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11화 – 방황하는 유대인 1 : 고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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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3권 11화 – 방황하는 유대인 1 : 고서점


고서점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만치 뚱뚱한 체구의 바이올렛이 조금 지나쳐 보일 정도의 제스처로 손을 흔들며 나타나자 백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목례로 답했다. 바이올렛은 아직 완치되지 않아 약간씩 다리를 절고 있었지만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았다.

바이올렛은 활짝 웃어 보이며 백호의 웃옷에 붉은 꽃 한 송이 를 꽂아 주었다.

“환영의 표시니까 빼지 마세요.”

백호는 얼떨떨했다. 그가 바이올렛의 팩스를 받은 것은 불과 열 몇 시간 전이었다. 바이올렛이 백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기 보다는 퇴마사들에게 보낸 것을 백호가 받은 것이었다. 메시지 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누구든 믿을 만한 사람을 급히 보낼 것.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좋겠음. 찾고 있는 장소에 관한 일임. 아주 급함.

그 장소에는 승희와 현암도 있었다. 박 신부는 이반 교수, 윌 리엄스 신부와 함께 이탈리아로 갔고, 준후는 다투고 난 다음 어 디론가 수련이라도 하러 간 것인지 잠적해 버렸다. 그때 승희는 백호에게 가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자신들은 눈에도 띌 뿐만 아니라 지난번 일 때문에 미국에 가기가 꺼려지며, 아라나 준호 나 수아는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다.

이에 백호는 연희가 더 낫지 않겠냐고 말해 보았는데, 이상하 게도 승희나 현암 둘 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이었다. 특별 한 이유도 없이 이상하게 둘은 연희를 제쳐 놓는 것 같았다. 결 국 백호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이 가겠노라고 팩스를 보낼 수밖 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여권만 챙겨 들고 곧바로 출발했다. 그런 데 바이올렛은 하나도 급한 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니…….

바이올렛은 조금 쑥스러워하는 백호를 핑크색의 커다란 차 쪽 으로 안내했다. 주인과 닮아서 타기가 무안할 정도로 화려하게 칠해 놓은 차였다.

차가 출발한 후 몇 가지 의례적인 인사와 안부를 묻는 데 시간 이 조금 걸렸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 때문에 불렀느냐고 백호가 묻자 바이올렛은 부상을 입은 사람의 목소리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그리고 바이올렛의 나이와도 어울리지 않는) 밝은 목소리 로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이야기가 기니까 가서 설명해 드리죠. 다만 한 가지만 먼저 말씀드릴게요. 지금 우리 친구들은 성당 기사단의 본부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죠?”

“그렇습니다만.”

바이올렛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 때문에 오시라고 한 거죠. 좌우간 요즘 친구들 근황은 어떤가요? 다들 잘 지내겠지요?”

바이올렛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수다를 질리지도 않는 듯 지껄이면서 차를 몰았다. 몹시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한 시간 넘 게 시내를 달리는 동안 바이올렛은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백호는 교통 체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보스턴 시내를 한 시간 이상이나 헤매야 할 만큼 그곳이 외진 곳인가 하고 조금 의아해 했지만 바이올렛의 수다를 참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차 안에서 백호는 현암과 승희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잠시 돌이켜 보았다.

‘성당 기사단…………… 그리고 점토판이라……………. 골치 아프군.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도움이 되기는 할까?

백호는 지난번 암살 위협을 받은 이후로 낮에는 공무를 수행 했지만(백호가 냈던 사표는 결국 수리되지 않았다) 밤에는 현암 등과 같이 지냈다. 그런데 지난밤 현암과 승희가 격렬하게 논쟁 을 벌이고 있었다. 백호는 문 앞에서 본의 아니게 그들의 이야기 를 어느 정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악마가 바라는 대로 놀아날 작정이냐? 나는 싫어.

이것은 현암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것만도 아니잖아. 준후 생각은 그걸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거였어. 그러니 찾아야 할 거라구. 우리가 그걸 찾는다고 해서, 모든 게 악마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이것은 승희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뭔가 석연치 않아. 상대는 악마라구. 진짜 악마!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 현암 군. 악마는 악마고, 우리는 우 리야. 악마가 건드리는 일을 무조건 피한다면 그거야말로 악마 의 손에 놀아나는거 아닐까?

-뭐?

-현암군 말대로라면, 악마는 우릴 맘대로 할 수 있겠네? 우 리가 맘에 안드는 행동을 할 것 같으면 나타나서 ‘그걸 해라’ 하 면 현암 군은 죽어도 안 할 거 아냐? 그럼 그거야말로 악마 맘대 로 놀아나는 거지, 뭐야?

-……….

-악마 이야기는 무시하는 거야. 「해동감결』에도 있다잖아.

그냥 평상시처럼 우리 판단대로 할 바를 하는 거야. 그러면 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거야. 안 그래?

-하지만…………… 너무 많은 일이 걸렸어. 연희 씨도, 백호 씨도…………….

-연희 언니 문제도 그 점토판에 언급되었다잖아.

-그러니 위험한 거야. 그리고 백호 씨는 지금 암살 위협이 아니라 악・・・・・・・

그때 덜컥 이야기가 멈추더니 현암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별수 없이 백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고, 둘의 이야기를 더 들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 승희는 성당 기사단의 본부를 찾 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고, 백호도 나름대로 힘써 돕겠다 는 말을 했다. 블랙 엔젤의 말에 의해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 중 절반이 성당 기사단의 손에 있다는 사실은 백호도 전해 들은 바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중요한 것이니만치 성당 기사단의 본 부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성당 기사단의 본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너무도 공교롭게 그에 대한 바이 올렛의 팩스가 날아와 백호는 그 즉시 미국으로 날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암살 위협을 받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악…………은 또 뭐란 말인가?’

백호는 피곤함을 느꼈다. 왜 자꾸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자신

과 엮이는 것일까?

‘허헛, 나 같은 사람이 왜 자꾸 이런 일에 말려들어야 하는 거 지? 이건…………….’

백호는 속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왜 이런 일에 말려든 것 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백호는 퇴마사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위험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들을 돕는 것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그들은 물론 나와 다른 세계에 산다. 나는 보통 사람이지. 그 러나 나는 정의를 숭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 것이 내가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의일 거야.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하다가 백호는 불현듯 피식 웃었다. 목숨 바쳐 퇴마사들을 돕는 것이 물론 자신의 그런 마음 때문이긴 했 지만 그 외에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런! 무슨 좋은 생각하시나 보죠?”

바이올렛의 말에 백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빠진 표정을 거두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잠깐 딴생각을……”

“호호호. 그러세요? 그런데 어느새 벌써 도착한 모양이군요.”

벌써가 아니라 백호에게는 일 초일 초가 지겨운 시간이었건만 차가 도착한 곳은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고색창연한 건물 부근이었다.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이었고, 간판에 는 ‘해밀튼 고서점’이라고 씌어 있었다. 서점은 인적이 퍽 드물 고 차로 왕래하기에도 불편한 위치에 있었다. 그 근방은 도시에 서 보기 힘든 나지막한 관목들이 우거진 곳이었다.

“여긴 어딥니까? 이게 성당 기사단의 본부란 말입니까?” 백호 스스로도 반은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바이올렛은 백호 의 농담에 지나칠 정도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물론 아니죠. 그러나 여기가 성당 기사단과 관련이 있는 것은 확실해요.”

그리고 바이올렛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다시 종알종알 떠들기 시작했다.

“이 ‘해밀튼 고서점’은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근방 에서 가장 오래된 고서점이죠. 신기하죠. 이렇게 외진 곳에 지어 진, 손님도 하나 없는 서점이 백 년이나 운영될 수 있다는 것이? 이 근방의 공원 같은 숲과 평지도 전부 이 서점 소유의 땅이에 요. 이 근방 사람들은 이렇게 알고 있죠. 이 서점은 백만장자였 던 아서 해밀튼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호사가적 취미를 위해 만들었다고요.”

“그럼 그렇지 않습니까?”

“아뇨. 물론 아서 해밀튼이 만들었죠.”

“그러면요?”

“그 자체는 거짓이 없어요. 문제는 그가 성당 기사단과 모종의 연관을 지니고 있었다는 데 있죠. 증거를 하나 보여 드릴까요?” 

그러면서 바이올렛은 백 년도 넘어 보이는 고색창연한 서점 간판의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십자가와 비슷한 것이 새겨져 있었는데, 보통 십자가와 달리 네 끝이 꽃잎처럼 벌어져 있었다.

“저건 파테 십자가라는 문양이죠. 특수한 집단들만 사용해 왔 던 문양이에요.”

“특수한 집단이라면……………..”

“맞아요, 성당 기사단. 전에 성난큰곰이 누구더라・・・・・・ 그래, 키건인가 하는 사람과 싸우고 난 다음에 커다란 갑옷 같은 것을 얻은 적이 있었댔죠? 거기에도 그 문양이 새겨져 있었어요. 조금 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뭔가 느낌이 오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백호의 이성은 이것만 으로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외쳤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 십자가 문양이 지금 와서는 그리 희귀한 게 아닐 것 같은데요? 비슷한 것을 자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문양을 쓰는 곳이 전부 성당 기사단과 관련 있는 곳이라 본다면 ……………”

“물론 지금 이 서점은 성당 기사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이 서점을 만든 아서 해밀튼은 관련이 있었겠지만.”

“무슨 뜻입니까?”

“이 서점의 설립자인 아서 해밀튼은 성당 기사단 소속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지금의 주인은 그렇지 않아요. 지금의 주인은 리처드 해밀튼. 바로 아서 해밀튼의 증손자죠.”

“그렇다면…..?”

“리처드 해밀튼 씨와 나는 친분이 좀 있어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좋은 사람이랍니다. 백만장자인데다 미남이고, 지적이고. 좌우간 내가 성당 기사단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려고 여길 몇 번 들르게 되었는데, 이 사람이 내가 뭘 찾는지 알고 나 서 나를 만나고 싶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아주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게 뭡니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성당 기사단의 본부를 찾아낼 수 있는 물건인가 봐요. 할아버지가 남긴 유물이라더군요.”

“흠. 그런데 왜 나를 부른 겁니까?”

“뭔가 요구 사항이 있대요.”

“요구사항”

“그것 때문에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어서 오시라고 한 거예요.”

“하지만 나는 당사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결정을 내리고 안 내리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바이올렛은 웃으면서 문을 가리켜 보였다.

“아무튼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해밀튼 씨가 기다리시니까요.” 

백호는 얼떨떨했다. 자신은 어떤 정보를 받거나 물건을 전달 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지, 무슨 요구 사항을 응낙하고 안 하고를 결정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다. 그러나 바이올렛의 태도는 아 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주위를 조금 둘러보니 비행기가 보이는 것이, 이곳은 공항에서 그리 먼 곳에 위치한 장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한 시간 이상이나 빙빙 돈 것은 수다를 떨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이 뚱뚱한 할망구의 수작에 속아 헛걸음을 한 것이 아닌가 하 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백호는 고서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리처드 해밀튼은 보기 좋은 하얀 은발을 단정하게 기른 초로 의 남자였다. 코가 조금 높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빛을 지녔으 며, 멋들어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 정도 되어 보였으나 몹시 다부지고 건장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해밀튼은 서점 깊숙이 위치한 별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백호와 바이올렛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고서점의 사무실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호화롭고 값비싸 보이는 고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오신 분이오?”

“그렇습니다.”

“나는 리처드 해밀튼이라고 하오. 그쪽은……?”

해밀튼의 물음에 바이올렛이 대신 대답했다.

“이쪽은 미스터 백이라고 해요. 아주 놀라운 친구들을 가지고 있는 분이죠.”

“전에 말한 적 있는?”

“예.”

백호는 바이올렛이 퇴마사들에 대해 해밀튼에게 이야기한 것 같아 눈살을 찌푸렸으나 바이올렛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 어 보였다.

“해밀튼 씨는 괜찮아요. 내 오랜 친구고 신사시니까.”

백호는 아무래도 바이올렛이 미덥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온 이 상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해밀튼은 백호 일행에게 앉으라고 손짓한 다음 시가 상자를 백호 쪽으로 내밀었다. 백호가 손을 젓자 해밀튼은 두툼한 시가 를 꺼내 끝을 깨물어 뗀 다음 금으로 장식된 커다란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었다.

“제 친구들에 대해 아십니까?”

백호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 물었다. 그러자 해밀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어가 능숙하시군요. 대강은 압니다. 그러나.”

해밀튼은 다소 건방지다면 건방지다고 할 수 있는 태도로 연 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염려는 마십시오. 이런 쪽 일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시끄러운 기관과 접촉하지 않게 됩니다. 내 목적을 이루어 주기만 한다 면 그쪽 분들이 어떤 분들이건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쪽 분들 이 어떤 분들일지 알고 싶지도 않고요.”

백호는 대강의 분위기를 눈치채며 물었다.

“청부 의뢰를 하는 겁니까?”

“좋은 말로 부탁을 드리는 것이라 해 두지요.’

“제 친구들은 청부를 맡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을 맡아 주지 않는다면 결코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 줄 수 없소.”

“어떤 정보 말이죠?”

“성당 기사단에 대한 것 말이오. 당신이 모르고 여기까지 오 셨을 리도 없는데, 우리 피차간에 지루한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시간이 아까우니까요.”

해밀튼은 상당히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 같았다.

백호는 심호흡을 한 다음 조심스레 물었다.

“무엇을 찾는 겁니까?”

“그것도 아직은 말할 수 없소. 일을 맡아 주지 않는다면 말이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무슨 일을 맡긴다는 겁니까?”

그러자 해밀튼이 딱 잘라 말했다.

“이백만불을 드리겠소.”

백호는 무심코 고개를 저었으나 곧 엄청난 액수라는 생각이 들어 눈을 크게 떴다. 해밀튼이 다시 말했다.

“삼백만.”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백호가 단호하게 말하자 해밀튼이 다시 말했다.

“사백만.”

불쾌감이 치밀어 백호는 더 이상 듣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해밀튼이 차분히 말을 건넸다.

“나가는 것은 자유요. 그러나 성당 기사단의 본부는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거요.”

백호는 성당 기사단의 본부라는 말을 듣자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해밀튼을 째려보았다.

“정부는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당 기사단의 본부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물론 알지요. 그러나 그 장소를 그냥 알려 줄 수는 없소.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절대 알려 줄 수 없는 입장이란 말이오.”

“내 친구들은 돈으로 움직이지 않소.”

해밀튼은 시가를 끄고 한숨을 쉬며 일어나서 말했다.

“천만불. 어떻소?”

백호는 너무나 천문학적인 액수를 제시하는 데에 의아심이 들 었다. 이자는 도대체 무엇을 찾기에 이렇게 엄청난 거금을 언급 하는 것일까? 그러나 호기심은 불쾌감을 억누를 정도로 커지지 않았다.

백호가 싸늘한 표정이 되자 바이올렛이 안절부절못하다가 해 밀튼에게 가서 뭐라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 나자 해밀 튼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잠깐 내가 실례했다면 용서해 주시오. 그러나 이건 나에게도 정말 절박한 문제요.”

“무슨 소리요?”

“내 명예, 그리고 내 가문의 명예와 신앙이 관련된 일이기 때 문이오. 좋소……. 그러면 돈 이야기는 하지 말고 우리 이야기 를 좀 나눠 봅시다. 허심탄회하게 말이오. 물론 말할 수 없는 것 은 말하지 않겠지만 그것 외에는 무엇이든 알려 주겠소. 그건 어 떻겠소?”

백호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라면 들어 보겠습니다.”

“고맙소. 그러면 무엇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소?”

“일단 당신이 알고 있다는 성당 기사단의 위치가 정확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장소를 말할 수 없다면 그런 내용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경위라도 말해 보십시오.” “좋소. 내 증조부에 대해 들어 보셨소? 그분의 성함은 아서 해 밀튼. 이 서점을 만드신 분이오.”

“그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들은 바 있습니다.”

“음. 그분은 성당 기사단의 비밀 단원이셨소. 그분은 장사를 하려고 이 서점을 내신 게 아니오. 근래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분이 고서점을 만드신 이유는 뭔가 목적이 있어서였다고 나는 생각하오.”

“무슨 목적입니까?”

“미국 대륙에서 고서점이란 것은 당시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 실 우스운 이야기요. 서점이 생긴 것은 백 년도 더 지난 일이오. 정확히 백십오 년 전의 일이지. 인디언과 기병대가 싸움을 벌이 고 있던 시절의 일이니 말이오. 역사가 얼마 되지도 않은 미국에 고서적이 많을 리 없지 않겠소? 인디언들은 문자로 된 책을 남기 지 않았으니 그것을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오.”

“그렇다면요?”

“여기서 다루어 온 책들은 유럽이나 그 근방의 자료들이 대부 분이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이 서점을 아버님께 물려 받고서도 십 년이나 더 지났을 때요. 서점의 오래된 벽을 보수하 다가 지하 창고 한쪽 벽에 마련된 비밀 장소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오래된 자료들이 꽉 차 있었소. 실로 듣도 보도 못한 기 이한 자료들이 말이오.”

“어떤 자료들입니까?”

“오컬트 즉 주술, 신비주의, 고대의 지식 등등에 대한 기이한 자료들이었소. 그 양이 상당하고 생전 처음 접해 보는 것들도 많 아서 나는 몹시 놀랐소. 이상한 것은 그러한 자료들이 장부에 기 록되어 있지 않았고, 판매를 목적으로 사들인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소. 우리 아버님이나 할아버님도 그런 사실을 모르셨던 것 같고 말이오.

그래서 나는 증조부가 취미로 수집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 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소. 취미라면 그것을 모아 전시하고 관리 라도 해야 할 텐데, 전혀 관리조차 하지 않은 채 백 년 가까운 세 월이 지나갔단 말이오. 나는 의아하게 느꼈소. 도대체 이 책들은 무슨 이유로 여기 쌓여 있었을까 하는.”

리처드 해밀튼은 다시 시가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몇 모금 빨 아들인 다음 말을 이었다.

“그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나는 마침내 증조부의 비망록을 발견하게 되었소. 그런데 거기에는 증조부가 ‘기사단’의 단원이라는 것과 이 고서점이 일종의 비밀 창고 역할을 했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소.”

“기사단이라면 성당 기사단?”

“그렇다고 나는 생각하오. 미스터 백, 성당 기사단에 대해 아시오?”

“약간은 압니다.”

“그렇다면 성당 기사단이 박해를 받고 몰락했다는 얘기도 들 으셨겠군요.”

“대강은요.”

“그 성당 기사단은 없어지지 않았소. 오히려 더욱 큰 조직으로 개편되었던 거요. 그래서 세기를 이어 오늘 21세기까지 존속하 고 있소. 프리메이슨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오.”

“프리메이슨?”

“그렇소. 물론 지금 프리메이슨은 더 큰 조직으로 개편되어 있 고, 일부 개방된 조직이 되기도 했소. 그러나 성당 기사단은 프 리메이슨의 모태가 된 조직이고, 프리메이슨의 비밀 조직과 같 은 형태로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소. 성당 기사단이 몰락할 때 많 은 단원들이 처형당했소. 성당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 때 막대한 부를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사단장과 모든 단원들을 탄 압해도 그 부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소. 성당 기사단의 부가 존속되었다는 것은 성당 기사단도 없어지지 않았다는 말과 같지. 그들은 성당 기사단의 이름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 어들었소. 그리고 그들이 모아 온 비밀 자료들 중 많은 수가 바 로 미국. 이 고서점의 지하에 보존되어 있었던 거요. 신대륙인 미국이야말로 안전한 장소였을 것이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나는 추측하오. 미국 대륙에 십자군 원정 때 만들어진 조직의 문서 창 고가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의외였을 테니까. 아마도 내 증 조부는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이 고서점을 만든 것 같소. 그런 데.”

백호가 열심히 듣자 해밀튼은 다시 시가를 빨고 짙은 연기를 뿜어 대며 말했다.

“증조부는 분명 열성적인 성당 기사단원이었던 것 같소. 그런 데 그 비망록의 뒤쪽 부분을 보면 돌아가시기 직전 증조부는 무 슨 이유 때문인지 몹시 고민을 했던 것 같소.”

“무엇 때문에?”

“그것은 정확히 말할 수 없소.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일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니까. 다만 신앙에 관련된 이유라고 보면 될 것 이오. 그 때문에 증조부는 아마도 성당 기사단에서 이탈하게 된 것 같고, 그 때문에 돌아가신 것 같소.”

“증조부께서 누구에게 살해당하셨습니까?”

“아니오. 병으로 돌아가셨소.”

“예?”

백호가 의아해하자 해밀튼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원인 불명의 괴이한 병으로 돌아가셨소. 누구도 증상을 들어 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하는 병으로,”

“그렇다면……?”

“그렇소. 나는 그것이 저주였다고 생각하오. 저주에 의한 살 해. 하하. 세상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 그러나 당신이나 당신의 친구들이라면 그것이 정말 불가능한 일 인지 아닌지 알거요. 그렇지 않소?”

“틀림없습니까?”

“심해어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어떻게 되는지 아오? 눈과 내 장이 몸의 모든 구멍으로 꾸역꾸역 밀려 나오지. 나는 그런 병에 걸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소. 나는 신비주 의적인 면에 관심이 많소. 세상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시답잖은 초능력자나 영능력자들 말고도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힘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소. 그리고 강력한 사람들일수록 정체를 숨긴다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소.

물론 증조부가 남긴 자료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 증조부가 남긴 자료들도 아직 극히 일부밖에 보지 못했지만 나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기이한 이야기들이 그득하니까. 좌우간 증조부는 성당 기사단을 배신했고, 그 때문에 저주……………. 아니면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주술적인 해침을 받아 돌아가셨다고 나는 생각하오.”

백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해밀튼도 고개를 덩 달아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러고 보면 증조부가 쌓아 내게 물려준 부(富)도 의아한 면 이 없잖아 있소. 증조부는 금광에 손을 대서 부를 쌓았다고 집안 에서는 전해지고 있소. 하지만 증조부가 금광에 손댔다는 기록 은 어디에도 없소. 분명 증조부가 물려준 부는 성당 기사단과 관 련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확신하건대, 증조부가 성당 기사단의 부를 가로채려 고 배신을 한 것 같지는 않소. 그건 증조부의 신앙과 관련이 있 는 문제였고, 증조부의 변심 때문에 뭔가 중요한 비밀이 누설될 까봐 성당 기사단에서 증조부를 해친 것으로 추정되오. 그런데 증조부가 돌아가시자 증조부 명의의 재산은 고스란히 내 조부께 상속되어 버린 셈이 되었지.”

“처음에 당신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그때의 부를 성당 기사단이 되찾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자 해밀튼이 웃었다.

“성당 기사단이 증조부가 맡아 두었던 재산 정도에 관심을 가 질 것 같소? 상당한 액수이기는 하지만 성당 기사단이 쌓았던 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거요. 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것을 되찾으려고 꼬리를 잡히기보다는 깨끗이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사실은 나도 짐작할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은 엄청난 거금을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만 보아도 그 재산이 막대했던 것 같은데요?”

해밀튼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의 내 재산은 부친과 내가 힘겹게 쌓아 올렸다고 보는 것 이 옳소. 물론 조부 덕분에 처음 시작은 좋았지만 그렇게 막대하 진 않았소. 좌우간 증조부의 배신은 신앙에 관련된 심정적인 것 이었소.”

“아무튼 성당 기사단이 증조부를 해쳤다면 증조부께서는 상당 한 비밀을 알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물론이오.”

“그 비밀이란 것은요?”

“성당 기사단의 본부에 대한 것. 그리고 또 있소. 아직은 말할수 없소만…………….”

그 말에 백호는 실망했다는 듯 되받았다.

“하지만 그건 백 년도 더 지난 이야기 아닙니까? 지금도 그들의 본부가 그 위치에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럴 수 없소. 그들의 본부는 절대 옮길 수 없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말할 수 없소.”

“그것도 말 못한단 말입니까?”

“그렇소. 모든 것이 얽혀 있기 때문이오. 그것을 말하면 모든 것이 한 번에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오.”

그러면서 해밀튼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보고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억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고 결정 을 내리라뇨. 가령 맡고 싶어도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면 맡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해밀튼이 정색을 했다.

“아니오. 당신들의 친구들이라면 가능하오. 내가 왜 가능하지 도 않은 일을 부탁하겠소? 내 이건 말해 두겠소. 내가 바라는 일 은 성당 기사단의 본부로 당신 친구들을 보내 물건을 하나 찾고 자하는 거요. 당신들이 무엇을 찾는지 잘 모르지만 무슨 점토판 이라고 들었으니 내가 찾는 것과 다른 걸 거요. 그러면 당신들은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갖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갖는 거요. 그거면 되지 않소?”

“뭔가를 찾으려는 모양이군요?”

“그렇소. 그러나 절대 약탈한다거나 훔치는 것은 아니라 믿소. 정당성이 충분한 물건이오. 내가 실언을 했는데, 더 이상은 말 해줄 수 없소. 좌우간 그것을 얻는 일은 결코 누구의 재산을 빼앗는 도둑질이나 강도질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해두겠 소.”

“그 정도의 돈을 낸다면 용병단으로 군대를 편성해 파견할 수도 있을 텐데요?”

백호의 빈정거림에 해밀튼은 고개를 저었다.

“성당 기사단에는 기이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우글우글하 오. 저주를 내리고, 초능력을 부리는 자들에게 군대를 보낸다고 소용이 있겠소? 핵폭탄이라도 떨어뜨려 그 일대를 초토화시키지 않는 한, 그들의 소굴에서 뭔가를 찾기는커녕 아무도 들어갈 수 조차 없을 거요. 일류 첩보원이나 용병들도 불가능합니다. 당신 의 친구들 말고는.”

그리고 해밀튼은 묵묵히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해밀튼의 말이 거짓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고 마음이 조금 움직이는 것 같 았다. 사실 여기 오기 전 승희의 태도를 보니 정 안 된다면 점토 판을 빼앗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니 얻는 것 이 좋기는 하겠지만.

“내 친구들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조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죠? 정말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이란 것을 압니다. 한국에서의 일, 일본에서 의 일, 영국, 아프리카, 미국, 인도, 티베트∙∙∙∙∙∙. 거의 다 압니다.” 

백호의 눈빛이 달라지자 해밀튼은 약간 겁을 먹은 듯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 염려는 하지 마시오. 나는 그들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오. 그들로부터 원한을 사고 싶지는 않아요. 일의 성사 유무와 관련 없이, 비밀 보장만은 염려 마시오.”

백호는 입술을 깨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그 물건이 뭔지는 정말 말해 줄 수 없습니까?”

“안 되오.”

“그렇다면 왜 그 물건을 찾는지 이유나 들어 봅시다. 아까 당 신 말을 들어 보면 명예와 신앙이 걸린 것이라고 했지요?” “그렇소.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소만.”

“정말 그 물건에 대해 당신이 정당성을 지니고 있나요?”

“그렇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나는 그 물건을 나 혼자 독점하려 는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을 개인적인 용도 이외로 이용할 마음도 없소. 내친김에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실제 내 눈으로 보고 조 금만, 아주 잠시 동안 만져 보기만 해도 만족이오.”

“그것에 천만불을 거나요?”

“그럴 만한 물건이기 때문이오.”

백호는 도무지 이 사람이 무엇을 바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 었다. 하지만 해밀튼의 눈빛은 거짓됨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목 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가슴이 퍽 벅찬 것 같았다. 

“성당 기사단에서 당신이 정보를 지니고 있다는 건 모르나요?”

“안다면 나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나도 어느 정도 대비는 하고 있소만.”

“흠……”

백호는 깊이 고민해 보았다. 확실히 해밀튼은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았고, 몹시 절박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무엇을 찾는지 모르는 터에 자기가 어떻게 대신 대답을 한단 말인가?

그때 바이올렛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호에게 말을 걸어 왔다. 놀랍게도 서툴지만 한국어로

“승낙…………. 제발……. 어서……!”

백호는 놀라서 바이올렛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바이올 렛의 얼굴은 간절한 표정이 아니었고, 마치 무슨 농담이라도 하 고 있는 것 같았다. 백호도 한국어로 대답했다.

“뭡니까? 나를 놀리시는 건가요?”

바이올렛이 깔깔깔 웃으면서 짧게 말했다.

“날 믿어요.”

바이올렛이 해밀튼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앞으로 나서서 영어로 말했다.

“미스터 백은 농담도 잘하시네요. 거기다 배짱도 두둑하시고. 천오백만이면 응낙하겠대요.”

백호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았다. 지금 바이올렛 이 무슨 수작을 꾸미는 것일까? 백호는 당장이라도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눌러 참았다.

바이올렛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과거 바이올렛은 비록 마스터에게 홀려서였다고는 했지만 퇴마사들을 위험에 빠 뜨린 적이 있었다. 이런 바이올렛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그러는 사이 해밀튼이 눈을 치켜뜨고 백호에게 말을 건넸다. “정말이오? 당신이 직접 이야기해 보시오.”

백호는 당혹스러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바이올 렛이 뒤돌아보고 웃으며 눈을 깜박했다. 이때의 바이올렛의 표 정에 아주 잠깐이나마 진실의 빛이 보였다. 백호는 조금 더 고민 했지만 결국 반 정도 체념한 상태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정 안되면 자신이 책임지리라는 각오로.

“좋소.”

해밀튼이 다시 한번 강조해 말했다.

“이 일은 막중한 거요. 이 일을 의뢰받은 이상, 당신들은 여기 를 떠날 수 없소. 당신 친구들이 물건을 가지고 도착할 때까지 말이오. 그래도 응낙하겠소?”

백호는 눈을 크게 떴다.

“못 떠난다니? 그러면 내가 인질이 되는 거란 말입니까?”

“그렇게 사나운 호칭을 붙일 건 없지 않소? 내 손님이라 해 둡시다.”

“이건……”

백호가 바이올렛 쪽을 돌아보자 바이올렛이 태연하게 말했다.

“난 여기 남겠어요. 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해밀튼 씨의 손님 대 접도 한번 받아보고 싶군요.”

백호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 같았지만 애써 진정하고 차 분하게 가늠해 보았다.

‘바이올렛이 만약 나쁜 속셈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인 질이 되면서까지 그러지는 않을지도………… 아냐, 신부님이나 현 암 씨는 절대로 아는 사람의 목숨을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놓아 둘 사람들이 아니니 그걸 노리고 그러는 건지도 모르지.’

백호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천오백만불이라면 엄청난 거액이 었다. 바이올렛은 그 돈을 노리는 것이 아닐까? 뜬금없는 바이올 렛의 말을 믿고 인질이 되어도 정말 되는 것일까? 그러나 백호가 채 확답을 하기도 전에 해밀튼이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럼 말하리다. 내가 찾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 물이오. 이보다 더 중요하고 신성한 물건은 없을 겁니다.”

백호는 아직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해밀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바이올렛이 재빨리 물었다.

“뭐죠?”

백호는 뭐라고 말을 해서 해밀튼의 말을 부정해 보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막 입을 열려는 순간 해밀튼이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백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찾는 것은 성궤요. 성서에 나오는 언약궤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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