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2권 12화 – 때는 임박하도다 2 : 정체불명의 암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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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2권 12화 – 때는 임박하도다 2 : 정체불명의 암살자들


정체불명의 암살자들

도망치듯 나갔던 승희가 몇 시간 뒤 아침나절이 되자 돌아왔 다. 현암에게 된통 면박을 당해 승희는 삐친 듯했지만 백호 앞이라 많이 참는 것 같았다.

백호는 거리를 유지하여 절대 남의 눈에 띄지 말라는 걱정 어 린 다짐을 한 번 더 받아 낸 다음 일터로 떠났다. 현암과 승희는 그때부터 백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 이 틀이 지나도 백호의 주변에 수상쩍은 자가 다시 나타나는 것 같 지는 않았다.

백호는 낮에 검찰청에서 일을 보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승희 가 휴식을 취하고 현암이 경계를 했다. 그리고 백호가 퇴근한 이 후, 즉 보다 위험한 상황에서는 승희가 투시력을 쓰고 현암이 쉬 는 방식을 취했다. 박 신부와 준후는 예상외로 일이 오래 걸리는 지 연락이 없었다.

이틀이 지나도 별다른 조짐이 나타나지 않자 밤에 심심해진 승희는 현암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들은 백호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워 놓고 그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근데 말야, 현암 군.”

“음?”

“연희 언니 말야. 어떻게 하면 좋지?”

“뭘 어떻게 해?”

“연희 언니가 라미드 우프닉스인 게 틀림없잖아. 그렇다면 조 만간 우리가 언니를 만나서 도움을 얻어야 할 게 아니냐는 말이 지.”

퇴마사들은 몇 년 동안이나 연희와 접촉하지 않고 있었다. 공연히 연희에게 연락을 취했다가는 꼬리를 밟힐 것 같은 걱정 때 문이기도 했고, 나아가서는 연희가 공연히 그들의 험악한 일에 말려들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연희는 그들이 죽은 것으로 알고 몹시 슬퍼했고, 지금은 사회봉사 활동을 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 내고 있다. 현암과 승희는 아직까지 이번에 박 신부가 나간 것이 연희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박 신부는 깊은 고심 끝에 혼자 연희를 만나러 간 것이다. 연 희는 퇴마사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녀를 만나는 것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니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지만 만에 하나 연희가 동조해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평소 퇴마사들과 가까웠던 연희의 주변 에 아직까지 수사망이 있다면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 때문에 박 신부는 현암이나 준후, 승희 등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간 것이다. 원래 박 신부는 아무 일이 없으면 금방 현암에 게 연락을 취했을 터였다. 그러나 별생각 없이 갔던 곳에서 수아 가정령의 여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줄은 박 신부로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지금 박 신부는 일단 연희의 집에 묵으면 서 연희와 함께 그간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게다가 약간의 부상도 입었고 아직 수사망 혹은 검은 지하드나 칼키파 등의 눈이 주변에 있을까 염려스러워 현암 등에게는 연락 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현암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건 『해동감이 해석된 뒤에 하기로 했잖아? 성당 기사단 장인가 하는 자의 말만 듣고 연희 씨와 접촉하는 건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니야. 우리가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그때 연 락해도 늦지 않아.”

“그건 이론적으로 그런 거구.”

“그러면?”

“감정적으로는 그렇지 않잖아.”

“뭐가 안 그래?”

“야, 이 목석아. 넌 보고 싶지도 않냐? 한 가족이나 마찬가진데.”

“조금 기다리면 만나게 될 건데, 뭘.”

“그리고 세크메트의 눈도 연희 언니가 한쪽 가지고 있어서 지 금은 무용지물이잖아. 그것도 받아야 하는데.”

퇴마사들이 지니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은 지난번 홍수 사건 때 한쪽을 연희가 지니고 있었다. 그 이후로 퇴마사들이 동굴에 들어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서 세크메트의 눈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혹시라도 그것을 만졌다가 연희와 생각이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박 신부는 일단 그것을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끔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당장은 급한 일이 없잖아.”

현암은 그 말만 남기고 차 시트에 몸을 묻었다. 그러나 승희는 궁금하다는 듯 종알거렸다.

“연희 언니도 벌써 삼십 대가 넘었네. 늙었을까? 응? 어떨 거 같아?”

“내가 아냐?”

“흠, 아냐. 워낙 미인이니 늙지는 않았을 거야. 성숙미를 물씬 풍기는 멋있는 여인이 되지 않았을까? 어때?”

“궁금하면 투시라도 해 보지그래?”

“투시? 그걸로 겉모습을 어떻게 아냐? 마음은 읽을지언정….”

“야, 심심한데 대답 좀 해 봐라. 안 그러면.”

그때 뭔가 심상찮은 느낌이 휙 승희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백호의 아파트 아래쪽,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 이상해. 현암군!”

그 소리에 현암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가?”

“이상한 능력을 가진 녀석이 오고 있는 것 같아.”

“음? 암살자야?”

“몰라. 마음이 안 읽혀.”

그러자 현암은 눈을 빛냈다.

“어디야?”

“314동 현관 부근.”

현암은 재빨리 운전석에 앉아 조용히 차를 몰고 314동쪽으로 이동했다.


“저 남자냐?”

“응.”

314동 앞에는 조그마한 체구의 한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주변 을 둘러보고 있었다. 밤인데다가 먼발치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 았지만, 분명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그자는 아파트로 들어 가려는 것 같진 않았지만, 주변을 조용히 둘러보는 태도로 보아 뭔가 수상쩍어 보였다.

“안 잡을 거야?”

“조금 기다려 봐. 서두를 것 없어.”

“왜?”

“아직 저자가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다른 한패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시간이 지나자 저만치에서 이번에는 여자 하나가 서서히 걸어왔다. 역시 먼발치라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금발 머리가 힐끗 보이는 것이 서양 여자 같았다.

“저 여자는 어때?”

“저 여자도 안 읽혀. 상당한 자들인가 봐. 나가서 잡자.”

“아직 아직!”

그 여자는 남자를 못 본 것처럼 쓱 지나쳐 갔다. 그러다가 여자가 아무도 없는 아파트 앞의 놀이터로 걸음을 옮기고 나자 남 자도 서서히 그 뒤를 따라갔다.

“백호 씨에게 조심하라고 전화라도 할까?”

“조금 있다가 너 왜 이렇게 안달이냐?”

“빨리 잡고 집에 가구 싶어서.”

“허참.”

현암은 승희와 입씨름하기를 포기하고 놀이터 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러다가 놀이터에서 오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서 현암이 차를 세웠다.

“뭔가 더 안 읽혀?”

승희는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다가 이윽고 눈을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만만한 자들이 아닌걸?”

현암은 고개를 끄덕인 뒤 승희에게 말했다.

“내리자.”

“왜?”

“일단 부근으로 가보자구.”

승희를 끌고 현암은 놀이터 가로 가서 주변에 심어진 나지막 한 관목 더미 뒤로 몸을 숨긴 채 서서히 그들이 향한 방향 쪽으 로 접근했다. 그리고 관목을 조금 헤치고 놀이터 안쪽을 들여다 보다 흠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남자와 여자 두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 사람은 두 사람에 비해 체격이 크고 키도 백팔십 센티미터가 훨씬 넘어 보였는데, 검은 머리의 외국인이 었다.

놀이터의 가로등 덕분에 그 사람 말고도 다른 두 사람의 얼굴 도 희미하게 보였다. 앞서 아파트 앞을 살피던 남자는 창백하지 만곱살한 얼굴에 코가 높은 서양인이었고, 금발 여자는 통통한 얼굴에 섬뜩할 정도로 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현암과 승희는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해 보았지만, 그들이 무 척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어 좀체 들리지 않았다. 일단 얼굴 을 확인한 현암과 승희는 놀이터에서 약간 물러섰다.

“이상한데?”

“뭐가?”

“저들은 외국인이긴 하지만 모두가 미국인 아니면 유럽인 같지 않아?”

“응.”

“백호 씨를 습격한 건 어새신이야. 아랍인으로 이루어진 자들이라구. 약간 미심쩍은데…………….”

“글쎄?”

“그런데 저 놀이터에 있던 키 큰 남자는 어떻게 된 거야? 왜 네가 몰랐지?”

“음? 난들 알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 있잖아, 분명히,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다니까.”

그때 놀이터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 현암과 승희가 고개를 돌 렸다. 코 큰 남자와 금발 여자가 나와 아파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키 큰 남자는 그들과 함께 가지 않았다. 현암은 재 빨리 그들의 방향을 확인한 다음 승희에게 말했다.

“백호 씨에게 전화해.”

그러고 나서 현암은 키 큰 남자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놀이 터 관목을 다시 들추었다. 그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놀이터의 출입구가 두 곳이기는 했지만 현암과 승희가 보고 있었으므로 그 남자가 사라져 버린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승희도 남자가 없어진 것을 알고 놀라서 물었다. 그런데 이번 에는 저만치에서 노인 하나가 비틀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도 서양인이었는데, 곧바로 백호의 아파트를 향해 가고 있었다.

“왜 이리 사람이 많지?”

승희가 중얼거리면서 앞서 놀이터를 빠져나간 두 사람 쪽으로 가려는 순간, 현암이 승희를 만류했다.

“잠깐, 좀 더 살펴보고.”

그 노인은 아파트로 곧장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아파트 문 앞 에서 코 큰 남자와 금발 여자를 발견하고는 그들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들과 잠시 대화하는 것 같더니, 그 세 사람 은 방향을 아파트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키 큰 남자는 어디로 간 거고, 저 노인은 또 뭐야? 응?”

승희가 중얼거리는데 현암은 이상한 예감에 노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보다가 어떤 느낌이 들었다. 아까 그 노인의 걸음걸이 는 비틀거리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긴장한 듯 팽팽했다. 그리고 몸에도 야릇한 기운이 풍기는 것 같았다. 그 기운은 아주 희미하 기는 했지만 현암에게도 낯설지 않은,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친숙한 느낌이었다.

그들이 아파트를 나서자 현암이 승희에게 말했다.

“너, 백호 씨에게 연락하고 이 근처를 살펴라. 난 저 사람들을 좀 살펴야겠어.”

그러자 승희가 눈을 크게 떴다.

“나 혼자 있으라구?”

“무섭냐?”

“그건 아니지만….. 아까 없어진 남자가 아무래도 찜찜해.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르겠고 말야. 아무튼.”

“여차하면 날 불러.”

“뭘로? 이럴 때 세크메트의 눈이 있으면 좋을 텐데…”

“휴대 전화를 걸어서 한 번 울리면 바로 끊어. 그러면 내가 달려올 테니까.”

“휴대 전화는 하나뿐이잖아.”

“넌 그럼 백호 씨 집에 가 있으라구. 거기서 연락해.”

“아니, 이 야심한 밤에 여자 홀로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가 있으라구? 도대체가….”

“백호 씨가 남이냐? 쓰잘데 없는 소리하지 마.”

그 말만 남기고 현암은 핸드폰을 재빨리 뒷주머니에 꽂고 세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승희는 혼자 투덜투덜하다가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렇다면 아까 놀이터에 있던 키 큰 남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어떻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제길・・・・・・ 오싹하네.’

승희는 중얼거리면서 아파트 입구 쪽으로 깡충거리면서 뛰어 갔다.


세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서 현암은 점점 긴장이 느껴졌다. 한 국의 평범한 어느 아파트에 외국인이 셋씩이나, 그것도 승희가 투시할 수도 없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만 세 명이나 모인 것을 결 코 우연이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세 명 중 곱살한 얼굴의 남자와 금발 머리의 여자는 한패인 것 같았지만, 노인은 아무래도 아닌 듯했다. 노인은 처음 에는 힘을 감추고 있었으나 차차 사람들의 인적이 뜸한 곳으로 걸음을 옮겨 감에 따라 달라졌다. 현암은 그의 몸에서 점점 묘한 기운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 점으로 볼 때 그 노인은 나머지 두 명과 친한 관계에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노 인에게서 풍겨지는 느낌은 현암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은 아파트를 벗어나 한참을 걸어 주변의 어느 어둡고 후 미진 공사장 터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찾는 것을 보니, 노인과 두 명의 남녀는 아마도 남의 눈 을 피해 한판 벌일 모양이었다.

그러나 현암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들 중 어 느 한편은 분명 백호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본 다면 다른 한편은 백호를 도와주러 온 것이며, 그 때문에 백호를 해치러 온 자를 맡으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호가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단 말인 가? 백호가 다른 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것은 확실한 사실이 었으니까.

‘그렇다면 저들은 백호를 해치러 온 자들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남겨 두고 온 승희와 백호가 은근히 걱정되 기도 했다. 그렇지만 현암은 다시 궁리해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백호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 은 우연치고 너무 기이하고도 말이 되지 않는 우연이니까.

그들 중 어느 한편은 어떻게든 백호와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 없다고 현암은 단정 지었다. 혼자 두어도 승희의 능력이 막강하 니 만큼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는 별일 없을 것 같기도 했고…………. 현암은 그런 생각으로 그들과 백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몸 을 숨기며 그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더 가까이 가 보고 싶었지만 그들도 능력자가 틀림없으니만치 너무 접근하면 발각될 우려가 있었다. 간신히 놓치지 않을 정도로 최대의 거리를 두는 편이 안 전했다.

세 사람은 어두운 공사장의 벽만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현암은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바싹 거리를 좁혀 서 건물 벽에 귀를 댔다. 건물 안에서는 뭐라고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안타깝게도 현암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곧이어 벽이 저르릉 울렸다. 호되게 울린 탓에 엿듣던 현암의 귀가 다 멍해졌다. 현암은 놀라서 얼른 벽에서 귀를 떼었다.

‘이게 뭐야?’

벽에서 전해진 진동의 충격은 상당했다. 그런데 그 진동은 어 딘가가 이상했다. 현암 역시 진동을 이용한 사자후를 쓸 줄 알았 으며 과거 블랙서클의 히루바바의 음파 주술에도 대항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진동은 그와는 달랐다. 벽이 그토록 거칠게 울렸는데도 큰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음파라기보다는 지진파 같은 것을 내는 것 같았다.

좀 더 신경을 집중해 보니 현암이 서 있는 땅과 그 주변이 미미 하게나마 흔들리는 듯했다. 그와 더불어서 찰랑거리는 맑은 소리 같은 것이 연속해서 들려왔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 들어가야 하나?’

현암은 다소 고민이 되었다. 공연히 남들 싸우는데 이유도 모 르고 끼어들 것은 없었으니까.

‘우연히 지나친 것처럼 하고 들어가 볼까?’

현암은 원래 영능력자가 아니니 힘을 숨기고만 있으면 들키지 는 않을 것 같았다. 현암은 얼빠진 사람 흉내를 내기로 마음먹었 다. 무엇보다도 호기심이 들어서 견딜 수 없었다. 더구나 노인의 몸에서 풍겨지던 기운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친숙하게 느껴져서 그 호기심을 더욱더 부채질했다.

현암은 깊이 두어 번 호흡을 한 뒤에 공력을 안으로 착실히 갈 무리하고 일부러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문턱으로 들어서는 순간, 현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밖에서 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무척이나 치열했던 것이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은 금발 머리의 여자였다. 그녀는 투명하고 아주 맑은 수정 막대기 같은 것을 여러 개 이은, 밧줄 같기도 하고 체인 같기도 한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때마 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 그 수법은 구절(節鞭*을 휘두르는 무술과도 흡사했고 채찍을 휘두르는 수법과도 흡사했다. 그러나 그 수정 체인은 가닥이 훨씬 많아서 구절편보다도 훨씬 더 현란하게 움 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곱살한 얼굴의 남자는 여자가 체인을 휘두르는 사이사 이에 간간이 손을 내뻗고 발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때마다 남자의 손이 가리킨 벽이나 바닥이 흔들리거나 부서져 나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진동파 같은 것으로 공격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현암이 자신의 눈을 의심한 것은 그들의 그런 기이한 공격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 맞서 노인은 그리 심하게 움직이지 도 않고 주로 방어만 하고 있었는데, 그의 몸에 선명하게 떠올 라 있는 것은 바로 박 신부의 몸에서 나오던 것과 같은 연녹색의 오라였던 것이다. 다만 박 신부처럼 거대한 오라 막이 몸 전체를 보호하지는 않았다.

세숫대야만 한 크기의 오라 구체가 그의 몸에 깃들어 여기저 기 움직이면서 여자의 수정 체인과 남자의 진동파를 계속 튕겨 내고 있었다. 비록 박 신부만큼의 강력한 힘은 없지만 그 사용만 은 훨씬 능숙하다고 할 수 있었다.

커다랗게 빛나는 오라 구체가 몸 주위를 돌면서, 반짝거리며 빛을 영롱하게 반사하는 수정 체인을 막아 민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무섭다기보다는 신기하고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현 암은 그 오라를 보는 순간, 마음을 정했다. 악한 의도를 가진 사 람이 박 신부와 유사한 오라를 발출할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동양, 특히 중국에서 자주 사용된 기형(形) 병기, 막대기를 일컬어 곤)이 라고 하는데 두 개의 곤을 이은 것을 쌍절곤, 세 개의 곤을 이은 것을 삼절곤이라 한다. 그러나 아홉 개의 곤을 이은 것은 너무나 잘 휘어지기 때문에 곤이라 하지 않고 채찍 편자를 붙여 구절편이라 부르는 것이다. 채찍과 흡사한 효용이 있으며 부드러움과 강함을 둘 다 지니고 있어 사용하기 어려운 무기 중의 하나로 꼽힌다.


“어이쿠!”

의도적으로 크게 지른 고함 소리에 어지럽게 맞붙어 싸우던 세 사람이 멈칫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찰랑 소리와 함께 여자의 수정 체인은 어디로 들어갔는지 금세 자취를 감췄고, 곱살한 얼굴의 남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조용히 팔짱을 끼었으며, 노인 의 몸의 오라도 금방 사라져 버렸다.

“이런 밤중에 여기서 뭣들 하는 거요. 엉?”

현암은 일부러 술에 취한 것처럼 발걸음을 흐트러뜨리며 안으 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남자가 미간을 흠칫하더니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현암 앞으로 조용히 걸어왔다.

“겟 아웃 오브 히어!”

남자는 상당히 딱딱한 악센트로 현암에게 말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싸늘한 말투 하나만으로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도망 쳤을 터였다. 그러나 현암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뭐시기? 뭐시기? 난 무식해서 몰라. 뭐라 그러는 거야?” 

그러면서 현암이 남자에게 엉겨 붙듯이 몸을 기대려 하자 남 자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 미터 정도 옆으로 비켜섰다. “움직이면서도 머리와 상체는 꼼짝하지 않으니 대단하기는 하 군. 그러나 그 정도는 주기 선생의 힐기보법(法)에 비하면 반에도 못 미치는 재주다.

현암은 속으로 상대의 능력을 대강 가늠하면서 일부러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외쳤다.

“뭐야, 이거?”

남자는 다시 입술을 열어 아주 서툰 한국어 억양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꺼져!”

남자가 한 번 손짓을 하자 현암의 아랫배에 상당한 타격이 와 닿았다. 물론 남자는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힘을 많 이 쓴 것은 아닌 듯했지만, 현암이 맞아 보니 보통 사람이 맞으 면 그대로 기절할 정도의 타격이었다. 천정개혈대법을 이루어서 배 부분에 공력을 소통시키지 못했다면 현암도 심한 아픔을 느 꼈을 것이다.

현암은 일부러 뒤로 우르르 물러서면서 넘어지는 척하려 했는 데 누군가가 현암의 등 뒤를 살짝 받쳐 주었다. 짐짓 놀란 표정 을 지으며 돌아보니 그 사람은 아까의 노인이었다.

“돌아가세요. 위・・・・・・ 음………….. 위엄합네다.”

노인은 미소를 띠며 서툰 한국어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보자 현 암은 어찌 되었든 노인을 꼭 도와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현암은 고의로 노인을 밀쳐 내고 아픈 듯 캑캑거리다가 소리를 질렀다.

“당신 뭔데 다짜고짜 사람을 쳐. 엉? 정말 나하고 한번 해보겠 다는 거야. 엉?”

현암은 휘청거리면서 팔을 들어 남자를 칠 듯이 달려들었다. 그런 현암을 보고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비웃는 표정을 짓더 니 뒤로 오십 센티미터 정도 또 번개같이 물러섰다. 보통의 경우 같았으면 그 거리로도 충분히 주먹을 피했을 터였지만 상대는 현암이었다.

현암은 그 점을 미리 어림하여 주먹을 휘두르면서 번개같이 한 발 더 내디뎌 남자의 아래턱을 정확하게 후려갈겼다. 그것도 암암리에 사성(四)의 공력을 실은 상태로 말이다.

남자는 머리가 핑 돌아가면서 벽까지 날아가서 부딪히고는 다 시 튀어서 바닥에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보자 여자와 노인의 안색 이 해쓱하게 질려 버렸다.

현암이 과장되게 큰 소리로 하하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하하! 맛이 어떠냐? 이래 봬도 복싱을 한 지 오 년이 넘은 몸 이라 이거야!”

현암의 사성 공력을 담은 주먹은 보통 사람이 맞으면 죽지는 않는다 해도 단번에 병원으로 실려 갈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런 그 주먹을 방심한 상태에서 맞았으니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단 방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순간, 여자가 긴장하면서 손을 휙 내뻗었다. 그러자 여자 의 손목에서 차르릉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수정 체인이 뱀처럼 길게 쏟아져 나와 현암에게 날아들었다. 그것도 정확하게 현암 의 양미간을 노리면서.

현암은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넘어지는 척 체인을 피했지만, 여자가 손목을 떨치자 체인은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어 계속 현암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다급해진 현암은 더 이상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재빨리 오른팔을 들어 체인을 막았다.

현암의 오른팔에 체인이 맞자마자 여자가 손목을 휘둘렀고 체인은 뱀처럼 현암의 손목을 감았다. 연달아 여자가 체인을 잡 아당기자 체인은 다시 촤르륵 풀려 여자의 손목으로 감겨 들어 갔다.

현암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면서 여자를 노려보았 다. 현암의 오른팔 부분의 옷이 가위로 잘라 낸 것처럼 여러 조 각이 되어 바닥에 너풀거리며 떨어졌다. 체인을 이루고 있는 수 정토막들은 하나하나 모두가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날을 지니 고 있었던 것이다. 현암이 만약 공력을 돌려 팔을 보호하지 않았 다면 필시 팔에 구멍이 뚫렸을 뿐만 아니라 팔목이 가위로 자른 것처럼 토막토막 나 버렸을 터였다.

현암의 옷만 잘렸을 뿐, 팔에 생채기 하나 없는 것을 보자 여 자는 몹시 놀라면서 외쳤다.

“아이언 암?”

여자는 교활하게 양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가닥 의 수정 체인이 현암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한 가닥은 얼굴을 향 했고 한 가닥은 심장을 똑바로 겨냥하고 있었다. 현암은 여자의 수법이 몹시도 잔혹한 것에 화가 치밀어 양손을 펴서 두 가닥의 체인 끝을 손바닥으로 막고 체인을 꽉 잡았다.

여자는 현암이 맨손으로 체인을 잡자 너무도 놀라 양손으로 체인을 마구 흔들어 댔다. 보통의 경우 같았으면 손바닥에 체인 날이 박혀 들어갔을 테지만 현암의 손은 그야말로 끄떡도 없었 다. 천정개혈대법을 하기 이전부터 현암의 오른팔은 공력으로 보호하면 거의 무쇠와 같았는데 지금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물론 팔이 정말 무쇠로 변한 것이 아니어서 둔기로 치면 그래 도 아픔을 느끼지만, 이렇게 날이 있는 것으로 베는 것에는 대체 로 완벽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 다만 아직 천정개혈대법의 육단 계 이상은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서 몸 전체를 그렇게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두 팔, 특히 양손바닥에 대해서만은 현암은 각 고의 노력으로 공력의 집중도를 높여 왔다. 유사시에 가장 민첩 하게 움직여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손이기 때문이 다. 아무튼 그 덕분에 약간의 아픔은 느껴졌지만 무시무시한 수 정체인을 현암은 맨손으로 쥘 수 있었다.

현암은 수정 체인을 쥔 손에 힘을 주어 휙 잡아당기려 했지만 여자는 어깨를 휘청하면서도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결사적으 로 체인에 달라붙었다. 체인을 통해 ‘투’ 자결로 공력을 가해서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었으나 현암은 그렇게 하지 않 고흥 하고 비웃으며 여자를 보다가 노인에게 물었다.

“어르신, 제 말 알아들을 수 있나요?”

노인은 놀란 듯 멍하니 현암을 보고 있다가 급히 대답했다.

“아…………. 예, 약간・・・・・・ 약간은…….”

“이 여자, 뭐하는 여잡니까?”

“오우……. 그건・・・・・・ 그것은…….”

노인은 말을 이으려다가 갑자기 놀라며 휙 하고 오라를 뿜었 다. 그러자 현암의 등 뒤에서 뭔가가 낑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 는 것 같았다. 기척도 전혀 없었는데 무슨 일일까 하고 현암이 돌아보자 아까 현암에게 맞아 넘어졌던 남자가 일어나 있었다. 남자의 아랫입술은 터졌고 뺨이 퉁퉁 부어올라서 곱살하던 얼 굴은 형편없이 찌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방심한 상태에서 그만 한주먹을 맞고도 몇 초 지나지 않아 몸을 일으켰다는 것은 대단 한 일이었다.

현암은 체인을 잡은 채 그 남자에게 말했다.

“당신, 우리말 할 줄 알아?”

그 순간, 남자가 손을 마주 모으면서 무어라고 중얼거리자 사 방에 차가운 느낌이 감돌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섬뜩하 고 음산한 기분. 현암이 뭘까 하는 찰나 뭔가가 휙 날아들면서 현암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도 아 릿한 아픔이 오면서 현암의 어깨 부분의 옷이 지익 찢겨 나갔다.

“섀도우 비스트(shadow beast)!”

노인은 크게 외치면서 오라 구체를 손끝으로 옮겨 다시 현암의 앞을 막아섰다. 현암은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공력을 팔에 집중해 십자 막기 자세로 앞을 막자 뭔가가 현암의 팔을 치고 팅팅 튕겨 나갔다.

‘제길! 저놈도 무슨 주술사였나? 정령 같은 걸 불러낸 모양이 군!’

섀도우 비스트라고 부르는 그 존재는 숨 쉴 틈도 없이 현암을 사방에서 덮쳐 왔다. 보이지 않는 현암으로서는 온몸에 공력을 있는 대로 돌리면서 대비하고, 공력이 통하지 않는 머리를 양팔 로 보호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월향검을 날리면 그따위 정령쯤이야 처치하겠지만 월향검을 이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노인도 열심히 오라 구체 를 움직여서 달려드는 섀도우 비스트들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 찰나 여자가 틈을 놓치지 않고 체인을 휙 잡아당겼다. 현암 은 섀도우 비스트를 막느라 체인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노 인이 다시 코앞에서 섀도우 비스트 하나를 쳐 내자 현암은 그에 게 외쳤다.

“당신은 이놈들이 보입니까?”

그때 여자가 앙칼진 소리를 크게 내지르면서 두 가닥의 체인 을 휘둘렀는데 그 체인은 현암이 아니라 노인의 드러난 몸을 향 하고 있었다. 현암은 얼른 팔을 뻗어 체인을 막으려 했지만 남자 가 급히 진동파를 한 방 내쏘았다.

진동파가 옆구리에 맞자 온몸이 저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현암은 체인을 한 가닥밖에 쳐 내지 못했고, 노인은 체인 을 정통으로 가슴에 맞았다. 그러자 노인의 왼쪽 어깨 부분부터 오른쪽 허리 부분까지의 옷이 주욱 잘리면서 무엇인가가 땅에 털썩 떨어졌다. 붉은 천으로 겹겹이 싼 손바닥 하나 정도 크기의 평평한 물건이었다. 그것이 떨어지자 노인은 안색이 변하면서 몸으로 그것을 덮쳐 안았다.

여자가 체인을 당겼다가 노인을 향해 휘둘러 대는데도 노인은 자신의 몸보다 그 물건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현암은 큰 소리를 지르면서 오른팔을 뻗어서 체인 한 가닥 을 튕겨 내고 한 가닥을 손으로 잡았다. 그사이 섀도우 비스트들 이 현암의 몸을 타다닥 치고 지나가는 통에 현암은 균형을 잃고 체인을 다시 놓쳤다.

“귀찮은 놈들!”

현암이 화가 나서 공력이 충만한 오른손을 허공에 휙 휘둘렀 는데 요행히도 섀도우 비스트 한 마리가 그 손에 맞은 모양이었 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터져 나가는 듯도 하고 울부짖 는 것도 같은, 낑 하는 괴이한 소리가 들리면서 자그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현암은 한 놈을 해치우자 자신감이 생겨서 손을 어지럽게 허 공에 휘두르며 기세 좋게 고함을 쳤다. 그러자 남자도 얼굴색이 변하며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손바닥을 맞붙였다.

‘제길! 녀석이 또 재주를 부리면 정말 곤란해지겠다!’

아까 섀도우 비스트 한 마리를 잡은 것은 우연에 불과했기 때 문에 아무리 현암이 손을 휘둘러도 섀도우 비스트를 또 잡을 수 는 없었다. 더구나 남자가 뭔가 다른 술수를 부리려는 듯하자 현 암은 조금 마음이 급해져서 손에 잡고 있는 체인에 ‘투’ 자 결의 공력을 불어 넣었다.

“아악!”

육성)의 공력이 체인에 가해지자 그것을 잡고 있던 여자 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다 가 체인을 놓치고 뒤로 넘어졌다. 현암은 체인을 크게 한 번 휘 두르며 방향을 바꿔서 다시 공력을 가한 후 체인을 남자에게 집 어 던졌다.

그러나 체인은 날아가다가 허공에서 뭔가에 부딪혀 폭발해 버 렸다. 아마도 남자가 정령을 조종하여 체인을 막자 체인과 섀도 우 비스트 한 놈이 같이 폭발한 것 같았다. 폭발에 수정 조각이 사방으로 눈부시게 튀어 올랐다. 아름답기는 했지만 그 파편에 맞는 것은 대단히 위험했다.

현암은 얼른 노인의 몸을 들어 올리면서 저만치로 껑충 뛰어 서 파편을 피했다. 그때 남자가 주문을 다 외운 듯 손뼉을 짝 치 자 아까보다도 훨씬 더 음산한 기운이 주변에 감돌기 시작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아까의 섀도우 비스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놈을 불러낸 듯했다.

‘저놈 특기는 소환술인가?’

현암은 혹시라도 안명부가 없나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 았지만 준후의 부적은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주변의 공기가 심 상치 않은 것이 이대로는 위험할 것 같았다.

‘날 원망마라.’

현암은 속으로 외치면서 ‘탄’자 결의 구체를 손끝에 맺었다. 세 개의 구체가 맺히자 현암은 손을 남자 쪽으로 돌리며 구체 한 개를 내쏘았다. 그러나 구체는 날아가다가 중간에서 뭔가에 부 딪힌 듯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현암은 다시 두 개의 구체를 약 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연속으로 내쏘았다. 다시 한 개의 구체가 허공에서 폭발했지만 나머지 한 개의 구체는 남자도 채 막지 못 했다.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뒤로 날아간 남자의 몸이 벽에 호되게 부딪혔다가 맥없이 앞으로 털썩 쓰러지자 주변에 감돌던 을씨년 스러운 기운도 서서히 걷혔다.

현암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일단 쓰러진 남자가 혹시 죽 지는 않았나 살펴보았다. 남자는 ‘탄’ 자결을 정통으로 맞아 그 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호리호리한 외모와는 달리 굉장히 강인한 녀석인 것 같았다.

현암의 공력을 맞고 쓰러진 여자는 아직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어서 일어서려면 한 시간 이상은 지나야 할 것 같았다. 그 제야 안심한 현암은 쓰러져 있던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습니까?”

현암이 부축하자 노인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러다가 노 인은 땅에 아직도 천으로 싼 물건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신음

소리를 내며 급히 몸을 숙여 그것을 주우려 했다.

현암은 가볍게 웃으며 그것을 집어서 노인에게 건넸다.

“그게 뭡니까?”

노인은 현암이 그 물건을 자신에게 건네자 안심한 듯 그것을 품에 넣더니 성호를 그어 보였다. 그러고 나서 현암에게 말했다. 

“고맙습네다. 절망…………… 절망 당신은・・・・・・ 우수한…… 아니 대단한………… 사람입네다…………. 정말 놀랐습네다.”

현암은 악의 없이 씨익 웃어 보였다.

“절망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굽니까? 그리고 당신은 또 누구죠?”

“아아……………. 나는………… 나는 아우구스티노요. 당신은? 그러는 당신은?”

“혹시 사제십니까?”

“?”

노인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 않자 현암은 좀 서툰 영어로 다시 물었다.

“혹시 신부님이신가요?”

노인 역시 서툰 영어로 대답했다. 말투에는 이탈리아어 비슷한 억양이 많이 섞여 있었다.

“아아, 아닙네다. 나는 수사입네다.”

아우구스티노는 퍽 나이가 많았고 능력도 상당했는데 아직 신 부가 되지 않고 수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좀 신기했다. 하지만 현암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물었다.

“그러면 저들은 누구입니까? 아우구스티노 수사님.”

그러자 노인은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정확히는 저도 모릅네다.”

노인은 쓰러진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현암에게 말했다. 

“저 여자는 마녀 협회의 사람인 것 같고. 저 남자는 누군지 정 확히는 모릅네다. 다만 모종의 암살 조직에 있는 자가 아닐지.” 

그러자 현암이 조금 인상을 쓰며 물었다.

“혹시 검은 편지 결사가 아닙니까?”

현암이 대뜸 그런 질문을 하자 노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검은 편지 결사에 대해 어떻게 아십네까?”

“친구 한 사람이 그들에게 위협을 받고 있어서요. 그런데 수사님은 여기 어떻게 오시게 된 겁니까?”

“나는…………… 나는…………… 미스터 백을 만나러 왔습네다.”

“백호 씨 말이군요.’

“아십네까?”

“잘 압니다. 그러면 저자들은 백호 씨를 해치러 왔나 보군요.”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이것을 노리고 온 것입네다. 내가 여기에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면서 노인은 자신의 품에 넣은 물건 위를 쓰다듬어 보였다. 

“대단히 귀중한 물건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것이지만. 그런데 당신은 누굽네까?”

현암은 그저 담담히 웃어 보였다.

“백호 씨와 연관이 많은 사람일 뿐입니다. 하여간 수사님이 오 신 것은 검은 편지 결사와 연관이 있는 용무겠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현암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검은 편지가 노리고 있다는 친구분이 혹시 미스터 백 아닙네까?”

“맞습니다. 그런데 왜 검은 편지 결사가 백호 씨를 노리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리고 수사님은 무슨 일로 백호 씨를 찾아오신 겁니까?”

그 질문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현암이 자신을 구해 주었더라도 그 이상은 대답해 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백호 씨를 만나기 전에는 더 이야기할 수 없습네다. 죄송합네다.”

현암은 있을 법한 일이라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가시죠. 백호 씨를 만나러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군요. 흠, 그냥 내버려 두면 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 니 ・・・・・・ 일단 끌고 가죠. 끌고만 가면 백호 씨가 감옥에 넣든지 추방하든지 알아서 처리해 줄 겁니다.”

현암은 두 사람을 한 손에 한 명씩 가볍게 들어 올린 다음 앞 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현암이 두어 걸음을 옮겼을까 말까 했을 때, 현암의 허리춤에서 찌리링 하는 요란한 소리가 한 번 울렸 다. 승희가 전화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현암은 깜짝 놀라서 두 사람을 그 자리에 던져 놓고 달리기 시 작했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영문을 몰라 “헤이! 헤이!” 하면서 현암을 소리쳐 부르며 뒤따라 왔지만 현암은 돌아볼 겨를도 없 이 내처 달리기만 했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땅에 엎어진 두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은 그들을 놓아둔 채 있는 힘을 다하여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는 현암의 그림자를 따라 달렸다.

현암이 백호의 아파트 앞으로 돌아왔을 때, 아파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파트로 올라가다가 언뜻 보니 아파트 경비실 앞에 경비원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 았으나 숨은 쉬고 있었다.

현암은 엘리베이터를 누르려다가 엘리베이터가 십오층, 즉 백호가 살고 있는 층에 멈추어 있는 것을 보고는 냅다 계단으로 달려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보다는 공력으로 몸을 솟구치는 현암 의 다리가 더 빨랐다. 십오층에 도달하자 백호의 아파트 문이 보 였다.

현암은 문의 손잡이를 돌려 보았지만 손잡이는 잠겨 있었다. 안에서는 승희인 것 같은 여자의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 는 듯했다. 현암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월향검을 꺼내 검기를 주입한 다음 문손잡이 주변에 박아 넣고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 자쇠로 된 문의 손잡이 주변이 둥글게 오려내졌다.

지체할 겨를도 없이 현암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집 안은 격투가 한바탕 벌어진 듯,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문 득 저만치 쓰러져 있는 승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백호도 헐 떡거리면서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앞에는 아 까 놀이터에서 유령처럼 사라졌던 검은 머리의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현암이 들어오자 놀라지도 않고 쓱 현암을 바라보더니 다시 백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호는 헐떡거리다가 현암을 바라보고는 몹시 반가운 듯 소리를 쳤다.

“현암 씨!”

현암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천천히, 그러나 긴장된 걸음걸 이로 백호 앞으로 다가가 그의 앞을 막고 섰다. 그리고 그 남자 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쓰러져 있는 승희를 바라보았다. 승희 는 기절한 것 같았지만 역시 호흡은 정상인 듯했다.

그제야 현암은 키 큰 남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넌 누구지?”

그때까지 꼼짝도 않고 서 있던 남자는 고개를 한 번 까딱하며 씩 웃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암은 괜스 레 시간 끌 것 없다는 생각으로 주먹에 공력을 가해서 남자의 머 리 부분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남자는 유령처럼 스르르 현암의 주먹을 피했다. 현암 도 남자가 이 정도의 주먹은 간단히 피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다음 순간 현암은 남자의 머리가 피하는 방향으로 다른 손 주 먹을 휘둘렀다. 남자는 또다시 스르르 현암의 주먹을 피했다. 현암은 먼저 뻗었던 팔을 굽혀 그 팔꿈치로 남자를 노렸지만 남자는 그것마저도 피했다. 최후로 현암은 몸을 빙글 돌리면서 넓게 돌려차기를 했으나 남자는 어느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현 암의 네 번째 공격마저도 피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은 일 초도 걸리지 않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현암은 흥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한가락 하는군.”

남자는 다시 고개만 까딱하면서 현암에게 목례를 하는 것 같 았다. 현암은 다시 한번 호흡을 깊이 한 다음 전광석화처럼 남 자에게 달려들어 소나기같이 주먹을 퍼부었다. 삽시간에 십여 차례나 주먹을 퍼부어 대는데도 남자는 기이한 동작으로 몸을 비틀고 구름처럼 움직이며 현암의 날카로운 공격을 모조리 피 했다.

십여 차례나 주먹을 피하고 나자 남자의 몸이 균형을 잃은 비 스듬한 자세가 된 것을 놓치지 않고 현암은 번개같이 몸을 숙이 면서 다리를 길게 펴서 남자의 다리를 휩쓸어 갔다. 그러나 남자 는 몸이 허공으로 기울어져 있는데도 두 다리를 위로 들어 올려 현암의 다리를 기가 막히게 피해 버렸다.

현암은 약이 올라 다리를 휩쓸던 자세 그대로 위로 몸을 용틀 임 치며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차기를 했다. 남자는 마치 풍선처럼 몸을 두둥실 허공으로 솟구쳐 올리면서 그 공격마저도 피했다. 

‘한가락 정도가 아니라 아주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현암은 입술을 깨물고 공력을 크게 운행했다. 미꾸라지같이 빠져나가는 상대는 일단 가까이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다. 현암은 양손에 ‘흡’ 자 결의 공력을 팔성(八)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남자의 몸이 아래로 내려오려는 순간 ‘흡’ 자결의 공력을 발해 남자의 몸을 끌어들이려 했다.

놀랍게도 남자의 몸은 현암의 ‘흡’ 자 결에도 끌려오지 않았 다. 오히려 현암의 손이 향한 방향에 걸려 있던 벽걸이 장식물이 벽에서 떨어져 나와 현암의 손으로 날아왔고 주변의 종이와 가 벼운 물건들이 현암의 손으로 어지럽게 날아들었을 뿐이었다. 남자의 몸이 끌려오지 않자 현암은 화가 치밀어 올라 순간적 으로 공력의 운행을 바꾸어서 ‘발’ 자 결의 공력을 가했다. 그러 자 현암의 손으로 끌려들어 오던 물건들에 반대 방향의 힘이 가 해졌다. 약한 물건들이 허공에서 깨어지거나 찢어지면서 방향을 바꾸어 남자를 향해 우박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 조각 하나하나 에는 현암의 공력이 약간씩 담겨 있어서 종잇조각 같은 가벼운 물건일지라도 무시 못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남자도 그때는 긴장했는지 허공에서 휙휙 몸을 세 번이나 돌 려서 우박처럼 쏟아지는 잡동사니들의 공세를 피했다. 현암은 남자의 몸놀림에 어이가 없었다. 그자는 거의 체중이 없는 것처 럼 허공에서 자유로이 몸을 틀고 있었던 것이다.

현암은 남자의 몸이 옆으로 날아가는 순간 몸을 박차고 달려 나가서 남자의 몸을 향해 ‘추’ 자 결의 육성 공력을 발했 다. 남자의 몸을 벽에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몸은 무게가 없는 듯 현암의 힘을 타고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마치 연기 뭉치를 주먹으로 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상?’

현암은 잠시 놀라면서 주춤했다. 그 틈을 타 이번에는 남자의 다리가 현암을 향해 날아들었다. 남자의 다리를 한 팔을 들어 막 았으나 그자의 다리는 마치 뱀처럼 현암의 팔을 스르르 미끄러 져 올라오더니 현암의 뺨 쪽으로 날아들었다.

현암은 재빨리 고개를 비틀면서 뒤로 몸을 넘어지듯 하여 간신 히 남자의 다리를 피했으나 균형을 조금 잃고 뒤로 세 발자국이 나 물러섰다. 순간 현암은 긴장하여 공력을 돌려 몸을 보호했다. 갑자기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등 뒤에서 와장창 무엇인가 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퍽 하며 무엇인가가 현암의 등을 강타했다. 현암의 등 뒤에 있던 큰 창문을 깨고 무엇인가가 날아든 것이다. 현암이 놀라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다시 한번, 이번에는 금빛이 번쩍이자마자 현암의 등에서 강하게 퍽 소리가 났다. 현암은 그만 앞으로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러자 창밖에서 누군가가 훌쩍 몸을 날려 날아들었다.

현암이 쓰러지는 것을 보자 백호는 몹시 놀라면서 현암 쪽으 로 달려오려 했으나 또다시 금빛이 번쩍이며 백호의 근처에서 빛났고, 백호는 정통으로 맞은 것 같지 않은데도 입에서 피를 뿜 어내면서 한쪽 구석으로 처박혔다. 창으로 들어온 자가 금빛 나 는 커다란 무기를 휘두른 것이다.

쓰러진 현암의 목덜미를 누군가가 콱 밟고 섰다. 그 남자였다. 현암과 겨루던 남자는 지금까지 저쪽 벽에 팔짱을 끼고 서서 미 소를 짓고 있었는데 별안간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남자의 손에는 금빛이 번쩍거리는 커다란 망치가 들려 있었 다. 그것으로 남자는 현암과 백호를 쓰러뜨린 것이다. 남자는 흐 흐하고 웃으면서 허리춤에서 짤막한 칼을 꺼내 들며 망치를 내 려놓았다. 금으로 만들어졌는지 그 망치가 떨어지자마자 쾅 하 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조금 파였다. 곧이어 남자는 현암의 뒷덜 미를 칼로 찌르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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