도 진채에 횃불을 많이 밝혀 맹획을 속 이라. 그리고 그걸 안 맹획이 우리를 뒤쫓거든 그때는 그 뒤를 끊어 버려라.”
그렇게 모든 장수에게 하나하나 계책을 일러준 공명은 그날 밤 관색 하나만을 남겨 자신의 수레를 지키게 하며 군사들을 물렸다. 그러나 장익이 등불을 수없이 밝혀놓으니 만병들은 감히 치고 들지 를 못했다.
다음 날 날이 밝았다. 맹획은 또 군사를 휘몰아 촉군과 싸우러 왔 다가 진채 셋이 그대로 비어 있음을 알았다. 사람은커녕 어리친개 새끼 한 마리 없는데 군량미며 마초에 수레 수백 대와 병기까지 두 고간 걸 본 맹우가 형에게 말했다.
“제갈량이 진채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이게 바로 계략이 아닐까요?”
“내 생각에는 제갈량이 치중까지 버리고 간 것으로 보아 그 나라 에 무슨 큰일이 난 것 같다. 오나라가 쳐들어온 게 아니면 위나라가 밀고 든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등불을 많이켜 우리 눈을 속이고 수레와 병기까지 버린 채 도망간 것 같다. 빨리 뒤쫓아서 이 좋은 기 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맹획이 그렇게 잘라 말하고 앞장서 말을 몰아 촉군을 뒤쫓았다. 맹획이 서이하 가에 이르러 보니 강 북쪽에 촉군의 진채가 서 있 는데 전과 같이 기치가 가지런한 게 마치 비단 구름을 두른 듯했다. 또 근처 강변에도 비단을 둘러 성처럼 보이게 했는데 조금도 쫓기는 군사들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맹획은 그걸 보자 더욱 힘을 내 맹우에게 말했다.
“저것은 제갈량이 우리가 뒤쫓는 걸 겁내 짐짓 강물 북쪽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듯 꾸민 것이다. 하지만 이틀도 안 돼 그는 틀림없이 달아날 것이다.”
그러고는 만병들을 강물 남쪽에 머무르게 한 뒤 사람을 보내 대 나무를 쪄오게 했다. 뗏목을 엮어 강을 건너려 함이었다. 그러나 싸 우는 데 정신이 팔려 군사들을 모두 진채 앞으로 몰아 내놓으니 촉 군이 딴 길로 저희 땅 깊숙이 들어와도 알 길이 없었다.
얼마 있다 미친 듯한 바람이 크게 일자 사방에서 불길과 함께 북 소리가 나며 촉군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왔다. 놀란 만병들은 저희끼 리 부딪치고 나동그라지며 법석을 떨었다.
놀란 맹획은 급히 자기 피붙이들과 졸개들을 이끌고 길을 앗아 원래의 진채로 돌아갔다. 그때 문득 한 떼의 군마가 진채 안에서 뛰쳐나왔다. 앞선 장수를 보니 조운이었다. 맹획은 황망히 서이하로 돌아서서 그쪽 거친 산기슭을 타고 달아났다.
어디쯤 갔을까. 또 한 떼의 군마가 가로막는데 앞선 장수를 보니 마대였다. 거기서 다시 한차례 죽을 맛을 본 맹획은 겨우 수십 명의 졸개만 거느리고 골짜기 안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것도 트인 길은 아니었다. 남쪽, 북쪽, 서쪽 세 곳에서 불길이 일어 그곳으로는 가지 못하고 한군데 빤한 동쪽 길로 접어들었다.
맹획이 한군데 산굽이를 돌았을 때 문득 큰 숲이 하나 나타났다. 그 숲 앞에는 군사 수십 명이 수레 한 대를 에워싸고 섰는데, 수레에 단정히 앉은 것은 바로 공명이었다.
“만왕 맹획이 싸움에 크게 지고 이리로 올 줄 내가 이미 알고 기 다린 지 오래다. 자 이제 어찌하겠는가?”
공명이 껄껄 웃으며 맹획에게 말했다.
공명을 보자 맹획은 두 눈이 뒤집혔다. 자신의 처지도 잊고 좌우 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나는 저자의 속임수에 빠져 이미 세 차례나 욕을 보았다. 이제 다행히 저자를 만났으니 너희들은 힘을 다해 나아가 그 욕을 씻으 라. 사람이고 말이고 가릴 것 없이 베어 박살을 내버려라!”
그 소리에 말 탄 만병 몇이 험한 기세로 공명을 향해 덮쳐갔다. 맹 획도 그들의 앞장을 서서 크게 소리치며 말을 휘몰았다. 그런데 이 게 어찌 된 일인가. 그 숲 앞에 이르기도 전에 발밑이 꺼지면서 사람 과 말이 모조리 깊은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버렸다.
뿐만이 아니었다. 맹획과 그 졸개들이 구덩이에 떨어지자 큰 숲속에서 위연이 수백 기를 이끌고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하나 구덩이에서 끌어내 밧줄로 꽁꽁 묶어버렸다.
공명은 그걸 못 본 체 먼저 진채로 돌아가 사로잡혀 온 만병과 동 의 추장들을 좋은 말로 다독였다. 감격한 그들은 태반이 자기의 땅 으로 돌아가버렸고 그 나머지도 죽거나 다친 사람을 빼고는 모두 공 명에게 항복해버렸다. 공명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술과 밥을 주어 배 불리 먹인 뒤 모두 풀어 보내주었다. 그 같은 공명의 너그러움에 만 병들은 다시 한번 감격하며 제 갈 길로 가버렸다.
얼마 후 장익이 먼저 맹우를 끌고 왔다. 공명이 그를 꾸짖었다. “네 형이 어리석고 생각이 막힌 사람이면 너라도 곁에서 말려야 할 게 아니냐? 이제 내게 네 번째로 사로잡혔으니 무슨 낯으로 사람 들을 보겠는가?”
맹우가 거기 대꾸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얼굴 가득 부끄러운 빛 을 띠고 있다가 그저 목숨만 살려주기를 엎드려 빌었다.
“좋다. 내 오늘은 너를 죽이지 않겠다. 잠시 네 목숨을 더 붙여줄 터 이니, 너는 반드시 네 형을 달래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해라.”
공명은 그 말과 함께 무사들에게 맹우를 풀어주라 일렀다. 공명이 또 한번 살려주자 맹우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울며 그 은혜에 감사하고 물러갔다.
오래잖아 이번에는 위연이 맹획을 끌고 왔다. 공명이 짐짓 성난 기색으로 소리쳤다.
“너는 이번에 또 내게 사로잡혔다. 이제 무슨 소리를 하겠느냐?”
“이번에도 잘못해 당신의 속임수에 떨어졌으니 죽어도 차마 눈감 지 못할 것이오!”
맹획이 분하다는 듯 뻣뻣이 대꾸했다. 공명이 무사들을 꾸짖듯 영을 내렸다.
“이제는 저놈을 살려둘 수 없다. 어서 저놈을 끌어내 목 베어라!”
그러나 맹획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무사들에게 등 을 밀려나가면서도 공명을 돌아보며 큰 소리를 쳐댔다.
“만약 다시 나를 놓아 보내준다면 내 반드시 이렇게 네 번이나 사로잡힌 한을 씻을 것이오!”
그 기개를 보자 공명이 문득 낯빛을 바꾸어 껄껄 웃었다.
“그 사람을 풀어주어라.”
공명은 그렇게 말하여 맹획을 풀어주게 하고 술을 내려 맹획의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게 했다.
이윽고 맹획에게 자리를 내어준 공명이 가만히 물었다.
“나는 이제까지 네 번이나 너를 사로잡았으나 예로 대접해 돌려 보냈다. 그런데 너는 아직 항복할 뜻이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인가?”
“나는 비록 왕화를 입지 못한 곳에 사는 사람이나 승상처럼 속임 수를 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속임수에 항복할 수 있겠습 니까?”
전략의 개념을 이해 못해서인지 알면서 뻗대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항복할 뜻이 전혀 없는 것만은 분명했다. 공명이 그런 맹획을 보고 빙긋 웃으며 물었다.
“만약 너를 다시 놓아준다면 한 번 더 나와 싸워보겠느냐?”
“그래서 만약 다시 내가 승상께 사로잡힌다면 그때는 진심으로 항복할 뿐만 아니라 제가 거느린 족속과 땅을 바치고 두 번 다시 모 반하지 않을 것을 맹서하겠습니다.”
공명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맹획이 그렇게 말했다. 공명도 망설 임없이 그 말을 받아들여주었다.
“좋다. 다시 한번 놓아 보내줄 터이니 이번에는 네 말을 어기지말아라.”
그러고는 맹획을 보내주었다. 맹획 또한 흔연히 공명의 앞을 물러 나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러 떠났다.
그런데 이쯤 해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은 맹획이 아닌가 싶다.
정사에서는 주)에서만 짤막하게 다루고 있지만, 『삼국지연의』 전편을 통해 맹획만큼 흥미 있는 인물도 드물다.
첫째로는 그가 한 변방의 만족 지도자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정사는 말할 것도 없고 『연의도 한결같이 한족의 손에 씌어져 맹획 을 보는 눈길도 그들의 중원(中) 내지 식민사관에만 의지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잘해야 간교하고 아니면 우둔한 주제에 거 짓말만 밥먹듯 하는 오랑캐 추장으로만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한 꺼풀만 뒤집으면 그에게서 독립심에 불타는 민족 지도 자의 면모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는 약소 민족을 이끌고 강력한 촉군과 싸우며 조국의 식민지화에 눈물겹게 저항하고 있다. 수적인 우위, 장비의 우수성, 중원에서의 풍부한 전쟁 경험에다 제갈량이란 뛰어난 전략가까지 갖춘 침략군을 맞아 그는 자신의 동족 과 그 땅에서 끌어낼 수 있는 한의 모든 힘을 끌어내 맞서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맹획의 그런 면모가 제갈량의 광채를 조금도 줄이 지는 않는다. 그는 그대로 뒷날의 그 어떤 식민지 개척자가 보인 것 보다 더 뛰어난 책략을 구사하고 있다. 반드시 그를 추켜세울 목적 이 없더라도 거기서 그가 맹획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갖가지 왕화 정책은 천수백 년이 지난 근대 서구의 식민지 정책보다 세련되고 오 히려 돋보이는 데마저 있다.
어쨌든 제갈량에게서 풀려난 맹획은 다시 동족의 장정 수천을 끌 어모은 뒤 남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더 많은 군사를 모으고 힘을 길러 제갈량과 한 번 더 싸워볼 속셈이었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한 곳에 자욱이 먼지가 일더니 한 떼의 군사 가 이르렀다. 아우 맹우가 흩어진 졸개들을 힘대로 끌어모아 형의 원수를 갚으러 오는 길이었다. 서로 죽은 줄만 알았던 형제는 얼싸 안고 목을 놓아 울며 지난일을 얘기했다.
이윽고 맹우가 형에게 권했다.
“우리 군사는 여러 번 싸움에 지고 촉군은 여러번 이겨 이제 싸 우려 해도 당해내기 어렵습니다. 산속 깊이 있는 동네로 물러가 숨 어 나오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촉군은 이 찌는 듯한 더위를 이기지 못해서도 절로 물러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겠느냐?”
맹획도 당장 뾰족한 수가 없는지 그렇게 물었다. 맹우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이나 대답했다.
“여기서 서남으로 가면 한 마을이 있는데 그 이름을 독룡동(禿龍洞)이라 합니다. 그곳 동주 타사대왕(朶思大王)은 저와 몹시 친한 사 이니 그리로 가서 기대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에 맹획은 독룡동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히고 먼저 맹우를 보내 타사대왕을 만나보게 했다. 타사대왕은 맹우가 찾아가자 얼른 군사 를 이끌고 자기 땅 어귀까지 나가 맹획을 맞아들였다. 평소 맹획이 자기 동족들에게 얼마만 한 신망을 얻고 있었는지를 알아볼 만한 대 목이다.
맹획은 타사대왕의 경내로 들어가 서로 예를 표한 뒤 그간에 있 었던 일을 낱낱이 말해주었다. 어지간하면 촉군의 위세에 겁을 집어 먹고 움츠러들 법도 했으나 타사대왕은 그렇지가 않았다. 맹획이 한 탄과 함께 얘기를 끝내자 분연히 소리쳤다.
“대왕께서는 부디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만약 서천의 군사가 온다 해도 말 한 마리 군사 한 사람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모두 제갈량과 더불어 이 땅에서 죽게 만들지요.”
그 말에 맹획은 몹시 기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타사대왕이 터무 니없이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물었다.
“어떤 계책으로 그렇게 하시겠소?”
“이 동네로 들어오는 길은 다만 두 가닥이 있을 뿐입니다. 동북으 로 난 길은 바로 대왕께서 들어오신 길인데, 지세가 평평하고 흙이 두꺼울 뿐만 아니라 물이 흔해 사람과 말이 다니기 좋습니다. 그러 나 만약 그곳에 흙과 돌을 굴려 동네로 들어오는 입새를 막아버린다 면 비록 백만 대군이 온다 해도 뚫고 들어올 데가 없습니다. 다른 한갈래는 서북으로 난 길인데 산이 험하고 재가 높을 뿐만 아니라 길 이 좁습니다. 그밖에 다른 샛길이 없지 않으나 모두 독 있는 뱀과 모 진 전갈이 득실거리고 안개 같은 장기(氣)가 자욱이 서려 있지요. 그 장기만으로도 미, 신, 유세 시진밖에는 사람이 다닐 수가 없습니 다. 그렇지만 물을 마실 수가 없으니 역시 다니기 쉽지는 않겠지요.” 이어 타사는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또 거기에는 네 개의 독 있는 샘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천(泉) 이라 해서 물은 맛이 좋으나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말을 못하게 되 고 보름을 넘기지 않아 죽고 맙니다. 둘째는 멸천(滅泉)이라 하는데 온천물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으나 사람이 만약 거기 몸을 담그면 살갗이 문드러져 뼈를 드러내고 죽지요. 셋째는 흑천(黑泉)입니다. 그 물을 덮어쓰면 손발이 시커멓게 되어 죽고 맙니다. 넷째는 유천 (柔泉)이라고 합니다. 그 물은 얼음같이 찬데 사람이 마시기만 하면 목구멍부터 따뜻한 기운이 없어지고 온몸이 부드러워져 마침내는 솜같이 된 뒤 죽고 맙니다. 따라서 그곳은 벌레나 새 한 마리 없는 곳이지요. 오직 한 복파장군 마원(馬援)이 한번 온 적이 있을 뿐, 그 뒤로는 누구도 이른 적이 없습니다. 이제 먼저 동북쪽으로 난 큰길 을 막고 대왕께서는 마을 깊숙이 숨어 계신다면 동쪽 길이 끊긴 촉 군은 틀림없이 그쪽 서편 길로 접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는 도중 에 물이 없으니 그 샘들만 보면 퍼서 마시겠지요. 그렇게만 되면 설 령 백만 대군이 온다 해도 돌아갈 자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도대 체 그들을 상대로 창칼을 쓸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모든 말을 들은 맹획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손으로 이마를 치며 기쁨을 나타냈다.
“이제서야 내 몸을 쉬게 할 만한 땅을 얻었구나.”
그러고는 제갈량이 있는 북쪽을 가리키며 고소한 듯 말했다.
“제갈량이 아무리 꾀가 많고 헤아림이 귀신 같다 한들 그 네 개의 샘이야 어찌 피할 수 있으랴. 그 네 군데 샘물만으로도 네 번 사로잡 힌 한은 넉넉히 씻을 수 있겠구나!”
비록 스스로 나가 촉군을 쳐부수지는 못하나 그 아래 항복해 다 스림을 받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기껍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에 지 친 몸과 패배의 쓰라림에 찌들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개운해지는 듯 했다. 이에 맹획과 맹우는 그날부터 모든 시름을 털고 연일 타사대 왕이 베푸는 잔치만 즐겼다.
한편 공명은 아무리 기다려도 맹획이 군사를 이끌고 나오지 않자, 마침내 전군에 영을 내려 서이하를 멀리하고 남으로 밀고 가게 했 다. 스스로 맹획을 찾아나서려 함이었다. 철저한 패배에 기초한 복 속만이 오래감을 알고 있는 그에게는 아직 맹획에게 보여주어야 할 게 더 있었다. 만족의 기개만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힘이 그 와 그의 등 뒤에 있는 중화(中)에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