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7화 : 독룡동천에서 은갱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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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7화 : 독룡동천에서 은갱동으로


독룡동천에서 은갱동으로

때는 유월 한창 뜨거운 때라 햇볕이 마치 모닥불을 퍼붓는 것 같 았다. 공명이 대군을 몰아 나가고 있는데 문득 살피러 갔던 군사가 나는 듯 말을 달려와 알렸다.

“맹획은 독룡동(禿龍洞)으로 들어가 숨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동으로 들어가는 길은 돌과 흙으로 막혀 있을 뿐만 아니라 안에서 군사가 지키고 있고 다른 곳은 모두 험한 산과 높은 재로 둘러싸여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여개(呂凱)를 불러 물었다.

“제가 일찍이 이 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자

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여개가 머뭇거리며 그렇게 답하자 마침 거기 있던 장완이 공명에게 권했다.

“맹획은 이미 네 번이나 사로잡힌 바 되어 적지 않이 놀랐을 것입니다. 어찌 다시 감히 나오겠습니까? 거기다가 지금 날은 덥고 사람 과 말이 아울러 지쳐 있으니 싸워도 이로움이 없을 듯합니다. 군사 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습니다.”

그러나 공명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바로 맹획의 계책에 떨어지는 것이오. 우리 군사가 한번 물 러나기 시작하기만 하면 적은 반드시 승세를 타고 뒤쫓을 것이외다. 이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런 다음 왕평에게 수백 군마를 주고 새로 항복한 만병을 길잡 이로 삼아 서북쪽으로 난 샛길을 찾아 들어가보게 했다.

왕평이 영을 받아 그 길로 들어가다 보니 한군데 샘이 있었다. 목 이 마르던 군사들은 다투어 그 물을 마셨다. 왕평은 길을 찾은 데다 샘까지 있자 얼른 그 소식을 공명에게 알리게 했다. 그러나 심부름 을 간 군사는 공명의 대채에 이르기도 전에 말문이 막혀 공명 앞에 이르러서는 다만 손가락으로 자기 입을 가리킬 뿐이었다.

공명은 깜짝 놀랐다. 그 군사가 말문이 막힌 게 독 때문임을 알아 차리고 몸소 수십 기와 더불어 왕평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서 보니 샘이 솟는 작은 못이 하나 있는데, 물은 맑았으나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물기운이 써늘한 게 군사들도 함부로 들어가 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공명은 수레에서 내려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사방을 돌아봐도 우 뚝우뚝 솟은 봉우리뿐 까치나 참새 한 마리 날지 않는 게 매우 이상했다. 그래서 잇달아 사방을 살피는데 멀리 산기슭에 오래된 사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공명은 칡덩굴에 매달리어 기어가듯 그 언덕 에 올라가보았다. 돌로 짠 사당 안에는 흙으로 빚은 장군의 상이 단 정히 앉아 있고 곁에는 돌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한복파장군 마원지묘(漢伏波將軍馬援之廟)’라 크게 씌어진 곁에 그 사당을 세우게 된 연유가 씌어 있었다. 한의 복파장군 마원이 남 쪽 오랑캐를 평정하고 그곳에 이르니 그곳 주민들이 사당을 지어 제 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공명은 그 사당에 두 번 절하고 고했다.

“양은 선제의 당부를 받은 데다 이제는 또 금상의 어진 뜻을 받들 어 만방을 평정하러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남만을 평정한 뒤에는 위 를 치고 오를 삼켜 한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그 런데 지금 군사들은 이곳 지리를 잘 알지 못해 잘못 독수를 마시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존신(神)께서는 한조의 은 의를 생각하시어 신령한 힘을 드러내보여주옵소서. 부디 우리 삼군 을 지키고 보살펴주옵소서!”

그런 기도를 올린 공명은 그 사당을 나와 부근에 사는 토박이를 찾았다. 토박이들로부터 군사들이 입은 독을 풀 방도를 물어볼 참이 었다. 하지만 멀리 가기도 전에 맞은편 산에서 한 늙은이가 지팡이 를 짚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모습이나 차림이 예사롭지 않은 늙은 이였다.

공명은 그 늙은이를 사당 안으로 모셔들여 돌 위에 앉게 하고 물었다.

“어르신의 높으신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노인은 이름은 밝히지 않고 칭송만 앞세웠다.

“이 늙은이는 오래전부터 대국 승상의 크신 이름을 들어왔습니다. 이제 이렇게 뵙게 되니 실로 큰 기쁨입니다. 이 땅 사람들은 승상께 여러 번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입어 하나같이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의심쩍은 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공명에게 우선 급한 것은 중독된 군사들을 구해내는 일이었다. 굳이 이름을 캐묻는 대신 군사들이 마신 샘물에 대한 것부터 물었다. 늙은이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군사들이 마신 샘물은 아천(泉)의 것인 듯합니다. 마시면 말을 못하고 며칠 안에 죽게 되지요. 이곳에는 그 샘물 외에도 독 있는 샘 물이 셋 더 있습니다. 동남쪽에 한 샘이 있는데 그 물이 매우 찹니 다. 만약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목구멍에 따뜻한 기운이 없어지고 몸이 흐물흐물해져 죽기 때문에 그 이름을 유천(泉)이라고 합니 다. 남쪽에 있는 샘물은 그 물이 사람에 튀기면 손발이 시커매져 죽 지요. 그 바람에 흑천(黑泉)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또 서남쪽 샘이 하나 더 있는데 언제나 뜨거운 물처럼 끓고 있지요. 사람이 거기 목 욕을 하면 살점이 모두 떨어져나가 죽기 때문에 멸천(泉)이란 끔 찍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미 말한 이 네 곳 샘은 독기가 모여 된 것이라 약으로는 그 독이 퍼진 사람을 낫게 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 다가 또 이 부근에는 못된 장기(氣)가 일어 미, 신, 유시 때에만 다 닐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나머지 시간에는 장기가 빽빽이 덮여 있어 거기 쐬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내 죽고 말지요.”

그런 얘기를 들은 공명은 갑자기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그러하다면 남방을 평정하기는 그른 일이구나! 또 남방을 평정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위를 치고 오를 아울러 한실을 되일으켜 세운단 말인가! 선제께서 뒤에 남은 금상을 당부하셨는데 이러고서 야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나을 게 무에 있겠는가!”

공명이 그렇게 탄식하자 늙은이가 좋은 말로 공명을 위로했다. “승상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 모든 어려움을 한 꺼번에 풀어줄 곳을 한군데 일러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 어떤 높으신 가르치심이 계십니까? 부디 일러주십시오.”

공명이 매달리듯 그렇게 말했다. 그 늙은이는 별로 내세우는 기색 없이 참으로 귀한 것을 알려주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몇 리 가면 산골짜기 하나가 있고, 그 안으로 이십 리쯤 들어가면 다시 만안계(萬溪)란 개울이 나옵니다. 그 개 울 위쪽에 한 높은 선비가 사는데 호를 만안은자(萬安隱者)라 합니 다. 그 사람은 벌써 수십 년째 그 계곡에서 나온 적이 없지요. 그런 데 그가 거처하는 암자 뒤에 안락천(安樂泉)이란 샘이 있습니다. 어 떤 독에 중독된 사람이라도 그 물을 마시기만 하면 바로 낫고, 옴이 나 버짐이 생겼을 때나 장기에 쐬었을 때도 거기서 목욕을 하면 깨 끗해집니다. 또 그 암자 뒤에는 좋은 풀이 있는데 이름을 해엽운향 (薤葉芸香)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그 잎을 하나씩 입에 물고 있으면 장기에 씌어도 아무렇지 않지요. 승상께서는 어서 그리로 가셔서 그 샘물과 풀잎을 얻도록 하십시오.”

공명은 고마운 나머지 그 늙은이에게 엎드려 절하고 물었다.

“어르신께 이같이 목숨을 구해주신 듯한 은혜를 입고 나니 어떻 게이 고마움을 나타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높으신 이름이라 도 들려주십시오.”

그러자 그 늙은이가 복파장군의 사당 안으로 들어가며 엄숙히 말했다.

“나는 이곳 산신이외다. 복파장군의 명을 받들어 특히 가르쳐주러 온 것이오.”

그러고는 사당 뒤의 돌벽을 열고 사라져버렸다. 공명은 신기함을 이기지 못했다. 사당 앞에 다시 절하고 물러나 진채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었다. 공명은 여러가지 예물을 마련한 뒤 왕평과 아천을 마셔 벙어리가 된 군사들을 데리고 산신이 일러준 곳으로 찾아갔다. 먼저 큰 골짜기를 찾아 샛길로 한 이십 리 들어가니 소나무 잣나무 가 높이 솟고 대나무와 기이한 꽃들이 무성한 가운데 집 한 채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쓰러져가는 울을 두른 몇 간 띠집 [茅屋]인데 가까이 가니 그윽한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공명은 바로 찾아온 게 기뻐 집 앞에 이르기 바쁘게 문을 두드렸다. 한 아이가 나와 물었다.

“누구시기에 이곳을 찾아왔습니까?”

“나는 제갈량이란 사람이다. 만안은자를 뵈러 왔다.”

공명이 그렇게 말하자 곧 한 사람이 나왔다. 대나무 관에 짚신이 요, 흰 옷에 검은 띠를 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는데 눈은 푸르고 수염은 노랬다.

“오신 분은 한(漢)승상이 아니십니까?”

그가 반기는 듯 그렇게 묻자 공명도 웃음을 머금고 되물었다.

“높으신 선비께서는 어떻게 저를 알아보셨습니까?”

그가 다시 시원스레 받았다.

“승상께서 크게 군사를 이끌고 남방을 평정하러 오셨음을 들은지 오랜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고는 공명을 청해 초당으로 들이고 예를 표했다.

예가 끝난 뒤 주인과 손님이 자리를 정해 앉기 바쁘게 공명이 간곡히 말했다.

“양은 돌아가신 소열황제의 무거운 당부와 뒤를 이으신 지금 성 상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만방을 복속시켜 왕화를 입게 하려함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맹획 은 독룡동 깊이 숨어버리고 그리로 가던 우리 군사는 잘못하여 아천 의 물을 마셨습니다. 그 때문에 정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차에 고맙게도 복파장군께서 어진 모습을 드러내시어 어르신의 약천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샘물이면 아천을 마신 군사들을 낫게 할 수 있 다 하니 부디 나누어주시어 그들의 남은 목숨을 구할 수 있게 해주 십시오.”

그러자 그 숨어 사는 선비가 선선히 허락했다.

“이 늙은이는 그저 산야에 버려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승상께서 몸소 이곳을 찾아오실 만한 위인이 못 됩니다. 그러나 그 샘물이라 면 암자 뒤에 있으니 얼마든지 퍼다 쓰십시오.”

이에 왕평을 비롯한 벙어리 군사들은 동자의 인도를 받아 샘물가로 갔다. 샘물을 마신 군사들은 곧 나쁜 침과 가래를 토하고 말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동자는 또 그들을 데리고 계곡으로 가 몸을 씻어 장기를 가셔내게 했다.

그동안 그 늙은이는 잣차와 송화채(松花)를 내어 공명을 대접했다.

“그곳 독룡동 부근은 독사와 전갈이 많고 버드나무 꽃이 개울이 나 샘물에 떨어져 물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땅을 파서 샘을 만들고 거기서 솟는 물을 마셔야만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그곳에서 물을 얻는 방법을 일러주자 공명은 아울러 해엽운향도 나누어주기를 청했다. 그는 그 또한 기꺼이 내주었다. 

“모두 입에 해엽운향 한 잎을 물고 있으면 장기가 침범하지 못할 것이오.”

그렇게 군사들에게 일러주는 그를 보고 공명이 다시 그 이름을 물었다. 그가 빙긋 웃으며 알려주었다.

“맹획의 형 맹절(節)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그 말에 공명은 깜짝 놀랐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맹절이 다시 말했다.

“승상께서는 너무 놀라지 마시고 제 말을 마저 들으십시오. 저희 부모는 모두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바로 이 늙은이요, 둘째는 맹획이며 셋째는 맹우올시다. 이제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만 바로 밑의 아우가 성정이 거세고 모질어 왕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요. 저는 여러 번 아우를 달래보았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기에 이름을 바꾸고 이곳에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욕된 아우가 나라를 거슬러, 승상으로 하여금 수고스럽게도 이 거친 땅 깊은 곳까지 들어오게 하였으니 이 맹절은 그 죄만 해도 만 번 죽어 마땅합 니다. 이에 먼저 승상께 아뢰고 죄를 비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마디마디 진정에 차 있어 공명은 의심보다 감탄에 사로 잡혔다.

“이제야 도척(盜)과 유하혜(柳下惠)의 일을 믿겠구나. 그 일이 바로 여기도 있지 않은가!”

도척은 현자 유하혜의 동생인데, 모질기로 이름난 도적이었다. 맹 절같이 어진 형에 맹획 같은 모진 동생이 있는 게 꼭 그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왕화라는 이름의 식민지화를 꾀하는 공명의 입장에 서 본 것일 뿐, 조금만 돌려서 보면 얼마든지 달리 해석될 수도 있 다. 다시 말하자면 맹절과 맹획은 강력한 침략자에 맞서는 약소민족 의 두 가지 상반된 대응 양식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한족의 우수한 중원 문화에 깊이 빠져든 것으로 보이는 맹절에게 는 그들의 지배에 순응하는 것이 자기들 종족의 보존과 번영에 더 이로우리라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민족주의 입장에서 보면 진 정한 투사요, 불굴의 지도자인 아우 맹획을 거세고 모진[] 인간으 로 보게 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가망 없는 싸움으로 종족을 이끌어 숱한 종족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든다는 뜻에서 한 말로 보면 그 또 한 종족을 덜 사랑함이 아닌 듯하나, 그런 관점이 정복자인 공명의 그것과 일치하는 데는 어떤 섬뜩함이 느껴진다.

마음속의 뜻이야 어떠하건 그런 맹절을 이해하는 공명의 입장 또 한 정복자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임은 그다음 말에서 잘 드러난다.

“내가 천자께 말씀드려 공을 이곳 왕으로 삼으면 어떻겠소?”

맹절이 펄쩍 뛰며 말했다.

“나는 이미 공명이 싫어 이리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다시 부귀에 뜻을 두겠습니까?”

말은 그랬으나 그가 진심으로 피하고 싶었던 것은 정복자의 대가 가 자신의 깨끗한 명분을 더럽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거듭 권해도 맹절이 굳이 왕위를 마다하자 공명은 다시 금과 비 단을 내놓았다. 맹절이 그걸 받을 리 없었다. 공명은 찬탄을 금하지 못하며 절로만 고마움을 나타내고 맹절의 초당을 나왔다.

진채로 돌아온 공명은 먼저 군사들에게 샘부터 파게 했다. 맹절에 게 들은 대로 군사들이 마셔도 아무 탈이 없는 물을 얻기 위함이었 다. 그러나 군사들이 땅을 열 길 씩이나 파보아도 물이 나오지 않았 다. 그렇게 장소를 옮겨가며 파보아도 마찬가지이자 목마른 군사들 은 놀라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생각다 못한 공명은 그날 밤 향을 피워올리며 하늘에 제사를 드 리고 고했다.

“신 제갈량은 재주 없으면서도 대한의 복록을 입고 천자의 명을 받들어 이 땅을 평정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도중에 물이 떨어 져 사람과 말이 아울러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늘이 대한의 운세를 끊으려 함이 아니시거든 이 샘 가득 단물이 괴게 해주옵소 서. 만약 대한의 운세가 이미 다하였다면 양을 비롯한 저희 무리는 다만 이곳에서 죽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고 제사를 마친 공명은 경건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하늘이 정말로 한실을 저버리지 않은 것인지 이튿날 날이 밝고 우물을 들여다보니 우물마다 맑은 물이 넘쳐흘렀다. 오늘날에 조차 없어지지 않는 싸움터의 신화 중에 하나이리라.

중독된 군사들이 모두 낫고 마실 물까지 넉넉히 얻자 공명의 군 사들은 별일 없이 샛길을 지나 바로 독룡동천 앞에다 진채를 내렸 다. 만병이 그걸 알고 급히 맹획에게 달려가 알렸다.

“병들은 장기를 쐬어도 아무 일 없고, 또 독 있는 샘에 중독되 거나 목마른 기색도 없이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그 네 개의 독천(毒 泉)도 촉병들에게는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타사대왕은 아무래도 그 말이 미덥지 않은 듯했다. 곧 맹획과 함 께 높은 곳에 올라가 병 쪽을 내려보았다. 정말로 촉군들이 아무 일 없이 크고 작은 통에 물과 간장을 날라다 말을 먹이고 밥을 짓는 게 보였다.

타사대왕은 머리끝이 쭈뼛했다. 질린 얼굴로 맹획을 돌아보며 탄식했다.

“저것은 아무래도 하늘이 보낸 군사들 같습니다. 실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맹획이 오히려 그런 타사대왕의 마음을 다잡아주듯 말했다.

“우리 형제가 나가 촉병과 한바탕 죽기로 싸워보겠소. 싸움터에서 죽을지언정 어찌 손을 내밀어 묶임을 받겠소!”

타사대왕도 거기에 힘을 얻었는지 이를 악물며 말을 받았다.

“만약 대왕께서 그 싸움에 지시면 나의 처지도 끝장입니다. 마땅히 소와 말을 잡아 장정들을 배불리 먹이고 후한 상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우도록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을 휘몰아 똑바로 병의 진채를 덮치면 이길 수도 있을 것입 니다.”

그리고 곧 그 말대로 했다. 술과 고기를 흠뻑 마시고 상까지 두둑 히 받은 만병들은 크게 기세가 올랐다.

맹획과 타사대왕이 그들을 이끌고 막 싸우러 나서려는데 문득 졸 개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우리 동 뒤 서쪽은야동銀洞 스물한 번째 동주 양봉(楊鋒)이 삼만 군을 이끌고 우리를 도우러 왔습니다.”

그 말에 맹획이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이웃 군사들이 도우러 왔으니 이 싸움은 반드시 우리가 이기겠구나!”

그리고 타사대왕과 함께 동구까지 나가 양봉을 맞아들였다. 군사 를 이끌고 독룡동천으로 들어온 양봉이 말했다.

“제게는 가려 뽑은 군사 삼만이 있습니다. 모두 철갑을 입고도 산 봉우리와 높은 영마루를 나는 듯 치달을 수 있으니 촉병 백만은 넉 넉히 당해낼 것입니다. 거기다가 또 내게는 다섯 아들이 있는데 모 두가 무예를 갖췄습니다. 우리가 대왕을 도와드릴 것이니 대왕께서 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다음 다섯 아들을 모두 불러들여 맹획에게 절하게 했다. 맹 획이 그들을 살펴보니 하나같이 표범의 몸놀림에 호랑이의 생김이 라 위풍이 대단했다. 맹획은 기뻐해 마지않으며 크게 잔치를 열어 양봉 부자를 대접했다.

술이 반쯤 오르자 양봉이 문득 말했다.

“싸움터에는 즐길 거리가 적어 제가 놀이패를 약간 데려왔습니다.

모두 칼과 방패로 하는 춤을 잘 추니 불러다 이 자리에 재미를 더할 까 합니다.”

맹획이 그걸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자 금방 놀이패 수십 명 이 장막 안으로 춤추며 들어왔다. 모두가 풀어헤친 머리에 맨발이었 다. 그들이 손뼉을 치며 노래하는 소리는 흥겹기 그지없었다. 맹획 이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양봉이 문득 맹획 형제를 가리키며 아들 둘에게 시켰다.

“너희는 어서 저 두 분에게 술잔을 올려라.”

이에 양봉의 두 아들은 술잔을 채워 맹획과 맹우 앞으로 갔다. 두 사람이 그 술잔을 받아 막 마시려는데 양봉이 벼락치듯 소리쳤다.

“아들은 어서 그 두 역적 놈을 묶지 않고 무얼 하는가!”

그러자 양봉의 두 아들은 그대로 맹획과 맹우를 덮쳐 묶어버렸다. 놀란 타사대왕이 달아나려 했으나 그도 뜻 같지 못했다. 양봉이 덮 쳐 그 또한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껏 춤추고 노래하 던 놀이패들이 돌연 무서운 기세로 장막을 에워싸니 누구도 맹획 형 제나 타사대왕을 구하러 덤빌 수가 없었다.

맹획이 정신을 차려 그런 양봉을 꾸짖었다.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지는 법이니 같은 부류(동족)는 해치 지 말라悲 勿傷其類]는 옛말이 있다. 너와 나는 모두 같은 족 속의 동주들로서 지난날 아무 원한진 일도 없는데 어찌하여 나를 해치느냐?”

그러자 양봉이 타이르듯 그 말을 받았다.

“우리 형제며 아들 조카는 모두 제갈승상으로부터 목숨을 살려주 신 은혜를 입었다. 그 은혜를 갚을 길 없어하던 차에 마침 네가 모반 을 하니 어찌 너를 잡아다 승상께 바치지 않겠느냐?”

그리고 장막을 나가 먼저 각 동에서 불려온 장정부터 각기 제고 향으로 돌려보낸 다음 맹획 형제와 타사대왕을 끌고 공명의 진채로 갔다.

제갈공명을 찾아본 양봉이 그 앞에 엎드려 말했다.

“저희는 모두 승상의 은덕에 감복하여 여기 맹획과 맹우 및 그를 돕던 무리를 사로잡아 왔습니다. 작은 갚음이라도 될까 하여 승상께 바치오니 거두어주옵소서.”

공명은 그 뜻 아니한 선물에 매우 기뻤다. 한바탕 어려운 싸움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양봉이 그걸 피할 수 있게 해준 까닭이었다. 공명은 양봉 부자에게 큰 상을 내린 다음 맹획을 끌어오게 했다. 

“어떠냐? 이번에는 네 진심으로 항복하겠느냐.”

공명이 끌려온 맹획을 내려보며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맹획이 제 성을 못 이겨 소리쳤다.

“이건 당신이 잘해서 나를 사로잡은 게 아니오. 우리 종족 안에서 서로 해쳐 이 지경이 났을 뿐이외다. 죽이려면 어서 죽이시오. 이렇 게는 결코 마음으로 당신에게 항복할 수 없소!”

“너는 나를 마실 물 한 방울 없는 땅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아 천, 멸천, 흑천, 유천 같은 독물샘으로 우리 군사를 어찌해보려 했으나 우리는 아무 탈 없이 이곳까지 왔다.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 너는 어찌도 이토록 되지도 않을 일을 꿈꾸고 고집하느냐?”

공명이 별로 성난 기색 없이 차근차근 따져 대꾸했다. 거기에 힘 을 얻은 맹획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다시 떼를 썼다.

“우리 조상은 은갱산이란 곳에서 살았소이다. 그곳은 세 갈래강 이 있고 지나기 힘든 관이 겹쳐 지키기는 쉽고 둘러엎기는 어려운 땅이오. 당신이 만약 나를 한 번 더 놓아주어 그곳에서 사로잡는다 면 그때는 자자손손 진심으로 항복하고 섬길 수 있겠소이다.”

맹획의 짐작대로 이번에도 공명은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만은 짐짓 매섭게 하여 다짐을 받았다.

“좋다. 다시 한번 너를 보내주마. 가서 병마를 정비해 나와 한판 멋지게 승부를 겨뤄보자. 하지만 그때 사로잡히고서도 마음으로 항 복하지 않는다면 구족을 잡아 죽일 테니 그리 알아라!”

그러고는 좌우에게 일러 맹획의 밧줄을 풀어주게 했다. 다시 한번 풀려난 맹획은 이번에도 절하며 고마움을 표시하고 공명 앞을 물러 나갔다. 공명은 또 맹우와 타사대왕도 풀어주게 하고 술과 밥을 내 려 그들을 놀라게 했다. 두 사람은 송구스러워 감히 공명을 바로 쳐 다보지도 못했다. 공명은 다시 그들에게 안장 얹은 말까지 내어주어 돌려보냈다.

공명에게 풀려난 맹획과 그 무리 천여 명은 밤낮을 달려 은갱동 으로 돌아갔다. 은갱동은 맹획이 공명에게 말한 대로 밖으로 세 줄 기강을 겹으로 두르고 있었다. 노수(水)와 감남수(水), 서성수 (西城)가 그것으로, 세 줄기가 한 곳에서 합치고 있어 삼강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마을 북쪽으로는 거의 이백 리에 이르는 넓고 기름 진들이 있어 여러 가지 물산이 풍부했다. 또 그 서쪽 이백 리에는 소금광이 있었으며 서남으로 이백 리를 가면 노감(甘)에 이르고 정남 삼백 리에는 양도동(梁都洞)이 있었다.

은갱동이란 이름을 얻게 된 은(銀)은 그 동을 둘러싸듯 자리 잡은 산에서 나왔다. 그 산 이름이 바로 은갱산으로, 산 중턱에 궁궐과 누 각이 들어서 만왕의 거처가 되었다. 그 건물 가운데 조상을 모시는 사당의 이름은 ‘귀(鬼)’였고, 거기서 사철 소와 말을 잡아 지내는 제사 이름은 ‘복귀(鬼)’였다. 촉이나 그밖에 외지 사람을 제물로 써 서 그 제사를 지냈다.

그곳 사람들은 또 병이 나도 약을 먹을 줄 모르고 무당을 불러 푸 닥거리를 할 뿐이었다. 그 무당을 일러 ‘약귀(鬼)’라 했다. 형법도 없이 죄를 지으면 그저 목을 자르는 게 유일한 벌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혼인 풍습도 유별났다. 계집아이가 자라면 골짜기 로 가서 목욕을 하는데 그때 남자도 그녀들과 함께 섞여든다. 그리 고 거기서 서로 눈이 맞으면 짝을 정하는데 부모도 그걸 막지는 못 했다. ‘학예(學藝)’라고 이름하는 풍습이었다.

먹고사는 방식은 흉풍에 따라 달랐다. 비바람이 알맞아 농사가 잘 되면 벼를 심고 거두었으나, 벼가 익지 않으면 뱀을 잡아 죽을 쑤고 코끼리를 구워 밥 삼아 먹었다. 각 지방마다 가장 으뜸되는 이를 ‘동 주’라 부르고 그다음을 ‘추장’이라 불렀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삼 강성 안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혹은 서로 바꾸었다. 맹획이 돌아간 그 나라의 풍속이 대강 그러했다.

맹획은 자기 동에 돌아가자마자 피붙이와 그를 따르는 무리 천여명을 모아놓고 물었다.

“나는 여러 차례 촉병에게 사로잡혀 욕을 보았소. 이제 그 원수를 갚고자 하는데 누가 좋은 계책이 없겠소?”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제가 한 사람을 천거하겠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제갈량을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여럿이 보니 그는 맹획의 처남이요, 팔번부장(八番副將)인 대래동주(帶來洞主)였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맹획이 기뻐하며 물었다. 대래동주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가면 팔납동(八洞)이 있는데 그 동주는 목 록대왕(木鹿大王)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법술에 깊이 통해 있으며, 나다닐 때는 코끼리를 타고, 비와 바람을 마음대로 부른다 합니다. 언제나 호랑이와 표범, 늑대에다 독사며 전갈을 데리고 다닐 뿐 아 니라, 삼만의 신병(神兵)을 부리는데, 용맹하고 날래기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글을 닦고 예를 갖춰 그에게 도움을 청해보십 시오. 제가 직접 가서 목록대왕에게 졸라보겠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우리 청을 들어준다면 촉병은 조금도 두려워할 게 없을 것입니다.” 

이에 맹획은 처남의 말을 따라 그에게 글을 주어 팔납동으로 가 보게 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따라온 타사대왕은 삼강성으로 보내 그 곳을 지키면서 앞서 촉병을 막게 했다.

오래잖아 공명이 이끈 촉병들이 삼강성에 이르렀다. 공명이 삼강성을 살펴보니 세 방향은 강물이 둘러 있고 한 곳만 강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다. 공명은 위연과 조운에게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주어 뭍 길로 성을 치게 했다.

위연과 조운이 성 아래 이르자 성벽 위의 적군이 활과 쇠뇌를 비 오듯 쏘아 붙였다. 원래 은갱동의 사람들은 활과 쇠뇌를 익혀 솜씨 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쓰는 쇠뇌가 또한 유별났다.

한 번에 화살이 열 대씩 날아가는데 화살 끝에 묻은 독이 끔찍했 다. 그 화살에 맞으면 온몸이 썩어 창자를 내보이고 죽게 된다고 했다.

조운과 위연이 아무리 맹장이라 해도 그런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 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적병이 굳게 성문을 걸고 들어앉아 활과 쇠뇌만 쏘아대는데, 그 화살 끝에 무서운 독이 발려 있어 어쩔 수 없이 물러났습니다.”

조운과 위연이 돌아가 그렇게 말하자 공명은 몸소 작은 수레에 올라 성 아래로 가보았다. 그리고 무엇을 살피는지 한참을 살피다가 진채로 돌아와 영을 내렸다.

“진채를 십 리쯤 뒤로 물려라.”

이에 촉병들은 십 리나 물러나 다시 진채를 세웠다. 촉병들이 갑 자기 멀리 물러가는 걸 본 만병들은 기세가 오를 대로 올랐다. 큰 소 리로 웃고 떠들며 서로 치하를 주고받았다. 병이 두려워서 물러간 걸로 생각한 까닭이었다.

한편 공명은 군사를 물린 뒤로 진채의 문을 굳게 닫고 일체 나오 지 않았다. 하루이틀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도 아무런 영을 내리지않다가, 닷새째 저녁 무렵 왼쪽에서 가벼운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비로소 영을 내렸다.

“모든 군사들은 옷 한 벌씩을 따로 마련해 일경 때까지 점고를 받 도록 하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리라!”

그 갑작스런 영에 군사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 도 아닌 공명의 영이라 감히 어기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따랐다. 군사들이 모두 옷 한 벌씩을 따로 마련해 정한 시각에 모이자 공 명이 다시 영을 내렸다.

“군사들은 모두 그 옷에 흙을 채우고 삼강성 아래로 모이라. 먼저 이른 자에게는 크게 상을 내리리라!”

그러자 군사들은 모두 가지고 있던 여벌 옷에 흙을 채우고 나는 듯 삼강성 아래로 달려갔다. 공명이 다시 그들에게 소리 높이 외쳤다. 

“모두 성벽 아래 가져온 흙을 쏟고 성벽으로 오르라. 먼저 성벽 위에 오르는 자의 공을 으뜸으로 치리라!”

이때 병의 수는 원래의 군사 십만에 항복한 군사 일만을 합쳐 십일만이나 되었다. 한꺼번에 들고 있던 흙을 성벽 아래 쏟으니 금 세 흙으로 된 산이 성벽으로 이어졌다. 촉병들은 한소리 군호를 정 해놓고 거기 맞춰 일제히 성벽 위로 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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