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2권 9화 – 정령들의 여왕 1 : 밤의 방문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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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2권 9화 – 정령들의 여왕 1 : 밤의 방문객


밤의 방문객

구름이 잔뜩 끼어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깊은 밤이었다. 그곳 은 간혹가다가 윙윙 하며 늦은 밤길을 질주하는 차소리가 멀리 서 들려올 뿐,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곳이었다.

여기저기 볼품없이 자란 잡목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으 며 저만치로는 시커먼 호수가 보였다. 주변은 모두 기분 나쁜 안 개가 솟아오르는 질펀한 습지였다. 무성한 갈대들도 이렇게 빛 없는 밤에는 한들거리지 않고 을씨년스럽게 몸을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그 습지 사이로 난 오솔길을 세 명의 남자가 걷고 있었다. 주 변은 빛 한 점 없이 캄캄했지만 그들은 작은 불 하나 밝히지 않 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세 명 중 한 남자는 아주 체격이 커서 멀 리서도 눈에 띌 정도였으며 한 남자는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로 보아 아직 아이 같아 보였다. 그리고 맨 뒤에서 조용히 걷는 남자는 보통 체격을 지니고 있어 별반 눈에 띄는 것이 없어 보였다.

한참을 걷자 저만치에서 안개를 뚫고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자그마한 건물의 그림자가 희끄 무레하게 보였다.

건물이 보이자 앞장서서 걷던 덩치 큰 남자가 손가락으로 건 물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일행은 다리에 힘을 주어 조금 더 빨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습지 주변의 안개는 점점 더 짙어 지고 있었다. 안개를 뚫고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들의 눈에 오랜 풍상을 겪은 낡은 건물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보였다. 이 층으로 된 작은 건물이었으며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칠이 다 벗겨진 미 끄럼틀과 그네 같은 놀이 기구들이 보였다.

그리고 닫힌 철문 옆에는 약간 비뚤어진 간판이 걸려 있었는 데, 거기에는 ‘유진 보육원’이라는 빛바랜 글자가 쓰여 있었다. 희미한 불빛은 이층의 한쪽 창문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른 창문들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고 군데군데 깨어진 창문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앞장선 덩치 큰 남자가 조금 망설이는 표정을 보이다가 닫힌 문을 슬며시 밀었다. 문은 별 저항 없이 열렸다. 남자는 뚜벅뚜 벅 걸어서 문을 넘어선 다음 뒤를 돌아보고 따라오던 남자들에게 들어가자는 듯 한 번 고갯짓을 해 보였다.

세 명의 남자가 안으로 막 들어선 순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 는데 보육원의 문이 갑자기 철컹 소리를 내며 닫혀 버렸다. 남자 들은 약간 흠칫하는 것 같았지만 발길을 돌리지 않고 조용히 현 관문을 열었다.

그들이 현관문을 열자 느닷없이 안에서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문 안쪽에서 주먹만 한 돌들이 우박처럼 와르르 날아왔다.

덩치 큰 남자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몸을 뒤로 돌려 돌벼락 을 등으로 버텨냈다. 그 돌들은 남자의 등에 맞고 바닥으로 떨 어져 굴렀다. 수십 개나 되는 돌들이 한바탕 날아온 뒤, 일순 그 요란하던 소리도 멎고 돌도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사 방이 거짓말같이 조용해졌다.

덩치 큰 남자 뒤에 숨어 있던 키 작은 남자가 한 발자국 앞으 로 나오면서 바닥에 떨어져 뒹굴던 돌 하나를 주워 들고 살펴보 았다. 돌들은 새알만 한 크기였는데 이 근방에 있던 돌 같지는 않았다. 그때 수십 개나 되는 흩어진 돌들이 돌연 연기처럼 희미 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


*영소)라고도 한다. 종을 울리거나 조그만 돌이나 열쇠 등이 어디선가 비오듯이 날아오거나, 똑똑 저벅저벅 탕탕 소리를 낸다거나 기묘한 물체가 왔다 갔다 하는 등이 있다.


키 작은 남자가 중얼거리는 순간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쾅 하고 닫혔다. 뒤에 있던 보통 키의 남자가 긴장된 목소리 로 말했다.

“조심하시오.”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현관문에 불이 붙으면서 맹렬한 기세로 활활 타올랐다. 불길은 순식간에 현관문만이 아니라 복 도 전체에까지 옮겨 붙었다. 남자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불길이 천장에서도 일어나 그곳에서 불붙은 나무토막 같 은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려 앞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덩치 큰 남자는 에에익 하고 고함을 지르며 막 무엇인가 용을 쓰려는 듯했으나 보통 키의 남자가 외쳤다.

“다 환상이오! 눈을 감고 무시해 버리시오!”

보통 키의 남자 목소리가 다 가라앉기도 전에 그 남자는 천장 에서 쏟아진 나무토막에 머리를 호되게 맞고 앞으로 넘어져 버 렸다.

키 작은 남자가 비명을 올렸다.

“뭐가 환상이란거야! 이게 무슨.”

그 남자는 으아아악 하며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덩치 큰 남자가 달려와서 그 남자의 몸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퍽 퍽 쳐서 불을 끄려고 했으나 불은 생각만큼 쉽게 꺼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남자들 발밑의 마루가 풀썩 꺼져 들어갔다. 마루 밑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 같은 어두운 심연이었다. 남자들 은 깜짝 놀라 몸의 균형을 잡으려 버둥거렸지만 마루는 계속 꺼 져 내려갔고 그들의 발은 공중에 떠 버리고 말았다. 남자들은 비 명을 지르면서 어두운 바닥으로 떨어졌고, 불이 활활 타오르는 복도와 천장이 무너져 그들의 몸을 덮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떤 묵직한 손이 어깨를 잡아끄는 느낌에 덩치 큰 남자가 눈을 떴다.

“괜찮소?”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등 뒤로 환한 햇살이 비치고 있어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덩치 큰 남자는 눈을 몇 번 껌벅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딥니까?”

그러자 어깨를 잡아끈 남자는 후후하고 조그만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병수군,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건가?”

덩치 큰 남자 병수는 그제야 자신을 일으킨 사람의 얼굴을 알 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나이가 상당히 든 허우대 좋은 노인 이었는데, 언젠가 얼굴을 한 번 보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거대한 체구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에 검은 안경을 낀 흰머리의 노인. 조금 더 나이 가 들어 생긴 주름살과 흰머리를 제하고 나면 어디선가 보았던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병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렸다.

“어……. 당, 당신은・・・・・・ 신부님?”

그러자 박 신부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알아보겠나? 허나 신부라고 대놓고 부르지는 말게. 난 교단 의 일을 그만둔 사람이니까.”

병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둘러보 았다. 시각은 이미 해가 훤하게 뜬 대낮이었는데 자신은 습지의 진창에 반쯤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양옆에는 같이 왔던 다른 두 명의 남자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도……………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예?”

병수가 얼떨떨해서 묻자 박 신부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난들 어찌 알겠나? 자네들이 왜 여기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 진창은 수영하는 데 적당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

박신부가 시치미를 떼자 병수는 그의 옆에 쓰러져 있는 다른 한 명의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근호, 근호, 일어나 봐.”

그 남자는 현현파(派)의 도인인 근호였다.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곧이어 병수는 다시 그 옆에 쓰러져 있던 키 작은 남자를 흔들었다.

“전 박사님, 전 박사님 일어나세요.”

그러자 박신부가 병수에게 말했다.

“일단 진창에서 나오는 게 어떻겠나? 그 사람들도 좀 밖으로 끄집어내고 말일세.”

병수는 진창에서 몸을 일으켜 근호와 키 작은 남자를 밖으로 꺼냈다. 병수는 워낙 몸집이 크고 힘이 좋아서 두 사람을 따로 들고 나른 것이 아니라 한 손에 한 명씩 잡고 단번에 두 사람을 바깥의 조금 마른 땅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고는 진창 속으로 다 시 들어가 주섬주섬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박신부는 두 사람의 호흡을 살펴본 다음 웃는 얼굴로 병수에

게 물었다.

“뭘 찾는 건가?”

“내 철봉요.”

병수는 산만 한 덩치와 험상궂은 얼굴과는 달리 아이처럼 대답하면서 계속 진창 속을 휘저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진흙 범벅이 된 길쭉한 물건을 진창에서 꺼내 들었다.

“헤헤, 찾았다.”

병수는 진흙 범벅이 되어서도 실쭉 웃으며 비로소 진창에서 나왔다. 병수가 가지고 나온 것은 길쭉한 가방에 든 그의 무기인 조립식 철봉이었다. 접혀 있을 때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길게 늘 여 결합하면 거대한 병수의 키를 넘어서는 길이가 된다. 더구나 그 무게도 보통이 아니게 무거운 듯, 병수가 가방을 내려놓자 늪 지 주변의 물렁한 땅이 움푹 파여 들어갔다.

“그건 왜 가지고 왔나?”

병수는 가방을 열고 번득거리는 철봉의 뭉치들을 꺼내 진흙과 물을 닦아 내면서 대답했다.

“그러는 신부님은 왜 여기 오신 거요?”

“자네는 왜 온 건데?”

그러자 병수는 문득 곱지 않은 눈매로 박 신부를 쏘아보았다.

“혹시 신부님이 날 가지고 장난치신 건 아뇨?”

“내가 무슨 말인가? 나는 지금에야 여기 도착한 길이네.”

“흠. 그런가? 아무튼 신부님은 신경 쓰실 것 없다.”

“그런데 무슨 낭패를 보았기에 여기 이런 몰골로 있는 겐가? 자네들 정도 되는 사람들이 뭐에 홀렸을 리도 없고.”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이번은 정말 대단했다. 제길, 엄청 심하던데.”

“뭐가 말인가?”

박신부가 말하자 병수가 미간 사이의 갈매기를 잔뜩 찌푸려 보이면서 되받았다.

“왜 신부님은 자꾸 모르는 척하쇼? 저기 낡은 보육원 말요.”

“보육원?”

“정말 모르쇼? 진짜 우연히 온 거라면 내 얘기해 드리지.”

그 말에 박 신부는 미소를 머금었다.

“얘기해 주게나.”

그러자 병수는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줄줄 주워서 기기 시작했다.

“저기는 이미 사람이 안 산다는 빈 건물이오. 그런데 거기서 매일 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다가가는 사람들은 죄다 허깨 비를 본다는구려. 그래서 이분이 흥미를 가지신 모양인데, 워낙 무서운 곳이니 가지 말라고 사람들이 다 말렸거든요.”

“가보니 어떻던가?”

“에구, 무슨 폴・・・・・・ 뭐라드라? 전 박사는 아는 것 같았는 데……………. 폴트…………… 폴타…………….”

“폴터가이스트라고 했나?”

“아, 맞다. 그렇수. 뭐 내가 보기엔 환영이고 도깨비 지랄에 불과한데, 얼마나 유식해 보이려고 영어 이름을 갖다 붙이는 건지 는 모르겠지만.”

“심하던가?”

그 질문에 병수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심한 정도가 아니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러면서 병수는 지난밤, 아니 지난밤인지 며칠 전이었는지 는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때 겪은 무시무시한 불의 환 상을 박 신부에게 말해 주었다. 병수는 설명을 끝내고 쓰러져 있 는 근호에게 다가가서 그의 몸을 살펴보았다. 근호의 몸은 흠뻑 젖어 있었지만 불에 탄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병수는 또다시 휘휘 고개를 저었다.

“제길, 불이 난 것도 허깨비였구먼. 그런데 나도 수련을 한 몸 이고 이 친구도 꽤나 오랫동안 수련한 친구인데 전혀 환상을 깰 수 없더라니깐요.”

박신부는 병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허허. 그렇게 대단하던가?”

“그랬다니깐요.”

박신부가 안색을 조금 딱딱하게 굳히면서 병수에게 말했다. 

“자네들…………… 그곳에 다시는 가지 말게. 그 정도라면 이건 자 네들의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야. 절대 가지 말게. 알아들었나?”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가십시다. 신부님 정도 되는 분이 있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요.”

“내가 왜 그리 간단 말인가?”

“어어. 신부님은 궁금하지도 않으? 그리고 우리가 지금 난처한 입장에 빠졌는데 좀 도와주면 안 되겠수?”

그러나 박 신부는 딱 잘라서 냉정하게 말했다.

“공연히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고, 솔직히 난 자신이 없네.”

“으음, 이제 보니.”

병수가 문득 의심스러운 눈길로 박 신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씀이야. 신부님, 신부님이 우연히 왜 여 길 온단 말이오? 난 아무래도 신부님이 장난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아까부터 자꾸 왜 그러나? 내가 장난을 쳤다니?”

“신부님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는 될 거 아니오. 그리고 신부님 이 여기 우연히 나타났다는 게 난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말 요. 나더러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허허. 그 정도 상황이면 내 능력을 넘어서는 걸세. 그리고 난 정말 우연히 여기로 지나던 길이란 말일세.”

“여기 뭐 볼 게 있어서 우연히 온단 말요? 아무래도 신부님도 저 보육원에 관심을 가진 것이 틀림없는데?”

“보육원? 내가 거기에 왜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병수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박 신부를 험상궂은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 눈길에 박 신부는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이내 덧붙였다.

“자네 아직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왜 멀쩡한 사람을 가지고 그러는가? 뭐,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게나. 나는 분명 자네를 말 렸고 충분히 경고했네. 그것만은 명심해 두게.”

그때 근호가 나직하게 신음성을 내면서 몸을 비틀었다. 병수 는 곧 박 신부의 일을 잊어버리고 근호에게 가서 그의 뺨을 툭툭 쳤다.

“이봐, 근호, 정신이 드나, 응?”

근호가 눈을 번쩍 떴다. 근호도 몸에 별다른 상처는 없었던 터 라 눈을 뜨자마자 깜짝 놀라면서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 앉았다.

“이게 어찌된 거야?”

“제길, 나도 몰라. 뭔가에 홀렸나 봐.”

“우리가 왜 여기 있지?”

“아, 나도 모른대두!”

병수가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뒤로 몸을 돌리자 방금 전까지 있던 박 신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라? 어딜 갔지?”

“누구 말야?”

“박신부님 말야. 못 봤어? 아까 날 깨워 줬는데.”

그 말에 근호가 얼굴을 이상하게 일그러뜨리면서 물었다.

“박 신부? 그렇다면 전에 우리가 강화도에서 같이 보았던 그 박윤규 신부를 말하는 거야? 영능력이 굉장했던 그….”

“맞어, 맞어. 십여 년 만에 처음 보는 거긴 하지만.”

그러자 근호는 놀라면서도 무서워하는 듯한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박 신부는 죽은 것으로 아는데. 아까 여기 있었다구?”

그 말을 듣고 병수는 근호보다도 더 놀랐다.

“뭐 ・・・・・・ 뭐야? 박 신부가 죽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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