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2권 11화 – 때는 임박하도다 1 : 검은 편지
검은 편지
퇴마사 일행이 현재 숨어 지내고 있는 비밀 아지트는 항구에 있는 낡은 선박이었다. 누구도 항구가의 뭍에 끌어 올려진 녹슨 폐선 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거주하는 데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퇴마사들도 집이 있었고 준후는 부근에 있는 학교를 다니기 때 문에 주로 집을 지키고 있었지만, 현암이 실제로 생활하는 곳은 이곳이었다. 퇴마사들의 집은, 말하자면 그들을 찾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장소였다.
배 안에 작은 발전기도 설치했고 가스통도 들여놓은 덕에 생 활에는 그다지 불편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아직 불 편함이 남아 있는 것은 물이었다. 근처는 바닷가라 민물을 끌어 들일 방법이 없었고, 수도를 연결할 수도 없었다.
그 때문에 현암은 매일 새벽이면 커다란 물통을 짊어지고 조 금 떨어진 부둣가 연안에서 물을 길러 와야만 했다. 현암이 가지 고 다니는 물통은 보통 사람이라면 질려 버릴 만큼의 큰 크기였 지만 새벽 네시경에는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 눈에 띌 염려도 없을뿐더러, 누가 그렇게 큰 물통을 어떻게 지고 가느냐고 물으 면 물은 얼마 담겨 있지 않다고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귀찮기는 해도 수련에도 도움이 되었고 매일매일 스스로의 힘 을 가늠해 볼 수도 있어서 현암은 기꺼이 그 일을 맡았다. 만약 현암이 그렇게 물을 져 나르지 않았다면 승희는 씻지 못하는 것 이 답답하여 예전에 벌써 도망쳤을 터였다. 사실 그렇게 퍼 나른 물의 반 이상은 승희가 씻는 데 사용됐으니까.
물통의 무게는 대략 삼백 킬로그램 이상 되었지만 이제 공력 을 거의 자유롭게 운행할 수 있는 현암에게는 그다지 무겁게 여 겨지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현암의 공력은(현암 자신은 아직도 칠십 년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백 년 수위에 달했기 때 문에 그 정도 일을 한다고 소모되지도 않았다.
매일 그렇듯 무거운 물통을 지고 나르니 몸에 공력을 운행하 는 방법에도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아마도 몸에 일종의 호 신강기(氣)같은 것도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여 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 새벽도 현암은 그 커다란 물통을 어깨 에 지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배에는 지금 아무도 없어서 물을 퍼 나를 필요까지는 없었다.
박 신부는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며 한 이틀 있다가 돌아온다 고 했고, 승희는 박 신부가 없는 틈을 타 더워서 못 살겠다며 잠 시 바닷가로 도망쳐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준후는 학교에 다니 기 때문에 지금은 현암 혼자서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현암은 매일 습관처럼 해 오던 그 ‘운동’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 오늘도 이렇게 물통을 져 날랐다. 요즘은 그렇게 무 거운 물통을 지고 가면서도 신경을 집중하면 발소리를 죽이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연습을 해 볼 요량이었다. 수련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생활의 모든 요소가 수 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요즘 들어 깨달은 덕분이기도 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하고도 힘차게 걸어가던 현암은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확하게 알 수 는 없었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줄곧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다.
현암은 뭘까 싶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 ‘누군가’는 현 암의 눈에 띄지 않았다. 주변은 조용했고 항구의 등불과 배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만이 밤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빛날 뿐이었다. 현암은 아무래도 수상쩍은 기분이 들어서 일단 커다란 물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십 분 정도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서 주변을 살폈다. 시선의 느낌은 계속 그대로였다. 물론 현암에 게 아직 정확한 투시나 감지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많은 난관을 겪어 온 현암 특유의 예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십 분이 지나도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고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현암은 그다지 크지 않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누구요? 용건이 있으면 나오시오.”
현암이 말하자 저쪽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누 군가가 나왔다. 체구가 제법 큰 남자였는데 항구에 있는 가로등 을 등지고 있어서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볼 수가 없었다.
현암은 누구냐고 물어보려다가 그 사람이 다가오면서 손을 쳐 드는 것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백호 씨!”
그 사람은 백호였다. 백호는 미소 띤 얼굴로 현암에게 걸어오며 말했다.
“새벽부터 뭐 하고 있나요?”
그러자 현암이 구김살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는 백호 씨는 왜 이런 새벽부터 찾아왔나요?”
“소식이 있어서 온 겁니다.”
백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으며 현암 옆으로 다가와 현암의 어깨를 친근하게 툭 쳤다. 백호는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머리를 뒤로 묶은 터프하고도 털털한 모습 그대 로였다.
백호는 현암이 방금 내려놓은 물통에 팔을 기대고 서서 담배 를 꺼내 불을 붙였다. 지난번 홍수 사건 때 얼어붙어 있는 퇴마 사들을 구해 병원으로 옮기면서 백호는 그때 처음으로 물고만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 난 뒤 이제는 완전히 골초가 되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것 이다.
현암은 그런 백호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무슨 소식입니까? 좋은 소식, 아니면 나쁜 소식?”
백호는 아주 기분 좋은 듯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지요. 두 가지 다.”
“그러면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현암은 백호를 조금 비키게 한 후 물통을 가볍게 들어 어깨에 얹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백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물 통은 방금 자기가 기대서 있어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장난감처럼 단숨에 어깨에 올리다니?
“무겁지 않나요?”
“그럭저럭 들 만합니다. 가시죠.”
백호와 현암은 나란히 걸었다. 그러나 백호는 현암의 어깨에 얹힌 그 무지무지한 물통이 약간은 무서운 듯, 슬쩍 반대편 어깨 쪽으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현암은 미소를 지었으나 별말은 하지 않았다. 백호가 조금 쑥스러운 듯 걸음을 옮기다 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들 잘 계신가요? 이게 얼마만인지…………. 이 년 만인가요?”
“그렇지요. 다들 잘 있습니다. 준후는 정말 많이 컸고, 신부님은 조금 늙으셨지만 여전히 정정하시지요.”
“승희 씨도 잘 계신가요?”
그 말에 현암은 웃으며 말했다.
“잘 있어요.”
“지금 다들 저기 계신가요?”
“아뇨. 저밖에는 없는걸요.”
그러자 백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예. 상관없습니다. 그다지 중요한 용건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지금 말씀드릴까요? 좋은 소식부터?”
“그러세요.”
현암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하자 백호는 품에서 조금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좋은 소식이 두 가지나 된답니다. 일단 하나는 이 봉투죠.”
백호는 봉투를 현암의 웃옷 주머니에 쑤셔 넣어 주었다. 현암 이 물통을 지고 있어 손이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이게 뭐죠?”
“그동안 너무 오래 걸렸지요? 승희 씨 것은 전에 드렸지만. 이건 다른 분들의 새 신분증과 여권입니다. 만드느라 정말 고생 많 이 했지요.”
백호는 일부러 우스운 듯 이야기를 했지만 현암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백호 혼자만이 퇴마사들의 생존 사 실을 알고 있었으며, 아직껏 연희에게조차 이야기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대민 통제가 확실한 나라에서 혼자만의 노력으로 위조 신분과 여권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보통의 노력으 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백호가 준 신분증과 여권은 단순한 위조가 아니라 정말 모든 기관에 제대로 등록되어 있는 신분증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더 이상 퇴마사들은 여느 사람들이나 경찰 등의 눈을 피하려고 애 쓸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들을 알고 있던 사람이나 술사들에 이 르면 문제가 달라지지만,
현암이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백호는 두 번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좋은 소식은 제가 백수건달이 되었습니다.”
“예?”
“제가 비로소 편안한 몸이 되었다는 겁니다. 허허, 어제 사표를 쓰고 나오는 길이랍니다.”
“예? 아니, 그건 왜………….”
“아, 그건 개인적인 일입니다. 더구나 아주 기쁜 일이기도 해요. 더 이상 속 썩이고 고생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괜찮습니다. 그냥 무슨 회사라도 들어가든지, 아니면 조그마한 변호사 사무실이라도 차려서 먹고살 생각입니다. 너무 힘들 어서 못해 먹겠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백호는 지난번 홍수 사건 이후로 관료 조직에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그만두 지 않은 것은 퇴마사들의 신분을 확실히 정리해 주고 싶어서였 다.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고서는 사적으로 신분증을 만 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즉, 퇴마사들과 비슷한 행방불명자나 사망자가 나와야 비로소 신분위조를 할 여지가 있었으며, 그들에게 남은 가족 친지 등이 없어야만 했다. 그 때문에 백호는 몇 년이나 되는 시간을 기다려 야만 했던 것이다. 현암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뭐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주제를 돌리려 했다.
“그러면 나쁜 소식은 뭡니까?”
그 말에 백호는 피식 웃었다.
“나쁜 소식은 제가 낸 사표가 잘 수리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거 아무래도 사고를 한 번 치든지 해야 잘릴 수 있을 것 같아 요. 허허.”
현암은 어이가 없어서 백호를 마주 보고 허허 웃고 말았다. 그 통에 현암의 어깨가 조금 흔들리자 백호가 웃으며 몸을 피했다.
“조심조심! 저 같은 놈은 거기 깔리면 단박에 오징어가 됩니다. 조심하세요.”
현암은 백호를 보고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아까 내가 지고 갈 때는 그렇게 무거운 건 줄 모르셨나요?”
그러자 백호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예? 아까요? 난 그게 땅에 놓여 있을 때밖에는 보지 못했는데요?”
그 말을 듣고 현암은 얼굴을 굳혔다. 그러면서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백호를 보더니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도착하신 지 몇 분이나 됩니까?”
현암의 질문에 백호도 뭔가 느낌을 받은 듯 크게 미소를 짓더 니 역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암 씨가 말했을 때 막 도착………….”
현암은 아차 싶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렇다면 아까 자신 을 지켜보던 그 눈초리의 주인공은 백호가 아니었단 말인가? 정 신을 가다듬자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등 뒤에서부터 느껴졌다. 갑 자기 급해졌다. 현암은 본능적으로 물통을 뒤로 휙 내던지듯 하 며 백호의 몸을 잡아끌었다. 그 순간, 거대한 물통에서 퍽퍽 소 리가 나는 것이 들렸다.
“엎드리세요!”
현암은 다급하여 백호의 몸을 그대로 땅에 찍어 누르면서 그 무엇인가가 날아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살기! 현암이 막 몸을 날리려는데 땅에 엎어진 백호가 소리치며 현암의 발을 잡았다.
“조심해요! 무턱대로 뛰어들면.”
바로 그때, 무엇인가 화끈한 것이 현암의 얼굴과 어깨를 휙 스 치고 지나갔다. 백호는 무의식중에 품에 손을 넣었지만 지금은 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서 총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백호는 현암에게 재빨리 말했다.
“놈은 어둠 속에 있으니 조심…………!”
그러나 말을 이을 틈조차 주지 않고 다시 어둠 속에서 무엇인 가가 휙휙 날아들었다. 아주 가늘고 가벼운 느낌의 것들이었으며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아 날아오는 방향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현암이 아까 스친 뺨을 만져 보니 조금이기는 해도 피가 묻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예리한데다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물건 같았다. 거기다가 조준도 매우 정확해서 현암은 물통 뒤로 숨어 서 공격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죠?”
현암이 백호에게 묻자 백호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거요! 물통에 구멍이 나지 않았으니 총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을 하면서도 현암은 계속 물통 뒤에서 뛰쳐나가려 했으나 그때마다 그 이상한 물건이 자꾸 날아들었다. 현암도 열심히 몸 을 피해서 직통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얼굴이며 옷 자락이 점점 찢겨 나갔다.
“자꾸 나가려 하지 말아요!”
백호가 외치는데도 현암은 여전히 미련스럽게도 계속 몸을 밖 으로 노출시켜 댔다. 그러다가 세 번째 몸을 내밀 때, 그것이 날 아오는 방향을 알아낼 수 있었다. 현암은 방향을 알아내기 위해 계속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노출시킨 것이다.
“이야아앗!”
현암은 용을 쓰면서 커다란 물통을 번쩍 들고는 달리기 시작 했다. 예상대로 다시 그 이상한 것이 휙휙 날아왔지만 물통에 막 혀 조그맣게 팅팅 소리만 내면서 튕겨 나가는 것 같았다. 무서운 기세로 현암이 조금 달려가자 의외로 막다른 창고 벽이 나왔는 데, 다행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암은 예상외의 일이라 놀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거기 에는 가느다란 나무 기둥 몇 개가 서 있을 뿐, 창문도 없었고 사 람의 그림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여 현암이 물통을 돌 리는 순간, 다른 방향에서 그것이 날아들었고 이번에는 미처 피 하지 못했다. 옆구리에 뜨끔한 충격이 오자 현암은 무언가가 박 히는 느낌으로 방향을 알아챌 수 있었다.
“에에잇!”
현암은 큰 소리로 외치면서 물통을 팽개치고 그 방향으로 몸 을 날렸으나 역시 그 장소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현암은 기 가 막혔다. 도대체 이 작자는 은신술이라도 쓰고 있단 말인가? 그때 돌연 옆구리가 저릿하면서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독인가?’
머리까지 핑 돌자 현암은 다급해졌다. 몇 초 만에 이 정도로 몸을 마비시킨다면 이만저만 강력한 독이 아니었다. 현암이 다 리를 풀썩 꺾는 순간, 저만치에서 조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휙 하 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너무도 작아 도저히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때 현암의 왼쪽 손목에서 월향검이 귀곡성을 울리면서 무서 운 기세로 빠져나갔다. 현암이 내쏜 것이 아니라 월향검이 스스 로의 의지로 날아간 것이다. 그에 이어서 은빛이 번쩍하면서 저 만치 어둠 속에서 조그마한 비명 소리 같은 것이 캬악 하고 났 다.
백호는 월향검의 울음소리를 듣자 급히 현암에게로 달려와 현 암을 부축했다. 불과 십 초도 안 되는 짧은 사이에 현암의 얼굴 빛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 이건!”
백호는 급히 현암의 옆구리를 살폈다. 놀랍게도 현암의 옆구리에는 상처만이 있을 뿐, 날아와서 박힌 것이 없었다. 현암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한마디만을 했다.
“독! 독침・・・・・・ 이오!”
“어? 어떻게……!”
백호는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물통 주위에는 아 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분명 날아온 것은 조그마한 암기일 터 였다. 그것을 현암이 물통으로 몇 번이나 막았으니 물통 주변에 그 암기가 흩어져 있어야 했는데 어떻게 된 까닭인지 하나도 보 이지 않았다. 그때 저만치에서 월향검이 캬아악 하는 귀곡성을 내면서 현암의 왼손으로 돌아와 꽂혔다.
현암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며 백호에게 말했다. “저쪽으로…………… 가봅시다.”
백호는 현암이 걱정되었지만 그 역시 궁금하기도 해서 현암을 부축하여 그쪽으로 가 보았다. 그곳에서 백호는 전혀 의외의 것 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아주 몸집이 조그마한 금빛 원숭이 한 마 리가 허리가 반으로 잘려 죽어 있었다. 원숭이의 손에는 금빛 대 롱이 쥐여 있었고 한쪽 팔도 허리와 함께 잘려 있었으며, 허리춤 에 작은 바구니 하나가 걸려 있었다.
‘블로우건(blow-gun)인가? 사람도 아닌 원숭이가 이것을 불 어 쏘았다는 건가?’
백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현암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손을 뻗어 원숭이의 허리춤에 달린 바구니를 떼어 냈다.
바구니는 몹시 차가웠다. 그 안을 들여다보고 현암은 흐음 하며 신음성을 냈다.
바구니 안에는 아주 작은 바늘 모양의 얼음덩어리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흰색이 아니라 보라색 기운이 감도는 얼음덩어 리들이었다.
‘그렇다면 독액을 얼음으로 얼려 불어서 내쏜 것이란 말인가? 정말 기가 막힌 방법이구나!’
얼음은 사람 몸에 박히거나 외기에 노출되자마자 녹아 버릴 터였다. 그렇다면 독액 자체가 탄환이 된 셈이니 그것을 맞은 사 람을 검사해도 증거가 남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을 내쏜 것이 사 람이 아니라 조그마한 원숭이라면 현암이 아니라 누구라도 단시 간 내에 그 사실을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었다. 결국 현암도 사 람을 발견하리라 여겼기 때문에 이 조그마한 그림자를 보지 않 은 실수를 범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월향검이 원숭이를 죽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현암은 몇 방을 더 맞고 아주 위험하게 되었을 지도 몰랐다.
백호는 저만치에 날아간 원숭이의 한쪽 손을 발로 툭 건드려 보았다. 그 손에는 얼음 탄환을 잴 때 얼음이 녹지 않게 하려는 듯, 금빛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그나저나 현암이 걱정되는 듯 백호가 말했다.
“어떻게 하죠? 독이 퍼진다면……………
“십 분만…………… 주변을 살펴 주세요. 이놈의 주인이 오면 곤란해지니까.”
그러면서 현암은 후욱 하고 심호흡을 하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고 나서 눈을 꼭 감고 기운을 집중하여 용을 쓰자 갑자기 현암의 옆구리에서 검은 피가 팍 튀어나왔다.
백호는 깜짝 놀라서 현암의 얼굴을 보았다. 현암의 얼굴은 굳 기는 했으나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검은 피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점점 기 세가 약해지면서 검은 기운 역시 점차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백호는 조금 안심하여 일단 징글맞기는 했지만 담뱃갑의 비닐을 풀어서 원숭이의 잘린 손에 끼워진 장갑과 블 로우건, 바구니를 집어넣었다.
원숭이의 시체도 가지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면서 시체를 발로 툭 건드리자 그 뒤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백호 는 조금 놀라면서 그것을 집으려다가 독 생각이 나서 담뱃갑 종 이를 찢어 조심스레 손을 싼 다음 집어 들었다. 그것은 한 장의 검은 종이였는데 편지 봉투 같은 것에 들어 있는 듯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백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검은 편지? 그렇다면…………!”
백호가 무심결에 중얼거릴 때 갑자기 저쪽에서 우우 하고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백호는 깜짝 놀라 편지를 대강 주머니에 구겨 넣고 그 방향으로 달려가려다가 문득 현암이 걱정이 되어 멈춰 섰다.
현암을 돌아보니 현암은 무아지경에 빠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도,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현암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창백하 게 변해 있었고 옆구리는 흠뻑 젖어 있었는데 핏빛은 이제 제법 선홍색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현암의 도움이 없다고 생각하자 백호는 삽시간에 등이 축축하게 젖었다. 총도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저 기이한 작자 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백호는 물러서지 않고 급히 물 통에 몸을 부딪쳐 물통을 넘어뜨렸다. 물통이 엎어지자 물이 사 방으로 흘러 나갔다. 백호는 낑낑거리며 빈 물통을 들어 현암에 게 씌워 놓고 그 주변을 돌면서 사방을 살폈다.
‘이렇게 지독하다니…………. 그런데 검은 편지 결사가 왜 현암씨를 노린 걸까?’
순간 우우 하는 울음소리가 훨씬 더 가까이 들려왔다. 백호는 섬뜩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주먹밖에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근거리의 격투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 는 백호였지만 상대가 또다시 블로우건 같은 것을 쏘아댄다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득 느닷없이 백호는 왼편 가슴이 뜨끔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었는데 말이다. 놀라 가슴께를 들여다 보니 옷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바로 심장부위였다.
‘당했구나!’
백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 구멍을 들여다보다가 스르르 무너지듯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쓰러진 백호는 몇 번 몸을 꿈 틀거리다가 완전히 오그라든 자세로 동작을 멈추었다.
* 중세 그리스도교의 암살 집단으로서 광범위하고 비밀에 싸인 광신적 조직을 가 졌던 종파 그들의 목적은 신의 국가를 실현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암살했 다. 어느 날 어디서인지 모르게 구성원들 앞으로 검은 편지가 도착하면 그 구성 원은 거기에 적힌 사람을 암살해야만 했다. 이 결사는 16세기 중반에 결성되어 비밀리에 급속도로 뻗어 나갔으나 18세기에 교황 클레멘스 14세에게 말살당했 다. 이 검은 편지 결사대의 최후의 수령은 일개 수도사였던 피에르 크레이만이었 는데, 그는 클레멘스 14세가 검은 편지 결사의 존속을 인정하지 않으면 프랑스 전국을 페스트로 초토화시키겠다는 협박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잠복 장소 를 밀고당해 처형되었다.
백호가 쓰러지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어둠을 뚫고 지붕에서 조그마한 몸집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흑인은 아니 었지만 검은 얼굴 탓에 어둠 속에서 눈만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것 같았다. 백호가 쓰러진 주변에 오자 그는 흰 이를 드러내고 악마처럼 웃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둥글게 휘어진 반월도(半 月刀)* 형상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현암을 없애려는 것 같았다. 그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쓰러져 있던 백호의 고개가 번쩍 들리면서 뭔가가 번뜩거리며 쏘아져 나갔다. 그자는 놀라서 몸을 피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이마에 조그마한 구멍이 나고 말았다. 백호는 원숭이의 블로우건을 뱉고 벼락같이 몸을 일으켜 그자 에게 덤벼들었다. 그자는 단검을 들고 있었지만 이마에 독침을 맞았기 때문에 놀라서 저항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백호의 돌 려차기 한 방에 쓰러지고 말았다.
“흥!”
백호는 코웃음을 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퉤퉤 몇 번 이나 침을 뱉었다. 사실 막다른 지경에 몰리지 않았다면 원숭이 가 입에 물었던 것을 자기 입에 물고 쏘지는 않았을 터였다.
백호는 녀석의 단검을 빼앗아 조심스럽게 가슴께의 옷자락을 잘라 냈다. 독이 묻어 있을까봐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자 안주머 니에 들어 있던 일회용 가스라이터가 바닥에 함께 떨어졌다. 독 침은 정확하게 백호의 심장 부위에 맞았으나 라이터에 막혀 백 호는 운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담배 끊는단 생각은 안 한다!’
백호는 다시 한번 식은땀을 닦아 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었다. 이건 분명 크나큰 행운이었다. 백호는 다시금 쓰러진 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자는 얼굴이 몹시 검게 그을린 인도인이나 아랍인 같아 보였다. 백호는 너무도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런 자가 검은 편지 결사에 있는 거지? 그리고 왜 현암 씨를….’
*시미타(Scimitar), 둥글게 휘어진 칼, 주로 아랍에서 사용된 형태의 칼로서 흔 히 다마스쿠스 강철로 만들어져 매우 예리하고 견고했다.
백호는 아까 얼결에 주머니에 구겨 넣은 검은 편지를 펴 보려 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때 뒤에서 뭔가 기척 같은 것이 느 껴졌다. 놀라서 얼결에 고개를 숙이는 순간 뒤통수에 둔한 통증 이 퍽 하고 왔다. 눈앞이 핑 돌면서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만 약 무심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머리가 깨졌을지도 몰랐다. 백호는 아찔해지는 정신에 반사적으로 몸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나 몸을 굴리는데도 제이, 제삼의 타격이 계속 무자비하게 백호의 몸으로 쏟아졌다. 구르면서 백호는 언뜻 거대한 체구에 검은 얼굴의 시커먼 자가 짧은 막대기 같은 것으로 자신을 인정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힘 또한 어마어마해서 맞을 때마다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아까 같은 행운은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백호는 질끈 눈을 감았다.
‘끝장인가・・・・・・!’
그 순간 쾅 하는 폭음 같은 것이 들려와 백호는 다시 눈을 떴 다. 그러자 자신을 내리치려던 거대한 체구가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거대한 몸집의 남자는 뒤로 쿵 소리를 내면서 쓰러져버렸다. 놀라서 고개를 돌린 백호의 눈에는 반쯤 날아가 버린 거 대한 물통의 잔해가 보였다. 그 안에는 현암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오른손을 튕길 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오른손에 는 밝은 빛의 구체가 두 개 남아 있다가 스르르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현암 씨! 어떻게 알고…………….”
그러자 현암이 눈을 뜨지 않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물통 때문에 보이지는 않아도 귀는 뚫려 있어요.”
“그러나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어떻게…………….”
“급하면 할 수 없죠.”
그러다가 현암은 힘겨운 듯이 입을 다물었다. 현암은 물통 속 에서 독을 뽑아내다가 백호가 얻어맞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대강 가늠해서 ‘탄’ 자결을 내쏜 것이다. 공력을 집중하고 있는 참이라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탄’자결의 구체가 물통 벽에 맞아 그것을 날려 버리 느라 위력이 많이 약해져 그나마 거한이 박살 나지 않았던 것이 다. 대신 현암도 간접적으로 그 폭압에 휘말렸다. 하지만 ‘탄’ 자 결의 폭발력은 원래 현암의 공력이었기에 현암의 몸에 닿은 힘 은 태반이 도로 몸으로 흡수되어서 충격이 그리 크지 않았다. 백호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비틀거리고 일어나 거한 의 무기를 빼앗았다. 덩치 큰 아랍인의 무기는 가지가 달린 경찰봉처럼 생긴 막대기였다. 백호가 무기를 빼앗는 순간, 별안간 그 아랍인이 눈을 번쩍 떴다. 백호가 깜짝 놀라 단검을 놈에게 들이 대자놈이 음산한 목소리의 서툰 영어로 말했다.
“어새신*은…… 어새신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너희 는…………… 모두 죽은 목숨이다…………….”
그 말을 남기고 높은 눈을 까뒤집더니 입에서 선혈을 뿜으면 서 죽어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독약 같은 것을 물고 있다가 삼 킨 듯했다. 백호는 당황하여 놈의 입을 벌리려 했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몰골이 오싹해진 백호가 앞서 쓰러졌던 자를 살피려 했지만 그자도 어느 사이에 입에서 선혈을 뿜은 채 죽어 있었다.
“잘할 줄을 몰라서…………. 괜찮습니까?”
낡은 배의 화물칸을 약간 치운 것에 불과한 거실 겸 응접실 겸 수련실에서 백호는 착잡한 얼굴로 현암의 상처를 동여매어 주다 가 물었다. 현암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글쎄요…………. 아, 너무 꽉 매지 마세요!”
백호가 지나치게 긴장했는지 붕대가 너무 조여 끊어질 지경이 었다. 백호는 얼른 손에서 힘을 빼내었다.
“미안합니다.”
백호가 어쩔 줄 몰라 하자 현암이 조용히 물었다.
“아까 그 친구들 정체가 뭐였기에 그렇듯 긴장하시죠?”
현암의 태평스런 말을 듣고 백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린 죽을 뻔했습니다. 아슬아슬했다구요. 그러니 긴장이 안되겠습니까?”
“그건 아까 일이고 지금은 다 끝났으니 긴장할 필요 없잖아요.”
현암의 목석같은 신경에 백호는 속으로 경의를 표하며 대꾸 했다.
“무슨 독인지는 검사해 봐야 알겠지만, 괜찮은가요?”
“독은 모두 빼냈으니 염려 마십시오. 그런데 놈들의 정체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신 것 같던데요?”
“혹시………… 검은 편지 결사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글쎄요. 우리를 습격한 자들 말인가요?”
백호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다시 고개를 든 암살 조직입니다.”
“최근 다시라고요? 그러면 전에도 이들이 무슨 일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 11~13세기 이슬람의 종교적·정치적 분파인 니자리 이스마일파의 신봉자. 그 들은 적을 살해하는 것을 종교적 의무로 여겼다. 이후 이 분파는 소수 이단으로 침체되었고 지금은 시리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그 추종자들이 있으 며, 특히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커다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러자 백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그 조직은 아주 오래전에 결성되었습니다. 약 16세기 중반 정도에 생겼다고 합니다만. 그들은 중세 그리스도교의 이단 종 파로서 암살 집단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암살했던 공포의 존재였죠.
그들의 조직은 절대 비밀에 부쳐져 외부에 노출되는 법이 없 었습니다. 만약 일이 생기면 어느 날 갑자기 구성원에게 검은 편 지가 보내집니다. 그 안에 살해해야 할 상대자의 이름이 들어 있 지요. 그러면 그 구성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을 살해하 고 말지요.
그런 방식으로 수많은 암살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 의 이름이 ‘검은 편지 결사’라고 붙은 것이죠. 18세기에 완전히 말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요즘 다시 나타나 각국의 요 인들을 암살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무섭기 이를 데 없는 자들이랍니다.”
백호의 설명을 듣고 현암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보였다.
“원숭이 같은 상상할 수 없는 방법까지 이용하는 걸 보니 대단 하긴 하더군요. 그런데 그런 암살 조직이 여긴 왜 온 걸까요?”
“저도 그걸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아까 두 명은 인도인 아니 면 아랍인인 것이 확실한데. 검은 편지 결사에 어떻게 그런 사람 들이 있는 것인지……………”
“인도인이나 아랍인이 있어서 안 될 것은 없잖습니까?”
“아닙니다. 안 될 이유가 있어요. 검은 편지 결사는 그리스도 교의 광신적인 자들이 모인 조직입니다. 그런데 아랍인은 그들 과는 완전히 적대적 관계에 있는 회교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 도인이면 힌두교도일 테고요.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단체와 일을 한다고는 믿기 어렵군요.”
“그러나 아랍인이나 인도인이라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 덩치 큰 아랍인은 자살하기 직전에 자신이 어새신이라고 밝혔어요.”
현암이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어새신 암살자라는 뜻 아닙니까?”
“요즈음은 암살자라는 단어로 통칭되고 있지만, 원래 어새신 은 암살 조직입니다. 산중노인이라고도 불리는 하산이라는 자가 만든 단체로, 그 역시 무시무시한 악명을 떨쳤지요. 결국은 당시 유럽 쪽으로 진군하던 몽골군에 의해 전멸되었지만 지금도 존속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광신적인 회교 숭배자들입니다.”
“청부를 맡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적대적인 단체에게서 청부를 맡을 리 없습니다. 설혹 청부를 맡았다고 해도, 자신들의 존속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그렇게 자살함으로써 입을 다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건 분명 그들 자체 내의 문제겠지요. 그런데 놈들이 우리나라에까지 건 너와서 현암 씨를 해치려 하다니. 정말 뜻밖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암은 다른 방향으로 석연치 않다는 생각 이 들었다. 백호의 설명은 그럴듯했다. 그러나 백호가 언제 저렇 게 고대 중세사에 능통해졌을까? 그러다가 현암은 백호의 주머 니에 비죽하게 나와 있는 검은 편지를 보자 궁금해졌다.
“그것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세요. 혹시 지문이 묻어 있다면 지워질지도 모르니 그것만 조심하시고.”
백호는 손수건으로 검은 편지를 싸서 꺼낸 다음 현암에게 건 네주었다. 편지는 한 번 뜯어 본 듯 봉해져 있지는 않았다. 그 안 에 든 종이를 꺼내어 펼쳐 본 현암의 얼굴이 약간 변했다.
“혹시….. 백호 씨, 검은 편지나 어새신에 대해 조사하고 계셨습니까?”
그 말을 듣자 백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래 좀 사건들이 잦아서 개인적인 선에서 조사를 하고 있던 참입니다. 어, 그런데 그건 왜?”
“어새신이나 검은 편지 결사는……………..”
현암은 보고 있던 종이를 백호 쪽으로 돌려 보였다. 거기에는 몇 줄의 아랍어인 듯한 알아볼 수 없는 글씨가 적혀 있었고, 그 밑에 복사된 흑백 사진에는 바로 백호의 얼굴이 있었다.
“제가 아니라 백호 씨를 노린 것 같군요.”
백호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껏 백호는 암살자들이 현암을 노리고 있다고 믿었지.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는 상상조 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백호는 곧 침착을 되찾고 말했다.
“이럴 수가…………. 흠.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왜 그들이 나 같은 사람을 노리는 걸까요?”
현암도 조금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백호 씨. 그 검은 편지 결사나 어새신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 러니까…………… 그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단순한 청부 암살 집단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광신적인 종교 집단의 성격이 더 짙 습니다. 그러나 저도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합니다. 다만 약간 조사를 했을 뿐입니다.”
“조사요? 그들에 대해 왜 조사하셨습니까?”
백호는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요 근래 난 좀 일을 태만하게 해 왔죠. 그래서 이런 한가한 일 이 떨어지게 된 거라고나 할까요?”
“한가한 일?”
“근래 기승을 부린다는 검은 편지 결사와 어새신에 대해 조사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자들이 나타난 적도 없고 하니, 정보기관의 데이터베이스를 위한 작업이었을 뿐이죠. 거의 시간 때우기 비슷한 작업이었을 뿐이었는 데 이렇게 골치 아픈 일과 맞닥뜨리다니, 허허.”
“뭔가 그들의 실체에 대해 알아낸 것이 아닙니까?”
현암의 질문에 백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비유하자면 백과사전을 찾는 정도의 작업 을 했을 뿐입니다. 그 정도의 작업 때문에 암살된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겠지요.”
“정말 그런 부분이 없었습니까?”
“그럴 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사실 조사는 거의 안 했고 대부 분은 제가 소설 쓰듯이 직직 갈겨쓴 것에 불과합니다. 자투리 시 간을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졸려서 비몽사몽간에 쓴 부분도 많 았죠. 그런 황당한 것에 그들이 신경을 쓰다니.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백호가 그렇게 말하자 현암도 그럴 법하다고 생각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 작업 말고는 검은 편지 결사나 어새신과 연관을 맺거나 하 는 등의 일은 없었습니까?”
“분명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난번 홍수 사건 때 이후로 이 직업에 환멸을 느껴서 말이죠. 그때부터는 일을 맡지 않고 빙 빙 돌기만 했습니다. 하물며 그들과 연관 맺을 일 같은 건 없었죠.”
“흠……. 그러면 혹시 우리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요?”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여러분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니까요.”
“글쎄요. 일반적인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특수한 능력을 가 진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지요.”
“특수한 능력요?”
“먼 데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승희를 생각해 보세요. 만약 승 희의 반의 반 정도라도 되는 능력이 있는 자라면 우리의 생존을 알 수 있죠. 물론 우리에게 관심을 두고 있어야 알 수 있겠지만.”
“아무튼 현암 씨나 여러분들과 관계 있는 일은 아닐 겁니다. 여러분들에 대해 안다면 왜 나를 노렸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그러나 그렇다면 왜 그들이 백호 씨를 노린 걸까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전혀 짐작가는 데가 없어요.”
현암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아무튼 놈들이 이번에는 실패했으니 다른 자들을 보내겠죠?”
그 말에 백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럴 것 같군요.”
“그러면 한번 알아봅시다. 저와 승희가 주변에서 지켜 드리죠. 승희의 능력을 이용하면 놈들의 속셈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백호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현암 씨나 여러분들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요. 그건 안됩니다. 이건 제 일이에요.”
백호는 잠시 말꼬리를 끌다가 힘없이 웃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도와주신다니 고맙군요.”
현암은 밝은 목소리로 하하 웃었다. 그러자 백호는 겸연쩍은 듯이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정도 되는 자들이라면 혼자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 군요. 솔직히 무섭습니다. 현암 씨와 승희 씨가 도와주신다면 걱 정없죠.”
현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경계는 철저히 해야 합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녀석들이니까요. 아마 조금 기다리시면 승희가 올 겁니다. 제가 승희와 함께 백호 씨 뒤를 따라다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