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10화 – 아무도 없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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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2권 10화 – 아무도 없는 밤


비디오가 끝났다. 동민은 다 본 비디오테이프를 감을까 하다 가 마음을 바꾸고는 리모컨을 소파 위에다 던졌다. 어차피 재미 없는 영화였는데 뭐・・・・・・・ 동민은 창밖으로 저물어 가는 해를 힐 끗 쳐다보면서 냉장고로 향했다. 해는 서산 너머로 저물어 저녁 하늘에 붉은 자국을 천천히 남기며 어두운 장막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곧 밤이 될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밤이……………

요즘 부모님은 신혼 기분을 내는 모양이다. 외아들인 동민이 귀여운 맛도 없어졌을 만큼 성큼 자라 버리고, 머리가 희끗희끗 하게 변하기 시작하는 지금도 두 분은 사이가 퍽 좋았다. 오늘처 럼 날씨가 좋은 토요일 밤에는 두 분이 함께 외출하시는 일이 다 반사였다. 물론 동민이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동민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난 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동민을 남 겨 두고 외출을 하셨다. 그럴 때면 동민은 왠지 외로운 기분도 들었지만, 자신이 다 컸다는 생각을 하며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 이곤 했다. 부모님이 외출하실 눈치를 보이며 은근히 동민을 걱 정스러운 눈으로 말을 꺼내실 때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늘은 여느 때와는 좀 달랐다. 결혼 십오 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공교롭게도 아버지께서 직장에서 생각도 하지 않았던 특별 휴가까지 얻어 오신 것이다. 특별 여행, 동민의 어머니가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고(그럴 때는 꼭 아이 같았다) 아버지에게 여행을 제안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부부끼리의 여행은 분명 좋은 일이며 동민이 참견할 일도 아니었지만, 까닭 없이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 집 보는 게 무서워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건 가? 아니지. 조금 있으면 중학생이 되려는 차에 무섭기는 뭘! 아 마 섭섭해서 그런 것이리라. 방문 틈으로 가늘게 들려오는, 기뻐 하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동민은 왠지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고 손등으로 코끝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아버 지가 “동민이 혼자 집을 볼 수 있겠니? 내일까지만……” 하는 말씀에는 평상시보다 더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하고 씩 웃어 보였다.


냉장고 안은 꽉 차 있었다. 동민이 좋아하는 소시지가 한 줄 그대로 들어 있었고, 샌드위치 빵과 버터와 콜라와 삶은 고구마까지 한 그릇 담겨 있었다. 토마토도 몇 개 있었다. 동민이 좋아 하는 것들이었다. 밥보다 빵을 좋아하는 동민의 식성에 어머니 는 항상 웃음으로 대했고, 선선히 밥을 치우고 햄버거며 샌드위 치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배가 고프기는 해도 눈 앞에 있는 먹을거리들이 별로 실감나 보이지 않았다. 식당 진열 대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밀랍으로 만든 음식들, 먹음직스럽게 생겼지만 먹을 수 없는 음식 같았다. 냉장고 안의 음식에서 양초 냄새가 났다. 동민은 냉장고 문을 닫았다.

‘난 오늘 혼자야. 엄마도 아빠도 다 나갔어. 나만 두고…….. 평소에 잘 먹던 것들이 갑자기 역겹게 느껴지는 것은 혼자 남 았다는 생각 때문일까?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밤이 되면 무서워 질 테고, 쓸데없는 생각도 많아졌다. 그게 더 싫었다.

‘엄마하고 아빠가 돌아오시지 않는 건 아닐까?’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한번 머리에 떠오르자 무서운 공상이 머 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출동하고, 기차가 뒤집히 고, 배가 가라앉고, 비행기가 곤두박질치고, 거기에 우주인이 나 타나서 지구를 점령해 버리고, 식인 식물이 무성해지고, 그리고…………..

‘내가 미쳤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하지만 정말로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귀찮을지도 모른다. 항상 웃는 얼굴을 보이시긴 하지만,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장난 심하고 말썽만 피우는 나를…………. 내가 부모 라고 해도 나 같은 자식이 귀여울리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두 분 은 나 같은 귀찮은 애물단지가 없는 좋은 곳으로 가 버리신 건 아닐까?

동민은 아버지의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동민은 몰래 아버지의 컴퓨터에서 오락도 많이 했다. 아버지 는 컴퓨터를 사 놓고는 쓰시는 일이 별로 없었다. 처음엔 통신을 하신다고 삐익 하면서 가래 끓는 소리도 자주 내시더니만, 요즘 은 그것마저도 별로 안 하시는 것 같았다. 한참 고생해서야 통신 망에 접촉할 수 있었다.

동민은 백 개나 되는 대화실을 하나하나 스크롤하면서 뒤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대화실은 만원이었고 자기처럼 열세 살밖에 안 된 어린이가 낄 곳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14. 직장인 방

‘쳇!’

37. 별이 지는 것을 보면서

여기 갔다간 완전히 어린애 취급받겠지? 그래도 괜찮을까?’

55. 게임에 도튼 사람들

‘그래, 여기라면・・・・・・ 어휴, 열두 명이 차 버린 지 벌써 옛날이군.’

99. 비방, 혼자뿐인 사람들

‘어? 그렇지 나도 혼잔데, 혼자니까 한번………….”

st 99

“응? 휴, 열한 명이다. 장준후, Indra81……. 이 사람이 방장이구나.’

기회는 찬스다!

j99.

* 김일환(spinoza) 님이 입장하였습니다. *

송하윤(library) 아 열받어! 조준기(Tiki) 왜여?

(!) 김일환(spinoza) 안녕하세여?

임화섭(solatido) 하윤님 왜요?

송하윤(library) 아 글쎄 오늘 소개팅 하는디…

장준후(Indra81) [승희] 안녕하세요?

정복민(9159068) 우흐흐흐..

정희연(minerva7) 솟아라! 곰 같은 힘이여!

윤정열(wamozart) 우히히히… 희율이 열받음?

박제성(pachmann) 키키키 소개팅 뻔함

김유미(cindee) 어솨여

박제성(pachmann) 안 봐도 본 듯함

박제성(pachmann) 어쇼

송하윤(library) 아 글쎄 돼지대가리가 나옴…

윤정열(wamozart) 어솨요

윤정열(wamozart) 도망가야징

*윤정열(wamozart) 님이 퇴장하였습니다. *

‘이방 사람들은 인사도 제대로 안 하는군.’

(!)김일환(spinoza) (동민] 안녕들하세요.

김유미(cindee) 예 안녕하시와요

송하윤(library) 으… 꿈에 나타날까 두렵다

송하윤(library) 안녕하십니까?

정희연(minerva7) 아 반가와요 일 아니 동민님.

조준기(Tiki) %$%^$&$*^가가가띵가삥펑노,가아퓨,가%”%

박제성(pachmann) 우하하 준기 노이즈

조준기(Tiki),하파가가라가으

정희연(minerva7) 정열이 잡으러 감

정희연(miverva7) 여러분 안녕히………

*정희연(minerva7) 님이 퇴장하였습니다. *

* 조준기(Tiki) 님이 퇴장하였습니다. *

임화섭(solatido) 앗 희연이 갔다! 배신녀!

* 임화섭(solatido) 님이 퇴장하였습니다. *

박제성(pachmann) 아 하윤형 그래서?

송하윤(library) 글쎄 그 와중에 내가 채였단 거 아니냐

장준후(Indra81) [승희] 아. 동민님 혹시 13살??

송하윤(library) 내가 그거밖에 안되나. 흑흑..

동민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 장준후, 아니 승희라는 사람, 나는 기억에 없는데 나를 어떻게 알까? pf해 봐도 아버지 것밖에 안 나올 텐데………?

김유미(cindee) 와 영계

정복민(9159068) 와! 유미님 좋아하는 영계

김유미(cindee) 아이고 그래도 너무 어림. 키키키(죄송동민님)

장준후(Indra81) [승희] 반가워요… 하하하. 아버님 아이디 쓰시

정복민(9159068) 음 총혀기가 부르넹. 참 저 연습 못 나가용

정복민(9159068) 나 잠시…

*정복민(9159068) 님이 퇴장하였습니다. *

(!)김일환(spinoza) [동민] 승희님 저 아세요? 전 기억 안 나는데요….

송하윤(library) 아이고 난 죽어야 돼

박제성(pachmann) 죽을려면 광고내지 말고 곱게 가여

송하윤(library) 빠마 너 주글려?

장준후(Indra81) [승희] 아… 아뇨…

김유미(cindee) 동민님 넘 귀여울 것 같당

* 김유미(cindee) 님이 퇴장하였습니다. *

박제성(pachmann) 우하하하 유미님 짤림

송하윤(library) 하하하

(!)김일환(spinoza) (동민) 그러면 어떻게 아셨어여?

박제성(pachmann) 우악 엄니가 밥먹으라시네

장준후(Indra81) [승희] 호호호

송하윤(library) 아니, 또 먹어? 배 터져 죽겠다.

박제성(pachmann) 아난 원래

(!) 김일환(spinoza) (동민) 저 아시는거 아녜요?

박제성(pachmann) 하루에 12끼는 먹음.

송하윤(library) 꽥

*박제성(pachmann) 님이 퇴장하였습니다.*

(!)김일환(spinoza) (동민] 이잉… 가르쳐 줘요잉.

송하윤(library) 음 나도 이만…

송하윤(library) 여러분 안녕히…

・송하윤(library) 님이 퇴장하였습니다..

(!)김일환(spinoza) (동민] 음 다 가시네. 

장준후(Indra81) [승희] 아 미안… 동민님. 

(!)김일환(spinoza) (동민] 예? 뭘요…

장준후(Indra81) [승희] 궁금하게 해 드린 것 같아서.

동민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승희라는 사람은 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물론 글을 올리거나 한 적도 없 고, 신상명세를 얘기한 적도 없었다. 또 대화방에 가서도 잘 적 응을 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다가 나오는 게 보통이어서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을 사귀어 본 적도 없었는데………. 동민은 pf 명령어 를 쳐 보았다.

/pf Indra81

Indra81 (장준후) * 신념을 가지세요. *

/st 99

대화실 ’99 공개 (4명) 혼자뿐인 사람들.

장준후(Indra81) 김규만(violino) 이선우(yison) 김일환

(spinoza)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아, 두 분은 잠수중이니 st하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신념을 가지세요.”

귓속말이 갑자기 들어오자 동민은 기겁을 하고는 자신도 귓속말을 켰다.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으악!

[귓속말]장준후(Indra81) 왜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제가 st한 거 어떻게 아셨어

[귓속말]장준후(Indra81) 음.. 그냥 추측이에요.

정말 신기했다. 저 승희라는 사람은 어떻게 그런 걸 다 알 수 있는 걸까? 혹시 괴물이나 귀신이 아닐까? 그래, 통신 동호회내에 귀신이 있다고들 난리치던데 혹시………………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호호호 제가 무슨 귀신이에요? 그리고 통신 동호회에 어떻게 귀신 같은 게 나와요? 호호호!

동민은 놀라서 몸을 뒤로 젖히다가 살짝 정신을 잃고 뒤로 자빠져 버렸다.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진 건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려던 동민은 화면에 올라와 있는 글 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님, 안 다쳤어요? 놀라서 넘 어지기까지 하고….

‘귀신에게 홀린 게 분명해! 원 세상에 나가야겠다.’

막 접속을 끊으려던 동민의 손이 멎었다.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님 나가지 말아요. 미안해요…. 제가 설명을 할께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저 무서워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아. 무서워하지 말아요. 제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할 이야기라고? 도대체 내게 무슨 이야기가 있다고 그러는 걸 까? 막 동민이 키보드로 몸을 돌리려 하는데 밖에서 쿵! 하고 뭔 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민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으나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별것 아니겠지 하고 생각한 동민은 다시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무슨 이야기 하시려고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아. 동민님 지금 혼자 계시죠?

혹시 피에로 인형 같은……………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 지는 않은데…………..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호호호 저도 혼자 있어요. 그래서 그냥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어떻게 제 생각을 아시는 거예 요? 우리 집에 카메라 붙여놓고 감시하나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그럴리가요… 동민님, 어떤 사람 에게는 희한한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책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들으신적 있죠?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희한한 능력요?

예전에 읽은 어떤 소년 잡지에 나온 이야기가 떠올랐다. ESP 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중에는 멀리 떨어진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우와 그럼 ESP 할 줄 아세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ESP요? 호호호 그건 서양 사람 들이 그냥 붙인 이름예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그림 ESP의 진짜 이름은 뭔데 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그냥 좀 특이한 능력이죠…. 별건 아녜요… 우리나라에도 많은 일을 왜 영어 이름으로만 해야 돼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와 진짜 놀랬어요. 월요일에 학교 가서 자랑해야지.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앗! 그러심 안 돼요. 동민님.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예? 왜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아. 그러면 제가 곤란해져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왜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그러면 혼나요… 신부님하고, 현암군하고.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예? 그게 누군데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아… 저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요. 하여간 부탁예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저 수련하다가 지겨워져서 들어 온거거든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네.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하나씩 마음을 보고 있는데 동민님이 제일 착하신 거 같아서…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프헤헤 뭘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아녜요. 그리고 혼자 너무 심심해 하는 것 같아서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그래서 말 건거에요…

그랬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자니 동민은 심심했다. 동민 은 모니터 아래쪽에서 깜박거리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아홉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루에서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와 같은 소리 였다. 동민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별것 아니겠지’ 하는 생각 으로 마음을 달래고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승희라는 여자가 정말 신기했다.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승희님?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예? 동민님?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지금도 내 생각 알 수 있어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아뇨. 지금은 안 읽고 있어요. 안 할래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왜요? 신기하잖아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미안해요. 남의 마음을 멋대로 읽어서는 안되는 건데…………… 죄송했어요. 저 이만 갈께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으앙!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예?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으앙! 가지마여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왜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심심해요… 무섭기도 하구…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혼자 있죠? 부모님은…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뭐하러 물어봐요 그냥 읽으면 되지.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아니, 안 읽을래요. 생각해보니 그런 걸 함부로 쓰면 안될 것 같아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흠… 하여간 가지마여…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학교에 가도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애들한테 얘기 안할께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그리고…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예… 동민님. 안 갈께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와!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저도 절대 마음대로 동민님 생각 읽고 그러지 않을께요. 그러니 뚜~~~~?!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뚝!

다시 마루에서 쿵쿵 하는 소리가 두 번이나 울려왔다. 동민은 쭈뼛 소름이 돋았다. 왜 이런 소리가 자꾸 들리지?

동민의 집은 길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곳에 있는 이 층 양옥 집이었다. 아버지가 워낙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분이어서 호젓 한 축대 위에 집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니 옆집에서 들리는 소리 일 리가 없었다. 동민은 무서워졌다. 창밖은 캄캄해진 지 오래였 고, 외진 곳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나 차 지나가 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은 아까와 는 딴판으로 구름이 잔뜩 끼어 별 하나 보이지 않고, 안개가 자 욱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일기 예보에서는 맑을 것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일기 예보는 잘 틀리니까.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님? 뭐해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아. 아뇨.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어디 다녀왔어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아녜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호호호 동민님 쉬하러 갔었나 보다.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아녜요! 씨…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호호호 농담예요

이 여자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어리다고 날 갖고 노는 건가? 기분이 나쁘다. 그래, 내가 어리다고, 혼자 무서워하고 있다고 놀리는지도 몰라. 지금 들린 소리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그리고 아까처럼 저 여자는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게 분명해. 그래서 자꾸 놀리는 거야……………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님?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예?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왜 말을 안해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아무것도 아녜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화났어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다 알면서 왜그래?????????????????

동민은 자기도 모르게 물음표 키를 계속 누르고는 엔터키를 쾅쳤다. 승희라는 여자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꽤 타자가 빠른 사람이던데. 동민은 잠시 기다리다가 말을 걸었다.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승희님?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승희님?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왜그러세요?

[귓속말](!) 김일환(spinoza) (동민] 미안해요… 화나셨어여?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아뇨.

[귓속말](!) 김일환(spinoza) (동민] 왜 말이 없으세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님 저 의심했죠?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예?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내가 또 동민님 마음 읽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음… 또 읽었어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아녜요. 진짜 짐작예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저도 기분이 안좋아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왜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다른 사람들도 그래요… 신기한 장난감을 보듯….

[귓속말](!) 김일환(spinoza) (동민] 예?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처음엔 신기해 하고 그러지만…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조금만 지나면 되레 싫어하고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무서워하고…

동민은 무슨 말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하여간 왠지 승희라는 여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미안해요 누나.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아참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누나 맞죠?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어떻게 알았어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짐작예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호호호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그래요 맞아요. 동민님 나보다 딱 10살 아래예요.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헤헤헤

동민은 기분이 좋아졌다. 승희 누나도 기분이 풀린 듯했다. 둘 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누나는 이것저것 잘 대답해 주었 고, 특히 비밀이라면서 자신이 귀신 쫓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까지 말해 주었다. 동민은 신기해서 무당이냐고 했지만 승희 누 나는 아니라고 하면서, 퇴마사(?)라는 생소한 말을 했다. 동민은 신기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는데 승 희도 지루해하지 않고 잘 대답해 주었다. 자연스럽게 둘은 누나, 동생 하며 말을 놓게 되었다.

동민은 추워져서 고개를 돌렸다. 창문이 열려 있지 않나 해서 였다. 그러나 창문은 닫혀 있었고, 안개가 짙게 깔려서 다른 집의 불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는 연기처럼 꿈틀대며 커튼을 친 것처럼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쿵” 하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래층에서 들렸다.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무슨 소리가 나요.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응? 소리?

[귓속말](!)김일환(spinoza) (동민) 예, 아래층에서.

[귓속말]장준후(Indra81) (승희) 누가 온 것 아냐? 가 보렴. 기다릴게.

내려가 볼 생각은 없었는데……. 하여간 승희 누나가 내 마음 을 읽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내친김에 한번 내려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동민은 몸을 일 으켰다. 아까부터 들리던 소리가 아무래도 이상하기는 했다. 도둑인가? 그러면 내 태권도 실력으로・・・・・・ ‘용감한 국민학생, 집 에 들어온 도둑을 혼자 잡다!’, ‘한국판 <나 홀로 집에>!’ 흐흐흐……

동민은 옆에 굴러다니는 알루미늄 방망이를 들고 조심스럽 게 방문을 열었다. 동민의 집은 그다지 넓지 않았으며 특히 이층 은 일층의 반밖에 안 되는 넓이였다. 이층 마루에는 아무것도 없 었다. 방을 나서는데 아래층에서 다시 “쿵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방문이 열려 있어서 그런지 소리가 한층 크게 울렸 다. 무거운 것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동민은 소름이 끼쳤 다. 동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모니터는 여전히 파랗게 빛나고 있 었고,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지 흰 줄들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그걸 보니까 승희 누나가 모니터 안에 있는 것 같아서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동민은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방망이 를 손에 단단히 쥐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께로 가는 동 안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계단 입구까지 가도 아래층은 보이지 않는다. 반쯤 내려가서 굽이를 돌아야 아래층을 볼 수 있었다. 계단을 막 내려가려는데 다시 한 번 “쿵” 소리가 들렸다. 동민은 몸을 움찔하면서 하마터면 야구 방망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동민의 귀에 나직이 무언가 질질 끄 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 땀방울이 이마에서 뺨으 로 흘러내려 축축한 자취를 남겼다.

동민은 이제 막 구부러지기 시작하는 계단을 내디뎠다. 굽이를 돌아 동민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불이 꺼진 채 음울 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마루의 풍경이 동민의 눈에 들어 왔다. 소파, 그 앞의 테이블, 아버지가 즐겨 피우는 파이프와 재 떨이, 쿠션, 텔레비전…………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동민은 한숨을 내쉬고는 계단 위로 몸을 돌렸다. 손에 든 야구 방망이가 괜히 무겁게 느껴져 어깨에 둘러메고는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동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불이 꺼져 있는데, 창밖은 안개가 가득 끼어 있는데……… 그 런데 왜 그림자가 생기지? 그것도 길게………’

동민의 등골에서 오싹한 기운이 올라오면서 온몸이 학질에 걸 린 것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

과학 시간에 배웠다. 해가 높이 떴을 때 그림자는 짧아진다. 석양이나 아침처럼 해가 낮게 떴을 때에 그림자는 길게 드리운 다. 그렇다면 지금 뭔가 빛을 내는 것이 낮게 웅크리고 있다는 말이다.

동민은 이가 딱딱 소리를 낼 만큼 자신이 떨고 있음을 느끼고 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뺨이 파들파들 떨렸다. 동민은 그 자리에 선 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책상 밑이나 테이블 밑 에 있으면서, 빛을 내어 마루를 환하게,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질 만큼 환하게, 그것도 특별히 한 군데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온 마루에 은은한 빛을 채울 수 있을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그럴 만한 것은 없었다.

동민이 떠는 것에 맞추어 야구 방망이가 어깨에 달린 쇠 장식 에 부딪히며 딸각딸각 소리를 냈다. 다시 한번 “쿵” 하면서 무언 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찬장, 틀림없이 찬장 쪽에서 난 소리였다. 그렇다면 부엌이다. 지금 동민이 서 있는 위치에서는 부엌이 보이지 않았다. 뒤를 이어, 희미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동민의 귓가를 긁는 듯이 들려오는 질질 끄는 쇳소리………….

마루에 드리운 가구들의 그림자가 서서히 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을 내는 물체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것이 다. 동민의 귀와 눈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예민해졌다.

지익지익. 무언가 끌리는 소리다. 쇠사슬, 분명히 쇠사슬을 끄 는 소리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딸각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어 떤 물체가 이번에는 찬장 옆에 있는 장식장에 부딪힌 것이리라. 동민은 주변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소 스라쳤다. 그랬다. 눈앞에 보이는 가구들의 형상이 점차 또렷해 지고 있었다. 그림자도 짙어지고 있었다. 놈, 아직 뭐라 말할 순 없지만, 하여간 그놈이 부엌을 나오고 있었다. 그러면 그놈도 동 민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동민은 몸을 날려 계단을 네 개씩 뛰어 올라갔다. 어깨에 메고 있던 야구 방망이가 굴러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몇 개 안 되던 계단이 왜 이리도 많은 것일까? 동민은 평소 계단을 한 꺼번에 세 개 이상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동민 의 눈앞이 밝아지면서 자신의 그림자가 앞에서 허우적거리고 있 었다. 놈이 따라오고 있다!

동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파란빛을 내 는 커다란 것이 계단 굽이에 막 올라서고 있었다. 언뜻 보아 그 빛을 내는 것은 늑대나 표범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동민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면서 고개를 돌리고 넘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바로잡고는 계단을 다섯 개씩 한꺼번에 뛰어 올라갔다. 문이 보였다. 방금 자신이 나왔던, 아버지 컴퓨터가 있는 방의 문이었다. 동민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 고는 얼른 손잡이를 돌려 문을 잠갔다.

모니터가 보였다. 파란빛을 뿜어내고 있는 모니터에는 흰 줄 들이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동민이 모니터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문에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쾅!

“으악! 저리가!”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높은 문을 박박 할퀴고 있었다. 바 닥에 주저앉은 동민은 한쪽 구석으로 기어갔다. 문이 버텨 줄까? 다시 한번 “쿵” 소리가 났다. 별로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소 리가 한번 들릴 때마다 동민은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저리 가! 엄마, 엄마!”

동민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힐끗 쳐다본 모니터에 막 스크롤되어 올라가고 있는 말 한마디가 비쳤다.

장준후(Indra81) [승희] 아 그러세요? 호호호…

동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턱을 덜덜 떨면서 희게 칠해 진 문만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 문을 긁는 소리가 계속 되더니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에 부딪히는 소리는 아 니었다. 놈이 포기한 것일까?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들린 소리는 훨씬 작았다. 계단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놈은 문이 잠긴 것을 알고 포기하고는 계단으로 내려간 것이 분명했다. 문 을 열고 나갈까? 아래층으로 내려가 현관으로 도망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었다. 동민은 아래층으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 았다. 아참, 전화를 하자. 그러나 전화도 아래층에 있었다. 창문 으로 뛰어내리면?

동민은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다시 쳐다본 모니터에는 승희 누나의 글이 또 한 줄 올라가고 있었다. 승희 누나…… 누나는 귀신을 잡는 사람이라 했다. 혹시.. 아니다. 아무 도움도 안 될 것이다. 제아무리 초능력을 가졌다 해도 사람이 모니터에서 뛰어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민은 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돌 렸다.

창밖은 잿빛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저 안개는 왜 낀 것일까? 오늘 밤은, 아니 내일까지도 분명히 맑은 날씨일 거라는 일기 예보를 본 기억이 났다. 여기는 이층이다. 잘못 뛰어내려 발목이 부러지고, 곧바로 그놈이 뒤를 따라온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동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동민은 흑흑거리며 중얼거렸다.

“엄마, 무서워, 엄마……………..”

아래층에서 “쿵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틀을 잡은 손이 떨리고 다리가 지푸라기처럼 풀어지면서 동민은 그 자리에 쓰러 졌다.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동민은 애써 울음을 삼키면 서 키보드로 손을 뻗쳤다. 그것만이 지금 자기가 어떤 일에 처했 는지 알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장준후(Indra81) [승희] 아, 그러세요… 호호호

(!)[귓속말] 김일환(spinoza) 싶휴 가가가가가가가가가,

동민은 손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자꾸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그냥 키보드를 긁어 댈 뿐이었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음? 동민이 장난하니?

(!)[귓속말] 김일환(spinoza) *%가가가 987가가 7가가가가가가

동민은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려서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에 힘을 모았다.

(!)[귓속말] 김일환(spinoza) 도와줘요가가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얘, 너 왜 그래?

동민은 흐느낌을 참으려 왼손으로 입을 막고 손등을 깨물었 다. 그러면서 마구 흔들리는 손가락을 똑바로 세우려 애썼다.

(!)[귓속말] 김일환(spinoza) 괘괴물띵띵띵띵띵귀신나나나나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동민아!

(!)[귓속말] 김일환(spinoza) 슬수가업서요가가가가마음을띵띵띵 띵내마가가가가가

“쿵” 소리가 들리면서 아래층에서 무언가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민은 마치 자신의 몸이 부서진 듯 덜컥 책상 밑에 처박혔다. 놈은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잡지 못해 서 그러는 것 같았다. 놈은 아래층에서 화를 풀려고 막 물건들을 부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승희 누나, 제, 제발 내 생각을 읽고도, 도와줘요’

아래층이 잠잠해졌다. 동민의 귀에는 나직하게 컴퓨터 팬이 돌아가는 소리와 자신의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려오 고 있었다. 승희 누나가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아니, 아까 누나 는 마음을 읽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장난치는 걸로 알 고 그냥 넘어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동민의 눈에서 안타까운 눈 물이 샘솟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동민아! 진정해! 진정!

동민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자, 우선 마음을 침착하 게 가져. 내가 도와줄께…

승희 누나가 내 마음을 읽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행이 다. 이렇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키보드마저도 두드릴 수가 없는데, 내 마음을 속속들이 읽고 답 해 줄 수 있다니….. 동민은 어떻게든 도와 달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누나! 도와줘요! 이리 와 줘요!’

모니터에서 흰 글자들이 올라갔다. 갑자기 승희가 잠수를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이 투덜대는 것 같았지만, 승희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갈 수 있지만, 너무 멀어. 그사이에 혼자 버틸 수 있겠어?

‘아니, 혼자는 너무 싫어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우선 진정해. 그리고 다 시 생각해 봐.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잘못보다뇨! 틀림없이 봤어요! 파란빛이 돌고 쇠사슬 소리가 났어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아 잠깐만! 차근차근 생각해 봐. 난 아직 미숙해서, 너무 한꺼번에 많은 생각을 떠올리면 다 읽을 수가 없어.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차근차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자… 심호흡을 해봐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깊숙이

동민은 승희가 시키는 대로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기분이 안정되기는 했지만 아래층에서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자 움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만큼은 겁나지 않았다. 적어도 누군가 옆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괜찮아?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아 저런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예? 누나?’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나도 알겠어. 정말 뭔가가 나타 났구나.

‘누나, 도와줘요. 귀신 잡는 사람이라면서요? 저걸 없애 주세요. 제발.’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여기서 힘을 쓸 방법은 없어. 그리고 나는 원래 그런 힘이 없고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신부님이나 준후가 있었으면 도움이 되련만

또 다시 “쿵” 소리가 들리더니 유리판에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끽끽거리며 들려왔다. 놈이 마루에 있는 테이블의 위로 올라간걸까?

으아, 나 죽는 건가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아니, 진정해. 동민아… 그럴 리가 없어.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네가 원한을 살 이유가 있을 것 같진 않고… 너를 해치려고 들어온 건 아닐 거야… 다만

“다만 뭐죠?’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아래층의 그 괴물의 모습을 봤니? 자세히….

‘아뇨. 자세히는 못 봤어요.’[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잠깐 보았더라도… 무엇과 닮았다고 생각했지?

‘늑대나 표범 같았어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물의 영이로군! 저런…

‘왜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늑대, 표범… 그런 것의 영들이 너희 집까지 떠돌아 들어올 리가 없어. 큰 개… 큰 개가 아닐까?

‘맞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영이나 귀신의 일은 얼핏 뒤죽박죽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게 원인과 이유가 있어.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아니, 사람들 사이의 일보다도 어쩌면 더 정확하고 논리적인 게 영들의 관계일지 몰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또 “쿵” 소리가 들려왔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너희 집에 혹시 개를 키웠던 적이 없니?

개, 개라………… 요즘은 기르지 않지만, 동민이 어렸을 때에는 개를 참 많이 길렀다. 쫑, 해피, 히틀러, 점박이, 억쇠………….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작은 개 말고 큰 개! 큰 개를 길 렀던 적이 없어?

큰개………… 그래, 아까 본 파란 덩어리만큼 큰 개………… 그렇다. 쫑과 억쇠가 그만큼 큰 개였다. 지금은 둘 다 죽었을 테지만……………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좋아, 동민아. 중요한 거야. 그 두 마리의 개가 어떻게 죽었지?

쫑・・・・・・ 동민이 어렸을 때였다. 쫑은 그때는 참 크게 보였는 데, 달릴 때면 흰 털이 마구 휘날리던 큰 스피츠였다. 사납기도 했지만, 쫑은 쥐약 먹은 쥐를 잡아먹고 죽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로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좋아, 동민아. 시간이 없어. 또 한 마리… 그러니까 억쇠는?

억쇠는…………… 맞다. 억쇠는 쫑보다 더 컸다. 그러나 성질은 쫑 보다 훨씬 순했다. 억쇠는 나를 태우고 다니기까지 했다. 나와 정말 친했다. 내가 북어 대가리를 들고 억쇠에게 주면 억쇠는 큰 몸집을 두 발로 세우며 덩치에 걸맞지 않게 재롱을 부리곤 했다. 그걸 보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큰 소리로 웃으시곤 했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그건 좋아. 그런데… 그 억쇠는 어떻게 되었지?

억쇠⋯⋯ 억쇠는 너무 컸다.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순한 억쇠 를 무서워했다. 억쇠가 죽은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기억이 난 다. 누군가 억쇠를 데려가 버렸다. 누구였더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그러면 억쇠가 어떻게 되었는지 는 모르니?

‘몰라요. 이미 오래전 일이니 죽었겠지만………….’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억쇠의 생김새는?

‘그걸 왜 알려고 하는 거예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어쩌면 내가 그 개의 마음도 알수 있을지 몰라… 이승에만 있다면…

동민은 억쇠의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큰 도사견이었다.

털빛이 누렇고 귀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그 정도로는 안 돼… 너무 흔해… 특징이 없니?

특징이라…………… 그래, 눈매가 축 처졌고………………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더! 그것 말고 더!

왼쪽 귀가 오른쪽보다 더 짧았다. 맞다. 짝짝이 귀였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알았어!

모니터의 스크롤이 잠시 정지했다. 억쇠의 귀신이 맞는 것일 까? 승희 누나가 정말 아래층의 괴물이 억쇠의 귀신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 그것이 억쇠의 귀신이라면, 억쇠가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있을까?

승희가 무얼 어떻게 하는지 동민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놈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틀림없이 이 방 문을 긁고, 아니 몸으로 밀고 들어와서는 나를 쥐나 헝겊 인형처럼……..

‘도와줘요! 승희 누나, 제발!’

모니터는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승희 누나는 억쇠가 어떻게 되었는지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을 발톱으로 박박 긁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억쇠의 발톱 소리일 것이다. 길고, 날카롭고 뾰족한 발톱. 승희 누나는 어찌 된 것일까?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를 버리고 떠났다. 부모님을 다시 못 볼 것만 같다. 승희 누나라고 지금의 내 상황을 어떻게 할 수 가 없을 것이다. 모두가 똑같다. 지금 괴물에 밀려 방구석에 처 박혀 있는 동민에게는 이런 일을 겪고 있지 않는 다른 사람 모두 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문을 긁어 대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알아냈어! 불쌍하게도…

“아, 누나다! 누나!’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지금 네 앞에 있니? 그건 억쇠가 맞아… 가엾은.

‘예? 가엾다구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

‘무서워 말라니요! 지금 문을 긁어 대고 있단 말예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아냐 그 이유는…

‘날 죽일 거예요! 나를 죽이고 말 거예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아냐! 동민아!

‘아냐, 다 똑같아! 거짓말이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이 너.

‘누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나만 혼자 버려 두고는………… 나 혼자만 놔 두 고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무서워 무서워 죽겠단 말야…………..

동민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눈에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고, 귓속도 멍해졌다. 문을 긁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동민은 정신을 차렸다. 문 밖에 있는 것이 미웠다. 한없이 미 웠다. 저놈이 저놈이 나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그러면 안 돼!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돼!

‘뭐, 뭐라구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어머니를 생각해… 아

버지도…

‘흥!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지금 난 혼자예요. 아무도 없다구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네 곁에 계셔… 너를 생각하고 계실 테니까…

‘나를 생각한다구요? 흥!’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틀림없어… 미워하지 마… 그런 생각을 가지지 마….

‘미워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동민의 코끝에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나오는지…………….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그래그래… 착하지? 네 마음 알고 있어… 외롭고 무서워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그래 울지 마… 넌 혼자가 아냐… 힘을 내…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세상에는 말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들도 있는 거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남이 도와주지 못하는 일도 있 고, 아무도 모르는 일도 있고,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무서워하기만 해서는 아무 도움이 안 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문을 열렴…

동민은 그런 글자들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귀신의 장난 같았다. 문을 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못해요! 어떻게, 내가 어떻게………

계속 올라가고 있는 승희의 말들은 마치 영화에서처럼 크게 클로즈업되어 비치고 있었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문 밖에 있는 것은 괴물이나 악령이 아니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너와 친했던 억쇠일 뿐이야…

‘아냐, 틀림없이 귀신이었어요! 괴물이라구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물론 억쇠는 죽었어… 아주 불쌍하게….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그러나 억쇠는

동민은 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과연 승희 누나의 말이 정말일 까? 억쇠, 저 억쇠를 과연 옛날의 억쇠로 생각해도 되는 걸까?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네게 악의가 없어… 또 단순하기 때문에 너에게 달라붙는다거나 빙의되지도 않을 거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너를 보기 전에는 가지 않을 거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슬픔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슬픔이 너무 깊기 때문에…

슬픔이라고? 귀신도 슬픔이 있던가? 옛날이야기나 무서운 이 야기에 나오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피를 흘리며 간을 빼 먹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동민아… 문을 열고 억쇠를 마주봐….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옛날과 같은 기분으로… 그래야해….

옛날의 기분…… 그래, 나는 억쇠를 무척 좋아했다. 넓은 잔 등에 올라타면 억쇠는 나를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조심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로 걷곤 했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은 몹 시 부러워했다. 억쇠와 나는 친구였다. 그러나 그건 옛날 일일 뿐이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무섭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돼… 오히려 억쇠가 놀라서 네가 위험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아냐… 그런 생각도 안 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내 말을 믿어…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다만 억쇠를 도와준다고만…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가련하게 여기고…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기는 하다. 억쇠에게 무슨 일이 생겼 단 말인가? 죽은 것은 분명한데・・・・・・ 가련? 가련하게 생각하라고?

문을 긁는 소리가 그쳤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승희 누나의 말대로 억쇠를 마주 볼 수 있을까? 아니 면 여기서 문을 닫고 웅크린 채로 아침이 될 때까지 숨어 있을까.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도와줘… 그 가련한 개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그 개도 하나의 생명체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그리고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네 친구였잖아…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네가 해야 해… 오직 너만이…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차근차근 얘기해 줄게…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억쇠는…

동민은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 다. 나만 할 수 있다고? 가련하다고? 귀신인데! 생명체? 파랗고 소름끼치는 빛은? 친구라고? 도와주라고?

갑자기 모니터에 한 줄의 글자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동민은 자지러지게 놀랐다.

* 장준후(Indra81)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

‘아, 안 돼! 승희, 승희 누나!’

마지막으로 남은 말상대마저 사라져 버렸다. 나쁜 전화 전화가 끊긴 게 틀림없었다. 이제 스크린에는 왁자지껄하게 떠 들어 대는 농담과 말장난과 심각한 척하는 공허한 논의만 난무 했다. 아무도 동민의 처지를 알지 못했고, 관심을 가져줄 리 없 었다. 승희 누나가 다시 접속할 수 있을까? 붐비는 시간대………… 문득 쳐다본 시계는 열한시 이십오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민은 잠시 몸을 떨다가 문의 손잡이 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 었다. 팔뚝에까지 땀이 뚝뚝 떨어졌다. 이를 악물며 동민은 문고 리를 쥐었다.

억쇠, 친구, 개, 무서움, 귀신, 넓은 잔등, 피, 웃음소리, 간, 헝 겊 인형, 기억, 쫑, 쇠사슬 소리, 안개, 아버지, 여행, 파란 불빛, 모니터 승희 누나, 이빨, 발톱, 엄마…………… 엄마……………

문을 빠끔 열었다.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억쇠의 귀신은 계단을 내려가 버린 모양이었다. 동민은 천천히, 마치 꿈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계 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씩 발을 아래로 내디딜 때마 다 아득한 시간이 지났다. 다시 한 발 저 밑에는 무엇이 있을까? 왜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을까? 동민은 무서웠다. 그 러나 다시 돌아가 문을 잠그고 틀어박히거나 소리를 질러 사람 들을 부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승희 누나는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어떤 일이라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처음 계단을 내려올 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 어 있었다. 어떤 모습을 보게 되더라도, 원한을 가진 귀신이거나 아니면 억쇠의 모습이거나 상관없었다.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해 결해야 한다. 어른의 말을 듣고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동민의 눈앞에 벌어진 일을 난생처음 완전히 혼자 힘으 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오히려 동민의 마음을 편 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동민은 계단을 내려와 마루 앞에 섰다. 파란 불빛은 아직도 마 루를 비추며 엎어진 테이블이며 가구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 고 있었다.

‘내 마음을 아직 읽고 있어요. 승희 누나?’

불빛은 다시 부엌에 가 있었다. 무서운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기로웠던 생각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 고, 참기 어려운 무서움이 등줄을 타고 올라왔다. 동민은 억지로 한 발을 내디뎠다. “쿵” 소리가 들려왔다. 동민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부엌쪽으로 몸을 돌렸다.

‘승희 누나 보고 있어요? 볼 수 있다고 했죠?’

무서웠다. 동민의 질끈 감은 눈꺼풀을 뚫고 음산한 불빛이 들 어오는 듯했다. 만약 나에게 덤벼든다면? 커다란 몸집과 이빨과 발톱으로…………….

‘무서워요. 하지만 내가 꼭 해야 한다면…………….’

동민은 눈을 떴다.

동민의 눈에 시퍼런 빛을 발하고 있는 송아지만 한 모습이 들 어왔다. 처음엔 물컹물컹한 빛의 덩어리처럼 보였으나, 차츰 길 게 늘어진 쇠줄과 줄에 매달려 있는 굵직한 쇠막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쇠사슬 소리, 쿵쿵거리는 소리의 정체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빛 속에서 형체가 분간되기 시작했다. 송아지만 한 개………… 틀림없이 동민의 기억에 남아 있던 억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앞발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 억쇠야?”

억쇠가 고개를 돌렸다. 쇠줄이 휘청하면서 흔들리고 쇠막대가 공중으로 조금 떴다가 땅에 부딪히면서 육중한 소리를 냈다. 

“억쇠? 억쇠야…….”

고개를 돌린 억쇠의 눈은 푸른빛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 다. 동민의 눈에 억쇠의 몸이 자세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억쇠야…… 가, 가엾게도…….”

억쇠의 앞발은 무참하게 반쯤 잘려 나가 있었다. 짓이겨져 있 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었고, 귀도 찢어져 일부만 남아 있었다. 몸은 바싹 말라 갈비뼈가 드러나 보였다. 그중 두 개는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억쇠가 낮게 으르렁댔다. 커다란 이빨들이 일 그러진 입술 사이에서 번득였다.

“너, 너, 어쩌다가……………..”

처참한 모습이었다. 동민은 막상 그런 모습을 보자 오히려 긴 장이 풀렸다. 억쇠가 멀쩡한 모습이었다면 차라리 무서웠을 것 이다. 억쇠는 꼬리도 흔들지 않았다. 옛날처럼 고개를 숙이고 슬 금슬금 친밀한 눈빛으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항의를 하듯, 시위 를 하듯, 노여움과 의문이 뒤섞인 이글이글 타는 눈매로 가만히 동민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동민은 주저주저하면서 억쇠의 푸른 몸 가까이 한 발 다가섰 다. 억쇠의 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동민이 만져 주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동민은 조심스레 억쇠의 몸 주변에 엉겨 있는 푸른 불꽃에 손을 대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영상들이 터널에 서 빠져나올 때 보이는 풍경처럼 동민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흽 쓸며 지나가기 시작했다.

가죽점퍼를 입은, 얼굴이 검게 탄 중년 남자가 흉하게 웃고 있 다. 손에는 쇠줄을 쥐고 휙 잡아당겼다. 머리에 떠오르던 영상도 그 움직임에 맞추어 물결쳤다.

‘억쇠가 겪은 일이구나. 내게 보여 주고 있어. 새로 바뀐 주인 인가보다. 우리가 억쇠를 준 것은 저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를 드러내고 있는 커다란 개가 보였다. 눈 주위부터 아래턱 까지 찢어져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눈에는 고통을 가득 담은 채 뒷다리로 흙을 긁어 대며 휘청거리고 있었다. 억쇠의 큰 앞발이 그 개의 눈언저리를 갈기자 피가 확 튀었다. 상처를 입은 개 는 결정타를 맞은 듯 구슬픈 표정으로 자리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고,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좋아하는 모습과 아까의 중년 남 자가 기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억쇠의 시선은 아 래로 떨구어져 있었다. 다른 개의 피에 물든 자신의 앞발을 보고 있었다.

‘투견장에 끌려갔었구나. 여러 번, 벌써 여러 번 억쇠는 다른 개들을 물리쳤다. 이유도 모르고 개들을 죽였어.’

중년 남자의 당황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래, 배가 고팠구나. 먹을 것을 오랫동안 주지 않았던 것 같았다. 허기, 궁핍, 독이 오를대로 오른 분노………….

동민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광경을 보며, 마치 자신이 그 일을 겪고 있는 듯 생생한 느낌을 전달받았다. 굶기면 난폭해진다. 그 래서 굶기는 거다. 참을 수 없다. 중년 남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곤봉을 꺼내 후려친다. 고통…………… 정통으로 맞았다. 갈비뼈 언 저리에…………. 뼈가 삐죽이 튀어나온 옆구리가 간신히 보인다. 힘 이 없다. 코앞에 누런 흙이 깔려 있다. 흙 위로 부지런히 기어가 는 개미 몇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동민은 울먹울먹했다. 참다못해 주인에게 대든 억쇠는 갈비뼈 가 부러져 나갈 정도로 얻어맞은 것이다.

답답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목이 감겨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어지럽게 움직여서 제대로 구별이 안 가는 주위 풍경 사이로 쇠줄을 묶은 쇠말뚝의 모습이 간간이 비쳐 들었다. 뒤편의 커다란 나무가 쓰러지고 있었다. 무섭도록 빠르게 덮쳐 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슬에 매인 억쇠는 멀리 움직일 수 없었 다. 뒤틀린 옆구리 때문에 발걸음을 옮길 수도 없었다. 나무 둥 치가 쓰러지면서 왼쪽 앞발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그래서 발이………… 흑, 불쌍하게도……..’

중년 남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억쇠는 아 직 살아 있다. 그러나 주인은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 목에 맨 사 슬을 풀어 주지도 않는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엉기고 구더 기들이 그 상처를 파고든다. 꼼짝도 할 수 없다. 힘이 없다. 말뚝 과 쇠줄이 크게 확대되어 눈에 들어온다. 동민의 얼굴도 간간이 섞여 떠오른다. 옛날의 일들이 억쇠의 눈앞을 지나간다. 말뚝과 쇠줄의 모습이 커졌다가 점점 흐려진다. 그러고는 모든 게 흐려 진다.

동민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는 말들이 동민의 목구멍 속에서 맴돌았다. 억쇠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억쇠의 불타는 눈은 동민에게 왜, 도대체 왜냐고 묻고 있었다.

동민은 떨리는 손을 억쇠에게 내밀었다. 억쇠는 잠시 망설이 는 듯하더니,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믿었던 옛 주인, 아니 옛 친구에게로, 동민의 손은 억쇠를 만지지 못했다. 다만 눈으로 만 보이는 억쇠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할 뿐. 동민에게 왈칵 설움이 밀려들었다. 열려진 냉장고가 보였다. 억쇠는 동민이 손 대지 않았던 음식들을 먹으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먹을 수 없 었던 듯, 음식들은 흩어져 있었으나 그대로 있었다. 동민은 먹을 것을 닥치는 대로 집어 억쇠의 입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음식 들은 억쇠의 입이 보이는 공간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동민은 울음을 터뜨렸고, 억쇠도 슬픈 표정을 지었다. 문득 동민은 의아 해졌다.

‘억쇠의 몸이 투명하다면 왜 쿵쿵 소리가 나는 거지? 냉장고 문은 어떻게 열었고?’

동민의 손끝이 억쇠의 목 부분을 향했다. 거기 걸려 있는 목걸 이와쇠줄은 진짜였다. 그리고 쇠줄 끝에 달린 쇠막대기도. ‘죽어서까지 죽어서까지 풀어 주지 않다니……………..

동민은 서둘러 허공에 떠 있는 개목걸이를 풀기 시작했다. 손 이 떨려서 잘되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억쇠, 억쇠야!’

동민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목걸이를 풀어내고는 묵직한 쇠 막대기와 줄을 집어 던졌다. 쇠막대기에 맞은 창문이 와장창 박 살 나고, 저주받은 속박의 징표는 마당으로 나가 떨어졌다. 억쇠 의 눈빛이 되살아나며 온전한 검은색으로 바뀌어 갔다. 동민은 뒤로 물러섰다. 억쇠는 흉한 몸뚱이를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하늘로 높이 들고 길게 울었다. 처음으로 억쇠는 옛날처럼 짖었다.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동민은 아름다운 음악을 듣듯 억쇠 가 짖는 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억쇠가 머뭇거리며 동민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제 억쇠의 눈 빛은 옛날 동민을 태우고 다닐 때의 친근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 었다. 뭔가 허락을 구하는 듯했다. 동민은 깨달았다. 이제 갈 때 가 되었다는 것을. 동민은 눈물을 흘리면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 이제 가………….. 억쇠야.”

억쇠가 길게 울었다. 금방이라도 다가와 응석을 부릴 것 같았다. 

“아냐, 이젠 가. 다시는 그렇게 고통받지 말고…………… 편한 곳으 로, 아주 편한 곳으로…………….”

동민의 가슴속에서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응어리가 올라왔 다. 억쇠가 또다시 길게 울었다. 억쇠는 마치 촛불이 꺼지듯 서 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잘 가, 억쇠야…… 이제, 이제는 안녕・・・・・・ 억쇠야…….”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동민은 아버지 방으로 올라와 모니터 를 보았다. 다시 접속한 승희도 모든 걸 보았던 듯, 동민이 모니 터를 보자 짤막한 메시지를 보냈다.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장하다… 동민아…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이제 넌 더 이상 철없는 애가 아나….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정말 착하고… 아무튼 잘했어…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이제 억쇠도 편히 쉴 수 있을 거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또 조금,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넌 조금 더 큰 거야….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안녕… 나도 좀 시큰해서… 호호호

[귓속말] 장준후(Indra81) [승희] 메일 보낼게…

* 장준후(Indra81) 님이 퇴장하였습니다. *

동민은 미소를 지었다. 눈물을 꽤나 흘려서인지 마음이 개운 했다. 그리고 정말로 자신이 조금 더 자란 것 같은 느낌이 들었 다. 키도 그대로일 거고 나이를 더 먹은 것도 아닐 테지만……………. 혼자 있는 밤도 이제 무서울 것 같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원망스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 먼 곳에 있던 억쇠도 내 생각을 했다. 하물며 부모님이 야…………. 멀리 계셔도 옆에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억쇠를 풀어 줄 수 있어서 흐뭇했다. 이젠 편안히 쉬기를……………. 어느덧 집을 덮었던 안개도 걷히고 구름 사이로 별 도 한두 개 빛나고 있었다. 사람은 죽어 별이 된다는데, 개도 그 럴까?동민은 갈라지는 구름 사이로 하나둘 늘어나는 별들을 보면서 밤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없는………… 아니, 혼자 있는 밤이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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