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이 지니고 다니는 칼의 이름은 월향이다. 작은 은장도같 이 생겼으나 비수처럼 양날을 가진 칼이다. 현암이 이 칼을 애지 중지하며 가지고 다니는 것과, 또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서 승희는 칼의 내력을 몹시 궁 금해했다. 승희가 월향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우연한 기회에 현 암이 칼을 얻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승희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 해 투시를 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현암이 신경질적으로 싫어했 기 때문에 월향에 깃든 영혼을 투시하지는 않았다. 준후도 투시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현암이 그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승희는 현암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현암은 나중에 말해 주겠다 고 할 뿐 대답을 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벼르고 벼르던 승희는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며 현암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몇 차례 거절하던 현암은 결국 승희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암은 시선을 멀리 두고 생각에 잠겼다. 승희는 현암이 이야 기를 말로 하기보다는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사실을 좀 더 생생하게 전달해 주려하고 있음을 알았다. 승희는 현암의 머릿속에서 지나가는 영상들을 영화처럼 관람하기 시작했다.
덕산 마을………….
80년대에 들어서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속의 덕산 마을 주민에게 밤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일 뿐 아니라 실질적 인 공포의 시간이기도 했다.
해가 짙은 노을을 드리우며 대지에 잠기려 하자 마을 사람들 은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몇 장정들은 하던 일을 마 무리하려고 손을 재게 놀리며 남아 있었지만, 그들마저도 해가 지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있던 노인과 부녀자 들은 버드나무며 복숭아나무 가지 등을 울타리에 부지런히 꽂았다. 소금을 뿌리거나 여인네의 속 옷가지를 꺼내어 집 앞에 널기도 했고, 마당에 장작불을 피워 머 리카락을 태우기도 했다. 횃불을 만들어 집 주위에 꽂는 광경도 보였다.
횃불은 한두 개가 아니고 수십 개나 되었다. 온 마을이 다가오는 밤을 두려워하며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 해가 넘어가는 마을 뒷산의 작은 비탈길을 한 청년이 걸 어가고 있었다.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은 약간 큰 키에 마른 체격을 하고 있었고, 얼굴엔 짙은 고민의 표정이 어려 있었 다. 머리는 가위로 썩둑썩둑 자른 것처럼 엉망이었고, 너덜너덜 한 옷차림에 등에다 커다란 자루를 메고 있는 것이 여지없는 거 지 행색이었다. 당시 현암은 도혜 스님과 헤어진 뒤 혼자서 수련 에 몰두하던 중이었다. 현암은 도혜 스님이 물려준 칠십여 년의 막대한 내력과 한빈 거사에게서 전수받은 파사신검이라는 비전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적합한 주술적 무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현암은 길을 살폈다. 산비탈 아래로 불빛이 환히 비추고 있는 마을이 있었다.
“오늘은 저 마을에서 식량을 구해야겠군.”
현암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마을을 향해 내려갔다.
현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을의 분위기가 이상했기 때문이 다. 완전히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왕래하는 사람이 전혀 보이 지 않았다. 작은 구멍가게의 문들도 하나같이 닫혀 있고, 개 짖 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 같았다. 그러나 사방에는 횃불이며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담장마다 나뭇가지가 꽂혀 있었다.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 가지였다. 둘 다 귀 신을 몰아내는 힘이 있다고 민간에 알려진 나무였다.
‘무슨 일이 있기에?’
현암은 궁금했지만 물어볼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수 련을 계속하려면 빈 식량 포대를 채워야 했다. 현암은 막연히 마 을 안을 떠돌고 있었다. 갑자기 한 집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 렸다. 현암은 호기심에 그쪽으로 발을 옮기며 들려오는 말소리 에 귀를 기울였다.
“안 뒤야! 니 죽고 싶어 그러는 기여? 안 뒤야!”
“엄니 이거 놔요! 내 고놈의 구신을……………”
귀신? 현암의 눈초리가 올라가면서 얼굴에 싸늘한 분노의 빛이 돌았다. 현암은 혈기왕성했고 성질도 급했다.
현암이 집 쪽으로 다가가자 이번에는 “어이쿠” 하는 비명과 함께 무엇인지 와르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푸른 불 빛이 번쩍이더니 곧이어 여자의 울음소리와 아우성치는 소리들 이 섞여 들려왔다. 현암은 자루를 팽개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현 암의 불끈 쥔 오른손이 허리께로 올라가자 기운이 주먹 부근에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며 모여들었다. 현암은 오른손 바닥을 펴 서 사립문을 밀치고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무 기둥으로 얼기 설기 엮은 문이 현암의 손바닥에 박살이 나면서 나뭇가지와 수숫대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마당으로 뛰어든 현암의 얼굴에 놀라움과 분노의 기색이 번졌다.
앞마당은 온통 흐트러져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마당 한구 석에는 중년 사내와 노인 남녀가 땅에 구르면서 신음 소리를 내 고 있었다. 그리고 마당 한가운데는 어린 소녀가 허공에 뜬 채 울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소녀의 옷은 거의 찢어져 있었고, 얼마 남지 않은 천 조각마저 떨어져 나가려 했다.
“이 고약한!”
현암은 노호를 터뜨리면서 공중에 떠 있는 소녀 앞으로 날아 들었다. 그러자 정전기 같은 아찔한 기운이 현암의 몸을 순간적 으로 밀쳐냈다. 뒤로 밀려난 현암은 한 바퀴 재주를 넘어 꼿꼿 이 섰다. 현암은 옆에 있던 나무 막대기를 황급히 주워 들었다. 현암이 오른손에 힘을 집중하자, 마른 껍질들이 파파팍 튀어 나 가며 하얀 나무의 속살만이 남았다. 거기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 이 엉기기 시작했다.
“더러운 귀신 놈! 파사신검의 맛을 보여주마!”
현암이 몸을 날려 소녀를 붙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색귀를 덮 쳤다. 순간 소녀의 몸이 땅에 털썩 떨어졌다. 색귀가 현암의 공 격을 피하기 위해 소녀를 놓은 것이다. 앞으로 돌진하는 현암의 막대기 끝에 무엇인가 스쳤으나 정통으로 가격한 것 같지는 않 았다. 표적을 잃고 앞으로 날던 현암은 한 발이 땅에 닿자 몸을 활처럼 구부리고 앉은 채로 뒤를 돌았다. 갑자기 마당 구석에 있 던 괭이가 허공에 붕 뜨더니 현암을 내리쳤다. 현암은 몸을 뒤 집으며 기공력이 깃든 나무 막대기로 괭이를 막았다. 괭이의 목 이 칼로 베인 듯 잘리며 날이 날아가 버렸다. 현암도 충격을 받 고 기둥에 부딪혔다. 지붕이 흔들흔들했다. 현암은 눈앞이 아찔 했으나 정신을 수습하고 색귀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장독 쪽으 로 막대기를 던졌다. 그러나 막대기는 그냥 큰 독에 박혀 버리 고, 거기서 약간 벗어난 왼쪽 싸리나무 담장이 와르르 무너지면 서 뭔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길, 도망쳐 버렸군!”
이 광경을 쳐다보고 있던 세 사람은 멍하니 얼이 빠져 버렸다. 흉한 일을 당할 뻔했던 소녀는 땅에 주저앉아 흐느끼면서 얼마 남지 않은 옷가지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귀신을 잡겠다고 큰소 리를 쳤던 중년 사내와 노파가 달려와 소녀를 감싸 안았다. 소녀 의 할아버지인 듯한 영감이 먼저 침착함을 되찾고 현암에게 말 을 걸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다친 덴읎으신가요?”
현암은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예, 저는 아무 일 없습니다만, 귀신을 놓친 것이 아쉽군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좋을지 모르겠구만유 지 손녀를 구해 주시다니…….”
“저는 그저 지나가던 사람입니다만,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근디 워떻게 고런 흉물들허고 싸우실 수가 있남유? 지들은 당최 뵈는 게 옰는디…..”
서럽게 우는 소녀를 노파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사내가 다가와 현암에게 절을 했다.
“아이고, 지 하나밖에 읎는 딸을 구해 주시다니, 증말 고맙구 먼유!”
“이러시지 마세요. 은혜랄 게 어디 있습니까?”
“아니, 근디 뭔 술수를 쓰셨기에 고 나무막대기 하나루 구신을…….”
“산에서 검술을 약간 수련했습니다. 지금도 수련중인데 식량 을 구하러 잠시 하산했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길이었지요.”
영감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믄 도인………… 도인이시구먼유! 인제 우리 살았네! 살았어!”
“아직 도인은 못 됩니다. 수련을 하고 있을 뿐이죠. 그런데 자 세한 내막을 일러 주시지 않겠습니까? 못된 귀신을 잡아서 도움 이 되었으면 싶군요.”
“아이고, 지발 우리 마을을 구해 주시유! 부탁이유!”
영감은 사내에게 눈짓을 하고는 얼떨떨한 표정의 현암을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현암은 초라하기는 하지만 제법 정갈해 보이는 초가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암은 급하게 차린 밥상을 받으며, 자신의 성을 전(全)이라 밝힌 영감이 곰방대를 빼금거리며 풀어 놓는 마을 이야기를 주 의 깊게 들었다. 영감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밝힌 중년 남자는 구 석에 앉아 있었고, 옆방에서는 노파의 달래는 소리와 소녀의 훌 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파는 전 영감의 안사람이고 중년 남자는 일찍이 상처하여 외동딸만 데리고 이 깊은 산중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고 있다는 것, 그래도 자신의 가게는 예전에 꽤 지체가 있었던 양반 가문이 었다는 의례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나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 되었다. 전 영감의 이야기는 꽤 조리가 있었다.
두봉산은 산세가 크진 않지만 보기보다 깊고 험준한 산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곡절이 많은 산이라 했고, 곡절만큼이 나 산짐승도 많았다. 또한 이 터는 풍수지리로 보아 강한 기운을 품고 있어서 마을이나 절이 산속에 들어서질 못했고, 버스커녕 전깃불도 구경하기 힘든 고장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보다 짐승 을 더 좋아한 어떤 중이 이 산에서 혼자 살았다는 전설까지 남아 있었다. 덕산 마을은 두봉산 한 자락에 외로이 자리한 마을로, 흔한 경운기 하나 없이 아직도 지게질이 일상적인 마을이었다.
이런 덕산 마을에도 가뭄에 콩 나듯 등산객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의기양양하게 등정을 시작한 그들은 초죽음이 되어 내려 오거나 아예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 이 다른 곳으로 하산했으리라 애써 믿으려 했지만, 불안한 마음 을 지울 수는 없었다. 혼비백산해서 내려온 사람들은 꽁무니가 빠져라 마을을 떠났다. 그들은 백주에 바위 위를 날아다니는 귀 신을 보았다느니, 번득거리는 수십 개의 눈동자를 숲에서 보았 다느니,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여우 떼를 보았다느니 하며 횡설수 설했다. 물론 멀쩡히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공통 점이 있다면 두봉산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회운 봉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회운봉에 두봉산의 산신이 산다고도 했고, 또는 천 년 묵은 여우가 산다고 해서 아예 근처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요사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워낙 해괴한 일들이라, 처음에는 쉬쉬하고 넘어갔기 때문에 정확히 그 일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기 어려웠다.
현암이 전 영감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해괴한 일들이라는 것을 자세히 알려 주십시오. 아시는 대로요.”
전 영감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담뱃대를 탁탁 털었다.
“그 일들이라는 게 워낙에 괴이하고 남우세스러운 것이 돼 놔서………….”
“그래도 알아야 대처 방안을 생각할 수 있지요. 하나도 빼지 말고 아시는 대로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말씀은 드리겠지만………….”
사건의 시작은 평범한 농사꾼이던 세열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서 죽고, 세열의 정혼자였던 말숙이 우물가에서 목을 매달아 자 살하면서부터였다. 둘은 혼인을 하기로 약속을 했던 사이였는 데, 난데없이 하룻밤 사이에 둘이 자살을 하자 동네가 발칵 뒤집 혔다. 이 괴변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말숙의 어머니를 다그치자, 말숙의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들려주 었다. 밤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 들어와서는 말숙을 겁탈했다 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누구요? 그러면 아까 그 귀신이 말인가요?” “그류・・・・・・ 말숙이 엄니도 딸한테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믿 지를 않았다는구먼유. 근디 하루는 말숙이 엄니가 직접 그 광경 을 보았다는 거여유. 말숙이 몸이 공중에 떠설랑은 그냥………… 아까처럼 말이유.”
“그러면 보이지 않는 힘이 산 사람을…………….”
“그류. 완전히 겁탈이었어유. 귀신이 아니라믄 워떻게 그럴 수 있었겠시유. 말숙이 온몸에 손바닥 모양의 멍 자국이 생기고 음부에서 피까지 흘렸다고 하는디, 당최 믿지 못할 일이지요.”
“음.
“그담부터는 그런 일이 도처에서 일어났지요. 그전에는 없던 일들이 말이유. 말숙이가 자결을 하자 그 귀신 놈이 다른 상대를 고르는 것 같았시유. 보다시피 이 마을은 손바닥만 한 곳이라 처 녀들도 몇 안 되는디, 거기서도 여덟이나 변고를 당했으니 그런 난리가 어딨겠시유.”
“경찰에는 말씀하신 적이 없었나요?”
“웬걸? 몇 번이나 찾아가 봤었지. 그러나 그놈의 경찰들 이 하루이틀 정도 근무 설 적에는 아무 일도 없고, 가고 나면 또 그런 일이 생기는 걸 워째유. 더구나, 그담에는 대낮인데도 산길 을 타고 파출소에 알리러 가던 젊은 아이 하나가 온몸이 긁히고 찢겨서 신음하는 채로 발견되었지유. 부랴부랴 마을로 옮겼지만 종내 죽고 말았시유. 담부터는 어디 누가 갈라고 하겠시유? 그려 서 남들한테 알리는 것도 못하고 있지요.”
“굿이나 치성을 드린 적은 없나요?”
“아이고, 왜 안 혔겄서유? 저기 동구 밖으로 나가믄 성황당이 하나 있는디, 거기다 치성을 드리면 마을 일들이 잘 풀리곤 했지 유. 근디 요즘은 그나마도 안 들을뿐더러, 성황당 근방에서도 전 에 없던 요상한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나지 뭐여유. 그리고 말숙이가 죽은 바로 뒤에 무당도 몇몇 불렀는디, 통 효험도 없고 무당 하나까지도 죽어 버렸지 뭐유…..”
“예? 무당이 죽었어요?”
“말허긴 좀 민망하지만, 그 무당이 밤에 갑자기 숲으로 들어가 더니 다음 날 옷이 갈가리 찢겨져 알몸뚱아리만 남아서 난행당 해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지요. 그러니 우리가 뭘 워떻게 하겠 서유? 다만 우리 식구가 당하지 않게 빌 뿐이지.”
“그런데 아까 성황당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글씨, 밤마다 당산나무 근처에서 여자 우는 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바람이 불고 안개도 서리고………… 그려서 요즘은 해가 진 다음에 성황당 근처로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지요. 물론 낮에는 많이들 가서 빌기도 허고, 돌탑도 쌓고 그러지만유. 마을 사람들 중에는 성황님이 대로하셔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믿는 사람들 도 있지요.”
“그러면 영감님도 이 괴이한 일들이 성황당에 치성을 잘못 드 려서 일어난 걸로 생각하시는가요?”
“글씨, 진 모르겄서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뭘 알겠남유?” “제 생각으로는 이런 일을 저지르는 귀신은 성황당에서 일어 나는 일과는 무관하다고 봅니다. 일단 그 색귀가 여자들을 겁탈 하고 다닌다면, 필경 남성, 적어도 양성 귀신인 것만은 확실하지요. 그런데 성황당 부근에서 여자의 귀곡성이 들린다면, 그 성황당의 터주는 여성일 테니까요.’
“아이고, 그러믄 귀신인지 뭔지가 둘이나 된다는 거여유? 한 놈만 혀두 삭신이 떨리는 판인디, 두 군데서나 괴이한 일이 벌어 진다면 대체 워떻게 살 수 있단가유?”
“두 가지 이상한 일이 관련이 있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군요. 영감님 혹시 그 성황당의 유래에 대 해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건 지도 잘 몰러유.”
“누가 알죠?”
“글씨, 저렇게 오래된 성황당에 무슨 내력이 없으라는 법은 없 지만서두, 그걸 아는 사람두 옰는 것 같구먼유.”
현암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 마을에 전혀 다른 두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니…………. 그러나 성황당의 일은 그렇 게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마을에서 날뛰는 색귀의 일이 중요했다. 색귀는 심령 과학 책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흔한 현상 중의 하나였다. 문제는 현상 자체보다도 그런 일을 벌이는 존재의 정체나 나아가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연유를 알아 내는 데 있었다. 현암은 전 영감이 잠깐 언급한 여우 떼 이야기 를 생각해 냈다.
“아까 여우 떼를 본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는데, 이 동네에 여우가 많이 나오나요?”
“요즘은 없지. 젊었을 때만도 있었지만, 포수들이 많이 와서 는 다 잡아 버렸지. 아까 등산객들이 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헛것을 본 걸 거유. 눈 씻고 봐야 여우는 없어.”
“아무튼 색귀를 잡지 못했으니, 그놈은 언제라도 다시 나타날 겁니다. 그러니 빠른 시간 내에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 록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일단은 관계가 없는 것 같 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성황당엘 가 봐야겠군요. 위치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아니, 지금 가시겠다구요? 아이고, 귀신이 나타나면 워쩌시 려구? 내일 날이 밝으면 가시도록 허서유.”
“아닙니다. 내친김에 가야죠. 그런데 혹시 영감님, 칼을 하나 얻을 수 없을까요?”
“칼?”
“예, 아무래도 녀석을 상대하려면 무기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이 산중 마을에 무슨 칼이 있겄시유. 부엌칼이라믄 모를까.”
“그런 것을 무기로 쓸 수는 없죠. 그러면 단단한 쇠막대기라도 구할 수 있을까요?”
“그거야 있지요. 헛간에 가면 있을 거여유.”
현암이 헛간에서 쇠막대기 두 개를 주워 들고 전 영감이 일러 준성황당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웠고, 성황당으로 가는 길은 꼬불꼬불하니 꽤 험했다. 현암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오른손에 쇠막대기 하나를 들고 왼손에는 태극패를 꺼내 들었다. 다른 하나의 쇠막대기는 허리춤에 찔러 넣어 두었다. 태극패는 한빈 거사가 물려준 것으로, 뒤에 붙은 동경)에 기공을 실어서 비추면 영의 형체를 볼 수 있었다. 현암의 귀에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째질 듯한 여자의 비명과 겁에 질린 남자 목소리였다. 현암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재 빠르게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우거진 나뭇가지를 헤치자 눈앞 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젊은 여자 하나가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었고, 한 청년이 공중에 떠서 역시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둘 다 알몸이었다. 한 켠에 옷가지가 차곡차곡 쌓 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은밀한 곳에서 만나 밀회를 나누던 중인 듯했다. 청년은 허공에 떠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철 썩철썩 따귀를 얻어맞고 있었다. 현암은 순간적으로 그 귀신이 색귀와 동일한 존재라고 단정했다. 현암은 태극패에 기공을 집 중하여 귀신이 있을 곳을 비추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청년의 뒤 를 덮쳤다. 태극패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이 돌자, 현암은 동경으 로 청년의 뒤를 비추어 보았다. 거울에는 희미하게 여자의 형체 가 반사되어 보였다. 상대가 여자인 것을 보고 현암은 당혹했지 만, 어쨌거나 다짜고짜로 쇠막대기에 기공을 집중하여 영이 있 는 곳을 후려갈겼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기공이 실린 쇠막대기가 삼분의 일쯤 잘려 나갔다. 현암은 놀라서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도대체 보통 의 쇠막대기도 아닌 기공력이 실린 쇠막대기를 잘라 버리다니? 그건 일반적인 영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만 보니, 청년 의 등 뒤에 번쩍거리는 작은 것이 떠 있었다. 얼른 태극패의 동 경으로 비추어 보니, 여자의 영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청년의 뒷 덜미를 잡고 서 있었는데, 한 손에 작은 물건이 들려 있었다.
‘영력을 물건에 주입해서 쇠막대기를 잘라 냈구나! 그렇다면 저것은 칼?’
현암이 태극패의 동경을 다시 보려는데, 청년의 몸이 땅에 풀 썩 떨어졌다. 청년은 기절한 상태였다. 뒤쪽에 있던 처녀가 갑자 기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언뜻 보니 처녀의 손에 그 작은 물건 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작은 은장도만 한, 양쪽에 날이 선 비수 였다. 지금 여자의 영은 재빨리 자리를 옮겨 처녀의 몸에 빙의하 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현암이 상대하기가 더 곤란해 진다. 알몸의 처녀를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려운 판에 맞붙어 싸 우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현암은 태극패에 기공을 주입하여 처 녀의 머리 위로 던졌다.
태극패에 파사의 기운이 있으니 효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 다. 그러나 장도(粧刀)를 쥔 처녀의 손이 치켜 올라가자 태극패 는 칼에 차단당하여 그만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현암은 놀라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한빈 거사의 태극패는 악에 대해 철저 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데, 저렇게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다 니…………. 완전히 빙의가 끝난 듯, 처녀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 다. 처녀의 어수룩한 얼굴이 서른 살쯤 된 얼굴로 변하고, 눈이 크게 벌어지며 눈썹이 위로 치켜져 올라갔다. 얼굴색은 납처럼 창백했다. 그러나 생전에는 미인 소리를 들었을 법하게 고운 자태가 남아 있었다. 현암은 정신을 가다듬고 소리를 쳤다.
“너는 누구냐? 왜 이런 짓을 하지?”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앞서 옆에 있던 옷가지를 끌어다가 몸을 덮었다. 현암은 어이가 없었다. 색귀인 주제에 부 끄러움을 타는 것도 아닐 텐데. 몸을 가린 여자가 현암을 째려보 았다. 눈빛이 하도 강해서 뒤로 물러설 뻔했던 현암은 심호흡을 하고 배짱 좋게 외쳤다.
“대답해, 색귀! 안그러면 혼을 내 줄 테다!”
여자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변하더니 깔깔 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화난 표정으로 돌아갔다. 처녀의 몸에 빙의되었으 니 말도 할 수 있을 터인데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현 암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여자의 영인데 여자들을 덮친 다는 것은 아무리 사람이 아닌 영의 일이라도 어색한 구석이 있 었다. 또 힘을 쓰는 형태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이 여자의 영 은 전 영감의 집에서 싸웠던 색귀와는 달리 푸른 불꽃이 일어나지 않았다. 현암은 눈앞의 여자를 색귀라고 단정 지을 순 없었지만, 다그쳐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누구냐? 왜 말을 안 하지?”
여자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우울함이 깃들어 있었다. 여자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옆으로 살 짝 흔들었다.
‘어라? ・・・・・・ 저런 말을 하지 못하는 여자였구나.’
현암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살아생전에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지박령이 되었다면, 빙의가 되어도 말하는 법을 모를 수 있으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고달팠을까?
여자가 잠시 현암을 쳐다보더니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현 암의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현암은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 을 열었다. 눈앞에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던 귀신이 있는데도 왠 지 다른 때처럼 증오심이 들지 않았다.
“그 칼은 뭐지?”
여자가 손가락을 뻗어 땅에 글자를 썼다.
月香.
“월향? 칼의 이름인가?”
여자는 살풋 웃는 표정을 지었다. 현암이 멀뚱히 질문만 해대 는 것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현암은 월향이라는 이름이 칼의 이 름일 뿐 아니라 혹시 저 여자의 이름은 아닐까 상상해 보았지만 여자는 표정에서는 다른 것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저 남자를 괴롭혔지?”
여자의 얼굴이 매섭게 변하더니 손을 들어 아직 흩어져 있는 청년의 옷가지들을 가리키고 다시 성황당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얼굴을 붉혔다.
‘아하, 청년과 처녀가 여기서 그런 짓을 한 것에 대해 화가 난게로군.’
“그거야 이해해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걸 구태여 ……….”
현암이 기절한 남자의 변명을 해 주려고 하는데, 여자가 머리 를 양손으로 감싸고 미친 듯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갑자기 사방 에서 광풍이 일어나고 나뭇잎들이 흩날렸다. 엄청나게 강한 거 부의 표시였다. 현암은 투시나 영사를 행할 수 없었지만, 여자의 표정 속에서 어렴풋이 고통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왠지 이 여자의 영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무래도 묘한 경우였다. 싸우기커녕 귀신과 넉살 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을 할 수 있다니…………. 현암은 갈수록 이 영 에 대해 호기심과 친근감이 느껴졌다. 더불어 투쟁심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미안, 미안하다. 사연이 있나 보군.”
여자가 동작을 멈추고 현암을 쳐다보았다. 눈빛에 고통과 슬픔, 그리고 얼음 같은 싸늘함이 뒤엉켜 있었다.
“오해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자꾸만 이상한 일들 이 벌어지고 있어. 알고 있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초리에 격렬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너는 주로 성황당에 붙어 있겠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의 정체는 뭐지? 그리고 그놈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데, 네가 마을 사람들의 치성을 받는 성황으로서 그 일을 막을 용의 는 없었나?”
여자의 얼굴이 흐려졌다. 여자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다 시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힘이 모자란다고? 아니, 너 정도의 힘이라면…………….”
여자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더럽고 추한 것을 떨쳐 버리려는 몸짓 같았다. 현암은 대강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색귀는 분명 성 황의 터주로 있는 여자의 영과는 다른 존재였다.
이 여자의 영은 살아생전에 어떤 성적인 이유로 깊은 원한을 품고 죽은 것이 분명했다. 저 청년을 마구 골려 준 것을 보면 증오 심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 이 유로 이 여자의 영은 색귀가 저지르는 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그것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지저 분한 일에 끼는 것 자체가 본능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현암이 생각을 하는 동안 여자는 가만히 현암의 얼굴을 쳐다
보고 있었다. 현암이 소리를 질렀다.
“내 생각이 맞나? 정말 그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켕기는 눈빛이었다. 현암은 화가 울컥 솟아올랐다.
“에잇, 바보 같으니!”
여자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그런 일로 원한을 품고 성황신으로 남았다면, 당연히 앞 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할 텐데 더러워서 피해?”
여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무서우리만큼 화난 표정 이 되었다. 성질이 치민 현암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현암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무력하게 동생을 잃고 복수 심만을 키우던 과거의 현암 자신에게 말이다.
“그런 색귀가 돌아다니는 데도 보고만 있을 거냐?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네가 그토록 원한이 깊은데도, 다른 사람들 일이니 까 괜찮다는 거야? 너희도 한번 당해 봐라 이건가?”
여자의 손에서 월향이라는 칼이 휙 하고 날아왔다. 무서운 기 세였다. 현암은 자신의 말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여자의 성질 이 고약하게 느껴졌다. 일단 칼을 피했다. 칼은 다시 호를 그리며 돌아왔다. 현암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쇠막대기에 순간적 으로 기공력을 실어 날아오는 칼을 후려갈겼다. 쨍 하고 불똥이 튀면서 현암의 손아귀가 뻐근해졌다. 쇠막대기가 자루부터 부러 져 나가고 날아오던 월향검도 뒤로 떨어졌다. 여자는 마치 자신 이 얻어맞은 것처럼 크게 비명을 질렀다. 현암은 앞에 떨어진 칼 을 집으려다가 놀랐다. 그리고 확인 삼아 허리춤에 차고 있던 쇠 막대기를 꺼내 땅에 떨어진 칼을 쿵 찧어 보았다. 그러자 또 다 시 여자가 처참한 귀곡성을 울렸다.
‘이 칼과 저 여자의 영은 서로 통하는구나.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
현암은 월향검을 집어 들었다. 십오 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작 은 칼이었다. 퍽 오래돼 보이는 칼이었지만 여전히 반짝반짝 광 이 나 있었고, 손잡이에는 세밀한 조각이 칠보로 수놓아져 있었 다. 그리고 한 귀퉁이에는 조그맣고 예쁜 필체로 ‘月’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현암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얼굴 이 빨개져서 현암을 이를 악물고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아픈 듯이 어깨를 문지르고 있었다. 혼령이 통하는 물건을 기공력이 실린 힘으로 때렸으니 그럴 법도 했다. 현암은 직접 여자를 때리 기라도 한 것 같아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하긴 자신이 심한 말 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친근감이 드는 영이었는데 두들겨 패기 까지 하다니. 그러고 보니 여자가 칼을 날리기는 했지만 현암을 해칠 뜻은 없었던 듯했다. 아마 현암이 피하지 않았어도 칼이 현 암을 맞히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암은 울적한 기분이 들어서 한숨을 내쉬며 여자에게로 칼을 던져 주었다. 여자는 놀란 표정으로 칼을 받았다. 현암은 외면한 채로 말했다.
“미안해. 앞으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마. 이제 가.”
여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서서히 시골 처녀의 몸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시골 처녀의 얼굴이 점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면서 앞으로 푹 쓰러졌다. 월향검은 반짝거리면 서 보이지 않는 여자 영의 손에 들려 성황당 뒤로 돌아갔다. 현 암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때까지 정신을 잃고 있는 청년과 처녀를 흔들어 깨웠다.
현암은 처녀와 청년에게 그들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일어 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는 이곳 주위에서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성황당은 영 험한 곳이니 무슨 일이 있으면 치성을 드리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둘은 허겁지겁 성황당에 절을 하면서 잘못을 빌었고, 현암 은 그런 그들의 순진한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들은 곧 결혼할 사이인데, 마을이 하도 소란스러워 식을 올리지도 못 하고 그런 짓을 했노라고 말하며 부끄러워했다. 현암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을로 돌아온 현암은 전 영감의 부탁으로 이틀을 더 집에서 묵었다. 그사이 회운봉을 두 번이나 올라가서 살폈지만, 등산객들과는 달리 이상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단지 계곡에 있 는 어느 동굴에서 오래된 낙서를 보고 놀랐을 뿐이다. 사람과 동 물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오래된데다 솜씨가 조잡해서 잘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마을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 자 현암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색귀를 빨리 찾아내서 물리쳐 야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수련을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마 냥 기다리고 있자니 울화통이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 루가 더 지나고 마침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전 영감의 손녀딸인 순례에게 다시 색귀가 덮친 것이다. 월향 과의 싸움에서 쇠막대기로는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현암이 저녁 무렵 엉성하나마 검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하여 대장 장이인 최영감에게 가 있는데 전 영감이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아이고, 왔시유! 또 그 귀신이유!”
“예? 이런! 어딥니까?”
“우리 집이유! 아이고, 어서 서둘러 주시유! 우리 아들이 대들 다가 뭇매를 맞고 나만 간신히 도망쳐 나왔시유!”
현암은 전 영감의 집으로 달음질쳤다. 막 사립문을 밀고 들어 가는 순간, 현암의 뒤통수에 큼지막한 돌멩이가 날아와서 명중 했다. 현암은 뒤통수에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현암의 눈앞에서 전 영감의 손녀 순례가 울면서 허공에 떠오르 고 옷이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색귀는 한 녀석이 아닌 듯했다. 몸을 일으키려 해도 무엇인가 현암을 위에서부터 잡아 누르고 있었다. 저만치에는 전 영감의 아들이 마당 구석에 옴짝 달싹 못하고 눌려 있었다. 순례는 소리를 지르려 하고 있었지만, 누가 틀어막고 있는 듯 입 모양을 일그러뜨린 채 아무 소리도 내 지 못하고 있었다. 현암이 이를 악물고 기공을 끌어 올렸다.
“이얍!”
현암이 오른손에 힘을 모아 땅바닥을 힘껏 치자 땅이 세 치쯤 움푹 파이면서 몸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 바람에 현암을 누르고 있던 힘이 나가떨어지면서 장독 하나가 요란스럽게 부 서져 버렸다. 현암은 오른손에 힘을 가하여 장독 주위를 갈겼다. 보이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정통으로 부딪히는 느낌이 왔다. 그 놈은 짐승처럼 “캥” 소리를 내고는 허물어져 버렸다.
‘응? 이놈들은 사람이 아니구나!’
여우 소리였다. 현암은 태극패를 꺼내어 마당 구석에 눌려 있 는 전 영감 아들의 머리 위를 향해 던졌다. 또다시 퍽 하는 소리 와 함께 여우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는 여우였다. 현암이 몸을 돌려 순례 쪽으로 달려갔다.
“이런 고약한 것들! 짐승 주제에!”
현암이 노호를 터뜨리자 집이 쩌렁쩌렁 울렸다. 일을 당할 참이던 순례의 몸이 털썩 땅에 떨어지면서 요사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킬킬킬.”
현암은 얼른 손을 뻗어 순례를 끌어당겼다. 순례의 아버지가 순례를 받아 안았고, 전 영감이 헛간에서 쇠막대기를 찾아서 현 암에게 던져 주었다. 현암이 공력을 가하자 쇠막대기가 웅 하는 소리를 냈다.
“너는 웬 놈이냐? 보아하니 네놈은 사람 같은데?”
“킬킬킬. 제법 재주가 있는 놈이로구나.”
순간 현암의 등을 향해 뭔가 휙 날아들었다. 재빨리 고개를 숙 여 피하고 보니 낫이었다. 현암은 섬뜩했다. 분명 목소리는 앞에 서 들렸는데, 일당이 또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현암의 옆에서 돌멩이가 날아왔다. 현암이 쇠막대기로 받아치자 돌멩이는 허공 에서 가루가 되어 버렸다.
“고약한 놈, 정체를 밝혀라!”
“킬킬킬・・・・・・・ 멍청한 놈.”
흉악한 웃음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현암은 뒤를 쫓으려 했 으나 육중한 힘이 어깨를 후려갈기는 바람에 풀썩 주저앉고 말 았다. 경맥이 막혀 있어서 위력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래도 현암의 몸에는 도혜 선사가 물려준 막강한 내력이 있어서 주저앉는 정도로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즉 사하거나 어깨가 떨어져 나갔으리라. 현암은 고통을 참으며 자 신을 내려친 놈을 향해 쇠막대기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크아앙!” 하는 짐승의 괴성과 무엇인지 땅에 풀썩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여우가 아니라 곰의 울음소리였다. 어깨를 내려 친 놈의 힘은 분명 곰이 후려갈긴 정도의 위력이었다. 현암은 다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이런 산속에 살던 동물들이 귀신이 되어 내려왔구나!”
전 영감은 그 소리를 듣고 입을 벌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저, 저런! 중이로구나! 전설로 내려오던 짐승을 부리는 중!”
현암은 전 영감에게서 얼핏 들었던 전설을 떠올렸다. 사람보 다 짐승을 좋아하여 산속에서 짐승과 함께 살았다는 중. 그러나 중이라는 말 때문에 현암은 색귀와 관련이 없을 것으로 여겨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짐승들의 영을 부린다면…………. 그렇다면 저 색귀는 엄청나게 오래된 귀신이 틀림없다.
“영감님,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현암이 또 달려드는 짐승의 귀신을 쇠막대기로 후려갈기면서 소리를 질렀다. 전 영감은 마당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벌벌 떨 면서 말을 더듬고 있었다. 현암은 정신없이 쇠막대기를 휘저으 면서 소리를 쳤다.
“어서요! 알아야 대응을 할 수 있어요!”
“그 중은・・・・・・ 파계승이라고만 했는데………… 한 백 년, 백년전 쯤…….”
전 영감의 떠듬거리는 이야기가 너무 답답했다. 건너편 집에
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현암은 당황했다.
“이런 나를 여기 잡아 놓고 다른 집을 노렸구나!”
현암은 몸을 솟구쳐 사립문을 산산이 부수면서 뛰어나갔다. 마을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온갖 짐승의 영들이 살았을 때와 똑같은 힘으로 날뛰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은 공포에 질려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짐승들의 수효는 언뜻 헤 아려 보아도 삼십 마리 이상은 될 듯싶었다. 놈들을 일일이 상대 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두목인 색귀를 잡는 것이 중요했다. 현암은 옆집 수수깡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면서 허공에 떠오르 는 그 집 여자의 앞에다 쇠막대기를 던졌다. 그러나 쇠막대기는 마치 바위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쨍 하는 소리를 내더니 땅 바닥에 떨어졌다. 현암은 멈추지 않고 몸을 굴리면서 기공력을 오른손에 실어 허공을 갈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현암의 손목 이 뻐근해졌다. 싸늘하고 단단한 감촉이 바위를 친 것 같았다.
‘바위? 그렇다면 놈은 몸이 돌로 돼 있단 말인가? 아니, 아니 다! 그 그림!’
현암은 회운봉에서 발견했던 그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 그림은 중이 죽기 전에 그려 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날뛰고 있는 동물들도 바위 벽의 그림에 그려져 있던 것들일 테 고, 이것들이 어떤 주술을 통해 형상화되어 악행을 저지르고 있 음이 확실했다.
“이놈! 이제 정체를 알았다! 내 당장 바위로 가서 모조리 부숴 버릴테다!”
현암이 일갈하자 이상한 파동이 느껴졌다. 현암의 위협에 당 황하는 것 같았다. 현암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이 색귀는 처음엔 짐승들을 키우며 산속에 칩거하다가 어떤 계기로 여자를 접한 이후로 색에 빠졌을 것이다. 그렇게 완전히 파계의 길로 치달아, 그동안 닦았던 주술력을 부려서 죽은 후에까지 못 된 짓을 일삼는 것이 분명했다. 색귀가 음산한 소리를 냈다. “이 우라질 놈, 내 앞을 가로막는 놈은 가만두지 않는다!” 색귀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면서 용을 쓰는 듯하더니, 전기 와 같은 강력한 힘이 현암에게 부딪쳐 왔다. 현암은 단전에 힘을 넣고 정면으로 맞섰다. 푸른 불꽃이 튀면서 현암의 몸이 뒤로 밀 려났다. 오른손에 힘을 모아서 자기를 밀어내는 색귀를 후려쳤 으나 단단한 돌을 치는 느낌이었다. 현암은 실수했다는 것을 깨 달았다. 현암의 몸에서 기공력이 제대로 소통되는 곳은 오른손 과 하단전뿐이었다. 색귀는 현암의 약점을 눈치채고 현암을 얼 싸안듯이 꼼짝 못하게 붙잡아 버린 것이다. 지금 현암에게는 무 기도 없었다. 태극패는 전 영감의 아들을 구하느라 던져 버렸 고 쇠막대기마저 떨어뜨리고 없었다. 아무리 기공력을 모았다고 는 하지만 맨손으로 바위를 치기는 무리였다. 커다란 돌덩이 같 은 힘이 현암의 등을 강타했다. 기공으로 보호하고는 있었지만, 양쪽의 힘 사이에 끼이자 현암은 “컥” 하고 숨이 막혔다. 색귀가 부리는 모든 짐승 귀신들이 현암을 공격하는 듯했다. 현암은 유 일하게 자유로운 오른팔을 휘둘러 몇 놈을 뿌리쳤지만 놈들은 사방에서 쉴 새 없이 현암에게로 달려들었다. 또다시 뒤에서 타 격이 왔다. 멧돼지 같았다. 현암은 기혈에 충격을 받고 피를 울 컥 토했다. 그 광경을 본 마을 사람들이 비명과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어 호미며 낫을 허공에 대고 휘둘러 댔지만, 영력이 깃들 지 않은 농기구들은 헛되이 영들을 통과해 버릴 뿐이었다.
“맛이 어떠냐? 킬킬킬………. 저번에 네놈과 겨루고 나서 바위 의 기운을 몸에 넣었다. 이제 너 따위는 상대가 안 돼!”
눈앞이 침침해졌다.
그때 이쪽으로 달려오는 어떤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성황당 에서 총각과 함께 수모를 당했던 처녀였다. 그녀의 손에는 반짝 이는 월향검이 들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얼굴은 성황당 에서 만났던 친근한 여자 영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상황이 위급 해지자 처녀가 성황당으로 달려가 빌었고, 거기에 깃들어 있던 여인의 영이 빙의되어서 도우러 온 것이다.
현암은 반가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동 물령과 색귀가 현암의 몸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몇몇 동물 령들이 현암을 떠나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여인이 월향을 뽑자 서늘한 검광이 번쩍였다. 동물령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시골 처녀의 몸에 씌어 있는 여인의 영을 공격했다. 월향검은 무서운 빛을 번득이며 휘둘러지고 있었지만, 동작이나 힘이 엉성했 다. 마구잡이로 휘둘러 댈 뿐이어서 몇 놈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현암은 안타까웠다.
저칼⋯⋯⋯⋯ 저 칼을 쥘 수 있다면……….
다시 옆구리에 강한 충격이 왔다. 어지간한 현암도 비명을 올 릴 수밖에 없었다. 내상을 입은 듯, 목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갑자기 현암을 잡고 있던 힘이 풀리자 현암은 헝겊 인형 처럼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아직 의식을 잃지는 않았고 기공 력도 남아 있었지만, 극심한 충격에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월향검을 휘두르면서 동물의 영과 대적하고 있던 여인이 당혹 한 표정을 지으면서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본 현암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색 귀가 여인의 영에게 흑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킬킬킬, 저런 미인이 있다니. 그것도 다른 계집의 몸을 타고 있구나! 마침 잘됐다! 킬킬킬……”
동시에 동물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 사람들을 몰아붙이 기 시작했고, 색귀는 조금씩 여인에게로 다가가고 있는 듯했다. 여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으면서 월향검에서 날카로운 광채가 뿜 어져 나와 서서히 엉겼다. 간신히 고개를 돌린 현암은 그 광경에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것은 저것은 검기다! 도혜 스님의 칠십 년 내력으로도 간 신히 맺을 수 있었던 검기가………………
여인은 검술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 자신과 혼령이 통하는 작은 칼에다 스스로의 집념과 의지, 원한을 몰아 넣고 있었다. 그래서 작은 칼에 전설상으로만 내려오던 검기가 맺힌 것이다. 현암은 과거 한빈 거사에게서 검기가 맺히는 시범 을 볼 수 있었고, 현암 스스로도 혼신의 공력을 다하면 칼에 반 자 정도의 검기를 맺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통 칼은 그 정도 의 기공력을 밀어 넣으면 산산이 조각나곤 했다.
현암은 안타까웠다. 애써 기공력을 돌리자 오른팔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 현암은 힘들게 기어서 색귀와 여인이 있는 쪽 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목구멍에서 피가 솟구치고,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극심했다. 여인의 영은 활활 타는 눈으로 색귀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 자세는 너무도 엉성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월향검에 쏟아서 찬란한 검기를 만들어 내고는 있었지만…………….
갑자기 돌멩이들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여인을 향해 날아들었 다. 여인이 월향을 휘두르자 돌 몇 개는 아예 가루가 되어 버렸 지만, 나머지는 여인의 몸을 쳤다. 여인이 비틀거렸다. 현암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위험해! 어서, 어서 피해!’
하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색귀는 어느새 여인의 뒤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현암은 자신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안 타까웠다. 여인은 뒤에서부터 붙들린 듯, 팔을 움직이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갑자기 몸에서 파란 불꽃이 일어나더니 여인은 몸을 부르르 떨고는 그만 월향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킬킬킬, 발버둥치지 마라! 귀신이라도 도망칠 수 없다! 어차 피 죽은 것이 왜 앙탈을 부리는 거냐?”
여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입술을 악물었다. 여인은 자기가 빙의된 시골 처녀의 몸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색귀가 술수를 부린 것이리라. 여인의 영이 색귀와 맞서지 않은 이유를 현암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상대가 되지 않을뿐더러, 귀신이 되어서도 욕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시골 처녀, 아니 지금은 그 여인이라 해야 할 것이지만, 그녀 의 옷이 부욱 찢겨져 나갔다. 여인은 시골 처녀의 몸을 벗어나려 는 듯, 시골 처녀의 얼굴과 여인의 얼굴이 순간순간 변화를 반복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색귀가 붙들고 있어서인지 여인은 시골 처 녀의 몸을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현암은 이를 악물고 땅에 떨어진 월향검을 주웠다.
최후의 승부로 기공력을 칼에 실어 던지면, 제아무리 바위의 힘을 빌려 몸을 굳히고 있는 색귀일지라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 았다. 현암이 월향검을 집어 들자 안에 깃들어 있는 이름 모를 여인의 한과 분노가 마치 전류처럼 현암의 몸에 퍼져 갔다. 현암 이 마지막 남은 기공력을 집중하자 월향의 끝에서 검기가 일어 나기 시작했다. 현암은 칼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모든 힘 을 쏟았다. 그러자 우우웅 하는 울림과 함께 월향검에서 검기가 한자 이상이나 뻗어 나왔다.
여인은 거의 알몸이 되어 있었다. 순간 색귀가 월향검의 소리 를 들었는지 놀란 소리를 질렀다.
“으헉! 저건 검기! 너, 너 같은 어린놈이 어떻게!”
색귀도 살아생전에 무예를 닦은 경험이 있었던 듯, 만신창이 가 된 현암의 손에 들린 검기를 보자 기겁을 했다. 그러나 높은 현암이 오른팔 말고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간교하게 도 여인을 앞세웠다. 현암은 깜짝 놀라 월향검을 던지려던 동작 을 중지했다.
“칼을 버려라! 바보 같은 놈! 이 여자, 아니 두 여자를 한꺼번에 죽이고 싶냐?”
색귀가 뒤에서 목을 조르는지, 여인의 머리가 뒤로 꺾이며 고통 스러운 표정을 짓었다. 그러나 여인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서, 어서 칼을 버려! 계집의 모가지가 부러지기 전에!” 현암은 갈등했다. 기공력의 극한이 실린 이 검을 맞으면 사람 뿐 아니라 귀신이라 해도 그 자리에서 소멸하고 만다. 더구나 칼 을 직선으로 던질 수밖에 없을뿐더러, 자신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방향을 틀지도 못한다.
갑자기 현암의 머릿속에 성황당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월향검 과 여인의 영은 이어져 있어 칼에 타격을 주면 영도 같이 타격을 입게 된다. 현암은 순간적으로 월향검의 검기를 거두고 칼끝을 땅에 대고 눌렀다. 그러고는 칼끝을 굽혔다가 강하게 튕겼다. 여인의 몸이 앞으로 격하게 젖혀지며, 색귀가 튕겨져 나가는 듯했다. 여인이 비틀거리면서 재빨리 고개를 숙였고, 이 틈을 놓 치지 않은 현암은 월향에 검기를 실어 힘껏 던졌다.
여인의 뒤에 서 있던 굵직한 소나무가 삽시간에 두 동강이 나 면서 무너졌다. 월향은 그 뒤쪽의 아름드리나무에 깊숙이 박혔 다. 색귀는?
“으윽, 이 노옴!”
색귀의 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 고 여인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여인이 발길에 차인 듯 휘청거리 더니 현암의 옆에 엎어졌다. 현암의 바로 앞 허공에서 푸른 전기 가 감돌면서 차츰 형체를 갖추어 갔다. 그것은 희미한그림자처 럼 어른거리더니 갑자기 투명한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키가 작 고 눈썹이 굵은, 흉하게 생긴 중의 몰골이었다.
“이 연놈들, 내게 부상을 입히다니 죽여주마!”
색귀는 사납게 달려와 현암과 여인을 발로 걷어찼다. 저항할 수가 없었다. 큰 바위의 기운을 입어서 그런지, 놈이 투명한 다리로 걷어찰 때마다 거대한 돌에 얻어맞는 것 같았다. 현암은 이 제 마지막이구나 싶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색귀가 소나무 옆에 있던 집채만한 바위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아예 납작하게 만들어 버릴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때 옆구리를 차여 신음하고 있는 처녀의 몸에서 희미한 기 운이 일었다. 현암은 고개를 돌려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 처녀의 얼굴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현암은 자포자기했다.
‘오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없애 주마!’
막 눈을 감으려던 현암의 눈에 월향이 보였다. 월향에는 희미 한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칼자루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색 귀는 이제 집채만한 바위를 집어 들어 머리 위로 올리는 참이 었다.
그 순간 나무에 꽂혀 있던 월향검이 스르르 빠져나오더니 눈 부신 호선을 그리면서 현암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여인의 영이 조종하는 것이 분명했다. 현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월향검을 잡은 손에 기공력을 가했다. 검기가 두 자 넘게 뻗어 나왔다. 현 암이 월향을 뿌림과 동시에 색귀 또한 바위를 던지고는 몸을 숙였다.
현암은 옆에 쓰러져 있는 시골 처녀를 오른손으로 밀치고는 땅을 후려쳤다. 처녀와 현암의 몸이 양쪽으로 비껴 날아가는 동시에 바위가 떨어지며 땅을 울렸다.
기공력을 실어 날카로운 검기를 담은 월향검은 여인의 혼의 조종을 받아 직선이 아닌 곡선을 그리며 우아하게 날아갔다. 현 암은 긴박한 와중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엄 청난 영기를 담아 무서운 검기를 뿜으면서 허공을 가르고 날아 가는 작은 검…………. 전설이나 고서에 실려 있는 어검술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모습이나 위력은 비슷했다. 월향검은 재빨리 몸을 숙인 색귀를 비웃기라도 하듯, 마치 물 찬 제비처럼 밤하늘 위로 솟구쳤다가 똑바로 하강했다. 월향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찢어질 듯한 귀곡성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월향에 깃든 벙어 리 여인의 한과 분노에 찬 고함이자 애틋한 노래이기도 했다. 현암의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월향의 일격에 색귀의 푸르스름한 오른쪽 어깨가 잘려 나가더 니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색귀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 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현암은 기공을 실은 오른손을 펴서 위 로 세웠다. 월향은 현암의 뜻을 알아차린 듯, 날렵하게 땅 위를 우아하게 미끄러져 돌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색귀의 왼손이 부 서져 버렸다. 지금의 현암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오직 맹 목적인 증오심으로 칼을 조종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월향의 빛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색귀의 고통에 찬 아우성은 월향의 귀곡성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색귀는 쓰러질 수조차 없었다. 월향이 사방에서 색귀의 몸을 난도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색귀의 두 발목을 자르고, 이어 서 월향검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색귀의 목을 따 버렸다. 색귀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러면서도 놈은 떠들었다.
“자, 잔인한 계집……… 이 독한 년………… 내 마지막 힘으로 네년 은 칼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하리라. 아무도 이 저주는 풀지 못할 것이다.”
월향은 다시 허공에 떠오르더니, 색귀의 저주에는 아랑곳없이 격렬하게 맵을 돌다가 떨어져 나간 색귀의 머리에 꽂혔다. 머리 가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현암은 망연히 엎드린 자세로 무시무시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한 악령이었지만, 색귀가 참혹하게 소멸되는 것을 보자 식은땀이 저절로 났다. 월향검이 힘이 빠진 듯, 광채 가 무뎌지며 현암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현암은 복잡한 마음으 로 칼을 지켜보았다. 색귀의 마지막 저주가 사실일까? 정말 여인 의 영은 월향검에 봉인된 것일까?
땅에 떨어진 월향검이 꿈틀거렸다. 현암은 신기하게도 그 칼 의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여인의 영이 칼에서 빠져나오려는 몸짓이었다. 월향검에서 희미하게 신음 소 리가 들렸다. 현암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현암은 눈물을 흘리면서 월향검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월향검은 꿈틀거리면서 조금씩 현암을 피해 도망치는 듯했으나, 힘이 있어 보이 지는 않았다. 현암은 입을 열었다.
“아, 가엾게도…… 미안하다. 나 때문에, 나를 구하려고…..”
월향검이 바르르 떨었다. 조그마한 칼・・・・・・ 비록 엄청난 위력 과 냉혹함을 보이긴 했지만, 이제 작은 칼은 애처롭기만 했다. 현암은 조심스럽게 월향검을 감싸 쥐었다. 칼은 여전히 떨고 있 었다. 현암은 차가운 칼날에서 오히려 따스함을 느꼈다.
월향검은 그렇게 현암에게 다가왔다. 무기라기보다 친구로…….
현암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승희도 할 말이 없었다. 현암이 승희를 보면서 물었다.
“이제 알았니?”
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올라가 봤더니 그 색귀가 힘을 끌어냈던 바위는 산산조 각이 나 버렸더군. 그 후로 덕산 마을에서는 더 이상 이상한 일들 이 벌어지지 않았어. 일을 수습한 뒤에 성황당에 가 보니까 월향의 칼집이 당산나무 둥치에 있더군. 그리고 어떤 사람의 유골을 넣은 단지가 하나 있었어. 월향검에 깃든 영혼의 원래 몸이겠지. 그런데 유골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단서도 없고, 자료도 없었지. 나도 월향검에 깃든 여인의 영을 구해 주고 싶어. 내력도 알아내고 싶고… 하지만 알 수가 없어.”
“투시를 하면 어떨까? 아니면 영사라도?”
“전혀 안 통해. 색귀 놈의 주술이 아직도 효력을 발하고 있는지. 아니면 월향 스스로 떠나지 않는지는 모르겠어. 단지 내 느낌이긴 하지만 말야. 어쩌면 월향의 숙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현암은 오늘따라 말이 많았고, 감정도 격앙되어 있었다. 현암은 품에서 조심스럽게 월향검을 꺼내 들고는 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승희는 현암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잠 시 눈을 감고 월향의 내력을 투시하려 했으나, 현암의 말대로 전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색귀의 주술 탓일까? 아니면 어떤 업보 같은 숙명 때문일까?
승희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현암은 그런 승희는 아랑곳하 지 않고 묵묵히 깨끗한 천으로 월향검을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