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1014화


1449화

하나의 초식만을 남겨 뒀다고 말하는 마르텔.

어쩐지 그 모습이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작별 인사처럼 들렸다. 오죽하면 바짝 날을 세우고 있던 클라인 백작을 숙연하게 만들 정도다. 하지만 마음이 무겁기로는 검후만 한 사람이 없었다.

애써 담담한 척 무던한 표정이지만, 이드가 느끼기에 고요한 숨소리가 유독 무거워 보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검후가 지금 상황에 눈을 돌릴 인물은 또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무기를 쥔 손을 단단히 하며 더욱 기도를 가다듬었다. 마르텔이 바라던 ‘용감한 죽음’을 내려 주려는 것일까.

이드도 가만히 숨을 골랐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아나크렌의 역사서의 한 페이지를 채우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순간을 함께한다는 것은 그로서도 꽤 가슴 떨리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탁받았던 일에 소홀할 수는 없다.

이드는 다시금 은색 기사단의 전투를 살폈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여전히 은색 기사단이 미쳐 날뛰고 있다. 잠시 눈길을 거두더라도 큰 위험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없을 게 분명하다.

전황은 이미 은색 기사단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기 때문이다. 이드가 살피는 이 순간에도 적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일분일초가 지날 때마다 은색 기사단이 더더욱 유리해지고 있었다.

아군의 전력은 유지되고, 적의 전력은 줄어든다.

이런 상황에 시간이 더해지면 은색 기사단은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드의 짐작으로 대략 10분.

그때까지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자신이 나서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

아, 물론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으니,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사고는 항상 방심한 순간 일어나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이드는 이번 전투에서는 안심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기 전장의 중심에서 꼼꼼하게 전투를 지휘 중인 쉴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케마란! 네리베르! 전선을 유지해! 산드라, 애송이들의 고삐를 잡지 않고 무엇하나! 엘리나 경! 후방 경계!”

“충!”

“하고 있다고요, 단장! 거기 애송이들, 당장 뒤로 빠져!”

평소 조용한 편에 속하던 그녀는 전투 상황이 되자 다시 없는 수다쟁이가 되어 쉬지 않고 소리치고 있었다.

‘응,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 전투는 쉴라에게 맡기고 마르텔이 보여 줄 마지막 절초에 온전히 집중해 보자.

그런 마음에 편한 자세로 팔짱을 끼던 차였다.

“아마 마지막 남았다는 초식의 위력이 가장 강력하겠죠?”

일리나가 물었다.

안 그래도 한 명의 무인으로서 마르텔이 창안한 검법에 관심이 없을 수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저와 꼭 닮은 검법이 있다지 않은가. 오랜만에 일리나의 호기심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이드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의 말씀이라고 무시할까. 사랑하는 아내가 원한다면 당장 그림까지 그려 가며 설명할 자세가 되어 있다.

이드는 마지막 공방이 시작되기 전, 빠르게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마르텔이 보여 준 검법의 초식 구성으로 볼 때, 검의의 깊이와 초식의 복잡성에 따라 위력이 계단식으로 상승하는 형태였으니까요. 모르긴 몰라도 마지막 남겨 둔 초식이 그가 보여 줄 수 있는 최강의 초식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봐야겠죠.”

무공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착각들을 한다.

첫 초식이 가장 약하고 마지막 초식이 가장 강하다고. 이러한 선입견이 생겨난 원인에는 마법의 영향이 지대했다. 마법이야말로 가장 체계화된 분야 중 하나였으니까.

클래스가 높아질수록 위력이 강력해지는 마법. 클래스의 차이는 가히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지식은 그레센에 있어 그야말로 기본 상식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무공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검법은, 무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마법도 그러하겠지만, 검법은 그 안에 든 아주 작은 초와 식에서부터 어디에 어떻게 쓰여야 할지 정해져 있었다. 적절한 용도에 쓰이지 않은 초식은 그 효용과 위력이 급감하다 못해 오히려 파탄이 날 수도 있었다.

무공에 있어 가장 강력한 초식은 파괴력이 엄청난 초식이 아닌, 적을 죽일 수 있는 최선의 초식이었다.

막말로 마지막 초식의 위력이 가장 강력하다? 그럼 나머지 초식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서로 마주 서서 각자 가진 최강의 초식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싸움이 끝날 테니까.

대규모 전투에 있어서도 그 하나의 초식만 연사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겠나.

하지만 그 어떤 기사도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최강의 초식이 언제나 최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무공의 초식은 마법처럼 후반으로 갈수록 꼭 위력이 높아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창안자의 구상에 따라 전반이나 중반에 가장 파괴력이 강한 초식을 배치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창안자도 세간의 인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기 때문일까.

후반에 강한 위력을 가진 초식이 배치되는 무공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기도 했다. 마르텔의 무공 역시 이런 구성을 따르고 있었다.

일리나의 짐작이 옳았다는 말이다.

“어떤 형태였어요? 이드가 알고 있다는 그 축융검법의 마지막 초식 말이에요.”

아무래도 그녀는 이드가 알고 있다는 검법과 마르텔의 검법을 비교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드의 마음 또한 다르지 않았다.

“축융검법은 전 6식, 중 6식 후 6식으로, 총 18식으로 구성된 검법이에요. 보통 강맹한 검의를 내포한 검법은 초식이 단순한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죠. 제 생각에는 축융검법이 도교라는 종교 의식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초식의 구성은 차이가 확실하네요. 마르텔의 검법은 각 식이 5개로 구성되어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18과 15.

그사이에 숨어 있는 3의 차이.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숫자, 3.

축융검법과 마르텔의 경우에서는 후자에 속했다.

“3개 초식이 모자라긴 하지만, 사실 큰 차이는 없어요. 오히려 실전성만 본다면 마르텔의 검법이 옳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3은 도교라는 종교와 축융이라는 신에 대해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가져오는 숫자인 거죠.”

그렇게 초식 구성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한 이드는 축융검법의 최후 절초인 축융만세에 대해 말했다.

축융만세祝融滿勢).

축융의 복을 세상에 가득 채운다는 이름의 의미처럼, 초식이 닿는 범위를 모두 검염으로 채워 내는 광범위 초식이었다. 이렇게만 들으면 대인 공격기로는 어울리지 않는 초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하나의 적이 아닌, 집단을 상대함에 어울리는 초식이 바로 축융만세니까.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만약 단점이 그렇게 분명했다면 형산파가 자랑하는 축융검법의 최후식이 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일단 세상을 가득 채운 축융의 불길은, 특이하게도 하나로 뭉치는 강력한 응집성을 가진다. 당연히 이 응집력의 중심에는 땔감이 놓이게 되는데. 이때 땔감으로 선택되는 것이 시전자의 적이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천지사방에서 불길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 같은 거죠.”

“마치 블레이즈 마법 같네요.”

“뭐, 비슷해요, 축융만세의 무서운 점은 적의 호흡을 끊어 낸다는 데 있어요. 사방을 가득 채우는 불길에 양강의 경력이 담기거든요. 그걸 호흡을 따라 흡입하게 된다면…….”

“그러면요?”

“폐가 타 버리죠. 이후엔 내장이 차례대로 익고요.”

입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것 같은 손동작을 보이는 이드에 일리나는 고개를 잘래잘래 저었다.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한 최후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드는 축융만세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거기서 마쳐야 했다. 

“마르텔의 마지막 초식도 그와 같다면, 시르피도 방심할 수 없겠네요.”

옳은 말이다. 그 어떤 무인도 인간인 이상 호흡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특히나 격렬한 움직임에 더해 면면부절 끊기지 않는 내공을 위해서라도 더욱더 중요한 것이 바로 호흡이다.

“그렇긴 하지만, 대응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죠. 만약 일리나라면 어떻게 할래요?”

“저라면 검막으로 검염을 막은 후, 정령을 불러 열독을 막고, 혈화, 분영, 멸혼으로 적의 목을 치겠어요.”

“가장 까다로운 열독을 정령으로 막아 내는 거네요.’

“틀렸나요?”

“전혀요. 정답이에요. 각자 가진 능력을 최대한 사용해야죠..

애초에 정령이나 마법을 제외해야 한다는 조건을 넣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일리나처럼 정령을 부리지 못하는 검후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마르텔이 강요하기 직전이다.

“크하~”

곧이어 마르텔이 움직였다.

그는 뜨거움 숨결과 함께 십 미터 높이로 타오르는 검염을 사방으로 뿌리며 검후를 조여들었다.

‘축융만세와는 조금 다른가.’

이드는 그 형태를 보고 눈을 빛냈다.

분명 그의 최후 초식은 축융만세와는 다른 부분이 있었다. 천지사방을 축융의 불로 채우는 축융만세와 달리, 마르텔의 것은 길게 뻗은 검염이 밧줄처럼 검후를 휘감으려 했기 때문이다.

같은 점이 있다면 거기서 전해지는 열기와 열독.

그 부분을 제외한다면 마르텔의 초식은 집단이 아닌, 단 한 명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초식 같았다.

마르텔은 이 검법을 검후를 상대로 처음 세상에 내놓는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오직 검후를 상상하며 가다듬었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 목적성 때문에 최후 초식의 형태가 이렇게 갈려 버린 것이고.

‘나쁘진 않아. 나쁘진 않은데……………?’

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

아무래도 쌓아 온 시간의 차이일까. 검후에 대한 열망이 축융만세와 완성도 면에서 차이를 만들어 냈다.

형태가 있는 것은 자르면 그만인 것.

“이것이 네 무공에 대한 내 답이다.”

백화난무.

진한 꽃향기와 함께 검후의 검에서 뿜어진 강기의 검막이 부풀어 올라 그녀를 옥죄려 하던 검염의 감옥을 저 멀리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초식의 묘용이나, 검식의 우수성 등과는 상관없는 오직 힘의 차이였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