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권 7화 – 황금의 발 3 : 위기의 연속
위기의 연속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현암은 왼팔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 끼면서 눈을 떴다. 몸이 온통 굵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오 른손은 왼팔을 굳게 감싸 쥐고 있었고, 왼팔에서 피가 흘러내리 고 있었다. 현암이 공력을 잔뜩 불어 넣은 오른손은 아무도 풀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묶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현암의 천정개혈대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여전히 공력은 주로 오른팔로만 운행할 수 있었고, 왼팔에 공력을 많이 불어 넣는 것은 아직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왼팔은 지금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오른손으로 공력을 가해 줄을 끊을 수는 있지만, 그러다가는 왼쪽 팔목까지 같이 끊어질 정도로 밧 줄이 단단했다. 그러나 현암은 그런 것보다도 월향을 놓치지 않 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현암의 앞에는 백 목사와 몇 명의 청년들이 서 있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백 목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암은 눈을 감아 버렸다.
“거칠게 다루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힘이 너무 강해서 행여나 다른 사람들이 다칠까 봐 묶은 것입니다. 이해하 시기 바랍니다.”
현암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할 생각이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묶이 지도 않았을 거요.”
고개를 끄덕이며 백 목사가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말리려 했습니다만………….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하고 말고가 뭐 있겠소? 줄이나 풀어 주시지요?”
“그건 곤란합니다. 당신이 사악한 힘을 버리기 전까지는…………….”
그 말에 현암은 눈을 치켜떴다.
“사악한 힘?”
“그렇습니다. 당신의 왼팔에 있는 그 칼・・・・・・ . 나도 보았습니다. 당신은 그 이상한 칼을 너무도 소중히 여기더군요. 그것이 당신이 지닌 힘의 근원입니까?”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고 현암은 생각 했지만 구태여 백 목사에게 그런 것까지 구구하게 설명하고 싶 지 않아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해 요. 인간에게 허용된 일이 아닙니다.”
백 목사는 퍽 차분한 어조로 계속 말했고 현암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당신이 사람들을 치료하고 안수해 주는 것은 인간에
게 허용된 힘이오?”
“그것은 제 힘이 아닙니다. 주의 권능일 뿐입니다.”
현암은 다시 흥 코웃음을 쳤다.
“남의 힘은 사탄의 힘이라고 잘도 단정 지으면서 당신 자신의 힘에 대해서는 의심해 본 적이 없나 보군?”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백 목사의 뒤에 있는 청년들이 뭐라고 소 리를 지르면서 뛰쳐나오려 했다. 그러나 백 목사가 막아섰다. 청 년들이 부르르 떨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저자는 주의 권능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혼내줘야 합니다!”
하지만 백 목사는 단호했다.
“그런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저 사람을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할 뿐.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현암은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백 목사는 그리 악한 사람 같 지 않았다. 처음에는 속임수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사이비 종 교 지도자 정도로 여겼지만, 그건 성급한 판단 같았다. 그래서 현암은 오히려 더욱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고지식한 작자 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주의 권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현암이 보기에 백 목사에게 주어진 힘은 어두운 쪽의 힘이 분 명했다. 그렇지만 백 목사는 그 점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 다. 아니, 의심해 본 적도 없는 듯했다. 먹히지 않을 거라는 생각 은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현암은 계속 백 목사에게 말 을 걸었다.
“당신은 그럼 주의 권능으로 당신에게 사람들을 치료하는 힘 을 주었다고 믿나요?”
“주의 권능이 아니면 어떻게 그런 힘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주의 권능이라……………. 그렇다면 왜 나에게 이 힘이 생겼을까 요? 나의 힘도 주의 권능이나 그 비슷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는 없소?”
백 목사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힘은 사람을 해치고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힘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치료해 주는 좋은 힘이기 때문에 당신의 힘은 주의 권능이고, 내가 얻은 힘은 사람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에 사탄의 힘이라는 겁니까?”
“그렇소.”
백 목사가 단호하게 말하자 현암은 껄껄 웃었다.
“당신은 사탄을 본 적 있소?”
“사탄의 힘은 여러 번 보았지만, 사탄을 본 적은 없습니다.”
“나는 이미 여러 번 보았소.”
현암은 물론 사탄과 맞서 싸운 적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뒤의 청년들은 우우 하면서 마구 날뛰며 흥분 했다.
“저것 보세요! 저놈은 사탄에게 몸을 판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 입으로 시인했잖아요!”
현암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사탄이 그 정도로 바보인 걸로 믿소? 당신들 만똑똑하고, 당신들이 두려워하는 사탄은 그리 뻔한 수작밖에 하지 못하는 바보들인 걸로 여기는 거요? 당신들이 그리 잘났 소? 사람을 치료하는 힘이라고, 그렇게 곧이곧대로 주의 권능이 라고 단언하는 당신들이, 정말 사탄을 알아보고 대적할 수 있다 고 보시오? 허허.”
백 목사가 조금 창백해진 안색으로 되받았다.
“나는 주의 힘을 기도를 통해 영접했습니다. 기도의 힘을 나는 믿습니다.”
“흥! 말세일수록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異)을 행하고, 거짓 예언과 거짓 기적에 사람들이 열광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던가요? 그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까?” 백 목사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현암은 말을 이었다. “주의 권능이 그리 쉽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사람의 병을 치 료해 주고 편안히 하는 것이 과연 주님이 직접 하실 일이라 여 깁니까? 물론 주님이 그런 것도 들어주시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과연 주님이 모든 병을 고쳐 준다면, 애당초에 병은 왜 생긴 걸 까요? 할렐루야를 외치고 부흥회장으로 사람을 모으기 위해 생 긴 겁니까? 당신이 안수를 내려서 사람들의 모든 병이 낫는다 면・・・・・・ 당신이 사도입니까?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십 니까? 여기서 할렐루야를 그토록 열광적으로 외치는 사람들도 그만큼의 믿음이 있다면 이미 육신의 고통은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왜 당신에게만 주의 권능이 내려오고, 당신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나을까요? 주의 권능이라면, 믿음을 가진 사 람들에게 모두 내려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것은…….”
“뭐, 좋습니다. 당신은 양들을 이끄는 목자이니 그렇다고 해두죠. 그런데 당신은 모든 사람을 치료해 줬습니까? 이렇게 열성 적으로 찾아와서 할렐루야를 외치는 사람들 말고, 예수 이름조 차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는 했습니까? 그 사람들도 똑같은 하나님의 어린 양일 텐데요. 몽매하기 때문에 더 인도해야 할, 길 잃은 어린 양들이 아닙니까?”
백 목사의 뒤에 있던 청년들이 흥분하여 현암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백 목사가 필사적으로 그들을 말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말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 역시 사악한 사탄의 술 수이며, 당신 자신이 회개하기만 하면 깨끗해질 것입니다. 그러sk……”
현암이 딱 잘라 말했다.
“난 회개할 것이 없소.”
“당신은…….”
현암은 이제 이런 대화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자기 눈 과 자기 머리만 믿으며 자기만을 확신하는 인간을 설득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오직 스스로의 ‘논리’에 빗대어 모든 것을 평하고 마음대로 잣 대질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고도 그 사람은 떳떳하다. ‘나는 객관적이고 공정했다’고 말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과 아무리 입씨름을 해 보았자 소용없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백 목사나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때에 자신의 말은 충분히 마귀 들린 사람의 이야기로 들릴 것 같 았다. 이런 종류의 맹신적인 인간들에게는 어떠한 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굳이 백 목사를 때려눕히 고 싶지도 않았고, 어차피 대화도 안 통할 것 같아 현암은 아예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난 회개할 것이 없단 말이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요?”
“당신은……!”
“난 나 스스로 옳았다고 여기오. 당신도 그렇겠지? 예수 그리 스도가 최후의 심판이라 했던가? 아무튼 그걸 할 때라면 몰라도 그 전에는 절대! 나는…………… 스스로만 옳고 진리를 안다고 믿는 인간에게 회개하고 싶지 않소!”
그 말을 끝으로 현암은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을 듯, 조개껍 질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백 목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연신 기도를 해 댔다. 현암으로서는 그 기도 소리가 욕설 만큼이나 듣기 싫었다. 차라리 진짜 사탄의 유혹이나 사악한 주 술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분명 그릇된 의도에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암에게는 그릇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기 때문 이다. 백 목사가 한참 동안 기도를 올리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 했다.
“내 기도가 약하여 당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계속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면서 백 목사는 손수 현암을 묶은 줄을 끌러 주었다. 주변 의 청년들이 위험하다며 백 목사를 말리려 했지만, 백 목사는 들 은 척도 않고 현암의 손을 묶은 줄만 남기고 다른 줄을 대강 끌 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청년들에게 말했다.
“이분을 막지 마십시오.”
“하지만 목사님…….”
“이분은 많이 다쳤소. 우리가 잘못한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분도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믿읍시다……………..”
백 목사는 조용히, 그러나 조금 힘없는 걸음걸이로 밖으로 걸 어 나갔다. 그런 백 목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현암은 안쓰러움과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저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백 목사가 막 문을 나서려고 할 때, 별안간 그가 몸을 비틀하 면서 그 자리에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현암이 놀라서 몸을 일 으키려는데 갑자기 청년들이 흥분해서 외쳤다.
“네가 그랬지? 이놈이!”
“어딜가! 이 자식! 사탄의 종!”
느닷없이 뒤통수로 딱딱한 것이 퍽 하고 날아들었다. 제아무리 현암일지라도 뭇매를 맞은 상태인데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눈에서 불똥이 팍팍 튀는 것 같았다. 급히 공력을 끌어 올려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것 은 어찌할 수 없었다.
“뭣들 하는 거야! 내가 그런 게 아냐!”
그러나 그런다고 현암의 말을 들을 청년들이 아니었다. 청년 한 명이 백 목사에게 달려갔고, 나머지 청년들은 현암에게 덤벼 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현암은 다시 이들의 매를 감 수할 생각으로 몸을 굽혔다. 그런데 또 한 번 퍽 소리가 나면서 등이 격렬하게 아파왔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 ・・・・・・ 당신들…………….”
현암이 고개를 돌리는데 난데없이 곡괭이 같은 쇠뭉치가 현 암의 얼굴로 휙 날아들었다. 현암이 재빨리 고개를 돌려 피하 자 곡괭이는 현암의 얼굴 옆, 콘크리트 바닥을 한 치가량 부수 며 콱 박혔다. 저걸 그대로 맞았다면 칠십 년 공력이고 뭐고, 박 살이 날 뻔했다. 현암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청년들은 비록 현암에게 분노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 방에 현암을 때려 죽이려 할 정도로 난폭한 자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현암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몸을 휙 굴려 구석으로 간 뒤에 몸을 일 으켰다.
“어엇!”
현암은 깜짝 놀랐다. 청년들 모두 눈자위가 희게 뒤집어져 있었고 표정이 없었다. 손에는 저마다 근처에 굴러다니던 연장이 며 몽둥이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분명 뭔가에 쐰 것 같았다. 아 까 산중에서 죽음을 당한 남자도 저랬는데, 현암은 저항하고 싶 었지만 오른손이 왼쪽 팔목에 매여 있어서 도저히 공력을 쓸 수 가 없었고, 월향검조차도 꺼낼 수가 없었다. 현암이 주춤하는 사 이 그들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손에 든 흉기를 현암을 향해 휘둘 렀다.
‘뭔가 이상하다!’
현암은 하는 수 없이 몸을 굴려 그들의 공격을 피한 뒤 백목 사의 쓰러진 몸을 훌쩍 뛰어넘어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문을 빠져 나가려는 찰나, 현암은 깜짝 놀랐다. 문 앞에는 이미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양손을 들어 올리고 희 게 뒤집힌 눈자위를 번득거리며 현암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현암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듯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정신이 나갈 수 있단 말인가? 현암은 공력 도 쓸 수 없는데다가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은 것에 질려 버 렸다. 현암은 기껏 열었던 문을 다시 쾅 닫았다. 이번에는 뒤에 서 청년들이 흐느적거리며 나타나 흉기를 휘둘렀다. 현암은 이 를 악물고 아픈 몸에 힘을 주어 재빨리 몸을 움직이며 그들이 휘두르는 삽이며 곡괭이 등을 피했다. 그러던 차에 닫아 놓은 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문의 못이 팅팅 빠져나가고 끼이 익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바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문을 밀어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현암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판이었다. 할 수 없이 현암은 문이 터져 나가려는 순간, 몸을 날려 반대편 벽에 나 있는 좁은 들창을 향해 뛰어들었다. 유리가 깨지면서 옷이 찌익 하고 긁히는 소리가 났으나 개의치 않았다. 현암은 옆 창고에 쌓아 둔 짐 더미 위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 다. 먼지가 일어 기침이 나왔다. 현암은 손에 묶인 밧줄을 풀 작 정으로 왼손을 뻗어 깨어진 유리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런 데 현암이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창고의 문마저도 삐걱거렸 다. 현암의 몸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도대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면 밖에 있던 수 백 수천의 사람들이 모두 뭔가에 씌었단 말인가?’
이 사람들을 마구 치거나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냥 밀 어내자니 수가 너무도 많았다. 문이 삐걱거리다 펑 하고 터졌다. 좀비처럼 몸이 굳은 십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몰려 들었다. 현암은 재빨리 몸을 날려서 뒤쪽의 문을 박차고 뛰어들 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 문이 어디로 통하는지 따질 겨를도 없었다. 그곳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게다가 뒤에서는 눈이 희게 뒤집힌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제길! 손이라도 풀린다면!’
현암은 벽에 기대어 선 채 왼손으로 유리 조각을 밧줄에 대고 문질렀지만 잘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유리 조각을 힘들게 오른 손으로 옮긴 다음 공력으로 유리 조각에 조그만 검기가 맺히게 했다. 그러나 밧줄을 채 자르기도 전에 유리 조각이 검기를 이기 지 못하고 퍽 하며 깨어져 버렸다.
‘오늘은 되는 일이 없군.’
서서히 저벅저벅 다가오는 수많은 멍한 눈동자들을 보니 저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제길……………’
현암은 주위를 돌아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나갈 길은 완전 히 차단되었다. 누가 일부러 막아선 것은 아니었으되, 수십 명의 사람들로 아예 꽉 메워져 있으니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더 이상의 선택은 없었다.
현암은 묶인 두 손으로 벽을 한번 두드려 보았다. 예상대로 벽 은 블록 한 겹의 얇은 벽인 듯했다. 이런 산중에 건물을 지으려 니 운반의 문제로 자재를 충분히 쓰지 못했으리라. 현암은 급히 공력을 끌어모으면서 오른손의 검지를 곧추세웠다. 오른손이 굵 은 줄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세울 수 있는 손가락은 그것밖에 없 었다. 그다음 현암은 ‘탄’ 자결로 공력을 응용하기 시작했다.
콰쾅!
사람들의 손이 현암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먼지구름과 함께 현암의 앞을 막고 있던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현암은 자신 에게 달라붙는 몇 개의 손을 뿌리치면서 구멍 너머로 몸을 날렸 다. 그동안 천정개혈대법을 수련하여 공력의 운용이 많이 익숙 해진 덕분에 ‘탄’ 자결을 쓰고도 탈진하지는 않았지만, 숨이 가 빠 오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막 벽을 넘어서다 현암은 뭔가에 걸려서 넘어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꺅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야! 누구야! 무서워! 무서워!”
현암은 몸을 일으키다가 또다시 놀랐다. 이 목소리는 아까 그 정신 나간 여자의 목소리가 아닌가!
무너진 벽 틈에서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손들이 우르르 뻗쳐 왔다. 그 손들은 서로 엉켜서 현암에게 닿진 못했지만, 그 부근 에 쓰러져 있던 여자의 여기저기를 잡았다.
“아이고! 뭐야! 뭐야! 오빠! 살려 줘! 오빠!”
자신도 급했지만 그 목소리를 듣고 현암은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저들은 지금 이성을 상실한 사람들이었다. 여자를 단번 에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도 있었다. 현암이 급히 구멍 쪽으로 다가서는 순간, 여자는 이미 수많은 손에 잡혀 구멍 저쪽으로 반 쯤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현암은 묶인 왼손을 뻗어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수십 명의 힘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공력이라면 수십 명의 힘을 능 가할 수 있었지만, 든든하게 발 디딜 곳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발 디딜 데 없이 체중 이상의 힘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불가능했 던 것이다. 할 수 없이 현암은 공력을 팔에 집중했다.
“아아악!”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여자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현암이 별수 없이 ‘투자 결의 공력을 여자의 몸 을 통해 퍼뜨린 것이다. 그 때문에 여자를 끌고 가려던 자들은 충격을 받고 손을 풀었지만 여자가 받은 충격도 상당할 터였다. “미안하지만 할 수 없었소.”
현암이 중얼거리면서 여자를 얼른 일으키려 했으나 그녀는 벌 써 기절한 다음이었다. 하는 수 없이 현암은 여자를 어깨에 둘러 메고 방 저쪽으로 달려갔다. 문이 보였다. 문이 잠겨 있는 것이 보여 현암은 달려가면서 몸으로 들이받아 아예 문을 부숴 버렸 다. 단단한 문이었지만 두 사람의 무게로 들이받은 덕에 자물쇠 가 부서진 것 같았다.
‘사람을 구해 주니 보답을 받는군.’
현암은 혼자 실없는 생각을 하며 달려갔다. 곧 바깥과 통하는 문이 나타났다. 현암은 곧바로 숲으로 달려가려고 했는데 뒤에 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저벅저벅 걷는 것이 아니라 달려오는 소리였다. 현암은 땀을 뻘뻘 흘리며 최
대한 빨리 달리려 했지만, 불행히도 이미 많이 다친데다가 힘도 빠졌고 무엇보다도 여자를 메고 있어 거북이처럼 느리게 달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구해줘도 꼭 보답받는 건 아니군.’
하지만 힘이 든다고 여자를 내팽개치고 갈 수는 없었다. 저 정 신 나간 집단이 이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그 러는 사이 어느덧 수십 명의 남자들이 현암의 주위를 에워쌌다. 현암은 어헝 하며 사자후의 일갈을 했다. 주변이 쩌렁쩌렁 울리 면서 달려들던 놈들이 섬뜩 놀라며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섰다. 그들이 조금 기가 죽은 것 같아 현암은 일부러 여유 있게 한숨을 쉬며 여자를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여자를 툭 치면서 작은 소리 로 말했다.
“이봐요. 내 손좀…………….”
여자가 손만 풀어 준다면 이 사람들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라 고 봤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암이 공력을 보낸 충격이 너무 컸는 지 여자는 아직도 인사불성이었다. 그때 현암은 줄에서 뭔가 이 상한 느낌이 오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아차 하고 외쳤다. 조금 전 에 현암은 월향을 잃을까 봐 있는 공력을 오른손에 다 퍼부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른손 에 줄을 묶자 남은 공력이 줄에 흘러들어간 모양이었다.
이젠 그 공력이 전부 사라질 때까지 그 줄은 거의 끊을 수 없 다고 봐야 했다. 공력이 칼날을 퉁겨 낼 것이었다. 이제 남은 방 법은 월향의 도움을 얻어 줄을 베거나 왼손을 부수고라도 손을 빼내는 방법뿐이었다. 그렇지만 오른손에 눌려 있는 월향을 무 리하게 꺼내다간 오른손에 구멍이 날 터였다. 공력이 도는 손은 오른손뿐이었으니 그렇다면 차라리 왼손을 포기하는 편이 나았 다. 현암이 이왕 이렇게 된 것, 왼팔이 박살 나더라도 힘을 주어 손을 빼낼까 하는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조금 교활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가 얼굴에 히죽거리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봐, 청년,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 이 난리지? 응?”
현암은 안색을 굳혔다. 이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뭔가에 홀리 거나 쒼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자가 모든 것을 조종하는 흡수(手)란 말인가? 현암은 그자를 노려보았지만, 그자는 유 들유들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현암의 주변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자네, 한가락 하는 모양인데, 정말 오늘 자리 잘못 골랐네, 허 허. 소리 지른다고 누가 오거나 사람들이 기절해 쓰러질 것 같은 가? 허허. 그러지 말고 나와 손잡는 게 어때? 자네 정도 되면 꽤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뭘 말이오?”
“자네가 내 말만 잘 들어준다면 며칠 만에 일이억 버는 건 문제가 아니지. 어떤가?”
현암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남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꽤 정의파인 것 같은데……………. 정의가 밥 먹여주나? 내 제안이 어때?”
현암이 심드렁하게 되받았다.
“실례지만, 난 당신을 처음 보는데 ・・・・・・・ 당신은 누구요?”
“난 강 집사라고 하네. 이 교단의 총무인 셈이지. 빨리 대답해. 부흥회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내가 응낙하면 이 여자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네. 저 계집애는 봐선 안 되는 걸 봤어.”
현암이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황금의 발 말이오?”
그 말에 강 집사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 모습을 보고 현암은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렸다.
“난 백 목사가 주동자인 줄 알았는데 실수했군. 당신이야말로 그 사악한 힘의 조종자였구먼!”
별안간 강 집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놈을 죽여라!”
청년이 달려들고, 현암이 왼팔이 부서질 각오를 하면서 공력을 집중시키려는 순간, 누군가가 사람들의 머리 위를 휙 뛰어넘 어 날아들었다. 그리고 현암에게 덮치려던 청년 두 명을 양손으 로 툭 밀어냈다. 그 두 청년은 별로 세게 맞은 것 같지 않았는데 도 으악 소리를 지르면서 허공을 날아 저만치 나가떨어져 버렸 다. 내가권(拳)의 수법. 정 선생이었다.
“정 선생님!”
현암이 말하자 정 선생은 인상을 찌푸리며 현암의 옷을 잡아당겼다.
“어서 도망가세나! 중과부적(敵)이네!”
“어떻게요?”
“비월법(飛越法)”으로 뛰세! 아까 나처럼…………. 음? 아니, 자 네 비법을 모르나?”
정선생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현암이 조금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모릅니다.”
“으음? 아니, 자네만 한 공력을 가진 인물이 어찌 그것도 모르 는가!”
“전 어차피 다리엔 공력이……………. 그리고 이 여자도 그냥 둘 순…..”
*선도에서 높은 담이나 장애물을 뛰어넘는 기술을 말한다. 작게는 보통 담장으로부터 크게는 남대문 같은 아주 높은 장애물도 거뜬히 뛰어넘을 수 있다 고 전한다.
말을 더 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강 집사가 소리를 지르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가운데로 몰려들었다. 그것을 본 정 선생이 휙 하고 위로 뛰어올랐다.
“제 손을 풀어 주십시오!”
현암이 외쳤으나 정 선생은 현암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훌쩍 허공을 날았다. 정 선생은 강 집사가 조종자인 것을 간파하 고강 집사를 잡으면 될 것이라 여긴 듯했다. 그런데 정 선생이 비월법으로 몸을 솟구치자 강 집사의 주변에 수십 명의 사람들 이 와르르 인간 벽을 쳤다. 정 선생이 깜짝 놀라 허공에서 두 바 퀴나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꾸었지만 그 자리에도 역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당황한 정 선생이 허공에서 재빨리 세 번 손바닥을 후려치자 여섯 명의 사람들이 퍽퍽 쓰러졌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많 기만 했다. 정 선생이 채 땅에 내려앉기도 전에 십여 개의 손이 그의 몸 이곳저곳을 붙잡았다. 정 선생은 몸을 회전시키면서 솟 구쳤으나 옷이 여기저기 찢어져 처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정선생이 당해 내지 못하고 몸을 뺄 듯이 보이자 현암은 다급 해졌다. 당장이라도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해서 손을 빼고 싶었 지만 냉정하게 머리를 굴려 보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지 금도 너무 많이 맞아 성치 못한 판에 왼손마저 결딴나 버리면 이 많은 사람들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사람들은 현암보다 정 선생에게만 주로 신경을 쏟고 있어서 현암은 마구 팔을 휘두르며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정 선생님! 제 손의 줄을!”
현암이 외치자 정 선생은 머뭇거리다가 몸을 날려 현암 옆으로 날아들었다. 달려드는 몇몇 사람들을 발로 차 버린 다음 정 선생이 외쳤다.
“자넨 뭘 하고 있는겐가?”
“줄에 묶여서 힘을 못 씁니다!”
현암이 팔을 내밀자 정 선생은 오른손을 갈고리처럼 펴서 줄 을 잡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줄은 정 선생에게 찌릿한 충격만 준듯했고 끊어지지는 않았다. 당황한 정 선생이 놀라 외쳤다.
“이게 왜 이러지?”
현암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공력이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좌우간 어서!”
그때 수백 명의 사람들이 확 하고 밀려드는 바람에 정 선생은 물론, 현암마저도 그 힘에 휩쓸려 한쪽으로 밀려갔다. 현암은 하 는 수 없이 ‘투자 결을 응용하여 밀려드는 사람들을 되밀었다. 밀려드는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듯 부르르 몸을 떨었지만, 뒤에 서 계속 밀어붙이는 힘 때문에 현암과 정 선생은 여전히 그들에 게 밀렸다. 그들은 건물의 한쪽 담 주변까지 현암과 정 선생을 밀고 갔다.
정 선생이 인파에 밀려 넘어지면서 현암의 손목을 꽉 쥐고 공 력을 가했다. 그 순간 정 선생의 공력에 부딪혀서 줄에 남아 있 던 공력이 대부분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하지만 현암과 정 선생 은 인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고, 곧이어 수십 명의 사람 들이 두 사람의 몸 위를 와르르 덮쳤다.
“그래! 없애 버려라! 두 놈 다!”
강 집사가 신이 나서 외쳐 대는데 별안간 사람들의 몸이 물결 처럼 위로 솟구치면서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강 집사가 놀라서 어어 하며 입을 벌리는 순간, 사람들이 와르르 사방에서 흩어져 넘어지더니 우뚝 몸을 세운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드디어 줄을 끊고 손이 자유롭게 된 현암이었다.
정 선생이 넘어지는 순간에 마지막 힘을 가해 현암을 묶은 줄 을 끊어 준 것이다. 현암은 지체 없이 오른팔에 ‘추’ 자결을 돌려서 자신을 덮친 수십 명의 사람들을 밀어냈다. 그러나 정선 생은 사람들에게 워낙 강하게 짓눌린 상태여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몸을 구부린 채 땅에서 뒹굴며 신음하고 있었다.
“뭐………… 뭐, 저런 놈이 다있어!”
강 집사가 놀라서 외치는 사이 현암은 강 집사를 쏘아보면서 월향검을 날렸다. 그러고는 이내 기합성과 함께 ‘추’ 자결을 써 서 수십 명의 사람들을 저만치로 밀어냈다. 그 틈을 타 재빨리 쓰러져 있던 여자를 낚아채어 정 선생의 옆에 던지듯 눕히고는 앞을 막아섰다.
한편, 월향검은 귀곡성을 울리면서 강 집사를 꿰뚫을 듯 날아 갔다. 그러나 곧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강 집사를 둘러싸자 월향은 그만 크게 울며 긴 은빛 호선을 그린 뒤에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 다. 원래 현암은 월향검을 날려 강 집사를 위협하려고 했지만 사 람들에 치여 어쩔 수가 없었다. 현암은 입술을 깨물면서 월향을 받아 품에 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월향검을 써서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어, 이놈! 요상한 재주를 부리지만 여기 있는 천 명을 당해 낼 수는 없을 거다!”
현암이 눈을 번쩍 빛냈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것 같았 다. 강 집사 저놈이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 틀림없었다. 백 목사 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강 집사가 백 목사에게 힘을 중계하여 치유 능력으로 신도들을 끌어모은 다 음, 백 목사 뒤에서 오만 짓을 저지른 것 같았다. 현금을 강요하 여 끌어모으고 이 여자를 잡아 오도록 폭력배들을 부린 것도 강 집사임이 틀림없었다. 다만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었다. 정작 이 신도들을 조종하는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 힘의 원천이 여자가 말했던 황금의 발일까? 그러나 당장은 그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가 없는 판국이었으니…………….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어. 강 집사를 굴복시켜야 뭔가 알아낼수 있을 텐데…………….
현암은 자신을 에워싼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중엔 건장한 남자들도 있었지만 힘없는 아녀자나 노인, 아이까지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추자 결로 밀어내기만 할 뿐이었지만, 사태가 급박해지면 이런 식으로 마냥 버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저 사람들과 본격적으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현 암은 마음이 쓰라렸다. 그때 막 숨을 몰아쉬던 정 선생이 힘겹게 소리쳤다. 정 선생은 운기(氣)를 근본으로 삼는 내가권 고수였 기에 사람들에 눌려 호흡이 곤란해지자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 았다.
“어서 가게! 가서 경찰에라도……………..”
“경찰이 오면 뭐합니까!”
현암이 사람들을 떠밀면서 외쳤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을 청할 수 있단 말인가? 경찰이 이런 말을 과연 믿어 주기 나 할 것인가? 그리고 자신이 지금 이 자리를 떠나 버리면 정선 생과 저 여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 확률이 높았다.
‘할 수 없다. 놈은 나중에 잡더라도 일단 몸을 피하자.’
또다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현암은 ‘추’자 결로 사 람들을 와르르 밀어냈다. 태극기공의 다른 수법은 사람들을 다 치게 할까 봐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세 번을 밀어낸 다음 현 암은 공력을 모으며 크게 소리쳤다. 일종의 협박인 셈이었다.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이 꼴이 된다!”
현암은 ‘폭)’자 결의 공력으로 담을 쾅 밀어 쳤다. 공력을 이기지 못해 삽시간에 담벼락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커다란 구멍 이 뚫렸다. 그러나 강 집사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속에서 웃으 며 외쳤다.
“재주는 정말 좋구나. 하지만 맘대로 해 봐라. 여기 천명을 다 죽이기 전에는 어림도 없을 거다. 이자들은 무서움도 모르고 아 무것도 모르니 협박해도 소용없다!”
강 집사가 지껄이는 사이 현암은 재빨리 정 선생과 여자의 몸 을 끌고 구멍 저편으로 도망쳤다. 두 사람을 끌고 가려니 힘이 들어 현암은 그만 정 선생의 몸을 놓치고 말았다. 잠시 주춤하는 순간, 갑자기 담벼락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수백 명이 몸으로 동시에 밀어붙이니 담이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무너진 것이었다. 돌벼락이 와르르 쏟아지자, 현암은 쓰러 진 여자와 정 선생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덮었다.
“으으윽…….
그저 모든 것을 잊고 누워 있고 싶었으나 억지로 참으며 현암 은 먼지투성이가 된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무너지던 담벼락에 맞은 허리가 끊어질 것같이 아파 왔지만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달려드는 사람들을 밀어젖히긴 했어도 두 사람을 끌고 도망갈 기운은 도저히 없었다. 그때 현암의 귓전에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잃고 있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왜 ・・・・・・ 나를 구한 거죠?”
현암은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사력을 다해 밀려드는 사람들을 다시 밀어냈다. 그러고 나서 간신히 입을 떼었다.
“말 시키지 마시오.”
그러나 여자는 속삭이듯 말했다.
“왜… 왜 본 적도 없는 나를 구했냐구요.”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는 상당한 원망이 섞인 듯한 억양이었 다. 짜증이 나려 했으나 현암은 팔을 휘둘러서 한 떼의 사람들을 밀쳐내면서 대꾸했다.
“미안하군요. 하지만 놓고 가 버릴 수 없어서…………….”
그때 저쪽에서 강 집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미리 자매! 그자는 사탄의 종이오! 잡아야하오!”
아마도 이 여자의 이름인 듯했으나 현암은 강 집사의 목소리 가 들려오자 화부터 치밀어 올랐다. 현암은 어떻게 월향검을 잘 조정하여 녀석을 혼내 줄까 궁리했다.
“저 녀석이 ………!”
그러나 다음 순간, 현암은 옆구리가 뜨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자신이 구해 주었던 그 여자가 현암의 옆구 리를 뾰족한 뭔가로 찌른 것 같았다.
“무슨 짓이야!”
쓰러져 있던 정 선생이 놀라 넘어진 채로 여자에게 한방 날렸 다. 비록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지만, 여자를 넘어뜨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여자는 사람들 쪽으로 떠밀려서 비틀거리면서 넘어졌다. 현암은 멍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윽고 옆구리를 움 켜쥐고 비틀거렸다. 사람들 속으로 파묻혀 가는 미리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날 왜 구했나요? 왜 제정신 아닌 채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나요? 그랬어야 하는데…………….”
그 말에 정 선생이 거칠게 내뱉었다.
“저런 미친년!”
현암의 눈빛이 빛났다. 미리라는 저 여자는 지금은 미친 상태 가 아니었다. 아까 공력을 가했던 덕에 제정신을 차린 것이 분명 했다. 그러나 여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미리는 정 신을 차린 것을 원망하는 것일까? 왜 자신을 원망하는 것일까? 현암은 너무 뜻밖이라 화조차 나지 않았고 상처가 아픈 것도 몰 랐다. 다만 사람을 구해 줘 봐야 역시 보답을 받지 못하는구나 싶어 쓴웃음이 났다.
현암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현 암이 몸을 날리자 정 선생이 대뜸 외치면서 양손을 저었다.
“그래! 저 미친년을 혼내주게!”
정 선생은 분노의 기운까지 더해서 있는 힘을 다해 현암의 앞 쪽으로 양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공력이 응집되면서 커다랗게 물결 같은 파장이 뻗어 나갔다. 흔히 장풍(掌風)이라 일컬어지 는 현상이었다. 그러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손도 닿지 않은 상태 에서 와르르 밀려 넘어졌다. 그 틈을 타 현암은 사람들 사이로 뛰 어들었다. 옆구리에서 피가 새어 나와 허공에 점점이 뿌려졌다. 현암은 크게 팔을 휘둘러 사람들을 헤집고 쓰러진 미리의 팔 을 잡았다. 미리는 사람들에게 짓밟혀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 고 반쯤 기절한 것 같았다. 현암은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두둑하고 탈골되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행히 미리의 몸은 사람들 사이에서 쑥 뽑혀 나왔고, 그 순간 수십 개의 발들 이 그녀가 있던 자리를 짚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미리는 짓밟 혀 죽었을 터였다.
현암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수십 개의 손들을 미친 듯이 팔을 휘둘러 떼어 버리고는 미리의 축 늘어진 몸을 질질 끌고 물러섰 다. 정 선생도 다시 한번 ‘에잇!’ 소리를 지르면서 앞을 막아서며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기운이 빠진 듯, 이번 장풍은 조금 전의 절반도 채 안 되는 위력이어서 사람들을 넘어뜨리진 못하고 다만사람들의 물결을 휘저어 진군을 잠시 멈추게 했을 뿐이었다. 현암은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비틀거리다 발밑에 무슨 맨홀과 같은 쇠뚜껑이 달린 것을 발견 했다. 쇠뚜껑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열 수 없었다. 현암은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월향검을 발출했고 월향검은 간단 하게 자물쇠를 박살 내고는 왼팔로 돌아왔다. 그때 우르르 사람 들이 밀려들자 정 선생은 장풍도 내지 못하고 죽을힘을 다해 사 람들을 어깨 부딪쳐 밀어냈다.
*무협지에서 자주 언급되는 손바닥에서 일어나는 바람. 실제로는 공기가 움직이 는 바람이 아니며, 일종의 에너지 분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력을 끌어 모아 손바닥으로 내뿜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수련자가 상당한 수준의 장풍을 낼 수 있다는 초자연학회 등의 보고도 있다.
현암은 뚜껑을 열고 일단 미리를 던져 넣은 다음 정 선생을 끌 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세 사람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현암은 고통 때문에 맥없이 쓰러져 금방 몸을 일 으킬 수 없었지만, 정 선생은 금세 몸을 일으켜서 주위를 살폈 다. 여기라면 구멍이 좁아 한 번에 두어 사람밖에 내려오지 못할 것이니, 그럭저럭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다행히도 밖의 사람들은 우우 하면서 근처를 맴돌 뿐, 안으로 내려오지 못 하는 듯했다.
이번에는 정 선생이 현암을 끌고 한쪽 구석으로 갔다. 지하 통 로는 하수구처럼 무척 좁아서, 무슨 상자 같은 것이 쌓여 있는 것을 본 정 선생은 상자들을 밀어서 길을 막아 버렸다. 어쨌거나 간신히 한숨 돌린 셈이 되자 정 선생은 헉헉거리면서 현암을 바라보았다. 현암이 그때까지도 미리를 놓지 않고 있는 것을 본 정 선생은 ‘허’ 하면서 탄식하듯 말했다.
“뭐하러 그 여자를 끌고 왔나? 단방에 쳐 죽이든지 내버리지 않고!”
“그냥 두면 이 여잔 죽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여잘세. 우리 처지도 급하지 않은가?”
현암이 피식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원래 사람들이 은혜 모르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수도 없이 당했죠. 뭐, 착한 사람인 척하려고 끌고 온 건 아닙니다. 하지만 눈을 뻔히 뜨고 여자가 죽는 걸 바라볼 수는 없잖아요.”
“지금 자네 꼬락서니를 알고 이야기하는 건가?”
현암은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면 정 선생님은 왜 끼어드셨나요?”
그 말에 정 선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자네는 왜 그리 힘을 아끼는가?”
“아끼다뇨? 죽을힘을 다했습니다.”
“자네 정도의 공력이면 밖의 저 떼거리 전부는 몰라도, 반은 때려눕힐 수 있었을 텐데. 왜 힘을 안 썼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 선생을 보며 현암이 가볍게 대꾸했다.
“차마칠 수 없어서요.”
“자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닐세. 그러나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서 자기 몸을 지키려는 것은 죄가 아닐세.”
“그건 그렇습니다만……………. 손이 안 나가는 걸 어쩝니까.”
현암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 선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자네가 여태까지 살아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일세. 근데 자네 참 재미있어졌구먼. 전에 봤을 때는 마냥 심각한 사람인 줄 알았 는데.”
“정말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웃고 사는 게 남는 거라고.”
“죽을 고비?”
“음. 좌우간 그렇습니다.”
“허허, 원참…….”
정 선생은 쥐 같은 얼굴에 담뿍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현암도 웃으며 말했다.
“아이구, 그나저나 뭐 약 같은 것 없나요? 정말 아프네요.”
“으흠, 옛날이라면 모를까, 요즘에야 누가 약을 들고 다니겠는 가 지혈이나 하세.”
정 선생은 옷을 부욱 찢어 현암의 옆구리를 처매 주었다. 정 선생은 속으로 어허 하고 혀를 찼다. 현암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 정으로 농담을 하고 있었지만, 동여맨 천이 대번에 붉게 물드는 것을 보니 상처가 꽤 깊은 것 같았다.
“자네, 정말 괜찮겠나?”
걱정스럽게 묻는 정 선생의 말에 현암이 웃으며 대답했다.
“기관총을 맞고도 살았는데요, 뭐 이쯤이야…………….”
“기관총?”
그러나 현암은 조용히 호흡을 조절하면서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정 선생이 상자로 바리케이드를 친 쪽을 불안한 듯 쳐다 보며 말했다.
“슬슬 나갈 길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나? 걸을 수 있겠나?”
“예.”
정 선생은 곧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쓰러져 헐떡거리는 미리 를 보더니 못마땅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난 저런 배은망덕한 여자는 손도 대기 싫네. 구하려면 자네가 끌고 가게.”
현암이 싫은 기색도 없이 되받았다.
“그러죠.”
정선생은 현암이 정말 미리를 끌고 가려 하자 쯧쯧 혀를 찼다.
“아니, 정말로 데리고 가려는 건가?”
“놓아둘 수는 없잖습니까?”
“아니, 자네 몸 하나도 추스르기 어려운 판에 현암은 후들거리면서도 정 선생을 향해 웃어 보였다.
“뭐, 가는 데까진 가봐야지요.”
그러자 정 선생은 말없이 미리의 몸을 끌어 자신이 둘러메고 성큼성큼 앞장섰다. 현암이 뒤를 따르며 짓궂게 물었다.
“배은망덕한 여자라 손도 대기 싫으시다더니…………….”
현암의 말에 정 선생은 하하하고 웃었다.
“난 자네를 업은 걸세. 배은망덕한 여자는 자네가 끌고 가는 거구.”
“고맙습니다.”
현암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웃었지만, 좁디좁은 통로 를 지나가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정 선생은 기력이 많이 회복된 듯했지만 사람 하나를 들쳐 메고 가기엔 힘이 부친 듯했고, 현암은 부상 때문에 힘이 들었다. 게다가 이 지하 통로 는 생각보다 무척이나 길었다. 한참 가다가 정 선생이 현암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여기 왜 온 건가?”
“책 찾으러요.”
“책? 정말인가?”
“예. 그런데 정 선생님은 왜 오셨습니까?”
“무슨 책인데 그러나?”
“이야기가 깁니다. 나중에 설명해 드리죠. 근데 정 선생님은요?”
정선생은 습관인 듯, 쥐 같은 입을 삐쭉거리더니 대답했다.
“나는 전부터 여기에서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네. 그러나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흠을 잡을 수가 없더란 말일세. 그래서 이들 주위를 돌아다니며 알아보고 있었지.”
“그러면 정 선생님, 황금의 발에 대해 뭐 아시는 게 있습니 까?”
“음? 그게 뭔가? 그러고 보니 강 집사라는 작자도 그 이야기 를 하던데.”
그때 갑자기 정 선생의 등 뒤에서 흑흑하고 흐느껴 우는 소리 가 들려왔다. 정 선생과 현암은 누군가 추격하지 않나 바짝 긴장 하고 있던 참이라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쫓아오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그 소리는 정 선생의 등에 업힌 미리의 소리 였다. 그 소리를 듣자 정 선생이 흥하면서 물었다.
“왜 우나?”
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 선생은 미리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대뜸 빽 소리를 질렀다.
“듣기 싫으니 입 닥쳐!”
그래도 미리는 더욱 서럽게 울먹이면서 말했다.
“날・・・・・・ 날 놔요. 당신들은 인간이 아냐…………. 당신들은 귀신들린 사람들이야…….
“아니, 세상에 뭐 이런 것이 있나!”
정 선생은 버럭 소리치면서 미리를 휙 내던져 버렸다. 현암이 재빨리 미리를 받았다.
“놔요!”
미리는 현암의 손을 탁 뿌리치더니 땅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현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미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는 거요?”
“나한테 말도 걸지 말아요. 오빠도 좋은 사람이 아냐.”
정선생이 발을 구르면서 소리쳤다.
“허허! 그러면 저강 집사가 좋은 놈이란거냐? 아까 그 떼거리 야말로 귀신들린 놈들이 아니더냐!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정선생이 막 손찌검을 하려는 찰나, 현암이 정 선생을 저지하 면서 말했다.
“정신이 아직 다 안 돌아왔나 봅니다.”
“아냐! 난 제정신이라구! 왜 날 제정신 들게 만들었어………. 왜………… 왜 날 구해 준 거야…………. 주님・・・・・・ 주님・・・・・・ . 사탄의 손에서 저를 구하소서……………”
미리는 쓰러진 그대로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계속 울었다. 그 모양을 보고 정 선생이 기가 막힌 듯 혀를 찼다.
“주우니임? 이제 보니 광신도로군그래. 원……. 어떻게 미쳐도 저렇게 미칠 수가 있나!”
“그냥 놔두시지요.”
하지만 정 선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정 선생은 심지가 굳고 자신의 본색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한번 성질이 나면 수그러들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전에도 와불을 일 으켜 세워 일본을 가라앉히자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너, 무슨 근거로 우릴 귀신 들린 자들이니, 사탄이니 하는 거 냐, 엉? 현암 군이 널 목숨 걸고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구해 주었 는데 넌 어떻게 했지? 그래도 현암 군은 널 걱정해서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정선생은 말을 하다가 더욱더 노기가 치미는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너 같은 배은망덕한 것이 살아서 무엇하겠느냐? 내 오늘 도 행을 깨치는 한이 있어도 너 같은 것을 가만둘 수가 없다!” 정 선생이 말도 채 다 마치기 전에 손을 꽉 아래로 내리치는데 재빨리 현암이 그 손을 받았다. 두 개의 손이 부딪히며 펑 하는 폭음을 냈고 정 선생의 손이 휙 뒤로 밀려났다.
“정 선생님. 그러지 마십시오.”
“어허! 자네 너무 심하군그래! 악한 자는 벌하지 않으면 안 되 는 법이야. 그건 잘못이 아니네!”
그러나 현암은 미리를 애써 일으켜 세우며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귀신 들린 자라고 생각되면 그렇게 해요. 어쨌든 난 당신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그 말을 듣고 정 선생이 화가 치밀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자네가 왜 귀신 들린 자인가! 거사님(한빈 거사를 말함)의 도 맥(脈)을 이어받은 자가 무슨 망발인가! 아니, 그러면 나까지 도 도매금으로 귀신 들린 자가 되어 버리는 것 아닌가! 이게 대 체 무슨 꼴이야!”
정 선생은 우도방의 대가답게 한빈 거사와 현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정 선생이 눈을 가늘게 뜨고 현암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이 여자에게 마음이 있나?”
상황이 급했지만 현암은 픽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느닷없이 아까 쌓아 두었던 상자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정 선생은 에잇 하고 호통을 치더니 서둘러 말했다.
“어서 가세!”
“예.”
그러나 현암이 잡아끄는데도 미리는 옆에 튀어나온 쇠기둥을 붙잡고 꼼짝도 하지 않으려 했다. 정 선생이 발을 구르며 외쳤다.
“어허! 스스로 죽기를 자청하는데 대체 왜 그러는가! 어서 우리부터 가세!”
“아닙니다. 데려가야지요.”
“이 계집이 무슨 비밀이라도 알고 있는 겐가?”
.”글쎄요………….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럼 왜 이리 고집을 부려! 에잇! 자네 혼자 성인군자가 될 셈인가? 언제까지 그런 행세를 하려는 건가? 이거 사람을 잘못 보았군! 역겹네! 역겨워!”
정 선생은 말을 하다가 답답한 듯 먼저 발을 옮겼다. 현암은 따라가지 않고 벽에 달라붙은 미리를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현 암의 손이 다가오면 미리는 무슨 거머리나 벌레를 본 것처럼 치 를 떨며 죽어라고 발버둥을 쳐서 현암이 도무지 손을 댈 수가 없 었다. 기절시킬까 생각도 했지만 공력도 떨어져 가늠도 쉽지 않 아진 판에 섣불리 세게 치면 상처를 입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살살 치면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미리의 반감을 살 것 같기도 했다.
“손대지 맛! 이 사탄! 귀신 들린 자! 난 여기서 죽을 거야! 죽을 거야!”
그러는 차에 저만치서 다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뒤에 푸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은 듯 앞서 가던 정 선생이 돌아와서 호통을 쳤다.
“어서 가세! 이거 놈들이 불을 지른 모앙이네!”
“이 여자도 같이 가야 합니다.”
“이 멍청아! 그럼 같이 타 죽을 셈이냐! 자네는 장차 도맥을 이어받아 큰일을 할 사람이 아닌가? 이런 여자 때문에 개죽음 당하려는가!”
불길이 점점 타올라 저만치가 환해지며 석유 냄새가 코를 찔 렀다. 연기도 순식간에 짙어지고 있었다. 불에 타 죽기 전에 이 좁은 곳에서 머뭇거리다가는 질식해서 죽을 판이었다.
현암은 정 선생 정도 되는 사람이 너무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것에 조금 부아가 치밀어 정 선생을 마주 보며 말했다.
“무엇이 큰일입니까? 지금 이것이야말로 큰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답답한 녀석을 보았나!”
정선생이 발을 쾅쾅 구르다가 갑자기 호통을 쳤다.
“뒤에 누구냐!”
현암이 놀라 뒤를 돌아보는 순간, 정 선생은 느닷없이 현암의 아랫배를 내가권의 수법으로 퍽 쳤다. 현암은 창졸간에 좁은 통 로에서 기습을 당한 셈이라 미처 막지 못하고 풀썩 무릎을 꿇었 다. 정선생은 휴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미안하이. 이 방법뿐이네.”
정선생은 현암을 질질 끌고 앞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현암은 뜻밖에도 정신을 잃지 않고 힘을 주며 버티었다. 정 선생이 놀라 현암을 돌아보자 현암은 고통스럽게 웃었다.
“가르침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뭐라고?”
현암은 절뚝거리면서 미리에게 다가갔다. 미리는 불길과 연기 속에 여전히 미친 듯이 발악하고 있었다. 현암은 미리에게 가더 니 미친 사람처럼 크게 웃고는 외쳤다.
“그래, 난 귀신 들린 놈이야.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내 몸속의 귀신이 배가 고프대거든.”
그러자 미리는 놀라서 멍하니 발악하던 것을 멈추고 현암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현암은 미리의 뒷목을 잘 겨 누어 쳐서 미리를 기절시킨 다음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정 선생은 한숨을 깊이 쉬더니 재빨리 미리의 몸을 빼앗아 들고 통로를 헤 치며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현암이 정 선생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정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 같은 고집불통은 내 생전 처음 보네! 나보다 열 배는 더 심하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