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10화 – 두 사람의 기적 5 : 결단
결단
건물에서 나오자 이상하게 박 신부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어서 갑시다. 찾아야 합니다.”
“누굴 말입니까?”
“지금도 일이 잘못된 판인데,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아. 내 느낌이 틀렸기를…………….”
박신부는 절뚝거리면서도 어디론가 열심히 달렸다. 그러면서 도 더 이상 이유도 말해 주지 않았다. 윌리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 는 영문도 모른 채 그 뒤를 열심히 따라갔다. 박 신부는 바티칸 의 외곽 지역까지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돌고 돌아 한참을 헤매 다가 어느 으슥한 뒷골목에서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아아, 늦어 버렸군요!”
박 신부는 탄식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윌리엄스 신부와 이 반 교수가 보니 그곳에는 만신창이가 된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 었다. 그런데 그의 몸에 걸쳐진 피투성이의 후드는 아까 본 듯한 것이었다. 박 신부가 급히 달려가 그 사람의 맥을 짚었으나 그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윌리엄스 신부가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말했다.
“저 사람은…… 아까 어디론가 가버린 그 수사 아닙니까? 그가 왜…………?”
그 사람은 베드로 수사였다. 이반 교수도 놀라서 외쳤다.
“죽었습니까?”
“일이 커졌습니다.”
박신부가 성호를 그으면서 베드로 수사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그를 편안하게 눕혀 주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눈을 감고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이반 교수는 조용히 베드로 수사의 시체를 보다가 말했다.
“기이하군요. 옷이 축축이 젖어 있는데도 불에 그슬려 있어요. 거기다가 오른손의 상처는 그냥 화상이 아니라.”
박신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죠. 전기에 데인 것 같은 상처입니다. 그리고 수없이 강한 타격을 당했어요.”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말하던 이반 교수는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이 사람은 세븐 가 디언의 한 사람으로 누구 못지않은 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 다. 그런 사람을 몇 분 지나지도 않은 사이에 이토록 처참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자가 누가 있을까? 더구나 그는 타격과 불과 물과 전기 등에 모두 당한 상태였으니. 그러한 여러 가지 주술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자라면…………….
이반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박신 부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 얼굴에 올라 있는 슬픈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닐 겁니다! 아닐 겁니다!”
이반 교수는 인상을 쓰고 있다가 피에 젖은 후드 자락을 더듬 어 뭔가를 찾았다. 그때 뒤에서 외마디 고함 소리가 들렸다. 가 브리엘 수사였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윌리엄스 신부는 몹시 당황했다. 오해가 생겨도 크게 생길 것 같았다. 더구나 이반 교수가 남자의 품 안을 뒤지기까지 하던 터 아닌가? 그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가브리엘 수사가 먼 저 크게 외쳤다.
“당신들이 ……………! 점토판을 훔치려고!”
“우리가 한 게 아니…………….”
윌리엄스 신부가 말을 하려는 순간 가브리엘 수사는 무화 능 력을 발휘해 맞은편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윌리엄스 신부가 놀라 급히 일어서려는데 박 신부가 그를 말렸다.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억울하지 않습니까? 아아, 이럴 수가! 교수님, 당신은 왜 그 남자의 품을 뒤졌나요?”
이반 교수는 천천히 대답했다.
“아까 루카 수사가 이 남자에게 뭔가 맡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게 점토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맞았군요. 하 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이 사람을 해치고 가져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윌리엄스 신부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통째로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지 않았습니까?”
박신부가 천천히 아주 슬픈 듯 말했다.
“누명을 쓴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을 나가 있게 한 프란체스코 주교는 이마를 감싸 쥔 채 혼자 울고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기적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박 신부에게서 일어난 기적이 진짜라는 것을. 그러나 주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었다.
‘궁극적으로는…………… 내가 옳을 것이다……………. 주여 ……….. 주여……..’
그러나 전과 같은 자신이 없었다. 주교는 눈물을 흘리고 계속 가슴을 치며 기도를 했으나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왜 기적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고 그런 파문자에게 일어난 것 일까? 왜 나에게는 말씀이 없으신 것일까?’
응어리진 마음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나는 열 살 때 빈민가에서 태어나, 먹고살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고 서원을 했다. 서른 살이 넘어서야 나는 신앙을 깨달았 다. 그러나 나의 신앙은 진실이다. 나는 순수하지 못한 동기 때 문에 더더욱 고민하고 참회를 거듭해 왔다. 그렇다. 나는 인간보 다신의 의지를 따를 것이다. 신의 의지가 종말이라 한다면 나는 종말을 선택할 것이다. 신의 뜻은 분명 거기에 있을 것이다. 거기에 있을 것이다.’
프란체스코 주교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인간을 믿기에는 어 릴 때의 기억이 너무나 뼛속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그는 종말을 원했다. 영원한 인간의 종말을 원했다. 비록 지금 이 순간마저 도 신의 이름으로 간구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바람일 뿐이었다. 그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 었다.
그런 만큼 그는 스스로를 증오하고 인간을 증오했으며, 자신 의 신앙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교황청에서 위험한 인물까지는 아니지만 경계할 인물로 낙인찍혔다. 주교의 직위도 그를 옹호하는 몇몇 고위 성직자의 힘으로 된 것이었다. 그가 이 단 심판소란 기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의지가 인간의 종말을 성경에서 예언한 것이 틀림없다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골 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게 하면서까지 말씀을 이루었는데, 인간들이 어찌 그 길을 마다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길이 악 마의 길이라고 좋다. 허나 악마도 야훼의 예정대로 일을 하는 일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은 이 세상을 버리실 것이다. 아 니 버리셨다. 그렇다면 반드시 …………….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막으려 하고 있다. 나 는 그를 다시 막아야 한다. 그에게 내린 말씀은 삿된 것이다. 분!명! 삿된 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되뇌며 마음속 깊은 곳의 고통을 참았다. 지 옥 불에 영원히 타도 좋다. 그는 말씀을 이룰 것이고, 가장 위대 한순교자가 될 것이다. 모두가 없어져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지 라도.
그때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주교는 눈을 떴다. 그러고는 곧 다시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에는 아우구스티노 수사와 루카 수 사, 가브리엘 수사 세 명이 모두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낭패한 몰골에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내일 다시 모이자고 하지 않았던가요?” 주교가 놀라서 묻자 가브리엘 수사가 흑 하는 소리와 함께 말 했다.
“…… 베드로 수사가 돌아가셨…………….”
“예? 무슨 말이죠? 설마 그 베드로 수사가……………. 그리고 점토판도…………!”
주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가브리엘 수사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 사람들이 …………… 아까 그자들이 죽은 베드로 수사의 품을 뒤지는 모습을…………! 아아……………!”
주교는 경악에 차 부르짖었다.
“베드로 수사가 베드로 수사가 당했다는 겁니까? 정말로…………?
정말로 죽음을 당한 겁니까!”
“주교님!”
가브리엘 수사가 울부짖자 프란체스코 주교는 그만 거의 기절 한듯 힘이 빠져 의자에 몸을 푹 파묻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점토판도 물론・・・・・ 없어졌겠죠? 아니…… 아니, 됐습니 …….”
세 명의 가디언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 으나 잠시 후 주교는 천천히 말했다.
“아녜스 수녀를……………. 그리고 나머지 전원을 소집해 주세요…………….. 이제부터는………… 이제부터는 비상사태입니다. 그리고………….”
주교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가련한 베드로 형제를 위해 기도합시다……………..’
가브리엘 수사가 사라진 후 박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돌아서서 간단한 묵념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숙소 로 돌아가면서도 박 신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윌리엄스 신 부나 이반 교수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착잡한 마음이 되어 숙소인 호텔로 돌아오자 카운터에서 박 신부 일행을 불렀다.
“배달된 게 있습니다.’
이반 교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금 자신들이 여기 있는 줄 누가 알고 물건을 보냈단 말인가?
“우리에게 온 것이 맞습니까?”
“틀림없는데요? 호실 수가……………. 그리고 손님이 이반 교수님 맞지요?”
“맞습니다만…….”
의아하게 여기면서 이반 교수가 카운터로 다가가자 박 신부가 몸을 비틀했다. 깜짝 놀란 윌리엄스 신부가 그를 부축해 로비 의 자에 앉히자 박 신부는 중얼거렸다.
“아니기를, 아니기를 바랐건만…………….”
그때 카운터에서 이반 교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신부님!”
“뭡니까? 도대체?”
윌리엄스 신부가 묻자 박 신부는 근래에 볼 수 없었던 슬픔과 피곤함이 겹친 침울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이반 교수가 상 자를 들고 박 신부에게 달려왔다.
“신부님! 이것………!”
여간해서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는 이반 교수도 그때만은 놀 란듯 변해 있었다. 그 상자 안에는 없어졌던 세 개의 점토판이 솜에 둘러싸인 채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 외에는 쪽지 하나 없었다.
“도대체 누가……………!”
윌리엄스 신부는 영문을 모른 채 중얼거렸으나 이반 교수는 돌처럼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박신부는 상자를 무릎 위에 펼쳐 놓은 채 눈을 감고 소파에 깊 이 몸을 파묻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깨어나면 잊힐 꿈이기를 이때만큼 간절하게 바란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