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권 20화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 6 : 토트의 예언
토트의 예언
승희는 그런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다가 키건에게 말했다.
“거참, 대단하군그래. 어떻게 저들을 고용할 수 있었지?”
키건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승희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 다. 그리고 그 무지막지하게 큰 왼손을 승희에게 내밀어 보였다. “이제 줘.”
승희는 뒤에서 우사경을 꺼내 손에 들고 키건에게 물었다.
“약속은 약속이지. 그러나……………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뭘 묻는다는 거냐?”
“당신들이 이걸로 뭔가 흉악한 짓을 한다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이걸 넘겨줄 수는 없어. 도대체 이 글이 말세와 무 슨 연관이 있는지, 어떻게 당신들이 머나먼 동방의 이야기를 알 게 된 건지, 그리고 당신들 성당 기사단이 이걸 얻어서 뭘 하려 는 건지 말해 줘.”
그러자 키건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허허. 여기서 그 긴 이야기를 하라는 건가? 당신은 지금 당신의 처지를 모르는가본데?”
“당신, 내 능력에 대해 알지?”
“사이코키네시스 말인가?”
“그래. 『우사경』은 퍽 오래된 물건이라서 말야…………. 손만 잘 못 대도 부스러질 것 같은 물건이야. 대나무로 만든 죽간이 이렇게 오래 보존되어 형체라도 남은 게 기적 아니겠어? 후후……. 난 단순히 물건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불을 붙이는 일도 할 수 있지. 이렇게.”
승희는 『우사경』의 바삭거리는 한쪽 귀퉁이를 조금 꺾어 허공 으로 집어 던졌다. 순간, 그 조그마한 대나무 조각은 불이 확 붙 어서 순식간에 타 없어져 버렸다. 승희의 염력은 렌즈가 태양열 을 모으는 듯 한군데로 집중할 경우 인화물질에 불을 붙이는 정 도는 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키건이 흠칫 놀라면서 물었다.
“그게 ・・・・・・ 그게 무슨 짓인가?”
“키건, 난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고는 믿지 않아. 당신이 악하 지 않고 의도가 나쁘거나 잘못되지만 않았다면 난 이걸 넘겨줄 수도 있어. 하지만 만에 하나 당신이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면 난 죽어도 이걸 넘겨줄 수 없는 거야. 이해하겠지?”
그러자 키건은 다크 헌터에 손을 대며 느릿하게 말했다.
“속이려는 것 아닌가? 네 능력은 대단하지만, 내 칼이 더 빠를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기 바란다.”
“죽는 순간에도 염력은 발휘할 수 있어.”
승희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러자 키건이 고개를 저으며 칼에서 손을 떼었다.
“정말・・・・・・ 당신 걱정도 무리는 아니지만……………. 나는 조금도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잠시 머뭇거리던 키건이 승희에게 말했다.
“좋다! 말해도 좋다는 단장의 명령이다. 아니, 단장께서 직접 말씀하시겠단다. 어차피 너 정도의 능력자라면 숨길 수도 없는 일이고……………. 떳떳하지 못한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걸 넘겨주 지 않는다면 ・・・・・・ 그때는…”
“염려 마. 반드시 넘겨준다.”
“하지만 여기는 너무 사람이 많아서…………….”
키건이 멈칫거리자 승희가 지체 없이 말했다.
“말로 할 필요는 없어, 키건. 다만 마음의 벽을 열기만 하면 돼. 그러면 내가 순식간에 다 읽을 수 있으니까.”
키건이 조금 망설이면서 물었다.
“쓸데없는 것까지 읽는 건 아니겠지? 사적인 건 좀…”
승희는 거인 키건이 밝히고 싶지 않은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 까봐 어린아이처럼 부끄러워하는 것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원치 않는 건 엿보지 않아.”
곧 키건은 마음의 벽을 허물었고 승희는 재빨리 그의 마음을 읽었다. 아니, 키건의 마음이라기보다는 그와 텔레파시로 연결 되어 있는 성당 기사단장의 마음을 읽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승희의 얼굴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갔다.
성당 기사단장의 마음은 마치 승희와 대화를 하려는 듯했다.
키건을 통해서 그의 나이가 이미 팔백 살이나 되었다는 것은 알 고 있었지만, 실제로 팔백 년 동안 육신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팔백 년 동안 영혼만 남아서,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는 처지였다. 영혼의 상태이지만, 육체를 옮 길 수는 있으되 육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부 유령 같은 것과는 달랐다. 게다가 그만한 세월 동안 존재해 왔으 니만치 결코 호락호락한 영혼은 아니었다. 그 영혼은 자신이 보 여주고 싶은 것만 승희가 볼 수 있도록 스스로를 조절하고 있었 으며, 승희와 대화를 할 수도 있었다.
종말의 때가 다가왔으니 그것을 막아야 하오. 그것은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의 목적일 것으로 압니다. 허나 당신은 라미드 우프닉스에 대 해 모르고 있소. 그가 없이는 종말의 때가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소. 그 러니 우리를 믿고 우리에게 맡기시오.
‘라미드 우프닉스? 그게 뭐지?’
아주 드문 인간이요.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라미드 우프닉스를 지켜 왔소. 종말의 때를 위하여 ………………
‘그렇다면 당신들은 왜 우사경을 필요로 하는 거죠?’
종말의 때에 열쇠가 될 자…………. 그것을 정확히 알아내어 기록한 자 는 둘밖에 없었소. 계시록의 요한도 보지 못했으며, 노스트라다무스도 할 수 없었소. 더 태곳적의 인간이 아니면 안 되었던 거요.
‘그 둘이란 것이 바로……………?’
그렇소. 한 사람은 『우사경』을 쓴 동방의 여인, 한 사람은 고대 이집 트의 대예언가였소. 그의 예언은 이미 실전되었으며, 사실 그는 구체적 인 사실을 짚어 낼 능력도 없었소. 그러나 그는 동방에서 위대한 예언가 가 자신보다 정확한 예언을 남길 것을 기록했던 거요. 그 사람의 예지력 은 그 동방의 예언가만 못했지만, 동방에서 자기를 능가하는 대예언가 가 나올 것임은 알 수가 있었던 거요.
‘그 사람도 대단하군요.’
그 사람은 후세 이집트인에 의해 신의 반열에 끼이게 된 대학자 토트*였소.
‘그렇다면 성당 기사단은 이집트의 영향도 받았다는 건가요? 회교만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소.
승희가 아는 지식이 그렇게까지 넓은 편은 못 되었지만, 한때 고고학도였으니만큼 세계사에 대해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다. 자신이 아는 한도 내의 지식과 짜 맞추어 볼 때에도 그의 말은 가능한 이야기 같았다.
성당 기사단은 십자군 원정 때 동방으로 원정 간 기사들의 잔 류군이 그 지역의 토속 신앙 등의 영향을 받아 변질된 집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십자군은 회교를 믿는 사라센인과 주로 싸 웠지만, 싸움터는 성지 부근만이 아니라 서아시아와 북부 아프 리카에도 걸쳐 있었다. 특히 이집트는 이스라엘과는 지척인 곳 이고,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 중의 한 곳이니만큼, 성당 기사단 이 이집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십자군은 실제로 신앙심으로만 뭉친 집단은 아니었으니 후기 로 갈수록 십자군의 종교적인 명분이 변질되어, 회교도와 동맹 을 맺어 같은 기독교도와 싸우는 일도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집트나 회교, 기타 근동의 종교와 토속 신앙의 영향을 받아 결속된 집단이 성당 기사단이라는 설도 충분히 가능했고, 그들 이 당시 쇠망하기는 했지만 이집트로부터 고대의 신비를 전수받 았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 토트는 이집트 신들의 서기)이다. 크문, 또는 헤르모폴리스라고도 불리 며, 검은 따오기의 머리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초기에 토트는 창조신이었으나 기원전 3000년경부터는 법률의 제정, 학문의 발달, 신성 문자(히에로글리프)의 발명이 토트의 공적이라고 여겨졌다. 또 토트는 연구로 히케(Hike), 즉 마술을 터득했다고도 전해진다. 이를 보아 토트라는 대학자가 비슷한 시기에 실존했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본문의 토트는 바로 이 학자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가정 아래에서 그가 예언을 남겼다고 설정한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나름대로 동방의 고대 문서들을 조사했고, 끝내는 불사의 비밀이 적혀 있다는 『우사경을 알게 된 것이군요?’
그렇소. 불사의 비밀이란 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소. 다만 탄복하 기는 했소. 그 문서를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남아 있게 하려면 그런 소 문을 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 기록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상의 어떤 비밀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 아니겠소?
그 말에는 승희도 탄복했다. 승희 역시 준후에게서 불사의 비 밀이란 책을 후세까지 전해지도록 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말이며, 그 덕분에 그 책이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하 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준후 도 「해동감결 원전을 보고 난 후에야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인데, 이 성당 기사단의 단장은 오로지 추론만으로 그런 의도를 짐작 하고 있었다. 정말 이자는 가볍게 볼 존재가 아니었다. 비록 악 인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려 깊음과 용의주도함은 과거의 적 들을 능가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말이죠. 그・・・・・・ 누구더라? 그렇지, 토트의 예언은 뭐였죠?’
그러나 그는 승희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당신은 아까 이 문서는 우리가 절대 해독할 수 없는 고대 조선의 글 자로 되어 있으며 이 스크롤은 해동감결」이라는 다른 예언서의 열쇠일 뿐이라고 했는데…. 맞소?
‘이럴 줄 모르고 공연히 떠들었군요.’
승희는 안타깝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말해 주니 고맙구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 문서의 내용을 알 려 줄 수는 없겠소? 우리 서로 도웁시다. 당신들은 『해동감결』이라는 예언서를 지니고 있고, 우리는 지금 그 예언을 풀어낼 수 있는 『우사경을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오.
‘토트의 예언을 말해 주면 생각해 보죠.’
그러자 단장은 뭔가를 망설이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그것은 비전 중의 비전이오. 그러나 당신의 믿음을 얻으려면 우리부•터 솔직해져야겠구려. 좋소.
그는 천천히 마음속에 예언의 내용을 떠올렸다.
말세의 때에 인간들을 지켜 주는 힘이 사라진다고 했소. 그리고 그것은 심연(深淵)의 눈…………..
승희는 놀라서 단장이 말하는 중간에 끼어들었다.
‘뭐라고 했죠?’
심연의 눈이라 했소. 심연의 눈을 가진 사람이 사라져 가니 신의 분노에서 자유로워질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소.
‘심연의 눈이 사라져서 신의 분노가 온다구요?’
왜 그러시오? 심연의 눈이란 말을 당신은 들어 본 적이 있소?
“그런데 그 심연의 눈이란 뭐죠?
그것이 바로 라미드 우프닉스의 상징이오. 아랍에서는 쿠트브라고도 부릅니다. 신의 분노에서 세상을 정당화하는 사람………. 그것이 라미드우프닉스요.
승희는 연희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연희가 라미드 우프닉스란말인가? 신의 앞에서 세상을 정당화하는 사람이라고?
‘라미드 우프닉스에 대해 조금 더 말해 주시겠어요?’
당신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때 아브라함이 드린 기도”를 아시오?
‘알아요.’
*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물었다. “당신께서는 죄 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기어 이 쓸어버리시렵니까? 저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버리시렵니까? 죄 없는 사람 오십 명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 렵니까? 죄 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소돔성에 죄 없는 사람이 오십 명만 있으면, 그 죄 없는 사람을 보아서라도 다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다시 말했다.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주제에 감히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 오십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말하시겠 습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저곳에 죄 없는 사람이 사십오 명만 있어도 말하지 않겠 다.”
아브라함이 “사십 명밖에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여쭙자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사십 명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또 여쭈었다.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십 명밖에 안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야훼께서 “삼십 명만 되어도 멸하지 않겠다” 하고 대답하시자 그가 또다시 여쭈 었다. “죄송하오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이십 명밖에 안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야훼께서 “이십 명만 되어도 그들을 보아서 멸하지 않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아브라함이 다시 “주여, 노여워 마십시오.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열 사람밖에 안 되어도 되겠습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야훼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 고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때 죄를 짓지 않은 의인(人)이 열 명만 있었어도 소돔과 고모라 는 멸망하지 않았을지 모르오. 그것은 신의 약속이었으니까. 그래서 이 후 유대의 주술사들은 힘을 모아 그러한 대주술을 걸었소. 신 앞에서 세 상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대대손손 정직한 인간이 항상 세상에 존재하 도록 말이오. 그들은 서른여섯 명밖에 없으며, 스스로 자신이 라미드 우 프닉스라는 것을 깨달으면 즉시 죽음을 맞이하며, 새로운 라미드 우프 닉스가 태어나게 되오. 그들이야말로 더러운 세상을 신의 분노로부터 지켜주는 구원자라고 할 수 있는 거요.
‘그・・・・・・ 그런 일이 얼마나 지속되었나요?
몇천년, 적게 잡아도 이천 년이오.
그런 주술이 아직도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오. 그러나 분명 세상에 존재하오. 그 때문에 인간은 멸망을 면하고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오.
승희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라미드 우프 닉스! 더구나 잘 알고 지내던 연희가 라미드 우프닉스의 한 명이 라니? 그러나 이 일을 연희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스스로가 라미드우프닉스라고 알게 되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지 않는가? 승희는 침착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물었다.
‘그러면 심연의 눈이란 뭐죠?’
심연의 눈은 라미드 우프닉스의 상징이오. 항상 선함을 찾아내는 눈이죠.승희는 비로소 이해가 갔다. 왈라키아 성에서 드라큘라 부인 의 눈도 그랬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연희를 사랑했던 리도 연 희 말고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었다. 현암이 전해 준 리 의 마지막 말에 의하면 리는 어린 시절 그런 눈을 한 여자를 만 났고, 그것을 평생 잊지 못했다. 티베트의 판첸 라마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승희는 그동안 심연의 눈이 도대체 무엇이 며, 왜 그런 눈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진실은 승희가 나름대로 짐작했던 어떤 상상이나 추측보다 엄청난 것이 었다.
단장은 승희의 그런 놀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토트의 예언은 이러합니다. 말세의 때가 오면 인간을 지켜 주 는 힘이 사라진다. 심연의 눈을 가진 자가 사라져 가니 신의 분노 앞에 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구원을 방해하는 거대한 힘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요?”
그러나 그 힘은 동방의 예언가만이 알 수 있으며, 라미드 우프닉스의 눈이 더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도 했소. 마지막으로…………… 피로 이어진 것만이 진실로 이어진 것이라고 했소. 이것이 전부요.
‘피로 이어졌다고요?”
그렇소.
승희는 잠시 침묵하면서 예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박 신부와 현암, 준후는 이번 일을 자신에게 애써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으 로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백호가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음에도 그때까지 여권은 승희 것밖에는 만들지 못했고, 다 른 사람의 것은 언제 만들 수 있을지 기약할 수도 없는 판이었 다. 어차피 미국은 승희밖에 갈 수 없었다. 또 준후는 맥달의 예 언에 여자가 가야만 『우사경』을 얻을 수 있다고 했으니 승희밖에 갈 사람이 없다고 우겼던 것이다. 『우사경』(이라기보다는 불사 의 비밀을 담은 고대 문서)이 미국에 있다는 것을 안 것도 일본 에서의 준후의 노력과 맥달의 예지 덕이었으니, 그 말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우사경』은 서복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가 막부(幕府)의 창고에 숨겨졌다. 그러다가 개항 과정에서 미국인들에게 넘어가 는 운명을 맞았다. 그 후 미국에서 골동품으로 전전하다가 결국 제목이나마 읽을 수 있는 중국인들이 사는 곳, 즉 차이나타운으 로 옮겨졌다는 것까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승희가 성난큰 곰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한국을 떠나올 때 박 신부는 이렇게 말 했다.
“승희야, 우리의 길은 몹시 외로운 길이 될 것이다. 그러니 아 무도 믿지 마라.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하고 아무리 합당한 말을 해도 그럴수록 믿으면 안 된다.”
그러면서 박 신부는 잠깐 지나치듯 말을 이었다.
“나는 전에 계시를 받은 것이 있다. 한동안 왠지 모르게 기억이 나지 않았었는데…………. 이제 기억이 나는구나. 그 사람은, 나와 는 피로 이어졌으니 피로 이어진 것 말고는 믿지 말라고………….”
“그 사람이 누군데요?”
“나도 모른단다. 그러나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니 피로 이어진 셈이겠지? 하하. 여하간 괜한 소리는 아닐 것이니 피로 이어진 우리나라 사람 말고는 아무도 믿지 말고 아무에게도 속지 말려 무나.”
‘동방의 예언가…… 라미드 우프닉스……………. ‘
그리고 피로 이 어진 것만이 진실로 이어진 것이다.
승희는 절대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 내용을 되뇌어 보았다. 잠 시 후 단장이 말을 이었다.
이제 어떠시오? 나는 당신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소. 그런 능력은 결코 사악한 주술이나 범속한 수련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오. 당 신은 신과 통한……. 으음, 테트라 그라마톤(Tetragrammaton)*과 같은 절대 신은 아니지만……………. 뭐랄까? 천사? 반신(半神? 어쨌거나 인간의 영역을 훨씬 벗어난 신적인 존재와 통하는……………. 아무튼 그런 사람이라 여겨지오. 맞소?
*신성한 힘을 지닌 네 글자, 즉 야훼의 이름을 뜻하는 JHVH’를 의미한다. 야훼 의 이름은 엘로힘, 아도나이 등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고대의 신앙인들은 야훼 의 이름을 두려워하여 그 이름을 부르지 않고 ‘테트라 그라마톤’이라고도 불렀다.
승희는 단장에게 보이지 않는 깊은 마음속으로 이 늙은이, 아 니 이 늙은 영혼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사라진 애염 명왕의 기운까지도 은근히 느끼다니. 그러나 승희는 그런 마음 은 보이지 않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비슷해요.’
더구나 당신은 분명 토트의 예언에서 언급한 동방의 예언서를 가지 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소. 그러니 이 스크롤・・・・・・ 『우사경』을 찾는 거겠 지요. 그러니 우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나아가서는 힘을 합하 는 것이 어떻겠소?
승희는 이 사람, 아니 이 영혼과 마음으로 대화중이었기 때문 에 이자가 결코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 다. 그러나 왠지 석연치 않았다. 마음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이 자의 성격도 조금 느껴졌는데 이자의 문제 해결 방식은 평화적 이라기보다는 다소 힘을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하찮은 이유였지 만승희로선 그게 꺼림칙했다. 승희는 그것은 자신이 결정할 문 제가아니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제가 대답할 수는 없군요.’
성당 기사단장이 다시 말했다.
당신이 비록 동방 예언가의 책……. 음, 『해동감결』이라 했던가요? 그것을 가지고 있고 우사경마저 얻는다고 해도 라미드 우프닉스의 힘을 얻지 못하면 일을 이룰 수 없소. 이것은 우리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전체에 대한 문제요. 한 가지 물읍시다. 당신은 라미드 우프닉스의 일을 알고나 있었소?
“아뇨.’
그렇다면 어떻게 그 일을 수행해 나갈 생각이오? 우리는 라미드 우 프닉스를 찾아내고,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데에만 팔백 년이 걸렸소. 우리는 지금 세상을 구하자고 하는 거요.
‘그건 알아요.’
그런데 왜…………….
그가 말끝을 흐리자 승희는 짤막하게 물었다.
‘당신들은 종말의 때를 어떻게 알죠? 그리고 그걸 어떻게 막으려는 거죠?’
막을 방법은 아직 모르오. 그러니 알려고 하는 것 아니겠소? 그러나 말세가 이미 다가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아니오? 당신도 능력자이 니 대답해 보시오. 지금이 말세가 아니오?
‘글쎄요・・・・・・・’
어쨌거나 우리는 힘을 합해야 합니다. 세상이 신의 분노로 종말을 맞이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참이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일단 우사경은 우리에게 맡겨 두시오. 그리고 연락을 할 수 있도록 거처를 알려 주시오.
‘글쎄요, 그건……..’
거처만이라도 알려 주시오. 『우사경』을 달라고 하지는 않겠소. 좌우 간 우리는 이제 서로를 존중해야만 합니다. 나는 성당 기사단의 비전 인 토트의 예언까지도 모조리 이야기했는데 아직도 우리를 못 믿는 거 요? 키건을 보시오. 그는 추호도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는 명예로운 기 사요. 우리가 그 예언을 얻어서 달리 무엇을 하겠소? 나는 죽어서 육신 도 없는 몸이오. 내가 이런 존재라는 건 성당 기사단 내에서는 비밀 중 의 비밀이고, 키건도 그런 사실은 모르오. 내가 무엇을 더 바란다고 당 신을 속이겠소? 이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문제가 아니오? 당신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고 말이오.
그의 말이 너무도 겸허하고 간곡해서 승희는 몹시 번민이 되 었다. 그러나 승희는 박 신부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있었 다. 너와 피로 이어지지 않은 자는 아무도 믿지 말라고………….
‘일단 내가 결정할 만한 일이 아닌데…………. 설마 여기서 이것 을 넘긴다 해도 나쁠 것은 없지 않을까?’
아마 현암이나 박 신부, 준후였다 해도 키건의 사람됨을 보고 단장의 말을 들었다면 그들을 믿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승희는 여자라서 그런지 이상한 직감이 있었다. 키건은 일단 승희의 마 음에 들었지만, 막상 기사단의 우두머리인 단장은 마음을 터놓 고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불일치가 한층 이상하게 느껴져서 승희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참 이나 망설였다.
그러다가 승희는 갑자기 아차 싶었다. 일이 너무 순조롭게 잘 맞아떨어진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승희가 『우사경』의 행방 을 알아내어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몇 년이란 시간이 걸렸는가. 그나마도 더글러스 덕에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키건이 이 장소에 쳐들어왔던 것일까? 이토록 기막히게 우 연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만약 이들이 우사경을 해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고………….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면….’
키건은 이미 빼륭파와 결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글러스의 말에 의하면, 빼륭과 치이도, 쥐이띵 세 파가 이 우사경을 놓고 다툰 것은 상당히 오랜 기간이었다. 문득 준후가 일본에서 겪었 던 일이 기억났다. 준후도 그런 함정에 빠져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던가? 승희는 모든 일이 후회스러웠다. 공연히 입을 나불거려서 『해동감결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다니…….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더더욱 두려워졌다. 이들은 자신들의 은 신처를 알려 달라고 하고 있었다. 승희가 그것을 말한다면 이들 은 곧 그곳을 덮칠지도 몰랐다. 승희가 알리는 것보다 더 빨리! 이들은 자신들에게는 없는 텔레파시의 능력을 갖고 있다! 벌써 한국에도 파견한 사람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토트의 예언에서도 동방에 관해 언급을 했으니까. 그렇다면 승희가 여기서 속아 넘어가 우리가 있는 곳을 알려 준다면 즉시 잠입하여 「해동감결 을 훔쳐 갈 수도 있었다.
‘가만가만…………….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 거지?’
갑자기 지나친 기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쥐이띵 의 우사부와 마피아들도 이들이 불렀단 말인가? 그것은 말이 되 지 않는 것 같았다.
‘아냐, 내가 의심이 지나친 건가. 하지만 저 사람은 결코 거짓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는데…
단장이 거짓말을 했다면 승희가 바로 느꼈을 터였다. 아무리 마음의 벽을 둔다 해도 그것은 바라지 않는 속마음을 투시로부 터 감추는 것이지, 거짓말을 하면서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만드 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래, 그럴 수는 없었다. 분명히 …………. 승희 는 갈팡질팡하면서 도무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 젠 머리가 아프고 지긋지긋해서 더 이상 생각하기조차 싫어졌 다. 마침내 승희는 결단을 내렸다. 근거는 아주 단순했다. 만에 하나라도 현암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죽어도 하지 말자 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미안하군요. 안 되겠어요.’
단장은 몹시 놀라는 것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러는 거요?
‘전 당신들을 믿어요. 그러나 완전히 믿지는 못하겠어요.’
흠,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당신을 믿지 못하오. 당신은 혹시 고의 로 예언을 은폐하려는 것 아니오?
‘아니에요. 그러나 목적이 같아도 길은 다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정말 그것이 옳은 일이라 믿소?
‘예’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따라야겠군. 최소한 『우사경』만이라도 확보해야겠소!
단장이 화난 듯 마음을 전하자 승희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나 나나 서로를 못 믿는……………. 후후. 어쩔 수 없죠.’
당신 능력은 대단하지만 키건과 이 많은 수의 사람들을 이길 수 있 을 것 같소? 다시 한번 잘 판단해 보시오. 『우사경』을 넘겨준다면 무사 히 돌아가게 해 주겠소. 그러나 그렇지 않는다면 당신 목숨은 장담 못하 오. 이건 너무도 중대한 일이니까.
승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중대한 일? 중대한 일이라면 나를 죽여서라도 우사경을 빼 앗겠다는 건가?’
승희는 비로소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승희는 큰 일을 위한다고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박 신부의 말에 완전히 수긍하고 있지는 않았다. 솔직히 승희 본인의 생 각대로라면 대를 위해 소가 희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 닌가 하는 싶었다. 그러나 일부러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은 현암 역시 박 신부와 같은 뜻이라, 자신의 그런 마음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바로 그 상황에 처하고 보니 그 말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승희가 정신을 차린 순간, 자신을 둘러싼 채 기다리고 있던 수 많은 차이나 마피아들의 흉기 및 총부리는 자신에게 겨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서는 키건이 묵묵히 승희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