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2권 1화 – 재회 1 : 기다리는 아이
그로부터 한 달 후…..
기다리는 아이
조영고등학교는 특이할 것 하나 없는,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고등학교였다. 특별히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몰 려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적이 불량한 학생들만 모여 있 는 것도 아니었다. 교육 방법이나 수업 방법에 유별난 점도 없었 고 교사 중에 괴짜나 독특한 사람이 많지도 않았다. 남녀 공학이 아니라 남자 고등학교라는 것이 유별나다면 유별난 점일까? 사람들이 말세가 온다, 말세가 온다 떠들어 대던 1999년도 별 다른 일 없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이십일세기에 접어든 지도 꽤 지났다.
그런 시기라서 더더욱 조영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불평을 뇌까 리곤 했다. 새로운 세기인 이십일 세기가 열린 지 몇 년이 지났 는데, 아직도 구태의연하게 남녀칠세부동석을 부르짖으며 시커먼 사내 녀석들만 우글거리는 남학교를 고수하는 것에 대한 불평 말이다.
조영 고등학교의 건물은 멋대가리 없이 길게만 올라간 오층 짜리 회색 건물이었다. 기다랗게 본관이 이어진 한 채의 큰 건물 에 학교의 거의 모든 부분이 속해 있었으며 체육관과 강당, 창고 등의 부속 건물들 몇 군데만이 운동장 여기저기에 띄엄띄엄 박 혀 있었다.
이런 멋대가리 없는 건물에도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탁 트인 시야였다. 조영 고등학교 근방에는 그다지 높은 건물이 없는데 다가 학교 자체가 다소 높은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사층이나 오층 정도만 올라가면 복도 창문을 통해 교문 너머의 동네 풍경이나 차들이 지나다니는 모습, 조금 눈이 좋은 사람에 게는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모습까지도 모두 들어왔다.
특히 오층의 동쪽 끝 복도 창문에서는 교문 앞이 아주 잘 보였 다. 칙칙한 남자 고등학교의 교문 앞에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 겠는가마는 대부분의 경우 학생들은 아침에 지각하여 뛰어오는 다른 학생들의 모습을 킥킥거리며 지켜보곤 했다. 또한 그곳은 청소당번이나 다른 일이 있어 하교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자못 처연한 표정으로 즐겁게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장 소이기도 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마지막 수업만 남은 시간, 방학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이라서 그런지 고등학생들의 떠들어 대는 소리가 더욱더 요란하게 재잘거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이제 한 시간만 더 지나면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은 대부분 집 으로, 또는 학원이나 놀러 가기 위해 교문을 나서게 된다. 고 등학교의 야간 자율 학습은 거의 없어졌지만 아직도 그 명맥 은 유지되고 있어 학교에 남는 아이들이 물론 소수는 있을 테지……
원석은 마지막 쉬는 시간을 틈타 복도에 나와 기지개를 커다 랗게켰다. 곧이어 뒤에서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인이 따라서 기지 개를 켰다.
“아음~~!!! 아, 짜증난다.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단 말인 가.”
원석이 근래 들어 텔레비전에 자주 보이는 어느 개그맨의 말투를 흉내 내며 기지개를 켜자인이 킥킥 웃었다.
“너, 똑같다. 빼다 박았는데?”
“자식이?”
히히. 아이구, 그나저나 남은 한 시간을 또 어떻게 버티나 졸라 지겨워서.”
“야, 마지막 시간이 뭐냐? 영어냐?”
“넌 시간표도 모르냐? 국어다. 국어.”
“국어? 으……. 그러면 눈탱이냐?”
눈탱이는 국어 교사의 별명이었다. 원석의 평상시 지론에 따 르면 무릇 샘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학생들의 존경과 인기를 모 으는 샘이 첫 번째이고, 학생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는 샘이 두 번째이며, 학생들의 비웃음과 웃음거리가 되는 샘 이 세 번째였다. ‘눈탱이’ 선생은 불행히도 세 번째 유형의 전형 적인 예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 ・・・・・・ 토낄까?”
“너나 해라. 난 노(No).”
“자식이 겁만 많아서.”
“어쨌든 난 노다. 또 네 이빨 믿다가 한 달 동안 청소하랴?” 둘은 원래 그 반의 문제아(?) 격인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불량 서클의 장이라 할 정도로 사회의 악의를 가진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공부하기를 극도로 싫어하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그 둘을 부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야! 조원석!”
“어?”
원석이 돌아보니 그들을 부른 것은 다름 아닌 부반장 준호였 다. 원석은 자신을 부른 것이 준호인 것을 알고는 흥하고 코웃 음을 쳤다.
“됐네.”
원석이 비웃자 준호는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자 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왕따가 말을 다 시키네. 이거 재수 털리겠군.”
준호는 소위 그 학급의 ‘왕따’라고 할 수 있었다. 공부는 잘하 는 축에 속하여 부반장을 맡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준호를 상당 히 싫어했다. 예전에 원석은 ‘장준호가 재수 털리는 열 가지 이 유’라는 것을 칠판에 붙였던 적이 있었다.
1. 계집애처럼 조그마하고 매가리 없이 생긴 것이, 속은 계집 애보다 더 좁다.
2. 뭔가를 보면 반드시 샘한테 일러바친다.
3. 싸움도 못하면서 만날 우물거리다가 구석에 가서 질질 짠다.
4. 되지도 않게 한문 나부랭이만 중얼거리고 남의 말을 졸라 잘 씹는다.
5. 주거 불명이면서 이상한 짓거리만 한다.
6. 길에 나갈 때는 어울리지도 않는 한복 나부랭이만 입고 다
닌다.
7. 낯짝이 계집애 같아서 밥맛이 없다.
8. 어디서 전학 왔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붙임성마저 없다.
9. 말을 하게 되면 사흘 동안 재수가 없다.
10. 그런 주제에 속으로는 졸라 잘난 척한다. 왕밥맛이다.
그러나 실제로 아이들이 준호를 피하게 된 것은 꼭 그런 종류 의 이유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특히 원석과 인의 경우에 있어서 는 말이다. 부반장 장준호가 정말 키가 조그마하고 얼굴이 뽀얗 고 여자애라 착각할 정도로 곱살하게 생긴 것도, 길을 다닐 때는 항상 한복만 입고 다닌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문 나부랭이를 늘 읊어서 말할 때마다 옛 말씀이 어쩌고 운 운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 일색인 것도 틀림없었으며, 어디서 전학을 왔는지 아는 아이도 없었고 본인도 그것을 밝히지 않으 며, 나아가서는 사는 곳마저도 아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아이 들을 피한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화가 날 때에도 사람들 앞에서는 결코 언성을 높이지 않으며, 구석진 곳에서 혼자 눈물을 흘리다가 아이들의 눈에 띈 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때문에 장준호가 왕따가 된 것은 아니었다. 장준호가 왕따가 된 것은 두 달 전 주 석의 자살 사건이 있던 이후부터였다. 그때 장준호는………….
“야, 그러지 말고 들어가라. 너희들 부반장이 일이 있다잖아.”
얼굴을 내밀며 원석에게 말을 건 것은 현규였다. 현규가 말을 걸자 인이 먼저 미소를 지었고 원석이도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 서 대꾸했다.
“아, 그래? 알았어.”
원석과 인은 이번에는 아무 불만 없이 선뜻 교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준호의 말이라면 누구도 듣지 않을 것이었지만 현규의 말이라면 누구라도 들을 테니까.
박현규를 싫어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같은 전학생이었지 만 장준호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전학 온 것은 박현규가 장준호보다 훨씬 뒤였다. 그러나 박현 규는 키가 반에서 두 번째로 큰데다가 행동거지가 시원시원하 고 대범했다. 아울러 수학은 조금 달렸지만 공부도 잘하는 편이 었고 운동도 잘했으며 얼굴빛은 좀 검었지만 몹시 미남이었다. 더구나 박현규에게는 암암리에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카 리스마가 있었는데, 특히 그것은 현규의 눈매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현규를 보는 사람은 그 눈매의 날카로움에 잠시 몸을 움찔 하곤 했다. 그렇다고 그 눈빛이 위압감을 주거나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뭐라고 할까? 눈빛이 워낙 차가울 정도 로 맑기 때문에 속이 뜨끔해진다고나 할까?
그러나 전혀 구김이 없는 쾌활한 아이였기 때문에 아이들은 금방 현규를 좋은 감정으로 여기기 마련이었다. 그러한 아이들 의 존경심에 가까운 감정은 현규가 형과 함께 불구가 된 할아버 지를 모시고 부모도 없이 산다는 이야기가, 교사 한 사람의 말실 수로 퍼진 다음부터 더더욱 커졌다.
현규는 주먹에서도 거의 무적에 가까웠으며, 행동거지가 조금 파격적이었지만 비뚤게 나가는 법이 없었다. 박현규는 그래서 조영 고등학교의 캡짱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었다. 굳이 현 규가 캡짱임을 자칭하는 일은 없었지만, 몇몇 자신이 캡짱이라 자처하는 아이들이 현규의 말이라면 두어 발은 접고 들어갔으니 말이다.
한 가지 좀 의문스럽기도 하고 현규에게 불만스러운 점이 있 다면 현규가 장준호를 어느 정도 감싸고도는 듯한 느낌을 준다 는 사실이었다. 하긴 현규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친절했으니 장준호에게 친절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현규는 아이들이 장준호를 왕따로 만든다고 무어라 직접적으 로 말하는 경우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준호와 아이들의 문제이지 자신이 개입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보는 듯했다. 그런데 원석과 인이 막 교실로 들어가려 할 때, 원석이 이상하다는 듯이 외쳤다.
“야, 저거 봐라!”
“뭔데?”
인이 의아해서 원석이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교문 쪽이었 는데 그 앞에 웬 여학생 하나가 서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퍽 오랜 시간 그곳에 있었던 듯 싶었다.
“야, 쟤는 뭐하러 저기 서 있냐? 누굴 기다리나?”
“히히, 어떤 놈인지 몰라도 좋겠다.”
그러나 그때 ‘눈탱이’ 국어 교사가 나타나는 바람에 원석과 인은 교실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교문 앞에 여자아이가 와서 기다린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 었지만, 그렇다고 희귀하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인은 그 일을 잊어버렸다. 더구나 수업 시간에 눈탱이에게 몇 대 쥐어박히는 통에 그 일을 기억하려고 해도 할 수 없기도 했다.
그러나 원석은 이상하게도 멀리서 본 그 아이의 모습이 잊히 지를 않았다. 그래서 수업 시간이 끝나자마자 다시 창 앞으로 나 가서 교문 쪽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는 여전히 교문 앞에 서 있었다.
‘이십일세기에 웬 춘향이? 허허..’
누군지는 몰라도 복도 많은 놈이라고 원석은 생각했다. 곧 종 례 시간이 되어 원석은 내려다보던 것을 멈추고 교실로 돌아갔 다. 재수 없이 원석은 그날 청소 당번에 걸리고 말았다. 그것도 보통 청소가 아니라 대청소. 마치고 검사까지 받고 가야 하니 적 어도 한 시간은 걸릴 청소였다.
원석은 청소를 하다가 그 아이가 있나 궁금해져서 또 밖을 내 다보았다. 원석이 처음 보았던 때부터 계산해도 벌써 한 시간 반 이 넘게 지났는데도 그 아이는 여전히 교문 앞에 서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아이는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교문을 통 과하여 나가는 아이들을 한 명씩 살펴보는 것 같았다.
‘’춘향이 이상이구나. 심청인가? 아니지, 심청이는 효녀 고・・・・・・ . 음, 그렇다면……..’
원석은 이상하게 계속 그 아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눈탱이에게 걸려 재수가 없어서 그랬는지. 함께 청소 당번에 걸 린 인이 멍하니 있는 원석을 보고는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야, 뭘 보냐?”
“아, 아냐.”
“제기랄. 준호가 말 시키더니 정말 재수가 없긴 없네. 에잉. 퉤.”
인은 침을 한 번 뱉고는 원석이 내려다보는 창문 밖을 힐끗 보았다.
“어? 저거 뭐야? 저 애 아직도 있네?”
“그러게.”
“음냐, 너 그래서 그렇게 눈알이 빠지라고 창밖만 보고 있었냐? 반했냐?”
“이 자식이.”
원석은 인을 한 대 때리는 시늉을 하고 창가에서 물러나왔다. 청소 검사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원석과 인은 처음 예상했 던 한 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학교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미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원석은 그 아이가 아직까지도 꼼짝 않고 교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학교에 남은 아이들도 그리 많지 않은데, 야자(야간 자율 학습)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는 걸까? 이게 도대체 웬 지극정성이란 말인가?
원석은 교문을 나서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여자아이를 힐끗 보았다. 때마침 그 아이도 원석과 인을 살펴보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도대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아주 특이한 용모 였다.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어찌 보면 중학생인 것 같았고 어찌 보면 고3이나 대학생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용모는 꽤 예 쁜 편이었으나 분위기가 묘했다. 아주 어려서 응석을 부릴 것 같 기도 했으며, 한편으로 보면 냉랭하기 그지없을 것 같기도 했다. 원석이 그 아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인이 히히 웃었다.
“너 왜 마음 있냐?”
“음냐. 자식이.”
원석은 괜히 부끄러워져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그때 인이 그 아이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안녕? 뭐 하니?”
그러나 그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인이 다시 말을 걸었다.
“이봐, 거기 누구 기다려?”
여자아이는 살짝 눈길을 돌렸다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듯 다시 교문 쪽만 주시했다.
이번에는 원석이 물었다. 아이가 조금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굴 기다려? 학교 안에는 야자 하는 아이들 몇밖에 없는데. 이름 알아?”
그 아이는 뭔가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대꾸했다.
“됐어. 집에들 가.”
원석은 어이가 없어 허 하는 소리를 냈고 인은 화가 난 듯 톡 쏘아붙였다.
“뭐야 그게?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도와줄 필요 없어.”
여자아이는 그냥 둘을 무시해 버렸다.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 멩이로밖에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인이 화가 치미는 듯 움찔거리자 원석은 그런 인을 달래서 끌 다시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이었다. 원석은 원래 지각 대장이었지만 그날만은 이 상하게 잠이 일찍 깨어 다른 때보다 훨씬 빠른 등교를 했다. 주 번 정도 되는 아이들이 아니면 학교에 오지 않을 시간이었다. 원 석이 교문 근처로 다가가자 놀랍게도 그 여자아이가 어제 그 모 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아이는 학생도 아니란 말인가? 아니면 땡땡이를 친 건가?
그보다는 혹시나 저 아이가 밤을 꼬박 새우고 저 자리에 서 있었 던 것은 아닐까 하는 믿지 못할 생각까지 들었다.
원석은 처음에는 그 아이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어제처 럼 돌멩이 취급이나 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 냥 지나가기에는 아무래도 찜찜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안녕?”
그러자 그 아이가 슬픈 듯이 원석에게로 눈을 돌렸다.
“너………… 얼마나 기다리려고 그러냐? 못 찾았어?”
그 아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원석이 다시 물었다.
“너 ・・・・・・ 혹시 여기 서서 밤샌 건 아니지?”
그 말에 그 여자아이가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내가 미쳤니? 아침에 일찍 온 것뿐이야.”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지만,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원석 은 별안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성격 으로 본다면 밥맛없는 아이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음…………. 근데 누・・・・・・ 누굴 찾는데그래? 혹시 이름 알아?”
여자아이가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떼었다.
“혹시 장…….”
“장?”
원석이 묻자 그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 학교에 혹시 장준후라고 있지 않니? 넌 알아?”
“장준후?”
원석은 장준후라는 아이가 이 학교에 있는지 떠올리려 했으나 그런 이름의 아이는 없었다. 원석이 모르는 아이도 있을지 모르 지만……………. 아니지, 장준후는 없어도 장준호는 있지 않은가? 그 래도 원석은 설마 했다. 설마 그 밥맛없는 왕따 장준호가 이 아 이가 찾는 장준후일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애는 없는데…………….”
여자아이가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있어. 망할 자식. 나쁜…… 나쁜 놈…………….”
여자아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원 석은 뭐라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장준후라는 녀석이 정 말 못된 녀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그 녀석은 힘없는 여자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혹시 무슨 영화나 추적 프 로그램 같은 데서 나오는 그런 일이…………?
“야, 울지 마라, 울지 마.”
원석은 진심으로 여자아이가 가련해져 달랬다. 그 아이는 계속 욕을 퍼부었다.
“정말 나쁜 자식이야. 정말……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흐흑………….. 흑흑…….”
이제 여자아이는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울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보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남자가 아니라고 원석은 생각했다.
“도대체 장준후가 어떤 놈이야, 응? 난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찾아 줄까?”
원석의 말에 여자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숨기고 있을지도 몰라.”
이름을 숨긴다고? 원석은 자신이 무슨 탐정 소설의 주인공이 라도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친김 에 다시 물었다.
“이름을 숨겨? 그럼 뭐…………… 특징 같은 것도 없니?”
“있어.”
“어떤 거?”
“음. 본 지 좀 오래되었지만…………… 얼굴이 하얗고 귀엽게 생기고 눈은 좀 가늘고 찢어진 편이야.”
“그런 거 말고. 그거 가지고 어떻게 찾냐?”
“음…………. 한복을 잘 입고 다니는데……….”
한복! 음. 그렇다면 장준호가 아닌가? 그러나 원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 왕따가 어찌 …………….
“그리고?”
원석이 묻자 여자아이는 눈물을 닦더니 언제 울었냐는 듯이 도도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갔다.
“한문 나부랭이 같은 걸 자주 중얼거릴 거야 아마.”
한문 나부랭이를 중얼거린다고! 원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러나 아직도 거부하고 싶었다. 그 왕따………… 왕재수에게 이런 여 자아이가 목숨을 걸다니!
“또?”
“이상한 짓이나 말을 자주 할 거야. 아마 부적을 들고 다닌다 거나………… 무슨 영이 어쩌고 신이 어쩌고…………….”
원석은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 아이는 장준호를 눈 앞에서 보는 듯이 묘사하고 있었다. 그런 기분임에도 불구하고 원석은 그 아이의 얼굴에서 일 초도 눈을 떼지 못했다.
문득 여자아이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뭔가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목에 걸고 있던, 희한하게 번쩍거리는 목걸이 같은 것을 꺼내서 손에 들고 쳐다보다가 말했다. 망설이는 듯한 표정은 이미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요 근래 학교에서 이상한 일이 있지 않았니? 누가 죽었다거나 하는.”
있었다. 바로 주석의 자살. 이 아이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
“무, 무슨 말이야, 그건?”
“장준후……. 분명 그 아이가 죽은 것과 연관되어 뭔가를 하려고 할지도 몰라.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원석은 소름이 쫙 끼쳤다. 물론 이건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이 아이가 무슨 마녀나 에스퍼(초능력자)라도 될 리는 없을 테니까. 어쩌면 소문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주석의 죽음과 준호의 그날 행적 때문에 왕따가 되었 고 재수 없는 아이로 전락한 것인데…………….
주석은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야자가 끝난 늦은 시간 이었다. 그 직전까지 주석은 왕따 장준호와 무슨 이야기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말다툼을 하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도 있었 다. 본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주석은 옥상에서 뛰어내려 피로 범벅이 된 시체로 발 견되었다. 그 사건만으로도 주호는 왕따에다 재수 없는 애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준호는 아무런 말도 아이들에게 하지 않았다. 도대체 주석이 자살하기 직전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 아이들이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떤 아이는 준호에게 주먹질까지 해 댔으나 준호는 몇 대 얻 어맞으면서도 조개껍질처럼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아이들은 준호가 주석을 죽인 것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수군거렸다.
하지만 준호가 주석을 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주석이 뛰어내리던 그 시간에 준호는 현규와 함께 교무실에 가 있었으 니까. 왜 갔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준호는 분명 그 시간에 많은 교사와 같이 있었으니 직접적인 범인은 아닌 셈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찜찜해했다. 주석은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하기는 했어도 자살할 만한 언행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근래에 들어서는 성적이 무척이나 올라 은근한 노력파로 인정받던 아이였다. 그와는 달리 준호의 기이한 행적은 그 이후 에도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알아.”
원석은 이상하게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뭘?”
여자아이가 묻자 원석이 소리치듯 말했다.
“네가 말하는 게 누군지 안다구.”
순간 여자아이의 얼굴이 그야말로 빛을 발할 듯이 환해졌다.
“알아? 정말?”
“그래, 장준호야, 틀림없어. 한복 입고, 한문 나부랭이를 중얼거리고 부적 같은 거 들고 다니고…”
“정말이야?”
“그래.”
여자아이는 별안간 눈물을 글썽하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 있어? 몇 반이야? 응?”
허허…………. 여자란 이런 것인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죽일 놈 살릴 놈 했으면서. 원석은 준호란 놈이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꼴보기 싫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말 잘 들어. 내가 할 말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런 놈은 잊어버리는 게 어때? 안 그래도 난 지금 그 자식을 뭉개 버리려 고 벼르던 참인데.”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즈음 원석은 뭔가 화끈한 것이 얼굴을 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 화끈할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불덩이 같았다. 여자아이가 다짜고짜로 따귀를 올려붙인 것이 다. 그것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한 일격이었고 독기가 서린 듯 이 매워서 매에 어지간히 단련된 원석도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여자아이가 앙칼진 목소리로,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계모 왕 비 같은 도도한 얼굴로 외쳤다.
“걔한테 손대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이…. 뭐 이런게 다 있어! 이걸…….”
원석은 가까스로 정신이 들자마자 눈이 확 뒤집혔다.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치켜들었지만 차마 내리칠 수가 없었다.
여자아이는 원석이 주먹을 치켜드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얼음장 같은 눈으로 원석의 얼굴을 화난 듯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제길! 원, 재수가옴 붙으려니까.”
여자아이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다시 말하겠어. 걔한테 손끝이라도 대면 넌 죽어. 정말이야. 그리고 그 애가 몇 반에 있는지 어서 대.”
원석은 기가 막혀서 말조차 이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 이런 여자애가 다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여자아이의 얼굴이 너무도 자신감에 넘치고 당차 보여서 이제는 슬슬 무서 웠다.
“너 ・・・・・・ 넌 도대체가…………….”
“난 아라라고 해. 최아라. 이름까지 알려 줬으니 너도 어서 말 해. 죽기 싫으면 말야.”
원석은 도대체 뭐 이런 아이가 다 있느냐는 듯한 의아한 눈으 로 아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은 곱살한데 말끝마다 ‘죽 기 싫으면’이라니, 정말 얘가 나를 협박하는 건가? 아니면 도대 체 뭐란 말인가.
원석이 멍하니 있을 즈음, 저만치서 일찍 등교하는 아이들 몇 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원석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아라 가원석에게 말했다.
“이리 좀 와.”
원석은 홀린 듯 아라를 따라 교문 옆의 조금 후미진 골목길 안 으로 들어섰다. 아라가 원석에게 말했다.
“너, 준후에게는 이야기하지 마. 그리고 저녁 때 준후를 데리고 와. 알았지?”
“너………… 남에게 말을 하려면 좀 더 …………….”
친절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원석이 말하려 했지만 아라는 듣지도 않고 원석의 말을 그 즉시 잘라 버렸다.
“음, 가만 사람들이 좀 없는 곳이 좋은데. 좋아, 학교 뒤쪽이 좋겠군. 학교 뒤쪽에 가면 체육 창고 같은 게 있지? 아이들도 잘 안 다니는 곳 말야.”
원석은 깜짝 놀랐다. 말을 무시당한 것보다도 여자아이가 어 떻게 남자 학교의 내부를 잘 알고 있을까 하는 것이 더 의아했 다. 이상한 것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래. 여덟시? 아니, 너무 일러. 아홉시면 되겠지? 그때까지 무슨 수를 쓰건 걔를 붙들어 놓고 있다가 그리로 데려오라구. 알 았어?”
“하지만…………….”
원석은 말을 하려다가 또다시 제지당했다.
“거기는 다른 아이들이 잘 안 가는 장소 아니야? 얼마 전에 누군가가 거기서 죽지 않았니? 자살이라도 한 거겠지. 아마?”
“………….”
원석은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 애가 혹시 귀신이나 여우 가 아닐까? 대체 그곳을 어떻게 안 것일까? 그곳은 바로 주석이 뛰어내려서 죽은 곳이었다. 주석의 핏자국이 아직도 물들어 있 는 곳. 그리고 왕따 준호에 관한 가장 좋지 않은 소문의 그 장소 이기도 했다.
“너 ・・・・・・ 너 어떻게 그런 걸 알았어? 너・・・・・・ 너 혹시………… 이 학교에 오빠나 동생이 다니니?”
아라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런 건 묻지 마. 실례잖아?”
누가 실례를 하는 거냐고 원석은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이 아이 앞에서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 마치 고양이 앞 에 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뭔가 느껴져, 희미하지만. 새벽 시간인데도 이 정도 느껴진다면 보통 일이 아닐 거야. 그냥 어제 그 자리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고만 해. 그러면 분명 준후 오빠는 너랑 같이 그리로 갈 거야. 틀림없어.”
원석은 눈을 번쩍 치켜떴다. 준후 ‘오빠’라고? 준후는 준호라 치고 이 여자아이는 그럼 준호보다도 어리다는 얘기인데, 그렇 다면 나보다 어린 것 아냐! 그런데 나한테 완전히 노예 부리듯이 이러쿵저러쿵 하다니! 원석은 돌연 자존심이 상했다. 목청을 돋 워 막 소리라도 지르려는 순간, 아라가 다시 서늘한 눈을 원석에 게 돌리자 원석은 이내 말문이 막혀 엉뚱한 이야기를 둘러댔다.
“그…… 준…… 준호는 아무래도 ………… 걘 좋지 않은 소문이 많은 아이야. 그런 애는…………….”
아라는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소문이 뭔데?”
“준호가…… 준호가 ………… 주석이가 죽던 날 마지막으로 주석이하고 이야기를 했다는 소문이 있어.”
“흠. 그 자살한 아이 이름이 주석인가 보군. 그래서?”
“그래서 ・・・ 애들은 주석이가 자살한 것과 준호가 무슨 관련이라도 있지 않나 해서…………….”
“뭐?”
순식간에 아라의 얼굴이 화난 고양이처럼 변했다.
“어느 자식이 그 따위 소리를 해?”
“하지만 그것만이 아냐. 준호는….. 준호는…… 주석이가 죽은 자리에 밤마다 가서 …………… 뭔가 이상한 짓을 한다는 소문 도………….”
차마 그 짓이 무엇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었다. 준호도 그런 소문을 극력 부정했으며, 정확히 누가 그런 것을 보았는지도 알 려지지 않았다. 아무튼 막연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밤마다 준 호가 주석이 죽은 그 자리에서 주석과 이야기를 한다는………… 아이들은 모두 헛소문이라고 웃으며 이십일세기에 어떻게 그 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했지만 내심으로는 모두 찜찜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라는 가볍게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흥! 상관없어!”
“너・・・・・・ 정말……”
“오히려 잘됐네. 그러면 오늘 밤에도 오겠군그래, 틀림없이. 흠. 그러면 넌 같이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아참, 몇 반인지 물어보는걸 까먹었는데.”
아라는 말하다가 느닷없이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모르면 어때. 오늘 밤에는 만나게 될 건데. 아무튼.”
아라는 원석을 보면서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준후 오빠가 아홉시에 그 자리에 없으면 넌…………!”
그러고는 갑자기 말을 끊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죽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가엾은 목숨을 죽이면 안 되 겠지. 다만 평생 잊지 못하게 혼을 내 줄 테니 그렇게 알아.”
차라리 죽인다고 하는 게 낫다고 원석은 생각했지만 미처 말 을 꺼내기도 전에 아라가 손가락으로 땅 아래를 가리켰다. 그러 고는 방긋 웃으면서 골목 밖으로 뛰어나갔다.
원석은 아라가 별안간 나가 버리자 놀라서 따라 나가려다 그 자리에 넘어졌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구…………… 이게 뭐야.”
이마를 땅에 세게 부딪혀 혹이 난 것 같았다. 그런데 몸이 넘 어졌는데도 발은 아직도 땅에 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왜 발이 안 움직이는지 의아하여 발밑을 보 다가 원석은 깜짝 놀랐다. 어느 틈에 그리된 것인지 모르지만 원 석의 발밑에서 잡초가 덩굴처럼 자라 원석의 발을 꽁꽁 묶어 둔 것이 아닌가.
“에엑! 이게 뭐야! 언제 이렇게…………!”
원석은 기겁하며 발을 묶은 잡초를 손가락으로 마구 뜯었다.
얼마나 겹겹이 묶였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 풀을 다 뜯어 낼 수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내가 정말 귀신에게 홀린 건가?
으아악!’
다음 순간, 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사방에서 갑자기 수 백 마리나 되는 하루살이가 날아든 것이다. 간혹 하루살이 떼가 와글와글하게 날아다니는 적은 있었지만, 별안간 하루살이들이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하루살이들은 허공에 이상한 형상을 그렸다. 마치 무슨 글자를 쓰는 것처럼 꼬불꼬불하게 날아다니는 것이 희한하 여 원석은 그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놀랍게도 그 하루살이들은 글자를 쓰고 있었다.
“…… …. ..”
원석은 거기까지 읽다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뒤로 넘어져 버렸다.
“으아…………. 으아아!!!”
원석은 팩 소리를 지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 는 순간 결코 낯설지 않은 주변의 풍경들이 보였다. 교실 안이었다. 곧이어 아이들이 “와아!”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뒤를 이어 눈탱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아예 잠꼬대에 가위까지 눌리냐? 잘 빠졌다. 잘 빠졌어. 일루 튀어나왓! 얼렁!”
원석은 멍한 기분에 눈탱이에게 몇 대 쥐어박히고 구석에서 벌을 섰다.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내가 언제 교실로 돌아 온 것일까? 자다가 꿈을 꾼 것일까? 그렇다면 그 아이의 일은 꿈 이었단 말인가?
‘꿈이었겠지. 그래, 악몽이야. 제길, 재수 없어. 에이, 씨팔. 정 말 X나게 재수 없네!’
원석은 속으로 한참 욕을 해댔다. 꿈이었다고 생각하니 오히 려 마음이 놓였다. 아니,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아라라고 했던가? 꿈속의 그 여자아이. 비록 싸가지도 없고 왕 밥맛에 완전 공주병인 것 같았지만, 꿈이었다고 하기엔 그 얼굴 이 너무나 선명하게 어른거렸다. 아라 생각을 하다가 원석은 문 득 준호의 얼굴과 마주쳤다. 원석은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제기랄, 저 왕재수. 그래, 꿈이다. 꿈이니 망정이지 너한테 아 라가 가당키나 하냐? 돼지 발톱에 진주지. 아무튼 꿈에서나마 너 한테 그런 애를 붙여 주었으니 나한테 고맙다고 하려무나. 고마 우면 내일부터 당장 학교 좀 그만두고 나오지 말란 말이다. 이 자식아. 재수가 털린단 말야. 알겠어?’
원석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벌을 서는 고통도 잊은 채 그 시간을 넘겼다. 사실 벌서는 일은 어느 정도 만성이 된 일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눈탱이는 나갔다. 그에 따라 원석의 형기도 만 료되어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인이 낄낄 웃으며 다가왔다.
“너 캡이던데? 우와, 정말 볼 만했어. 히히, 잠꼬대도 그만하면 수준급이다. 히히.”
“짜식이 주글려(죽을래?”
“너 그 여자애한테 홀렸냐?”
“무슨 여자애?”
“짜식이 내숭은 나 아까 아침에 다 봤어. 그 아이가 교문 옆 골목길에서 막 뛰어나가는 거 말야.”
원석은 깜짝 놀랐다.
“뭐?”
“그래서 가 보니깐 네가 기절해 있잖어. 병신. 그 애가 뭐라 디? 그리도 이쁘디? 내가 보니깐 그렇게 기절할 정도까진 아니 올시다더구먼.”
“어…… 그, 그러면 아침의 일이………….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야?”
원석은 어이가 없어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이 대뜸 원석의 머리를 탁 쳤다.
“정신 좀 차려, 정신 좀. 이거 완전히 얼이 나갔네그려.”
“야, 그럼 아침에 내가 정말……………”
“그래, 인마. 이거 이상해졌네. 병원 한번 가볼래? 뭔 꿈을 꾸 었는진 모르지만 아침 내내 멍하다가 인제 좀 제정신이 드나 했더니만.”
더 이상은 인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원석은 몸을 부르르 떨었 다.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러면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 지? 어떻게?
아라의 얼굴과 협박하던 그 목소리. 하루살이와 잡초에 당한 일이 기억에 떠올라 원석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헝클어 버리는 것 같았다.
원석은 눈을 돌렸다. 저만치에 역시 혼자 말없이 앉아 있는 준 호가 보였다. 준호. 준후, 어떻게 해야 할까?
원석은 한참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준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냥 뒤숭숭하고 두렵기만 했다. 원래 수업에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닌 원석이었지 만 오늘은 더욱더 그랬다.
그 풀과 하루살이는 정말 아라가 불러낸 것이었을까? 그렇다 면 그 아이는 무슨 초능력자란 말인가? 아니다. 그건 말도 안 된 다고 원석은 생각했다.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라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원석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 진 채 골머리 앓았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더 이상 망 설일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종례 시간이 된 것이다.
원석은 고민하다가 결국 준호에게 갔다. 반에서 현규를 제외 한누군가가 준호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 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원석에게 향했으나 원석은 짐짓 사나운 눈길로 방을 둘러보았다. 원석을 향한 눈길이 조금 줄어들었다. 원석은 다시 준호를 보았다. 햇빛을 못 본 지 몇 년이나 된 듯 하얗고 창백한 얼굴, 그리고 조그마한 몸집, 작고 가늘게 찢어진 눈. 이런 녀석이 어떻게 아라 같은 아이를 알까?
원석은 용기를 내려고 한 번 헛기침을 했다.
준호는 가만히 원석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찌푸린 표정이었다. 내친김에 원석은 준호에게 말을 건넸다.
“너………… 수업 끝나고 잠깐 나 좀 보자.”
준호는 잠시 원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왜?”
원석은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호감을 가진 상대 였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저 그런 상대가 그렇게 했 다 해도 화를 낼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준호에 대한 기분 나쁜 선입견 때문에 이런 단순한 행동 하나에도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고 원석은 다짐했다.
“좀 일이 있어. 절대 너한테 나쁜 일은 아닐 거야. 어때?”
원석은 간신히 이야기한 것이었지만 준호는 짧게 잘라 말했다.
“글쎄.”
도무지 나올 것 같은 표정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원석이는 준호의 귀로 슬쩍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주석이와 관련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 말에 준호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원석은 준호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았지만 준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원석은 울화 가 치밀었다.
‘제길, 내가 왜 이 자식에게 간청을 해야 하지?
원석은 입에서 맴도는 대로 다시 말했다. 물론 준호의 귀에 대 고 조용히 말한 것이지만.
“안 오면…… 후회할지도 몰라. 아홉시에 체육 창고 앞으로 와라.”
준호가 의아하다는 눈길로 원석을 바라보았다.
“너 오늘 어차피 환경 미화 땜에 늦게 가잖아. 널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 반드시 …..”
그 순간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오고 있다고 인이 외쳤다. 원석은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제기랄, 이래도 안 온다면 내 탓이 아니야’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원석은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 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