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권 4화 – 부름 (Summoning) 3
부름
“어서 피해야 합니다.”
포 소리가 더욱 가깝게 울려왔다. 이제는 병동 근처에까지 직 격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인원은 철수했으며, 두 어 명만이 남아 겁에 질린 얼굴로 닥터 박의 수술을 돕고 있었 다.
“핀셋.”
“군의관님! 시간이 없습니다!”
“핀셋!”
쓰러졌던 닥터 박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수술에 매달렸다. 메스를 긋고 가위를 휘두를수록 등의 통증은 더욱 심해졌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심술궂게 박힌 탄환과 씨름했다. 조금만 더! 이제 조금만 더!
탄환이 뽑혀 나왔다. 땡강하는 소리를 내며 탄환이 쟁반에 떨 어지자 닥터 박은 잠시 헉헉거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때 닥터 신이 말했다.
“사망했습니다.”
닥터박의 커다란 몸이 휘청했다. 그는 등뼈를 드러낸 채 엎드 려 있는 젊은 군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애쓴 보람도 없이 한 젊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죽은 이의 늘어진 한쪽 손에 묵주가 걸려 있는 것을 닥터 박은 보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젊은 이는 묵주를 쥐고 있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묵주는 손에 쥐어져 있지 않고 반쯤 걸려 있었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닥터 박이 메스 대신 묵주를 쥐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비록 살리지는 못할지언정, 죽기 전에 그 군인에게 묵주를 고쳐 쥐여 주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 한 것은. 허나 그는 이미 사망했다. 상황은 종료되었다. 닥터 박 은 사망한 환자를 치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철수해야만 했다. 머 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후방에서 그를 기다리는 다른 환자가 너 무도 많았고, 그리고 또…………….
‘묵주를 다시 쥐여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뭐….’
닥터 박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 장소를 떠났다. 그랬다. 그러나…….
지금 박 신부는 죽어 버린 군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 신부 는 쓰러진 군인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조용히 손에 쥔 묵 주를 바로 쥐여 주었다. 그러자 허공에 매달린 미라가 미소를 지 었다.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과거에 자신이 보았던 마리아의 그림과도, 나희의 미소와도, 제주도 바다 소녀의 미소 와도 같은 것이었다. 세상의 종말은 무엇일까? 인간의 종말을 의 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주 만물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일까? 말 세가 인간의 말세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죽음을 의미 한다는 말일까?
모든 인간이 죽는다 해도 어느 누구도 모두의 죽음을 겪지는 않는다. 단 한 사람의 죽음만을 겪을 뿐이다. 모두의 죽음을 볼 수는 있어도, 정작 자신은 한 사람분의 죽음밖에는 겪을 수 없 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죽음이란 그 사람에게는 곧 세상의 종말 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느 무엇도 그보다 중요한 일이 없는 것이 아닐까?
박 신부에게 아쉬움이 밀려왔다. 몇 달 동안 묵시록의 계시를 풀이한다고 틀어박혀서 보낸 시간들이 아쉬웠다. 왜 주변의 사 람들부터 돌아보지 않았을까? 세상을 종말에서 구한답시고 주변 의 사람들을 등한시한 자신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묵주를 고쳐 쥐여 주자 식어 버린 군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 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 미소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소녀들 의 미소와 구별할 수 없으리만큼 똑같았다. 그것을 보며 박 신부 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아주 작은 움직임부터 시작하면 된다. 이것이야말로 큰 힘이다……”
박신부는 깨달았다. 운명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신의 섭리를 믿기로 했다. 말세가 예정된 것이라면 한낱 작은 인간의 지력( 力)으로 바뀔 수도 없는 것이며, 한낱 인간의 능력으로 비틀어지 게 할 수도 없는 일이리라.
박신부는 계속 믿기로 했다. 신은 아직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을. 신의 섭리가 결코 인간이 자멸하는 것을 보고만 있도록 내버 려 두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더 이상 고민하고 번민할 필요가 없 었다. 자신은 그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면 되는 것이다. 그 분의 뜻대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박 신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과거 닥터 박이 사라진 것처럼. 그러나 다시 나타났다. 없어졌다가 다시 생긴 것처럼, 지워졌다 가 다시 그려진 것처럼.
박 신부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갈라지면서 묵시록 의 내용을 토해 내는 빛을. 박 신부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여태껏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아무 깨달음도 없었다. 이미 알고 있고 그 렇게 행하고 있다고 믿어 왔지만, 또다시 깨달을 수도 있었다. 알고 있는 것과 깨달은 것의 차이. 아니, 깨달은 것과 새로 깨닫 는 것의 차이가 정녕 크다는 것을 박 신부는 느꼈다. 그것으로 너머에 있다. 인간과 다른 신념에 기본을 두고 있다. 그 신념이 무엇이건간에 인간은 그것조차도 스스로의 선악으로 판별할 수 밖에 없다. 박 신부는 인간이 신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확신했다. 그것은 곧 신이 인간의 선악관을 지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러나 신은 거기까지밖에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신이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력인지도 모른다. 신은 인 간에게 평화를 주지 않았다. 인간의 가치관은 인간을 수많은 생 물과 환경, 자연 등과 싸우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라는 인간 이외의 무언가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 거의 대부분의 인간 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있지만, 박 신부를 비롯한 극소수의 인간 들은 그 ‘마’와 접촉했다. 그리고 투쟁의 시간이다. 투쟁은 싫지 만, 다른 방법이 없다. 인간과 인간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 인 간의 선악이 인간만의 것일지라도, 비록 초월적인 그들은 인간 을 비웃지만, 인간은 엄연히 만물의 영장이다. 박 신부는 인간 의 가치가 비록 완전치는 못하다 해도 어떤 맥락에서건 초월 세 계나 신과도 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올라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었으면 공 룡처럼 쇠망했을 것이다. 수많은 오류와 잘못을 범하고 그 대가 도 만만치 않게 치르지만, 언젠가 인간이 잘 발전한다면 저 끝에 가 닿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공존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아우르 는 진리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허나 아직은 아니다. 자만하면 안된다. 인간의 선이라는 것을 우주 전체에 파급시키기엔 아직 인 간의 가치는 조잡하고 턱없이 모자란다. 섣불리 함부로 절대선 을 지껄이면 자멸할 뿐이다. 특히 ‘마’ 앞에서는…………. 자칫하면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면 종말이다. 마물이 나타나 세상을 휩쓰 는 식의 만화 같은 일이 아니라,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 찾아오는 종말이다. 당장 모든 사람이 전멸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깨닫지 도 못하는 새 서서히 쇠멸하다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가치의 파 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주도권 상실, 내부 갈등으로 인한 폭력 적 자멸………… 무엇일지 언제일지 모르지만 어쨌건 패배하면 종 말이 온다.
「요한 묵시록은 정말로 세상의 종말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 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더 이상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말세의 위기는 수없이 왔었다. 앞으로 올 말 세도 그중의 하나일 뿐. 다만 그것이 종말로 치닫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말세가 곧 종말은 아니다. 꼭 이겨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패배하지 않으면 된다.
박신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뜰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한쪽 손 으로 나희를 닮은 소녀의 몸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팔로는 두 명의 어부의 몸을 잡고 있었다. 그 상태로 박 신부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물 위로………….
‘나는 인간이다. 신부이고 퇴마사이기 전에 인간이다. 그리고 마물도, 악령도 과거에는 인간이었겠지. 어쩌면 악마까지도. 인 간의 마음, 인간의 생각. 신은 그냥 보고 계신다. 신은 인간을 사 랑하시기 때문에 그냥 보고 계신다. 신은 인간 하나하나보다 더 크게 인간 전체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가치를 사랑하신다. 인간 에게 맡겼기에 끼어들지 않으시는 것이다. 때문에 신은 인간 하 나하나를 사랑하지 않으시지만, 결국은 인간 하나하나를 사랑하 시는 셈이다.’
박신부는 ‘마’에게로 생각을 돌렸다.
‘그러면 마는 무엇일까? 비록 그 근원은 다르고 다를지라도, 결국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가 아닐까……………. 그 들이 아무리 강하고 다른 존재들일지라도, 인간의 세계에 끼어 들 수 있는 것은 결국은 인간을 매개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렇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마와의 싸움이지만, 인간 스스로 의 싸움일지도..
박신부는 마침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마를 상대하려면 그들을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는 인간의 세상. 그들의 세상이 아니다. 궁극의 길이 어딘가 있고, 지금 우리가 그것을 직접 붙잡고 있지 않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결국 진리는 가까운 데 있다. 아니, 가까운 데에도 있어야 진리 다. 인간 스스로 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턱없이 높게 잡아서도, 낮게 잡아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 가치대로 하면 되는 것 이다. 진리는 어디에나 있으니, 우리 인간의 무지하고 불완전한 가치관 안에도 있을 테니까. 결국은 빙 돌아서 제자리로 온 것인 가? 아니, 빙 둘러보았으니 더 확신할 수 있지. 무엇이 나타나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확신……………..
박신부의 몸은 어느새 오라의 광휘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아 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 부러지고 으깨어진 팔로 사람을 들 어 올릴 수 있는지, 왜 부서져서 곤죽이 된 다리로 물 위를 걸을 수 있는지, 왜 파도 속에 잠겼다가 태연히 일어날 수 있는지 의 문조차 갖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텅 빈 무(無)그자 체였다.
어느덧 박 신부는 물 위를 걸어 해변에 도착했다. 박 신부는 세 사람을 내려놓았고 조용히 기도하는 자세로 그 자리에 앉았 다. 광휘가 사라지며 박 신부의 팔다리에서 피가 왈칵 솟구쳐 나 왔다. 박 신부는 해변을 붉게 물들이며 쓰러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제 찾아냈는가? 깨달았는가?
아니, 아무것도 모르겠네.
그러면?
그러나 알 수 있네. 모든 것이 분리된 것이 아니네. 마의 실체가 어떤 것이든간에, 인간 세상의 마는 인간에서 비롯된 것이며, 인간의 종말도 인간에서 비롯될 것이네. 만약 신이 분노하여 종말을 내리시는 것이 어 쩌면 내일 올지도, 아득히 먼 훗날에 올지도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종말을 막는 것뿐이라네. 종말을 부르는 힘이 비록 마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마는 지금 바로 인간들 속에 있겠지. 그렇다면 어찌할 셈인가?
인간의 말을 들어야 하네. 신의 힘, 아니 보다 큰 진리를 간구하는 것 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세.
박 신부는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높이 쌓아 둔, 시끄럽게 떠 들어 대고 외쳐대는 책들을 모조리 덮은 다음 구석에 쌓았다. 곧이어 켜 두었던 호롱불을 들어 그 책들에 불을 붙였다. 모든 책들이 순식간에 비명 소리와 함께 불 속으로 사그라지고 정적 만이 남았다. 박 신부는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더 이상 빛도 보이지 않았고, 홀리려는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등 뒤 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와 걸음을 멈추었을 뿐.
예수께서 말씀하셨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그리고 또 그러셨지. 너희 중 가장 못한 자 하나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내게 해 주는 것이라고…
박 신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자 신 있는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파도가 다시 솟구치면서 일어났다. 큰 파도 속에서 시커먼 형체가 불쑥 빠져나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갑자기 하늘이 캄캄 해지고 빛을 잃은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위는 칠흑 같 은 어둠에 잠겨 버렸다. 거센 바람이 일어나면서 사방은 알아들 을 수 없는 아우성 같은 것으로 가득 찼다.
소녀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켜 박 신 부 곁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흔들어 댔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 절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옆의 아저씨도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박 신부 역시 마찬가지였 다. 그렇지만 사악한 기운은 박 신부에게 범접하지는 못했다. 박 신부 근처로 다가가는 기운은 모조리 튕겨 나가는 것이었다. 사악한 기운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사납게 울부짖는 것 같은 바람이 악귀처럼 짖어 대면서 소용돌이쳤다. 겁에 질린 소녀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는 놀 라고 겁먹은 눈을 들어 멍하게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바로 앞쪽에서 모래를 뚫고 날카로운 쇠막대기 같은 것이 쑤욱 솟아올랐다. 소녀는 몸을 덜덜 떨었다.
찔러라.
검은 그림자가 소녀에게 말했다. 소녀는 홀린 듯 막대기를 쥐 었다. 소녀의 팔이 덜덜 떨리면서 박 신부의 몸 위로 옮겨졌다. 그러나 박 신부는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 박 신부 의 얼굴을 보고 소녀는 팔을 덜덜 떨기만 할 뿐, 들고 있는 막대기로 찌르지는 못했다.
어서!
다음 순간, 소녀는 막대기를 떨어뜨려 버렸다. 박 신부는 미소 를 머금은 채 눈을 떴다. 그는 의식을 잃은 게 아니었다. 아니, 이 전보다도 더 정신이 맑았다. 박 신부는 소녀를 믿었고, 소녀는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어둠의 힘도 소녀의 여 리고 순수한 마음을 지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녀는 박 신부의 몸 주변으로 녹색의 빛무리가 모여들고 무 리를 지어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연이어 박 신부의 몸에서는 녹색의 빛이 나와 둥글게 뭉쳐졌다. 소녀는 팔다리가 다 부서지고 박살이 났던 할아버지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미 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아가야, 이건 다 꿈이란다.”
“아……………. 예…………….
“그래. 그러니 무서워 말고 눈을 감고 있으려나. 그러면 될거야. 알겠니?”
소녀는 박 신부의 미소를 보고는 덩달아 웃어 보였다. 그리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 이럴 수가! 이럴 수는 없어!
박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너는 분명 아무런 힘도 없는……………
그렇다………. 나는 힘이 없지. 하지만 너는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말하는 힘이란 것은 이 소녀의 웃음만도 못한 것이다…………….
박 신부는 검은 그림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 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기엔 지금은 너무나 피곤했다. 박 신부는 사악한 힘과 대화하면서도 인상을 쓰지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 았다. 오히려 은은한 미소를 띠면서 그 힘을 가련히 여겼다. 진 실로 가련하다고.
박 신부가 눈을 감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검은 그림자 는 비명을 지르며 어디론가 사라지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빠 르게 박 신부의 녹색 오라가 퍼져 나갔다. 그림자는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순식간에 폭발하여 흩어져 버렸다.
사방을 뒤덮었던 어둠이 걷혔다. 박 신부는 가만히 눈을 뜨고 잠시 맑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머금으며 잠을 청했다. 무 척 피곤했다. 무척이나.
두 달이 지났다. 박 신부는 절룩거리면서도 차츰 병원을 산책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병원에 실려 왔을 때 박 신부의 상처는 몹시 심했지만, 신기하게도 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 다. 원래 불편했던 다리 말고는 박 신부를 데리고 왔던 어부들 도박 신부가 처음에는 분명 뼈가 없어진 것처럼 보일 만큼 박살 난 듯했는데, 너무 멀쩡해서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박 신부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 신부를 구해 준 어부는 배가 부서졌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 는 듯했다. 가난했지만 박 신부가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 수술 보증까지 설 정도로 호탕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모두 가 물에 빠졌을 때 어떻게 뭍까지 올 수 있었을까 은근히 궁금하 게 여겼지만, 그냥 파도에 밀려와 살았으려니 하는 것 같았다. 병원에 입원한 박 신부는 예전에 백호에게서 받은 수표 잔액 이 아직 꽤 남아 있던 터라 병원비를 밀리지 않고 지불할 수 있 었다. 그리고 서서히 건강을 회복해 갔다. 그 소녀는 가끔씩 박 신부를 찾아와 주었고, 박 신부도 미소로 반겼다. 그 소녀는 박 신부가 동굴에서 공부하고 있었다는 말(그렇게 둘러댔다)을 듣 고 아버지에게 말해서 짐을 싸다 주겠다고 했다. 사흘이 지나 소 녀의 아버지는 짐 꾸러미를 병원으로 가져다주었다.
짐 꾸러미를 뒤져 보고 박 신부는 의아했다. 자신의 것이 아 닌, 얇은 석판이 하나 딸려 온 것이다. 박 신부는 그것이 무척 오 래된 것 같아 겉에 낀 이끼를 헤치면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순 간 난데없이 거기에 기이한 문자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박 신부는 그 문자들을 읽을 줄은 몰랐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 볼 수는 있었다. 준후만이 읽을 수 있는 녹도문이었다.
퇴원하자마자 박 신부는 그 동굴로 찾아갔다. 녹도문이 적힌 석판이 나온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동굴은 그냥 조용한 곳을 찾기 위해 들어갔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런 것이 나오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동굴을 샅샅이 뒤지던 박 신부는 벽 에 새겨진 아주 희미한 글씨를 발견했다. 그 글자는 한쪽 벽이 움푹 파인 곳 바로 밑에 있었는데,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글 자가 제법 많이 쓰여 있었다. 그 밑에 다시 오래된 전자체(篆 體)의 한자로 쓰인 글자도 있었다. 그 글자는 박 신부도 해독이 가능했다.
‘서복(福), 여기서 우사경을 얻다.’
박 신부는 모든 글자들을 탁본하여 품에 넣었다. 아무래도 이 녹도문 같은 글자는 준후에게 물어보아야겠다 싶었다.
이제 찾았나? 이제 갈 것인가?
박신부의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그가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또 다른 박 신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제 박 신부는 하나였으 니까. 안타까워하고, 미혹되어 마음을 애태우던 과거의 박 신부 는 좀 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운 박신 부와 합해져 있었다. 미혹이나 흔들림은 더 이상 없었다.
가야지.
박신부는 동굴을 나서면서 다시 그곳을 둘러보았다. 신기하 게도 그 글자가 새겨진 곳은 빛무리가 보였던 곳이었다. 여기서 이것을 발견한 사실이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예지이자, 묵시이자, 기적이 아닐까? 박 신부는 싱긋 웃으며 스스로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나에게 성령의 힘이 돌아온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 지…………. 이제…………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시 시작이다…………..’
박신부는 동굴을 나섰다. 다시 한번 세상을 위해 힘을 쓰기 위해서 다시 한번 인간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