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13화 – 방황하는 유대인 3 : 저주받은 유대인
저주받은 유대인
“아하스 페르츠가 도대체 누굽니까?”
백호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뒤에서 조그 마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떨리고 있었다.
“아하스 페르츠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러 골고 다 언덕을 올라갈 때, 그를 조롱하고 채찍질한 자예요. 덕분에 그리스도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머물러 기다리라는 저주를 받았 다고 전해지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천 년 전의 사람이 아닙니까?”
“맞아요.
“어떻게 이천 년이나 사람이 살아 있을 수 있죠?”
백호가 다시 묻자 이번에는 해밀튼이 대답했다.
“그의 경우에는 당연히 가능하오. 이천 년이 아니라 앞으로 일 만년이 지나도 계속 살아 있을 거요. 말세가 와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게 말이 됩니까?”
백호가 얼떨떨한 듯 말하면서 현암을 쳐다보자 현암은 미간을 조금 찡그려 보였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백호 씨. 나는 전에 팔백 년 동안 살아온 자와 겨루어 본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는 몸도 지닌 채였습니다.”
현암의 말에 이어 승희가 나섰다.
“좋아요. 그렇다고 해 두죠. 그런데 그가 있다고 해서 왜 우리 일이 위협받는다는 거죠? 고작해야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고, 게 다가 혼자일 텐데?”
“이천 년이라는 세월의 경험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더구 나 그는 절대로 소멸되거나 죽지 않소. 말세가 오기 전까지는 말 이오.”
“그러면 그는 상처도 입지 않고 다치지도 않는다는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소.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그는 죽지 않을 것 이오.”
“큰 상처를 입으면 죽잖아요.”
“그런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소. 부상을 입을 수 있을지 몰라 도 절대 목숨을 잃는 상태로는 발전되지 않는단 거요.”
“가령 ……………. 음, 예를 들어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멈춰도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애당초 그의 주변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즉 목에 칼이 날아들어도 무슨 이 유에서건 그 앞에서 멈추어 서거나 아예 칼이 빗나가 버리게 되 는 식이지.”
“물리 법칙을 아예 거스른단 말이오?”
“그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런 상황이 되지 않게 변한다는 거요. 칼이 멈추어 선다는 건 내가 예를 조금 잘못 든 거요. 그건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니 어지간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그보다는 계속 빗나간다든가, 칼을 던지려는 대상에 사고가 생긴다거나, 뭔가가 무너져서 칼을 막는다거나, 뭐 그런 상황으 로 변한다는 거지.”
“그런 상황요소를 다 제거한다면?”
“그때는 물리 법칙이라도 위배될 거요. 가급적 쉬운 쪽으로 상 황이 변하겠지만 그런 요소를 찾아 노리려 하면 나중에는 중력 이나 물질 구성의 원리까지도 깨질지 모르지. 더 위험한 결과가 올 거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시오?”
“그렇다면 이건 확률이나 운명에 의거한 주술이겠군요. 원, 세 상에 그런 것이 있다니. 그것에 맞설 특수한 주술을 찾아 사용한다면…….”
“어떤 주술도 먹히지 않을 거요.”
“왜 그렇죠?”
“그리스도가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너는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세상의 어떤 힘 이나 주술도 그리스도의 권능에 비길 수는 없을 거요.”
“원참!”
승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현암은 침착하게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그 일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어요. 더군다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가한 조롱 때문에 그렇게 엄청난 저주를 내렸다고는 보기 어려 운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영혼이 이천 년 동안이나 계속 살아 있는 사람처럼 존재할 수 있단 말이오?”
“흠…….”
현암은 좀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해밀튼 이 말을 이었다.
“아하스 페르츠의 위험성은 단지 그가 불멸의 존재라는 데에 있는 것만이 아니오. 그는 물론 그리스도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아무 힘도 없는 보통의 사람에 불과했소.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사태의 심각 성을 깨닫게 되었소. 가족과 자식이 늙어 가고 죽어 가는데도 그 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거요.”
“그건 오히려 축복이 아닐까요? 늙거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사 는데…………….”
백호가 중얼거리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것이 축복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해밀튼이 백호에게 차 근차근 설명을 했다.
“처음에는 그도 기뻐했을 거요. 그러나 사정이 조금 달라졌소. 그는 점차 사람들에게,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을 거요. 그를 알던 사람들 모두가 그를 악마라고 욕하게 되었겠지.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리고 그에게 찾아온 것은 권태요. 지긋지긋한 권태. 한 천 년 살다 보면 올 것 같지 않소? 아니오. 불과 수십 년도 지나지 않아 그 권태가 찾아왔소. 더구나 그는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 었던 거요. 모든 사람들이 늙고 죽어 가는 상황에서 늙지도 않 고, 죽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분노와 질투를 자아냈소.
결국에는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는 린치 소동이 일어났지. 그 러나 그는 죽을 수 없었소. 알아듣겠소? 죽을 수가 없었단 말이 오. 다른 자들이 어떤 짓을 해도 그는 번번이 빠져나가게 되었 고, 그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해도 죽을 수가 없었소. 그쯤 되자 그도 사태를 깨닫게 되었소.”
“그래서요?
“그때는 이미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였소.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주술에 매달렸던 것 같소.”
“주술?”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는 주술 말이오. 당시만 해도 그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소. 유대 사람들 거의 다가 그러했겠지. 한 명의 주술사나 마법사 정도로 여겼을 거요. 그래서 그는 그 주술을 풀기 위해 사방을 전전했던 것 같소. 그때 그는 엄청난 비밀을 손에 넣게 되었다오.”
“그게 뭐죠?”
“신의 힘.”
“신의 힘?”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온 것이오. 흠…………… 설명하자면 기니까 이것을 보시오.”
해밀튼은 책장을 살피더니 커다란 책 한 권을 꺼내 책상에 놓고 갈무리되어 있던 페이지를 펼쳤다.
“그게 뭡니까?”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에 대한 문헌이오.”
그 문헌을 본 백호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물었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이라고요?”
“그렇소. 일반적인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가 없거든.”
현암이 긴장된 낯빛으로 말을 건넸다.
토마스 복음서입니까?”
그러자 해밀튼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대견하다는 듯한 눈길로 현암을 보았다.
“잘 아시는구려.”
승희도 현암을 보고 싱긋 웃으며 한마디 했다.
“현암군, 대단한데?”
현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백호는 어리둥절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토마스 복음서요? 난 들어 보지 못했는데요?”
그 말에 해밀튼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스도는 모두 열두 제자를 두었소. 그중 성서에 언급된 복 음서는 여섯 개뿐이오. 그렇다면 나머지 여섯 명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을까요? 물론 가룟 유다는 예수보다 한 발 앞서 목매 달아 죽었으니 복음서를 남길 수 없었겠지만 다른 다섯 명은 수 십 년간이나 각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했소. 그런 그들 도 나름대로의 복음서를 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오. 그리고 이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실증적이고 이성적인 판 단을 하려 했던 토마스가 남긴 복음서란 말이오. 토마스는 그리 스도 부활 후에도 상처에 손을 대 보고서야 믿으려 했던 일종의 유물론자였소.”
“그렇습니까?”
*토마스 복음서는 비록 성경에 정식으로 수용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인기가 있었던 일종의 비밀 전승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 스가 작성했다는 복음서인데 특히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언급되어 있어 중세 이후에 인기가 높았다. 혹자는 이 복음서가 정식은 아니지만 토마스가 작성한 언 문을 약간 가감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하고, 문체가 치졸하고 조잡하여 중세에 이름없는 사람에 의해 모작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중세보다는 훨씬 오래 전의경전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복음서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소. 이 부분이오.”
해밀튼은 『토마스 복음서를 읽어 주기 시작했다.
(전략)
……
예수가 마을을 거닐고 있는데, 한 아이가 급히 달려오다가 예수의 어깨에 심하게 부딪혔다. 이에 화가 난 예수가
말했다.
“너는 더 이상 네 길을 가지 못한다.”
그러자 그 아이는 즉시 땅에 넘어져 죽었다. 그 광경을 본 몇몇 사람이 물었다.
“말을 하기만 하면 그대로 실현되니, 이 아이는 어디서 태어난 아이냐?”
죽은 아이의 부모가 요셉에게 가서 따졌다.
“당신이 이런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이 마을에서 우리와 같이 살아갈 수 없을 것이오. 이 아이가 우리 아이들을 죽이니 말이오. 마을에서 나가든지, 이 아이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하는 법을 가르치시오.”
요셉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어린 예수를 끌고 가 다그쳤다.
“왜 이런 짓을 했느냐? 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그래서 우 리를 미워하고 박해하지 않느냐?”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그 말이 당신의 말이 아님을 난 알아요. 그러나 당신을 생각해 입을 다물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벌을 받을 것입니다.”
순간 예수를 비난했던 사람들 모두가 소경이 되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공포에 질리고 어리둥절해져 예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아이가 말만 하면 무엇이든지 그 대로 일어나고 기적이 된다.”
예수가 한 행동을 알고 화가 난 요셉은 예수의 귀를 심하게 당 겼다. 그러자 예수는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군요. 당신은 매우 어리석게 행동했어요. 내가 당신 아들인 것은 잘 알지만, 나를 건드리지 말 아요.”
그때 자케우스라는 선생이 그곳에 있다가 예수가 자기 아버지 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어린아이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자케 우스는 매우 놀랐다. 며칠 후 자케우스는 요셉에게 가서 말했다. “당신은 매우 영리한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 아이는 현명한 정 신을 가지고 있더군요. 글을 훤히 알도록 가르치고, 모든 원로들 에게 인사드리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원로들을 존경하고 동료들 을 사랑하도록 가르쳐 보겠습니다.”
그리하여 자케우스는 예수를 데리고 갔다. 자케우스는 우선 알 파에서 오메가까지 모든 글자들을 쉽게 가르치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예수는 선생인 자케우스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알파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어 떻게 다른 사람에게 베타를 가르칩니까? 당신은 위선자예요! 만 일 당신이 알고 있다면 우선 알파부터 제대로 가르치세요. 그래 야 우리가 베타에 대해서도 당신 말을 들을 거예요.”
예수가 선생인 자케우스에게 첫 번째 글자인 알파에 관해 질문 을 시작하자 자케우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이인 예수가 자 케우스에게 하는 말을 많은 사람들이 들었다.
“자, 선생님 첫 번째 요소의 순서를 잘 들어 보세요. 이것이 어 떻게 선을 그리고, 가운뎃점이 두 선을 가운데를 지나는지 잘 보 세요. 두 선이 만나서 위로 오르고, 정점에 가서 세 번 같은 것이 되고……………. 이것이 바로 알파입니다.”
아이인 예수가 첫 번째 글자의 비유를 그토록 많이 말해 주는 것을 듣고 난 자케우스 선생은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나는 비참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이 아이 를 다루어 보려다가 수치만 뒤집어썼습니다. 형제 요셉이여, 제발 이 아이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난 그의 매서운 눈초리를 감당하 지 못하겠습니다. 이 아이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이 아이는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며, 또한 불 같은 원소들조 차 길들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천지창조 이전에 태어난 아이인 듯합니다. 어떤 여인이 이 아이를 배고, 어떤 여인이 이 아이를 길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친구들이여, 이게 무슨 꼴입니까? 이 아이 가 나를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내가 바보짓을 했군요. 제 자를 두려다가 스승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친구들이여, 내 수치 를 생각해 보시오. 나도 늙은이인데도 아이에게 지고 말았소. 지 금 이 순간도 아이의 시선을 받을 엄두를 낼 수 없구려. 이 이야기 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이 아이가 말한 첫 번째 요소의 선들에 대해 내가 무엇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아, 친구들 이여, 나는 모릅니다. 첫 글자의 시작과 끝조차도 모릅니다. 형제 요셉이여, 제발 이 아이를 당신 집으로 데려가 주시오. 이 아이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신이거나, 천사이거나・・・・・・ 아니, 뭐라고 불 러야 좋을지조차 나는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자케우스를 위로하고 있을 때 예수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 이제 당신들이 보고 들은 것에 성과를 맺도록 하세요. 눈먼 마음이 눈을 뜨게 하세요. 나는 당신들에게 저주를 내리고, 또 당 신들을 천상으로 부르기 위해 위에서부터 내려왔어요. 바로 당신 들 때문에 나를 보냈던 그분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에요.”
예수의 말이 끝나자 아이의 저주로 쓰러졌던 모든 사람들이 즉 시 구원받았다.
“그 후로는……”
해밀튼은 글귀를 다 읽고 난 후 말을 끊다가 이내 덧붙였다.
“예수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를 화나게 하려 하지 않았으며, 예수도 사람들에게 저주보다는 축복을 내리게 되었 소. 죽은 자를 살려 주고, 다친 자를 낫게 해 주며, 실패한 것들을 온전히 돌려주는 데 기적을 사용했소. 그러나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은 예수가 문맹으로 남는 것을 원치 않아서 다른 선생을 붙 여 주려고 했지.”
그러면서 해밀튼은 또 다른 구절을 읽어 주었다.
요셉이 예수를 다른 선생에게 데리고 가자 예수의 선생은 요셉에게 말했다.
“이 아이에게 먼저 그리스어를 그다음에 히브리어를 가르치겠소.”
그 선생은 예수가 학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순서를 바 꾼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이 알파벳을 써 놓고 여러 시간 동안 설 명했지만,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예수가 선생 에게 말했다.
“당신이 정말 선생이고, 글자에 대해 안다면 알파의 힘에 대해 나에게 말해 보세요. 그러면 내가 베타의 힘을 말해 줄게요.”
그러자 선생은 화가 치밀어 예수의 머리를 때렸다. 예수 역시 화가 나 선생을 저주했고, 선생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예수는 혼자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 비탄에 잠긴 요셉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를 화나게 한 사람은 누구든 죽으니까, 이 아이를 아예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시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요셉의 절친한 친구인 다른 선생이 요셉 의 집을 찾아왔다. 선생이 요셉에게 말했다.
“이 아이를 우리 학교에 데려와 보는 것이 어떻겠소? 아첨이라도 해서 글을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러자 요셉은 절망적으로 대답했다.
“형제여 감히 해 보겠다니 말리지는 않겠소. 이 아이를 데려가보시오.”
선생이 두려움과 걱정으로 예수를 학교로 데리고 가자 예수는 기꺼이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당당하게 학교로 간 예수는 책상 에 놓인 책을 집어 들고, 그 안의 글을 읽지도 않은 채 성령의 힘 으로 모두에게 말을 하고, 율법을 가르쳤다.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 그 아름다운 가르침과 웅변에 놀라고, 어린아이가 그토록 깊은 가르 침을 주는 데 놀랐다.
요셉이 그 소식을 들었다. 혹시나 또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나 하여 겁에 질려 학교로 달려가자 선생이 말했다.
“형제여, 내가 이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이려 했지만, 이 아이 안에는 이미 넘칠 만큼 풍부한 은총과 지혜가 가득 차 있소. 배울 것이 없소. 그러니 당신 집으로 데려가 주시오.”
아이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올바르게 말하고 올바르게 증언했으니, 당신 덕분에 이미 잘못하여 다쳤던 자까지도 치유될 것입니다.”
그러자 전에 쓰러졌던 선생까지 즉시 치유되었다.
해밀튼이 읽기를 멈추자 승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암에게 말을 건넸다.
“참 놀라운데? 신기한 이야기야. 난 들어 본 적이 없었어.”
현암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토마스 복음서는 오래전부터 꽤 인기가 있었던 거야. 아는 사람은 다 알아.”
“잘난 척은! 하여튼 어릴 적의 예수라… 난 오히려 신선한 걸? 정말 하느님의 아들 같아. 성서에 나오는 고리타분한 이야기 보다도 오히려 더.”
현암이 대답하지 않자 승희는 다시 조잘거렸다.
“처음에는 인간 세상을 잘 이해하지 못해 마구 힘을 쓰다가, 점차 동화되는 과정이 잘 나온 것 같아. 안 그래?”
“글쎄………….
현암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데 해밀튼이 나섰다.
“어떻소?”
감이 잘 잡히지 않는지 백호가 해밀튼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하스 페르츠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겁니 까?”
“아까의 이야기 중 그리스도가 율법학자들에게 알파에 대해 강론한 바가 나오지 않았소? 여러 번에 걸쳐서 나왔지만,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이야기요. 예수는 대부분 율법에 대해서 사람들에 게 강론했지만, 두 번째에는 알파의 ‘힘’에 대해 말했소.”
“그렇습니다만…. 아……. 그렇다면 …………….”
“그렇소. 그 내용은 나도 알 수는 없지만 대단히 심오한 의미 가 담겨 있는 것이오.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직접 말씀하 신 것이니 신의 힘을 담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겠지. 물론 당시의 학자들이 그것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거기서 일부분이 라도 대단한 주술적 내용을 만들어 낸 사람도 있었을 거요.
아하스 페르츠는 그리스도의 강론을 듣고 초인적인 힘을 얻은 자를 찾아갔다고 하오. 그자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렇게 올바른 사람은 아니었던가 보오. 그리스도의 말에서 주술적인 힘과 관련된 것만 해석해 초인적인 힘을 얻은 자였던 것 같소.
그리고 그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자가 시몬이었소. 그노시스파의 대주술사 시몬.”
“시몬이라뇨?”
현암은 다소 상기된 얼굴로 재차 물었다.
* 시몬 마구스(Simon Magus), 시몬은 영화 <쿼바디스>로 유명한 시대의 로마를 배경으로 활약했다. 물론 영화에는 시몬에 대해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내용 또한 일종의 비경전으로 전해진다. 로마에 들어가 포교 활동을 하려는 예수의 큰 제자 베드로가 로마 시민들을 유혹한 그노시스파의 술사 시몬을 상대하여 여러 차례 기적을 발휘하며 대결하다가 마침내 승리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의 큰 제자 임에도 매우 힘겹게 시몬을 이기고 승리를 거두고도 로마 시민들을 완전히 교화 하지 못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당한다. 여기서 시몬은 잠시 동안이지 만죽은 사람을 살려서 조종하는 기이한 술법과 네로 황제 앞에서 공중을 날아가 는 술법 등을 부리는데, 베드로는 공중을 날 수 없어 당해 내지 못하다가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떨어뜨리는 데에만 성공한다. 역사 기록에서의 시몬은 그노시스 파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도교도가 된 후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성령을 전달하는 능력을 사려고 했다. 여기에서 성직 매매를 뜻하는 ‘Simony’란 단어가 유래되기도 했다.
그는 주로 팔레스타인 북부 사람들에게 대단한 초능력을 가진 것으로 숭배되었 으며, 성서에는 베드로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책망받고 회개 하여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앞에 언급한 전설처럼 초능력을 가 지고 신적인 대접을 받았다가 몰락했다는 설 등도 있다.
그 외에도 시몬은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방문했고 로마인들에게 신처럼 추앙받 았다는 전설도 있으며 거짓 메시아 노릇을 했다는 전설도 공존한다. 한마디로 복잡하고 행적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신비한 힘을 소유한 것만은 분명한 인물이 었는데, 그는 스토아 철학과 그노시스파 교리를 절충하여 ‘대선언(The Great Pronouncement)’이라는 유사 삼위일체적인 그노시즘의 교리를 만들어 냈다. 이 시몬 마구스들이 모두 동일 인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2세기에는 시몬파 가 결성되어 예호바가 아닌 시몬을 제1의 하느님으로 보는 운동마저도 생기게 되 었으며, 그를 그리스의 신 제우스의 화신으로 보기까지 한 것으로 보아 시몬이 당 시에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막강한 사람이었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몬이 창설한 그노시스파는 당연히 이단으로 낙인찍혀서 ‘교부 철학의 발전은 그노시스파의 교리를 부정하는 데에서 생겼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혹시………… 베드로와 겨룬 시몬입니까?”
해밀튼이 감탄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대단하군. 맞소. 바로, 로마에서 베드로와 겨룬 시몬이었소.”
“그게 누구야? 현암 군이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승희가 놀란 얼굴로 묻자 현암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래전 신부님에게 들은 이야기야. 시몬 이야기는 비경전 사도행전 중의 「베드로 행전」에 나오지. 왜 ‘쿼바디스 도미네 라는 말이 나오는 이야기 말야. 좌우간 신부님은, 그 경전이 진 짜라고 본다면 시몬은 가장 강력하고도 사악한 주술사 중 한 명 일 거라고 하셨어.”
승희와 현암의 한국어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해밀튼이 계속 이야기를 했다.
* 2세기경 그리스, 로마 등지에서 두드러졌던 철학적, 종교적 종파 그리스어 ‘그 노스티코스’ 혹은 ‘그노시스(비밀스러운 지식을 소유한 사람)’라는 이름에서 유 래했다. 이 학파는 교육이나 경험적인 관찰이 아닌 신적 계시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스러운 지식의 구속 능력을 강조한 종파이며, 이에 따라 지극히 주관적이고 신비적이며 비밀적인 성격을 띠었다.
“로마에 포교하러 간 베드로는 그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시몬 의 방해로 말미암아 위기에 빠지게 되었소. 물론 결국에는 베드 로가 승리했고, 「베드로 행전」에는 시몬이 베드로에게 사사건건 패배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시몬은 사람들 앞에서 죽은 자를 살 려 냈으며, 하늘을 나는 등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기적을 보였소.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수제자였으며 성령의 기운이 항상 그와 함께했는데도 시몬을 상대하며 몹시 힘들어했고, ‘급히 그리스 도의 힘을 빌리는 대목이 많이 나오지요. 그리스도를 직접 모셨 던 베드로가 그럴 정도였으니, 이는 대단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이유가 있소. 시몬의 힘은 흑마술이 나 악마의 힘을 빌린 것뿐만이 아니라 신의 말, 즉 어릴 적의 그 리스도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오. 그는 그노시스파의 일원이었으며 그리스도의 말을 십중팔구 비뚤어지게 곡해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위 력을 지녔다는 소리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상대가 안 될 정도일까요?”
백호가 이의를 제기하듯 묻자 해밀튼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당신 친구들의 능력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대단하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하스 페르츠에게 결정타를 가할 수 없을 거요. 그는 대단한 자이며, 죽지 않는 자이기도 하오.”
“그러나.”
현암이 의문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왜 그자를 꼭 없애야만 한다는 겁니까? 정 상대가 안 된다면 피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밀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살아 있는 악마요! 나를 이런 꼴로 만든 것도 그자의 힘 이오! 그자는 이미 어둠에 침식당해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단 말이오! 더구나 그는 이제 보이지 않는 곳에 서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소! 그는 없어져야 하오! 그 렇지 않으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을 뒤집어 엎으려고 할 거란 말이오! 말세가 와야 자기가 죽으니, 앞당겨 말세를 오 게 만들려는 거요!”
해밀튼은 언성을 높였다가 다음 순간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으 려는 듯 보였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자는 막아야 하 오. 내가 성당 기사단에서 몇몇 동지들을 모아 이탈한 것도 그 때문이오. 이미 그자는 행동에 들어가 있으며, 나나 내 동지들의 힘으로는 그를 막을 수가 없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승희가 조금 망설이다가 해밀튼에게 물었다.
“말세를 앞당긴다니…………. 도대체 그는 왜 그러는 거죠?”
그 질문에 해밀튼은 말했다.
“정확히 기억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라비안나이트』에 보면 램프의 요정 이야기가 나오지 않소? 처음 오백 년 동안은 나를 풀어 주는 자에게 세상의 부를 모두 주려고 했다. 그다음 오백 년 동안은 나를 풀어 주는 자에게 세상의 권세를 모두 주려고 생 각했다. 그런데도 아무도 나를 풀어 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나 를 풀어 주는 놈을 그 자리에서 죽여, 이 답답함과 분노를 풀어 야겠다고 맹세했다.”
여기까지 말한 해밀튼은 조금 멍한 듯한 시선으로 말을 멈추 더니 먼 곳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하스 페르츠의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소. 맨 처음 그는 죽 지 않는 몸이 되었다는 것을 기뻐했소. 그러나 조금 지나 아는 사람들이 모두 죽어 가자 그 외로움에 지쳐 자신도 죽어 보려고 노력했소. 그러다가 한때는 그리스도에 귀의해 신앙심을 가짐 으로써 구원받으려고도 했고, 그다음에는 분노와 슬픔에 겨워서 신을 저주하고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려고 했소. 그러다가 마침 내…………… 지금에 와서는…………….”
거기까지 듣고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평안한 안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보기 위해 말세를 오게 하려는 건가요?”
그 말에 해밀튼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가 그처럼 소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 직접 그와 대적하려 하고 있소. 엄청난 복수심의 발로지. 말세를 앞당겨 그리스도를 재림하게 한 다음,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그가 진심으로 바라는 일이오.”
해밀튼의 말에 모두 충격을 받은 듯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것은 상상을 초월한 이야기였다. 조금 지 나서야 백호가 약간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 가능한 겁니까? 도대체 …………… 도대체 나는 믿을 수 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오게 하여, 또다시 그를 십자 가에 못 박는다고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악한 이야기지. 아까 말한 인간적인 슬픔이나 소박함은 그에게 거의 남아 있지 않소. 그는 괴물이오. 이제 그에게 인간의 존재란 그가 가장 미워하는 그리스도에 대 적하기 위한 인질에 지나지 않소. 세상의 안위나 인간의 운명 같 은 것은 그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거요. 당신들은 말세의 위 기가 다가오는 것을 예감하고 있고, 그것을 막으려 애쓰고 있지 않소? 때문에 당신들이 궁극적으로 마주칠 적은 바로 그 아하스 페르츠이고, 그를 없애지 않는 한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말이오.”
승희가 흥분한 듯 소리쳤다.
“솔직히 말해 나는 납득이 가지 않아요! 나는 그 유대인의 이 야기가 믿어지지 않는다구요. 예수가 정말로 신의 아들이고,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존재라면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볼 수도 없지 않나요? 그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했는데, 사적인 조 롱 때문에 그런 저주를 퍼부어 지금의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게 하다뇨. 예수가 신의 아들이었다면 이렇게 될 것도 알고 있었을 텐데! 도대체 이건 앞뒤가…………….”
“그건 나도 모르겠소. 뭔가 이유가 있었을 테지. 그러나 아하 스페르츠가 존재하고, 그가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엄 연한 사실이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성당 기사단에 서 이탈해 목숨을 위협받고 있겠소? 아시다시피, 나는 예전에 죽 은 영혼일 뿐이오. 그러나 나는 저세상으로 가지도 못하고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계속 이승에서 떠도는 존재가 되었으며, 이제 는 그와 맞서다가 이 영혼마저 없어질 위험에 처해 있소.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칩시다. 허나 그의 마음대로 되면 이 세상은 어찌 되겠소? 내 안위에 대한 것은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그는 꼭 막 아야만 하오.”
“아하스 페르츠는 정말 죽지 않나요?”
승희의 질문에 해밀튼이 웃으며 되받았다.
토마스 복음서나 그노시스파의 경전 중 예수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칼렙이라는 자의 이야기가 나오지. 그것처럼 되는 거요.”
“칼렙이 어쨌는데요?”
“예수가 아기이던 시절, 두 명의 아내를 둔 유대인 남자가 있 었소. 두 아내 중 한 사람은 착하고 한 사람은 사악했는데, 각각 아들 하나씩을 두고 있었지. 착한 여자의 이름은 마리아였고, 아 들은 칼렙이었소. 그런데 아직 예수가 아기일 때 두 아내의 두 아들이 모두 아주 중한 병에 걸렸소.
예수의 소문을 들은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에게 멋진 양탄자를 선물하면서 기저귀 한 폭만 달라고 했지. 그래서 칼렙은 그 기저 귀로 옷을 지어 입고 병이 나았지만, 사악한 아내의 아들은 병으 로 죽고 말았소. 이를 시기한 사악한 여자는 칼렙을 가마솥에 넣 고 불을 땠지만, 칼렙은 죽지 않았소. 무슨 이유에서인지 솥이 달궈지지 않았던 것이오.
그래도 이 여자는 사악한 마음을 버리지 않고 칼렙을 우물에 던져 버렸소. 그러나 칼렙은 물 위에 편안히 앉아 있는 채 발견 되었소. 결국 그 여자가 무슨 수를 써도 칼렙은 죽지 않았던 거 요. 그리스도의 힘 때문이지. 그리스도의 기저귀 한 폭이 지닌 힘이 이 정도였다면, 그가 친히 명한 권능은 얼마나 크겠소? 그 때문에 아하스 페르츠는 결코 죽일 수가 없는 거요.”
현암이 물었다.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언약궤를 찾고 있죠? 언약궤가 아하스 페르츠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여기까지 털어놓은 바에야 솔직히 말해 주리다. 언약궤는 아 하스 페르츠를 죽일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오. 왜, 전하는 말이 있지 않소. 언약궤에 손을 대는 자는 누구나 죽음을 당하리라 는…………? 물론 모세나 다윗은 죽지 않았지만, 아하스 페르츠는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니라고 믿소.”
그 말을 들은 모두는 눈이 휘둥그레져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러다가 바이올렛이 먼저 놀란 듯이 외쳤다.
“그래서 언약궤를……………?”
“그렇소. 아까 나는 내 신앙과 명예 때문에 언약궤를 찾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을 찾는 거요. 물론 아까 한 말도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돌연 승희가 소리치며 나섰다.
“말도 안 돼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그리스도가 직접 명하신 것이 아무리 언약궤라고 한들………….”
“언약궤는 예호바(야훼)께서 직접 내리신 물건이오. 그러니 그 리스도의 명령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라면 아하스 페르츠를 세상에서 없어지게 할 수 있다고 나는 믿소. 아니, 솔직히 말해 나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이 지금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 이란 말이오.”
여기까지 말한 해밀튼은 책상에서 벗어나 몹시도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현암은 입을 꾹 다물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언약궤가 성당 기사단 본부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까?”
“그렇소. 나도 최근에 알아낸 사실이지.”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도 그곳에 있습니까?”
“그렇소. 나는 성당 기사단을 이탈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나오려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소. 키건에게 발각되어 빈손으로 나 올 수밖에 없었지.”
“키건요?”
승희가 그 이름을 듣고 찔끔하면서 물었다. 전에 승희가 눈을 멀게 만든 성당 기사단의 기사가 키건이 아니었던가?
“그렇소, 키건 아가씨는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지요?”
“그는ᆞᆞᆞᆞᆞᆞ 눈을 잃은 것을 아직도 원망하고 있나요?”
해밀튼은 대답하지 않고 슬픈 표정으로 승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승희는 풀이 죽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 대답할 필요 없어요. 물론 그렇겠죠.”
승희의 말에 해밀튼은 걱정되는 듯 되받았다.
“아가씨는 그를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는 성당 기사단의 아홉 기사 가운데에서도 가장 집념이 강한 사람입니다.”
“아홉 기사요?”
“그렇소. 원래 성당 기사단은 아홉 명의 인원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아홉 명의 기사를 두고 있소.”
이내 승희가 겁먹은 듯이 물었다.
“그러면 성당 기사단 본부에는 아홉 기사가 다 있나요? 그런 자가 아홉이나 있다면 그건 정말…….”
“그렇지는 않소. 여섯뿐이오. 세 명은 여기 있으니까.”
그 말에 승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해밀튼이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중 한 명인 화이트 나이트이고, 아까 만났던 마하딥과 시켈이 각각 성당 기사단의 블루와 그린 나이트였소. 우리 셋은 아하스 페르츠의 음모를 알고 함께 성당 기사단에서 이탈했지. 그러니 성당 기사단 본부에는 블랙 나이트인 키건을 비롯한 여 섯 명의 기사만 있을 거요.”
“아휴, 그런 자들은 다시는 만나기 싫어요!”
“당신들 정도의 힘이면 그렇게 겁낼 것만은 없을 것 같소만.”
“물론 현암 군이 있으면 별문제야 없겠지만, 문제는 힘이 아니라..”
그러다가 승희는 샐쭉해져 말을 이었다.
“싫어요. 난 안 갈래요.”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현암이 입을 열었다.
“우린 가겠습니다. 그곳의 위치를 알려 주세요.”
선언하듯 내뱉는 현암을 보며 승희가 놀라 외쳤다.
“현암 군! 정말이야?”
“가야 해.”
승희는 아무래도 키건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는 듯, 어떻게든 피하려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거긴 키건이 있다잖아!”
“승희야, 네 마음은 알겠지만,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도 현암 군! 저 말을 믿어? 난 황당하기만 한데? 그리스 도는 하느님의 아들인데, 언약궤가 있다고는 해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뒤집어엎기는 좀………….”
승희가 말끝을 흐리자 현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신앙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어. 하 지만 만약 아하스 페르츠가 언약궤를 성당 기사단의 본부로 옮겼 다면 그가 뭔가 언약궤에 꺼리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해밀튼 씨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아무리 그래도……”
“솔직히 나는 점토판인지 뭔지 별로 찾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그것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어떻게 보면, 이것도 운명이라 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현암은 뭔가 말을 더 하려는 듯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승희는 체념해 버렸다.
“할 수 없지, 뭐. 현암 군이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해. 나야 뭐…………. 쫄래쫄래 뒤나 따라가야지.”
“너는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
현암의 말에 승희는 현암을 향해 눈을 째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안 가! 내가 안 가면 현암 군 혼자 어떻게 하려구! 하 여튼 이 둔탱이는…………….”
현암은 승희의 말을 못 들은 척 해밀튼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저는 가고 싶습니 다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누군가 한 분의 의견을 들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신부님 아니시오?”
“맞습니다. 다른 유물에 대한 것이라면 몰라도, 언약궤 같은 물건은 그분 당신의 신앙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 르니까요.”
“좋소. 좌우간 쾌히 응낙해 준다니 정말 다행이오.”
“아직 완전히 허락한 것은 아닙니다.”
“아까는 간다고 하지 않았소?”
“물론 가기는 갈 겁니다. 우리는 일단 점토판을 찾으려고 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언약궤 문제는 아직 단정 내릴 수 없습 니다.”
해밀튼은 조금 생각해 보다가 쾌히 대답했다.
“좋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는데 꺼릴 것이 뭐가 있겠소? 나는 당신들을 믿소. 사실 당신들이 언약궤를 찾지 않는다고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언약궤를 나에게 넘겨주지 않아도 좋소. 다만 중요한 것은 언약궤를 찾아, 아하스 페르츠를 만나게 되었을 때 사용해 보라는 충고만은 잊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소. 나로서는 아하스 페르츠만 어떻게 된다면, 그로 인해 세상이 평 온해지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것은 없으니까.”
“그냥 아하스 페르츠를 이길 수 있으면 그런 번거로운 일은 안 해도 되겠죠. 더구나 그건 전설대로라면 몹시 위험한 물건이잖 아요. 만지기만 하면 죽는다니, 원 참. 그리고 전설대로가 아니 라면 필요도 없는 물건이고 말이에요.”
승희의 말에 해밀튼이 되받았다.
“나는 믿소. 아하스 페르츠는 유대인이었소. 유대인들 중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많지만, 야 훼를 믿지 않는 자는 없소. 그리고 아하스 페르츠도 예수를 만나 기 전부터 언약궤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을 거요. 만약…………… 만약 언약궤가 타보트가…………… 힘이 없다고 해도 그것이 도움이 될 수도…….”
해밀튼은 말꼬리를 흐렸지만 현암은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말 을 듣고만 있었다. 승희는 현암에게 말을 걸려다가 그의 눈빛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그때 바이올렛이 은근히 물었다.
“그럼 우리는 인질로 있지 않아도 되나요?”
그러자 해밀튼이 껄껄 웃었다.
“허허, 그건 아까 일부러 해 본 소리였다고 하지 않았소? 물론 그럴 필요는 없소.”
현암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해밀튼은 잠시 조용히 있다가 중얼거렸다.
“정말 알고 싶소?”
“그렇습니다.”
“말해 줘도 모를 텐데.”
“무슨 목적이 있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대화하고 있는 상대의 이름조차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그런가요? 나는 지금으로부터 팔백 년 전에 살았던 한 평범 한 성당 기사단원이었소. 내 이름은 빌헬름이었소. 이미 써 본 지 오래된 이름이지만.”
그 말에 현암은 조금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빌헬름.”
해밀튼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지금은 계속 나를 해밀튼이라 불러 주었으면 좋겠소. 다들 나를 해밀튼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오.”
“알겠습니다.”
“자, 그러면 바로 떠나도록 합시다. 비행기가 있으니 곧 준비 될 거요.”
“예?”
해밀튼의 말에 현암과 승희 일행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시간이 없기 때문이오. 아, 당신들은 모르고 있었소? 그렇다 면 비행기 안에서 차차 이야기합시다. 에티오피아까지 가는 시 간이 꽤 걸릴 테니까.”
“하지만 아직 신부님의 의견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의 의견도 모두 들어야만.”
“그럼 지금 연락해 보시오.”
해밀튼은 현암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현암은 번호 가 남을까 봐 조심스럽게 사양하면서 백호의 위성 전화를 사용 했다. 그러나 그 시간에 박 신부는 이단 심판소에서 격전을 치르 고 있었으니 통화가 될 리 없었다. 할 수 없이 현암은 한국으로 전화를 했다. 한국에서도 연희와 준호, 아라 등이 모두 난리를 겪고 있어 역시 통화가 되지 않았다.
현암이 한숨을 쉬면서 전화를 끊자 해밀튼이 물었다.
“아무도 연락이 되지 않소?”
“그렇습니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만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오. 너무나 시간이 촉박하거든. 이 십여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현암은 의아해졌다. 현암은 예전에 블랙 엔젤에게서 남은 시 일이 사십 일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었다. 물론 진심으로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로 미루어 계산할 때 남은 시일은 대 략 이십오일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해밀튼은 어 떻게 날짜를 알고 있을까?
현암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자 해밀튼은 대답했다.
“날짜 계산을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지만, 나에게는 방법이 있소. 그렇지. 아예 보여 드리도록 하겠소. 나를 따라오 시오.”
그러면서 해밀튼은 벽에 걸린 액자를 들추고 그곳에 설치된 전자자물쇠에 자신의 지문을 댔다. 그러자 지하실 한쪽 벽이 열 리고 작은 문이 나왔다. 해밀튼은 앞장서서 문 안으로 들어가면 서 현암과 승희, 백호와 바이올렛에게 그리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곳은 창문도 없는 자그마한 지하실이었는데 사방의 벽은 장 식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듯 램프만 켜 져 있었다.
지하실로 들어서자 바이올렛은 사방의 벽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굉장한 수집품이군요! 메소포타미아, 인도, 남미, 이집트……………. 무척 오래된 유물들이 잔뜩 있네요!”
“그렇소. 아서 해밀튼이 남긴 거지. 성당 기사단이 수집한 것 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면서 해밀튼은 벽 쪽에 놓여 있는 한 개의 검은 돌덩어리를 가리켰다.
“저것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거요.”
그 돌은 석판이 아닌 일종의 바윗덩어리 같은 투박한 모양이 었는데, 겉에는 이집트 상형 문자인 히에로글리프가 빽빽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보통의 석회암 같은 돌이 아니라 무척 단단해 보이는 검은색 돌로, 그토록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 걸 보면 퍽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는 듯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문자 들은 상당 부분 마모되어 있었지만 식별 가능했다.
“이게 뭐죠?”
승희가 묻자 해밀튼이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적이 있었을 거요. 동방에서 어느 여자가 한 예언을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말할 적에.”
“아!”
승희는 그제야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이게 바로 토트의 예언?”
*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일컫는 말, 신성한 문자라는 의미이다.
“그렇소. 토트의 예언석이오.”
현암이 돌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내용은 무엇이죠?”
“흠. 원한다면 탁본을 떠 가도 좋소. 지난번에 대략적인 내용 은 말한 것으로 아는데……………. 다시 한번 말하겠소. 우선 말세의 위기가 닥쳐올 것과 그 말세를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 쓰여 있소. 그 방법에 대해 구태여 늘어놓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현대를 지 칭한다는 것만은 분명하오.
그다음에는 이렇게 적혀 있소. ‘말세의 때가 닥쳐오니 인간을 지켜 주는 힘이 사라진다. 심연의 눈을 가진 자가 사라져 가니 신의 분노 앞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으며, 구원 을 방해하는 거대한 힘이 나타난다. 동방의 눈만이 그것을 제대 로 알아볼 수 있으며, 심연의 눈이 더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피로 이어진 것만이 진실로 이어진다’라 고……..”
해밀튼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승희가 물었다.
“그건 지난번에 들었어요. 좀 더 자세히 알려 주실 수는 없나요?”
“한 가지 더 있다면, 심연의 눈을 없애려는 자가 나올 것이니 그것을 조심하라는 내용도 있소. 중요한 내용은 이게 전부라고 할 수 있소. 다시 설명하자면, 심연의 눈이란 라미드 우프닉스를 지칭하오. 그리고 내가 이 내용을 알게 된 이후로 성당 기사단에 서 주력한 일은 라미드 우프닉스를 눈에 띄지 않게 보호하는 것 이었소. 물론 아하스 페르츠도 그 사실을 알았겠지만, 지금까지 는 그것을 용납했소.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대적하기에는 아직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봤기 때문인 것 같소. 그러나 이제는 아하스 페르츠가 성당 기사단과 프리메이슨 등의 내부를 완전히 장악했으니 우리가 수백 년 동안 찾아내 보호해 온 라미드우프 닉스도 위험한 상태요. 그렇기 때문에.”
해밀튼이 말하는 사이 백호가 살짝 승희에게 물었다.
“그런데 라미드우프닉스란 건 뭔가요?”
“그건…….”
승희는 대답하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등골이 짜릿했다. 라미드우프닉스의 이야기가 나오다 보면 반드시 연희의 이야기 가 나오게 될 것이 아닌가.
물론 백호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에 하나 백호가 연희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가 연희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 버리 면 연희는 죽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백호는 블랙 엔젤의 손아귀 에 들어 있는 존재이기도 하고 말이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바이올렛도 있었다. 바이올렛은 라미드 우프닉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알지 몰라도, 연희가 라미드 우 프닉스라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말 많은 수다쟁이 할망구가 그걸 안다면 연희 언니는 죽은 목숨이야!’
승희는 식은땀을 흘리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언뜻 보니 현암이 승희에게 암암리에 눈짓을 하고 있었다. 승희는 얼른 대 강둘러댔다.
“아. 그건 희귀한 동물이에요. 동물.”
“동물이라구요?”
“맞아요. 음…………. 그러니까 신이 내린 동물, 성스러운 눈을 지닌 동물………….. 그러니까 음……………. 음냐, 백호 씨 잠깐 저리 좀 가 실래요? 설명해 드릴게요.”
“예? 아니, 아직 해밀튼 씨의 이야기가…………….”
“현암 군이 알아들으면 그만이잖아요. 그러니 어서.”
곧이어 승희는 영어로 바이올렛에게 말하며 그녀의 옷자락도 잡아끌었다.
“그리고 미스 바이올렛도요.”
“음? 아니, 나는 라미드 우프닉스에 대해 알고 있어요. 나는 해밀튼 씨의 이야기에 아직 관심이 …………..”
그러나 승희는 영문을 몰라 하는 백호와 바이올렛을 거의 끌 다시피 하여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백호는 멍한 얼굴로 그냥 선 선히 나갔지만, 바이올렛은 왜 그러냐고 자꾸 물어서 승희의 얼 굴은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
해밀튼은 승희의 행동이 기이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고 있다가 현암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 거요? 다들 당신의 동료가 아니오?”
그렇게 질문을 받자 현암도 난처해졌다. 그래서 얼굴을 조금 붉히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사정이 있습니다.”
“동료를 믿지 못한다는 거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도 라미드 우프닉스와 연관이 있습니 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죠. 그래서 가급적 많은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다.”
그 말에 해밀튼은 이해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군요. 나도 라미드 우프닉스를 두어 사람 보호하고 있어 서 아오. 그것이 얼마나 신경 쓰이고 힘든 일인가를……………. 뭐, 어 쨌든 계속하겠소. 일단 아하스 페르츠는 말세를 앞당기기 위해 가장 빠른 방법으로 라미드 우프닉스들을 없애 버리는 것을 택 한듯합니다.”
“저런……!”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렇다면 연희도 직접적인 목표에 들어간 셈이 아닌가?
“라미드 우프닉스는 언제인지 잘 알수 없는 고대에 대주술사들이 펼친 엄청난 주술에 의해 나타난 존재들이오. 그들은 물론 보통 사람과 똑같이 태어나고 죽지만, 근본적으로 악을 멀리하 고 살도록 되어 있소. 아니면 선천적으로 악과 먼 사람들이 라미 드우프닉스의 소명을 받게 되는지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소 만, 좌우간 라미드 우프닉스는 일정한 숫자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으며, 그 숫자는 정확하게는 모르나 서른여섯 명인 것으로 추 정되오.
내 팔백 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라미드 우프닉스는 아기들로 구성됩니다. 아기들은 죄악과 연관이 없지 않소? 그래 서 장성할 만큼 성장하는 라미드 우프닉스는 그렇게 많은 숫자 가 아니오. 라미드 우프닉스는 자신이 라미드 우프닉스란 것을 알게 되면 즉각 명을 다하게 되며, 새로운 라미드 우프닉스가 태 어나게 되오. 물론 자연적으로 수명을 다해도 다시 새로운 라미 드우프닉스가 선택되지요.”
“그런데 라미드 우프닉스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심연의 눈으로 구별하는 거요. 라미드 우프닉스는 죄를 저지 르지 않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오. 그 때문 에 그들은 심연의 눈이라는 특수한 기능을 갖는 거요. 즉 의식하 지 않고도 거짓이나 죄악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짐으로써 자연스럽게 죄악과 먼 생활을 하게 되는 거지.
반면 이것이 라미드 우프닉스를 보통 사람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표식이 되기도 하오. 내 생각에는, 라미드 우프닉스의 주 술은 그 심연의 눈에 근간이 있는 것 같소. 즉 그것은 일종의 영 력체 같은 것으로, 그것이 깃들인 인간은 심연의 눈을 갖게 되어 자연스럽게 죄악과 먼 생활을 하게 되며, 그 사람이 죽거나 자신 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영력체가 떠나서 다른 존재 를 찾는 식으로 수천 년을 내려온 것으로 보이오.”
“그런데 나는 좀 회의가 듭니다. 나는 라미드 우프닉스인 것이 확실한 사람 하나를 잘 압니다. 물론 그 사람은 선량하고 마음씨 가 고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라미드 우프닉스 말고도 그와 비슷할 정도로 착하고 죄악과 거리가 먼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만약 라미드 우프닉스가 신의 분노 앞에서 인간을 정당화하는 존재라면, 굳이 그들 말고도 얼마든지 선량 한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여겨집니다만.”
“물론 그렇소. 허나 과거의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상이 어디까 지 갈지 잘 몰랐기 때문에 일종의 보험과 같은 역할로 라미드 우 프닉스의 존재를 세웠던 것 같소. 아무리 인간이 타락하고 죄악 의 층을 쌓아도 최소한 신의 분노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사람만 은 남겨 둔다고 말이오.”
“그렇다면 내가 보기엔 아직까지 인간의 타락상이 그 정도에 달한 것 같지는 않으니, 아하스 페르츠가 라미드 우프닉스를 없 앤다고 신의 분노가 당장 떨어지지는 않을 듯합니다만, 어떻습니까?”
“물론 당신 말에도 일리가 있소. 아하스 페르츠 역시 그 정도 쯤은 모르지 않을 테고.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소. 자, 원래 인간이 선량하게 살든 살지 않든 그것은 스스로의 선택인 거요. 그러나 고대의 주술사들은 라미드 우프닉스라고 하는, 어 떻게 보면 어느 정도 타인의 의지로 조종된다고 할 수 있는 사람 들을 만들어 냈소. 물론 그 의도는 나쁘지 않고, 그 주술이 당사 자들에게도 일상생활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소. 착한 사람 으로 사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오. 그 렇지 않소?”
“자연스럽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더구나 한 가지, 고대의 주술사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중 요한 오류가 있소. 라미드 우프닉스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알 게 되면 죽음을 맞게 되어 있소.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소?”
“글쎄요. 아마도 그 자신들보다는 라미드 우프닉스의 주변 사 람들 때문이 아닐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라미드 우프닉스가 있어서 신의 분노 앞에 세상을 정당화해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그것 을 믿고 더 타락할지도 모르오. 마치 타락한 종교계에 존경받는 고상한 성직자가 존재함으로써, 역으로 그 교단 자체가 더더욱 타락하게 되는 식으로 말이오.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그러한 어두운 면도 있음은 변명할 수 없는 일이지.
아무튼 그 때문에 고대의 주술사들은 그런 주술을 썼던 것 같 소.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라미드 우프닉스는 자신의 행동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 존재를 알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하 게 되는 거요. 물론 고통 없는 평안한 죽음이고, 죄를 저지른 일 이 없으니 천국에서 안식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당장 이 세상에 서는 죽음을 맞는 거요. 과연 죽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소? 그렇지 않소?”
“그건 ・・・・・・ 그렇군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할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최후의 수 단일지 몰라도, 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소. 정상적으 로 잘못 없이 살아온 한 인간의 생을 타의로 마감하게 되는 부조 화한 행위이기 때문이오. 더구나 라미드 우프닉스는 신의 분노 앞에 인간을 정당화하기 위해 보증 수표 격이자 대표 격으로 내 세워진 사람들이오. 그것도 수천 년 간의 부조화를 쌓아 가면서, 그러니까 다른 말로 수천 년 동안 또 다른 신의 분노를 쌓아 가 면서 말이오.
따라서 신 앞에서 라미드 우프닉스와 같은 수단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의 분노, 즉 조화를 깨뜨리는 데 대한 일말의 응징을 받을 만한 일이며, 라미드 우프닉스의 주술이 같은 인간 에 의해 깨어진다는 것은 그러한 신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된다는 것이오. 나도 자세히 설명해 줄 만큼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라미드 우프닉스의 죽음이 그러한 의미를 갖 는 것만은 분명하오.”
해밀튼의 말이 장황해서 조금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결국에는 현암도 동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암은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말 했다.
“그런데 라미드 우프닉스가 죽음을 당하면, 다른 라미드 우프 닉스가 자동으로 태어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아하 스페르츠가 라미드 우프닉스를 찾아 죽이더라도 소용없지 않습 니까?”
“라미드 우프닉스가 주어진 수명을 다하거나 다른 인간에 의 해 죽음을 당한 경우에는 그렇소. 그러나 인간이 아닌, 좀 더 정 확하게 말해 생명이 없는 존재에 의해 죽음을 당하면 다른 라미 드우프닉스가 탄생하지 못하오. 오랜 기간 그들을 관찰해 보고 얻은 결론이오.”
“생명이 없는 존재라고요? 그렇다면 ………………”
“그렇소. 가령 라미드 우프닉스가 악령이나 악마에 의해 죽음 을 당한다면 그 주술은 무효가 되는 거요.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번 도 일어나지 않았고, 정상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고 봐야겠지.”
그 말을 듣고 현암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퇴마사들은 그동안 연희와 함께 다니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리고 인간이 아니라 악령과 싸운 적도 상당히 많았다. 그렇다면 그때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세상을 위기로 몰아넣었단 말인 가? 만약 연희가 악령에게 죽음을 당했다면 신의 분노가 그대로 쏟아져 내리지 않았을까?
‘원참. 정말 아슬아슬했구나.’
현암의 얼굴이 질리는 것을 보고 눈치챈 듯 해밀튼이 말했다.
“잘 아는 사람 중에 라미드 우프닉스가 있다고 했는데, 당신과 잘 알았다면 영적인 문제에 몇 번 휘말렸을 수도 있겠구려. 그러 나 너무 걱정 마시오. 만약 악령의 손을 빌려 라미드 우프닉스가 죽더라도, 그것을 사주한 자가 인간이라면 그 역시 별문제는 없 소. 그자를 죽이려고 의도하는 자가 생명을 가졌느냐 아니냐가 문제이니 말이오. 문제는 아하스 페르츠요. 그는 지금 살아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라미드 우프닉스를 해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거요.”
“만약 정체불명의 악령이나 악마가 라미드 우프닉스를 해친다 면요?”
“라미드우프닉스는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오. 더구나 그 들에게는 심연의 눈이 있지 않소? 그리고 그들은 모르겠지만 그 들 주변에는 그들을 수호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이 있게 마련일 거요. 나도 그런 일을 했고, 꼭 인간이 아니라도 다른 사람의 영 혼도 그런 일을 해 줄 수 있소. 세상의 멸망을 원치 않는다면 누구라도 그들만은 지키려고 할 것 아니겠소?”
라미드 우프닉스는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누구와 특 별한 원한을 맺을 일이 없을 것이며, 악령 등과 마주치는 일은 사실상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또 영적인 문제도 대부분은 정확한 인과율의 원리에 따라 지 배되는 것이라 영혼이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을 해치는 일도 흔 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라미드 우프닉스는 심연의 눈을 지니 고 있어 그런 해를 당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연희의 경우에도 그랬다. 퇴마사들은 그렇다치고 리만 하더라 도 죽은 후에까지 어떻게든 그녀를 지켜 주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왈라키아에서 드라큘라 백작도 그러했고,
‘그러고 보니 이해가 되는구나. 리는 옛날에 연희 씨와 똑같은 눈매를 가진 사람을 만났다고 했지. 그리고 드라큘라 공의 아내 도 그러했다고 했다. 그 모두가 라미드 우프닉스의 상징인 심연 의 눈을 가졌던 거야.’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현암은 방향을 돌렸다. 지난번 블랙 엔 젤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블랙 엔젤은 악마들은 인간 세 상의 멸망만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악마도 라미드 우프닉스만은 해치지 않 는다는 이야기가 되나? 그렇다면……
현암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해밀튼이 입을 열었다.
“다른 이야기가 길어졌소만 좌우간 이 토트의 예언석에는 이런 구절이 끝에 붙어 있소. 바닥에 씌어 있어 알아보기 어렵소 만…….”
그러면서 해밀튼은 그 무거운 예언석을 가볍게 뒤집어 현암에 게 바닥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도 히에로글리프가 새겨져 있었 는데, 물론 해독할 수는 없었지만 위의 문자와 같은 필체였다.
“이 부분에는 토트가 개인적으로 남긴 경고가 씌어 있소.”
“어떤 경고입니까?”
그러자 해밀튼은 천천히 예언석을 읽기 시작했다.
“읽어 드리지. 사실을 알게 되는 이여, 서둘러라. 그대가 사실 을 알게 되는 때면 이미 시간이 별로 없다. 운명을 거스를 수 있 는 것도, 운명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도 짧은 혼돈의 순간에서뿐 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을 헛되이 넘기지 말라. 동방에서 온 운명의 사자들이여, 달이 차고 다시 차기 전에, 모든 것은 결 정되리라……………..”
현암은 이상하게 눈을 빛내면서 히에로글리프를 읽는 해밀튼 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밀튼이 읽기를 마치고 현암 에게 눈을 돌리자 평정한 보통의 눈매로 돌아왔다.
“그걸 직접 읽으시는군요.”
“별것 아니오. 나처럼 시간이 남아도는 지경에 처하면 뭐든 익혀 버리게 된다오. 한 사백 년 전쯤에 어느 유럽인 수도사에게 배웠지. 아주 박식한 사람이어서.”
“그렇군요. 아무튼 달이 차고 다시 차기 전이라면………… 한달 정도겠군요.”
“그렇소. 태음력으로는 한 달이 조금 안 되지. 나는 한때 몹시 조바심을 냈소. 동방에서 온 운명의 사자. 나는 지난번에 승희라 는 아가씨를 만난 이후 그녀가 혹시 운명의 사자인 것은 아닐까 생각했소. 그래서 이 내용을 사경』의 내용과 교환하려고 해 보았는데. 그녀가 거절했지. 뭐,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이 잘된 일 이라고 믿소.
그때 우사경』의 내용을 내가 얻었더라면, 그 내용 또한 아하 스페르츠에게 넘어갔을 테니까. 그러나 이제 당신들이 이 내용 을 보게 된 이상, 시간은 한 달 미만…………. 그러니까 이십일 정 도 남았다고 보는 것이 좋소.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는 거요. 동 방에서 온 운명의 사자여.”
해밀튼이 간절한 눈빛으로 현암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보 자 현암은 뭐라 더 말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암은 지금 복잡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흠.”
“일단 시간이 없소. 아하스 페르츠가 내 계획을 알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요. 그가 일단 내 계획을 알게 된다면 언약궤는 더 깊숙이 감춰질 것이고, 라미드 우프닉스들도 본격적으로 위험해질 거요. 그가 행동하기 전에 처단하는 것만이 가장 빠르고도 확실 한길이오. 그러니 어서 갑시다. 에티오피아로.”
해밀튼은 사정하듯 현암에게 말했다. 현암은 묵묵히 그의 이 야기를 듣다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라도 동료들에게 계속 연락을 취해야 합니다. 만약 연락이 되면 그들도 즉각 에티오피아로 실 어다 주셔야 할 텐데요.”
“문제없소. 그 정도의 일은 할 수 있소.”
“그리고 동료들이 모두 반대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 건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도록 하시오. 그러나 그렇게는 되지 않으리라 믿소. 아니,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겠지. 그러면 일단 오늘은 이만합시다. 조 금 있다가 바로 공항으로 갑시다. 비행기를 준비시키겠소. 두세 시간이면 모든 준비가 될 거요.”
“하지만 여권과 비자는…………….”
“금방 할 수 있소. 그런 것은 내게 맡기시오.”
그러면서 해밀튼은 미소를 띠었지만 그 표정에는 걱정스러운 눈빛이 묻어 있었다. 현암의 얼굴에도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야릇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현암은 좀 더 생각하더니 해밀튼에게 말을 건넸다.
“잠시만밖에서 이야기 좀 나누겠습니다.”
“좋도록 하시오.”
“어떻게 할 작정이야?”
승희는 방을 나서는 현암을 붙잡고 물었다. 바이올렛과 백호는 어디로 떼어 놓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있다가 비행기 안에서라도 어떻게든 연락을 취해 신부님과 상의해 본 다음에 이야기해 줄게.”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말하면서 현암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누군가 가들을 것이 걱정되는 듯했다. 그것을 눈치챈 승희가 현암에게 말했다.
“염려 마. 해밀튼 씨는 믿을 만한 사람 같아. 우리 주변 가까 운 곳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도 독심술 같은 걸 할 줄 아는 것 같 지도 않아. 해밀튼 씨 본인만 빼고는 하지만 그도 그렇지는 않 을 거야. 그의 마음은…………… 물론 그가 딴 데 신경을 쓴 사이 잠깐 밖에 보지 못한 거지만, 모든 말은 구구절절이 진심에서 나온 것 같아.”
“너도 그 안에서 한 이야기를 다 들었니?”
“물론! 내가 누군데?”
멋쩍은 듯이 승희가 씩 웃어 보였다. 현암은 승희에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뭔가 고민하고 있는 표정이 어른거렸다.
“흠. 좌우간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성급한 결정 아냐? 지금 당장 출발하자니……. 신부님 의견을 먼저 들은 다음에 출발해도 좋 지 않을까?”
“안 돼. 당장 가야 할 이유가 있어.”
“그게 뭔데?”
현암은 승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우리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무슨 기계 장치라도 있다면?”
“그거야 모르지만…………. 설마………….”
비로소 현암은 승희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금 추측하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틀림없는 것 같아. 맞아. 그래……”
“무슨 소리야?”
“해밀튼 씨의 말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거야.”
“그게 뭔데?”
“그는 고대 이집트어인 히에로글리프를 줄줄 읽었어. 그리고 사백년 전쯤 그걸 배웠다고 했지?”
“그게 뭐? 어! 그러고 보니…………….”
고고학을 배운 바 있는 승희도 그 말을 듣자 뭔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현암이 말을 이었다.
“그래. 나는 유식하진 않지만 그건 알고 있어. 히에로글리프는 오래전에 잊힌 언어가 되었다가, 샹폴리옹이 최초로 해독했어. 오래되어야 이백 년 정도 전의 이야기일 거야. 그러나 사백 년 전이라면…………… 지구상의 누구도 이집트인들조차 히에로글리프 를 해독할 줄 모르던 때였어. 그러니 해밀튼 씨가 그때 그걸 배 운건 아닐 거야. 안 그래?”
“그러면?”
“그러니까 요즘 배웠을 리도 없다는 거야. 그렇다면 그렇다고 이야기했을 테니까.”
“해밀튼 씨가 착각한 것 아냐?”
“이백 년은 착각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야. 더군다나 그는 유럽 인 수도사에게 그걸 배웠다고 했어. 사백 년 전에 히에로글리프 를 읽을 줄 아는 유럽인 수도사가 존재할 리 없어.”
“흠.”
그러나 승희는 현암의 심각함이 이해되지 않는 듯한 표정이 었다.
“그렇다면 해밀튼 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우리를 속이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만은 아닐 거야. 나는 해밀튼 씨가 뭔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봐. 그래서 사실을 밝힐 수 없는 거지.”
“비약이 좀 심한 것 아냐?”
“아니, 절대로.”
현암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승희야, 너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
“그게 뭔데?”
“만약 신부님과 연락이 닿지 않으면 너는 당장 서울로 돌아가.”
“엥?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현암 군 혼자 가겠다는 소 리야?”
“아냐 그건 아니지만 신부님이 꼭 필요할 것 같아. 준후의 힘 도 필요할 것 같고. 그러니 네가 신부님과 준후를 꼭 찾아줘. 그 래서 에티오피아에서 만나자.”
“영어도 잘 못하면서 무슨……………!”
“나는 백호 씨와 동행하면 되니까 염려 말아. 어쨌거나 내 생 각이 맞다면 이번 일은 정말 힘겨운 여정이 될 거야. 그러려면 신부님하고 준후의 힘도 꼭 필요한데, 준후는 서울에 있고 연락 도 안 되잖아. 안 그래?”
“흠. 그렇지만……”
“그냥 속 편하게 전화나 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보다는 직접 찾아보는 게 더 빠를거야.”
“내가 안 가도 연희 언니나 준호한테라도 부탁하면 되잖아.” “준후가 어딘가 처박혀 버렸으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찾아?
사람 찾는 데는 네가 최고일 거 아냐?”
“어… 하지만…………….”
“난 진정으로 부탁하는 거야. 응, 어때?”
현암이 정색을 하고 말하자 승희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지 만승희는 현암이 왠지 모르게 자신을 떼어 놓으려 하는 것 같다 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투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느낌이 그랬다. 현암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런 표정의 현암에게는 지는 수밖 에 없다는 것을 승희는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신부님이랑 준후랑 연락 닿는 대로 곧바로 올 테니까. 연락 자주 해. 알았어?”
“그래.”
현암은 승희와 함께 해밀튼에게 돌아갔다.
승희는 해밀튼에게 동료들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자신은 같이 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해밀튼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속히 출발하자고 재촉했다. 너 무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별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현암은 바이올렛에게 성난큰곰과 연락을 취해 보 라고 당부한 다음 백호에게는 같이 갈 것을 부탁했다. 백호는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쾌히 응낙했다. 언어도 서툴고 여권 등등의 준비도 되지 않은 현암에게 백호와의 동행은 필 수적이었다. 사실 현암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지만.
대강 준비가 끝나고 출발할 때가 되자 해밀튼이 한 사람을 불 러와 현암에게 소개했다.
“우리와 같이 가주실 분이오. 도움이 될 겁니다.”
승희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앗 하며 소리를 냈다. 그 사 람도 승희를 보고는 야릇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전에 승희 와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번 키건과 대결했던 우사부였다.
“당신이 어떻게……?”
우사부는 싱긋 웃었다.
“우선 인사부터 합시다. 나는 우포우라고 합니다. 그냥 우라고 불러 주시오.”
우사부가 자기소개를 끝내자 해밀튼이 나섰다.
“그렇지. 지난번에 키건과 우 사부는 한 번 겨뤄 본 일이 있었 지. 그때 아가씨도 옆에 있었지요? 그때는 서로의 입장이 달랐지 만, 지금 나는 우사부와 손을 잡았소이다. 우 사부는 대단한 분 이시오. 통배권의 대가이고, 소림 무술에도 일가견이 있으시오. 이쪽은 한국에서 오신 이현암 씨. 지금껏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강한 분이오.”
우사부는 현암의 위아래를 한 번 쓱 훑어보더니 현암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우 사부의 시선은 현암의 관자놀이 부근 에 가 있었다. 순간 현암은 이자가 내 내공을 판단해 보려 하는 구나 생각하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현암은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까지 건장해 보이는 타입이 아니 었다. 그러면 상대가 당연히 내공이 있는가 살피려 할 텐데, 원 래 내공을 정순하게 익힌 사람은 관자놀이 부근의 태양혈이 미 미하게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현암은 아직 상단전이 막혀 있어 기혈의 유통이 자유 롭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세상에서는 비길 자가 없는 공력을 지 니고 있었지만, 단순히 현암의 얼굴 상태를 보고는 우사부가 전 혀 알 수 없을 터였다.
현암을 살핀 우 사부는 냉소를 짓더니 해밀튼에게 뭐라고 속 삭였다. 해밀튼은 고개를 저어 보였으나 우 사부는 계속 차갑게 웃으면서 역시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현암이 전혀 강하지 않으 며, 해밀튼이 속았다고 보는 모양이었다.
그 건방진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현암은 속으로 혼을 좀 내 줄까 싶었다.
‘아냐……………. 관두자. 공연히 힘자랑할 일 있나.’
그러나 현암 뒤에 서 있던 승희는 현암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현암의 등을 툭 치면서 소곤거렸다.
“혼좀내줘.”
마침 우 사부가 여전히 썩소를 지으면서 현암에게 악수를 청 했다. 처음에 현암은 손을 내밀지 않으려 했으나 우 사부가 비아 냥거리듯 말했다.
“악수를 하자는데 거절하시는 겁니까?”
할 수 없이 현암은 우 사부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러자 우 사 부가 서서히 공력을 가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 현암은 저 항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우 사부는 현암이 저항하지 않는데도 점점 공력을 가해, 그냥 두었다가는 뼈가 부러질 것 같 았다.
‘뭐 이런 자가 다 있나!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현암은 약간 공력을 가해 우 사부가 누르는 힘에 저항했다. 그 러자 우 사부는 더더욱 강한 공력을 가해 오는 것이었다. 이 정 도라면 우사부도 이십 년 이상의 공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그 정도 수련을 했으면서, 인간성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현암은 화가 났지만 그래도 꾹 참으면서 우 사부가 가하는 힘 에 대항할 정도의 공력만 쏟았다.
우사부의 공력은 꾸준히 증가하다가 마침내 한계에 달했는지 멈췄는데 다음 순간, 우 사부의 공력이 날카롭게 현암의 팔 속으 로 뚫고 들어오려는 것이 느껴졌다. 공력이 침투당하면 상당히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현암은 깜짝 놀라 공력을 모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지독한 놈이 있나? 다짜고짜로 이런 위험한 짓을……………!’
마침내 현암은 화가 나서 육성)의 공력을 모아 한꺼번에 우 사부의 공력과 부딪쳐 버렸다. 다음 순간, 우 사부의 몸은 서 있던 자세에서 허공을 날아 저만치 뒷벽에 쾅 소리를 내며 부딪 히고 말았다.
“어머머? 뭐 하시는 걸까요?”
승희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난 뒤 일부러 시치미를 떼며 조롱 하듯 말했다. 해밀튼은 공력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듯, 어리 둥절한 눈으로 현암과 우사부를 번갈아 보았다. 현암은 약간 침 울하기는 했지만 표정은 별로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넘어졌던 우 사부가 얼굴이 벌겋게 되어 급히 일어서서는 현 암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실례했소이다! 무례를 범한 것은 알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당 신의 힘을 알아볼 길이 없어서……………..”
현암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우 사부는 다시 서둘러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니 약한 사람과 동행 할수는 없어서….”
그러면서 우사부는 급히 해밀튼에게 말을 건넸다.
“염려 마십시오. 이분이 이 정도라면 걱정 없을 겁니다. 사부님과도 비슷…………… 아니, 어쩌면 더 나을 듯합니다.”
보아하니 우 사부는 아무래도 현암의 능력을 보고 싶어 현암 을 일부러 화나게 만든 것이지, 원래 성격이 거만해서 그런 것은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힘을 과시한다는 것 은 현암으로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었다.
현암이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요? 왜 넘어지셨습니까? 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보다 강한 공력에 의해 뒤로 날아갈 정도라면, 넘어져서 가 아니라 공력의 반탄력 때문에 잠시 동안 잘 움직이지 못하는 법이다. 그것은 참을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방을 나서는 우사부의 걸음걸이는 매우 자연스러웠고, 공력의 반탄력에 의 한 고통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자기 능력을 감추고 있나? 단지 내 능력을 보기 위 해서만이라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현암은 왠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다. 더욱이 우사부 와 함께 동행해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마음이 껄끄러웠다. 우사 부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드디어 출발하기 직전, 승희는 현암에게 싱긋 웃어 보이면서 뭔가를 손에 쥐어 주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세크메트의 눈이었다.
“이거………… 네가 가지고있었어?”
“아, 나머지 하나는 아직 연희 언니가 가지고 있을 거야. 나는 돌아가서 연희 언니에게 받으면 돼.”
“그게 뭡니까?”
마침 옆에 있던 우사부가 물었다.
“아, 행운의 마스코트죠.”
승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하자 우 사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희는 현암과 백호만 보내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 에 걸리는지, 공항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
해밀튼의 비서인지 누구인지가 승희의 비행기표까지 준비해 두고 있었으니 공항까지는 같이 가도 될 듯했다. 차 안에는 주위 사람들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어 승희는 현암에게 당부하듯 짧게 말했다.
“조심해. 무조건 돌격하지 말구. 알았어?”
“그래.”
마침내 현암은 승희와 헤어져 해밀튼의 조그마한 자가용 비행 기에 올랐다. 비행기 크기에 맞는 작은 트랩을 오를 때, 저만치 승희가 탈 커다란 여객기가 보였다. 그것을 보며 현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 다면 이번에는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랐다.
‘만약 내가 돌아가지 못해도……………. 잘해 줘. 알았지? 승희야……..’
현암은 청홍검과 월향검이 든 골프 가방 끈을 고쳐 메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