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권 14화 – 우사(雨師)의 길 5
우사의 길
준후는 한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눈을 떴다. 눈앞에 널린 피 무 더기와 시체가 보였다. 끔찍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피와 살점과 튀어나온 뇌수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 이런 끔찍한 행위를 저지 른 인간의 마음이 추악하게 느껴졌다.
‘정말 지독하구나…………. 악귀나 야차도, 악령도, 악마도 결코 사람보다 지독할 수는 없구나……
준후는 비틀거리면서 부러지고 탈골된 팔과 손가락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리고 유리구 안에 있는 도자기 조각에 조용히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준후는 저 도자기에 있는 가르침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후세의 현명한 이여! 나는 우사 맥달이다.
그대가 내 자취를 찾아 내 말을 읽을 것임을 나는 안다.
나의 생각이 맞다면 그대는 지금 대단한 위험에 처해 있을 것이며,
힘을 쓰지 못하고 많은 자에게 협박당하고 있을 것이다.
지혜로운 이여, 그대는 힘을 써서는 안 된다.
악한 이들과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들이 끝까지 이기지 못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적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한 가지, 그 시대에는 잊힌 것이 될 수법을 남긴다.
그대는 이것을 악한 이들에게 주어라.
다만 내가 지시한 대로 순서에 맞게 주어라.
그렇지 않고 그대의 의지대로 한다면
그대는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전해 주기만 한다면
그들 스스로가 모두 죽음을 당할 것이다.
맥달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비록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오천 년 후에 어떤 이가 자신이 남긴 말을 찾고 사악한 자들에게 협박당할 것까지 예견했던 것이다. 준후는 맥달이 『해동감결』을 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엄청나게 정교한 예언 앞에 자신이 서게 되자 놀랄 수밖에 없었 다. 그야말로 감복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맥달은 준후가 번역했던 ‘미기”라는 술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맥달의 말대로라면 이 미중기는 체질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마공처럼 작용하게 되어 오 단계까지 는 공력을 크게 증강시키며 수련에 어떠한 장애도 느껴지지 않 지만, 이를 익힌 다음 급히 힘을 쓰면 순식간에 주화입마되어 전 신이 찢어져 죽음을 당하게 되는 금지된 술법이었다.
준후는 아무리 악인일지라도 차마 그렇게 죽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오 단계를 적지 않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이 저 마다 암투를 벌이자 급히 십이지번을 종이에 그렸다. 십이지신 술은 여기 있는 자들의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술수였으므 로 그것을 써서 서로 다투는 혼란을 일시에 제압하여 희생자를 최소로 줄이려 했던 것이다.
비록 황도인과 금강야차명왕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준후는 나머지 넷의 목숨을 살려 보려고 했다. 그 의도가 성공했다고 생각했을 때, 뜻밖에도 항삼세명왕에 의해 자신의 두 팔이 부러지고 모든 이들이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항삼세명왕도 미중기를 사 단계 정도밖에 익히지 않았지만, 덴구를 불러 내고 준후를 치느라 공력을 급히 쓴데다가 평소 그런대로 억눌 러오던 욕심과 광기를 참지 못하고 표출시키면서 더더욱 주화입 마가 급히 되어 죽음을 당한 것이다.
맥달은 이런 상황까지도 예측하여 ‘내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 기 의지대로 한다면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칠 것이다’고 한 것이 었으니, 어떻게 감탄하고 감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준후가 눈물을 흘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맥달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그 부분은 사 단계를 해석하고, 겐조 등이 싸움을 시작할 때에야 읽을 수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아! 슬프다. 어찌 사람을 해치는 것이 우사의 길이만
스스로 술수를 내어 아무리 악인이라 하나 사람을 해치게 되니
어찌 죄가 되지 않으며 마음의 병이 되지 않으랴.
그러나 후세에 이 앞에 설 이에게 묻는다.
그대는 악인이 될 수 있는가?
이제까지 쌓아왔던 덕을 모두 무너뜨리고
미워했고 버리려 했던 흉악한 마음을 도로 찾을 수 있는가?
*소설 내용 전개상 창작한 가상의 술수. 본문의 내용대로 공력을 단시간 내에 크 게 증가시키지만 아주 특별한 체질을 지닌 사람풍백 비렴과 같은 이 아니면 수련하는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부작용이 생겨서 일종의 마공(功) 럼 작용한다.
나는 전장에 나가 수천 명을 죽게 하였으며
이제 먼 훗날에 이르기까지 술수를 써서 사람들을 속여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이 어찌 우사의 길이라 할 수 있으리.
그러나 또 이 어찌 우사의 길이 아니라 할 수 있으리.
우사의 길이 이토록 쓰라린 것인 줄 알면서
내 어찌 이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었으리.
아무리 생각을 거듭하고 거듭해도
이 길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을 어찌하리.
이 앞에 서게 될 현명한 이여, 명심하라.
그대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토록 선한 마음을 지니고
그토록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명심하라. 그것을 명심하라.
‘우사의 길・・・・・・・ 우사의 길이라……………’
준후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을 저릿하게 하는 통에 흐르 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비록 오천 년이라는 시공의 간격이 있었지만, 우사 맥달의 마음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지금의 번민과도 흡사했다. 정의를 위해, 보다 큰 길을 위해…………. 자신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지금 준후의 마음은 분명 박 신부나 현암과는 달라져 있었다. 준후는 맥달이 남긴 말, 특히 이토록 쓰라린 것인 줄 알면서 어찌 이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말이 처절하게 공감이 되 었다. 아니, 맥달이 이미 오천 년 전에 자신의 마음을 읽어 내어 깨우침을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나는 악인이 될 필요가 있으면 악인이 될 테다. 분명 맥달은 그런 뜻을 나에게 전한 것이다. 나밖에는 없다. 나밖에 는…………….’
복받치는 기분을 진정시킨 후 준후는 도자기의 남은 마지막 부분의 글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 우사경』의 지금 행방에 관한 내용이었다.
내가 남긴 작은 글은 큰 바다를 건너
알지 못할 사람들 속에 묻혔으나
그래도 알 수 있는 사람들 손에 있을 것이다.
여자만이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며
악한 자만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으리.
그러고 난 다음에도
세상을 구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가 이루어져야 하리.
천부인이 세상에 풀리고
내가 남긴 큰 글이 얻어져야 하며
뜻을 지닌 네 사람과
열 사람이 필요하리라.
준후는 그 내용을 종이에 옮겼다. 탈골된 손가락으로 글을 쓰 기는 힘들었지만, 아픔을 무릅쓰고 결국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 종이를 『해동감결』 원전과 함께 품에 잘 갈무리하여 넣은 다 음, 기합을 넣어 단방에 유리구와 도자기를 산산조각으로 만들 어 버렸다.
준후는 차분한 얼굴로 철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 고 있는 힘을 다하여 기합을 넣어 발을 굴렀다. 지반이 우르릉거 리고 흔들리며 별관의 건물 전체가 삐걱거렸다.
준후는 마치 지나간 세월 동안 걸어온 자신의 마음에 발길질 을 하듯 인정사정없이 혼신의 힘으로 계속 발을 굴렀다. 마침내 작지만 육중한 별관 건물은 여기저기에 금이 가더니 무너져 내 렸다. 그리고 준후는 조용하고도 냉정한 얼굴로 몸을 돌려 다친 팔을 감싼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