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권 15화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 1 : 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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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1권 15화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 1 : 차이나타운


그로부터 몇 년 후


차이나타운

미국에는 여러 곳에 차이나타운이 있다. 시카고, 뉴욕, 포틀랜 드, 오리건 등 중국인이 모여 사는 구역은 많이 있지만 그중 샌 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이 가장 규모가 크고 넓다. 열여섯 개 의 블록을 차지하고 있는 이곳은 공식적으로는 칠만 정도, 비공 식적으로는 십만이 넘는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어. 거의 하나의 도시로 보아도 될 정도였다.

차이나타운은 중국 특유의 신기한 물건과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거기에 동양을 신비하게 생각하는 서양인의 시각도 덧붙여져,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불가사의하고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무엇인가가 있으리라는 사람들의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도 한몫을 거들었다.

사립 탐정 더글러스가 이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 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의뢰를 받아서 왔다고 할 수도 있지만 꼭 의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를 초청한 것은 윈딩고 사건 때 만났던 신비로운 동양인 일행들이었다. 윈딩고 사건이 끝나고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던 그들은 더글러스의 주변에서 벌어진 기 이한 일 하나를 해결해 주었다. 물론 더글러스는 심장이 멎을 정 도로 놀라운 경험이었으나 그들은 마치 검불을 털어내듯 가볍게 해결했다. 더글러스는 자신의 주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 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더글러스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때의 신세를 갚 기 위해 더글러스는 애썼다. 꼭 그들이 그렇게 원한 것은 아니었 으나 더글러스로서는 무엇이든 간에 그들을 돕지 않으면 신세를 갚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그들이 미 국에 올 때마다 그들을 만나 함께 행동하곤 했는데, 다행히도 신 세를 갚을 기회가 왔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자신의 고 약한 능력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그의 사이코메트리 능력은 자 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발휘되는 것이라 퍽 답답했는데, 어쨌거나 그때 그 능력이 발휘되었다. 발신지 불 명의 편지를 우연히 건드렸다가 출처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 덕 분에 퇴마사들이 찾던 마스터의 본거지를 쉽게 찾도록 해 주었 으니 신세는 갚은 셈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난 미친 게 틀림없어. 내가 왜 그자들에게 또 말려들어야 하지?’

더글러스는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 로 포기를 모르는 성격이라 자부하는 더글러스다. 허나 그에게 도 두려움은 있다. 예전에 우연히 투시가 행해졌을 때 그가 받았 던 느낌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더글러스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 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들도 대단하고, 무시무시한 힘이 있지. 그런데 이거 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힘이 느껴져.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당신들을 합해도, 아니 그 열 배가 되어도 못 당할 것 같아. 내, 내가 잘못 본 거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의 사이코메트리 능력은 아주 드물게 발동되지만, 한번 투 시된 것은 틀린 적이 없다. 그가 그 편지에서 느낀 것은 단순히 강한 존재가 아니다. 눈앞에 있던 동양인들도 자기로서는 상상 도 하지 못할 만큼 강했는데, 그 편지를 쓴 자와는 차이가 어마 어마했다. 굳이 예를 들자면 토끼와 티라노사우루스 정도의 차 이라고 할까.

“빌어먹을!”

더글러스는 공연히 애꿎은 길가의 가로등을 손바닥으로 쳤다. 안 그래도 행색이 남루하고 머리가 헝클어진 노숙자 같은 인상 의 더글러스다. 주변 사람들이 돌연한 그의 행동에 한 발자국 물러서며 시선을 모으는데, 더글러스는 인상을 쓰며 그들을 헤치며 마구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외쳤다.

‘난 도망쳤어! 제길! 도망쳤던 거야!’

물론 더글러스가 스스로 도망친 것은 아니다. 그런 엄청난 존 재와 대적하기 위해 가면서도, 그들은 차분했다. 더글러스는 도 움이 되지 않으며, 투시를 행해 준 것만도 충분히 고맙다고 말했 었다. 물론 더글러스는 참여하지 않았고, 더 정확히는 그러지 못 했다. 모르면 모를까 너무도 압도적인 상대의 크기를 알면서 달 려들 정도의 용기는 나지 않았다. 더구나 그가 가 봤자 아무도 움도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속으로 변명했다. 그 자리를 떠나면 서 다시는 그 동양인 일행을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분명 히다 죽을 거라 여겼다. 건물을 나오는 잠깐 사이에 등이 땀으 로 흥건히 젖고, 다리와 어깨가 덜덜 떨렸다.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편지를 썼으니 인간, 아니 인간에 가까운 존재일 텐 데. 그런 것이 존재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글러스를 휘어 감았다. 그는 며칠 동안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철부 지 아이일 때 처음으로 두려운 뭔가를 느낀 것처럼, 아니 그보다 는 백 배는 더 심하게 마음의 고통을 받았다. 동양인 일행은 아 예 떠오르지 않았고 수면제를 위험량까지 복용하면서 간신히 잠 을 자 버텨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은근히 궁금하여 알아보 니, 그들은 살아 있었다! 그들의 신병은 비밀이었지만, 일단 정부 측도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더글러스가 그들을 만나는 것 을 막지 않았다. 그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으나 분명 살아 있 었다. 그들은 그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싸 워 이긴 것이 분명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존재와! 더글러 스는 부끄러웠다. 비록 그들이 강자였지만, 자기가 투시로 느낀 그 존재와의 차이가 너무 커서, 사실 자신과도 별 차이 없다 생 각되었다. 자기의 승률이 0.001퍼센트라면 그들의 승률은 0.1퍼 센트 정도 될 것 같았다. 헌데 그것을 뚫고 승리를 거둔 그들 앞 에서 더글러스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그는 자기 혐오감에 빠져 술로 나날을 보냈다. 동방의 신비한 능력을 체험한다는 사이비 종교 집단 같은 데에 몸담은 적도 있었다. 퇴마사들의 신비로운 능력이 부럽고 질투 나서 한 옹졸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진짜배 기를 본 더글러스에게 그런 사이비 모임은 애들 장난이나 사기 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것을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것은 극 도로 위험한 것으로, 더글러스는 퇴마사들을 보며 그것을 느꼈 다. 그런데 포주처럼 사람들을 호객해 대는 그런 집단이 진짜일 리 없었다. 더글러스는 결국 거기에서조차 말썽을 일으켜 큰 싸 움을 벌인 후 몇 주나 입원해야 할 만큼 얻어맞고 쫓겨났다. 정 말로 싸워 보니 놈들도 신비한 능력 같은 것은 없었고, 불행히도 더글러스의 능력 역시 투시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놈들은 수가 많았다. 끈질기게 덤벼드는 더글러스의 투지는 고통과 입원 기간만 크게 늘렸을 뿐이다. 다만 그렇게 두들겨 맞자 오히려 뭔가 개운한 기분이 들어서 어느 정도 생활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이지만 나름의 작은 속죄라고 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 이후로 그런 사이비 집단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그들에 대한 기억이 거의 잊힐 때쯤, 더글 러스는 뜻밖의 방문을 받았다. CIA에서 그들을 추적하고 있었 다. 더글러스는 그 이후 그들과 접촉한 바가 없었기에 별 고초를 겪지 않았으나, 그는 분노했다. CIA는 속을 내비치지 않았지만, 그때도 원치 않던 더글러스의 능력이 약간 발동되었다. 놀랍게 도 CIA는 그들을 찾아 말살시키려 하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충 격을 받았다. 어떤 이유에서 그러는 것인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을 방문할 정도의 말단 요원이 자세한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실제 죄를 범했다기보다는 그들이 지닌 힘의 위험성 때 문에 제거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은 분명히 받았다. 더글러스는 그들이 그럴 리 없다고 믿었다. 그들이 없다면 그때 편지에서 자 신이 느낀 것 같은 존재는 누가 막는단 말인가? CIA가? 군대가? 더글러스의 느낌으로 그것은 그런 것으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괴물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들만이 막을 수 있었고, 실제로 막아 냈다. 그런데 그들을 없앤다는 것은・・・・・・ 물론 더글러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말단 CIA 요원에게 화 풀이를 할 수도 없었고, 어디로 숨어 다닐지 모르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 더글러스는 몇 년 전 사이비 집단에서 얻 어맞고 퇴원한 이후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 정 도 제자리를 잡았던 생활도 망가져 갔다. 사귀던 여자도 도망쳐 버렸고, 사무실도 결국은 빈민가로 옮겨 갔으며, 나름대로 말쑥 해졌던 차림새도 예전처럼 노숙자 스타일로 변해 갔다. 주변 사 람들은 술 때문이라고 수군댔지만, 실제로는 그의 마음속에 입 은 상처 때문이었다. 더구나 더글러스가 짐작한 그들의 말로가 그 상처를 더더욱 벌렸다. 그들이 제아무리 강해도 개인일 뿐이 다. 강하긴 하지만 초월적 괴물은 아니다. 더글러스가 보기에도 그들은 CIA를 상대할 만한 괴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량한 나 머지 제대로 반항도 못할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말로는 뻔하 다. 더글러스는 이미 마음속으로 수십 번이나 그들에 대한 조의 를 표하고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자신도 조 금씩 허물어져서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밑바닥에서 간신히 위 로 기어 올라간 더글러스는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져 갔다. 밑바 닥이 된 그에게는 일조차 깨끗하지 못한 것들만 남았다. 마약 조 직, 갱단, 깡패, 마피아의 말단…………… 더글러스는 결국 자기도 모 르는 새 사회의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해 있었다. 그는 이제 체념 했다. 세상을 살고 싶은 의욕조차 들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잊으려 애썼지만 마음속에는 퇴마사들에 대한 생각이 깊은 앙금 처럼 남아 있었다. 그들같이 정의롭고 선하게 살아도 그 꼴이 되는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들이 연락을 취해 왔다.

‘그런데 멀쩡했다니! 아니, 멀쩡하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살아 있어. 살아 있었다구!’

물론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들에 대 해 나쁜 감정은 없었다. 허나 더글러스는 자신이 지금까지 계속 도망치기만 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맞선 적이 무서 워서, 그리고 그들이 처한 운명을 보고 세상이 두려워져서. 그러 나 그들은 아직도 버티고 있고, 여전히 세상을 위해 움직이고 있 다. 겁먹고 항상 도망치던 것은 자신이었던 것이다.

‘간다. 이번에야 말로 간다. 뭐든지 할 거야.’

그들과 함께 다니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원래부터 주변에 있음에도 보 이지 않고, 보려 하지 않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너무도 하찮아서 그쪽에서 그냥 내버려 두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없다고 떠들어 대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유 리하니까. 그러나 그들과 다니면 그런 것들과 정면으로 부딪히 게 된다. 어쩌면 CIA나 정부, 국가와도 부딪힐지 모른다.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더글러스의 분노는 이제까지 도망만 쳐 왔던 자신의 비굴함에 대한 분노였고, 다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더더욱 분노해야만 했다. 더글러스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엔 절대 물러서지 않아.’


퇴마사들이 원하는 것은 어떤 물건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는 고대 동양에서 전해진 책과 같은 물건이라고 했다. 그런데 더 글러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최근 차이나타운의 암흑가가 떠올 랐다. 근래에 들어서 차이나타운이 술렁거린다는 소문을 간접적 으로(말하자면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차이 나타운의 암흑가에서 내분이 생겼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 아주 진기한 책 같은 것이라고 했다. 물론 막연하긴 했지만, 암흑가의 조직들이 책 따위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이상했다. 보통 그런 정보를 아는 녀석들은 그저 가치가 높은 보물이나 골동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글러스의 생각은 달랐다. 암흑가의 수입원은 의외로 막대하다. 어지간한 보물 한 점 따위는 값이 제 아무리 높아도 피를 보는 싸움이 일어날 정도의 액수는 될 수 없 다. 막대한 액수에 거래할 수 있는 고흐의 그림이나 거대한 다이 아몬드 같은 것이라면 또 모르지만, 아무리 골동품이라도 책 한 권이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돈 문제가 아니 라. 그 책에 특이한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책에 적힌 것 은 결국은 정보인데, 고대 동양의 책이라니 무슨 국가 기밀 정보 나 최신 기술 정보일 리도 없다. 이렇게 유추해 보면 뭔가 신비로운 힘, 그러니까 퇴마사들이 찾을 법한 고대의 힘이 담긴 책이 라보는 편이 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힘은 암흑가의 갱들조차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일 만큼 명확하고 큰 것이다. 그 소식 을 전하자. 퇴마사 측에서도 그리로 가 보겠다고 했다. 사실 이 런 정보를 전해 준 것만으로도 더글러스는 할 일을 한 셈이 된 다. 더글러스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물러설 수 없다. 차이나타운 의 차이나 마피아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망 치기만 했던 자신의 과거를 지울 기회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두 려움을 억누르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막상 와보니 그 ‘무엇’은 정말 대단한 물건 같았다. 차이나 마 피아의 세 파벌이 그것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암투를 벌이고 있 었으며, 사상자까지 생겼다는 소문을 들을 정도였다. 그들은 이 미 기관총 등의 중화기까지 동원했으며, 그로 볼 때 그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더구나 그 ‘무엇’을 노리는 것은 차이나 마피아들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사람들, 그 외에도 몇 개의 집 단이 더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차이나 마피아끼리의 대대적인 선전 포고도 그들이 배후에서 조작한 것이라는 풍문도 있었다. 실제로 차이나 마피아 간의 힘겨루기에서 몇몇 사상자가 발생했 는데, 그것도 실은 그 정체불명의 집단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이나 마피아 측에서는 사상자의 발생 사 실을 애써 부인하는 것 같아 보였다. 원래 비합법적인 집단인 만 큼 사상자가 났다고 경찰에 신고하거나 호들갑을 떠는 일 등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더글러스는 거기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가 장 큰 문제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얼마나 귀중하고 얼마나 놀라운 물건 이기에 이렇듯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는 것일까? 뭔가 신비한 힘 이 있다 해도, 퇴마사 같은 사람들에게나 소중해 보이지 일반인 은 그런 것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헌데 일반인 이하인 암흑가 존재들조차 욕심을 낸다는 것은…….

“제기랄!”

더글러스는 차이나타운 부근의 자그마한 바에서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불쑥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을 탁 쳤다. 그 기세에 위스 키잔에 띄웠던 얼음이 달각 소리를 냈다.

“직접 뛰어드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군.”

차이나타운에서 마피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노리는 물건의 일 에 끼어든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다. 차이나 마피아는 일반 시 민은 건드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자신들의 일에 개입 하는 자들은 비밀 보장을 위해서 반드시 제재를 가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 놓고 아무것도 모른 채 물러선다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차이나타운에 그가 심어 놓은 ‘슈’라 는 정보도 어느 한도 이상으로는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오늘 은 놈을 두들겨 패거나 협박하는 한이 있더라도 꼭 그 ‘무엇’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작정했다.

위스키 값을 치르고 더글러스는 바를 나섰다. 그는 그런 그를 창문 너머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이 그림자처럼 서서 입가에 미 소를 띤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 안 돼. 더 이상은 나도 아는 것이 없어. 그리고…..” 

예상대로 슈 녀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허나 그런다고 물러날 더글러스가 아니었다. 그는 슈 녀석의 멱살을 잡아 한쪽 구석에 밀어붙였다. 한창때가 지나긴 했지만 더글러스는 거구였 고 힘도 만만치 않았다. 그에 비해 슈는 조그마하고 싸움 재주도 없는, 그야말로 피라미 건달에 지나지 않았다. 슈가 겁먹은 표정 을 보이자 더글러스는 슈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은 채 품에서 백 달러짜리 지폐 세 장을 꺼냈다. 삼백 달러라면 건달에게는 큰 돈 이었다.

“자, 어때? 이걸 가지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아니면 병원 신세를 지고 싶어?”

“아…… 안돼. 난 아무것도 몰라. 아는 게 없다구!”

슈가 제안을 거부하는 듯하자 더글러스가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거짓말! 나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다니!”

그러면서 더글러스는 슈의 오른쪽 눈 밑을 톡톡 치며 말했다. “여기가 숯검댕처럼 검어지고 싶지 않다면 아는 대로 이야기 하래두 나에 대해서는 잘 알잖아? 난 사립 탐정일 뿐이야. 절대 비밀보장이 될 테니 염려할 것 없다구. 전부터 그랬잖아?” “하… 하지만………… 그 책은………….”

“책? 역시 책이군.”

“앗! 아니야! 아니야! 난…………….”

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더글러스가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라구? 그럼 좋아. 한 시간 후면 차이나타운의 모든 사람 들이 슈가 책에 대해 떠들었다는 소문을 듣게 될 테니까 말야.” 

그러자 슈가 부르짖었다.

“난 그럼 죽어!”

“그럼 어서 말해. 실수든 고의든 간에 너는 벌써 입을 열었으니까. 그래, 책이라・・・・・・ 좋군. 그다음은 뭐지?”

슈는 완전히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얼굴이 되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으음……. 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응? 누가 듣고 있으면 나는…”

“아무도 없어.”

그들이 있는 곳은 어느 후미진 뒷골목이었다. 모퉁이만 돌아 서면 시끄러운 도심 번화가의 불빛이 그대로 비치는 곳이기도 했다. 환한 곳 옆의 어두운 곳. 시끄러운 곳 속에 숨은 조용한 곳. 그런 장소가 밀담을 나누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것을 더글 러스는 잘 알고 있었다.

“오백 달러. 제길,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사백 달러”

“안돼. 오백 달러. 그 정도의 가치는 있어.”

더글러스는 다시 백 달러짜리 두 장을 꺼내어 슈의 목덜미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슈는 다시 불안하게 주위를 돌아본 다음 더 글러스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말했다.

차이나 마피아의 보스들은 늙었어. 아주 늙었다구.”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암투를 벌이는 차이나 마피아는 빼륭(白龍) 또 는 화이트 드래곤, 치이도(刀) 또는 레드 소드, 그리고 쥐이 (巨鼎) 또는 그레이트 칼드론이라 불리는 세 개 파였다. 그 세파 는 상당히 역사가 오래되어 빼륭파와 쥐이띵파의 보스는 거의 아흔 살에 가까운 노인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치이도파는 그 아 들이 보스 자리를 물려받기는 했지만 그 창시자가 거의 여든 이 상의 나이로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은 말야. 죽고 싶어 하지 않아. 늙어 죽는 걸 싫어한단 말씀이야.”

“늙어 죽는 걸 누가 좋아하겠어. 그런데…………?”

반문하던 더글러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혹시 그 책이 젊음을 되찾아 준다거나 늙어 죽지 않는 비결을 적은 것이란 말 인가? 슈가 더글러스를 보고 흐흐하고 웃으며 말했다.

“옛날에 중국을 처음 통일한 치이(秦)라는 나라의 황제가 있 었어. 그 황제는 죽지 않는 약을 찾아오라고 수천 명을 해외로 보냈는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지. 그때 불사약을 찾으러 간 자 들의 인솔자는 슈뿌우(福서복)라고 해. 내 먼 선조뻘이 되 지. 나도 그래서 알고 있었던 거지만, 그런데…………… 마피아의 보 스들이 찾는 책이 그 후예가 쓴 책이라는 거야.”

동양의 고사라 더글러스는 잘 몰랐지만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기는 했다. 그 황제가 시황제라고 하던가? 더글러스는 바짝 호 기심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거기에 불사의 비결이 있다는 건가?”

“그건 나도 몰라. 좌우간 그렇게 믿고 있어.”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책이 여기 있는 거지? 그때 슈뿌우가 신대륙이라도 발견했단 거야? 어떻게 이 아메리카에 그 책이 와 있을 수 있다는 말이야? 믿을 수 없군.”

슈가 말했다.

“차이나타운은 보통 사람에게는 신비해 보일지도 모르지. 그 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신비한 곳이 아니야. 사람 사는 평범한 곳 일 뿐이지. 그러니 좀 아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다 비웃어. 그렇기 때문에 그 책이 여기로 옮겨졌다는 거야. 우 리가 이 번화가 옆 골목을 약속 장소로 잡은 것도 그렇게 사람들 의 허를 찌르기 위한 것 아니겠어? 중국 속담으로는 등하불명(燈 下不明)이라고 하지.”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차이나타운은 뭔가를 숨기기에 가장 안성맞춤인 곳이기도 하다. 더구나 책은 작은 물 건이니 꼭 수천 년 전의 슈뿌우가 가지고 오지 않았더라도, 누가 이곳으로 들고 왔을 수도 있다.

믿어지지는 않지만 슈의 말대로 그 책이 정말 장생불사의 비 결을 담고 있으며 그것이 엉터리가 아니라면, 늙어 죽을 때가 된 차이나 마피아의 보스들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것을 손에 넣 고 싶어 한다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 책의 이름은?”

“그건 정말 몰라. 제길, 사실 볼 수만 있다면 나도 한번 보고 싶어. 나라고 나이 먹어서 허리가 구부러진 채 죽고 싶겠어? 하 지만 정말 모른다구.”

“그럼 어디에 있지?”

“그것도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래서 그렇게들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거야. 제길, 774번가에 있다는 말은 있지만……………. 정확한 건 아냐.”

어느새 더글러스의 손을 빠져나가며 슈가 말했다.

“제길, 난 당분간 여기서 떠야겠어. 입조심하고 파고들지 말라 구. 목숨이 열개 있어도 모자랄걸?”

그 말을 남기고 슈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더글러스는 자 리에 서서 입술을 깨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낡은 아파트의 사층 발코니에 선 흰 그림자 가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774번가는 워낙 오래되고 낙후된 곳이었다. 창고를 방불케 하 는 몇 채의 건물만 있을 뿐 번화한 상점이나 관광객의 눈길을 끌 만한 색다른 것은 별로 없었기에 인적 또한 드물었다. 그러나 밤 무렵의 774번가는 수상쩍은 분위기로 가득 찼다.

여기저기서 수상해 보이는 남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서 길목 곳곳을 가로막고 서성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특별히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행인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774번가를 일부러 피해서 가곤 했다. 그날은 낮부터 흐 리더니 나중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안개까지 꼈다. 그날 밤,

774번가의 한적한 뒷골목에서 더글러스는 비를 맞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많은 녀석들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구나.’

근방에 모여드는 작자들은 아마도 차이나 마피아의 일원들인 것 같았다. 그러면 그들이 저렇게 모여드는 이유는 뭘까? 분명 장생불사의 비법이 적혀 있다는 그 책과 연관이 있을 것이었다. 슈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게 정말 있 는 것일까?

“제길, 세상에 그런 게 있다면 벌써 알려졌지 왜 안 알려졌겠 어? 미친것들 같으니.”

그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 다. 그런데 막상 저렇듯 그것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또 그 말이 그렇게까지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싶기 도 했다.

잠시 후 몇 명의 중국인 남자들이 주위를 경계하는 듯 사방을 훑어보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더글러스는 혹시라도 그들에게 발각될까 봐 몸을 담벼락의 어두운 곳에 바싹 붙였다. 그런데 그 들이 하필이면 그가 숨은 골목의 바로 앞 어귀에 자리를 잡고 우 뚝 서서 사방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더글러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만 잘못 움직여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릴 것 같았다. 마음을 졸이며 주의 깊게 살펴보니 그들의 손에는 신문지로 둘둘 만 무엇인 가가 들려 있었다. 언뜻 총이 아닌가 짐작했지만 꼭 그런 것 같 지도 않았다. 길쭉한 막대기 모양이니 손잡이가 달린 기관총이 나 권총은 아닐 것이고, 장총이라 여기기에는 길이가 조금 짧아 보였다.

‘그러면・・・・・・ 칼?’

다음 순간 그들 중 한 명이 몸을 움직이는 사이 신문지 틈으로 흰 금속성의 빛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그 번쩍이는 빛을 보자 더글러스는 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총이 아닌 것이 더 무 서웠다. 차이나 마피아는 보통 총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총은 시끄럽기 때문이었다. 중국인들은 총을 사용하지 않고 칼이나 막대기, 밧줄, 심지어는 젓가락이나 맨주먹, 맨 손 가락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들었다. 전에 더 글러스 자신도 퇴마사들을 통해 그보다 더 놀라운 것들을 보지 않았던가. 그 이후로는 조심성이 더 많아졌다. 이런 일과 관련되 었을 때는 일상적으로 총이나 칼만 피해서도 안 된다. 더 음침하 고 무서운 수단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더글러스는 저들에게 발각되면 큰일이다 싶어서 더더욱 담벼 락에 몸을 붙였다. 곧 팔다리가 저려 왔지만 할 수 없었다. 다행 히 그들은 자신이 있는 골목 귀퉁이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 고길 건너편만을 열심히 주시하는 것 같았다.

‘저쪽에 뭐가 있기에 저러지?’

그는 궁금했지만 내다볼 수도 없는지라 그냥 그들이 갈 때까 지 참고 있을 수밖에 없는 판이었다. 문득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 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행히 그들은 중국인 2세나 3세인 듯,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어서 그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 상대가 몇이야?”

“몰라.”

“우리도 이 정도 숫자가 모였으니 상대 숫자도 많을 것 같은 데……. 근데 저런 좁은 곳에 몇이나 숨어 있겠어? 완전히 포위 되기까지 했는데………. 뭘 기다리는 거지? 지루한데.”

“낸들 알아? 좌우간 방심하면 안 돼. 상대 숫자는 예상외로 적 을지도 모르지만…………….”

“적다구?”

“그래. 어쩌면 한두 명일지도……………”

“한두 명? 아니 그러면 상대가 되겠어? 그냥 밟고 지나가도 문제없겠다.”

“허허…………. 너같이 방심했다가 그저께 여섯 명이나 입원했다구.”

“음? 여섯 명이나? 한두명한테?”

“그래.”

더글러스는 시큰둥했다. 차이나 마피아들끼리 싸우는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다음에 들려온 말은 뜻 밖의 것이었다.

“근데 말이지,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절대 비밀이야, 이 건. 그저께 여섯 명이 입원했는데 그들의 몸에는 그야말로 조그 마한 상처 하나 없었어. 근데 다섯 명이 의식 불명이라는 거야.”

“그런데?”

“나머지 하나가 이런 말을 했대. 상대는 아주 덩치가 큰 자였 는데, 자기는 미처 싸워 보기도 전에 갑자기 어찔해지면서 쓰러 져 버렸다는 거야. 그것도 여섯이 동시에 놈이 손가락 하나 까 딱하는 것도 못 봤는데 말야.”

“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더글러스도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한 번 기이한 경험을 한 그로서는 얼 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 같았다.

‘혹시 현암이라는 친구가 왔나? 아니, 그는 그렇게 큰 체구가 아닌데……………..

녀석들은 계속 떠들어 댔다.

“보이지도 않게 빠르게 움직였나 보지. 아니면 누가 뒤에서 기습했던지.”

“말도 안 돼. 도대체 여섯 명을 동시에, 게다가 기척도 없이 어떻게 기습한다는거야?”

“그거야 모르지. 무슨 신기한 무술이라도 익혔거나 마술을 부렸을지도.”

“제길. 어쨌건 엄청난 고수인가 보네. 그놈이 사당에 숨어 있다는 거야?”

“그래. 그리고 몇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빌어먹을. 그럼 그놈은 빼륭이나 치이도에서 보낸 녀석일까?” 

더글러스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저자들은 쥐이띵파의 자들인가 보군. 그런데 사당이라니?’

다음 순간, 이어진 녀석들의 이야기를 듣고 더글러스는 자신 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 녀석이 그 책을 갖고 있을까? 그런데 도대체 뭔 책이기에…….”

“나도 잘은 몰라. 그러나 ・・・・・・ 히히, 이것도 비밀인데.”

“뭔데?”

“그건 아주아주 중요하고 귀중한 책이라는 거야. 그게 아마…”

“아마?”

“불로장생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것이라고들 하던데.”

“불로장생? 아니 그런 게 정말 있단 말야?”

“제길, 나도 믿을 수 없어. 그러나 빼륭이나 치이도 놈들이 기를 쓰는 걸 보아서는……………. 놈들도 뭔가 있으니까 그렇게 난리들 일거 아냐?”

더글러스는 하마터면 놀란 나머지 기침이 나올 뻔했지만 간신 히 참았다. 그렇다면 정말 책 때문에 저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란 말인가? 슈 녀석이 일러 준 정보가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 책 이름은 뭐야?”

“흠… 그러니까 그건…………….”

더글러스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면서 온몸의 신경을 귀에 모았다. 그때 난데없이 한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총소리다!”

“사당이다!”

쥐이띵파의 녀석들도 놀라는 것 같았다. 더글러스도 놀란 나 머지 무심코 옆에 굴러다니던 깡통을 밟아서 소리를 냈다. 녀석 들이 그 소리를 듣고 휙 몸을 돌렸다.

“뒤에 누가 있다!”

더글러스는 기겁하여 몸을 벽에 찰싹 붙였다. 녀석들이 신문 지에 쌌던 것을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칼과 비슷했지만 가운데를 쥐도록 되어 있는 특이한 무기였다. 세 명이나 그런 무 기를 들고서 긴장된 얼굴로 골목길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 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더글러스의 등 뒤는 담벼락이라 도망치거나 더 이상 몸을 숨길 곳조차 없었다. 식은땀이 등골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한 발자국만 더 들어오면 발각되고 만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려 골목 밖으로 냅다 뛰쳐나갔다. 그러자 세 녀석이 소리 를 지르면서 그 칼 같은 무기를 휘두르며 쫓아왔다. 더글러스는 열심히 달렸으나 원망스럽게도 콱 막힌 담벼락이 앞을 가로막았 다. 하필 그 길은 막다른 골목이었던 것이다.

“자…………… 잠깐 나는 그냥………….”

“아가리 닥쳐!”

더글러스는 뭐라고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번쩍이는 무 기를 들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 은 것을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그걸 안 이상, 자신을 그냥 보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저쪽에서 또 몇 발의 총성이 들려왔 다. 이번에는 기관총 소리였다.

“제길. 저쪽이 급한가 보군!”

“이 자식은 어떻게 하지?”

“수상한 놈이야. 입을 못 열게 해 주고 어서 가자.”

한 녀석이 무기를 들고 더글러스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순간 그는 이제 끝이구나 절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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