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35화 생명의 나무 6 : 악전고투
악전고투
승희는 태극패를 손에 쥐고 달려 나가서 대문을 단단히 잠갔 다. 그리고 창문으로 가서 닫혀 있는 창문들을 다시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는데 옆방에서 부연 연기 같은 안개가 흘러 들어왔다. 놀란 승희는 허겁지겁 옆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의 열린 창문으 로 안개가 조금씩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안개에서 이상한 기운 이 느껴졌다. 승희가 창문을 닫으려 했으나 알 수 없는 힘이 창 문을 닫지 못하게 강한 힘으로 밀었다. 승희는 겁이 났으나 죽을 힘을 다해서 창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이 아지트는 각 창문에 도 철창이 쳐져 있었고, 유리도 두께가 일 센티미터가 넘는 고압 축이어서 꽤 튼튼했다. 창밖에서 고요한 소리가 들리자 승희는 흠칫 몸을 떨었다.
“퍼져 나가라, 용의 입김*이여…………… 그대의 주인 멀린의 주문이니…….”
“멀린이라면 고대 켈트족의 마법사・・・・・・ 놈들, 아는 것도 많구나!”
승희는 욕설을 퍼부으며 방을 나서려는데 바닥에 자욱이 깔 려 있던 안개가 한데 스르르 모여들기 시작했다. 놀란 승희는 뒤 로 후다닥 물러서다가 벽에 부딪혀 멈추어 섰다. 안개가 서서히 뭉치면서 인간과 흡사한 모양을 만들었다. 승희는 비명을 지르 며 엉겁결에 그 형체에다 태극패를 던졌다. 모아지던 형체가 태 극패에 맞고는 펑 소리를 내며 부서졌고, 그와 함께 태극패의 중 앙에 새겨져 있던 동경도 깨져 버렸다. 승희는 흰 그림자가 흩어 지자 무서움에 떨며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승희는 현암이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현암은 아직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으나, 여 기에도 안개가 꽤 밀려들어 와서 바닥을 자욱하게 흐르고 있었 다. 승희는 소리를 지르며 월향을 불렀다.
“어서 도와줘!”
승희가 암암리에 뿜어내는 영기를 타고 월향이 날아왔다. 바 닥을 흐르던 안개가 형상으로 뭉치다가 날카로운 귀곡성을 흘 리는 월향검에게 꿰뚫리고 난 후 바닥에 흩어져 버렸다. 그 틈 을 타서 승희는 현암의 팔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을 빼고 현암을 들쳐 업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으로 현암을 옮겨야 했다.
* ‘안개’를 서양에서는 용의 입김이라 부르기도 한다.
월향은 또 다시 뭉쳐 오르는 안개를 이리저리 흩뜨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이 안개는 뭐지?’
방 밖으로 나온 승희는 기겁을 했다. 창문을 꼭꼭 닫아 두었건 만, 어느새 안개는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와 마룻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승희는 안개에 휘말리자 알 수 없는 힘에 발목이 잡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으악! 이게 뭐야! 놔, 놔!”
승희는 안간힘을 쓰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마루 저쪽에는 박 신부가 주고 간 성수 뿌리개와 준후가 두고 간 부적들이 있었다. 승희는 현암을 업은 채 비틀거리며 그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마 치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었다. 승희는 터 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고 억지로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 겼다. 현암의 몸이 몹시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내팽개칠 수도 없었다. 승희는 이를 악물면서 걸었다. 막 성수 뿌리개를 집어 들 찰나였다.
“캬아아악!”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승희는 뒤를 돌아보았 다. 월향이 분투하는 가운데 어느새 커다란 덩어리를 이룬 안개 가 덮쳐 왔다.
“아악!”
박 신부는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준후를 데리고 지하실 입구로 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들은 아직 집 안의 동정을 살피느라 들어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준후야! 괜히 경찰에게 추적당하거나 하면 골치 아프다. 놈 들이 여기다 어떤 함정을 파 놓았는지 몰라! 우리에게 죄를 뒤집 어씌울 증거들을 남겼을 텐데, 무슨 술수가 없겠니?”
“아, 은신 부적이 있어요! 이걸 쓰면 우리 모습이 안 보이게 될 테니 빠져나갈 수 있어요!”
박 신부의 얼굴에 화색이 돌다가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안광을 빛냈다.
“아니다. 준후야, 아직 나가선 안 돼. 몸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더 수색을 해야 한다.”
“예?”
“놈들은 분명 시간이 없었을 게다. 현암 군을 추적해 온 이후 이 집까지 치울 여유는 없었을 거야. 이 지하실에는 분명 금단의 의식을 치렀던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아마도 그 죄를 우리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겠지! 어쨌건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신 기회 가 없을 것 같다. 네가 은신술을 쓸 줄 안다는 건 아마 놈들도 몰 랐을 것이다. 놈들이 우리 생각을 앞질렀지만, 우리도 놈들의 생 각을 한 번 더 이용하자!”
“그렇다면 경찰들도 들어오지 못하게 아예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입구를 벽처럼 보이게 하죠.”
더 이상 말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준후가 은신 부적을 꺼내 들고 벽을 긁어 벽지를 손바닥만 하게 뜯어냈다. 부적을 계단 입 구에 놓고 주문을 외우자, 벽지 조각이 부적 위의 허공에 떠오 르더니 입구 전체가 벽지 무늬로 덮여 버렸다. 경찰들이 들어온 듯,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렸으나 완전히 시야가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았다.
“음, 놀랍구나.”
준후가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이건 환영일 뿐이고 물리적인 저항력은 없어요. 누군가 손을 짚거나 몸을 들이밀면 바로 파괴되고 말아요. 그러니 서둘러야 해요.”
“그래. 현암과 승희에게도 서둘러 가야 하니까 어서 내려가자!”
박 신부와 준후는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으앗! 저리 가!”
승희는 덮쳐 오는 안개 뭉치를 간신히 피하면서 성수 뿌리개 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성수를 뿌리려 했으나 성수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안개 뭉치가 다시 승희 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승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성수 뿌리개를 안개 더미에 집어 던졌다.
“크아악!”
뿌리개가 깨지며 성수가 흩어지자 사악한 안개는 녹색 불꽃에 휩싸이며 녹기 시작했다. 승희는 뒤돌아서 다시 월향이 있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우뚝 서 버렸다. 어느새 유리가 깨져 방 안으로 안개가 밀려들었다. 월향 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안개 뭉치를 흩뜨리고 있었으나 안개는 조금씩 움찔거릴 뿐 꾸역꾸역 밀려왔다. 월향의 칼날에 기공이 나 주술이 실려 있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안개가 형체를 갖추지 않고 흩어진 채로 밀려와서인지, 아무튼 월향검은 혼자 헛되이 애쓰고 있었다. 승희는 서재로 가려다가 준후가 두고 간 부적 생 각이 났다. 승희는 부적을 집어 들고 해일처럼 몰려드는 안개를 피해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에는 준후의 부적으로 만든 결계가 있었다. 그 결계는 보통 때에는 열려 있었으며, 부적을 하나 붙 여야 비로소 진으로 발동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계를 발동시 키는 방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집이 흔들렸다. 안개의 파도가 두꺼운 유 리문을 뚫지 못하고 부딪히는 소리였다. 승희는 현암을 소파 위 에 내려놓고 박 신부의 성물을 모아다가 문 앞에 벌여 놓았다. 그러고는 준후가 두고 간 부적들을 뒤적였다. 다시 한번 집이 크 게 흔들리면서 거실 유리문이 깨졌다. 시간이 없었다.
‘이 부적이다! 문이 남쪽에 있으니 남해신의 부적을 써야한다!’
귀곡성이 애달프게 들려왔다. 월향이 혼자서 사악한 기운을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월향을 잊고 있었네! 이를 어쩐다?’
승희는 부랴부랴 월향을 불렀으나 귀곡성만 들려올 뿐 월향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으로 밀려들던 안개 더미가 바닥에 늘어놓 은박 신부의 성물에 걸려 주춤하고 있었다. 월향은 거대한 안개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어쩌지?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혼이 들어 있는데!’
지금 진을 발동시키면 현암과 승희는 그럭저럭 버티겠지만, 홀로 남은 월향이 문제였다. 승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승희는 한 손에는 박 신부의 묵주를 다른 손에는 축융의 부적을 들고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치 물속처럼 숨을 쉴 수가 없고 방향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승희는 무릎을 꿇고 월향을 부르며 손을 휘저었다. 손끝에 서늘한 것이 닿았다. 틀림없이 월향검이 었다. 사방에서 형체 없는 힘들이 승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것을 뿌리치려 발버둥 치던 승희는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벽에 붙자. 벽을 더듬다 보면 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승희는 벽에 등을 붙이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가면 서재였다.
‘윽!’
정체 모를 힘이 우악스럽게 승희의 목을 움켜쥐었다. 승희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의식이 점점 희미 해져 갔다.
‘안 돼! 정신을 잃으면!’
승희는 월향검을 꼭 쥐고 힘을 집중했다. 월향검이 기운을 차 린듯 손 안에서 푸득거리며 떨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월향검이 승희의 손을 이끌면서 코앞을 그었다. 그러자 목을 누르던 것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힘을 풀었고, 그사이 승희는 후다닥 서재로 뛰어 들어갔다.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이미 안 개는 박 신부의 성물들 사이를 가는 시내처럼 통과하여 현암이 누운 소파 밑으로 몰리고 있었다. 승희는 서재 안으로 뛰어드는 순간 문틀 위에 축융의 부적을 붙였다.
“아니, 이럴 수가!”
“우욱!”
눈앞의 광경에 박 신부와 준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준후는 고개를 숙이고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보일러며 잡동사니가 잔뜩 쌓인 지하실의 한쪽 구석에 수백 개의 촛불이 빛나고 있었고, 중앙의 넓은 재단 위에는 커다란 세 발 화로와 네 구의 시체가 배가 갈라진 채 뒹굴고 있었다.
박 신부는 분노와 욕지기를 간신히 억누르며 시체 쪽으로 걸 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시체들의 흐트러진 내장 속에는 간이 없 었다. 시체 중 하나는 늙은 노인, 둘은 젊은 청년, 나머지 하나는 젊은 여자였다. 그들의 이마에는 까만 뱀의 낙인과 3에서 6까지 의 불에 지진 숫자가 새겨져 있고, 고통의 표정은 없었으나 눈이 하나같이 뒤집혀 있었다.
박 신부는 세 발 화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재와 불에 탄 양피 지 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박 신부가 조심스럽게 손을 대자 양피 지 조각은 산산이 부스러져 버렸다. 박 신부는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준후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박 신부가 준후 를 일으켰다. 준후는 몸을 심하게 떨었다.
“시, 신부님…….”
“그래, 준후야, 진정해라. 이런 광경은 사람이 볼 것이 아니다.” 박신부는 지하실 내부를 훑어보았다. 이런 곳에는 의당 비밀 통로가 있게 마련이다. 과연 왼쪽 천장의 어두운 그늘 속에 작은 뚜껑이 보였다. 박 신부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는 보일 러의 연료 탱크를 열었다. 기름이 주르르 흘러나와 삽시간에 지 하실 바닥을 메웠다. 박 신부는 상자를 딛고 올라가서 뚜껑을 열 었다.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통로는 집을 벗어나 숲으로 이어졌다. 지하실을 빠져나온 박 신부는 잠시 생각하다가 성냥불을 켜 서 지하실에 던져 넣었다. 박 신부가 준후를 안고 숲에 숨겨둔 차에 도달할 때쯤, 저주받은 집에는 화광이 충천하면서 경찰들 이 부산하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 신부는 고개를 떨 구고 있는 준후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시동을 걸었다.
결계의 방어력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우우우 하는 소리와 함 께 강한 힘이 숨을 헐떡거리는 승희와 의식이 돌아오는지 가느 다랗게 신음을 흘리는 현암, 그리고 월향검을 에워쌌다.
이미 들어와 있는 안개가 진저리를 치며 흩어졌다. 바깥에 몰 려 있는 안개는 결계의 힘에 밀려 들어오지 못하자 점차 응결되 면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승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현암의 상태를 살폈다.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지만, 밖에 사 교의 일당이 얼마나 몰려왔는지, 어떤 사악한 수를 꾸미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박 신부와 준후가 어서 돌아와야 할 텐데……………. 승희는 현암이라도 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현암에게로 의식을 집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승희는 불현듯 눈을 떴다. 현암이 깨어나서 월향검을 집어 들고 승희의 옆에 앉아 있었다. 승희는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말을 걸려다가 얼른 멈추었다. 현암의 얼굴 에 고통의 기색이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현암은 승희가 눈을 뜬 것을 보고 씩 웃었으나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고마워, 승희야, 덕분에 훨씬 좋아졌어.”
“왜 일어났어! 총을 두 방이나 맞고,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사람이!”
“이젠 괜찮아졌어.”
그러나 현암이 애써 태평한 기색을 지으려 해도 승희의 눈에 는 하나도 괜찮은 것 같지가 않았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그렇게 다치고 하루 만에 나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는 현암이 극도의 정신력을 발휘해서 몸을 일 으킨 것이 분명했다.
“도로 누워! 무리하면 덧나!”
“누워 있다가 죽으면 덧나고 뭐고 없어.”
승희가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자 현암이 다시 말했다.
“아까는 정말 잘했어. 그 안개, 정말 지독한 거였거든. 잘은 모 르겠지만 서양에서 얘기하는 정령 폴터가이스트의 힘을 빌렸던 것 같아. 그걸 막다니 대견한걸.”
“내가 막았나 뭐… 근데 어제 본 것이 대체 뭐기에 저들이 죽자살자 쳐들어온거야?”
현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놈들은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어. 지금 아니면 얘기 못할지도 모르니까 어디에라도 적어 둬. 만일의 경우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승희는 현암이 그렇게까지 얘기하자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승희는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고 펜을 찾아 현암이 말하는 것 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신부님! 현암 형이 의식을 차린 모양이에요. 감이 잡혀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투시를 행하던 준후가 반갑게 소리 쳤다.
“그래? 더 자세한 것은 모르니?”
“무척 긴장하고 있어요. 아직은 둘 다 무사하지만…………음・・・・・・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서두르자!”
박신부가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입을 열었다.
“놈들은 바빌로니아의 점복술을 이용하려 하고 있어. 길일을 택한다. 바빌론의 점복술 이용, 샘플 아홉 개 소요…………… 기억나 지, 준후야? 현암 군의 손에 적혔던 말들?”
“예.”
“샘플이란 건 사람의 간이 분명해. 고대 바빌론에서는 점을 칠 때 주로 동물의 간을 이용했지. 그러나 아주 중요한 것을 알아내 는 일이라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을 거야. 놈들도 그걸 행하고 있고…………. 아홉 개가 필요하다고 했지? 아까 시체들의 이마에는 번호가 있었어. 만약 그게 현암 군의 손에 써 있던 샘플의 번호와 일치한다면, 놈들은 이미 여섯 사람의 생간을 구했다는 얘기가 되지.”
“…….”
“진정해라, 준후야・・・・・・ .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 면서 뭘 알아내려고 하는 걸까? 길일을 택한다고? 길일이 도대체 어떤 비밀을 지니고 있기에?”
준후도 어떤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잠깐만요. 제가 지혜를 관장하시는 묘길상(吉祥)*님의 힘 을 빌려 볼게요.”
“안 돼! 그런 방법으로 비밀을 알아내면 네 수명을 단축시키 게 된다! 그런 목적으로 신을 불러선 안 돼!”
“이분은 잡귀하곤 달라요. 저도 약간의 실마리만 얻으려는 것 뿐이구요. 한시가 급하잖아요!”
준후는 박 신부의 말을 듣지 않고 주를 외웠다. 박 신부는 할 수 없이 운전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잠시 후, 준후가 눈을 빛 내며 말했다.
“뱀・・・・・・ 뱀은 허물을 벗으며 계속 모습을 바꾼다.”
“응? 뭐라고?”
“그게 다였어요. 뭐가 뭔지 통 모르겠네! 좀 자세히 가르쳐 주시지 않고…….”
* 문수보살. 묘덕이라고도 불리며 여래의 왼편에서 지혜를 맡았다는 보살.
“놈들은 내가 들어갈 때부터 카메라로 감시하고 있어서, 자세 하게는 못 봤어. 하지만 대강 보고도 놈들이 뭘 하는지 감을 잡 을 수 있었지. 놈들은 바빌론의 점복술을 위해 산 사람을 해부하 고 있었어. 간을 꺼내고 있었지.”
“어머나 세상에!”
“길일을 택하기 위해 점을 치고 있었지. 희생자는 모두 주술이 나 마약 따위에 중독된 것처럼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 었어. 내가 손바닥에 적어 놓은 메모 봤지? 나도 무심코 적은 건 데, 알고 보니 그게 아주 중요한 거였어.”
“응, 봤어. 길일을 택한다. 바빌론의 점복술, 샘플 아홉 개…………. 샘플이란 건 사람의 간…………. 아까 신부님 책을 보다가 알았어.”
“그리고 대사제라는 녀석은 흑마술에 정통한 놈이었어.”
“그것도 알아. 아까 병원에 갔을 때 신부님과 준후랑 한바 탕 했지. 아마 죽었을 거야. 얼굴이 까맣게 타고 두 손이 잘렸으 …….”
“천벌을 받았군. 근데 내가 본 것 중에 더 중요한 게 있었어. 놈들은 총을 쏘며 양피지를 황급히 화로에 던졌는데, 다행히 그 안의 문장을 내가 봤지.”
“뭐였지?”
“모두 세 개였어. 왼쪽은 모나스 히에로글리피카의 문장, 오른쪽은 거대한 뱀을 상징하는 징표, 그리고 가운데는…….”
현암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그게.”
“내 지식이 맞다면 말야. 그건 생명의 나무를 그린 문장일 거야.”
“생명의 나무?”
“유대교의 카발라[經]에 율법의 나무라는 것이 있지. 놈들 의 생명의 나무는 율법의 나무를 역으로 그린 거야. 내용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그 위에 써 있던 라틴어가 아마도…………?”
“뭐라고?”
“십자가의 생명나무라는 뜻일거야.”
“생명나무?”
“그래. 나도 아직 그 정도밖에는 잘 모르지만, 신부님이 보면 놈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실 수 있을 거야.”
현암은 말을 마치고 피곤한 얼굴로 문 쪽을 주시했다. 승희는 현암이 말하는 것을 적고는 종이를 벽에 걸린 성모의 그림 밑에 숨겼다.
현암이 말했다.
“결계가 점점 약해져 가고 있어. 놈들이 또 다른 술수를 부리는 모양이야.’
승희는 결계가 깨져 간다는 소리를 듣고 왈칵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마음을 단단히 가져. 어떤 사술도 인간의 의지 앞에선 버텨내지 못해.”
다시 안개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집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갑 자기 흔들리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현암은 이제 결계가 완전히 무효화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현암은 승희에게 나직이 말했다.
“부적이나 성물 남은 것 있으면 모두 가지고 나와. 놈이 왔어. 이젠 여기 있어 봐야 소용없어.”
“누가 왔다고?”
“녀석들의 우두머리. 틀림없을 거야. 이 사악한 기운은……. 미처 승희에게 말은 못했으나 현암은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이 기회에 놈들의 우두머리를 없애야 한다.’
현암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한 손에 월향을 들고 엄숙한 걸음걸이로 서재를 나섰다. 지금의 안개는 아까와는 달리 보통 안개였다. 승희는 준후의 부적과 조그만 성모상 하나를 들고 현암의 뒤를 따랐다.
집안은 고요했다. 현암은 망설임 없이 대문을 활짝 열고 밖으 로 나섰다. 이미 집 밖은 흰 안개로 가득 덮여 있었고, 저만치 두건을 쓴 사람이 두 명 서 있었다. 현암은 상처가 쑤셔 오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승희도 뒤를 따랐다.
앞장서서 가던 현암이 발을 멈추었다. 사제복인 듯한 긴 후드 를 입은 두 사내가 서 있었다.
“응? 넌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니, 최소한 중태에 빠져 있는 걸
로 알았는데?”
둘 중의 한 녀석이 입을 열었다. 대사제라던 녀석이었다. 승희 가 놀란 눈으로 비슷한 말을 했다.
“어라? 너도 아직 죽지 않았구나! 두 손도 잘려 나갔고, 얼굴도 타 버렸을 텐데?”
대사제라는 놈이 빙글거리며 대꾸했다.
“생명나무의 비밀을 알고 있는 브리트라 님의 힘을 빌면 이쯤 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하하!”
승희는 마음속으로 크게 동요했다. 완전히 잘렸던 두 팔이 멀 쩡하고, 자기가 발출한 아스트랄에 적중되어 까맣게 얼굴이 타 버린 자가 짧은 시간 안에 저렇게 완전히 나을 수 있다니! 저놈 들은 정말 생명의 비밀을 알아내 응용하고 있는 걸까? 현암도 움 찔했으나 머릿속만은 방망이질을 하듯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네놈도 대단하구나. 그냥 이름이 알려진 게 아니었 어. 그러나 이젠 끝이다. 네놈은 금지된 의식을 보아 버렸어. 보아선 안 됐는데…..”
고통을 참으면서 기를 돌리고 있던 현암이 입을 열었다. 생각 외로 고통이 극심했다. 주위를 철벽같이 둘러싸고 있는 안개 때 문이었을까? 죽을 각오를 하고 나왔지만, 이 상태로는 오래 싸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기미를 보일 수는 없었다.
“저주받을 놈들! 인간이 같은 인간의 생명을 이용하여 알아내 야 될 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그자들도 너희를 추종하던 자들이었겠지?”
“그들은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다. 생명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 한 의식의 영광스런 제물로 말이다.”
“미친 소리! 마약, 아니 환각에 중독된 상태에서 말이냐!”
대사제가 말문이 막히는 듯 답변을 하지 못하자 현암이 날카 롭게 추궁했다.
“흥, 역시 그렇군. 신도들에게 육신의 죄를 사해 준다고 육신 을 바치라고 했겠지? 안 봐도 훤하다. 모두가 신의 섭리라 했겠 지? 그리고 환각에 빠져 판단 능력을 상실한 그들을 숨을 쉬는 상태에서 해부해서는 샘플, 그 저주받은 길일을 택하는 의식을 위한 샘플, 간을 꺼낸 거지?”
대사제가 나직하게 웃었다. 옆의 다른 남자는 아직까지 아무 말도 없었고, 후드를 걷지도 않아서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승희 는 현암이 봤다는 몸서리치는 광경을 상상하면서 몸을 떨었다. 현암이 말했다.
“나는 네놈이 총질을 할 때에 중요한 것을 보았지. 그 라틴어 문장……내가 무식하다 해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지……………”
대사제와 가만히 있던 다른 남자까지도 움찔하는 듯했다. 현암은 됐구나 싶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역시 짐작이 맞았군. 십자가의 생명나무, 그건 카발라의 율법 의 나무를 역으로 새긴 문장이었다. 율법의 나무에는 열 개의 장 이 있지. 그런데 샘플은 아홉 개..”
승희는 한편으로는 초조하게 현암의 말을 들으며 다른 한편으 로는 두 녀석의 동태를 살피느라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 따라 현암은 말이 많았다. 평상시의 성격 같았으면 벌써 튀어 나갔을 텐데………….
“인간의 간은 모두 구했나? 아니면 다른 한 개의 간은 미리 구해 놓았나?”
“너무 많이 알고 있군, 흐흐흐……. 마지막 하나는 특별한 것 이 필요하다. 강한 능력을 지닌 주술사의 간이 필요해. 네 것이 라면 충분할 테지.”
대사제가 음험한 눈을 빛내며 한 발 앞으로 다가서자마자 현 암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월향을 던졌다. 월향은 대사제 발 바로 앞에 박혔다. 현암은 모험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현암도 초인이나 불사신은 아니었다. 그는 시간 을 끌고 있었다. 승희는 왜 내 마음을 모르는 걸까?
‘승희야, 네게는 잠재력이 있다. 내 마음을 읽어 줘. 난 더 이 상 버티지 못한다!’
현암은 예전에 차 안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을 계속 생각해 왔 다. 그때 현암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맞혀 보라고 했고, 승희 는 연인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은 월향을 이용한 파사신검의 검식이었으므로 터무니없다고 웃어 넘겼다. 그러나 현암에게 마음을 굳게 닫아 버린 현암에게 단 하나 남은 연인은 누구인가? 스스로에게 반문한 현암은 깨 닫게 되었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승희가 완전히 잘못 짚은 것 은 아니라는 생각이 줄곧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종의 예감 이었는지도 몰랐다. 현암은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시 한번 도박을 걸고 있었다.
“아직 이르다. 너희는 나와 싸워 이기면 끝인 줄 아느냐?”
“흐흐흐……. 신부 늙은이와 어린 꼬마를 말하는 거냐? 놈들 은 아마 지금쯤 살인 혐의로 경찰에 잡혀 있을 것이다.”
“흥! 무의미한 함정에 빠뜨린 걸로는 시간은 끌 수 있을지 몰 라도 막을 수는 없을 거다. 나는 내가 알아낸 사실들을 모두 기 록해서 감추어 두었다. 나를 이길 수도 없겠지만, 설사 내가 죽 더라도 그들이 모든 걸 밝혀낼 거다.”
승희는 신경질적으로 현암을 돌아보았다. 왜 월향까지 던져 버렸지? 왜 싸우지 않는 거지? 가까이서 현암의 옆모습을 보니.
태연한 얼굴을 하고는 있었으나 얼굴 전체에서 엄청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 앞에 선 두 남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왼 손으로 승희에게 무언의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그렇구나! 현암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야! 이대로 싸워서는 우리에게 승산이 없어! 시간을 끌고 있는 걸까? 아니면 비밀을 알아내려는 것일까?’
“하하하…… 영리한 놈이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기 죽을 것 같으냐? 계속 입을 나불대서 우리의 비밀을 알아내고 싶 은 모양인데? 더 이상 수작을 부리지 마라!”
대사제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들고 땅에 박혀 있는 월향검을 성큼 넘어 앞으로 다가설 태세였다. 놈이 꺼내든 것은 새로운 펜 타그램과 기관총이었다.
현암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승희, 승희야! 시간이 없다!’
봇물이 밀려들 듯, 승희의 마음속에 갑자기 현암의 생각이 떠 오르기 시작했다. 승희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 한 걸 음을 물러났다. 현암은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승희야, 승희야!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내가 공격을 개 시하면, 네가 들고 있는 축융부적으로 안개 벽을 뚫고 나가! 축 융은 불의 신… 두터운 안개 벽도 뚫을 수 있다. 나가서 박신 부님께 알려! 듣고 있니, 승희야? 지금 바로 지금이다!’
공력이 흩어지기 일보 직전인, 현암이 노리던 때가 왔다. 대사제가 월향검을 넘는 순간, 양 주먹을 합하며 최후로 남아 있던 전신의 기력을 모아 월향검에 보냈다. 힘을 얻은 월향검은 박혀 있던 상태에서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승희야, 뛰어!”
“으아악!”
위로 솟구쳐 오른 월향은 귀곡성과 함께 대사제의 오른쪽 다 리를 꿰뚫고 몸을 관통하여 등을 뚫고 나갔다. 피가 사방에 튀는 동시에 대사제는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 무너졌다. 이것이 유일하게 현암이 할 수 있었던 최대의 공격이었다.
최후의 힘을 써 버린 현암의 몸에도 상처들이 툭툭 터지며 붕 대 사이로 피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놀란 승희의 외침 속에서 현암이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승희, 빨리, 빨리 가…………. 남은 한, 한 놈은……………”
“싫어! 난 안가!”
“저 대사제 이상으로 강한 기운을………… 어, 어서…………..”
현암의 고개가 푹 꺾어졌다.
“나 혼자선 못가. 이 바보야!”
승희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면서 들고 있던 축융 부적을 다른 한명에게 던졌다. 부적은 날아가면서 승희의 힘을 받아 불덩이 로 변하더니 삽시간에 거대해져서 다른 한 사람을 덮쳤다.
“죽어라!”
불덩어리는 남자를 덮치며 거대한 불 보라를 만들었다.
“됐다!”
승희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러나 불길이 사라진 뒤에도 남자는 멀쩡하게 서 있었다. 오른손을 쫙 펼쳐 든 채로…………. 축 융의 불덩어리를 맨손바닥으로 막은 것이 틀림없었다.
“우, 엄청난 놈!”
승희가 마지막 남은 성모상을 들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데, 남자가 후드를 벗어 뒤로 젖혔다. 거기에 나타난 얼굴은 아 랍인 같아 보이는 늙은 남자였다.
“어엇?”
“신부님, 저것!”
정신없이 차를 몰던 박 신부가 준후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 속에서 화광이 번쩍했다. 그들의 아지트가 있는 방향이었다.
“축융, 축융부예요!”
“역시 놈들이 습격해 왔구나! 준후야, 꽉 잡아라!”
박신부가 있는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속도계는 백팔십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랍 노인은 땅에 쓰러진 채 신음하는 대사제의 옆으로 갔다. 대사제의 상처는 상당히 깊은 듯, 숨을 쉴 때마다 쿨럭거리며 입 에서 피거품을 뱉고 있었다. 승희는 공중에 떠 있던 월향을 불러 서 손에 쥐고는 쓰러져 있는 현암의 앞을 막아섰다. 아랍 노인은 승희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묵묵히 대사제의 상처를 살폈 다. 승희는 몸이 떨리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아랍 노인에게 외쳤다.
“넌 누구냐? 네가 주모자지?”
아랍 노인은 힐끗 승희를 쳐다보고는 서툰 한국어로 대답했 다. 몹시 더듬거리는 말투였다.
“나는 바빌론의 바루(Baru)* 엔키두라고 한다. 그대도 보아하니 강한 신을 몸에 지닌 자로구나.”
“알았으면 썩 물러가라!”
“우하하!”
아랍 노인은 하늘을 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샘플이 세 개나 되는군! 어느 것을 택할까?”
그러면서 아랍 노인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중얼거렸다. 승희는 머리카락이 쭈뼛했다.
‘세 개 세 개라고? 현암하고 나… 저 대사제까지?’
* 바빌로니아의 점복술사
승희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하자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랍 노인 엔키두가 대사 제에게서 떨어지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승희에게 무언가 말했으나 승희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랍 노인도 승희가 못 알아듣는다는 걸 눈치챈 듯 말을 멈추더니, 양손을 마주 쥐고 눈을 감고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승희가 힘을 모아 월향을 내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부신 광채가 승희에게 덮쳐들었다.
“이, 이게 뭐야?”
승희는 얼떨결에 눈을 가렸다. 손에서 월향이 귀곡성을 지르 며 날아가다가 엄청나게 밝은 광채에 힘을 잃고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으, 으…… 그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퍼진 열기가 점점 뜨거워져 갔다.
“아악!”
승희는 눈도 뜨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열기에 몸이 데어 버릴 것 같았다. 귓전으로 바루 엔키두의 주문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 왔다.
승희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에 불이 붙은 듯한 기분이 었다. 비명조차 지를 힘이 없었다. 그런데………….
“음?”
왼손에는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는 박 신부의 성모 상이 쥐어져 있었다. 승희는 실눈을 뜨고 왼손에 쥐고 있던 작은 성모상을 보았다.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승희는 성모 상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성모상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승희 의 왼손을 적시자 몰아붙이던 열기가 조금씩 가셨다. 승희는 눈 을 떴다. 아직도 주변은 너무 밝고 벽처럼 둘러친 안개도 그대로 였으나, 주문을 외우는 바루의 안색이 조금 변한 것 같았다. 바 루 엔키두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주문을 외우려 하고 있었다. 승희는 최후의 힘을 짜냈다.
“아아앗!”
승희가 성모상을 내밀며 빛의 장벽을 뚫고 총알같이 앞으로 달 려갔다. 바루는 의외의 상황에 주춤거렸다. 승희는 짐작으로 바 루가 있는 방향으로 튀어나가 그의 몸에 성모상을 가져다 댔다. 쾅!
성모상에 적중된 바루의 몸에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승희 또한 힘에 밀려 뒤로 나가떨어졌다.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하고 어디 를 어떻게 부딪혔는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승희는 간신히 눈 을 떴다. 바루가 어떻게 되었나 보기 위해서였다.
“아니!”
바루는 아직 그대로 서 있었다. 성모상에 적중된 가슴 언저리 의 옷이 찢겨지고 시커멓게 탄 자국이 보였지만 그는 멀쩡했다.
얼굴에 잔뜩 노기가 서려 있었다. 바루가 소리를 질러 댔다. 무 슨 말인지 알 수는 없으나 욕설 같았다. 승희는 힘겹게 고개를 움직여 몸을 살펴보았다. 아까의 열기 때문이었는지 옷이 검게 그슬려 있었고, 나가떨어질 때 잘못되었는지 왼발이 뒤틀려 있 었다. 꼼짝할 수가 없었다. 바루가 이상하게 생긴 돌칼을 품에서 꺼냈다. 그러고는 음흉한 미소를 띠며 승희에게 한 발 한 발 다 가왔다. 승희는 눈을 감았다.
‘미안해.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어. 현암, 신부님, 준후……..’
“앞이 안 보여요! 신부님, 속도를 줄여요!”
“그럴 틈이 없어! 승희는 얼마 버티지 못해!”
먹장같이 둘러친 안개 속에서도 박 신부는 속도를 줄이지 않 았다. 그는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달렸다. 갑자기 왼쪽에서 나무 가 순간적으로 튀어나왔다가 쏜살같이 뒤로 멀어져 갔다.
“신부님, 거의 다 왔어요! 속도를 줄여요!”
그 나무는 그들의 아지트에서 이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 에 서 있었다. 박 신부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승희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바루가 돌칼을 높이 들고 서 있었다. 한껏 부릅뜬 그의 두 눈이 왼쪽을 향했다. 안개 속에서 두 개의 불빛이 번뜩이면서 달려왔다. 자동차였다. 속도를 줄이지 못한 자동차가 바루의 몸을 들이 받고는 아슬아슬하게 승희의 앞을 비껴 앞쪽 돌담으로 내달렸 다. 박 신부의 차였다. 줄어들지 않은 속력으로 담을 들이받는다 면・・・・・・ . 승희가 악을 썼다.
“신부님!”
차 양쪽 문이 벌컥 열리고 두 사람이 뛰어내렸다. 차는 담에 박히며 굉음을 내고 찌그러져 버렸다. 승희는 안타까웠으나 걸 을 수가 없었다. 아니, 걷기커녕 몸조차 일으킬 수 없었다. 차에 서 뛰어내린 두 사람 중 먼저 정신을 차린 준후가 승희에게 달려 왔다.
“누나, 괜찮아요?”
“난 괜찮아. 그보다 현암 씨…………….”
고개를 돌린 준후가 쓰러져 있는 현암에게 다가갔다. 맥을 짚 어 보더니 준후가 한숨을 쉬었다.
“별일 없어요. 기력이 떨어졌을 뿐이에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
승희가 안도의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앗, 준후야! 저, 저!”
준후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쓰러져 있는 대사제 옆에 서서 돌칼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바루 엔키두였다.
“샘플! 네, 네 것이라도!”
승희는 사악함에 치를 떨며 소리를 질렀다. 놈은 아직도 죽지 않고 주술사의 간을 꺼내기 위해 자신의 편인 대사제를 해부하려고 했다. 준후가 부적을 꺼내려 할 순간 엔키두가 일갈을 발하 자 불덩어리가 날아와 준후에게 적중했다.
“으앗!”
준후가 충격으로 데굴데굴 뒤로 구르자 엔키두는 돌칼을 높이 들었다. 그때 엔키두의 등을 강타하는 것이 있었다.
“크아악!”
박 신부가 던진 성수 뿌리개였다. 뿌리개가 깨어지면서 흘러 나온 성수가 엔키두의 등을 적시면서 푸른 불꽃을 일으켰다. 엔 키두는 기다란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굴려 안개 속으로 사라졌 다. 승희가 왼발을 질질 끌면서 기어서 준후에게 갔다.
“준후야, 괜찮아?”
준후는 약간 충격을 입었을 뿐, 다행히도 상처는 없었다.
“괜찮아요. 신부님은?”
박신부가 머리를 감싸 쥐고 안개 저편에서 걸어 나왔다.
“아이고, 머리야. 뛰어내리다가 머리를 부딪혀서…………. 다들 괜찮으냐?”
“예.”
“정말 최악의 날이군. 전부 다치다니…..”
준후가 말했다.
“전 안다쳤어요!”
“다행이다. 잘 넘어갔어, 승희야, 정말 고생이 많았다.”
엉망으로 망가진 집 안을 대강 정돈한 일행은 우선 현암을 편 하게 눕히고 대사제를 안으로 옮겼다. 대사제는 정신은 있었으 나 중상을 입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승희의 발목은 박 신부가 옛날 솜씨를 발휘하여 맞춰 주었고, 현암의 붕대와 링거도 갈아 주었다. 박 신부가 대사제의 상처를 살피려 하자 대사제가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아! 뭐 하려는 거야! 으아!”
박신부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진정하게 치료하려는 것뿐이니…..”
“이놈들, 거짓말 말고 죽이려면 빨리 죽여라! 한마디도 불지 않겠다!”
보다 못한 승희가 욕을 했다.
“저 망할 자식! 자기편에게 해당할 걸 구해 줬는데 말버릇 한번 고약하네!”
“건드리지 마라! 차라리 위대한 브리트라의 제물이 되는 것이 낫다! 저리 가!”
놈은 악을 쓰며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박 신부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자의 가슴 부분의 옷을 찢고 상처를 살피자 대사제는 박 신부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건드리지 마, 퉤!”
박 신부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가 다시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저리 가! 더러운 신부! 퉤 퉤!”
피 섞인 침이 얼굴로 날아드는 데도 박 신부는 묵묵히 상처만 매만지고 있었다. 보다 못한 준후가 소리쳤다.
“지독한 놈!”
승희도 뭐라고 욕을 퍼부으려 했으나 박 신부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준후와 승희, 그리고 대사제도 입을 다물었다. 승희는 화가 나서 준후와 함께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박 신부는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고는 역시 말 한마디 없이 밖으로 나 갔다. 대사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피곤한 싸움이 지나고 모두 잠에 곯아떨어졌다. 대사제만 빼 고는…………. 대사제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가끔 고개를 미친 듯 젓다가 눈을 번쩍거리기도 했다. 이윽고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 는 아무도 모르게 발목에 감추어 두었던 작은 단검을 꺼냈다. 그 리고 멀찌감치 떨어져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는 현암을 돌아보 고는 방을 나섰다. 박 신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는 방을 찾기 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사제는 고통을 참으면서 발소리를 죽 여 방으로 들어갔다. 박 신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평온한 얼굴로 드릉드릉 코를 골고 있었다. 대사제는 단검을 꺼내 박신 부의 가슴을 겨냥했다. 대사제의 눈에 박 신부가 벗어 놓은 안경 이 눈에 들어왔다. 까만 뿔테 안경, 그 안경의 모습이 대사제에 게 무척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의 아버지…………. 얼마나 오래된 일인가. 아버지도 시력이 나빴다. 그래서 항상 잠을 깰 때면 주 변을 더듬거리면서 안경부터 찾곤 했고, 그는 그런 광경을 볼 때 마다 미련한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대사제는 다시 한 번 박 신부의 평온한, 조금은 미련스럽게 코를 골고 있는 얼굴을 보았다. 박 신부가 아까 자신에게 한마디 말이라도 했다면, 잘난 체하는 설교를 하려 했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 나………… 그는 자신이 가졌던 신념, 그 악착같고 확고부동한 집념 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뒤 로 돌아섰다. 등 뒤에는 어느새 현암이 서 있었다. 대사제는 놀 라움찔했다. 현암은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대고는 박 신부를 돌 아보았다. 그러고는 대사제와 함께 그들이 누워 있던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그 방으로 가는 것을 알았나?”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칼을 내리쳤다면, 아니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나?”
현암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쨌든 환자네. 지금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나는 위대한 브리트라의 대사제일세.”
“아니, 지금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 불과해.”
대사제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고문하면 뭐가 나올 것 같나?”
현암은 웃었다.
“우린 사람과는 싸우지 않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하물며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아. 자네는 포로가 아냐. 가고 싶으면 언제라도 가게.”
“거짓말!”
대사제가 악을 썼다.
“위선자들! 그렇다면 왜 우리와 대적해 싸웠지?”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지. 세상의 고통을…………….”
“나를 풀어 주면 또 잔인한 의식을 할 거야. 더 많은 사람을 죽일 거고…………. 그런데도 날 풀어 준다고? 거짓말! 무슨 꿍꿍이지?”
현암은 고개를 돌리고는 자리에 누웠다.
“자네는 그러지 못해.”
“뭐?”
“남에게 입혀 왔던 고통을 자네도 겪었으니까. 자네 역시 해부당할 뻔했으니까. 그리고 자네는 이미 마음으로 졌으니까. 신부 님을 왜 찌르지 못했지?”
현암은 말을 마치고는 돌아누우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잠이나 자 둬, 낫고 싶거든…………… 주술력으로 버티고 있겠지 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
대사제는 망연히 그 자리에 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