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2권 2화 – 재회 2 : 만남
만남
원석은 영 기분이 찜찜했다. 걸음을 재촉하여 교문을 빠져나 가면서 보니 아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제정신일까. 도 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인이 뒤에서 따라오며 말을 건넸다.
“야야, 미팅 안 갈래? 오늘 저녁 때 말야.”
원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받았다.
“안 돼, 오늘은.”
“어라? 네가 미팅을 다 거부하다니, 사람 됐네? 짜식아, 무슨 일인데 그래? 웬만하면 제껴.”
“안된대두 아홉시에 학교로 다시 와야 해.”
“음? 학교는 왜 와?”
“넌 몰라도 돼.”
“자식이 언제부터 그렇게 비밀이 생겼냐? 얌마, 무슨 일이야? 응?”
“몰라도 된다니까.”
원석은 끈질기게 묻는 인의 말을 끝끝내 묵살했다. 잠시 후 인과 헤어지고 난 원석은 살짝 골목길로 몸을 숨겼다. 원석은 걸 음을 빨리하여 일찌감치 교문을 나선 터였다. 준호는 아직 나오 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오늘 환경 미화 준비를 하고 간다고 했으니까.
이 골목에 있으면 교문을 나오는 아이들을 모두 볼 수 있으므 로 준호가 빠져나가나 나가지 않나 지키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곳에서 원석은 기다렸다. 준호가 지나가면 도로 붙잡아서 끌 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여덟시 반가량 되었을 때 결국 준호가 지나갔다. 원석은 배가 고파 군것질을 하고 있다가 준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달려가서 준호를 붙들었다.
이미 사방이 어두워진 뒤라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야, 너 어디 가?”
준호는 여전히 짧게 대답했다.
“집에.”
“아홉시에 체육 창고 앞에서 보자고 했잖아?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날 기다릴 사람은 없어.”
준호가 몸을 빼어 걸어가려고 했다. 원석은 화가 났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요 조그마한 놈을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아라가 했던 말이 공연히 마음에 걸려서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제길! 장준・・・・・・ 후!!! 너 그럴 거야? 사람이 호의로 하는 말을?”
그 말에 준호는 발을 멈칫했다. 원석은 준호의 뒷모습만 보여 서 그 표정을 볼 수 없었으나 장준후라는 이름을 듣고 준호는 몹 시 놀란 것 같았다.
준호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준호야. 준후가 아냐.”
“다 알아, 장준후, 널 아는 애가 있어. 그리고 널 몹시 만나고 싶어 한다구.”
준호의 어깨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준호는 그냥 걸음을 옮기려는 듯 몸을 주춤거렸다. 그때 원석이 재빨리 말했다.
“같이 가자구, 어서. 왜 이름이 바뀐 건지는 모르지만 널 아는 애가 있다니깐? 만나고 싶어 한단 말야. 안 간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난 몰라.”
그러자 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조금 두려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애가 누군데?”
원석은 지금 아라의 이름을 말해 주면 이 녀석이 좋지 않은 반 응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궁금하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몰라도 돼. 아무튼 체육 창고 앞으로 오라구. 주석이와도 연관이 있는 일이야.”
“거기는 가면 안 돼.”
“뭐, 왜?”
“하여튼 가면 안 돼. 특히 오늘은 절대로………”
“왜 못 간다는 거야, 제기랄.”
원석은 분통이 터졌다. 그리고 대뜸 준호의 팔목을 홱 낚아채듯 잡아끌었다.
“어서 가자구.”
돌연 준호의 태도가 바뀌었다. 몹시 조심스러운 듯한 표정이 되어 준호는 한참이나 원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괜찮니?”
원석은 의아했다. 이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뭘?”
원석이 되묻자 준호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말했다.
“음, 그래. 좋아, 가자. 하는 수 없지.”
준호는 의외로 순순히 원석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체육창고 앞. 그곳은 주석이 육층에서 뛰어내려 피범벅이 된 곳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아이들은 그 장소에 가는 것을 몹시 꺼려 했다.
그런데 준호가 어느 날 밤 그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누가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죽은 주석도 그 자리 에 있었다는 말이 떠돌았다. 누가 본 것인지, 누가 이야기한 것 인지는 몰랐지만 그랬다. 준호가 주석을 죽게 만든 탓에 주석의 귀신이 계속 나와 준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라는 그럴싸한 추 측도 있었다.
그런 말들이 사실이든 아니든 자살한 아이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은 준호를 재수 없는 왕따로 만들기에 충분한 소문이 었다.
어두침침한 체육 창고 앞. 그곳은 본관 건물의 뒤쪽이라 그렇 지 않아도 어두운 곳이었다. 그곳에 면한 창문들은 거의가 과학 실이나 창고, 음악실 등의 방에 딸린 것들이라서 불빛도 새어 나 오지 않았다. 그런 방들은 자재가 많아 하교 시간만 되면 문을 잠그기 때문에 누가 아래를 내려다볼 수도 없었다.
오늘따라 학교가 몹시 조용했다. 아직 저 멀리의 별관에는 개 미만 하게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지만 본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일이 학년만 있는 본관은 저녁때만 되면 썰렁하기 그 지없었다. 그나마 사람들이 있는 곳은 별관이었는데, 삼학년 건 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체육 창고 앞은 외등 하나 없는 곳이 라 낮에도 지나갈 때는 걸음을 빨리했으며 밤에는 아무도 가지않는 곳이었다.
지금 원석과 준호는 그리로 가고 있었다.
‘아라는 와 있을까?’
원석의 머리에는 그것밖에는 없었다. 무섭다는 마음도 없었다. 다만 준호를 무사히 데리고 왔으니 아라가 기뻐하겠구나 하 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준호의 얼굴은 자못 심각했다.
“저기 있다. 와 있었구나!”
원석은 먼발치에서 체육 창고 앞에 어른거리는 사람 그림자를 보고 말했다. 준호가 몹시 의아해하며 물었다.
“누군데? 이제 좀 이야기해 줄 수 없어?”
“네가 직접 봐, 제길.”
원석은 준호를 끌고 창고 앞으로 갔다. 먼발치에서 보아도 분명 아라였다.
원석은 준후인지 준호인지 좌우간 데리고 왔다고 말하면서 걸 음을 더 옮기려다가 그만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그 자리에 풀 썩 고꾸라졌다. 준호는 원석의 등에 부적을 붙이느라 갖다 댔던 손을 조용히 거두었다. 그리고 어두운 그늘 아래에 서 있는 그림 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넌 누구지?”
준호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조그맣고 힘이 없 어 보이는 아이였지만 돌연 준호의 눈에서는 불빛이 번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말에 아라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준후 오……?”
아라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다가 의아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아라가 조금 더 앞으로 나오자 준호의 눈에도 아라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순간 아라의 얼굴이 의아함과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넌 누구지?”
“너야말로 누구야? 장준후를 왜 찾지?”
“준후 오빠가 오는 줄 알았는데… 넌…… 넌 아니야. 넌 준후 오빠가 아니잖아? 도대체 누구야!”
그러자 준호는 심각한 음성으로 외쳤다.
“넌 장준후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 거지? 그리고…………….”
준호는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능력도 좀 있어 보이는걸?”
아라는 어이가 없었다.
“너는 그럼 준후에 대해 어떻게 알지?”
준호는 입술을 깨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장준후에 대해 안다면 그냥 둘 수 없겠는걸.”
이 남자아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방금 전에 이 아이가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아라는 준후와 거의 흡사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틀림없다고 여기고 기뻐했는데, 흡사한 면이 약간 있긴 했지만 이 아이는 결코 준후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아 이는 준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했으며, 지금 아라를 협박하려 는 것 같았다.
“너, 너는…….”
아라가 말을 더듬자 준호는 아라 쪽으로 천천히,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을 듯이 다가왔다. 준호의 손에는 부적 같은 것이 들려 있었고,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손에는 이상한 기운 같은 것이 엉겨 갔다. 아라는 손에 꼭 쥐고 있는 조요경 (照妖鏡)을 통 해 그 기운을 느꼈다. 아라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 지만 오히려 흥하고 크게 코웃음을 친 뒤에 쌀쌀맞게 물었다.
“넌 뭐야? 어디서 되잖게 술수를 부리려고 하는 거지?”
그러면서 아라는 손에 쥔 조요경에 아무도 모르게 힘을 불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