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14화 – 방황하는 유대인 4 : 에티오피아로
에티오피아로
비행기는 작았지만 안은 잘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충분히 휴 식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음에도 현암은 눈을 붙일 수 없었 다. 동행자는 비행기 조종사를 제외하고 모두 여섯 명이었다. 현 암, 백호, 해밀튼, 마하, 시켈(현암과 겨루었던 아랍인 같아 보 이는 남자의 이름이 시켈이라 했다. 그는 아랍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유럽인이었다), 그리고 우사부였다.
우사부는 뭔지 알 수 없는 대단히 큰 짐을 가지고 있어서, 그 것을 비행기 화물칸에 싣느라 이륙이 조금 지연되었다. 비행기 가 이륙 준비를 하는 동안 해밀튼은 아하스 페르츠와 자신에 대 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하딥과 시켈은 잠자코 있었지만, 우 사부는 해밀튼과 꽤 많 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암도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것이 지루 해 백호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으나 백호는 피곤한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할 수 없이 현암은 짧은 영어를 해 가면서 해밀튼, 우 사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 사부는 해밀튼의 과거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 같았고, 해밀튼은 주로 아하스 페르츠의 무서움과 그가 없어져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문득 현암은 자 신이 해밀튼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우 사부가 계속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연일까? 아니면 우 사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암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망설이며 계속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자신이 추측한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 각을 하다가 현암도 그만 백호와 같이 깜박 잠이 들었다. 이상하 게도 졸음이 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암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주변은 마치 지옥 같아 보였다.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용암이 흘렀다. 그리고 그 위에 돌로 만든, 허물어져 가는 작은 외길이 보였다. 현암은 그 위를 달려갔다. 그냥 있으면 돌이 녹아 용암에 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용암이 간혹가다가 위로 솟구치면서 붉은색의 불덩어리를 허공으로 흩 날렸다. 어떤 것은 사람의 모습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현암은 지금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러 사람이 현암의 어깨 위에 있었다. 고개를 돌 려 세어 보려 했지만, 어깨에 올라탄 사람이 너무도 많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달리다 보니, 자신의 양옆으로도 사 람들이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다가 발 을 헛디뎌 용암에 빠져 버렸다.
현암은 그들을 구해 보려고 손을 내밀려 했으나 갑자기 어깨 가 무거워져 발을 옮길 수 없었다. 그리고 어깨 위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빨리 뛰어. 빨리!’
‘더 빨리!’
‘더 빨리!’
수십 개 수백 개의 손들이 내려와 현암의 머리와 얼굴을 때리면서 채찍질했다. 손들이 앞을 가려서 뛰기가 힘들었다.
현암은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열심히 뛰고 있잖아! 날 건드리지 마!’
그때 준후가 현암의 옆으로 다가와 미소를 지으면서 천으로 덮은 뭔가를 내밀었다. 현암은 목이 마르던 참이라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천을 벗기고 보니, 그것은 박 신부의 얼굴이었 다. 현암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때 박 신부의 머리 가 말했다.
‘현암군, 침착하게.’
그때 준후가 히히히 하고 웃으면서 갑자기 얼굴을 찢더니 뒤로 팽개쳤다. 그 안에는 생전 본 적이 없는 여자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어깨를 탁 치는 바람에 현암은 기겁을 해 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동생 현아가 서 있었다.
‘오빠, 조심해. 등 뒤는 벼랑이야’
현암이 깜짝 놀라서 보니 자신이 막 용암에 빠지려 하고 있었 다. 중심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렸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때 여자 얼굴을 한 준후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내 준후의 얼 굴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현암은 그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 손은 뼈를 드러내면서 쑥 빠져나오고 말았다. 현암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현암은 벼랑 에서 떨어져 지글지글 타오르는 용암에 빠져 버렸다. 용암 속으 로 가라앉는 순간 박 신부의 머리가 다시 말했다.
‘현암군, 여기가 지옥일세..’
용암에 몸이 타들어 가는데, 승희와 연희가 옆에 있는 것이 보 였다. 둘 중 누구를 구해야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현암은 승희 와 연희를 각각 오른손과 왼손에 잡고 있는 힘을 다해 용암 밖으 로 내던졌다. 그때 귓전에 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아직 아냐. 아직 때가 아냐.’
현암은 놀라서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옆에서 백호가 미소를 지으며 현암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
“잘 쉬셨나요?”
현암은 그저 눈짓으로 한 번 인사를 하고 물을 받아 마셨다.
기분이 묘했다. 현아를 꿈속에서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인데…………….
그때 백호가 현암에게 말했다.
“아주 잘 주무시더군요.”
“내가 얼마나 잤죠?”
“글쎄요. 나도 잠들었는데, 깨어 보니 주무시고 계시더군요. 그나저나 시간이 참 빠릅니다.”
“그래요?”
현암은 대답하면서 건성으로 창밖을 내다보고는 비행기 내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금방 잠들었던 것 같은데, 출발한 지열시 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미국에서 에티오피아까지 직행으로 갔 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것이었다.
‘승희는 서울에 도착했겠군.’
이렇게 짐작하면서 현암은 승희가 주고 간 세크메트의 눈을 손으로 들어 보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반응이 없었다.
현암의 추측대로 승희는 서울로 돌아가 있었다. 연속으로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 비행을 한 터라 시차 때문에 몹시 피곤했지만 승희는 곧장 연희를 찾아갔다. 연희는 준호, 아라, 수아와 함께 병원에서 쉬고 있다가 승희의 목소리를 듣자 반가워서 눈물 을 다 흘렸다. 승희는 연희가 집에도, 아지트에도 없자 연희를 찾아 수소문하느라 조금 고생을 하고 난 뒤였다.
승희는 곧장 연희 일행이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고, 현암이 비행기 안에서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쥐고 있을 무렵에는 연희 등이 겪었던 기막힌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그때 박 신부는 아직 돌아오기 전이었으며(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시간쯤이었다) 준후의 행방은 도대체 알 수가 없었기에 승희 가 달리 할 일은 없었다.
승희는 연희가 보관하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얻어 교신을 시도했지만 그때는 공교롭게도 현암이 막 세크메트의 눈에서 손 을 뗀 참이라 이쪽의 상황을 전달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고 난 뒤에 승희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부딪혀 잠시 현암과 연락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에티오피아의 수도 악숨은 때마침 축제 기간이었다. 예전에 아프리카에 한 번 와 본 적은 있지만, 그곳의 풍습을 잘 모르는 현암으로서는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호텔로 가는 길목에서도 축 제 행렬과 자주 마주치곤 했다. 악숨에서 열리는 축제는 대부분 종교적인 것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흰 천이나 갖가지 천으로 둘러싼 넓적한 판을 이고 행렬하는 광경이 현암의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뭡니까? 머리에 인 것이……?”
현암이 앞자리에 앉은 해밀튼에게 물었다. 현암 일행은 두 대 의 차에 나누어 타고 있었는데 해밀튼과 현암, 백호가 한 차를 타고, 우사부와 마하딥, 시켈이 또 다른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 이었다.
“타보트요.”
“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들이 타보트라고 믿고 있는 석판이오 악숨에만 이만 개에 달하는 교회가 있고, 그 하나하나는 모두 자 신들의 교회가 타보트를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그래서 이 축 제 행렬 기간에는 모든 교회에서 타보트를 이고 나오는 것이오.”
“그러나…………… 타보트는 만지면 누구나 죽게 된다는 물건인 …… 에티오피아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는 잘 알고 있을 것 아 닙니까?”
“모든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아니오. 물론 아론의 두 아들이 나 많은 사람들이 언약궤를 만지기는커녕 언약궤에 접근했다가 죽은 기록이 있는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신앙심이 깊고 올바른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전해지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의 신앙 심을 증명하기 위해 타보트를 이고 행진하는 거요.”
백호가 물었다.
“악숨에만 이만 개의 교회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악숨에 이만 명 이상의 진실한 마음을 지닌 성직자가 있다는 뜻인가요?”
“물론 여기 나온 타보트가 진짜일 리는 없소. 그런 중요하고도 위험한 성물을 행진에 사용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신앙심만은 무시하면 안 되오. 에티오피아는 아주 오래전부터 회교도 국가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고수했소. 그리고 이곳에서 종교의 중요성은 문명이 발달한 서구보다 훨 씬 높소. 더구나 회교는 기독교와 사이가 지극히 나쁘지. 그런 속에서 이리 오랜 세월 동안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는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소. 현실적인 구복(福)이나 자신의 목적을 위한 거짓 신앙심이 아니라 진실에 보다 가까운 신앙심 말이오.”
해밀튼이 숨을 고르는 사이에 현암이 물었다.
“성당 기사단의 본부가 에티오피아에 있다는 것도 그런 신앙 심에 보호를 받기 위해서인가요?”
“여기까지 왔으니 다 말해 드리겠소. 사실 성당 기사단의 본부 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오. 당신이 말 한 이유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에 급히 이곳으로 옮겼다고 보는 편이 좋겠지.”
“그렇다면 언약궤・・・・・・ 아니 타보트 때문에?”
“그렇소. 진실한 타보트가 발견된 이후, 성당 기사단은 그것을 얻으려 했소. 그러나 얻을 수 없었소. 그래서 성당 기사단은 타 보트가 있는 곳으로 본부를 옮긴 거요. 그렇게 함으로써 성당 기 사단의 본부에 타보트가 있게 된 것이고.”
“본부를요?”
“그렇소.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나중에 들어가 보면 더 간단히 알 수 있을 거요.”
“타보트가 발견되었을 때 아하스 페르츠는 어떤 조치를 취했 습니까? 내가 듣기로 아하스 페르츠는 타보트를 꺼려한 것 같은 데. 혹시 파괴하거나 사람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다시 감춘 건 아닐까요?”
“타보트는 아하스 페르츠가 파괴할 수 없소.”
“왜 그렇죠?”
“나중에 보면 알게 될 것이오.”
현암과 해밀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호가 끼어들었다.
“혹시 아하스 페르츠가 우리를 방해하려고 어떤 수단을 부리 지는 않을까요? 만약 당신이 말한 대로 아하스 페르츠가 정말로 막강한 자라면, 그리고 무시무시한 주술력을 지니고 있다면 우 리가 타보트를 얻으러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모르잖습니까? 나는 물론 현암 씨를 믿고, 성당 기사단의 여섯 기사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만, 아하스 페르츠가 직접 온다면………….”
“그렇게는 못하오.”
“어떻게 확신합니까?”
“아하스 페르츠는 지금 다른 곳에 있고, 꼼짝할 수도 없소. 만 약 아하스 페르츠가 이곳에 나타날 확률이 있었다면 아예 여기 에 올 마음 같은 것은 먹지도 않았을 거요.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일 테니까.”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 않소? 좌우간 내 말은 믿어도 좋소. 나도 그를 두려워하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아하스 페 르츠를 피할 자신이 있으니까.”
해밀튼은 말을 중단하려는 듯 중얼거리다가 현암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 친구들과 연락해야 하지 않겠소? 그들이 금방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곧 연락을 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해밀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오늘과 내일 정도는 우리도 움직이기 어려울 거요. 나 나 마하딥 등은 성당 기사단 사람들이 잘 아는 처지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고, 당신과 당신 친구들이 본부 주변을 살펴서 작전을 세울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때까지는 도착해 주면 좋겠는 데…………. 이틀이 넘게 지나면 일이 힘들어집니다.”
“왜 그렇죠?”
“이틀이 더 지나면 이곳 축제가 끝납니다. 축제가 끝나면 그곳 으로 들어가기가 대단히 어려워지오. 성당 기사단의 본부는 성 소 중 하나에 입구가 있는데, 그 성소는 축제 기간 동안만 외부 인들에게 개방되기 때문이오.”
해밀튼이 말하자마자 현암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되받 았다.
“그러나 성소가 외부인에게 개방된다면 오히려 그동안에 경계 가 더 강화될 것이 아닙니까? 성소를 통과하는 일은 성당 기사단 본부를 통과하는 것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어려울 것 같지 않은 데요?”
“글쎄, 그럴까요?”
해밀튼은 현암의 주장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뭔가 한참 생각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 었다.
“사실 나는 불안하오. 하루라도, 한시라도 빨리 이 일을 진행 하지 않으면 뭔가 잘못될 것 같소. 나는 솔직히 아하스페르츠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생각이 없소. 내가 알고 있고 꾸미는 모든 계획은 아하스 페르츠 본인도 알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마음 편하오.
그렇다면………… 그자는 내가 타보트에 손을 뻗칠 것을 눈치채고 어떤 조치를 취할지도 모르오. 토트의 예언이나 여러 가지로 미 뤄 볼 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내 마음이 급한 겁니다.”
“아하스 페르츠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면서요?”
“그러나 그에겐 많은 부하들이 있소. 그가 어떤 일을 꾸밀지는 귀신도 알 수 없을 거요. 그래서 불안한 겁니다.”
그때 백호가 나섰다.
“해밀튼 씨, 그런데 나는 한 가지 의심이 듭니다. 당신은 우리 가 찾는 것이 어떤 물건인지 아시죠?”
“알고 있소.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예언석 아니오?”
“그렇습니다. 물론 타보트만은 못하겠지만, 그 예언석도 상당 히 중요한 물건이라 여겨집니다. 그것은 아하스 페르츠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그 예언석은 타보트같이 신비한 힘을 지닌 물건이 아닙니다. 크기도 작고요. 만약 아하스 페르츠가 그 예언들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들을 성당 기사단 본부에 두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집니다만.”
백호의 말에 해밀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애를 써도 성과가 없을까 봐 걱정된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염려는 마시오. 물론 당신의 주장은 아주 타당하오. 그 러나 나는 부하를 통해 성당 기사단의 본부에 메소포타미아의 예언석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확인했소.”
“그렇다면 아하스 페르츠는 그 중요한 타보트도, 예언석도 다 본부에 버려두고 어딜 갔다는 겁니까?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지요?”
“나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소.”
“혹시 ・・・・・・ 당신・・・・・・.”
백호의 눈매가 조금 사나워지자 현암은 헛기침을 한 번 하면 서 백호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그러자 백호는 입을 다물었지 만 해밀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의심하더라도 나에게는 할 말이 없소. 그러나 여러분, 나를 믿어 주기 바랍니다. 나도 그 말밖에는 할 수 없구려 ………….”
승희는 연희와 아라, 준호 등이 입원한 병원에 있느라 현암과 연락조차 취하지 못한 채 하루를 훌쩍 보내고 말았다. 더구나 아 프리카와는 시차가 심했고, 그 시차가 교묘하게 작용해 연락이 되지 않았다. 현암은 조금 초조해졌다.
초조해지기는 해밀튼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가 왜 이렇 게 서두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하딥이나 시켈의 행동을 보니 그들 또한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말에는 잘 답하면서도 해밀튼의 일에 관한 것에는 입을 조개처럼 꼭 다물고 함구로 일관했다.
백호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라 박 신부나 준후와 따로 연락을 취하려 했으나 역시 연결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요?”
백호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현암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백 호를 안심시켰다.
“신부님이나 준후나, 모두 보통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그때 백호가 약간 의외의 말을 꺼냈다.
“조금 걸리는 것이 있어서요. 준후가 통 연락이 안된다니…………….”
“왜 그러시는데요?”
현암이 묻자 백호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준후가 전에 나한테 따로 부탁한 적이 있어요. 비자를 받아 달라고 말이죠.”
“어디 비자를요?”
“그게 ・・・・・・ 중국과 인도입니다. 그러면서 이건 별거 아니지만 만약의 사태를 위해 그런 것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준후가 하는 일이니 믿고 그러려니 했는데, 현암 씨도 몰랐나요?”
“예. 몰랐습니다.”
현암은 솔직히 놀라웠다. 인도에서 로파무드의 편지가 오기는 했지만 준후가 무슨 이유로 혼자서 중국과 인도에 가야 한단 말 인가? 혹시 준후가 뛰쳐나간 것이 그 나라에 가서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단 말인가?
“어느 어느 나란지 기억하십니까?”
“사실 많은 나라를 부탁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준후가 잘 몰라 서 그랬을 뿐, 많은 나라들이 대부분 비자가 필요없지요. 제가 들은 것이 중국과 인도였는데 그 외에도 몇 나라 더 있는 것 같 았어요. 허나 실제로 비자를 내준 건 인도 정도입니다만.”
“흠…….”
현암은 몹시 의아해졌다. 좀 더 곰곰이 뭔가를 고심해 보고 나 서, 현암은 아무래도 여기서 시간을 오래 끌어 봤자 좋을 게 없 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박 신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치더라도 준후와 연락이 끊 긴 것도 마음에 걸렸고, 승희와 연락이 안 되는 것도 수상했다. 더구나 이제 연락이 된다 해도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이틀은 걸릴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시간을 끄느니 하루라도 빨리 이곳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고 현암은 판단했다. 성당 기사단의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이 조금 어렵더라도 마 하딥, 시켈 등도 성당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우사부도 키건과 대등하게 싸운 적이 있다고 들었으니, 만약 남은 기사 여섯 명이 모두 있다 해도 자신은 세 명만 맡으면 될 것 같았다. 직접 겨뤄 본 적은 없지만 승희나 성난큰곰의 이야기로 볼 때 청홍 검이나 월향검을 잘 사용한다면 세 명 정도야 어떻게든 될 것 같 았다.
현암이 그런 뜻을 해밀튼에게 전하자 해밀튼은 몹시 기뻐하 면서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해밀튼은 마음이 몹 시급한 듯 허둥지둥하는 기색마저 엿보였다. 원래 해밀튼과 마 하딥 등은 발각될까 봐 같이 가지 않으려 했으나, 해밀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방침을 바꿔 같이 가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현암은 원래 백호를 동행시키지 않으려 했는데 백호가 한 사 람이라도 더 손이 필요할 것이라고 우겨서 결국 같이 가기로 결 정했다.
여섯 사람은 호텔 방에 모여 해밀튼이 준비한 지도를 펼쳐 놓 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 지도는 정밀한 지도를 손으로 베껴 그린 것 같았는데, 그중 다소 외딴 곳에 위치한 어느 건물을 가 리키면서 해밀튼이 말했다.
“여기가 타보트가 보존된 성소요. 악숨에는 수많은 성소가 있 고, 저마다 자신들이 지닌 타보트가 진짜라고 믿고 있소. 여기 있는 성소는 다른 곳과 다를 게 없지만, 타보트는 독실한 신앙심 을 가진 수도사들이 지키고 있소. 그리고 여기 수도사들은 자신 만이 진짜 타보트를 지키고 있다고들 알고 있소. 그러나 실제로는, 그 수도사들이 지닌 타보트 역시 가짜요.”
“예?”
“타보트의 보존은 지극히 엄중하게 처리된 일이었소. 즉 이곳 에는 가짜 타보트와 진짜 타보트가 모두 있다는 거요. 수도사와 성소의 사람들은 물론 목숨을 걸고 타보트를 지키겠지만, 그 타 보트는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가짜요. 그리고 그 타보트가 봉헌 된 단상 밑에 비밀 통로가 있고, 깊숙한 지하 동굴이 있소. 그 사 실은 수석 수도사만이 알고 있소.”
“그곳에 진짜 타보트가 있나요?”
“아니오.”
“예?”
“그곳에서는 수백 년 전에 설치된 각종 장치들이 타보트를 보 호하고 있소. 수석 수도사가 그 장치들을 계속 점검하지. 수천 년 전부터 그래 왔고 말이오. 그러나 그 타보트 역시 가짜요. 지 하에 봉헌된 타보트의 단상 밑에 제2의 비밀 통로가 있고, 진짜 타보트는 그 안에 잠들어 있소. 그러니 아무도, 타보트를 지키는 사람들조차 진짜 타보트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거요. 만약 주술력과 첨단 과학을 동시에 사용하지 않았다면 진짜 타보트가 있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거요. 수천 년 전에 설치된 교묘 한 함정이지.”
현암과 백호 등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대단히 공들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 타보트가 가짜라는 것은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그 밑에 감춰진 타보트가 발견되면 타보 트를 훔치려는 자들은 그것이야말로 진짜라고 믿을 것이다. 그 러나 그것마저 가짜라니.
“그 안에 또 가짜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백호가 묻자 해밀튼은 껄껄 웃었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은 것 같소. 좌우간 우리는 성소 쪽 통 로를 알아냈지만, 그리로 통과해 보지는 않았소. 하지만 타보트 가 있는 방까지의 터널을 만들고 나서 그쪽을 살펴보기는 했소. 안에서 밖으로 나가기는 비교적 쉬울 것 같아서였지.”
“그런데 성당 기사단은 왜 타보트를 꺼내지 않고 본부 자체를 옮겨 버린 겁니까?”
“꺼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오. 타보트가 발견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고, 지금 타보트는 삼중의 보호를 받고 있소. 수도사들과 에티오피아의 모든 신앙인들은 타보트와 비슷하거나, 타보트로 여기는 그 어떤 물건이라도 악숨에서 반출되는 사실을 용납하지 않을 거요. 실로 수백만 명의 경비원을 둔 거나 마찬가지지. 그리고 이 성소의 지하에 묻힌 타보트는 고대의 많은 함정으 로 잘 보호되고 있으며,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도 극히 적소. 마 지막으로 이 타보트 부근에는 성당 기사단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하에서 경비를 서고 있소. 타보트가 묻힌 지하 동굴은 지상에서 백 미터 이상의 깊이요. 핵폭탄이 떨어져도 안전할 정도요.
더구나 그리로 들어가는 입구는 단 두 곳, 성소 쪽과 성당 기 사단이 뚫은 통로뿐인데, 그것 또한 극히 좁아서 누가 경비망을 뚫은 다음 비집고 들어온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오. 성당 기 사단이 타보트를 꺼내 다른 곳으로 옮긴다 해도, 이보다 더 잘 타보트를 감출 수 있는 곳은 찾기 어려울 거요. 진짜 타보트가 지하 아주 깊숙한 곳에 있다는 것은 성소를 지키는 수도사들도 모르기 때문에, 아예 성당 기사단의 본부를 지하에 두고 땅굴로 연결시키면 성당 기사단이 타보트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 니겠소?”
“그런데 ・・・・・・ 당신은 언약궤를 직접 봤습니까?”
느닷없는 현암의 질문에 해밀튼은 약간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아니오. 직접 볼 수는 없었소.”
“당신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직접 본 것 같은데요?”
“타보트, 언약궤는 성스러운 물건이오. 성당 기사단에서도 그 것을 엄준히 봉인하고 지키기만 할 뿐, 누구도 그것을 건드리게 하지 않는다오. 그것은 신성한 힘을 지닌 반면 또 그만큼 위험한 물건이니 말이오. 물론 언약궤가 있는 부근까지야 갈 수 있었지 만 그 방까지는 갈 수 없었소. 아하스 페르츠의 엄명 때문이기도 했지만, 타보트에 손을 대거나 접근하는 자는 누구나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오.
원래 타보트가 들어 있는 언약궤는 단순히 장식이나 보관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소. 타보트가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 기 때문에 타보트에서 뻗쳐 나오는 힘으로부터 외부 사람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언약궤에 넣어 그 힘을 차단한 것이오.’
“그러면 ・・・・・・ 그 타보트는 만지지 않고 접근만 하더라도 위험 하단 말입니까?”
“그렇소. 성경의 기록을 보면, 언약궤는 막대를 끼워 어깨에 짊어지고 운반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언약궤에 손을 대는 자는 거의 다 죽음을 당했소. 언약궤에 직접 손을 대지 않은 자들이 죽는 일은 없었소. 그러나 언약궤를 열고 타보트를 본 자들은 모 두 죽었소.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이 타보트를 봤다가 그 자리에서 즉 사했고, 고대의 한 유대 왕은 언약궤를 열라고 명했다가 이상한 불치병을 얻었소. 그는 신하들을 시켜 언약궤를 열고 먼발치에 서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그렇게 되었소. 하물며 우리가 조사한 바로 지금의 타보트는 그때 그 언약궤에 들어 있지 않았소.”
“그럼 누가 그것을 이곳으로 운반한거죠?”
“잘은 모르겠소. 우리는 타보트가 있는 방에 통로를 내지도 못 했소. 다만 아주 작은 구멍을 뚫고, 마이크로 카메라를 넣어 간 신히 타보트의 모습을 찍은 화상을 볼 수 있었소. 그 주변에는 오래 묵은 몇 구의 백골과 썩은 나무 같은 것들이 보였는데, 내 짐작에는 몇 사람이 죽음을 각오하고 언약궤를 메고 들어가 언 약궤에서 타보트를 꺼내 봉인하면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소. 주변의 나무토막들은 언약궤의 잔해인 것 같은데 이미 수천 년 이 지났으니 당연히 썩어 없어졌겠지.”
“왜 목숨까지 버리면서 타보트를 꺼내 보관했을까요?”
“타보트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소. 그 사람들은 아무도 타보트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런 희생을 치렀던 것 같소. 타보트에 직접 접근한다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이 기 때문에 꺼내 보관하면 아무도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일 거요. 아무튼 우리는 타보트를 찍으려다가 세 명이 죽었고, 여섯 명이 알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렸으며, 여덟 대의 카메라를 망가뜨리기 까지 했소.”
“사진을 찍다가 죽었다고요?”
“그렇소. 그 작은 구멍 때문에 그렇게 된 거요. 더구나 사람만 이 아니라 기계에도 타보트의 힘이 미치는 듯했소. 정밀한 카메 라들도 그 방에 들여놓기가 무섭게 퍽퍽 망가져 나갔으니까.”
백호가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걸 무슨 수로 꺼냅니까? 설혹 성당 기사단 본부로 뚫고 들어가더라도 그걸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우사부도 한마디 거들었다.
“타보트가 주위의 인공물에 영향을 준다면, 그걸 갖고 비행기에 탈 수도 없잖습니까?”
“흥분하지 마시오. 나는 그에 대해서도 대비를 했소. 그렇지 않고서야 왜 내가 부탁을 했겠소?”
해밀튼은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타보트는 어떤 물체에도 힘을 끼칠 수 있는 것 같소. 카메라 가 망가졌던 걸로 보아 타보트 주변의 인공물이나 기계도 성할 수 없소. 그러나 타보트는 언약궤에 들어 있었을 때는 외부에 힘 을 그리 강하게 끼치지 않았소. 재조사한 바에 의하면, 타보트가 봉헌된 그 방의 구조가 바로 언약궤의 구조와 같다는 것을 알아 냈소 피라미드 파워와 마찬가지로, 언약궤의 구조에도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힘이 있었던 거요. 즉 이 말은, 언약궤와 같은 구조의 밀폐 용기에 타보트를 넣으면 비교적 안전하게 옮길 수 있다는 뜻이오. 그래서 나는 그 방의 구조로부터 언약궤의 형태 를 추적해 그런 상자를 여러 개 만들어 두었소.”
“그 안에만 있으면 사람도 안전하고, 비행기를 타도 안전하다는 건가요?”
“그렇소.”
우사부가 냉소를 지으며 되받았다.
“그러나 누가 타보트를 그 상자에 넣겠습니까?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죠?”
그 말에 해밀튼이 미소를 지으며 마하딥과 시켈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마하딥은 방 안에 있던 책 한 권을 꺼내 저만치 놓은 다음 문을 열고 시켈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문 이 조금 열리더니 납작한 상자 하나가 휙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와 동시에 둥글게 굽은 단검이 빙빙 돌면서 휙휙 날아 들어왔다. 그 단검은 회전하면서 바닥에 놓인 책의 아랫부분에 정확하게 부딪쳤고, 회전력에 의해 허공으로 조금 떠올랐다. 그다음 날아 온 단검들이 계속 책의 아랫부분을 치자 책은 결국 허공으로 솟 아올라 뒤집어지면서 상자 안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상자 뚜껑이 날아와 보기 좋게 상자를 덮어 버렸다. 실로 대단한 묘기였다.
* 피라미드 모양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것은 피라미드 모양 을 만들고 그 삼분의 일 높이가 되는 중앙에 정확히 남북으로 무디어진 면도날을 놓아두면 피라미드 파워에 의해 면도날이 무척이나 잘 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이용한 면도날 재생 특허까지 있으니, 피라미드의 구조에서 나오는 어떤 힘이 존 재한다는 주장도 나올 만하다. 그리고 정확하게 계산된 피라미드 구조 안에서는 음식물이 부패되지 않고 미라처럼 퍼석퍼석하게 마른다는 보고도 있다.
백호는 홀린 것처럼 그 광경을 보았고,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 으며 우사부는 박수를 쳤다.
마하딥과 시켈이 다시 들어오자 해밀튼이 말했다.
“마하딥은 원래 단검에 능하오. 이 두 사람은 벌써 몇 달 동안 이나 이 연습을 해 왔지. 그러니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여기오. 타보트가 있는 방의 벽을 조금 부수고 방 밖에서 신속하게 타보트를 봉인하면 목숨을 잃지 않을 것이오.”
“정말 대단합니다.”
백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입을 열었다. 세상은 넓고 신기한 재주를 지닌 별의별 사람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현암이 말했다.
“우리가 들어갈 길은 어디죠?”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길은 두 갈래가 있소. 성소에서 지하로 내려가 두 번째 가짜 타보트가 있는 곳에서 다시 내려가는 길, 그리고 성당 기사단의 본부, 그러니까 여긴데…”
그러면서 해밀튼은 손가락으로 교회의 한참 뒤편에 있는 허허 벌판을 가리켰다. 그것을 보고 백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보이지. 그러나 성당 기사단 본부는 땅속에 위치 하고 있소. 감춰진 타보트처럼 지하 깊숙한 곳의 천연 동굴을 이 용한 것이지. 원래 타보트를 여기 숨긴 사람들은 지하에서 천연 적으로 이루어진 공동(空洞)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용했소. 성당 기사단이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소?”
“그러면 그리로 어떻게 들어갑니까?”
그 질문에 해밀튼은 일 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맞은편 산의 산등성이 한 지점을 가리켜 보였다.
“여기가 입구요. 여기서부터 대략 천이백 미터가량 지하 경사 로를 따라 내려가야 합니다. 그러면 성당 기사단의 본부로 들어 갈 수 있고, 거기에서 굴을 통해 타보트가 봉헌된 방으로 갈 수 있소. 우리의 일이 힘든 것은 이것 때문이오.”
“통로의 크기는요?”
“높이와 폭이 모두 이 미터 정도요. 좁은 길이지.”
그 말을 듣고 백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통로를 천이백 미터나 내려가야 한다는 겁니까? 만약 누가 지키고 있기라도 하면.”
“맞소. 그들이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지. 침입자가 몸을 피 할 곳도 없고, 중장비 따위를 들여올 수도 없소. 더구나 총이나 주술력을 가진 사람들이 매복해 있다가 공격한다면 막아내기가 몹시 힘들지. 그래서 어렵다고 말한 거요.”
그러면서 해밀튼은 간단한 그림을 그려 가며 통로의 방어 구 조에 대해 말해 주었다. 통로는 좁지만 백 미터마다 한 곳씩 열 두 군데의 방어 거점이 있어서 안에서 밖의 침입자를 막기는 쉽 지만 밖에서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이런 정 도의 구조라면 주술사가 아니라 총 한 자루만 있어도 침입자를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백호는 이건 아무래도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설 레설레 저었다. 굳이 성당 기사단의 본부를 함락시키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요새와 같은 곳을 어떻게 뚫고 들어간단 말인가? “다른쪽 입구는 어떻습니까? 성소 쪽 말입니다.”
“성소 쪽 입구는 지금 상황에서 더욱 어려울 것이라 짐작되오. 관계없는 수도사들을 공연히 자극할 수도 있을뿐더러 우리가 직 접땅을 파고 발굴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발굴요? 성소 쪽 통로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성소에 봉헌된 첫 번째 가짜 타보트와 두 번째 가짜 타 보트 사이의 길은 열려 있지만, 두 번째 가짜 타보트와 진짜 타 보트 사이의 통로는 막혀 있을지도 모르오. 내가 성당 기사단을 나오기 직전, 아하스 페르츠가 그 통로를 막아 버리라는 명령을 내린 것 같으니까.”
“그러면 그쪽 통로는 막혀 버린 겁니까?”
“그것을 정확히는 모르겠단 말이오. 아직 공사가 다 되지 않았 다면 키건 등을 상대하지 않고서도 들어갈 수 있겠지만, 공사가 마무리되었다면 들어갈 수가 없소. 게다가 되돌아오는 것도 문 제가 됩니다. 우리가 그리로 들어가려면 성소에 봉헌된 타보트 를 건드리지 않을 수가 없소. 그런데 그걸 건드리면 당장 발각되 지 않더라도 조만간 수도사들이 난리를 피울 테니, 성당 기사단 원들에게 경보를 해 주는 거나 마찬가지가 된단 말이오.”
“재빨리 살펴보고 돌아온다면요?”
“성소 밑 지하에는 많은 함정이 장치되어 있소. 일단 성소 쪽 통로를 지나려면 두 번째 가짜 타보트가 있는 곳을 통과해야 하 는데, 그곳까지 가려면 수석 수도사가 관리하는 장치들을 통과 해야 하오. 그 장치들은 대단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두려 워할 정도는 아닐 거요. 하지만 피해를 입지 않더라도 장치가 움 직이는 것까지 어찌할 수는 없지 않겠소?”
즉 성소 쪽 통로가 성당 기사단 본부를 통과하는 것보다는 쉽 겠지만, 만약 그쪽 통로가 막혔다면 되돌아와 다시 성당 기사단 의 본부를 통과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내 계획은 이렇소. 일단 우리는 성당 기사단원들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사이에 신속하게 성당 기사단 본부로 들어 갑니다. 입구는 물론 경비하고 있지만, 우 사부의 무술이라면 소 리 내지 않고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요?”
“그 정도라면 문제없소.”
사람됨이야 믿을 수 없었지만 우 사부는 무술로 키건과 대등 하게 싸웠을 뿐만 아니라 강한 내공까지 겸비한, 근래 찾아보기 어려운 고수였다. 소리 내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경비병들을 잠 재우는 것쯤은 별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일단 통로를 들어가면 좀 더 힘이 들 겁니다. 통로 요소요소 에 설치된 경비소를 통과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내 통배권으로는 그런 석벽을 투과할 수 없소.”
우사부가 말하자 해밀튼은 현암을 보면서 말했다.
“그건 현암 씨가 능력을 발휘한다면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소.
현암 씨의 기공술 중에 벽을 투사해 타격을 줄 수 있는 것도 있 지 않던가요?”
그 말에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태극기공의 ‘투자 결을 말하는 것이었다. 현암은 해밀튼이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 다는 것에 대해 내심 놀라고 있었다.
“마하은 중력파를 쓸 수 있소. 마하딥이 일단 적을 제압하고, 현암 씨가 기공술을 사용하면 요소요소에 숨은 자들을 물리칠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우 사부의 통배권도 굵은 석벽이야 통과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노출된 자들은 처리하실 수 있을 것이고.
일단 성당 기사단 본부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성당 기사단의 기사들이 있을 거요. 여섯이 다 있을지, 그중 몇 명만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키건 이하 최소한 두 명의 기사는 있을 겁니다. 키건은 시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그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만약 여섯 기사들이 다 있다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마하딥은 몰라도 시켈은 좀 약한 편입니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남과 싸울 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고요. 백호 씨도 기사들의 상대 는 되지 않을 테니.”
그러자 우사부가 끼어들었다.
“키건 정도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소.’
“그러나 저들은 여섯이오. 우 사부께서 한 명을 맡고, 마하딥과 시켈이 하나씩 상대하더라도 현암 군이 셋을 맡아 줘야 하오. 그래서 현암 씨의 동료 분들이 와주시기를 바랐는데.”
이에 현암이 간략하게 말을 끊었다.
“해 봅시다. 그 정도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다.”
“좋소. 사실 나도 현암 씨를 믿고 있고, 그럴 능력이 있다고 보 고 있었소. 좌우간 그들을 모두 물리쳐야만 하니까 힘이 들더라 도 반드시 해내야 하오.”
그때 우사부가 나섰다.
“그들을 모조리 물리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리치 지 않고 나와 현암 씨가 시간을 끌고, 마하덥과 시켈이 따로 가 서 타보트를 얻으면 어떻습니까?”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오. 마하딥과 시켈이 빠지면 이쪽이 너 무 적어지오. 그리고 우리는 타보트만이 아니라 예언석도 얻어 내야 하오. 그것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거요. 더구나………… 타 보트가 있는 곳의 벽은 아마 현암 씨밖에 뚫을 수 없을 거요.”
“왜죠?”
“그 벽은 아주 단단한 돌로 돼 있어 급히 뚫을 방법이 없소. 폭 약을 써도 많은 양을 써야 하는데, 밀폐된 지하에서 많은 폭약을 쓰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지. 현암 씨는 검기도 쓸 줄 알고, 듣 기로는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명검을 갖 고 계시다는데.”
“과찬입니다. 무엇이든 자를 수는 없습니다만…………… 석벽이 아 주 두껍지만 않다면 가능할 겁니다.”
좌우간 현암 씨는 꼭 필요하오. 마하딥과 시켈도 그렇고, 그 렇다면 우사부께서 혼자 여섯을 맡으셔야 하지 않소? 혼자 여섯 을 상대로 시간을 끈다는 건 좀………..”
“그렇군요. 솔직히 그건 좀 문제가 되죠.”
우사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호가 입을 열었다.
“혹시 총이 있으면 나에게 주십시오. 사격은 좀 할 줄 압니다. 우 사부가 시간을 좀 주시면 제가 한번 기사 중 몇을 맞혀 보겠 습니다.”
그 말에 해밀튼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총은 휴대할 거요. 그러나 백호 씨, 우리는 타보트를 얻으려는 거지, 사람을 살상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 은…………… 한때 나의 동료들이었소. 아하스 페르츠의 손아귀에 들 어가 갈라서기는 했지만 그들은 악인이 아니오.”
“나도 사람을 죽이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다리 같은 곳을 맞 히면 되지 않겠습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성당 기사단의 기사들입니다. 이들이 입은 갑옷은 총알도 막아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총은 그들에게 소용 없습니다. 그리고 총이 먹혀드는 상대라면, 굳이 총을 쏘지 않 아도 우리 힘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봅니다만……………. 가급적 총은 쏘지 않았으면 합니다. 백호 씨는 저와 함께 주변 경계를 하십시다.”
그 말에는 모두 이의가 없었다. 해밀튼이 계속 이야기했다.
“일단 기사들을 제압하고 나면 재빨리 예언석과 타보트를 챙 깁시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 삼십 분 내에 해내야 합니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성당 기사단의 외부 경비원들이 경보를 받고 달려오려면 삼십 분 정도가 걸릴 거요. 그들은 별다른 능력이 없 겠지만, 모두 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 시간을 끌게 되면 그야말로 전쟁터가 돼 버릴 겁니다.”
“그다음 탈출은요?”
“들어온 길로 나갑니다. 만약 저항이 심해 탈출이 힘들면, 운 을 바라고 성소 쪽 통로로 가 보는 수밖에.”
“그쪽 통로가 막혔다면요?”
“그러면 별수 없소. 강행 돌파를 하는 수밖에…………. 그러니 삼 십 분 내에 일을 끝내야 합니다. 모두들 명심하시기 바라오. 삼 십분.”
그렇게 작전 회의는 끝났다. 그리고 그들은 만약을 대비해 탈 출로가 될 수도 있는 성소의 주변을 한 번 돌아 본 후, 밤늦은 시 각까지 기다렸다가 악숨 교외의 어느 후미진 산등성이에 숨겨진 성당 기사단의 본부로 향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