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9권 5화 – 나예린의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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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9권 5화 – 나예린의 결의

나예린의 결의

-분노! 떨어져 내리다!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이런 높은 곳은 딱 질색인데!’

당당하고 꼿꼿하게 서 있는 자세와 달리 그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마하령은 나무 위가 정말 싫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면서도 좀 달랐다. 왜냐하면 이 나뭇가지들은 그녀의 ‘존재’를 버티지 못하고 언제든지 부러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마치 모래로 쌓은 불안정한 탑 위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불안한 기분이었다.

‘그냥 다시 내려갈 수도 없고.’

절친한 친구들의 반대까지 무릅쓰고 자신에게 총회주 자리를 맡기겠다는 용천명의 결단이 쉽지 않았을 것임은 마하령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쥐 고 있는 권리를 남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어지간하면 하기 힘든 결단이었다. 용천명이 그토록 위험 속으로 몸을 던지는데 그녀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벌써 들켰고.’

기척을 죽이느라 한 발씩 한 발씩 조심조심 옮겨서 겨우 꼭대기까지 간신히 올라왔는데 그만 들키고 만 모양이다.

“형편없는 은잠술이군! 그래서야 어디 기습 한 번 제대로 하겠어?”

갈효효가 마하령 쪽을 올려다보며 기세 좋게 외쳤다.

“허세는.. 너도 내가 지적할 때까지는 까맣게 몰랐지 않느냐?”

보다 못한 갈효민이 핀잔을 주자 갈효효는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사소한 일에는 우리 신경 쓰지 말자고, 언니.”

“그게 사소한 일이더냐? 정말 너는 때때로 할 말을 잃게 만드는구나.”

넉살 좋은 동생의 말에 갈효민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마하령은 속으로 다시 한 번 욕설을 퍼부었다.

기습이라는 것은 의외성이 생명이다. 때문에 기습할 때까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해야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하령은 이미 자기가 곧 기습하겠다는 것을 만천하에 광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기습의 이점은 송두리째 빼앗긴 거나 다름없었다.

“크하하하, 아가씨. 다 큰 처자가 그런 데에 있으면 엉덩이가 무거워서 가지가 부러질 거요! 위험하니까 빨리 내려오는 게 어떻소이까?”

신마팔선자와 함께 온 흑견대의 제이대 부대장 맹견이 어느새 포위망을 좁히고 아까보단 좀 더 가까운 곳으로 다가와 실실 웃음을 쪼개며 농지거리를 던졌다. “푸하하하하하하!”

그러자 주위에 모여든 나머지 흑견대 대원들의 입에서 일제히 폭소가 터져 나왔다.

“저런, 저런! 저 아가씨 계속 저기 서 있으려면 살 좀 빼야겠네그려.”

“크하핫! 비록 나뭇가지가 부러져 버릴 정도로 커다란 엉덩이라도, 내 팔로는 거뜬히 안아줄 수 있는데 말이야!”

여기저기서 조롱 섞인 음담패설이 오갔다.

비밀 통로 안에서 그 광경을 엿보고 있던 진령을 비롯한 여인들의 얼굴까지도 새빨갛게 변했다. 부끄럽다기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마음 때문이었다.

흑견대로서는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어 당황하게 만들려는 심리 공격의 일환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자신들이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다는 사실 을.

빠지지지지지지직!

“닥—쳐—라 !”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이 천한 것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무시무시한 기백이 마하령의 온몸에서 뻗어 나왔다.

한참을 포복절도(抱腹絶倒)하며 웃다가 다시 마하령을 올려다본 흑견대 대원들은 ‘헉!’하고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나무 위에는 두 눈에서 푸른 귀광(鬼光)을 번뜩이며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는 나찰(羅刹)이 한 명 서 있었던 것이다. 푸른 귀화가 번뜩이는 마하령의 두 눈이 맹견을 향했다.

“흐헉!”

그 기세가 어찌나 무시무시했던지,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자부하던 맹견과 흑견대 대원들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헉, 저거 큰일 났군!”

심지어는 용천명마저 안색이 더더욱 창백해져서 청흔과 백무영 등에게 다급한 기함을 토했다.

“정신 바짝 차리게!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

그 기함이 채 끝나기도 전.

“이—천─한—! 것드—을! 죽—어—라!”

부웅!

나뭇가지를 박찬 마하령의 몸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만(萬)―근(斤)―추(錘)!”

슈화아아아아아악!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공기의 단층을 찢고 마하령의 몸이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솟아오르는 속도가 줄어드나 싶던 찰나, 대지를 향해 급전직하하며 떨어지기 시작한 그녀의 몸은 마치 쏘아진 대포알 같았다. 저 찍기에 당하면 맹견은 그 자리에서 피떡이 되고 말리라. 그러나 그에게 닿기에는 그녀의 낙하가 너무나 정직하고 올곧았다.

“뭐…… 뭐야, 괜히 쫄았잖아…….?

얼른 몸을 피하는 동시에 맹견이 소리쳤다.

“헹, 바보 같은 계집이군 그래!”

아무리 위력이 세다 해도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가히 폭발적인 마하령의 기세에 긴장했던 맹견의 얼굴에서 한순간 긴장이 풀려 나가며 안심한 기색 이 떠올랐다.

마하령이 수직으로 떨어지기 시작하고 맹견이 몸을 피하며 비웃던 바로 그때, 용천명이 급히 외쳤다.

“지금일세!”

용천명의 신호에 맞춰 청흔과 백무영이 그 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자신들이 뛰어오를 수 있는 한계 높이까지.

그 순간, 포탄처럼 떨어져 내리던 마하령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넌 이제 죽었어, 이 개자식아!’

쾅!

만극추의 공력으로 떨어진 마하령의 두 다리는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포위망의 한가운데를 강타했다.

천축유가신공(天竺瑜伽神功)

상급 비전(秘傳)

증량비공(增量秘功)

만근추萬斤錘) 오의

지진각(地脚)

대지(大地)의 파도(波濤)

쿠르르릉!

무시무시한 진각이 대지에 작렬함과 동시에 굉음이 울려 퍼지며 대지가 요동쳤다.

순간 대지가 출렁출렁 물결치더니, 대지의 너울이 사방을 향해 동심원처럼 펼쳐졌다. 이윽고 흙더미의 물결이 파도치듯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대지의 파도는 진각으로 대지에 충격파를 주어, 다수의 적들이 딛고 있는 발밑을 효과적으로 뒤흔드는 광역 타격 기술이었다. 대지의 파도가 밀려 나가자 사방을 둘러싼 흑견대의 발밑이 흔들리며, 그들의 균형이 일제히 깨지고 말았다.

“지금입니다! 나갑시다!”

완전히 붕괴하기 시작한 비밀 통로의 입구로부터, 때를 놓치지 않고 우르르 구출대가 뛰쳐나왔다. 이어 그들은 번개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주위를 포위하고 있 던 흑견대에게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대지의 파도는 적들에게 단번에 치명타를 입히기는 힘든 기술이지만, 포위망을 일시적으로, 그리고 기습적으로 뒤흔들 때 매우 유용한 기술이 아닐 수 없었다. 진 이 일순간이나마 붕괴되는 순간, 포위망은 더 이상 포위망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대비하고 있던 자와 대비하고 있지 않던 자의 차이는 컸다. 특히나 그 한순간을 기다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이들에게는 말이다.

구출대의 일제 공격에 반 정도는 멀쩡했던 흑견대 제이대가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계집의 몸에서 어떻게 이런 묵직한 공격이!”

망연자실한 어조로 맹견이 신음성을 토했다. 그 혼자는 어찌저찌 가까스로 자세를 잡았지만, 부하들은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며 데굴데굴 구르는 꼴이 처참하 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빠직!

그 탄성 아닌 탄성에 마하령은 푸른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폭갈했다.

“감히 여성의 몸무게에 대해서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이 비천한 것!”

무시무시한 살기가 마하령의 전신에서 맹렬히 뿜어져 나왔다.

“예의를 밥 말아 먹은 놈한테는 매가 약이지!”

요동치는 대지 위에 굳건히 선 채 마하령이 외쳤다.

“아니, 날씬하고 아리따우신 소저님! 조금 전엔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

맹견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한기가 내달렸다.

“여자의 몸무게를 물고 늘어지는 자에게 천벌이 내릴지니!”

마하령이 살벌하게 웃으며 쿵, 하고 진각으로 대지를 찍었다.

천축유가신공(天竺瑜伽神功)

오의

붕산진각(山鎭脚)

콰지지지직!

쿠콰콰콰콰콰콰콰!

대지에 생긴 금이 달려나가더니 맹견이 서 있던 땅바닥이 마치 널뛰기 판처럼 마하령을 향해 솟구쳤다. 진각에 의해 땅바닥이 솟구쳐 오르다니, 가히 한 번의 진각 으로 산도 허물어뜨릴 기세였다.

맹견의 몸은 마하령 쪽을 향해 공처럼 날아왔다. 대지가 그녀에게 선물이라도 던져주려는 듯한 광경이었다.

“환영해 주마!”

마하령은 웃으면서, 기꺼이 날아오는 선물을 주먹으로 받았다. 그러자 마치 산이 덮쳐 오는 듯한 묵직한 충격이 맹견의 전신을 강타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뿌드득, 뿌드득!

뼈와 살이 분리되는 효과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스윽!

흰자위를 드러내며 쓰러진 맹견의 위로 마하령이 발을 들어 올렸다. 단 한 번의 짓밟음으로 맹견을 묵사발로 만들기 직전이었다.

“나으리! 아, 아니, 소저님! 자, 잠깐 이야기를.. .!”

죽음의 예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번쩍 눈을 뜨며 맹견이 발광하듯 외쳤다.

“소저님은 바빠서. 잘 가라.”

퍽!

상큼한 목소리와 함께 마하령의 진각이 맹견의 머리통을 향해 떨어졌다.

쩌저저적!

“히익! 꽥!”

그러나 깊숙한 발자국이 새겨진 것은 맹견의 머리통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대지였다. 일부러 빗맞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견은 이미 꼴사납게도 게거 품을 물고 완전히 기절하고 말았다.

“흥, 간도 작은 주제에.”

맹견을 반쯤 죽여놓은 마하령은 아쉬운 듯 몸을 돌려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다른 구출대원에 비해 그녀는 파문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훨씬 더 움직이기가 원활했던 것이다.

“시간이 없습니다. 저들이 재정비하기 전에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도록 하죠.”

나예린이 외쳤다.

대다수의 흑견대원이 쓰러진 지금, 이 한순간의 틈이면 포위망을 뚫기에 충분했다.

으아아악! 크악! 아야! 크엑!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천명의 사자후에 이어 마하령의 진각까지, 두 번이나 흔들렸던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일어선 흑견대 대원들은 일제히 쇄도해 오는 구출대에 의해 또다시 짚단 인형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도 구출대 모두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마 이삼 주 정도 정양을 하면 나으리라. 사정을 봐준 손속의 강도는 그 정도였다. 구출대원 대다수는 어느새 포위망을 거의 뚫어가고 있었다.

그중에는 물론 면사를 두른 옥유경, 그리고 기절한 장소옥을 허리에 낀 무명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경황 중이라 기척마저 숨긴 이들의 존재를 눈치챈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모든 이가 일제히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경공을 전개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구출대는 간신히 매복하고 있던 포위진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단 한 사람, 나예린을 제외하고.

***

“우와! 무진장 예쁘다!”

신마팔선자의 막내 갈효묘는 앞을 막아선 나예린의 자태를 보자마자 감탄성을 터뜨렸다.

“막내야, 체신머리없게 갑자기 무슨 말이냐! 신마가의 격을 떨어뜨리지 마라.”

“하지만 진짜 엄청 예쁘잖아? 언니들도 예쁘긴 하지만 저만큼 예쁜 사람은 없는걸. 물론 효효 언닌 예외고!”

“오, 동생, 난 예외라니! 그럼 난 저 애보다 예쁘단 얘기지?”

갈효효가 반색하며 반문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연히 언니들 중에 효효 언니만 안 예쁘단 얘기지.”

“이 녀석, 시비 거는 거였냐!”

갈효효가 발끈해서 소리쳤으나 갈효묘는 나예린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둘을 무시하며 갈효민이 약간 놀랐다는 어조로 물었다.

“단신으로 남다니 배짱이 대단하구나. 혹여 소위 백도의 무리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고작 너 하나를 희생양 삼아 던져두고 도망간 것은 아니겠지?”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이리 할 것이라 미리 말했다면 모두들 말렸겠지요.”

나예린은 마하령과 상의하면서, 탈출 계획의 마지막은 맡겨두라는 말만 한 후 일부러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 포위망 탈출 계획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누군가 남아 서 절정고수들의 발목을 잡아둬야 한다는 것을.

“그저, 누군가는 남아서 세 분의 추격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이 아니라 둘이에요! 언니들이면 충분할 테니까 전 예쁜 언니를 공격하지 않을게요!”

갈효묘가 손을 번쩍 들고 방긋방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넌 좀 빠져라, 막내야. 그리고 그게 적에게 할 말이냐?”

갈효효가 인상을 구기며 철없는 막내를 뒤로 밀어내고는 나예린에게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스스로 지원한 거라고? 다른 애들한테는 말도 하지 않고?”

“네.”

나예린이 조용히 긍정했다. 씨익 웃기 시작한 갈효효의 미소는 이내 유쾌한 웃음으로 바뀌어 나왔다.

“하하하하! 십중팔구 사석(死石)이 될 텐데도?”

웃음과는 달리 나온 말은 살벌했다. 해석하자면, 넌 곧 죽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사석이 될 마음은 없습니다.”

“풉,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패기도 있고, 미모도 대단하고, 쳐죽일 놈의 나 가(家) 똘마니만 아니었으면 참 괜찮았을 텐데 말이야! 여자인 나조차도 두근거릴 정도 인데, 아깝네.”

뒤에서 작게 ‘변태’라는 소리가 들렸다. 보나마나 막내의 소행이 분명했다. 한 대 쥐어박을까 하는 시선으로 돌아본 갈효효가 막내에게 눈을 부라리자 갈효민이 대신 말을 이었다.

“너 정도의 미모를 지닌 아이이니 분명 강호에 이름이 났을 터, 이름이나 한번 들어보자꾸나.”

“나예린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숨길 마음이 없었기에 나예린은 똑바로 말했다.

“뭣? 그럼 네가 바로 그 증오스런 개잡종 나백천의 딸이란 말이냐!”

고개를 홱 돌린 갈효효의 기함과 함께, 폭발하는 듯한 증오와 분노의 소용돌이가 나예린을 후려쳤다.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

“어? 그럼 네 아비가 나백천 그 개잡종이 아니라고?”

“존함은 맞습니다만, 제 아버지는 누구보다 이 강호를 사랑하고 아끼시는 분입니다. 절대로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 말이 지금 갈효효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문했다.

“닥쳐라! 나 씨의 피를 이어서인지 말하는 것이 간교하구나! 네가 그 흉적의 딸인 이상, 너에게 오늘 살아갈 길이 없다는 건 각오했겠지?”

찌를 듯한 살기가 나예린의 전신을 향해 쇄도했으나, 그녀는 꼿꼿한 자세로 갈효효를 응시할 뿐이었다.

“저는 한 사람에게 제 목숨과 제 몸을 소홀히 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제 목숨을 함부로 던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갈효효는 나예린의 당당한 선언에 문득 할 말을 잃었다. 그 뻔뻔하고도 대담한 모습에 기가 차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한편, 무심결에 감탄하는 마음까지도 한 데 뒤섞인 것이다.

“.아, 됐다! 덤비거라! 음, 그런데 너는 하나고 우린 셋인데 어쩔 셈이냐? 뭐, 설마 혼자서 상대할 거니까 우리 셋 다 한꺼번에 덤비라는 건 아니겠지?”

갈효효가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것인지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모를 말투로 피식 웃으며 물었다.

“정하시는 대로 상대할 것입니다.”

딱 부러지는 투로 한 나예린의 말에 갈효효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은 비웃음이라기보다는 맹수의 미소를 연상케 했다.

“호오, 정말이지? 그 말대로라면, 한꺼번에 공격해도 혼자서 막을 기세구나?”

“필요하다면요.”

결연한 얼굴로 막힘없이 답하는 나예린의 대꾸에 갈효효는 더 참지 못하고 홍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여인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호쾌하면서도 낭랑한 웃음이었다.

“호오ᅳ 정말 대단한 의기구나! 너처럼 담이 큰 여자아이를 만나기란 정말 쉽지가 않지. 좋다! 신마팔선자의 일곱째, 나 갈효효가 직접 상대해 주마! 너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 암, 있고말고!”

패기 넘치는 장담을 하며 은금을 들고 갈효효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 순간, 원수의 핏줄에 대한 증오보다는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이 더 높아져 있었다.

“칠매, 또 함부로 호언을 하는구나. 이런 중요한 때에!”

못마땅한 어조로 여섯째인 갈효민이 힐책했다. 옆에 선 갈효묘도 뚱한 얼굴로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아아, 미안, 미안. 하지만 이렇게 멋진 아가씨랑 만났는데 한번 실력을 구경하지 않으면 안 되지 않겠어? 어차피 차가운 송장이 되어버릴 운명이라는 게 비극이지 만 말이야.”

그저 말만 들으면 사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말투였다.

갈효민도 한 번 내뱉은 말을 거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이렇게 해치우나 저렇게 해치우나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십초 안에 끝내거라. 그 후엔 즉시 다른 흉수들을 추적하겠다.”

“겨우 십 초? 너무 짧은 거 아냐?”

“그것도 많이 봐준 것이다. 칠매, 벌써 잊었느냐?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너는 슬픔에 잠기신 어머님들을 이 이상 기다리게 할 셈이냐?” 갈효민의 말은 거부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 그건 그렇군. 그래도 십 초라니…… 째째녀.”

“뭐라고 했느냐?”

“아냐, 아무것도.”

갈효효가 시침을 떼며 딴 곳을 바라봤다.

“십 초라.. 세 분 모두 그보다는 더 많이 잡는 게 좋으실 겁니다.”

차분한 어조로 나예린이 경고했다.

“둘이에요, 둘! 저는 예쁜 언니를 공격하지 않는다니까요?”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었는지 갈효묘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며 끼어들었다.

“넌 좀 함부로 끼지 좀 마라! 이 철딱서니 없는 고양이야!”

또다시 끼어든 막내의 뒷덜미를 잡아 고양이를 옮기듯 다시 뒤로 보낸 다음, 갈효효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너랑 좀 더 어울려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니 애석하구나. 하지만 어쩌겠어? 언니가 까라면 까야지.”

“괜찮습니다. 저희는 당신들에게 쫓기지만, 모든 사람은 항상 시간에 쫓기는 법이니까요.”

이해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재미있는 아이구나. 좋다, 나도 널 인정하는 의미에서 전력으로 상대해 주마.”

쿵!

갈효효가 들고 있던 은금을 세워 땅에 내려찍자, ‘퉁!’ 하는 소리와 함께 은금의 안에서 두 개의 긴 막대기가 하늘로 솟구치듯 튀어나왔다. 그녀는 양손을 뻗어 두 개의 막대기를 번개처럼 잡아채더니,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로 연결했다.

붕붕부―웅! 지이이이이이이이잉!

허공에 풍차(風車)처럼 돌린 장창을 나예린에게 겨누자, 은빛 창날이 매미의 날갯짓처럼 떨리며 울음을 토해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그녀를 중심으로 질풍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갈효효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몸통과 날 끝이 모두 은백색으로 빛나고 있는 한 자루의 은창(殷昌)이었다. 창날 끝에는 붉은색의 수실과 함께 특이하게도 세 개의 은으로 만든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찌링찌링, 삼은령(三銀鈴)이 흔들리며 맑은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서 나랑 놀자, 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 은창이 당신의 진짜입니까?”

“그래, 금이야 신부 수업으로 덤으로 배웠던 것뿐이지. 이 창이야말로 내가 수십 년 동안 갈고닦은 나의 진짜 힘이다.”

확실히 단지 기수식만 잡고 있을 뿐인데도 나예린은 전신을 압박하는 무형의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절세의 검객을 만났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 공 기를 가득 메웠다. 갈효효, 그녀는 절세의 창객(槍客)이었다.

“자, 한번 거나하게 어울려 보자꾸나.”

한창 기세등등하게 분위기를 잡고 있는데 뒤에서 갈효묘가 안달한 목소리로 외쳤다.

“꺽다리 언니, 예쁜 언니한테 너무 심하게 하면 안 돼!”

갈효효는 그 소리에 하마터면 다리가 꺾일 뻔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막내부터 요절을 내놓을까 순간 갈등하는 사이, 다행히 갈효민이 준엄한 목소리로 호통 을 쳤다.

“막내야! 지나치구나! 넌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이느냐? 네 근본이 신마가에 있다는 것도 잊었단 말이더냐? 큰 오라버님의 흉수가 누군지도 잊었단 말이더냐!” 갈효묘는 그 호통 소리에 어깨를 움찔하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닫았으나, 효민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속으로 탄식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큰 오라버니의 원수를 갚기 위한 여정이었다. 결코 그 안에서 본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들끓는 무인의 피도 억눌러야만 했고, 흉수 들의 틈에 마음에 드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그들의 살가죽을 남겨둬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철없는 늦둥이 여덟째는 애초에 큰 오라버님과 마주한 시간도 거의 없었을뿐더러, 나머지 일곱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게다가 겨우 열여섯밖에 안 되니…….”

너무 애지중지 오냐오냐 키우다 보니 장난기만 늘고 버릇이 너무 나빠졌다. 아무리 무에 대한 재능이 천부적이라고는 해도, 아직 이 철부지 막내만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막내, 넌 앞으로도 절대 나서지 마라. 나한테 맞든 언니한테 맞든, 아니면 저 아이한테 다치든 하면 우리도 어머니한테 맞아 죽을 테니까.”

나예린을 주시하는 자세로 갈효효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십이할 정도는 진실이었다. 효묘와 효효는 같은 어머니한테서 태어났지만, 어떨 때는 정말 차별 대우가 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일에 불만을 품고 어리광을 부리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 있었다.

다만, 신마가의 법도를 어기거나 도를 넘어서는 동생을 엄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고 갈효효는 웬만하면 자신이 그 엄벌을 내리는 주체가 되기는 싫었 다. 법도에 따라 처벌을 하지 않으면 그녀도 문책을 받게 될 것이고, 법도에 따라 처벌을 한다 해도 나중에 어머니의 눈총을 사게 되는 건 매한가지여서였다. “내, 내가 언제 놔주라고 했나? 그냥 저 예쁜 언니를 고이고이 잡아가자는 거지! 꼭 지금 당장 다치게 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절대 지지 않겠다는 듯, 여전히 철없는 말을 변명이랍시고 해대는 갈효묘였다.

“하아, 이 철부지가 우리 말을 순순히 들을 리가 없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갈효효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갈효민 역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커흠, 많이 기다리게 했구나. 추태를 보였다.”

나예린 앞에 마주 선 갈효효가 효묘의 말들은 잊어달라는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자, 오너라!”

드디어 나예린은 신마팔선자 중 가장 창을 잘 쓴다는 은창선녀(銀槍仙女), 갈효효와 싸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상하리만치 두려움이 생기지 않 았다. 대신 그녀의 마음속을 맴돌고 있는 것은 자신감이었다.

‘할 수 있어!’

그 자신감에 감응한 것일까?

개안(開眼).

용안(龍眼)이 열리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정보가 그녀에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주변의 모든 것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는 물론 공기의 흐름조차 도 그녀는 명확하게 지각할 수 있었다. 이 주위의 모든 정보가 그녀의 손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용안은 예전보다 더욱 깊어졌다. 그녀의 시야는 지금 범인(凡人)들은 도저히 볼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용안이 완전히 개방되었구나!’

그녀의 몸을 비롯해 주위의 모든 것이 그녀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낱낱이 보이고,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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