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12화 – 방황하는 유대인 2 : 언약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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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3권 12화 – 방황하는 유대인 2 : 언약궤


언약궤

“언약궤라고요?”

백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바이올렛도 놀란 듯 덩달아 물었다.

“성서에 나오는 언약궤? 《레이더스》라는 영화에도 나왔던 그 언약궤 말입니까?”

그러자 해밀튼이 웃었다.

“영화에 나왔던 건 언약궤의 껍데기일 뿐이오. 궤짝 모양을 하 고 있는 것 말씀이지? 그건 언약궤의 껍질에 불과하오. 중요한 건 그 안에 들어 있는 거요. 그것이 타보트지.”

해밀튼은 시가 연기를 빨아들이면서 천천히 언약궤의 내력에 대해 말했다.

“성서에서 말하는 언약궤는 원래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데 리고 광야를 헤매다가 산에 올라 하나님이 직접 내린 계시를 써 넣은 십계명 석판을 담은 궤짝이오. 원래 모세는 출애굽 이후 광야를 헤매다 시나이 산에 도달했을 때 무리를 떠나 오랫동안 기 도를 드린 끝에 십계명 석판을 가지고 왔지만, 그가 자리를 비운 사십 일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 숭배를 하는 등 완전히 타락 의 구덩이에 빠져 있었소. 금송아지를 숭배했다는 것, 유명하지 않소?”

“그래서요?”

“이에 분노한 모세는 십계명을 쳐서 깨부수고, 타락에 빠진 수 많은 이스라엘 종족을 처형했소. 그 후 모세는 다시 시나이 산에 올라 새로이 십계명을 받았고,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공물을 받아 성막을 세우고 언약궤를 만들었소. 그리고 십계명을 그 언 약궤에 넣어 보존하였으니,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의 보 물이고 성경에 나오는 최고의 보물이기도 하오. 그 깨어진 십계 명이 타보트란 성물(聖物)이오.”

“아니, 그 내용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 물건을 찾 아 달라고 하느니 차라리 고고학자들에게 의뢰해 보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

“고고학자들은 결코 그것을 찾을 수 없소. 알아듣겠소? 그것 은 성당 기사단의 본부에 깊이 감추어져 봉인되어 있단 말이오.” 백호와 바이올렛조차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언약궤가…… 성당 기사단에요?”

“그렇소. 이제 내가 앞에서 무리하게 이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를 아시겠죠? 언약궤가 그곳에 있다는 것 또한 비밀 중의 비밀이오.”

해밀튼은 흥분된 듯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시오! 언약궤란 말이오! 기독교 세계의 가장 중요 한 보물 중 하나요. 물론 성배가 있기는 하지만 언약궤는 그보다 더 오래되고, 더 신비로운 물건이오. 정확하게 말해 언약궤가 아 니라 타보트의 힘이지만.”

백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힘입니까?”

“아주 많소. 언약궤를 지닌 군대는 패배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소. 언약궤는 그 힘으로 여리고의 높은 성벽을 무너뜨렸고, 불 패의 힘을 주었소. 신비한 힘은 그뿐만이 아니오. 언약궤에 손 을 댄 자는 다윗 말고 모두 죽음을 당했지. 하지만 그건 정확하 게 말해 궤짝의 힘이 아니오. 그 안에 들어 있는 타보트의 힘이 란 거요. 내가 원하는 것은 낡은 나무 궤짝이 아니라 언약궤 속 에 든 타보트요. 아시겠소?”

“그것을 얻어서 무엇에 쓰시려고요? 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입니까?”

해밀튼은 잠시 백호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껄껄 웃었다.

“원, 농담도 내가 무슨 그런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오? 허허. 내가 그것을 원하는 이유는 신앙적이고 개인적인 데 있을 뿐이오. 사실 그런 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소. 만지지도 못하는 물건을 내가 대체 무엇에 쓰겠소?”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 때문에 천오백만 불을 건단 말입니까? 당신, 정말 대단한 재산가인 모양이군요.”

백호가 빈정거리자 바이올렛이 말꼬리를 가로챘다.

“잠깐…………… 우리는 성당 기사단의 본부에 대해 알고 싶은 거 예요. 그런데 언약궤라니…. 그러면 언약궤가 성당 기사단의 수중에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그게 어떻게 성당 기사단의 손에 들어가게 된 거죠?”

해밀튼은 바이올렛의 질문이 아주 기쁜 듯 자세히 설명했다. 

“구약 성서를 자세히 읽어 보면 그 언약궤는 솔로몬 시대까지 는 행방이 확실하게 나오오. 아주 자주 언급되지. 그런데 솔로몬 시대 이후부터는 그 행방이 묘연해지오. 솔로몬 시대까지 언약 궤가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보물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오. 성 경의 기록에 따르면, 솔로몬이 그의 지혜로 명성과 부를 쌓은 후 성전을 건축할 때 가장 먼저 모신 것이 바로 그 언약궤라고 했으 니까. 그런데 그 이후부터 성경에 언약궤가 다시는 언급되지 않 소. 그 중요한 보물이 말이오. 이상하지 않소?”

“한 번도요?”

“한 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언약궤의 행방을 찾기 위 해 애썼소. 영화에서는 그 힘을 빌리기 위해서라고 나오지만 그 건 말도 안 되는 허구고, 실제로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찾으려 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거요. 그런데 그중 가장 열심히 애쓴 자 들이 성당 기사단이었소. 나도 꽤 오래 조사해 보았는데, 이미 1100년대부터 성당 기사단원들은 언약궤를 찾아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써 왔소.”

“성당 기사단이 어째서요?”

“자세히는 나도 모르오. 그러나 성당 기사단은 1100년인 가・・・・・・ 그렇지, 1119년인가, 1120년인가에 아홉 명의 프랑스 귀족에 의해 만들어졌소. 가만있자, 1119년이 맞는 것 같군. 좌 우간 1119년에 그 아홉 명의 기사는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2세 에게 영접을 받았는데, 그러자마자 그들은 보두앵 2세에게 ‘신전 언덕’에 본부를 두고 싶다고 말했소.”

“신전 언덕이란건 뭐죠?”

“예루살렘 구시가의 동쪽에 있는 언덕이오. 종교의 성역이라 할 수 있는 곳이고, 솔로몬이 언약궤를 안치하기 위해 지은 성전 이 있던 자리요.”

“그렇다면……?”

“그 전에 이미 그곳에는 알아크사 모스크라는 회교 사원이 있었소. 지금도 남아 있지만. 좌우간 보두앵 2세는 그 모스크를 자신의 왕궁으로 개조해 놓았는데, 즉시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전에 모스크였던 곳의 많은 부분과 한때 솔로몬 성전이 서 있 던 자리를 표시하는 유명한 ‘바위의 돔’ 옆 별채를 그들만이 사 용할 수 있도록 제공했소.”

“그러고요?”

“그 이후로 기사들은 그 유적지에서 한 발도 나오지 않고 무언 가에 몰두했소. 칠 년! 칠 년이라는 세월 동안 말이오. 우습지 않 소? 그들은 그들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그곳에 얼씬거리지 못하 게 했으며, 그곳에서 먹고 자고 일하면서 칠 년에 걸쳐 무언가를 했소.

공식 발표문에서 그들이 성지에서 수행하는 임무란 ‘해안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에 산적들이 침범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 소. 하지만 그들은 1125년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아홉 명이라는 인원을 더 늘리지 않았던 거요! 아홉 명의 기사단이 팔십 킬로미 터가 넘는 길에서 산적 출몰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 한 일인데도 말이오.”

“그러면 그들은…..?”

“물론 정확한 건 아무도 모르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언약궤 를 찾거나, 혹은 그와 관련된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일종의 발 굴 작업을 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소. 그들이 칠 년 동안 일 했던 자리는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곳이고, 솔로몬 성전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봉안할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소. 더구나 그 후 바빌론 군대에 의해 성전을 약탈당했으니 더 이상 보물 같은 것은 없었을 거요.”

“바빌론 군대가 언약궤를 가져간 것은 아닐까요?”

“아니오. 그렇다면 성서의 구구절절이 비탄에 잠긴 내용으로 언약궤 빼앗김이 기록되어 있을 거요. 그러나 그런 내용은 물 론 없소. 좌우간 성당 기사단원들이 그곳에서 아무도 만나거나 나가지 않고 처박혀 칠 년간이나 무엇인가를 했다면 그것은 발 굴 작업일 확률이 높은 걸 거요. 성당 기사단의 공식 명칭에도 그런 내용을 암시하는 단어가 있지. 그들의 공식 명칭이 무엇이 었는지 아시오?”

바이올렛은 아는 것 같았으나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

“흠.”

“그 명칭이나 그들의 초기 행적을 보아도 애당초 그들은 솔로 몬의 성전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소.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 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은 언약궤였지. 아니, 그건 전 세계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보물 중 하나일 거고.” 백호가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때 언약궤를 발견한건가요?”

“아니오.”

“그렇다면 어째서 성당 기사단이 언약궤를 가지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해밀튼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단정할 수 없다면 왜 말을 했겠소.”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혹 증조부의 기록에 그게 나와 있던 겁니까?”

그러자 해밀튼은 이상하게도 조금 빈정거리듯 대답했다. “그렇지, 그래. 성당 기사단이 언약궤를 입수한 경위에 대한 내용. 그리고 거기에는 성당 기사단의 본부에 대한 대략의 지도 같은 것도 적혀 있었소.

“그것이 바로 ………….?”

“그렇소. 증조부께서 남기신 기록이오. 성당 기사단은 본부에 타보트를 보관하고 있고, 그것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오. 따라 서 본부를 옮길 수도 없는 거요. 아직도 분명 그대로 있을 거요.” 

그리고 해밀튼은 잠시 눈을 굴리다가 불쑥 말했다.

“하나만 더 알려 드리지, 언약궤-타보트와 성당 기사단의 본 부는 에티오피아에 있소.”

“에티오피아?”

“그렇소. 에티오피아. 프레스터 존의 왕국이자 아프리카 유일 의 전통적 기독교 국가. 거기에 언약궤와 성당 기사단의 본부가있소. 물론 어디에 있는가 하는 자세한 것은 차차 알려 주겠소 만.”

바이올렛이 그녀답지 않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잠깐만요. 성당 기사단이 언약궤를 입수했다면 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 문서가 진품인지도 확인되었나 요? 성당 기사단이 어떻게 언약궤를 입수했는지, 그 본부가 에티 오피아에 있는 것이 정말 맞는지, 아직도 언약궤를 지니고 있는 것이 확실한지도 말이죠.”

“오. 저런.”

바이올렛이 긴장하여 총알같이 말하자 해밀튼이 정색을 했다.

“틀림없소. 자자, 그럼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지. 그사이에 언 약궤가 사라질 것은 아니니까. 나도 증조부의 기록을 보고 반신 반의하여 수년간이나 심혈을 기울여 고증을 해 왔소.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결과를 발표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오.”

일단 해밀튼은 언약궤의 실종에 대해 말했다. 모세 이래로 언 약궤는 유대 민족의 가장 중요한 보물 중 하나였다. 사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첫 성전을 지었을 때 그의 유일한 동기는 ‘여호 와의 언약궤를 봉안할 전(殿)’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 사이의 어느 날, 이 독특한 귀중함과 힘을 지닌 물건은 아무도 모르게 성전의 지성 소에서 사라졌다. 성서에조차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기원전 587년에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불을 질렀 을 때, 언약궤는 사라진 지 오래였소. 또 기원전 538년 유대인들 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 제1성전의 폐허 위에 세웠던 제 2성전에도 없었소. 물론 아까도 말했듯, 바빌론 사람들이 전리품 으로 가져간 것도 아니고. 기록에는 약탈당한 놋그릇의 숫자까 지 언급되는데, 언약궤가 약탈당했다면 기록되지 않을 수가 없 지 않겠소?”

“그렇다면 어디로 간거죠?”

“일단 분명한 것은 언약궤가 솔로몬 왕 시절에 없어졌다는 거 요. 솔로몬 왕 때까지 수없이 언급되던 언약궤가 그때를 기점으 로 성서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게 되니까. 그에 대해 언급한 고 문서가 있기는 하오만………….”

그러면서 해밀튼은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필사본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바로 이거요. 물론 사본이오만 이건 케브라 나가스트」라는 책인데, 그에 따르면 언약궤를 가져간 사람은 메넬리크요.” 

“메넬리크?”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 사이에서 난 왕자 메넬리크. 솔로몬 은 현명한 왕이었지만, 후에는 자신의 지혜를 믿고 상당히 타락 하여 우상을 섬기고 신앙을 접어 두었소. 아마도 신앙의 첫 번째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언약궤를 더럽히지 않고자 새로운 땅으로 옮긴 것이라 볼 수 있지.”

“확실합니까?”

“물론 메넬리크가 정말 그랬는지는 확인할 수 없소. 모종의 은 폐 공작이 있다는 말도 있고, 몇 가지 면에서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지. 그러나 언약궤가 그때 누군가에 의해 옮겨져 결국은 에 티오피아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말은 사실에 상당히 근접해 있 소. 지금도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악숨’에 타보트가 봉안되어 있 다고 굳게 믿고 있소.”

“그런데 성당 기사단은요? 솔로몬 시대에 언약궤가 옮겨졌다 고 했는데, 성당 기사단은 그보다 천육백 년가량이나 뒤에 만들 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그런데 메넬리크든 누구든 간에 언약궤를 에티오피 아로 옮겼다면 그것을 비밀로 해야만 했을 거요. 기독교의 세력 이 점점 커지면서 더더욱 비밀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겠 지. 그리고 1100년대 정도 오면 언약궤를 찾겠다는 사람은 거의 사라지게 되오. 오히려 언약궤보다는 성배가 훨씬 큰 보물로 여 겨지지.

그럼에도 성당 기사단은 앞서 말한 것처럼 필사적으로 언약궤 를 찾았소. 물론 솔로몬 성전에서는 언약궤가 나오지 않았을 거 요. 포기 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르지. 그때만 해도 성당 기사단은 아홉 명의 작은 조직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조금 더 시일이 지나자 성당 기사단원들도 뭔가 눈치를 채게 되었던 것 같소. 프레스터 존의 왕국 때문에.”

“프레스터 존의 왕국?”

“당시는 십자군 전쟁이 한창일 때였소.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국가들이 일으킨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국가의 힘이 훨씬 더 강했지. 대부분의 십자군은 비참하게 패배하거나 열세를 면 치 못했소. 그때 기독교 국가들에 들려온 희소식이 프레스터 존 의 왕국 이야기였소. 이슬람이 득실거리는 땅 너머에 강대한 기 독교 국가가 존재한다는.”

“그렇다면 그 나라가 바로……………?”

해밀튼은 책상 위의 고풍스런 지구본을 빙그르르 돌리다가 탁 세우고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었다.

“맞소. 에티오피아요. 에티오피아는 특이하게도 전통적으로 계속 기독교 국가였소. 사실 내 생각에 따르면, 회교와 토속 신 앙이 난무하는 아프리카 한가운데에서 기독교 국가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강력한 기독교적인 유물이 있어야 하오.

당시는 매스컴도 없었고, 기독교 국가들과의 길은 모두 이슬 람이 막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바로 언약궤일 거라고 난 생각하 오. 사실 지금까지도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언약궤를 자신들이 모시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잠깐 잠깐!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있다면 성당 기사단은 언약궤를 가지고 있을 수 없잖아요?”

“자자, 이야기를 더 들어 보시오. 좌우간 프레스터 존 왕국의 이야기는 성당 기사단 사람들에게 언약궤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 른다는 의심을 갖게 해 주었을 거요. 솔로몬 성전 터를 칠 년이나 발굴할 정도로 끈기 있던 사람들이 그런 정보를 지나칠 리 없지. 성당 기사단은 그 이후 갑자기 노선을 바꾸게 되오. 1126년 그 들은 성 베르나르의 지지를 얻어서 트루아 종교 회의에서 기사 단 규칙을 정하고 전 유럽에서 지원자와 기부금을 얻소. 그 때문 에 12세기 후반에 이르러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오. 그런 사업 을 확장한 이후 성당 기사단은 다시 언약궤로 눈을 돌린 거요.” 

“하지만 언약궤는 에티오피아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요?”

“외면적으로는 그렇소. 자, 여기서부터 증조부의 기록 이야기 를 해 드리지, 증조부는 이렇게 기록하셨소. ‘에티오피아에 보존 되어 있는 타보트를 얻기 위해 성당 기사단은 백여 년 동안 애를 썼다. 그러나 나의 신앙심에 비추어 나는 몹시 회의를 느낀다.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이오.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성당 기사단은 백여 년에 걸친 모종의 공작 끝에 진짜 타보트의 위치를 알아내고 그것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는 것 같소. 그 공작이 언제부터 이루어진 것인지는 알 길이 없소만 증조부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소. 나도 실제로 에티오피아를 방문해 보았지. 내전중일 때 방문하느라 몹시 힘이 들었지만, 에티오피아에는 이만 개가 넘는 교회가 있 고, 그 교회 모두가 자신들이 진짜 타보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 하고 있소. 그리고 그중 어떤 타보트도 나는 볼 수 없었소.” 

“보여 주지도 않던가요?”

“설득, 간청, 회유, 뇌물 등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소. 그러 므로 외부인은 타보트를 결코 볼 수 없다고 봐도 좋을 거요. 그 리고 각 타보트의 관리인은 저마다 자기가 보존하고 있는 것이 진짜 타보트라고 말하고 있소. 물론 타보트가 이만 개나 있을 리 없으니 그 사람들도 진짜 타보트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진짜 타보트가 어디에 있 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는 셈이지.”

“흠…………. 나무를 숲에 감춘 셈이군요.”

“바로 그렇소. 적절한 표현이오. 그러나 거기에는 큰 단점이 한 가지 있소. 언약궤, 즉 타보트가 정말 성서에 언급된 것같이 엄청난 힘을 지녔다면 그것을 건드리기만 해도 죽게 될 거요. 그 러니 아무도 직접 만질 수 없는 물건이지. 언약궤가 필요한 것도 타보트를 직접 만지지 않고 운반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아울러 타보트는 솔로몬의 성전에서 옮겨진 이래 공식적으로 사용된 적 이 없소. 그렇다면 타보트가 가짜로 바뀌어도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 또한 없다는 이야기요.”

“그러나.”

바이올렛은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타보트의 정식 관리인은 그것의 진위를 알 수 있는 무슨 방법 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오. 아무튼 생각해 보시오. 타보트는 비 록 성서에서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진상은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이 진정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면 타보트의 관리인도 없어진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 만약 관리인 중의 한 사람이 매 수를 당해서 다음 세대의 관리인에게 가짜를 인계했다면? 가능 성은 충분하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백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언약궤・・・・・・ 아니, 타보트에 정말 힘이 있다면 그것을 건드리기만 해도 죽게 되는 판인데, 그것을 어떻게 가지고 나와 운반하죠? 그리고 타보트에 아무런 힘이 없다면 당신은 왜 그걸 그토록 얻으려 애쓰는 겁니 까? 타보트에 깃들어 있다는 엄청난 힘 때문에?”

그러자 해밀튼이 웃었다.

“천만에. 내가 그런 것을 무엇에 쓰겠소? 자세히 밝힐 수는 없 지만, 무슨 쓰임새가 있어서 그것을 얻고자 하는 건 아니오. 게 다가 돈 때문도 아니고.”

“그러면 무엇 때문이죠?”

백호가 캐묻자 해밀튼은 조금 사나워진 눈초리로 백호를 가만 히 바라보았다. 그때 바이올렛이 다시 해밀튼에게 물었다.

“그런데 증조부의 기록에 성당 기사단 본부의 위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던 것은 틀림없나요?”

“그렇소.”

“확실한가요?”

“물론이오. 아무튼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소. 이제 이 이야기를 들었으니 내가 물건을 찾을 때까지 당신들은 내 손님이 된 거요. 속히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 주시오.”

그 말을 듣고 백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안색을 굳혔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또다시 해밀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당신, 성당 기사단의 본부가 어디 있는지, 그걸 정말 알고 있는지가 확실치 않잖아요. 당신은 무턱대로 안다고 하지 만 그걸 확신할 증거는 하나도 없지 않나요? 내 친구들이 헛걸음 을 하게 된다면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은 없을 텐데 말이에요.”

“내가 그만한 확신도 없이 미쳤다고 이런 일을 하겠소?”

“그래도 말이에요. 진짜 확실한 건가요?”

“틀림없소.”

“이제는 말해 주어도 되지 않나요?”

바이올렛이 자꾸 캐묻자 해밀튼은 표정을 굳혔다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미스 바이올렛, 공연히 애쓰지 마시오.”

“무슨 소리죠?”

“다 알고 있다는 이야기요. 흠, 당신은 나를 과소평가하지 말았어야 했소.”

백호는 영문을 잘 알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바이올렛은 갑자 기 그 말을 듣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해밀튼이 책상 위의 버튼을 누르자 사방의 책장이 스르르 열 리면서 대여섯 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중 한 사람은 흑인 노인이었고, 한 사람은 아랍인 같아 보였는데 나머지 사람 들은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백호가 긴장 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해밀튼은 오히려 미소를 보이면 서 의자에 몸을 편안하게 파묻었다.

“당신은 나와의 계약을 그리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소? 다 알고 있소.”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죠?”

해밀튼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당신 친구들 중에 굉장한 투시력을 가진 여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여자도 지금 이 근방에 와 있겠지?”

“무슨 소리죠?”

바이올렛은 잡아떼려는 것 같았으나 이미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강은 짐작했소. 당신은 당신 팩스를 누군가가 같이 받아 보고 있다는 것을 몰랐겠지만. 어젯밤 한국으로 두 번의 팩스를 보 낼 때 나는 모든 것을 눈치챘소.”

‘두번?’

백호가 의아해하는데 해밀튼이 입을 열어 설명했다.

“첫 번째 팩스를 받고 여기 미스터 백이 오게 되었을 거요. 그 리고 이 사람이 급히 출발할 때쯤 당신은 다른 팩스를 보냈지? 당사자들에게 당장 달려오라고 말이오.”

백호는 그 말을 듣자 바이올렛이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얼추 눈치를 챘다.

해밀튼은 득의양양하게 계속 자신의 추리를 말해 갔다. 

“그 여자는 엄청난 투시력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의 마음속 정 도는 훤히 읽을 수 있다지? 그래서 당신은 두 번째 팩스를 보내 그 여자에게 이 근방으로 와 있으라고 한 거요. 그렇지 않소? 성 당 기사단의 본부에 대한 정보를 그냥 빼내 가려고 말이오.” 

바이올렛은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해밀튼 은 유유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에게 자꾸 말을 거는 모양이지만, 안 되지, 안 돼. 아주 머리를 잘 쓰셨지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소. 허허.”

“이미 다 읽어 냈을 거예요. 당신이 정말 알고 있었다면 지금 쯤 승희 씨가 다 알아냈을 거예요.”

이윽고 바이올렛이 반격하자 해밀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난 분명 성당 기사단 본부의 위치를 알고 있지. 하지 만 이건 생각해 보셨소? 세상에는 초능력이나 주술을 아는 사람 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게 적지도 않소. 하물며 나는 성당 기사단 을 상대하려는 사람이오. 짐작이 가오?”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나에게 투시력은 통하지 않을 거요. 하하. 대비를 해 두었다고나 할까?”

그것은 좀 의외의 발언이었다. 바이올렛은 발을 한 번 굴렀고 얼굴빛도 조금 해쓱해졌다.

“내 예상보다 훨씬 머리가 좋으시군요.”

바이올렛이 비꼬자 해밀튼은 태연히 받아넘겼다.

“초능력자, 주술사, 성당 기사단원들을 상대하다 보면 그 정도 는 습관이 되는 모양이오.”

급기야 바이올렛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백호는 작은 소리로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저 사람 말이 정말입니까? 정말 승희 씨에게 다시 연락을 했 습니까? 그래서 시간을…………….”

바이올렛은 이제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는 그제야 바이올렛이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서점까지 왜 길을 빙빙 돌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봤어요.”

“어쨌거나 그럼 이 근방에 승희 씨가 와 있는 겁니까?”

“예, 현암 씨도요.”

백호는 다소 안심이 되었다. 현암이나 승희가 와 있다면 해밀튼 패거리 정도는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 을 끄는 것이 문제였다.

“할 수 없군요. 그러면 이젠 어떻게 되는 거죠?”

해밀튼은 바이올렛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

“변한 것은 없소. 좀 얄팍한 술수를 부리시기는 했지만, 특별 히 이번 한 번만 넘어가겠소. 나에게 언약궤를 찾아만 준다면 당 신들은 물론 무사할 것이고, 거금도 손에 쥐게 될 거요.”

“기어이 우리에게 언약궤를 찾아오라고 할 작정인가요?” 

“물론이오. 마하딥!”

해밀튼은 흑인 노인을 불러 그와 뭐라고 소곤소곤 이야기한 다음 백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 친구들을 믿겠소. 마하딥이 그러는데, 당신 친구들 은 굉장한 사람들 같다는군. 충분한 능력이 있을 것 같구려. 그 러니 계약은 아까 말한 그대로요.”

백호는 아연했다. 해밀튼이라는 작자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마하이라는 사람도 일종의 능력자여서 오히려 바이올렛이 퇴마사들을 직접 불러온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능력까지 직접 확 인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꾸민 모양이었다.

“당신 두 사람은 이제 내 손님이오. 일이 무사히 끝날 때까지 말이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이상 이상한 수를 쓰지 말아 주기를 바라오. 성당 기사단의 본부를 알려 준 다음에는, 그리로 가서 무슨 짓을 하건 나는 상관 안 할 거요. 타보트만 얻을 수 있게 된 다면 말이오.”

그때 바이올렛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슬쩍 백호에게 말했다. 

“백호 씨, 내가 준 꽃을 눌러요.”

백호는 바이올렛이 공항에서 꽂아준 꽃을 기억해 냈다. 그 꽃 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백호는 그 꽃 을 슬쩍 눌렀다. 그것을 본 바이올렛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응하지 않겠다면?”

해밀튼은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내 비밀을 모두 말했는데도 응할 수 없다고? 정 그렇다면 그 냥 보내 줄 수는 없소.”

“성당 기사단의 본부가 어디 있는지 당신이 말 안 한다면 내가 언약궤를 건드릴 수는 없잖습니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요?”

“할 수 없소. 나는 정말 오랜 세월 동안 언약궤를 찾아다녔으니 그 비밀을 누설시킬 수는 없소. 이제 당신들은 좀 쉬는 것이 좋겠소. 축축한 땅속에서.”

“당신 미쳤소? 내가 응한다고 말은 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묻 지는 않았잖소. 당신이 마음대로 떠들어 놓고 이제 와서…………….” 

해밀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변에 늘어선 사람들을 향해 손 짓했다. 그러자 그들은 백호와 바이올렛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백호는 갑자기 껄껄껄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해밀튼은 의외 라는 듯 백호를 바라보았다. 해밀튼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백호는 해밀튼에게 말했다.

“당신이 게임에서 이겼다고 생각합니까?”

해밀튼은 여유만만하게 되받았다.

“지지는 않았다고 보는데?”

“방금 내 친구들이 여기 와 있다고 했죠? 그리고 승희 씨ᅳ아, 그 여자분 말입니다는 투시력이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 여기 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다 알고 있겠죠?”

“그럴지도.”

해밀튼은 조금 의아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면 당신들은 이제 졌소, 내 친구들이 당신의 협박에 순순히 응해서 나를 여기 그냥 놔두리라고 믿소?”

“놓아두지 않으면 어쩔 텐가? 쳐들어온단 말인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해밀튼이 크게 웃었다.

“후회하게 될 거요! 그건 불법이고, 무단 침입이오!”

“당신이 우릴 잡아 두는 것은 합법적인가요?”

“명을 재촉하는 거요. 여기는 지금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 소! 문짝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 문이지만 사실 총알도 뚫을 수 없는 합금판이 장치되었고, 벽의 두께는 ….”

그 순간 밖에서 쿵 하는 소리와 사람들이 우 하며 떠드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더불어 몇 발의 총성도 탕탕 울려왔다. 그 소 리를 듣고 해밀튼이 약간 놀라면서 눈을 치떴다.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이라 백호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내 친구들을 그런 걸로 막을 수 있다고 봅니까?”

“당신 친구들은 명을 재촉한 거요. 여기 내부에만 내 경호원이 삼십 명이나 있소! 모두 특등사수고.”

해밀튼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여전히 기를 꺾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백호는 껄껄 웃었다.

“그걸로 될까요?”

“지금 나에게 협박을 하려는 건가? 설마…………….’”

“그 인원으로는 승희 씨 한 명도 못 당해 낼 거요. 그리고 만약 현암씨가 왔다면 삼백 명이라도 상대가 안 될 거요.”

“뭐?”

해밀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마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의 노인인 마하딥은 어느새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 말이 ・・・・・・ 맞습니다.”

밖에서 울리는 고함 소리와 누군가가 쓰러지는 듯한 둔중한 소리, 그리고 장식물과 책장 등이 무너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점점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해밀튼도 안색이 변해서 눈 짓을 했다. 마하딥과 아랍인은 해밀튼의 앞을 좌우로 막아서고, 총을 가진 여섯 명은 모두 바이올렛과 백호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그 순간 휙 소리와 함께 합금판을 댔다는 문 자물쇠에서 뭔가 빛나는 것이 휙 솟아올랐다가 재빠르게 번쩍하며 사라졌다. 그 리고 곧 거짓말처럼 문이 간단하게 휙 열렸다. 거기에는 청홍검 을 뽑아든 현암이 싸움을 했다거나 힘을 썼다고 믿을 수 없을 정 도로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해밀튼은 주춤 뒤로 물러섰고 여섯 명의 경호원들도 백호와 바이올렛의 머리에 총을 겨누면서 그들을 끌고 우르르 뒤로 물 러섰다. 아무리 현암이 와주었다 해도 머리에 총이 겨누어진 상 태라 백호는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암은 그들이 마치 그 자리에 없기라도 한 것처럼 한 번 무심하게 쓱 훑어볼 뿐이었다. 그리고 손에 든 둥글고 긴 가방에 청홍검을 꽂았다. 공항에서 칼이 금속 탐지기를 피할 수 있도록 만든 골프 가방이 었다.

현암은 담담한 눈빛으로 백호와 바이올렛에게 목례를 해 보였 다. 백호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머리에 겨누어진 총구가 하나가 아닌 터라 꼼짝하지 못했다. 현암은 백호와 바이올렛의 머리에 겨누어진 총구에는 무관심한 듯 사람들을 하나둘 훑어보다가 뒤 쪽에 숨은 해밀튼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당신이 해밀튼?”

현암의 영어는 익숙한 편이 아니었고, 그다지 적의가 느껴지 는 억양이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특등사수라는 사람들을 흠 칫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해밀튼은 이상하게도 몹시 침 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죽고 싶은가?”

그때 문밖에서 깔깔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화려한 빛깔의 선글라스를 낀 승희가 가벼운 걸음걸이로 방으로 들어오면서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누가 누굴 죽이나요? 그런 끔찍한 이야기는 그만할 수 없나요? 숙녀 앞인데?”

“가까이 오지 마!”

해밀튼을 둘러싼 자들은 위협이라도 하듯 총구를 백호와 바이 올렛에게 겨누었고, 그중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외쳤다. 그러나 승희는 무심하게 말했다.

“장난감들을 가지고 장난이 심하시네? 나가지도 않을 텐데요?”

다음 순간 바이올렛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던 경호원들이 비명 을 지르면서 총을 떨어뜨렸다. 한 사람은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 고 한 사람은 머리를 한 사람은 배를 움켜쥔 채 아예 데굴데굴 땅을 구르고 있었다. 승희가 염력을 발휘해 신경 조직을 건드린 것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의 경호원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 었다.

“어디들 아프신 모양이네? 그러셔서 어디 경호원 하겠어요?”

승희가 빈정거리며 말하는 사이 이번에는 백호에게 겨누어졌 던 총들이 전부 철컥철컥 소리를 냈다. 안전장치가 걸린 것이었 다. 경호원들이 놀라서 총으로 손을 뻗는 순간, 세 사람의 경호 원들도 앞의 사람들처럼 모두 비명을 지르면서 나뒹굴었다. 백 호와 바이올렛은 기다렸다는 듯 승희 쪽으로 뛰어갔다.

그때 마하딥이 크게 소리쳤다.

“사이코키네시스!”

그러자 해밀튼의 앞을 막아섰던 아랍인이 비호처럼 몸을 날 려 승희를 덮쳤고, 마하딥은 눈을 감고 뭐라 중얼거리면서 양팔 을 크게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나 아랍인은 승희에게 가 닿지 못했다. 그 전에 무언가 쇠기둥 같은 것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 문이다.

금속성에 가까운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아랍인이 땅바닥에 넘어졌다가 고양이처럼 재빨리 일어난 다음에야 땅바닥에 무언가 투둑 떨어졌는데, 그것은 날카로운 쇠붙이였다. 아랍인이 어느 새인지 양손에 끼고 있던 날카로운 쇠손톱이 돋은 장갑 중 날 두 개가 부러진 것이었다. 다음 순간 아랍인의 날카롭던 눈은 경악 으로 크게 벌어졌다.

“맨, 맨 팔로?”

아랍인을 가로막은 것은 현암의 오른팔이었다. 맨팔로 아랍인 의 쇠 손톱을 막았는데도 손톱의 날이 부러졌을 뿐, 현암의 팔에 는 상처조차 없었다. 천정개혈대법을 육 단계까지 올린데다 백 년이 넘는 공력으로 보호받으며, 평소부터 기운을 쓰는 데 가장 익숙한 현암의 오른팔은 그야말로 쇠붙이나 다를 바 없었다.

현암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아랍인을 보고 한마디 했다. 

“꽤 빠르지만…”

다음 순간 현암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짓누르 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팔다리에 무엇인가 무거운 것이 매달 린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현암은 쓱 눈을 돌려 마하딥을 보았다. 그때 승희가 현암에게 한국말로 속삭였다.

“저 할아버지한테 난 안 되겠는데?”

현암이 성큼성큼 마하딥 쪽으로 두 걸음을 내디뎠다. 마하은 활짝 벌린 두 팔을 부르르 떨면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현암의 몸이 미미하게 기우뚱했고 현암의 발밑에서 우지직 소리가 났다.

그러나 현암은 마하딥 쪽으로 천천히 계속 걸어갔다. 마하덥 은 눈을 뜨지 않고 있었으나 모든 것을 느끼는 듯, 더더욱 목소 리를 높였다. 그러자 현암의 발밑의 마루가 뿌지직 소리를 내며 푹 파여 들어갔다.

현암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인상조차 찌푸리지 않고 태연히 발을 빼어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디려 했다. 다시 한번 마하의 비 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고 현암의 몸은 마룻바닥 밑으로 더 꺼 져 들어갔다. 현암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내밀었고, 현암의 몸이 나아감에 따라 마루의 두꺼운 판자들은 와지끈거리며 부서 져 사방으로 튀었다.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 현암은 마루의 판자 들을 몸으로 밀어 부수면서 마하딥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겁먹은 듯 보이던 아랍인이 현암에게 몸을 날렸다. 그 런데 아랍인은 현암의 몸에 닿기도 전에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 서 무언가에 세차게 아래로 잡아끌리기라도 한 듯 마룻바닥에 처박혀 납작하게 눌리고 말았다. 마하딥이 펼친 주술력의 범위 에 섣불리 들어왔다가 덩달아 짓눌려 버린 것이었다. 아랍인의 몸은 비명과, 마룻바닥과 함께 무너지고 처박혀 보이지 않게 되 었으나 현암은 여전히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루는 두꺼운 나무로 되어 있어서 수백 킬로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마루가 꺼지도록 마하딥이 주술로 현암 을 찍어 눌렀는데도, 현암은 멈추기는커녕 마룻바닥을 종이처럼 몸으로 밀어 부수면서 마하에게 다가간 것이었다. 한 가닥 한 다던 아랍인마저 개구리같이 깔려 버릴 정도였는데 말이다.

마침내 마하의 앞까지 다가간 현암이 마하딥에게 손을 뻗으 려 하자 마하딥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다가 그 자리에 벌렁 쓰 러져 기절해 버렸다. 얼굴이 검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코에 서는 선혈이 샘솟듯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해밀튼은 침착하게 현암과 승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미소까지 감돌고 있었다. 현 암이나 승희나 백호나 모두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뭐라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해밀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날 해칠 건가?”

현암은 서툰 영어지만 담담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럴 생각까지는 없소.”

느닷없이 해밀튼은 껄껄껄 소리를 내며 큰 소리로 웃어 젖혔 다. 현암, 승희, 백호, 바이올렛마저 도대체 이 사람이 왜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바이올렛이 멍하니 해밀튼을 바라보다가 승희를 쳐다보았다.

“알아냈나요?”

바이올렛이 물었다. 바이올렛의 목소리는 아직도 조금 떨리고 있었으나 이제는 거의 안정을 찾아가는 듯, 특유의 익살스런 억양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승희가 웃으며 말했다.

“못했어요. 해밀튼 씨도 능력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무슨 말입니까, 승희 씨? 그는 무슨 조치를 취했다고……” 

백호가 놀라서 묻자 승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승희의 얼굴 은 예전보다 화장기가 옅어졌지만 훨씬 밝아 보였다.

“조치를 취한 게 아니고 해밀튼 씨도 굉장한 영능력자인 모양이에요. 전혀 안 보이는데요?”

바이올렛이 놀라며 해밀튼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 그런 줄 몰랐는데?”

해밀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훌륭하오. 대단히 훌륭해. 실례를 용서해 주기 바라오.”

“실례? 용서라고?”

해밀튼은 웃으면서 되받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들의 능력을 확인할 수 없어서 이런 거요. 악의는 없었으니 염려 마시오. 그럼…………… 부하들을 물러가게 해도 되겠소?”

그러자 백호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악의가 없었다고? 이게 악의가 없었다는 거요?”

해밀튼이 여유 있게 백호에게 말했다.

“당신들을 정말 해칠 생각이었다면 구태여 시간을 끌지도 않 았을 거요. 당신들 친구들이 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소. 그리고 이 숙녀분이 투시력을 지닌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런데 나 는 일부러 꾸물거리고 당신들을 협박・・・・・・ 아니, 협박하는 체했 소. 아직도 모르겠소?”

백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해밀튼은 현암과 승희의 실력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 쇼를 한 것이란 말인가? 믿어지지 않 았다. 해밀튼이 다시 말했다.

“굳이 부하들을 여기 둘 필요까지는 없지 않소? 어차피 내가 여기 있으면 그만 아니겠소? 내가 저 청년의 손가락 하나도 당해 낼 수 없다는 건 다 아실 것 같은데.”

해밀튼은 유유히 부하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현암 이승희도 가만히 그것을 보고만 있을 뿐, 제지하지는 않았다. 한참 있다가 바이올렛이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는 거죠?”

“아까 말한 것과 같소.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니오.”

“아아…………… 난 잘한다고 했는데……………. 이건…………… 너무 미안해요. 현암 씨, 승희 양……………”

현암은 고개를 끄덕해 보였고 승희가 말했다.

“할 수 없죠, 뭐. 백호 씨에게 미안해요. 사실 처음에는 이런 줄 몰랐어요. 나중에 바이올렛이 두 번째 팩스를 보내고 그때서야 알고 부리나케 달려온 거랍니다.”

“모두 내 잘못이에요…………. 백호 씨, 용서해 주세요.”

바이올렛이 정말로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백호는 화가 나기는 했어도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없죠.”

승희가 해밀튼에게 말했다.

“당신 부하들로도 저만한 능력자들이 있는데, 왜 우리를 택하려는 거죠?”

“내 부하들은 성당 기사단의 본부에 들어갈 실력이 못 되기 때문이오.”

“만약 우리가 거절한다면?”

“거절하지 않을 것으로 아오.”

“어떻게 장담하는 거죠?”

해밀튼은 안색을 바꾸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사실을 모두 말해 줄 것이기 때문이오. 승희 양, 이제야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었군. 나를 기억하시오?” 승희는 의아해서 말했다. 분명 승희는 해밀튼이라는 사람을 처음 보았는데…..”

“당신을 기억하다뇨?”

해밀튼이 갑자기 눈을 감고 입을 반쯤 벌렸다. 그 상태에서 승희의 마음속으로 낯선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러면 기억이 나겠소?

승희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앗 하는 소리를 냈 다. 현암은 눈을 조금 찡그리며 승희를 돌아보았다. 승희는 놀라 움에 눈을 부릅뜨고 말을 더듬었다.

“이………… 이 사람…………. 전에 봤던……………”

“전에 봤던 누구란 거야?”

“전에………… 키건하고 싸울 때 만났던 ・・・・・・ 성당 기사단의 우두머리야……………!”

현암도 놀랐고, 그 이야기를 짤막하게 전해 들은 바 있었던 바 이올렛이나 백호도 놀랐다. 너무도 의문이 많아서 입을 열 수 없 을 정도였다. 성당 기사단의 우두머리가 왜 성당 기사단의 본부 를 알려 준다고 하는 것일까? 성당 기사단의 본부에 있는 어떤 물건을 얻으려는 것일까? 해밀튼은 천천히 눈을 뜨고 난 다음 말 했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소. 이제 그냥 이야기해도 믿겠소?”

승희는 심각한 눈빛으로 해밀튼을 보았다.

“그거 ・・・・・・ 당신 몸이 아니죠?”

“그렇소. 내가 잠시 빌린 거요. 한 이백 년 정도 되었지.”

바이올렛은 깜짝 놀랐다.

“이백 년? 아니, 그럼 ・・・・・・”

“그렇소. 내가 빌린 몸은 리처드 해밀튼이 아니라 아서 해밀튼의 몸이오. 그는 저주에 의해 죽음을 당했는데, 내가 그때 이 몸 을 빌려 쓰게 된 거요. 증조부의 기록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기 록을 남긴 것만은 확실하오. 나도 그제야 언약궤가 그곳에 있다 는 사실을 알게 된 거고 말이오.”

“아서 해밀튼은 성당 기사단에 의해 죽었… 아니, 그럼 당신이 죽인 거잖아요!”

바이올렛이 외치자 해밀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절대 아니오. 그를 죽인 것은 성당 기사단이 아니오.”

“그럼요?”

“자세하게 말하자면, 성당 기사단의 상부 조직이 그를 죽인거요.

현암이 말했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이요?”

“프리메이슨이 지금은 성당 기사단보다 상부의 조직이기는 하 지만 그것도 아니오. 물론 프리메이슨의 활동은 양성화되어 있 소. 그러나 아직도 비밀과 신비에 둘러싸인 또 다른 프리메이슨 이 그 뒤에 숨어 있는 것도 사실이오. 프리메이슨의 단원들조차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더 큰 조직이 위에 있소.”

백호가 말했다.

“혹시………… 시온주의자들의 조직은 아닙니까?”

“비슷하오. 그러나 조금 다른 것이 있소. 그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하겠소. 좌우간 나는 절대 그를 해친 적이 없소.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아무도 해치거나 해치라고 명령을 내 린 적이 없다오.”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성당 기사단의 사람들이 사 방에서 출몰하는데, 우두머리인 당신이……………..”

“오해하시는군. 나는 성당 기사단의 우두머리가 아니오. 나도 그중의 일원일 뿐이오. 더구나 지금은…………….”

그의 말을 끊고 현암이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정말 원하는 건 뭡니까?”

“방금까지 설명했잖소. 설마 이 자리에 없어서 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저기 숙녀분께서 그럴 능력은 충분하셨을 텐데.”

“그러면 당신은 정말 언약궤를 원하는 건가요?”

“물론이오. 모든 것은 내가 말한 바 그대로요.”

“그걸로 뭘 하려는 겁니까?”

“그것도 차차 설명하겠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물으면 대답할 수 없지 않소.”

해밀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좌우간 그것은 당신들에게도 꼭 필요한 물건이 될 거요. 안그러면 당신들은 끝장이거든.”

“무슨 말입니까?”

“방금 말했죠? 성당 기사단의 상부 조직, 그리고 프리메이슨 을 만들게 한 상부 조직. 그 외에 장미 십자회를 만들게 한 궁극 의 조직. 나아가 시온주의와도 통하는 상부의 조직. 그것이 궁금 하지 않소? 아니, 궁극적으로 간다면 조직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 소. 모두 한 사람으로 집결되니까 말이오.”

백호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 조직들 중에는 수백 년 이상 전에 만들어진 것도 있는데, 한 사람에게 집결된다고요?”

그러나 해밀튼은 백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궁극적으로 올라가면 이 모든 조직은 하나로 통해 있고 또 한 점, 한 사람으로 모이게 되어 있소. 그것이 누군지 아시오?” 

그게 누군지 알 리 없었다. 그러자 해밀튼이 말했다.

“방황하는 유대인에 대해 들어 보셨소?”

현암이 어깨를 움찔하면서 되물었다.

“아하스 페르츠 말입니까?”

해밀튼은 한숨을 내쉬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는 수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지요. 아하스 페르츠, 그것도 그중 하나이지. 어쨌거나 아시는구려. 그가 이 모든 조직을 눈에 보이지 않게 조종하고 있소. 내가 상대하려는 것은 바로 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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