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2권 10화 – 정령들의 여왕 2 : 거듭되는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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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2권 10화 – 정령들의 여왕 2 : 거듭되는 환영


거듭되는 환영

근호는 흐린 얼굴로 병수에게 말했다.

“박 신부는 죽었다고 들었어. 몇 년 전에 무슨 정부 조직과 관 련된 엄청난 일에 끼어들어서 모조리 죽었다고 하던데. 주기 선 생 상준이도 그때 죽었고 현암도…….”

“말도 안 돼. 조금 전까지 박 신부는 여기 있었단 말야. 나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구! 일 분밖에 아직 안 지났는데.”

근호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일 분밖에 안 되는 사이에 그분이 어디로 갔단 말야?”

병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휘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 니 이상했다. 이 주변은 늪지와 진창이 많기는 했지만 상당히 넓 은 개활지여서 사방이 탁 트여 있었고 건물도, 몸을 감출 만한 장소도 없었다. 달려간다 해도 일 분 사이에 모습이 보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병수는 놀란 나머지 사방을 둘러보고 혹시 진창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여 늪지 쪽까지도 돌아보았지만 박 신부의 자취는 남 아 있지 않았다. 병수는 크게 당혹했다.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잘못 본 거 아냐?”

“날 뭘로 보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병수가 화를 버럭 냈다. 그러자 근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만 그만 우리가 왜 다투어야 해? 이상한 일이라서 말해 본 거였으니 너무 화내지 말라구. 자넬 우습게 보아서 그런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병수는 화가 난다는 듯 발을 몇 번 쿵쿵 굴렀다.

“제기랄, 이게 무슨 꼴이람. 뭔가에 씌었군, 단단히 씌었어. 환 영에 씌고, 죽은 사람이 나타나서 말을 걸고. 이게 뭔 놈의 일이 란 말야.”

그때 전 박사가 끄응 소리를 냈다. 비로소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근호가 서둘러 말했다.

“전 박사님, 괜찮은가요?”

“아이고, 머리야…………. 이게 뭐지?”

그러자 병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긴 뭐? 다들 완전히 당한 거지!”

병수는 계속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전 박사님, 당신이 뭘 연구하려는 건진 모르겠소만, 요번 일 은 좀 무모했던 것 같아요.”

“뭐가 말인가?”

“이 근처에는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 늪지 주변만 조사해 보고 말았어야 하는 건데. 이상한 건물이 있다고 그리 가 본 게 잘못이었나 봐요. 그 낡은 보육원에 이런 엄청난 힘을 지닌 뭔가 가 숨어 있었다니, 원.”

한참이 지나자 전 박사와 근호, 병수 세 명은 모두 기력을 되 찾았다. 병수가 언뜻 전 박사를 보니, 그는 조금 놀라기는 했지 만 오히려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고 미소까지 띠는 것이 몹시 흥 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박사님은 뭐가 그리 좋으슈?”

“굉장한 발견을 했으니 좋지.”

“뭐가 그리 굉장한 발견인데요?”

“어젯밤인가….? 흠, 아마도 그렇겠지. 어제 우리가 본 현상은 정말 굉장한 것이라네.”

“당한 게 그리도 좋수?”

병수가 투덜거려 뭐라 쏘아붙이려 하자 근호가 얼른 눈짓을 해 보이고 전 박사에게 물었다.

“하지만 좀 위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렇지만…………. 어쨌거나 아무 일도 없지 않은가? 우리 다시 가보세.”

그 말에 병수가 펄쩍 뛰었다.

“다시 가본다구요?”

“왜 그러나? 당연히 가 봐야지!”

병수가 미간의 갈매기를 한층 더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박사님, 우리는 어제 완전히 꼼짝도 못하고 당했다구요. 솔 직히 말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나나 여기 현현파 근 호나 어느 정도 재주 있는 사람들인데도 전혀 찍소리도 못했단 말요. 하물며 박사님은 아무 힘도 없는 처지 아니오? 그런 판국에…….”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멀쩡하지 않은가?”

“그러니 다행으로 알아야 하는 것 아니겠수?”

“무슨 소린가? 결국 어제 우리가 본 그것은 환영에 불과하네. 겁먹을 필요 없네. 다치진 않을 테니까 말야.”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근호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떼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전 박사님은 어제 그 돌들이 날아온 것을 보고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라 하셨죠?” 

“그렇네. 당연히 폴터가이스트겠지.”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라면 우리들이 환상에 속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보육원 건물은 여기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인데, 우리들의 몸이 어떻게 여기까지 옮겨진 것일까 요?”

“음?”

그 말을 듣고 전 박사가 어깨를 움찔했고 병수도 놀랐다. 근호 는 차분히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들이 환상을 본 것이라면 당연히 그 자리에 쓰러져 있어 야 하지 않나요? 만약 그렇지 않고 그 현상을 일으키는 힘인지 존재인지가 우리들을 옮겼다 하면 더 이상하지요. 우리들 세 사 람의 몸을 이렇게 먼 곳까지 옮긴다는 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 트 현상으로 볼 수가 없는걸요. 이건 분명한 물리력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겠지. 흠, 물리력이라. 우리 세 명의 몸무게를 합하면 아무리 못 잡아도 이백 킬로그램은 될 건데, 그 무게를 일 킬로미터 밖으로까지 옮긴다?”

병수 역시 뭔가 한참 속으로 계산해 보는 듯하더니 중얼거렸다.

“당신들 몸무게가 사십밖에 안 나가?”

근호는 병수의 말이 우스웠지만 그냥 넘겨 버리고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맞아요. 무서운 물리력입니다. 몹시 위험해요.”

“이거야말로 전에 보지 못한 강력한 물리력이로군. 더더욱 조사해 봐야겠네.”

그 말에 근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을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은데요. 아니면 일부러 딴전을 피우시는 겁니까?”

“무슨 말인가?”

“어제 우리는 정신도 까마득히 잃은 상태였어요. 근데 이백 킬 로그램에 달하는 물리력이 우리를 옮기는 데 쓰이지 않고 우리 를 해치는 데 쓰였다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그건.”

근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린 저승 문턱에 갔다 온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죽진 않았지 않은가?”

“이건 일종의 경고라구요. 우리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으니 귀 찮게 굴지 말라는 경고죠. 그 귀신인지 뭔지가 한 번 봐준 거라 이겁니다. 이 판국에 다시 거길 가요? 만약 그 존재가 말을 못 알 아듣는다고 화내면 어떻게 하죠? 죽이지 않는다 해도 물리력을 써서 눈이라도 하나 멀게 만들거나 팔이라도 부러뜨리면 어쩌자 는 겁니까?”

그 말에 전 박사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으나 다시 애써 안색을 굳히고 말했다.

“흠. 설마 그 알 수 없는 존재가 발휘한 물리력은 아니겠지. 이 런 강력한 물리력은 듣도 보도 못했네.”

“하지만 우린 분명 옮겨지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한 짓이라면 왜 우릴 진창에 빠뜨려 놓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이 우릴 진창에 빠뜨렸다면 그 즉시 우린 차갑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눈을 떠 야죠. 그런데도 날이 밝을 때까지 깜깜한 정신으로 있었으니 이 건 분명 사람이 한 짓은 아닙니다!”

“아니야, 아니야. 아마 누군가가 우리를 발견하고 여기다 옮겨 놓은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제 환상에 너무 놀라서 깨어나지 못한 거고 말이야. 그렇지 않겠는가?”

병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다구. 아까 신부님이 옮겨 놓았는지도 몰라.” 

근호는 애가 탔다. 분명 전 박사라는 심령 연구가는 자신의 지 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그곳에 가 보고 싶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억지를 부리는 것 아닌가. 근호도 궁금한 건 마 찬가지였지만 어제의 환영과 물리력으로 볼 때 자신이나 병수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미친 짓 같았다. 그런데 병수는 왜 끼어들어서 전 박사 편을 든단 말인가?

“신부님이라니? 병수 자네는 헛것을 보고도 자꾸 그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해?”

“어어, 헛것이 아니래두 그러네!”

“신부님은 또 누군가?”

병수는 전 박사가 묻자 횡설수설하며 간단하게 자신이 박신 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자 전 박사도 깜짝 놀라 며 말했다.

“그 기도력을 발휘한다는 박윤규 신부 말인가? 으음……………. 나 도 그 사람은 죽은 걸로 알고 있네만.”

“어어, 그러면 정말 죽은 사람였단 말요? 하지만 너무도 또렷 했는데.”

병수가 놀라 말을 흐리자 근호가 다시 말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박 신부는 이미 죽었지만 영혼 상태로 우리에게 와 준 겁니다. 제발 그곳으로 돌아가지 말 라고 말이죠.”

“제길, 박 신부가 죽은 게 분명합니까?”

병수가 조금 얼굴빛이 질린 채 묻자 전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확하게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퇴마사라고 불 리던 동료들과 함께 모조리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문일세. 솔직 히 그 사람들 정도 되는 능력자들이 있다면 아무 거리낌이 없을 텐데.”

그러자 병수가 자존심이 상한 듯 철봉이 든 가방으로 땅을 쾅 찧으며 외쳤다.

“제기랄! 이미 죽은 사람들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뭐한단 말요?”

“그나저나 다시 한번 가 보세나 지금은 낮이니 괜찮지 않겠는 “가?”

“전 반대입니다. 전 박사님은 심령 연구가이면서 낮이라고 안 전하다는 말을 하실 수 있나요? 물론 낮이 밤보다 나은 것은 사 실이지만, 강력한 영은 낮에도 얼마든지 힘을 부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쩌자는 겐가?”

“일단 이대로 돌아가십시다. 그래서 더 능력 있는 사람들을 모 은 후에 다시 오기로 하죠. 제 스승님도 제가 잘 말씀드리면 와 주실지 모릅니다.”

근호의 말에 전 박사는 울상을 지으며 대꾸했다.

“이런 현상은 날이면 날마다 있는 것이 아닐세. 그리고 그렇게 지체하다가 그 존재가 어디론지 또 옮겨 가 버리면 어떻게 하는 가? 오늘 다시 가서 정체를 밝혀내야만 하네!”

근호는 전 박사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또・・・・・・라고요? 그러면 혹시 전 박사님은…………….”

전 박사는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내 솔직히 말하지. 난 이미 몇 년째 저 강력한 힘을 내는 존재 를 추적해 왔다네. 그러나 소문과 남은 흔적만 보았을 뿐, 아직 한 번도 그 존재와 직접 맞닥뜨려 본 적이 없었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얼마를 찾아야 할지 모르는데.”

근호가 놀라서 물었다.

“몇 년 동안 따라다녔다구요?”

“그래.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는 걸세. 저 존재는 절대 악하지 않아. 나같이 아무 힘없는 사람에게도 해를 끼친 일이 없다네. 나도 물론 나쁜 의도에서 저 존재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닐세. 다 만 저 존재의 정체를 밝혀내고 싶은 것뿐일세.”

전 박사의 말이 하도 간곡한 어조를 띠고 있어 근호는 조금 생 각을 바꾸었다. 솔직히 전 박사 같은 사람이 몇 년 동안 따라다 녔어도 아무 일 없었다면 한 번쯤 저런 청을 들어주는 것도 괜찮 지 않을까? 그러나 어제 보았던 무시무시한 환영이 떠오르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벌써 몇 년 동안 따라다녀서 많이 화가 나 있으면 어쩌죠? 전 아무래도 자신이 없습니다. 감당해 낼 자신이 없어요. 제 스승님 이라도 모셔 오지 않으면………….”

그때 시무룩한 표정으로 있던 병수가 전 박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존재라는 게 도대체 뭐기에 그러는 거요? 그 폴트…폴타…..”

“폴터가이스트 말인가? 그냥 부르기 쉽게 영소(靈)라고 하세.”

“아, 예. 그 영소가 원래 그렇게 강한 겁니까? 난 완전히 질려 버렸소이다.”

“영소 현상은 보통 이렇게까지 강하지는 않다네. 서양에서도 그 사례가 자주 보고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도깨 비장난이라는 것들의 상당수가 이 영소 현상이었을 것으로 믿어 지고 있다네. 보통 자그마한 물건들이 저절로 움직인다거나 돌 이나 모래 같은 것들이 날아오고 멀쩡했던 불이 저절로 꺼진다 는 정도지. 그러나 우리가 겪은 일은 아무래도 정도가 심한 것 같긴 하네. 그러니까 내가 추적하는 것이기도 하지.”

“왜 그렇게 강한 놈을 추적하는 거요?”

“내 짐작일지는 모르지만…………….”

전 박사는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그냥 입안에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병수를 보면서 말했다.

“좋아. 의뢰비를 두 배로 주지. 위험할 것은 없다고 믿네만 그 렇게들 위험하다고 하니, 위험수당이라 생각하고 받아 두게나. 어떤가?”

근호는 고개를 저었다.

“난 반대입니다. 더 강한 분들을 모셔 와야 해요.”

“나는 그래도 이게 업인 사람이오. 그러니 돈은 도로 넣으슈. 처음 계약한 것만 받아도 난 가겠소!”

병수가 뜻밖의 말을 내뱉자 근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병수 자네?”

“제기랄, 난 자존심 상해서라도 다시 가봐야겠다구. 제깟 놈 이 세면 얼마나 세겠어?”

보아하니 병수는 근호가 자꾸 더 강한 분을 모셔 오자고 말한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부득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 다. 결국 병수가 고집을 부리자 다수결에 밀려 근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보육원을 찾아가 보기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근호 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 길지 않았어도 여태껏 같이했 던 일행을 위험한 처지에 두고 갈 수 없다는 심정 때문에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이 막 보육원으로 가려는 저만치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 습이 보였다. 덩치가 큰 남자였는데 그 옆에는 키 큰 여자 하나 가 동행하고 있었다.

“어랍쇼? 저게 누군야?”

병수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그 큰 덩치의 남자는 박 신부였 던 것이다. 분명 조금 아까의 박 신부는 사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평복 차림이었다. 박 신부는 저만치서 걸어오다가 병수 를 보고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병수가 근호를 툭 치면서 중얼거렸다.

“거봐, 박 신부 맞잖아.”

“으음. 그럴 리가 없는데………………”

병수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 박 신부를 향해 말했다.

“다시 오셨구먼. 그런데 어딜 갑자기 가셨었소?”

그러자 박 신부는 병수에게 의아하다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우리 ・・・・・・ 구면이던가요? 낯이 익기는 한데…………….”

“어라? 나 병수요. 모르겠소?”

“아아. 병수 씨군요. 오랜만입니다. 몇 년 만이지요?”

박신부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병수는 히히 웃으면서 되받 았다.

“거 왜그러죠? 조금 아까 날 구해줬잖소? 저 진창에 빠진 걸.” 

“무슨 말입니까? 난 방금 왔소. 내가 언제 병수 씨를 구해 줬 습니까?”

“어?”

병수는 눈을 크게 뜨며 박 신부를 노려보는 듯한 시선으로 보았다.

“농담 마쇼. 아, 조금 아까 신부님이 날 구해줬잖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나는 방금 오는 길이오. 여기 동행도 있지 않소?”

병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병수는 뭐라 말하려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다시 근호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질린 것은 근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근호가 외쳤다.

“저건 가짜야!”

“뭐? 뭐?”

“박 신부는 죽었다구! 저건 환영이야! 에잇! 없어져 버려라!” 근호가 손에 든 것을 박 신부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박 신

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제길! 정체를 드러내! 병수는 속여도 나는 못 속여!”

근호가 휙휙 손을 휘두르자 박 신부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근호의 주먹을 피하면서 외쳤다.

“다짜고짜 무슨 짓이오! 이건…….”

그러는 순간 박 신부의 옆에 서 있던 여자가 근호의 주먹을 탁 쳐 내면서 근호의 발을 걸었다. 그 여자의 몸놀림은 의외로 빨랐 고근호는 박 신부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했을 뿐, 그 옆의 여자 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아 다시 아까 빠졌던 진 창에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약간은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그런 여자가 무술 고단자만큼이나 빠르게 끼어들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근호였다.

“정신들 차려요!”

여자는 근호에게 외쳤다. 그러자 병수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가만가만 이게 뭐야. 제길! 당신은 또 누구요?”

“당신들이야말로 뭐죠? 왜 지나가던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거죠?”

여자가 쏘아붙이며 병수를 쳐다보자 병수는 갑자기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 얼른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섰다. 여자는 다만 병수를 똑바로 쳐다보았을 뿐인데, 여자의 눈을 정면에서 마주 보자 어지럼증 같은 것이 생겨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꼭 연못에 빠져들어 가는 것 같은 기 분이었다.

병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가 왈칵 화를 냈다. 안 그래도 아까 보고 지금 또 박 신부를 보니 혼란스럽기 그지없는데, 근호 가 가짜라며 박 신부에게 덤벼들고 또 여자의 눈빛이 기이한 것 을 보자 순간적으로 이것도 어제 자신이 당한 무슨 술수의 일종 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난 여자라고 안 봐줘!”

병수는 흉악한 기세로 철봉을 땅에 쿵 찧었다. 거한인 병수가 인상을 쓰고 철봉을 들자 여자는 놀란 듯 인상을 쓰며 말했다.

“도대체 뭐죠? 왜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 건가요?”

“그럼 당신은 왜 사람을 치는 거요!”

“저 사람이 먼저 신부님에게 덤볐잖아요!”

“당신이 뭔데 끼어드는 거요! 당신은 누구야?”

“난 연희라고 해요. 신부님과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죠.”

“어딜 가는 거요?”

“남이야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에요? 우린 보육원에 가는 거 예요! 그러는 당신들은 도대체 뭐예요? 이런 밤중에 무슨 짓들 을 하는 거냐구요?”

그 여자는 연희였다. 연희는 그간 나이를 조금 먹어 한창때 같 지는 않았으나 얼굴은 여전히 화사했다. 길었던 머리를 짧게 쳤 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한결 차분하고 가라앉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병수는 연희의 이야기를 듣고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렸다.

“흥! 벌건 대낮에 사람을 쳐놓고.”

말하다가 병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아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낮이었는데 왜 이 여자는 밤중이라고 할까?

 “아니, 지금이 무슨 밤중이요? 지금은 낮인…………….’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사방은 캄캄해져 있었다. 병수는 너 무 놀라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리고 싶었다. 귀신에 홀린 것이 아 니라면 이럴 수가 없었다. 아니, 병수도 능력자이니만큼 귀신에 홀렸다기보다는 환영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지만.

“제기랄! 너도 환영이구나!”

병수는 철봉을 들어 연희를 칠 듯한 자세를 취했다. 연희가 제 아무리 고단자라고 해도 병수 같은 거한이 철봉을 휘두르면 막을 수 없을 터였다. 연희는 깜짝 놀라 물러서며 박 신부를 불렀다. “신부님! 이 사람 미쳤나 봐요!”

박신부가 연희를 잡아끌면서 말했다.

“정말 그런 것 같군. 미친 사람들 상대하지 말고 어서 가세!” 

“뭐, 미친 사람?”

병수는 화가 나서 박 신부를 노리고 다시 철봉을 휘둘렀으나 박 신부는 슬쩍 몸을 피한 다음 연희를 끌고 저만치로 달려갔다. 그때 진창에서 일어선 근호가 일갈하면서 연희의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너희는 뭐냐? 정체를 밝혀!”

그때 사방에서 갑자기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메추리알만 한돌멩이들이 날아왔다. 근호는 깜짝 놀라 팔을 휘둘러 돌을 쳐 냈지만 병수는 큰 덩치를 믿고 돌을 그대로 맞으며 연희의 뒤를 쫓았다.

다음 순간, 돌들이 와르르 병수에게 집중되자 병수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가렸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뜨자 병수의 눈앞에는 시커먼 암흑만 있을 뿐,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우박처럼 쏟아지던 돌멩이들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뭐야! 어디 갔어!”

병수가 외치자 근호가 눈 주위를 문지르면서 대꾸했다.

“몰라. 도대체 귀신에 홀린 게 아니라면 이건.”

그때까지 멍하게 서 있던 전 박사가 그들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이럴 수가.”

근호는 돌에 얻어맞은 것이 몹시 아픈지 화를 벌컥 냈다. 

“뭐가 대단하단 거요? 얻어터지고 희롱당한 게 대단한 거요?” 병수 역시 화가 나는지 철봉을 다시 땅에 쾅 하고 찧은 다음 어두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제기랄! 지금 대체 낮이야, 아니면 밤이야!”

“화내지 말게. 우리는 아직 아까 환영의 영향 속에 있는 것 같 아. 화내기보다는 일단 여기서 어떻게든 벗어나야 하네.”

그러자 근호가 앞으로 나서면서 눈을 감고 무어라 중얼거렸 다. 그러고 나서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본 다음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밤인 것 같소. 좀 전에 우리가 본 것은 환영 이고, 지금이 진짜인 것 같아요. 아까 우리가 환영에 저항했으니 지금은 환영 속에 있지 않은 게 분명해요.”

“그러면 벌써 만 하루가 지났다는 건가?”

“아닐 겁니다. 아까 본 것이 환영이니만큼 우리가 처음 보육원 에 들어갔을 때부터 따져도 아직 얼마 지나지 않은 것이 분명해 요.”

“믿을 수 있는 거야?”

근호는 병수의 말에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전 박사를 돌아보고 말을 건넸다.

“아까 그 여자가 보육원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 이 근처에 보육원이라고는 유진 보육원 하나뿐일세. 그렇다면.”

“제길, 나도 생각이 바뀌었소. 이렇게 사람을 희롱하다니. 뭔진 몰라도 그냥 둘 수 없소!”

“알았네.”

결국 세 사람은 분기탱천하여 걸음을 옮겼다. 일껏 헤매며 애 를 썼지만 뭔지 알 수 없는 존재에게 희롱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였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먼발치에서 남몰래 뒤따르는 그 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걸음을 옮기던 그들은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이번에는 사방 이 안개로 가득 차서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걸 음을 옮긴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삽시간에 이렇게 안개가 끼 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이 또한 분명 무언가의 장난이라 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근호가 속으로 단단히 결심하듯 입술을 깨물더니만 뭔가를 꺼 냈다. 언뜻 보기에는 태극패와 비슷한 팔각형의 납작한 판이었 는데 태극패보다는 컸고 중앙의 거울이 태극패보다는 훨씬 큰, 일종의 거울이었다. 근호가 거울을 꺼내어 앞을 향하게 하자 주변이 안개로 캄캄한데도 불구하고 한 줄기의 흰빛이 거울에 반사되어 앞길을 비추었다. 신기하게도 거울에서 나오는 빛이 비춘 곳에는 안개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허어! 신기하군. 그게 뭔가?”

전 박사가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표시하자 근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불쾌한 얼굴로 답했다.

“이건 신경 쓰지 마십쇼.”

“아니, 뭔가 신기한 물건이니 이름이나 알자는 건데.”

그러면서 전 박사가 거울에 손을 대려 하자 근호는 그것을 획 뒤로 돌렸다.

“이건 현현파의 보물이니 욕심내지 말라구요!”

옆에 있던 병수가 입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건 음양(陰陽) 아닌가?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폼은.” 

그래도 전 박사는 음양경을 만지려 했다. 근호는 참지 못하겠 다는 듯 거울을 뒤로 돌리고 전 박사에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희귀한 것을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으려 한 다는 것 잘 압니다. 허나 분명 우리 계약은 당신을 그 영소 현상 이 일어나는 곳으로 데려다 주고 보호하는 것이지, 우리 파의 보 물까지 건들게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 점을 확실히 해 둡시 다. 안 그러면 난 그냥 가겠소.”

“내가 무슨 욕심을 냈다고 그러나 난 그저 …………….”

“좌우간 분명히 해 둡시다. 그럴 거요. 안 그럴 거요?”

“알았네. 안그럼세. 원 참, 사람이 의심은 많아가지고.”

근호는 그제야 다시 음양경으로 안개를 뚫고 빛을 비추었다. 여전히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전 박사가 다시 물었다.

“그 빛은 어떻게 나는 건가?”

“이 안개는 환영일 뿐입니다. 그러나 음양경은 환영을 깨는 힘이 있지요. 그래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러는데?”

“안개가 허상이니 이렇듯 캄캄해 보여도 실제론 달빛이 우릴 비추고 있다는 겁니다. 음양경은 그 달빛을 반사하여 우리 눈에 다시 보이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죠.”

“오호라, 그렇군그래.”

전 박사가 눈을 굴리자 철봉을 들고 가던 병수가 외쳤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마슈! 우리가 다가가면 또 뭔 일이 생 길 것 같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툭툭 하고 주변에 뭔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또다시 돌벼락이 쏟아진다는 것을 알고 병 수는 으라차 기합을 넣으며 거대한 철봉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붕붕 돌렸다. 무거운 철봉이 마치 프로펠러처럼 무서운 속도로 병수의 머리 위를 회전하자 근호는 전 박사를 얼른 병수의 옆으 로 잡아당겼다.

돌벼락은 점점 심해졌지만 그들에게 쏟아지는 돌들은 병수의 봉에 맞아 모조리 튕겨 나가 그들에게는 하나도 적중되지 않았

다. 그 모습에 병수가 껄껄 웃으며 봉을 돌리며 계속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허허! 아끼는 방심해서 당했다만 이제는 어림도 없다!”

근호는 병수의 봉을 우산 삼아 밑으로 숨어서 음양경으로 앞 길을 비춰 나갔다. 둘의 합작으로 돌벼락과 안개는 거의 힘을 쓰 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사오 분 정도 길을 가자 어지간한 병 수도 팔이 뻐근해져 옴을 느꼈다.

그때 돌연 눈앞에서 안개가 걷히고 돌벼락이 뜸해지더니 이윽 고 사라져 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맑은 밤공기 위에 달빛이 찬 란하게 비치고 있었고 눈앞에 아까 들어가려 했던 보육원의 그 림자가 달빛에 아른거려 보였다.

보육원 건물을 보자 세 사람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병수는 조금 뒤쳐져서 봉을 수습했다.

“이제 된 것 같군요.”

근호의 말에 전 박사가 맞장구를 쳤다.

“영소 현상이 아무리 강해도 이 정도면 그칠 때가 됐지. 원래 그리 장시간 끌어 가는 현상은 아니니까.”

뒤에 떨어져 있던 병수 역시 호탕하게 외치면서 보육원 쪽을 향해 발을 디뎠다.

“어서 들어갑시다!”

다음 순간, 병수의 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바로 코앞에 서 같이 왔던 사람이 없어지자 근호와 전 박사 둘 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근호가 화급하게 음양경을 들고 여기저기를 비추어 보 았으나 병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전 박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끝을 흐리자 근호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좀 조용히 해요!”

근호는 사방을 음양경으로 비춰도 결국 병수가 보이지 않아 뒤를 한참 살펴보다 대뜸 소리쳤다.

“저걸 봐요!”

“뭔가?”

근호가 심각한 얼굴로 음양경에서 나오는 빛으로 비춘 것은 그들의 발자국이었다. 이곳은 비포장도로이고 땅이 질척해서 그 들이 지나온 곳에는 발자국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발 자국들도 많았지만 방금 그들이 밟아 온 발자국들은 한눈에 구 별할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에서 뒤쪽으 로 시선이 미치는 곳에는 두 줄의 발자국만이 보였다.

“이건…….”

“병수는 여기 도착했을 때 이미 없어진 겁니다.”

“아니, 그러면? 방금 이 앞으로 앞장서서 나간 건………….”

“그건 환영인 게 분명합니다. 아까 두 번이나 나타난 박 신부 와 연희란 여자도 환영인 게 분명하구요.”

“아니, 어떻게……..”

“잊으셨나요? 당신이 좇는 그 존재는 환영을 마음대로 만들어 내는 놈입니다. 벌써 지긋지긋하게 당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내 말은 그게 아냐. 환영이었다면 그렇겠지. 그러나 만약 병수군이 환영이었다면 아까 돌벼락을 막아 준 건 또 누구 “란 말인가. 응?”

그 말을 듣자 근호도 등골이 써늘해졌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가 환영이고 어디까지가 실제란 말인가? 도깨비에 홀린다는 말 이 있기는 했고, 그런 이상한 일을 여태껏 숱하게 겪은 근호로서 도 이렇게까지 갈피를 못 잡을 정도의 일은 처음이었다.

곧이어 사라졌던 안개가 사방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그럼 병수 군은 지금 어디 있지?”

전 박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반문하자 근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근호의 몸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모르죠…….”

두 사람은 보육원 문 앞에 서서도 감히 그 안으로 들어갈 엄두 조차 내지 못한 채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안개 는 순식간에 사방을 메워 음양경의 빛을 비추지 않고는 코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참 망설이다가 근호가 단검에 가는 끈이 연결된 삼재검(三劍)을 꺼내 오른손에 쥐고 왼손에는 음양경을 들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일단 철수합시다. 병수를 찾죠.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일단 사람이 급한 것 아닙니까?”

근호가 앞장서서 발을 옮기려 하자 전 박사가 허둥거리며 막아섰다.

“이봐………… 이봐…………. 그러다가 자네마저 없어져 버리면 난 어쩌란 말인가? 응?”

“제 옷깃을 잡으세요. 그리고 일단은 돌아가서 병수를 찾아봅 시다.”

둘이 막 뒤로 돌아서려는 순간 보육원의 안쪽에서 뭔가 시커 먼 형체가 소리를 지르면서 뛰쳐나왔다. 전 박사와 근호는 기절 할 듯이 놀랐고, 전 박사가 근호의 옷깃을 잡아끄는 통에 근호는 그만 음양경을 떨어뜨렸다.

음양경의 빛이 사라지자 그 즉시 사방은 다시 안개로 휩싸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근호는 놀라면서도 그 튀어나오는 형체를 향해서 삼재검을 던졌다. 삼재검은 뭔가 에 맞고 쨍 소리를 내면서 튕겨 나왔다.

그와 동시에 검은 형체는 뭔가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근호를 향해 내리쳤다. 바람 소리가 웅 하는 것이 맞았으면 그대로 저 세상으로 갈 정도의 힘이었다. 근호가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 하면서 삼재검을 당겨 손에 쥐는 사이 검은 형체는 다시 뭔가를 내리쳤다.

근호가 언뜻 보니 그 내리치는 것은 병수의 철봉 같았다. 안개 속이라 병수의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병수! 나야 나!”

근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검은 형체도 외쳤다.

“이 환영 자식! 안속는다!”

그러면서도 병수는 일단 공격을 멈추었다.

“난 환영이 아냐!”

근호가 다시 외치자 병수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정말이냐?”

“정말이야!”

병수가 손을 뻗어 근호를 만져 보더니 휴 하는 한숨을 쉬고 땀을 닦았다.

“제길, 이번엔 진짜군. 정말 식은땀 났네.”

근호도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병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모르겠어. 보육원 문 앞까지 왔는데 갑자기 두 사람이 없어지지 뭐야?”

“자네도?”

“그럼 자네도 그랬단 말야?”

근호와 병수는 둘 다 놀랐고,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이거 심각하군. 우리 모습까지도 마음대로 환영으로 만들다니.”

근호가 중얼거리다가 문득 놀란 듯 물었다.

“가만가만! 그런데 자네도 보육원 문으로 왔다고 했지?”

“엉? 어, 그래.”

“하지만 자넨 보육원 안에서 뛰쳐나왔잖아?”

“어? 아닌데? 난 보육원 문가에 있다가 자네가 날 공격하는 걸 보고 환영이다 싶어서 쫓아간 것뿐이네. 분명 보육원 문 쪽으 로 갔다구.”

“제기랄! 이게 도대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러다가 병수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근호에게 물었다.

“이봐, 그런데 전 박사는 어디갔어?”

“뭐?”

근호는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사라 졌는지 전 박사가 보이지 않았다. 근호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또…… 또 없어지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내 옷깃을 잡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로라하던 병수마저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여………… 염병할………. 도저히 안 되겠어. 이건 제기랄! 우릴 가지고 완전히 놀고 있잖아! 난 도망갈래!”

그러자 근호가 울상이 되어서 말했다.

“그렇지만…………… 전 박사는 어쩌구?”

“내 몸도 건사 못하는데 그 늙은일 챙기게 됐어?”

병수가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순간 저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야 되나.”

병수와 근호는 흠칫 놀랐다.

“저 목소리는……”

근호와 병수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동시에 외쳤다.

“박 신부!”

곧이어 안개 저쪽에서 다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날세, 무슨 소란인가?”

박신부가 안개를 뚫고 천천히 걸어왔다. 박 신부는 정신을 잃은 전 박사를 한쪽 어깨에 부축하고 있었고 그 뒤를 놀란 얼굴의 연희가 따르고 있었다.

“아이고! 또 나왔다!”

병수가 울상을 지으면서 철봉을 고쳐 잡았으나 이제 넋이 나 갈 정도가 된 터라 힘이 들어가지 않아 철봉 끝이 가늘게 떨렸다. 근호도 입술을 깨물면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박  신부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그들에게 말했다.

“자네들 혹시………… 전에 본 적 있지 않나? 음, 그렇군. 병수하고근호・・・・・・ 맞나?”

“뭔 시치미여!”

병수가 마치 박 신부를 밀어내기라도 하듯 철봉을 내밀면서 약간은 떨리는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박 신부가 미소 를 띠며 대꾸했다.

“시치미라니? 그나저나 여기서 자네들 뭐하는 건가? 자네들 도 내 가짜를 보았나?”

“그러면 ・・・・・・ 당신은 진짜 박 신부님인가요?”

“나는 진짜일세. 이야기는 여기 연희 양에게서 들었지. 연희 양도 가짜를 보았다던데.”

“아깐 죄송해요. 저도 몰랐어요.”

연희가 말하자 근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조금 아까 당신도 박 신부님의 허상을 보고 같이 걸어 오지 않았소? 당신도 혹시 환영 아니오?”

“아니에요. 아까는 나도 몰랐어요. 원래 나는 역 근처에서 박 신부님을 만나기로 해서 그리 가는 길이었죠. 그런데 박 신부님 이 오시기에 나도 그렇게 믿었던 거예요. 그런데 당신들하고 헤 어지자마자 박 신부님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더군요. 난 놀라서 역으로 다시 갔고, 방금 역 부근에 차를 대고 내리시는 박 신부님을 뵌 거예요. 그래서 이상하기도 하고 좀 무섭기도 해서 박 신부님하고 당신들을 만났던 곳으로 다시 와 본 거랍니다.”

연희는 박 신부가 다른 퇴마사들과 함께 죽은 것으로 알고 있 었다. 그러다가 박 신부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꿈인지 생시인지 정말 믿기지 않았다. 그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몹시 상심해 마치 가슴 한구석이 휑하니 뚫린 것만 같았는데.

박 신부에게서 간단하게 그간의 사정을 들으며 연희는 반가 움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도 많았지만, 첫 번째 만난 환영의 박 신부는 전화와는 달리 의외로 말이 없어 속으로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박 신부가 갑자기 사라지고 두 번째로 박 신부를 보 게 되자 다른 할 말보다도 불안함과 무서움에 연희는 당장 이 이 상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듣고 박 신부는 서둘 러 가 보자고 하여 이리로 곧장 차를 몰고 달려오게 된 것이다.

“우릴 만났던 곳? 아니 그러면 여긴 보육원 앞이 아니란 말인 “가?”

그러자 연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주위를 가리켜 보였다. 

“여긴 보육원과 한참 떨어진 곳이에요. 아까 당신들 만난 곳에 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걸요?”

근호와 병수는 크게 놀라면서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안개는 어느 사이엔가 걷혀 있었고 그곳은 보육원은커녕 사람이 만든 것 같은 건물은 하나도 없는 허허벌판 한가운데였다. 둘은 또 한 번 놀라면서 머리를 맞대며 수군거렸다.

“우리가 또 홀렸군.”

“젠장, 난 이제 지쳤어. 난 갈래. 제기랄. 근데………… 이번에는 진짜 맞아?”

근호와 병수는 박 신부에게 다가가 박 신부의 옷깃을 만져 보 고서야 박 신부가 진짜임을 믿게 되었다. 근호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신부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그랬겠지. 그러나 난 살아 있네. 단 부탁이 있네만, 나를 여기 서 보았다는 소문은 내지 말아 주기를 바라네. 그래 줄 수 있겠 는가?”

근호와 병수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데,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전 박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런 저런 글쎄요. 그럴 수 있을는지.”

“뭐요?”

근호와 병수가 동시에 전 박사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전 박사가 히죽 웃어 보이며 말했다.

“박 신부님,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전규희라고 합니다. 아주 대단한 분이라는 말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박신부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전 박사에게 고 개를 끄덕여 보였다.

“난 아무 힘없는 가짜 사제일 뿐입니다. 아무튼 만나 뵙게 되 어서 반갑습니다만.”

“으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신부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저 를 도와주신다면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문도 내지 않고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협박이 아니라 간청입니다. 제발 부탁드 립니다.”

“어떻게 도와 달라는 말씀이신지요?”

그러자 전 박사는 자신이 오랫동안 추적해 온 영소 현상을 일 으키는 존재가 바로 이 근처에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존재는 환 영을 일으키는 능력이 대단하여 근호와 병수의 힘만으로는 도대 체뚫을 수가 없다는 점, 이대로 가다가는 목숨마저 위험할지 모 른다는 것 등을 말했다.

전 박사의 말에 근호와 병수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박 신부의 능력이 자신들보다 훨씬 위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았다.

그때 전 박사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연희가 나섰다.

“저는 서연희라고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런 존재를 왜 찾는 거 죠? 위험한 지경에 빠져서까지 그것을 찾아서 뭘 하시려고요?”

연희의 물음에 전 박사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내 평생의 소원이오. 난 심령 연구가요. 이번만큼 커다란 힘을 가진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소. 이것을 알 아내는 것이야말로 내 궁극의 소원이란 말이오.”

“이번만큼 커다란 힘을 가진 존재는 처음이라고요?”

연희는 만약 전 박사가 과거 블랙서클의 술사들이나 마스터, 블랙 엔젤 같은 존재를 보았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피 식 웃었다. 그러나 곧 웃는 얼굴을 지우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그런 대단한 존재를 찾는다면서 여기는 무엇 하러 오신 거죠? 여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인데.”

“나는 유진 보육원이라는 조그마한 보육원을 찾는 거요. 거기 서 영소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러자 연희는 고개를 저었다.

“전 박사님, 저는 그 유진 보육원에 자주 가는 사람이에요. 그 러나 거기서 영소 현상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어요. 그리고 보육원은 여기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고요.”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병수와 근호가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연희는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믿으세요? 흠, 저는 일주일에 이틀은 그 보육원에 자원봉사를 나간답니다. 벌써 몇 년째 거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거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은 한 번도 들 은 적이 없어요. 겪은 적도 없고요. 여기서 내가 직접 가짜 신부님 을 보지 않았다면 당신들의 말조차 믿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그때 박 신부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연희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가만가만 곤란한 처지에 놓이신 것 같은데 도울 수 있으면 도와드려야지. 그런데 왜 유진 보육원을 찾으시는지 이야기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박 신부의 표정은 온화함 그 자체였는데도 전 박사는 쩔쩔매 면서 박 신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말했지 않습니까?”

“다른 이유가 또 있지 않습니까? 들어 보니 그런 위험을 겪었 는데도 그냥 구경하고 싶다는 이유로 이렇게 열심이실 것 같지 는 않은데요.”

박 신부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지만 전 박사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얼굴까지 붉어져서 쩔쩔매었다.

“그건・・・・・・ 그건………….”

“도와 드리려면 일단 전후 사정을 다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요?”

잠시 전 박사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결심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쉰 다음 고개를 들고 박 신부에게 말했다.

“그게 뭐요?”

근호와 병수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본 후에 전 박사에게 물었다.

“나는………… 정령의 왕을 찾고 있습니다.”

“정령의 왕?”

전 박사는 아까보다도 한결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지만 이 세상에는 많은 초자연적인 존 재들이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중 하나가 정령인데, 가령 귀신 이나 유령 같은 것은 사람의 영혼이 변해서 된 걸 겝니다. 그러 나 사람의 영혼을 거치지 않고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 는데, 그것을 저는 편의상 정령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도깨비나 서양의 트롤(Troll)*, 페어리 (Fairy)**, 엘프(Elf)***, 브라우니(Brownie)**** 같은 것들이 모두


*스칸디나비아 초기 민담에 나오는 거인. 괴물같이 생겼고 때때로 마술을 부리 기도 한다. 인간에게 적의를 느끼기 때문에 성안에 살며 어두워진 뒤 주변 지역 에 나타난다. 나중에 민담에서는 인간과 같은 크기이거나 난쟁이 또는 꼬마 요정 처럼 인간보다 더 작은 존재로 산속에 살며 때때로 처녀들을 납치하고 둔갑과 예 언을 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 요정, 정령의 일종으로 날개가 달리고 아주 작은, 나비나 벌처럼 생긴 정령을 일컫는 말. 일반적으로 선하고 약한 존재로 묘사된다. 피터팬에 나오는 팅커벨 은 대표적인 페어리이다.

* 독일 민담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난쟁이로 묘사되는 정령이며 짓궂고 쾌활하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민담에 나오는 작고 부지런한 요정이나 꼬마 도깨비. 집이나 헛간에 산다고 전해진다.


정령이죠. 실프(Sylph)*, 샐러맨더(Salamander)**, 운디네(Undine)***, 코볼트(Kobold)****, 루살카(Rusalka)고 하고 있고 있는 있는 같은 자연적인 정령도 그 안에 포함될 겁니다.”

“아랍의 진(Jinn)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겠고요.”

박신부가 덧붙여 말하자 전 박사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여 보 였다.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폴터가이스트, 그러니까 영소 현상의 많은 부분은 그러한 정령들과 관련이 있다고 믿어져 왔 습니다. 그런데………… 근래 우리나라에서 일종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무슨 조짐 말이오?”

“정령들의 행동은 원래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통일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했고, 한곳을 향해 집중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 다. 정령들은 제멋대로이며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인간들에 게도 존재를 알리기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정령들이 조직 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은 뭔가 큰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요?”

“여기 오면서 우리는 정말로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저항을 받 았습니다. 완전히 홀린 셈이지요. 정령들은 원래 그리 강한 존재 가 아닙니다. 아주 미미한 힘을 지니고 있을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겪은 것 같은 어마어마하고 조직적인 환상을 보이기 위 해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정말 수없이 많은 정령들의 에너지가 합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멋대로인 정령들이 이렇게 힘을 합하고 일사불란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정령의 왕이 나타났고, 그의 뜻대로 정령들이 움직인다는 말이오?”

박신부의 말이 다소 비약이 아닐까 연희는 생각했지만 전 박 사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맞아요. 정령들의 우두머리, 정령들의 왕이 나타난 겁니다. 안 그러면 아무리 영소 현상이라도 이렇게까지 큰일이 일어날 수는 없어요. 이런 일은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인 겁니다. 더구나 정령들이 이렇듯 대규모적인 힘을 발휘하여 우리를 방해 하는 것을 보면 더욱더 확실합니다. 즉 그들은 정령들의 왕을 우 리 같은 사람들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 거죠.”

“그렇게 만나기 싫어한다면 굳이 만나려고 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 중세 서양에서 믿은 공기의 정령. 무형체 또는 잠자리 같은 날개를 지닌 반투명 한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 중세 서양에서 믿은 불의 정령. 이글이글 타오르는 도마뱀의 형상이며 불길 속 에서 태어나 살아간다고 한다.

중세 서양에서 믿은 물의 정령. 물로 이루어진 부정형의 모습 혹은 여자의 모습 으로 묘사된다.

*** 독일 민담에 나오는 장난꾸러기 정령. 평소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등 고마운 짓을 하지만 이따금 변덕이 심하고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성을 낸다.

슬라브족의 신화에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어 호수를 떠도는아이나 고의로 든 실수로든 물에 빠져 죽은 처녀의 혼.


박신부가 말하자 전 박사가 울상이 되어 되받았다.

“정말로 나는 악의를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정 령이라는 존재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령들의 왕을 만나는 방법이 가장 좋고, 지금 정령들의 왕이 나 타난 이상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요. 난 말입니다. 그 존재를 만 나고 싶은 겁니다. 그 존재를 만나 보고, 직접 그 존재와 대화해 보고 안되면 하다못해 보기만이라도 해 보고 싶어요.” 

“그런데 왜 하필 그 보육원을 찾으시는 겁니까?”

“그 보육원이 그 큰 영소의 중심지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또 증거가 많잖습니까? 우리를 그토록 보육원에 들어가지 못하 게 하려고 정령들이 난리를 치고 우릴 홀린 셈이니 보육원이 중 심지가 아니면 어디겠습니까?”

박신부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전 박사에게 말했다. 

“좋소. 나도 좀 겁나기는 합니다만, 같이 한번 알아봅시다.” 

그러자 전 박사와 병수, 근호는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정말입니까?”

“예. 그 존재가 내 모습으로 변해 몇 번이나 나타났다니, 이대로 물러서면 내가 관련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지도 모르잖습니 까? 허허.”

박신부는 온화하게 웃으면서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는 박신부가 왜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이런 일에 스스로 휘말리는 것 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박 신부가 하는 일이라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병수가 전 박사에게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박 신부님이 도와줘도 우리 몫이 변하면 안 되우 알았소?” 

“알았소, 알았소! 염려 마시오! 그런데 박 신부님께는 수고비 를 어느 정도 드려야 할까?”

전 박사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하자 병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 그런 거 받으실 분이 아닌데…………….”

박 신부는 그 말을 어느새 들었는지 웃으며 전 박사를 쳐다보 았다.

“아, 그런 염려는 마십시오. 다만 그럴 성의가 있으시다면 그 걸 유진 보육원에 기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전 박사 님 이름으로 말이죠.”

박신부가 유쾌하게 윙크를 해 보이자 전 박사와 병수는 꿀 먹 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병수가 에잇 하면서 말 했다.

“좋수! 나두 사나이 대장부인데! 어차피 내 힘으로 된 것두 아니니 나두 이번 수고비는 기부하겠수!”

그러더니 이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목돈 좀 만져 보나 했더니만.”

연희는 병수의 목소리를 듣고는 잠시 눈을 빛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듯한 온화한 얼굴로 세 사람에게 말했다.

“많이들 헤매신 모양인데, 유진 보육원은 저쪽에 있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가보도록 하죠.”

그러자 근호가 조금 걱정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말 방향을 정확히 잡으실 수 있겠습니까? 신부님을 못 믿 어서가 아니라 여태껏 너무 헤맸기 때문에 …………….

박신부가 근호를 쳐다보면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정령들이 만든 환영, 만만치 않지. 고생들 하셨네.” 

박 신부의 말에 병수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러면 신부님은 정령의 환영에 대해 잘 아슈?”

“조금은 안다네. 자주 일어나는 현상 아닌가? 하긴… 자네 들이 겪은 것 같은 심각한 양상은 처음 보는 것이네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흘리게 된 건지 좀 말해 주슈. 그리고 말요. 환영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우리 몸을 먼 곳까지 옮겼는지 모르겠단 말유. 그대로라면 정말 무시무시해지는데.”

그 말을 듣고 박 신부는 일단 연희에게 길을 안내해 달라고 말 하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희가 마지못한 듯 앞장서서 걷자 전 박사 비롯한 세 사람도 그 뒤를 따랐다. 걸으면서 박신 부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윽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니 정령들은 결코 악하지는 않은 것 같네. 그리고 정 령들이 그토록 강한 물리력을 행사하지는 못할 거라고 보네.” 

“하지만 우린 분명히 정신을 잃은 사이에 몸이 아주 멀리 옮겨 졌단 말유.”

“정말 그럴까?”

박 신부는 병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령들의 특기는 환영일세. 감각을 자극해서 존재하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거지. 자네는 아까 보육원에 들어 갔다가 어마어마한 환영을 보고 기절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소이다.”

“그러면 그 보육원 자체가 환영이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실제로 자네들은 보육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자네들이 깨어 났던 그 장소에서 환영을 보며 헤매고 있었을 걸세. 그러다가 정 신을 차리고, 자신들이 먼 곳까지 옮겨졌다고 착각했겠지. 하지 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네.”

“아하.”

근호가 박 신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병수가 나서서 다시 물었다.

“그러면 돌벼락은 어떻게 된 거요.”

박 신부는 싫증 내는 기색도 없이 차근차근 병수에게 설명해주었다.

“자네들은 불구덩이에 떨어졌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타지 않 았네. 그런 것처럼 자네들에게 쏟아진 돌벼락도 실제는 아닌 걸 세. 물론 정령들이라도 힘이 모이면 약간의 물리력을 사용할 수 있을 테니 몇 개의 돌은 정말 던진 것일 수도 있네만, 그렇게 많 은 돌이 실제로 쏟아지지는 않았을 거란 뜻일세.”

박신부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전 박사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렇더라도 환영과 실제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모르겠군 요. 뭐, 신부님 말씀대로라면 실제로 죽거나 다치지는 않을 테니 안심은 됩니다만.”

박신부는 전 박사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렇다고 너무 방심은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환영일지라도 그것을 정말 믿게 되면 실제로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정신에 의해 상당 부분 좌우되는 존재이니까요. 아무튼 차 분한 마음으로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환영에 불과한데도 위험해집니까? 심장마비 같은 것을 말씀 하시는 겁니까?”

“그것도 문제입니다만, 환영이 정말로 강해지면 실제와 마찬가지의 효과를 낼 수도 있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 느 선원이 실수로 냉동 창고에 갇혔답니다. 그 선원은 너무도 춥 고 고통스러워서 자신이 겪은 추위를 벽에 세밀히 기록해 놓다 가 얼어 죽었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 냉동 창고는 비어 있어서 실 제온도는 바깥 기온과 같았던 겁니다. 그 선원은 냉동 창고가 차 가울 것이라 굳게 믿었고, 그러한 마음이 감각과 육체에 영향을 주어서 온화한 기온임에도 불구하고 얼어 죽게 된 것이죠.

또 과거에 어떤 비인간적인 실험 기록을 보면 이런 것도 있습 니다. 죄수를 잡아 놓고 동맥을 그어서 처형한다고 겁을 주죠. 그리고 죄수의 눈을 가린 후 팔목을 다치지 않게 살짝 긁습니다. 곧이어 그 위로 더운물을 조금씩 흘리면 죄수는 정말 자신의 피 가 빠져나가는 것으로 착각하여 얼굴이 창백해지고 현기증을 느 끼는 등 심각한 빈혈 증세를 일으키며 죽는다는 겁니다. 실제로 빠져나간 피는 한 방울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환영도 그 강 한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겁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 박사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모 든 게 환영이라는 박 신부의 설명을 듣고 안심했다가 다시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박 신부가 이내 덧붙였다.

“저는 잠시 이야기를 들었을 뿐입니다만, 아직까지 정령들 은 여러분을 해치려고까지 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환영을 보일 정도면 여러분을 자극하여 해칠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러 니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정말 전 박사님의 말대로 정령 들의 왕이 있고, 정령들이 자신들의 왕을 보호하려는 거라면 가 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강한 환영을 보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박신부의 말은 온화했지만 전 박사와 근호, 병수는 모두 등골 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특히 전 박사는 더더욱 공포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 그 환영을 보지 않는 방법은 없습니까?”

“스스로 이겨 내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더군다나 아까 저로 변신도 하고 대화까지 했다고 하니, 환영을 만들어 내는 정령들 은 결코 지능이 낮은 존재가 아닙니다. 최소한 사람 이상으로 지 능이 높은 존재일 겁니다. 그런 정령들의 속을 알 수는 없죠. 아 무도.”

전 박사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자 박 신부는 전 박사를 위로 라도 하려는 듯 온화하게 말했다.

“전 박사님이 정말 사심이 없다면 정령들도 그 뜻을 받아들여 줄 겁니다. 사람식으로 말하면 그들의 우두머리를 만나보고 싶 다는 것뿐인데, 그리 심하게 해코지야 하겠습니까?”

“만약 사심이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유?”

병수가 불쑥 묻자 박 신부가 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설마…………. 하지만 그렇다면 몹시 위험해질 수도 있다네. 내 가 보기에 정령들은 사람의 마음도 읽을 수 있는 것 같으니까.” 

“사람의 마음을 읽어요?”

“안 그렇다면 어떻게 나로 둔갑하여 자네들과 이야기를 나누 겠는가? 정령들이 나에 대한 조사를 한 것도 아닐 테고.” 

박신부의 말이 끝나자 근호가 불쑥 물었다.

“정말로 신부님과 이 현상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겁니까? 죄송 하지만 저는 정말로 석연치가 않습니다. 정령들이 하필이면 신 부님으로 둔갑하여 나타난 것도 그렇고. 우리가 찾는 보육원이 하필 신부님이 아는 곳이고 방문하시려 했던 곳이라는 것도 우 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박신부는 근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나도 의외일세. 당황스러울 뿐이야. 그러나 맹세하건대, 난 이 일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네. 그래서 나도 사실을 알 고 싶은 거야.”

“정말이십니까?”

“나는 이래 봬도 사제였던 사람이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네.”

근호와 병수, 전 박사는 그 말을 들은 뒤부터는 묵묵히 박 신 부의 뒤를 따르기만 했다. 주변의 안개는 살아 있는 듯 다시 뭉 클거리면서 자욱해져 갔다. 그러나 연희는 조금도 발걸음을 늦 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안개는 자욱해지기는 했지만 전 박사 등 세 사람이 연희와 박 신부의 모습을 잃을 정도까지 자욱해지 지는 않았다.

그들은 약간의 의혹과 미심쩍음, 그리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박신부와 연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조용해지자 연희 는 앞서 가던 걸음을 조금 늦추면서 박 신부의 옆으로 다가가 속 삭였다.

“저 전 박사라는 사람. 말처럼 그렇게 의도가 순수해 보이지 는 않는데요. 정말 저 사람을 도와주실 건가요?”

“연희 양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보수 말이에요. 병수 씨는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저 사람도 목숨을 걸고 이 일에 끼어든 것을 보면 그 보상금이 결코 적은 돈이라 여겨지지는 않아요. 그런데 저 전 박사가 재벌이라도 되 지 않는 이상, 자신의 취미를 만족시키려고 거금을 쓰기는 어려 울 것 같거든요. 게다가 신부님을 처음 뵌 자리에서 보상금 운운 하는 것을 보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정말 저축을 해서 자신의 평생 취미 때문에 저 사람들을 고용한 거라면, 당장 이 자리에서 신부님께 보상 치를 만한 여유를 갖기는 어려울 건데 말이에요.”

박신부는 미소를 띤 채 연희에게 말했다.

“계속해 보게.”

“더구나 저 사람은 겁이 많은 것 같아요. 신부님의 말만 듣고 도 얼굴빛이 창백해졌어요. 그러나 정말 초자연현상을 필생의 취미로 여기고 연구한 사람이라면 그 정도 일에 두려워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겁을 먹으면 서도 저 사람은 기를 쓰고 그 정령의 왕인가 뭔가를 찾아야 한다 고 하잖아요. 여긴 분명 뭔가 있어요. 저 사람은 뭔가 숨기는 게 있다구요.”

박신부가 조용히 연희에게 속삭였다.

“연희 양도 대단하군그래. 훌륭해요. 하지만 알아도 일단은 내 색하지 말고 조금 두고 보기로 하세.”

“왜요?”

“연희 양 추리에 나도 동감일세. 전 박사는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 같네. 아마도 거액이 걸려 있겠지.”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걸까요?” 연희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정령들의 왕이란 게 정말 있나요? 저는 잘 몰라서.” 

“나도 잘 알지는 못하네. 하지만 세상은 우리 인간의 눈에 보 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네 전 박사가 비록 뭔가를 속이고는 있지만 정령들의 왕이란 말은 정말일 수도 있겠 지. 그들이 본 환영은 정말일 테니까 말일세. 지금도 다시 안개 가끼고 있고 말야. 그러나 여긴 악령의 기운 같은 것도 전혀 느 껴지지 않아. 그렇다면 이 환영을 만드는 건 정령들이라는 말에 도 타당성 있고, 나아가서는 정령들의 왕이란 존재도 정말 있을 지 모르지.”

“그런데 왜 하필 유진 보육원에서 일이 벌어지는 거죠? 거긴 아주 작고 초라한 곳인데, 정말이지, 저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한 번도 이상한 일은 보지 못했는데………….” 

순간 박 신부가 아주 작지만 신중한 목소리로 연희에게 속삭였다.

“연희 양, 지금 우리 뒤를 몇 사람이 따라오고 있다네.”

“예?”

연희는 놀라서 하마터면 뒤를 돌아볼 뻔했지만 다행히 순간적 으로 억제하여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박 신부는 조용히 쉿 소 리를 낸 다음 연희에게 말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자들이야 거리를 두고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따라오고 있는 듯하네. 상당한 영력이 느껴지기도 하고. 아마 전 박사의 배후 인물은 저자들이 아닌가 싶군.”

그 말을 듣고 보니 연희는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저 박사를 사주한 자들이 박 신부의 느낌대로 대단한 영력의 소유자라면 왜 보육원을 직접 찾지 않는 것일까? 왜 전 박사와 같이 하잘것없는 인물에게 그런 일을 시킨 것일까? 그리고 왜 아무 특이한 점이 없는 유진 보육원 근처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연희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자 박 신부가 말했다.

“나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네. 도대체 내 주변에서는 이런 일들 이 끊이질 않는구먼. 그러나 연희 양, 눈을 크게 뜨고 잘 지켜본 다면 알게 될 테니 너무 심각한 표정 짓지 말게. 세상에 아무 이 유 없이 생기는 일은 없는 법일세.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이 있겠지. 혹시 그것이…………….”

박신부는 갑자기 안색을 흐리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박 신부 의 얼굴빛이 심각해지자 연희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혹시 뭔가…….”

그때 병수가 외치는 소리에 놀라 연희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고! 여기구나! 여긴 설마 진짜겠지?”

그러고 보니 어느덧 연희는 유진 보육원 앞에 다다라 있었다. 연희가 보기에 보육원은 그야말로 예전 그대로 조금도 달라진 곳이 없었다. 약간 빛바랜 간판, 낡고 초라한 놀이 시설들, 그리 고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나지막한 건물.

근호와 병수는 서로 계속 속삭이면서 이번만은 틀림없다고 말 을 하고 있었다. 전에 보았던 환영 속의 건물도 지금 건물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환영의 건물은 을씨년스럽고 사람의 발자취가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 보이는 보육원은 사람이 안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완연했다.

연희는 일단 마음을 가다듬고 뒤로 돌아서서 전 박사에게 말했다.

“자, 도착했어요. 정령이니 뭐니 찾으시려면 어서 찾으세요. 단, 늦은 시간이니 아이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해 주세요.” 

그때 근호가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하군요.”

“뭐가 이상하단 말이죠?”

“실례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저는 의심을 지울 수 없어요. 아 까는 그토록 지독하게 환영이 나타나서 우리를 여기 못 오게 하 려고 방해했는데, 왜 지금은 그러지 않는 거죠? 정말로 여기를 둘러싼 환영과 신부님은 인연이 없는 겁니까?”

연희가 기가 막히다는 듯 근호를 쳐다보았으나 근호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지금 우린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분명 허상의 신부님 을………… 저기, 연희 씨 맞지요? 연희 씨도 보셨으니까 그 환영 이 얼마나 기가 막힌 것인지는 아실 겁니다. 그런데 신부님과 같 이 오니 그런 환영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신부님과 이 환 영의 모종의 관계가 없다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요? 신부님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런 환영을 만들 수도 있다고 저는 감히 봅니다만…… “

“아닐세.”

박신부는 고개를 저으며 나섰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네. 그리고 만약 내가 자네들을 여기 못 오게 할 목적이었다면 왜 내가 직접 자네들을 안내했겠는가? 내 가 자네들을 거부할 심산이었고 환영을 만들 능력이 있다면 왜 이번에야말로 더 크고 혼란스러운 환영을 만들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신부님은…………….”

그때 박 신부가 근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나는 자네들이 위험하다고 여겨서 동행한 것뿐일세.”

“위험 ・・・・・・요? 그 환영 말입니까?”

박신부가 미소를 거두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환영은 위험한 것이 아닐세. 전 박사에게 이 일을 사주한 사 람, 그리고 지금 우리들을 뒤쫓아 온 사람들이야말로 위험한 자 들이라 여기기 때문일세!”

전 박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순간 박 신부가 쏜살같이 앞 으로 달려 나오면서 양팔을 활짝 폈다. 순간 박 신부의 오라 막 이 주변을 연녹색으로 물들이면서 퍼져 나갔고, 무엇인가 보이 지 않는 서너 개의 존재가 오라 막에 부딪혀 깨갱 하는 괴성을 지르면서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의 능력이라면 그런 환영을 만들 수도 있다고 저는 감히 봅니다만…… “

“아닐세.”

박신부는 고개를 저으며 나섰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네. 그리고 만약 내가 자네들을 여기 못 오게 할 목적이었다면 왜 내가 직접 자네들을 안내했겠는가? 내 가 자네들을 거부할 심산이었고 환영을 만들 능력이 있다면 왜 이번에야말로 더 크고 혼란스러운 환영을 만들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신부님은…………….”

그때 박 신부가 근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나는 자네들이 위험하다고 여겨서 동행한 것뿐일세.”

“위험 ・・・・・・요? 그 환영 말입니까?”

박신부가 미소를 거두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환영은 위험한 것이 아닐세. 전 박사에게 이 일을 사주한 사 람, 그리고 지금 우리들을 뒤쫓아 온 사람들이야말로 위험한 자 들이라 여기기 때문일세!”

전 박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순간 박 신부가 쏜살같이 앞 으로 달려 나오면서 양팔을 활짝 폈다. 순간 박 신부의 오라 막 이 주변을 연녹색으로 물들이면서 퍼져 나갔고, 무엇인가 보이 지 않는 서너 개의 존재가 오라 막에 부딪혀 깨갱 하는 괴성을 지르면서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뭐, 뭡니까?”

근호와 병수가 놀라서 주춤하는 사이 박 신부는 다시 오라 막 을 넓게 벌려서 연희와 전 박사까지 네 사람을 감쌌다. 그러자 다시 서너 개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팅팅 소리를 내면서 오라 막에 부딪혀서 튕겨 나갔다.

“이게 뭐죠?”

전 박사가 놀라 기겁을 하며 외쳤다. 그 순간, 또다시 팅팅 소 리를 내면서 오라 막이 거칠게 밀렸고 박 신부가 어깨를 움찔하 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병수가 그것을 보고 철봉을 휘두 르며 뛰쳐나가려고 하는데 박 신부가 버럭 소리를 쳤다.

“이 안에서 절대 나가면 안 되네! 이건…….”

문득,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이 폭풍 처럼 박 신부의 오라 막을 덮쳐 왔다.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폭 풍이 생겨난 것처럼.

보육원 마당의 그네와 같은 놀이 시설들이 바람에 어지럽게 흔들리며 휘어졌고 나무들도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크게 휘 어졌다. 유리창이 깨어지면서 잠을 깬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보육원 안에서 잠시 들리는 듯했으나 그마저도 바람 소리에 휩 쓸려 버렸다. 연희는 그 소리를 듣고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신부님! 아이들이!”

박 신부도 그 소리를 듣고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듯 크게 고함을 쳤다. 박 신부의 오라 막에서 수없이 많은 오라 구체들이 우박같이 앞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폭탄이 작렬할 때 파편이 튀는 것처럼 엄청난 기세였다.

오라 구체들은 나무나 돌 등의 물체와 부딪쳐도 형체가 없는 것처럼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그것들을 통과해 날아갔는데 그중 몇 개가 갑자기 허공에서 작렬하며 번쩍이면서 폭발하듯 사그라졌다. 그것을 보고 박 신부가 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저기냐!”

박 신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다시 한번 오라의 구체가 솟구 쳐 올랐다. 그러나 방금 전과 다르게 그 구체들은 한데 사슬처럼 연결되어 한군데로 모여서 채찍이나 창처럼 날카롭게 한 지점을 향해 찔러 가는 것이었다.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나면서 미친 듯한 광풍이 휘몰아쳤다.

박 신부는 굳건하게 땅에 버티고 섰지만 박 신부의 발은 땅을 한치 이상 파고 들어가면서 뒤로 두 발자국이나 깊은 홈을 내면 서 밀려났다. 그와 동시에 보육원 앞뜰의 그네와 미끄럼틀이 와 장창 소리를 내면서 부러지더니 미끄러져 나가 담장에 처박혔 고, 마당의 쓰레기며 낙엽 같은 자잘한 물건들이 소용돌이를 치 면서 하늘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솟구쳐 올랐다.

보육원의 창문 중 바람이 몰아친 방향으로 나 있는 유리는 모 두 깨졌고 급기야는 문짝마저도 삐걱거리며 반으로 뜯겨 날아가버렸다.

연희는 불쌍한 아이들이 다칠까 봐 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만! 제발 그만!”

연희가 비명을 지른 순간, 바람이 갑자기 뚝 그쳤다. 근호와 병수는 아까 본 환영보다도 믿지 못할 그 광경에 혀를 내두르면 서 불안한 심정으로 박 신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박 신부는 순식간에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이마를 재빨리 닦으며 여전히 앞을 향해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하나・・・・・・ 해치운 듯하네.”

“도대체 뭡니까, 저건? 귀신이나 악마라도 됩니까?”

“아냐. 이해할 수가 없네. 그런 존재가 아냐. 어쩌면 전 박사가 말한 정령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끝난 겁니까?”

“아냐! 더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것을 불러낸 하수인은 아 직 멀쩡하네!”

그때 연희가 바람이 잠잠해진 것을 알고 박 신부에게는 묻지 도 않은 채 보육원 문을 향해 달려갔다. 안에서 아이들이 울면서 놀라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 신부는 연희를 만류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이미 연희는 오라 막 밖으로 뛰쳐나간 다음이었다. 그 순간 박 신부는 보이지는 않지만 무엇인가가 연희를 향해 달려든다는 느낌을 받고 양팔을 뻗었다. 그러자 오라 막이 박 신부가 팔을 뻗은 방향을 따라 길 게 늘어나면서 달려가는 연희의 뒤를 감쌌다. 그러나 아까와 같 은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허공을 헛짚은 듯한 느낌이었 다.

“아차!”

박신부는 급히 연희 쪽으로 보냈던 힘을 회수하여 주변을 보 호하려고 했으나 그보다 조금 빨리 무시무시한 바람이 휘몰아쳤 다. 박 신부는 안간힘을 다해 바람의 힘을 오라 막의 방어력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오라 막의 힘이 약해지자 근호 와 병수, 전 박사가 바람에 떠밀렸고, 급기야 근호는 오라 막 밖 으로 서서히 몸이 밀려 나갔다.

“잡아!”

박 신부의 외침에 병수와 전 박사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근호의 옷깃을 간신히 잡았으나 옷이 찌익 찢어지면서 근호의 몸이 오 라 막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순간 근호가 줄 끊어진 연처럼 허공을 날아갔다.

“아아악!”

근호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 소리는 바람 소리에 파묻혀서 거 의 들리지 않았다. 근호는 이삼십 미터나 허공을 날아가서 근처 큰 나무의 가지에 허리춤이 걸렸다. 와지끈 소리를 내며 가지가 부러지자 돌연 바람이 뚝 끊어졌고 근호의 몸은 축 늘어진 채 땅 에 철퍼덕 떨어져서 데굴데굴 굴렀다.

“근호!”

병수가 소리를 질렀고 전 박사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눈 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박 신부가 이를 악물고 머리카락마저 솟 구친 험상궂은 표정으로 외쳤다.

“또 온다!”

다시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쳐 남은 세 사람을 덮쳤다. 힘에 겨 웠는지 피로에 지쳤는지 박 신부의 몸이 뒤로 조금 휘청이자 병 수가 재빨리 박 신부의 등을 어깨로 받쳤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박 신부의 몸이 또다시 땅에 길게 홈을 파면서 뒤로 일 미터가량 밀려 나갔다. 그러고 나자 바람이 잠잠 해졌다. 병수가 눈까지 붉어진 얼굴로 악을 썼다.

“이건 환영이 아니잖아!”

“그래. 이건 환영이 아니네. 이건・・・・・・ 이것은…….”

박 신부는 눈을 부릅뜬 채 중얼거리다가 전 박사에게 벼락같이 소리쳤다.

“전 박사! 사실을 말하시오! 당신에게 여길 찾아 달라고 한 게 누구였소?”

전 박사가 몸을 덜덜 떨면서 부르짖었다.

“난・・・・・・ 나도 잘 몰라요! 난 그냥・・・・・・ 그냥 욕심이 나서………………”

“뭐? 누가 당신한테 시킨 거였소?”

“오억 원, 아니 오십만 달러를 준다고 했소! 정령의 왕이 한국 어딘가에 나타난다고・・・・・・ 정령의 왕이 나타나는 장소가 어딘지 찾으라고 말이오!”

전 박사가 덜덜 떨며 외치자 박 신부가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박사, 난 지금 그 일을 누가 시켰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외, 외국인이오. 영어를 썼지만 서툴렀고…………… 아랍 사람 같 아 보였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박 신부가 외쳤다.

“아랍인! 역시! 그렇다면 이 힘은 바람의 진?!”

“아랍인이 어쨌단 거요? 그리구 진이 또 뭐요?”

병수가 소리를 지르는데 다시 무서운 바람이 밀려왔다. 박 신 부는 또다시 머리칼을 솟구치며 혼신의 힘으로 그 바람을 막아 냈다. 그러나 이제는 박 신부도 많이 지친 듯 몸이 가늘게 떨렸 다. 병수도 박 신부의 몸을 받치고 전 박사까지 박 신부의 몸을 받쳤지만 몰아치는 바람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박 신부가 외쳤다.

“문! 보육원 문 쪽으로 나를 옮겨 주게! 어서!”

“뭐라구요?”

“어서!”

병수는 거의 기계적으로 박 신부의 몸을 덥석 안아 들었다. 박 신부의 덩치도 무척 큰 편이었지만, 타고난 거인인 병수가 안아 드니 박 신부의 덩치가 작아 보였다.

박 신부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면서 오라 막으 로 바람의 힘을 최대한 막아 내는 데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병수는 으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땅을 쿵쿵 울리며 냅다 달렸다.

엄청난 위력의 바람의 압력을 받고 있었지만 병수는 차력사에 다가 선천적인 역사(力)였다. 병수는 단단한 땅에 발이 푹푹 들어갈 만큼 바람에 짓눌리면서도 용케 쓰러지지 않고 보육원 문 앞까지 달려갔다.

문 앞에 다다르자 짓눌려 버릴 정도로 휘몰아치던 바람이 또 뚝 그치고 말았다.

“그쳤소!”

병수는 외치면서 박 신부를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그만 비틀 하면서 털썩 주저앉아 곧바로 뻗고 말았다. 잠깐 사이에 너무나 도 기운을 썼던 탓이었다.

박신부는 그런 병수는 잠시 내버려 두고 전 박사에게 외쳤다. 

“그들이 무엇을 찾으라 했소? 이 보육원의 위치는 그들이 말 한 거요?”

“아, 아니오. 그들은 다만, 다만…………….”

“어서 말하시오!”

박신부가 노한 얼굴로 호통을 치자 전 박사는 으흑 하고 흐느끼면서 말했다.

“아니오, 아냐……. 그들은 다만 영소 현상에 대해 설명해 주 면서 그런 징조가 일어나는 중심점을 찾으라고 했소. 그래서 조 사를 하다보니 유진 보육원이 나왔던 거요.”

“그런데 왜 병수가 근호를 데리고 온 거요?”

“난……… 나 혼자 여기 와 보려고 했소. 그러나 전에 본 것 같 은 환영이 덮쳐서 ………… 도대체 접근할 수가 없었소. 그래서 유명 한영능력자를 수소문해서 데리고 온 거요.”

박 신부는 이제야 수많은 의문이 거의 해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했다. 한 가지, 한가 지만 더 있다면!

“정령들의 왕……………. 그래, 정령들의 왕이 무어라고 했소? 사람 이오? 나무? 돌? 아니면 그 역시 정령이오? 그 존재의 정체가 뭔 지 당신은 모르오?”

“그, 그건 사람, 사람이오……………. 사람이라고 했소.”

“그랬군!”

박신부는 크게 소리쳤다. 너무나 큰 소리라서 누워 있던 병수가 눈을 번쩍 뜨고 전 박사가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였다.

“사람………! 틀림없이 아이일 거요! 당신, 솔직히 말하시오! 그 아이를 어쩌려고 했소!”

그러자 전 박사가 땅에 엎드려서 미친 듯이 소리를 쳤다. 

“내가 나쁜 놈이오! 내가 죽일 놈이오! 그 아이를 넘겨 달라고 했소! 그들은 그 아이를…………… 정령들의 왕이 된 그 아이를 데려 다 달라고 한거요.”

“뭐? 그럼 아이를 유괴하려고 한 거라구?”

병수가 벌떡 일어나며 금방이라도 전 박사를 후려갈길 듯 소 리를 쳤다. 그러자 전 박사는 살려 달라는 듯 손을 휘저으며 멱 따는 소리를 질렀다.

“아이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소! 보육원의 아 이면 고아고…………. 해외 입양을 보내는 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했 소! 정말이오! 나도 자식이 있는 사람이란 말이오!”

그러나 병수는 지지 않고 고함을 쳤다.

“제기랄! 인제 존칭 생략하것다! 넌 존대받을 자격이 없어! 난 말야. 둔하고 욕심이 많은 놈이지만 그래도 지킬 것하구 아닐 건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라구! 너는 인마, 박사라는 작자가 그런 것도 몰러! 뭐, 인마? 말이 좋다! 생판 모를 외국 놈들한테 아이 를 넘길려구 혀!”

씩씩거리며 병수가 전 박사를 한 대 치기라도 하듯 덤벼들려 는 순간, 또 바람이 휘몰아쳤다. 박 신부와 병수 등은 놀라서 다시 바람에 맞서려고 했으나 바람은 그들의 코앞에서 놀랍게도 방향을 바꾸어 양옆으로 갈라져 나갔다.

“이건 또 뭔 도깨비놀음인가!”

그때 박 신부가 고함을 쳤다. 거의 현암의 사자후를 연상하게 할 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연희 양!”

그러자 또 바람이 몰아쳐 왔다. 이번에는 비껴가는 바람이 아 니라 바로 박 신부를 노리고 몰려드는 바람이었다. 바람은 마치 칼날처럼, 아까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한 점으로 집중하여 몰 아쳤다.

박 신부는 소리를 지르던 참이라 오라 막을 강하게 굳히지 못 하고 그만 뒤로 밀려서 벽에 호되게 짓눌려 버렸다. 박 신부의 입에서 피가 가늘게 흐르기 시작했다. 병수가 놀라서 박 신부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자 박 신부가 힘을 주어 오라 막을 펼치면 서 외쳤다.

“연희 양! 들리나! 나는…………… 나는…………… 더 버티기 힘드네!” 

이층의 유리가 완전히 달아난 창문가로 머리가 마구 흐트러진 연희가 고개를 내밀며 외쳤다.

“신부님!”

“연희 양! 시간이 없네! 어서……………! 어서 수아를 데리고 나오게! 어서!”

연희는 그 와중에도 몹시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신부님! 수아……………? 수아라구요? 걘 아직 어린…”

그러나 박 신부는 단호하게 소리를 쳤다.

“어서!”

도무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병수는 앞을 보고 그만 까 무러칠 뻔했다. 그들 앞으로 거대한 회오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이 회오리는 시커멓고 거대하게,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땅에 있 는 모든 것들이 회오리에 휘말려 부서지고 한데 엉겨 형체를 이 룬 것이다.

믿어지지 않게도 회오리는 커다란 빌딩만 한 크기였다. 아무 리 박 신부가 초인적인 힘이 있어도 저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있 는 것이 아니었다. 저 회오리에 휩쓸리면 박 신부나 병수가 아니 라 보육원 건물 자체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회오리는 미친 듯 땅을 휩쓸며 몇 번을 꿈틀대다가 그들 앞으로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 엄청난 모습을 본 순간 전 박사는 정신을 잃고 까무러쳐 땅 에 쓰러져 버렸고 병수는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박 신부는 이를 악물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힘을 끌어모아 오 라 막을 치면서 무섭게 외쳤다.

“연희 양! 어서!!”

그 순간 연희가 소리를 지르면서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녀의 품에는 아직 예닐곱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조그마한 아이가 안 겨 있었다. 아이는 울고 있지 않았다. 몹시 큰 눈에는 겁을 먹었 다기보다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연희는 문을 빠져나오면서 거대한 회오리를 보고는 순간적으 로 아이를 감싸 안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틀림없이 다음 순간 몸이 회오리에 휩쓸릴 테고, 모든 것은 끝이었다. 그러나……………… 

“하부지! 오랜만!”

아이의 티 없이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박신 부와 병수와 연희와 보육원과 그 외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하던 회오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병수는 눈을 가리고 있다가 주위가 잠잠해지고 아무런 충격도 오지 않자 슬며시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매무새가 온통 헝클어지고 입가에 피까지 흘리고 있던 박 신부가 이내 그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까 연희가 데리고 나온 조그 마한 아이를 안아 올리는 광경이었다.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말아 올렸고 빨간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것도 모르 는 듯, 다만 박 신부를 만난 것이 몹시 반가운지 박 신부의 흰 머 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장난치면서 깔깔거릴 뿐이었다.

“하부지! 하부지! 왜 이렇게 안 왔었어! 헤헤헤.”

전 박사도 서서히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다가 그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연희도 당황스러움과 놀라움, 그리 고 안쓰러움이 한데 얽힌 눈으로 박 신부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 이었다. 그때 병수가 얼빠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요?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럼 …………… 그러면 저 애가・・・・・・ 정령들의 왕?”

박신부가 대답했다.

“정령들의 여왕일세. 수아는 여자아이니까 말일세.”

“제길!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병수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박 신부가 수아를 어깨에 달랑 올려놓더니 수아에게 속삭였다.

“수아, 할아버지 좋아하니?”

아이는 귀엽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수아는 할아버지 편이지? 할아버지 말 잘 들을거지?”

“응! 난 하부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될 거야!”

“그럼 잠깐만 언니에게 가 있어라.”

“응? 으응.”

수아는 의외로 선선히 연희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자 박신부는 맞은편의 어둠 속을 보며 영어로 외쳤다.

“이제 포기하시오. 당신들의 힘은 이제 통하지 않소.”

캄캄한 어둠 저편에서 흥 하는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소리가 난 반대쪽에서 뭔가가 휙 하고 박 신부를 향해 날아왔다.

연희 전 박사는 무엇이 날아든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 다. 그러나 날아든 물체는 박 신부를 맞히지 못하고 허공에서 쨍 소리를 내면서 튕겨 나왔다.

미동도 하지 않던 박 신부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용없소.”

그제야 연희는 뭔가가 날아왔다는 것을 알고 놀라며 그 물체 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끝이 둥글게 휘어진 괴상한 모양의 단검 같았는데, 단검이라기보다는 표창에 더 가까운 생김새였다.

또다시 어둠 속에서 몇 개의 단검이 날아왔지만 기이하게도 오라 막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단검들은 박 신부를 하나도 맞 히지 못하고 튕겨서 땅에 떨어졌다. 박 신부를 오래 보아 왔던 연희도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신부님・・・・・・ 이건……………”

“걱정할 것 없네. 아무 염려도 없으니까. 그렇지, 수아야?” 

“응?”

수아는 오히려 잘 모르겠다는 듯 큰 눈을 부리부리 굴리면서 박 신부를 바라보았다. 박 신부는 어둠 속으로 눈을 돌리면서 수아에게 말했다.

“저 안에 숨은 사람이 있네. 숨바꼭질하려는 모양인데, 수아가 잡아볼까?”

그러자 수아가 까르르 웃었다. 병수와 연희, 전 박사는 모두 박 신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서로 얼굴만 멀뚱거리며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헤헤! 재미있겠다! 그래그래!”

“그러면 수아가 나오세요, 해 보렴.”

“정말?”

“그럼!”

수아가 앵무새처럼 박 신부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나오세요!”

그 순간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캄캄한 숲과 덤불 속에 서 세 사람의 형체가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스스로 뛰어오른 것이 아니었다. 마치 공중으로 집어 던져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은 박 신부의 앞으로 나가떨어져 한동 안이나 신음성을 울리면서 뒹굴었다.

“잘했다. 수아야 잘했어.”

박 신부는 껄껄 웃으며 연희에게 손짓을 해서 수아를 데리고 들어가게 했다. 도무지 이것이 무슨 도깨비장난인지 알 수가 없 는 판이었다. 연희는 너무도 기이하고 궁금하여 문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유치원 보모에게 급히 수아를 맡기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박 신부는 병수 등을 시켜서 세 사람이 가진 무기를 모조리 뒤져내고는 그들을 꽁꽁 묶어 두고 있었다.

“신부님・・・・・・ 이게 도대체…?”

“나중에 내 설명을 해 줌세. 그러나 먼저 근호 군을 데려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전 박사가 나섰다.

“내가 데려오겠소. 내 책임이 크니까.”

전 박사가 중얼중얼하면서 근호가 떨어진 숲 쪽으로 가자 박 신부가 연희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 통역을 좀 해 줄 수 있겠나, 연희 양? 아마도 아랍사람들인 모양인데.’

“잠깐만, 잠깐만요, 신부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우선 알 고 싶어요. 예? 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연희가 발을 동동 구르자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알아 두는 것이 더 좋겠지. 내가 아까 말했지? 누가 따 라오는 것 같다고. 그리고 전 박사를 누군가가 사주한 것이 분명 하고, 그 목적은 전 박사 말대로 정령들의 왕, 실제로는 정령들 의 여왕이었네만, 아무튼 그것에 있는 것 같다고 말야.”

“그건 알아요. 그런데 도대체 그 엄청난 바람은 뭐며, 왜 그 바 람이 수아가 나타나니까 잠잠해진 거죠?”

“사실 나도 그 바람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네. 현암 군이었다면 모르겠네만, 그건 악신의 힘이나 주술적인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그건 정령의 힘, 그러니까 진의 힘이었다고 나는 보았다

“네.”

“진이요?”

“진이 뭐야? 청바지인가?”

병수가 투덜거리자 박 신부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진은 아랍에서 오래전부터 믿어 온 정령이라네. 보통 램프의 지니로도 알려졌지. 유명한 것 아닌가? 그 지니도 일종의 진이라 네.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도깨비 정도 되는 존재라 보면 되겠지. 솔직히 나도 자세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 못하네. 얄팍한 지식이 지.”

“그래요? 하지만…………… 신부님은 그럼 그런 얄팍한 지식을 믿 고 목숨을 거신 건가요?”

연희가 농담을 하자 박 신부가 우물쭈물했다. 사실 연희는 박 신부가 세계 각지의 믿음과 신앙, 전설 등에 대해 무척이나 폭넓 은 지식을 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허허, 원참.”

“아무튼 그런데요? 그래서요?”

이제는 연희뿐만이 아니라 병수도 박 신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나도 확신할 순 없었지만, 전 박사가 자신을 사주한 사람들이 아랍인이라 말했을 때 그 생각을 했다네. 보게나. 정령의 힘을 빌려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정령들의 왕을 찾으러 여 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네. 그런데 아랍 사람으로 정령의 힘을 빌 려 쓴다면 진의 힘을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얄팍한 지식 이라도 그 정도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지.

나에게 닥친 그 바람은 바람의 진에 의한 것일 텐데, 그 힘은 악령이나 그런 종류의 힘이 아니라서 솔직히 나로서는 상대하기 힘들었네. 그런데 아까 병수, 자네도 보았겠지만 그 바람이 우리 에겐 그야말로 인정사정없이 몰아치면서도 보육원 안에까지는 피해를 별로 주지 않았네. 만약 그 정도의 바람이 보육원에 몰아 쳤으면 건물이 남아나질 않았을 걸세. 더구나 그 바람은 몇 번이 나 간격을 두고 쉬엄쉬엄 방법을 바꾸면서 불어왔네. 마치 정확 히 조준을 해서 이 보육원에는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 럼 말일세.”

연희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까 그 바람은 정령인 진의 힘이었는데, 그들의 왕이 보육원 안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피해를 주지 않을 거라고 보신 건가 요? 맞나요?”

“그랬지. 실제로도 그럴 거라고 나는 믿네. 그것을 보고 나는 보육원 안에 정령들의 왕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지. 솔직히 나 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정령들의 왕이 사람인지 동물인지, 아니면 무슨 물건이나 같은 정령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말일세.”

“으음. 그래서 수아를 불러내고 나니 바람이 그쳐 버린 거군요.”

“그렇지. 더구나 나는 수아를 불러낸 다음 수아에게 말을 시 켜서 내가 수아 편이라는 것을 정령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었네. 그러면 당연히 정령들, 즉 지금 묶여 있는 저자들이 불러낸 진은 수아의 말을 더 따를 거라 믿었던 걸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죠? 저자들도 강한 주술로 진의 힘을 빌려 쓰는 것 아니겠어요?”

“글쎄. 만약 수아의 힘이 그들의 주술을 누를 정도로 강한 것 이 아니라면 그자들이 굳이 수아를 데리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 았겠지? 안 그런가?”

“그런데 말입니다.”

병수가 원래의 퉁명스러운 말투를 버리고 조금 나긋나긋해진 말투로 박 신부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경탄한 나머지 이제 박신 부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정령들의 환영은 물리력이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근데 아까 바람은 뭐고 왜 이자들이 나가떨어진 겁니까?”

“그건 말일세. 정령들의 특징에 좌우된다고 나는 생각하네. 우 리가 겪은 환영은 아마 수아와 원래부터 알고 있고 수아를 받들 던 우리나라의 정령들일 걸세. 원래 도깨비 이야기가 그렇듯 우리나라의 정령들은 사람들과 친숙하고, 또 그다지 파괴적인 존재들이 아닐세. 물론 아랍의 진이 난폭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 금 우리가 맞닥뜨린 진들은 이자들의 주술로 부림을 당하고 있 던 존재들이네. 그래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러면.”

“정령은 인간과는 다르지만, 분명 대단히 영리한 존재일세. 모 두가 그런 것은 아니나, 정령들의 세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들 중 몇몇은 어쩌면 사람 이상일지도 몰라. 정령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네. 전 박사가 그다지 좋지 않은 목적으로 오고 있다는 것도 말일세. 그래서 정령들은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힘을 발휘 해서 자네들에게 환영을 부리고 홀려서 못 오게 하려고 한 걸세. 나로 변장하여 환영을 보이게 하고 대화까지 했지 않은가?

그리고 이자들에게 속박되어 바람을 일으킨 정령들도 아마 내 심으로는 이자들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을 것이라 믿네. 그래 서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보기 좋게 이들을 배신한 거겠지. 이자들이 던진 단검을 막고 이자들을 잡아 팽개친 것도 이자들 이 데려온 진들의 힘이라는 걸세.

우리가 알고 있는 아라비안나이트』나 그쪽의 전설을 생각해 보게. 거기 나오는 램프의 지니나 정령은 결코 바보 같은 존재가 아닐세. 마법 램프를 지닌 알라딘도 그릇된 명령을 내리면 진이 오히려 명령을 거부한 적이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그리고 아랍 신화에서는 진이 일종의 양날의 검 같은 존재로 등장하네. 즉 선량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더없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사리 사욕을 채우거나 악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오히려 사용하는 자 에게 징벌을 가하는 존재란 말일세.”

“같은 정령인데 어쩜 그렇게 다를까요?”

연희가 약간은 감상적이 되어 말하자 박 신부가 고개를 갸웃 하면서 말했다.

“사실 어쩌면 정령들도 인간의 믿음에 따라 그 힘을 다르게 보 여 주는지도 모르네. 우리나라의 도깨비를 정령으로 본다면, 우 리나라 사람들의 다소 순박한 마음을 받아들여서 물리적인 힘을 잘 쓰지 않게 되었고 아랍의 진들은 그들을 전지전능한 반신적 인 존재로 믿기 때문에 강력한 물리력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 른다고 여기네만. 허허. 뭐,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다는 이야기 는 아닐세. 자화자찬도 아니고, 내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네.” 연희는 감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연희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흐음. 다 이해가 되는데요. 박 신부님, 가장 중요한 것이 아 직 남아 있어요. 보육원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신부님은 어떻게 들어가보지도 않고 수아가 정령들의 여왕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신 거죠? 아니, 신부님이야말로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알 고 계신 것 아니었나요?”

박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전혀 그런 짐작을 하지 못 했어. 연희 양, 나는 그간 거의 실종 상태로 있었으니 연희 양이 야말로 수아를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지켜보았을 걸세. 그런데 수 아가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거나 모종의 힘을 발휘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

그 말에 연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절대로요.”

“그렇지. 나도 마찬가지일세. 나도 수아를 보통 아이들과 같다 고 그동안 생각해 왔어. 그런데 막상 이번 일을 돌이켜 보니 중 요한 단서 두 가지가 있었던 걸세.”

“그게 뭐죠?”

“첫째, 전 박사 일행을 따돌리려고 나타난 정령들이 나를 흉 내 냈다는 걸세. 그리고 두 번째는 수아의 출생 때문일세. 수아 는 내가 이 보육원에 맡긴 아이일세. 그래서 다른 아이들보다도 나를 잘 기억하고 잘 따랐지. 그러니 수아 근처의 정령들도 그런 사실을 보았을지 모르네. 그리고 정령들의 눈은 속일 수 없으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도 알고 그러했을 걸세.”

“그런데 왜 수아나 저나 신부님이나 저희 주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몰랐죠?”

“정령들이 현명하기 때문이지. 그들이 수아를 받들 뿐, 수아가 특별한 힘을 지니지는 않았다고 나는 믿네. 하지만 분명 수아 는 정령들의 여왕일세. 그러면 정령들이 인간인 수아를 가장 행 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나? 그것은 정령들 스스로가 가급적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살게 두는 것이네. 적어 도 정령들은 그렇게 생각한 거겠지.

그래서 정령들은 수아나 연희 양이나 기타 수아의 주변에는 되도록 영향을 주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 분명하네. 나도 잘은 모 르지만, 정령은 자연적인 존재 같네. 대자연 속에 녹아 있는 존 재라는 걸세. 그렇다면 그들의 지혜는 대자연의 지혜 같은 것이 겠지.”

박 신부는 긴 이야기를 마치고 몇 번 심호흡을 한 다음 연희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이 사람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으니 통역을 좀 부탁 함세.”

연희는 묶인 채 쓰러진 자들에게 두어 가지 말로 말을 걸어 보 았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중 한 명이 말을 알아듣 고 반응을 보이는 것을 연희는 놓치지 않았다. 박 신부도 그걸 눈치채고 그 사람만을 따로 끌고 가고 다른 자들은 저만치에서 병수가 감시하게 한 다음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 양, 그 사람 얼굴을 똑바로 보고 이야기해 봐요.”

“예?”

“어서.”

연희는 조금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 다보며 박 신부의 질문을 번역하여 묻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어디에 속한 사람들이죠?”

“우리는……… 우리는 진・・・・・・ 을 숭배하는………… 검은지하……”

“검은 지하드? 들어보신 적 있나요?”

연희가 박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자 박 신부가 말했다.

“지하드는 아랍인들이 성전(聖戰)을 일컫는 말이지. 그러나 검은 지하드라니, 나도 처음 듣는 말일세. 하여간 계속하세.” 

“예.”

연희는 다시 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의외로 남자 는 순순히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당신들의 목적은?”

“세상의 정화…………. 그러나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게 세 상을 정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검은 지하드의 목적이고 우 리의 사는 목표…….”

“어떻게 정화한다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힘을………… 한데 이끌어 내서 잘못된 문명을 바 로잡는 일………. 그것이 ………… 그것이…………”

남자는 말을 하면서도 몹시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식은땀을 흘리고 얼굴이 창백해져서 떠듬떠듬 말을 하면서도, 기이하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술술 아는 바를 털어놓았다.

박 신부의 질문은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계속 쏟아졌다. 그 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연희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검은 지하드 혼자의 힘만으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보나?” 

“우리는・・・・・・ 우리는 큰 세력과 손을 잡고 있다. 아주 크고 아 주 거대하고…………… 아주 뿌리 깊은…………. 우리는 세상을 정화한 다. 세상을 바꾸고야 만다…………….”

“어떤 세력인가? 성당 기사단과도 관련이 있는가?”

“성당 기사단・・・・・・ 그건 작은 일부분……………”

연희는 아무래도 남자가 술술 입을 여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 다. 이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순간 과거에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홍수 사건 때 백호와 이야기하면서 백호는 연희가 쳐다보는 앞에서는 속마음을 감출 수 없었노라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힘이었단 말인가? 그 때문에 이 남자도 비밀을 술술 털어놓고 있는 것인가?

연희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돌연 남자의 얼굴빛이 정상으로 돌아오더니 단호한 표정이 되었다.

“마녀! 너는 마녀야!”

남자가 거칠게 소리치자 연희는 깜짝 놀라 다시 남자의 얼굴 을 들여다보았으나 남자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이었다.

“어?”

그때 박 신부가 혀를 차면서 연희에게 말했다.

“됐네. 아깝군.”

“도대체 왜…..?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연희 양,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연희 양에게는 신비한 힘 이 생겼다네. 진실을 밝히는 힘이라고 할까? 나는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지. 그러나 그런 사실을 연희 양이 인식하게 되면 그 힘은 사라져 버리네. 알겠나?”

“어머나, 그러면 어떻게 하죠? 나 때문에 중요한 것을 알아내 지 못하게 된 건 아닌가요?”

연희가 당황스럽고 부끄럽기도 하여 몸 둘 바를 모르자 박 신 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할 수 없는 일인걸. 그나마 여기까지 알아낸 것이 어딘가?”

“이 사람들을 어디 가두고 또 물어보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박신부는 연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야 있겠나? 우린 경찰도 아니고 군대도 아닌데 이들을 포로로 잡아둘 수야 없지.”

“하지만 그냥 풀어 주면 또 수아에게 올지도 모르잖아요?”

“글쎄. 난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하네.”

“어째서요?”

“이 사람들이 왜 전 박사를 시켜서 수아에게 접근하려 했겠는 가? 이 사람들이 전 박사에게 영소 현상의 근원지를 가르쳐 주었 다고는 하지만, 그런 지식을 다 갖고 있었다면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여 직접 찾는 편이 훨씬 빨랐을 것 아닌가? 그런데 굳이 전 박사에게 거금을 주면서 일을 시킨 것은 이유가 있겠지.” 

“어떤 이유죠?”

“이 사람들 능력의 근원은 정령의 힘일세. 그리고 정령들의 여 왕인 수아, 정확히는 수아를 받드는 정령들이 그들을 거부하고 있었네 추측이기는 하지만, 이자들은 이미 몇 번이나 시도를 해 보고 안 되니까 전 박사를 사주하여 수아를 데리고 나오려 했던 것은 아닐까. 전 박사는 평범한 사람이니, 정령들이 거부하지 않 을지도 모른다고 여겼겠지.”

박신부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군. 전 박사와 근호 군은 왜 안 오는 걸까?” 

그때 저쪽에서 기이한 느낌이 박 신부에게 전해져 왔다. 그 느 낌은 마음속으로 울리는 대화법으로 박 신부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을 듣기에 앞서서 박 신부는 갑자기 몸을 부 르르 떨었다. 그 느낌은 그렇게까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많이 느꼈던 느낌. 그랬다. 그 느낌은 과거 퇴마사들의 가장 강 력한 적수였던 마스터의 느낌과 아주 흡사했다.

“너는 누구냐!”

박신부가 버럭 고함을 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연희가 놀라서 박 신부를 쳐다보며 물었다.

“뭐죠? 누가 또 있나요?”

연희의 말에 박 신부가 이를 악물고 짧게 대답했다.

“아직 더 있었나 보네. 그러나 이자의 느낌은………… 마치……………”

박신부는 하려던 말을 급히 멈추고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 양, 수아를 보살피게. 어서!”

연희가 급히 달려 보육원 안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의 아랍인 을 일으키던 병수가 박 신부의 옆으로 달려왔다.

“뭡니까? 네?”

그때 숲 저편에서 한 사람의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 남자는 키가 제법 컸으나 비쩍 마른 몸이었는데 한 손에는 정신 을 잃은 근호를 들고 있었고 한 손에는 전 박사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을 마치 헝겊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가볍게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퍽이나 황당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다소 검은 얼굴에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길렀으며 눈이 컸다. 나이는 젊어 삼십대 중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 자는 박 신부를 보고는 싱긋 악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근호와 전 박사를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박신 부를 향해 강한 억양으로 무어라고 말했지만, 박 신부는 무슨 말을 하는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하는 겁니까?”

병수가 묻자 박 신부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네.”

박 신부도 의아하여 영어로도 말해 보고 기타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말을 해 보았으나 그 남자와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옷차림이나 생김새를 보아서는 인도인 같은데, 영어를 모르 다니.”

“싸우자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남자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보이면서 땅에 쓰러진 근호와 전 박사를 가리켜 보이며 손을 저어 보였다.

“데리고 가라는 것 같군.”

박 신부의 말에 병수가 냉큼 걸어 나갔다. 병수가 근호 앞에 서서 그 사람의 표정을 보아도 그 사람은 여전히 싱글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병수가 살펴보니 근호는 아까 나무에 걸린 때문인 지 상처가 조금 심했지만 호흡은 정상이었고, 전 박사는 그리 상 처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병수는 박 신부에게 둘 다 괜찮다는 손짓을 해 보인 후 근호와 전 박사를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틈에 왔는지 그 남자가 병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뭐여?”

남자가 박 신부 쪽을 가리키며 뭐라 뭐라 말했다. 하지만 병수 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병수는 그냥 눈을 부라리며 옆 으로 몇 걸음 비켜서서 돌아가려 했으나 그 남자가 다시 병수 앞 을 막았다. 그러면서 계속 뭐라고 중얼거렸다. 답답해진 병수는 그냥 그 남자를 밀어내고 걸어가려 했다.

“안 비키면 다쳐 알아서 해.”

병수가 말하면서 그 남자의 몸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그 남자 는 땅에 뿌리를 박고 내린 것처럼 똑바로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 다. 마치 담벼락이나 아름드리 나무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놀란 병수는 더 힘을 주어 남자를 밀어내 보았지만 남자는 여 전히 중얼중얼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병수는 견디다 못해 꾀를 내어 남자를 밀어내는 척하면서 옆으로 슬쩍 돌아 빠져나 오려고 했다. 남자는 마치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옆으로 한 걸음씩 옮겼고 그때마다 병수는 앞이 가로막혀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나 좀 도와주!”

병수는 울상이 되었다. 그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도 박 신부 역 시 남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던 까닭에 긴장하고 있 었다. 다만 남자의 태도가 그렇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 에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박 신부는 아까 부상을 입어 제대로 힘을 내기도 어려울 것 같았고, 남자가 또 뭐라고 이야기하려는 듯 중얼거리자 결국 박 신부는 연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나온 연희에게 박 신부는 통역을 부탁했다. 그러나 연 희는 남자의 말을 몇 마디 들어 보고 얼굴빛을 흐렸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상한 말을 쓰나?”

“인도 말이긴 한데…………… 사투리가 너무 심해요. 인도도 워낙 넓은 나라라서 방언이 심해요. 대강 알아듣기는 하겠지만, 정확 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양해 바랍니다.”

“조금이라도 알아듣는 게 어딘가. 그러니 염려 말고 통역해 주 게.”

연희는 남자의 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또 몇 가지 반문 을 하기도 하는 것이 평소와는 달리 상당히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윽고 연희가 박 신부에게 말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카르나, 인도에서 왔대요.”

“바라는 게 뭐라고 하는가?”

“저 세 사람을 자신에게 넘겨 달라는 것 같아요.”

“그러면 저 사람도 한패인가?”

박신부가 인상을 쓰자 다시 연희가 카르나와 몇 마디를 나눈 다음 말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자신이 처리하는 편이 모두를 위해 좋지 않겠느냐고 하네요.”

“그러면 우리를 돕겠다는 건가?”

“글쎄요.”

연희는 한참 더 카르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했다.

“각자의 길은 다른 거래요. 신부님, 이제 좀 알아들을 것 같으 니 그대로 직역을 해 드리죠. 직접 물어보세요.”

연희는 전문 통역사답게 가급적이면 중간에 자신이 끼지 않고 두 사람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애 썼다.

박신부는 내심 궁금했던 점을 연희를 통해 카르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여기 왜 온 거요?”

“정령의 왕을 지키기 위해 왔소. 정령의 힘이 악용되지 않도 록 “

“이 아랍 사람들 말고 당신도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단 말이오?”

“알고 있던 것은 아니오. 나는 이자들을 추적하고 있었소. 이

자들이 꾸미는 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오.”

“그건 당신 개인적인 일이오. 아니면 당신이 속한 단체나 교파가 있소?”

“교파의 일이오.”

“어느 교파입니까?”

“그건 말할 수 없소.”

“이자들이 바라는 것은 뭐요?”

“이자들은 검은 지하드라는 단체에 속한 자들이오. 세상을 뒤집어엎으려는 자들이지. 한마디로 미친 자들이오.”

“그러면 당신, 아니 당신의 교파가 바라는 일은?”

“세상을 운명대로 흐르게 하는 것.”

연희는 이쯤 하자 카르나가 그다지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 신부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눈 을 빛내면서 더욱 강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의 교파는 힌두교 일파요?”

“그렇소. 그런데 그런 것은 자꾸 묻지 마시오. 나는 비밀리에 행동하는 중이니까. 이자들을 내게 넘겨주겠소. 넘겨주지 않겠 소?”

“넘겨주면 어떻게 할 거요?”

“두 번 다시 귀찮게 굴지 않도록 해 주겠소. 당신들도 그걸 바 랄 것 아니오? 공연히 크게 소문이 나는 것을 원치 않겠지? 저 아이를 위해서나, 당신들 자신을 위해서나 말이오.”

“그럼 ・・・・・・ 설마 해친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왜 산 사람의 목숨을 해치겠소. 절대 목숨을 빼앗지 않을 거 요. 염려 마시오.”

그 말을 듣고 보니 연희 생각에도 그 편이 낫지 않나 싶었다. 지금 이 사람들을 처리하려면 또 한 번 백호의 힘을 빌려야 할텐데, 자꾸 일이 생긴다면 퇴마사들의 생존이 외부에 알려질 우려가 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사람이 귀찮은 짐을 떠맡아 주겠 다고 하니 다행 아니겠는가?

그러나 박 신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정체를 모르고, 당신은 이름만 밝혔을 뿐 교파도 밝히지 않았소. 더구나 당신이 저들을 데려다가 무엇을 할 것인 지도 나는 모르오. 아무래도 안 되겠소.”

“이해가 안 되는군. 귀찮은 짐을 치워 준다는데 왜 안 된다는 거요?”

그 말에 박 신부가 냉랭하게 되받았다.

“저 사람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오.”

그러고 보니 묶여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이 납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들은 조금 아까 박 신부에게 잡혔어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었는데 저 인도 남자가 출현하자 비록 말은 하지 않았 지만 삽시간에 얼굴빛이 질린 것이다.

연희와 병수가 그것을 보고 놀라는 순간, 카르나는 씨익 미소 를 지으면서 오른손을 살짝 뻗었다. 그러나 박 신부가 재빨리 몸 을 날려 그의 손 앞을 막아섰다. 연희와 병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박 신부가 왜 그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카르나와 박 신부는 둘 다 그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세…………….”

“물러서게!”

연희가 말을 걸려 하자 박 신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버럭 내뱉었다. 그때서야 연희는 박 신부와 카르나가 보이지 않는 모 종의 힘으로 이미 겨루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 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떤 힘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으며 두 사람의 몸이 조금이나마 맞닿은 것도 아니었다. 연희는 이해 가 되지 않아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박 신부의 얼굴을 걱정스러 운듯 살폈다.

박신부는 몹시 긴장했다. 카르나는 자신의 힘을 쓰는 것이 아 니었다. 카르나의 소매 속에 들어 있는 무엇인가가 뛰쳐나오려 고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박 신부도 볼 수 없었지만 아주 음산하고 위험한 것 같았다. 악령과도 같았고 정령과도 흡 사한 기운, 일단 보이지 않는 그것이 나와서 날뛰는 날이면 박 신부도 막아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박 신부는 자신의 기도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카르 나의 소매 속에서 그것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었다. 박 신부의 이마에서는 순식간에 땀이 솟아 안경테를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카르나도 놀랐는지 안색에 긴장된 빛을 띠었 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연희와 병수도 덩달아 바짝 긴장했다.

둘의 힘이 접촉한 순간 박 신부는 카르나에게 직접 마음속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먼저 마음을 전해 온 것은 카르나였고 박 신부는 즉각 카르나에게 대답했다. 가급적 힘을 쓰지 않고 일이 해결되기를 박 신부는 바랐기 때문이다.

놀랍군요. 동방의 끝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줄이야.

당신, 왜 이러는 거요?

당신이야말로 왜 이러죠? 당신도 검은 지하드와 마찬가지인가요?

무슨 소리요?

당신도 저 아이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것 아닌가요? 저 아이의 힘을 탐내나요?

박 신부는 너무도 기가 막혀 웃었다.

나도 저 아이가 정령들의 여왕이라는 건 오늘 처음 알았소.

그러면 왜 날 막는 거죠? 당신은 저 아이 편이 맞나요?

그렇소.

정말인가요?

정말이오.

이봐요, 난 당신이나 여자나 아이들을 해칠 생각이 없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기를 쓰는 거죠? 난 단지 당신들의 적을 제거해 주려 할 뿐 인데, 당신이 적을 살려 주려고 이리도 애를 쓰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 는군요. 싸구려 휴머니즘인가요?

당신이 원하는 건 저들을 모두 죽이는 것 말고 또 있지 않소?

박신부가 재빨리 반박하자 카르나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

당신이 불러내려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오만, 수아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거요.

그러자 카르나가 대들 듯 마음속으로 외쳤다.

난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저 아이를 그 아이의 운명에서 구해주려는 것일 뿐…….

저 아이를 어떻게 구한다는 거요?

검은 지하드가 주목할 때부터 나는 저 아이를 살펴보았어요. 저 아이 는 정령들이 받드는 존재죠. 그러나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요. 다만 아 이는 그 자체로는 아무 능력도 없는 평범한 아이라는 것을 확인했죠.

그래서?

지금 저 아이는 보통의 아이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할 거예요. 그러려면 우선 저 세 악당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저 아 이를 그런 기이한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그런다는 거요?

내가 불러내려는 것은 나가(Naga)입니다. 나가는 정령과 극성(極 性)이죠. 나가가 그 아이의 주변을 보호하면서 정령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겁니다. 정말이에요. 저 세 악당을 벌주려는 것은 맞지만 아 이를 해칠 생각은 절대 없어요.

저 셋을 어떻게 벌주려는 거요? 죽이겠다는 거요?

악당이어도 인간의 목숨을 함부로 할 생각은 없어요. 저들은 다만 충격을 받고 한동안 제정신을 못 차릴 겁니다. 나가가 몸속으로 들어가면 능력도 부릴 수 없게 될 테고.

저들을 저지하려고 했다면 왜 진작에 하지 않았소?

저들은 보통이 아니에요! 지금 당신은 부상까지 입고도 나를 꼼짝 못 하게 하고 있는데, 그런 당신조차도 아까 아이의 도움을 안 받았으면 위 험했을 것 아니에요? 저들을 잡는 데는 정령의 힘을 잃은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단 말이에요!

카르나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다시 생각을 전해 왔다.

우리 이럴 필요가 있나요? 이야기나 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좋소.

박 신부는 즉각 카르나에게 가하고 있던 힘을 반의 반 정도로 줄였다. 그러자 카르나도 힘을 그 정도로 줄이는 것 같았다. 그 렇게 서너 번을 하고 나자 박 신부와 카르나 사이에는 둘이 대화 하기 위한 힘의 팽창만 있을 뿐 긴장감은 없었다.

당신은 누구지요? 가톨릭계의 힘인 것 같은데. 어느 파에 속하는 사람인가요?

나는 그런 것 없소. 파문당한 신세요.

흠, 능력자들에겐 흔히 있는 일이지요.

그러는 당신은 누구요? 혹시 칼키파의 사람이 아니오?

그 말을 듣자 카르나의 웃는 얼굴이 갑자기 긴장으로 딱딱하 게 굳었다. 그리고 타는 듯한 눈빛으로 박 신부를 노려보더니 오싹할 정도로 싸늘한 기운을 전해 왔다.

내 앞에서…………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시오. 이교도이니 한 번은 봐주겠지만, 한 번 더 부르면 벌을 내리겠어요.

원한다면, 자, 그렇다면 당신들은 그분을 뭐라 부르오?

‘임하실 분’이라 칭해요.

당신네들이 바라는 게 도대체 뭐요? 임하실 분을 받들어 세상을 끝 장내겠다는 거요? 나는 검은 지하드보다 당신네들이야말로 정말 위험 하다고 여기는데.

아아. 생각이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조금 있으면 세상은 끝 나요.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요? 우리가 바라는 것은 바로 그런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자는 것뿐이에요. 모든 살아 있고 존재하는 것은 언젠 가는 죽거나 존재가 없어지고 말지요. 인간 세상도 예외가 아니에요. 지 금이 왜 말세겠어요? 인간 세상의 수명이 다한 겁니다.

그리고 임하실 분은 그렇게 인간 세상에 죽음을 내리러 오시는 분이 에요. 결코 단순한 공포나 파괴의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한 생명의 삶과 죽음과 마찬가지 면모가 있는 거예요. 알고 계시지요?

생명은 스스로 죽음을 만들었어요. 원생동물일 때는 그대로 복제가 되니 영원히 자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죠. 그러나 생물은 다른 것으 로 변하기 위해, 보다 진보하기 위해 성을 나눴고 개체의 죽음을 받아들 였어요. 그건 스스로 택한 거라고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의 세상을 보세요. 세상은 인간만이 주인이 아니지요. 그러나 인간은 자신들만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설치고 그릇된 길을 걸어 왔어요. 인간이 우주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 때문에 인간 세상에는 종말이 필연적인 겁니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가 죽 음을 맞든지 하여 다른 존재로 바뀌어야 하는, 그런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의 멸망을 바란다는 거요? 벌을 내리라는 뜻이오? 들어 보세요. 우리는 세상을 파괴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세상 을 굳이 지키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임하실 분이 그렇게 인간들에게 비참한 공포와 대파괴로 세상을 멸하시리라고는 우리도 믿지 않아요. 모든 게 순리대로 될 겁니다. 오히려 파괴와 혼란이 일어난다면 그로 인해 인간들이 일으키는 헛수고와 안간힘과 공포와 히스테리가 훨씬 더 큰 원인일 겁니다. 우린 그걸 막으려는 겁니다. 검은 지하드 같은 자들 은 알려지지 않은 인간의 힘을 끌어모아서 세상을 뒤엎으려는 자들이에 요. 즉 평온하게 죽을 사람의 집에 들어가 기운 잃은 그 사람을 때려눕 히고 집을 터는 자들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아까 누누이 말했듯 운명대로, 있는 그대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 우리 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인간이라 해서 인간의 편만 들어선 곤란해요. 이 건 대자연, 대우주, 운명 전체에 대한 공평성의 문제입니다.

우린 인간이고, 인간의 편을 들어야 하오.

그러나………………

내 이야기를 들어 보시오.

한참을 듣고 있던 박 신부는 물 흐르듯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시작했다.

당신의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볼 때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너무나도 달관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소. 우리는 인간이며, 인간인 이상 다른 존 재보다 같은 인간을 위하게 되는 것이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오. 공 평성이니 하는 생각 또한 인간의 논리와 사변에서 나온 것 아니겠소? 또 하나 당신에게 묻겠소. 인간 세상에 그릇된 점이 많고 인간들의 잘못 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은 나도 인정하오. 그러나 죽기 직전인 자라 해도 죽기 싫어하고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심정인 것처럼, 종 말을 맞이하는 인간 세상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안락사시키듯 하는 것만이 자연스러운 일이란 거요? 당신은 죽음이 생명체 스스로가 받아 들인 것이라 말했지요? 하지만 그 죽음은 후손이 이어짐을 전제로 한 거요. 그러나 인간 세상의 멸망이라 함은 인간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의 미하지 않소? 이것이 어찌 비교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거요?

나는 교단에서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지도 않아 당신과의 말싸움에 서 이길 수 없군요. 그러나 당신은 자신의 논리를 그럴듯하게 합리화를 시키려 하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를 믿으시오.

그러나 이제 박 신부는 상당히 여유로운 말투로 변했다. 알아 낼 것은 다 알아냈다는 듯이.

그리고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아니 당신의 교단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또 있소. 당신, 타르미 마을을 아시오?

박신부의 말에 카르나는 갑자기 잠잠해졌다.

타르미 마을에 대해 물었소. 정체불명의 대화재로 마을 사람이 몰살 당하고 조사대, 구조대마저도 전멸한 산간 마을. 화산 폭발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는 그게 아니었지. 당신도 알고 있었소?

박신부가 다그치자 카르나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그건 사고였소. 당신은 어떻게 알았지요?

어떤 사고기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요? 왜 산 자들이 죽고 죽은 자들이 걷기 시작한 거요?

그건・・・・・・ 당신은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죠?

박신부의 말에 카르나는 할 말을 잃은 듯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박 신부가 말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그렇군. 로파무드의 편지가 없었다면 나도 모를 뻔했지만.

로파무드? 그게 누구지?

당신들의 음모를 알아차린 여자요. 인도의 타미르 마을에서 일어난 대화재. 그리고 거기서 나타난 부타(Bhuta)*들!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니라 생각되지만, 당신도 알고 있었던 것 같군그래.


*죽은 영혼을 상징하는 말. 부타나 칸카라는 힌두교에서 모두 가나(시바의 추종 자로 죽음과 연관이 있는 존재)이며 부타는 하급의 좀비와도 흡사한 존재이다.


박신부가 말하자 카르나의 안색이 점점 변해 갔다.

로파무드는 거기서 당신들과 맞서 싸웠던 여자요. 그리고 그녀는 나 의 편이오, 카르나, 나는 당신들에 대해 잘 알고 있소. 당신은 알고 있 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당신 교단의 숨은 속셈을 나는 짐작할 수 있소. 그러나 당신 스스로 말해 보시오. 당신은 알고 있었소?

그만하시오!

내가 대신 말해 줄까? 임하실 분은 말세에 나타난다는 비슈누의 열 번째 아바타라 칼키요! 온 세상을 파괴하여 암흑의 혼돈으로 되돌아가 게 한다는 존재. 그런데 당신들은 그를 받들고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 을 방조하오. 무엇을 바라고?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타르미 마을의 사 건을 듣고 나는 짐작했소. 당신들의 교단은 종말 이후의 세상에 대비하 려는 거요. 죽지 않는 존재가 되려는 것. 영원한 존재가 되어 텅 빈 세 상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 그것이 당신들의 진정한 속뜻이오. 그렇지 않소?

닥치시오! 근거도 없이 중상모략을…………!

중상모략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타르미 마을의 사건은 뭐요? 아니, 그와 비슷비슷한 사건들이 인도 전역에서 빈번하게 일어났소. 수많은 사람들이 마을에서 죽었고 단 한 명도 살아 나오지 못했으며 누구도 그 들에 대한 이야기조차 듣지 못했소. 그들은 모두 예외 없이 불이나 대 파괴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 기이하게도 당신들의 교파를 숭배하던 마 을이 대부분을 차지했소. 그래서 당신들은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 그것은 분명 당신들이 의도한 거요.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나는 모르지만 로파무드는 알고 있소! 말을 돌리지 마시오! 그들은 단지 실험 재료가 아니오? 죽음 이후에 소생하려는 음모를 지닌 단체에 의한 실험동물! 그러기에 당신들은 그 종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척할 수 있었소. 그러나 실상은 당신들이 비난하는 검은 지하드보다도 훨씬 더 흉악한 짓을 하는 그런…………!

닥치시오! 그들은 모두 스스로 원해서, 제발 자신을 그렇게 해 달라고 간청했소!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랬을 테지. 그러나 그들이 영생을 얻었소? 당 신들은 죽음을 이기는 법을 완벽하게 익혔소? 영생을 희망했던 그들은 지금 뭐가 되었소? 부타? 망령? 꿈틀거리는 죽은 시체?

카르나는 힘을 거두고 손을 떼려 했으나 박 신부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내가 당신들을 막을 거요. 검은 지하드처럼 표면적으로 설치는 자들 과 당신들같이 겉으로는 미소를 짓지만 속으로는 검은 꿍꿍이를 하는 자들을 당신들이 우습게 여기고 뒤엎으려는 보통 인간들의 힘으로 당 신들을 막을 것이오. 그리고, 그리고…… 종말은 오지 않을 거요. 오지 않게 만들 거요! 당신 교단의 윗사람들에게 내 말을 그대로 전하시오! 당신이 당신 혼자서?

나는 혼자가 아니오. 나도 당신이 말한 죽어 가는 세상의 작은 일부란 말이오. 세상의 일부로서 이야기하는 거요.

당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요. 이 세상은 그릇되었어. 지킬 가치가 없어요. 생명이란 것도 인생이란 것도・・・・・・ 모두 헛것에 불과한 거요.

당신이야말로 헛것에 불과해!

박 신부는 속으로 외치면서 카르나를 뿌리쳐 떼어 버렸다. 분 노로 인해 박 신부의 힘이 자연스럽게 발출되었고 카르나의 소 매 속에 있던 나가가 박 신부의 순간적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카 르나의 소매 속에서 폭발해 버렸다.

순간 옷소매가 갈가리 찢겨 천 조각이 휘날렸고 카르나는 팔 에 큰 부상을 입었으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박 신부는 그런 그를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카르나는 숲 속으로 몸을 날 려 어디론가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뭐, 뭐죠? 신부님? 연희 씨?”

병수의 더듬거리는 말에 박 신부가 뒤를 돌아보니 연희가 놀 란 표정으로 박 신부의 옷자락을 잡고 서 있었다. 연희의 손에서 는 과거 준후가 심어 준 부적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연희는 박 신부가 카르나와 보이지 않는 힘으로 대결하는 줄 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 신부가 땀을 흘리는 것을 보자 걱정이 되었고, 문득 준후가 심어 준 부적의 힘이 생각나서 무심 코 그것을 박 신부의 옷자락에 댄 것이다. 박 신부는 카르나와 강렬한 영력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연희는 박 신부의 옷자락을 잡은 것만으로도 둘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박신부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연희에게 물었다.

“전부 들었나, 연희 양?”

“…”

“그래・・・ 됐네.”

그러고는 병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되었네. 어서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뭘 하는 겐가?”

“아…………. 그러면 저는 이만…………… 가 보겠소이다.”

“다음에 보세.”

병수는 약간 호기심이 이는 낌새였지만 박 신부의 눈치를 보 니 앞으로의 대화는 도저히 자신이 낄 만한 것이 아님을 아는 듯 했다. 그는 근호와 전 박사를 들쳐 메고 조용히 사라졌다.

병수가 사라지자 박 신부는 뒤돌아서서 묶여 있던 세 명의 아 랍인의 줄을 끌러 주었다. 그러자 연희가 놀라서 외쳤다. “신부님! 그자들을 풀어 주면……”

연희의 외침에 박 신부는 지친 듯 빙긋 웃어 보였다.

“풀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가? 해칠 건가?”

“그렇지만………….”

연희가 말끝을 흐리자 박 신부가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또 오면 또 막고 지켜 내야지. 그러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연희 양, 가라고 하게. 다만 이제부터 수아 옆에는 항상 내가 있을 것이니 가급적 포기하라고 전해 주게. 알겠나?”

연희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박 신부의 쓸쓸한 표정을 보고 고 개를 끄덕였다. 연희가 아랍인들에게 박 신부의 이야기를 전하 자 그들도 상당히 마음이 움직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그중 하나가 일어나 박 신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영 어로 말했다. 그 전까지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지만 스스로 말을 거는 것을 보니 박 신부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우리를 정말 보내 주는 거요? 당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또 온다면 그땐 더 혼내겠네. 다행히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 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끝난다면 나로서도 바라는 바일세.”

“정말이오?”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남자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카르나에게 우리를 넘기지 않았소. 그것도 아무 대가 도 바라지 않고……………. 우리는 당신에게 목숨을 빚졌소. 우리는 「코란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요. 당신과 우리는 길이 다르지만, 우리는 원수를 분명히 갚지만 은혜 역시 반드시 갚소. 알겠소. 그러면 우리는 이만 가겠소. 내 이름은 알. 자, 알라의 뜻이 있어 다시 만나기를…………….”

“다시 와도 수아는 못 만날 걸세. 그건 알겠지, 알?”

“알았소.”

고개를 끄덕이던 알이 잠시 멈칫하더니 박 신부에게 말했다. 

“저 여자를 좀 비키게 해 주겠소? 당신에게 해 줄 말이 있소.” 

박신부는 조금 꺼림칙했지만 알의 눈빛이 진실 된 것 같아 수 아를 데리고 나오라고 하며 연희를 보육원으로 들여보냈다. 연희가 사라지자 알이 입술을 떼었다.

“저 여자는 쿠트브요. 그렇지 않소?”

“쿠트브?”

“라미드우프닉스 말이오. 우리들 아랍어로는 그리 부르지요.” 

“아!”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 다. 전에 성당 기사단의 키건도 그런 말을 했다고 승희에게 전해 들었는데 아랍인들에게서도 같은 말이 나오다니.

“어떻게 알았나?”

“아까 동료 한 명이 진실을 말할 때 조금은 눈치챘지만……………. 방금 알게 되었소.”

“어떻게?”

“조심하시오. 아까 카르나는 그것을 알았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리쳤소.”

“뭐라고 소리를 쳤나?”

“너는 쿠트브다’라고 외쳤소. 틀림없이 카르나는 저 여자를 해치려고 한 거요. 저 여자가 자신이 쿠트브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할 테니 말이오.”

알의 이야기를 듣자 박 신부는 등에서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카르나는 박 신부와 이야기할 적에는 그리 악한 것 같지 는 않았지만 자신이 몰리게 되자 정말로 집요하고 교활한 면을 보인 것이다.

힘으로 하려 해도 박 신부를 당해 내지 못할 것 같자 카르나는 박 신부의 곁에 있던 연희가 세상을 지켜 주는 보루 역할을 하는 라미드우프닉스, 혹은 쿠트브라는 것을 알고 소리를 지른 것인 분명했다. 박 신부를 곁에서 지켜 주고 있는 기둥을 무너뜨리고 그들이 바라는 세상을 조금 빨리 오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카 르나의 교활함을 알자 박 신부는 손이 부르르 떨렸지만 겉으로 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 알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염려 마시오, 나도 말하지 않을 테니. 그러니 이번에 나를 구 해준 것으로 비긴 걸로 해 둡시다. 물론 동료 두 명의 목숨 값은 장차갚겠소만.”

그러면서 은근한 시선으로 박 신부를 보며 덧붙였다.

“우리는 여자아이에게 절대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카르 나야말로 악한 의도를 품고 온 것이 분명합니다. 어떻습니까. 여기서 우리 손을 잡는 것이…………? 적의 적은 동지가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박 신부가 안색을 굳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적의 적은 동지가 될 수 있지만, 더 큰 적도 될 수 있소. 당신 들은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거요? 어서 가지 않으면 다시 묶어 버리겠소.”

“당신은 어떤 교파나 단체의 소속입니까?”

“그런 것 없소. 내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동할 뿐.”

그러자 알이 피식 웃었다.

“대단하신 것은 알겠지만, 혼자, 아니면 동료 몇 명이서 무얼 하 겠다는 겁니까? 칼키파를 적으로 돌리고 검은 지하도 적으로 돌리겠다는 거요? 그렇게 해서 과연 버텨 낼 수 있을까요?” 

알의 말을 박 신부는 짧게 말을 끊었다.

“썩 꺼지게.”

“기다리겠소. 당신이 마음만 바꾸면 우리의 지도자 중 하나가 되어도 좋으니까. 다음에 봅시다. 샬롬.”

곧이어 알은 두 명의 동료들을 데리고 카르나가 사라진 것처 럼 바람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연희가 수아를 안고 다시 나 왔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수아는 어느새 잠이 들어서 연희가 안고 나오는 것도 모른 채 쌔근쌔근 가늘게 숨소 리만 내고 있었다.

“모두・・・・・・ 갔나요?”

“모두 갔네. 각자 갈 길로……………. 이젠 나도 가야지.”

박 신부는 연희 품에서 잠든 수아를 들쳐 안고 등을 가볍게 토 닥거려주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절뚝이며 걷기 시작했다. 

“어. 신부님, 수아……… 데리고 가실건가요?”

“그럴 수밖에 없게 되었네. 이놈 저놈 전부 이 아이를 노리는 판이니 내가 데리고 가서 항상 옆에 있어야지 어쩌겠는가.” 연희도 지금 수아가 처한 상황을 알고 있었다. 표적이 된 마당 에 이제 수아가 갈 만한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다. 일반 사 회단체는 곤란할 것이고, 입양도 매우 위험하다고 보아야 했다. 따라서 박 신부가 수아를 맡아 주는 것이 가장 듬직하기는 했 다. 그러나 이제는 늙고 결혼한 적도 없는 박 신부가 아이를 키 운다는 생각을 하니 안쓰러웠다.

“하지만 신부님이 어떻게 아이를 키우시려고요.”

“괜찮다네. 수아도 다 컸는걸, 뭐. 준후도 내가 키운 것이나 마 찬가지인데 지금이라고 못하겠는가. 준후도 다 컸고 현암 군이 나 승희도 있으니 염려 말게.”

박신부는 보육원의 뒷일을 연희에게 부탁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희는 박 신부와 수아를 그냥 보내기가 안쓰러웠는 지박 신부의 곁을 계속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연 희가 박 신부에게 물었다.

“그런데 신부님, 쿠트브가 뭐죠?”

악마나 악신이 눈앞에 나타나도 놀라지 않던 박 신부는 연희 가 무심코 던진 질문 한마디에 마음이 다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박 신부는 구태여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쓸 것 없네. 아니, 신경 써서는 안 되는 일이지. 연희 양 나를 믿나?”

“그럼요!”

“그런 건 연희 양이 알 필요가 없는 일이라네. 결코 연희 양에 게 비밀을 만들거나 따돌리는 게 아니고, 단지 그것을 알아보았 자연희 양에게는 조금의 득도 없어서 하는 말일세. 나를 믿는다 면 그에 대한 호기심은 가지지 말게나 알았나?”

박 신부가 진중하게 말하자 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신부 는 내심 연희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아닐까 말해 놓고 나서 후 회했지만.

조금 어색한 분위기에 연희는 화제를 바꾸려는 듯 말했다.

“그런데 ・・・・・ 로파무드가 편지를 보냈다니, 전 정말 놀랐어요.”

“로파무드가 백호 씨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네. 인도에서 무서 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이지. 운 좋게 그 편지가 나에게 전 해진 것이 바로 어제 일일세.”

“참 공교롭기도 하네요.”

“글쎄……. 일이 이토록 공교롭게 되는 것도 무슨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에 의한 안배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도 놀랐네. 실제로 편지를 쓴 것은 시타 교수라는 무슨 과학자더군. 로파무 드는 몸은 비록 승희와 같은 또래이지만, 그녀가 영혼을 가지게 된 지는 몇 년 되지 않아 세상 물정에 아주 어둡다네. 시타 박사 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꼼꼼히 추적해서 백호 씨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칼키파의 진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을거네.”

박 신부도 조금 어색하여 할 말이 궁했는지 다른 때 같지 않게 묻지도 않은 것까지 중얼중얼 늘어놓고는 또다시 그것이 어색해 서 입을 다물었다. 얼굴은 평온했지만 박 신부의 등에는 아까 싸 울 때보다도 더 많은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연희도 다소 쑥스러운 듯,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다가 박 신부 에게 물었다.

“그런데 ・・・・・・ 신부님. 한 가지만 여쭤 볼게요.”

박 신부는 행여 연희가 쿠트브, 즉 라미드 우프닉스에 대해 묻 는 것이 아닐까 하여 다시 한번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다 고 대놓고 내색을 하면 연희가 더 궁금해질 테니 그럴 수도 없는 판이어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연희는 다행히도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아까 수아에 대해 하던 이야기 말인데요.”

박 신부는 다행이다 싶어서 얼른 대답했다. 침착하려 했지만 그보다 말이 먼저 나와 버렸다.

“음, 그래.”

“다른 것은 다 이해가 가요. 그런데 아무 힘도 없고 특별한 것 도 없는 수아가 어째서 정령들의 여왕이 된 걸까요? 왜 정령들이 받드는 존재가 된 거죠? 전 그 점을 정말 모르겠어요. 더구나 아 까 정령들이 신부님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고 하여 수아를 짐작 했다고 하셨는데, 신부님을 아는 아이는 수아 말고도 많아요. 저 는 신부님 소개로 여기 나가게 되었으니 잘 알죠.

그 점만으로 수아인 것을 추측하셨을 리가 없어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은가요? 어쨌거나 수아는 특별한 아이잖아요. 정 령들의 여왕인데, 하나도 특출 난 면이 없는 보통 아이란 것도 이상하구요. 아까 수아의 출생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혹시 수아가 남다른 면모라도 있었던 것 아닌가요?”

그러자 박 신부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나도 확실한 것은 아니네. 그러나 수아는 남다른 면이 없네. 아무런 영력도, 주술적 소질도 없는 아이일세. 조금이라도 그런 면모가 있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지. 그러나 수아는 특별한 면 이 있기는 하네. 그건 바로…………… 수아의 출생, 아니 수아가 배 속 에 있을 때의 일일세.”

“그게 뭐죠, 신부님?”

박 신부는 슬쩍 연희에게 윙크를 해 보이고 고개를 숙여 수아를 눈짓으로 가리킨 뒤 짧게 말했다.

“연희 양이 우리를 알기 전에 벌어진 일이네만…………. 혹시 현 암군이나 준후에게 들은 적이 없나? 악신 브리트라를 물리친 아 기에 대해서 말일세.”

그때 연희의 눈빛이 퍼뜩 빛나는 것 같았다. 연희도 그 이야기 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었다. 브리트라 를 숭배하는 사교(敎) 사건 때, 퇴마사들은 최후까지 안간힘 을 썼지만 여사제의 몸을 통해 환생하려는 악신 브리트라를 막 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 여자의 배 속에 있던 어리고 작은 태아가 살려는 의지만으로 악신 브리트라를 물리쳤다는 이야기 였다.

그렇다면 …………… 그때의 그 아이가 바로………………

“그게 수아!!!”

연희는 너무도 놀라운 사실에 그만 큰 소리로 외쳤다. 박 신부 는 연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게 수아일세. 수아의 어머니는 그 이후 의식 불명 상 태가 되었다가 수아를 조산하고 죽었다네. 물론 마지막에는 그 녀도 반성하고 아기의 이름을 수아라고 지어 주었지. 그리고 그 아기를 맡은 것이 나고, 아기를 여기 맡긴 것도 나일세. 흠…………… 벌써 세월이 그리 지났군. 사실 말이네, 수아는 태어나서 몇 년 동안 전혀 자라지 못했다네. 아마도 브리트라 때문에 너무나 지친 탓인지도 모르겠네만, 수아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 이네. 한 삼사 년 동안은 갓 태어난 아기 상태 그대로 인큐베이 터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말일세.

아무튼 이건 다 여담이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물론 브리트 라가 악신인 것은 알지만 그게 환생했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졌 을지 알 길이 없었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브리트라의 환생 은 정령들에게 큰 이변을 주는 위험한 사건이었을지도 몰라. 이 건 오로지 내 추측일 뿐이네만.

수아는 틀림없이 보통 아이일세. 수아가 브리트라를 물리친 것은 그저 인간 본연의 생명력 덕분이었지. 그러나 정령들은 악 신인 브리트라를 물리친 인간을 왕으로 떠받들기로 한 것이 아 닐까? 물론 내 말은 추측에 추측을 거듭한 것이고, 비약에 비약 을 거듭한 것이기는 하네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제대로 설명되니 일단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박 신부의 이야기를 연희가 들으며 계속 고개를 끄덕이는 동 안 어느덧 박 신부는 차를 세워 둔 곳까지 도착했다. 박 신부의 차는 연희를 처음 만났을 때 사용하던 것과 같은 형태의 아주 낡 은 차였다. 박 신부는 차 문을 열고 수아를 뒷좌석에 기대 눕히 면서 일부러 익살스럽게 말했다.

“차가 워낙 덜컹거리고 고물이라 수아가 깨지 않을지 모르겠군. 수아야, 미안하다. 잘해 주려고 노력은 하겠다만 너도 앞으로는 고생이 많겠구나.”

“신부님?”

“음?”

“수아도 앞으로 신부님이나 현암 씨…………… 준후와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건가요? 그건 ・・・・・・ 그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려다가 연희는 입을 다물었 다. 박 신부도 당사자인데 그를 앞에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실례 같아서였다. 그러나 박 신부는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이 아이의 운명대로 될 뿐일세. 그걸 누가 알겠는가?”

“신부님.”

“음?”

“다치신 데는 괜찮은가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세. 염려 말게나.”

그리고 박 신부는 운전석에 앉아 차의 시동을 걸었다. 차의 엔 진 소리는 고물차답게 시끄럽고 요란했다. 하지만 연희는 차 곁 을 떠나지 않고 계속 슬픈 시선으로 박 신부를 쳐다보았다.

박신부는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내심으로는 생애를 살아오면 서 가장 긴장된 시간을 보내는 셈이었다. 더군다나 연희는 심연 의 눈을 가지고 있어 일단 그 힘이 발동되면 그 눈앞에서는 거짓을 말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연희가 박 신부에게 말했다.

“또・・・・・・ 힘든 일을 하러 가시는군요.”

연희가 말하는 것을 듣고 박 신부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같이 가겠나?”

그 말에 연희는 비로소 활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희 양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고생하지 않았나? 앞으로 더 힘든 고생이 될지도 모르는데………….”

박 신부는 말을 중단하고 역시 활짝 웃어 보이면서 안에서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걱정되는 면이 많았지만 하는 수 없다고 박 신부는 생각했다. 준후의 예언에 나오는 열 명의 조력자들. 박 신부는 한꺼번에 그중 셋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연희도, 수아도, 로드도 모두 다 꼭 필요한 인물들이 분명하 다는 느낌이 강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면서도 박 신부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미 모든 것이 그리되도록 안배되어 있다면 차라리 기분 좋 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박신부가 무슨 고민을 하든지 간에 연희는 환하게 웃으며 박 신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요란한 고물 엔진 소리를 남기면서 박 신부의 차는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칙칙한 안개가 낀 어둠 속을 뚫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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