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2화 – 종말의 서곡 2 : 검은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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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3권 2화 – 종말의 서곡 2 : 검은 하늘


검은 하늘

한편, 아라는 얼굴이 퉁퉁 부은 채 병원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 었다. 벌써 며칠째 준후가 문병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쯤 꼭 올 줄 알았건만 거의 밤이 되어 가는 시간인데도 준후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오히려 꼴 보기 싫은 준호만 한두 번 드 나들었는데, 보기 싫다고 반은 내몰다시피 쫓아낸 판국이었다. “처음에는 좀 자주 오는가 싶더니 이 인간이 이젠 아예 코빼 기도 안 보이는구나. 하여튼 남자란 것들은’

아라는 심심하기도 하고, 또 그렇다고 찾아올 사람도 별로 없 는 게 서글프기만 해서 불을 다 꺼 버리고 죄 없는 베개만 두드 려 대고 있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언 뜻 보니 키가 훤칠한 것이 혹시 준후인가 해서 아라는 얼른 고개 를 들었다. 그러나 들어선 사람은 준후가 아니라 수아를 품에 안 은 연희였다.

“어, 잤니?”

“아……. 아니.”

어쨌거나 반가운 마음에 아라는 얼른 고개를 들며 병실의 불 을 켰다. 조그마한 수아는 연희의 품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 는데, 연희는 능숙하게 수아를 소파에 뉘고 아라에게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어. 그런데 상처는 좀 어때? 많이 나았지?” 

“거의 다・・・・・・・ 근데 …………”

아라는 수아를 힐끗 보고 연희에게 말했다. 아라는 혀가 끊어 질 뻔한 중상을 입었지만 이반 교수가 응급조치를 냉정히 취했 고, 서둘러 병원으로 옮긴 덕분에 회복이 빨랐다. 아라의 상처는 이십여 일 만에 많이 좋아져 지금은 거의 멀쩡한 상태였다.

처음에 아라는 말을 잘할 수 없었다. 지금도 약간 발음이 어 눌해진 것을 의식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그때 말을 거의 안 하던 것이 습관이 되어선지 그렇게 재잘거리던 예전과 달리 말수가 퍽 적어졌다. 물론 과묵한 성격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언니………… 딸?””

아라는 수아를 본 적이 없었다. 그 말에 연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난 아직 미스야. 내가 돌봐 주는 아이인데, 혼자 놓고 올 수는 없잖니. 그래서 데리고 왔단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예정이니까 이따가 얘한테 침대 한구석 좀 내줘.”

“응. 미안.”

“뭘. 얘는 수아라고 해. 그나저나 혼자서 심심했니? 지금 다들 어디론가 가버려서 아무도 못 올 거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내가 왔지.”

“언니, 고마워.”

“어쨌든 바쁘게들 다니는 모양인데…………. 이젠 통역도 필요 없는가봐. 나는 완전히 애 보기, 왕따야 왕따. 하하.”

“어딜?”

“몰라. 다들 흩어져서 외국에 간 모양인데. 백호 씨마저 없으니 어딜 갔는지 알 수 있나. 자, 신경 쓰지 말고 이거나 먹어.”

연희는 밝게 웃었다. 연희도 이제 거의 아줌마에 육박하는 나 이가 되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 아라는 연희 를 언니라고 부르며 승희보다 더 잘 따르게 되었다. 승희는 왠지 좀 차가운 느낌이 들고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연희 는 퍽 따뜻한 면이 있어서 아라도 잘 따르던 터였다.

다들 나가서 병실에 오지 못했다는 말에 아라도 조금은 마음 이 풀려서 연희가 가져온 간식거리를 먹으며 오랜만에 웃어 보 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눈치 보이게 폼 잡고 있었네.”

아라는 입원중이었지만 헐렁거리는 환자복을 싫어해서(정확 하게 말하면 행여 준후가 문병 왔을 때 그 꼴을 보이기 싫어서 검진 시간만 빼고는 귀여워 보이는 평상복을 입고 뒹굴고 있었다 (물론 간호사 말 따위는 듣지도 않았다).

연희도 웃었다.

“정말 환자가 왜 환자복을 안 입고 있나 했는데, 그러면 너 혹시…….”

그러자 아라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아냐, 아냐! 언니, 언니, 옛날 얘기나 해 줘. 응?” 

오랜만에 연희에게 옛날의 모험담을 비롯해 이 이야기, 저 이 야기를 듣다가 아라는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라는 퍼뜩 잠에서 깼다. 뭔가 느낌이 있어 서 놀라 깨었다. 급히 눈을 돌려 보니, 병실의 불은 꺼져 있었고, 연희는 수아를 아라의 옆에 눕혀 두고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다.

수아 역시 쌕쌕거리며 잘도 자고 있다.

‘괜찮네. 그런데…………’

그런데 마음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다. 물론 그냥 기분 탓이겠지만, 무엇인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아라는 인상을 쓰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이 깊어서인지 밖은 캄캄했다. 아 니, 밤이라고 생각해도 너무나 캄캄한 것처럼 보였다. 바랐던 위 안을 얻지 못하고 아라는 창에서 눈을 돌렸다.

아라는 문득 귓전에서 웅웅 하는 나지막한 소리를 들었다. 많 이 듣던 소리였다. 아라는 얼른 몸을 일으켜 한쪽 구석에 있는 벽장을 열고 자신의 손가방을 꺼냈다. 가방을 열자마자 가방 안 에서는 환한 빛이 번져 나왔다.

‘조요경이야!’

웅웅 소리는 조요경에서 나는 소리였다. 조요경은 삿된 것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 주고 다른 생물에게 명령을 하는 능력을 소유자에게 주기도 하지만, 위험한 영적 존재가 근처에 있을 때 는 빛을 내고 웅웅 하며 울어 일종의 경보기 구실까지 했다. 지 금껏 아라는 그런 현상을 몇 번이나 봐 왔으나 이번만큼 조요경 이 크게 울고 밝은 빛을 내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 라는 긴장하면서 조요경을 움켜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근처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을 집 중해도 근처에는 강아지 한 마리 없었다. 쥐나 벌레 따위는 조금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들은 눈을 빌릴 만한 대상이 될 수 없 었다.

‘이거 정말. 서울은 이게 문제라니까!’

아라는 연희를 깨울까 하다가 일단 좀 더 두고 보기로 하고 창 가로 다가섰다. 그때 갑자기 유리창이 와장창 부서지면서 바람 이 쏴아 하고 안으로 몰려들었다.

“으앗!”

아라는 유리 조각이 날아드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조요경을 떨 어뜨리고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파편은 날아들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바람은 안으로 몰아쳤는데, 유리 조각은 모조리 창 밖으로 튕겨 날아가 버렸다.

“대체 뭐니?”

뒤에서 연희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어느 틈에 일어났는지 아직까지 자고 있는 수아를 민첩하게 품에 안고 아라를 뒤에서 팔로 감쌌다. 아라는 놀라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얼 른 연희에게 달라붙었다.

“창문이 갑자기………!”

그 순간 창밖에서 검은 물결 같은 것이 출렁거렸다. 마치 꿈틀 거리는 생명체처럼 검은 물결은 창문 안으로 몰려 들어오려 하 고 있었다. 그것은 아라뿐만 아니라 연희의 눈에도 보였다.

“으악!”

아라는 기겁을 했고, 연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수아와 아 라를 양쪽에 안고 얼른 문 쪽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멀쩡하던 문 이 갑자기 잠겨 버렸는지 아무리 잡아당겨도 꼼짝하지 않았다. 

“대체 뭐야!”

연희는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물결은 창가에서 용 솟음치고 꿈틀거리며 시시각각 모습이 변했다. 사람의 얼굴 같 았다가 손 같은 형상이 되기도 했으며,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부정형의 기이한 모습이 되기도 했다. 끔직한 몰골이라 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연희는 덜덜 떠는 아라와 아직도 곯아떨어져 있는 수아를 안 고 방 한구석으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했다. 그러면서도 연희는 계속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몸을 떨며 가만히 지켜보니 검은 물결 같은 것은 창밖에서 꿈 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려고 발버둥치는 것 같았다. 유리가 흔 들리는 것을 보아 창문 정도는 단숨에 부수고 들어와도 충분한 데, 유리 아닌 무언가가 막고 있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 때문에 헛되이 꿈틀거리기만 할 뿐 안으로 밀려들어 오지 못하 는 것 같았다.

“뭐지?”

아라가 해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연희는 그 틈을 이용해 문을 열려고 했다. 아라의 말에 대답해 줄 경황은 없었 다. 연희는 이를 악물고 문손잡이를 양손으로 거칠게 돌리다가 결국은 문손잡이를 수도로 내리쳤다.

연희는 호신술이 삼단이었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친 것이라 웬만한 쇠파이프라도 절단할 위력이 있었다. 허나 가느다란 문 손잡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몸을 휙 돌리면서 아예 문을 부수려고 돌려 차기로 문을 걷어찼지만 얄팍한 나무문은 그 타격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뭔가 있어!”

뭔가가 문에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연희는 수 아를 얼른 왼팔로 옮겨 안고 오른손에 정신을 집중했다. 연희의 오른쪽 손바닥에는 과거 준후가 심어 준 부적의 힘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때 아라는 조요경을 떨어뜨린 것을 깨닫고 얼른 방 안을 살폈다. 조요경은 재수 없게도 하필 검은 물결이 일렁이는 창 가에 떨어져 있었다.

아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검은 물결은 다 시 한번 힘을 모으려는 듯 뒤로 조금 물러나 있었다. 그 틈을 타 아라는 조요경 쪽으로 달려갔다. 연희는 막 정신을 집중해 문을 내리치려다가 아라가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그 순간 검은 물결은 무서운 기세로 병실 창문을 향해 덮쳐들 었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아 있던 유리가 모조리 산산조 각나면서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창살이 고무처럼 휘청하고 반 구형으로 부풀어 올랐다.

아라는 조요경을 집어 들었지만 그 충격으로 데구루루 굴렀 고, 연희도 수아의 몸을 감싼 채 창문 쪽에서 등을 돌리면서 몸 을 웅크렸다.

그러나 비수처럼 날아들던 유리 조각들과 방 안을 온통 휩쓸 어 버릴 듯 덮쳐들던 검은 물결은 보이지 않는 보호막 같은 것에 부딪힌 듯 구형으로 크게 부풀었다.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자 연 희는 다시 눈을 들어 검은색 구체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막은 팽팽하게 버티고 있었지만 압력이 계속 증 대되는 듯, 중간에 낀 유리 조각들이 으깨져 가루가 되고 있었 다. 그리고 창문에서 떨어져 나간 알루미늄 철골과 벽돌 조각도 뒤틀리며 으깨졌고, 막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 아라는 넘어진 채 부풀어 오르는 막에 휩쓸릴 것같이 보였다.

연희는 황급히 정신을 추스른 다음 아라의 왼쪽 손목을 잡고 무작정 끌어당겼다. 또 한 번 있는 힘을 다해 오른손으로 문을 내리치려는 찰나, 어이없게도 문이 저절로 활짝 열렸다. 뭔가 이 상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연희는 아라를 일으키지도 못한 채 있는 힘껏 아라의 손목을 쥐고 문밖으로 몸을 날렸다. 툭 하는 감촉이 손끝에 전해져 왔 다. 급히 잡아당기는 바람에 아라의 팔이 탈골된 듯했다.

아라와 연희가 병실 밖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검은 물 결 같은 것이 기어코 보이지 않는 막을 뚫고 폭발했다. 그 순간 문이 거칠게 쾅 소리를 내며 저절로 닫혔고, 그 틈을 이용해 연 희는 아라를 일으키며 외쳤다.

“뛰어!”

아라는 왼팔이 아픈 것을 느낄 겨를도 없이 냅다 복도로 달렸 고, 연희도 곧 그 뒤를 따랐다. 그제야 수아가 잠에서 깨어나 으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연희는 그냥 수아를 꽉 끌어안고 아 라와 함께 있는 힘껏 복도로 뛰어 달아났다.

연희와 아라의 등 뒤로 다시 쾅 소리와 함께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문이 산산조각 나 허공에 파편을 뿌렸다. 검은 물결은 마 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면서 복도로 쏟아져 나와 두 사람을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복도 저편에 간호사 두 명과 의사 한 명이 나타났다. 그들도 굉음을 듣고 놀라서 달려오는 듯했다. 그들을 본 연희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도망가요!”

연희와 아라의 등 뒤에서는 휠체어와 링거 걸이, 손수레 등의 병원 소품들이 마구 뒤집히면서 부서졌고, 문들도 쾅쾅 소리를 내며 계속 터져 나갔다. 그것을 본 간호사와 의사는 석상처럼 굳 어 버렸다. 그러다가 연희가 다시 소리치자 그들도 얼른 뒤돌아 서 달렸다. 더 이상 말할 틈도, 다른 것을 고려할 틈도 없었다. 복도 끝에 있는 문을 박차고 연희가 뛰어들자 그곳은 계단이 었다. 연희는 달려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해 방향을 바꾸지 못한 채 창틀에 부딪쳤고, 뒤따라오던 아라도 연희에게 부딪혀 버렸 다. 간호사와 의사들은 병원 구조에 익숙해서인지 급히 구르면 서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이번에는 연희와 아라가 그 뒤를 따 랐다.

와장창 하면서 문이 부서지는 소리에 놀란 연희가 뒤를 돌아 보았다. 그 검은 파도 같은 것도 미처 방향을 바꾸지 못했는지 문을 박살 내고 난 뒤 벽에 붙은 창문을 모조리 부수면서 병원 건물 밖으로 밀려 나갔다.

“어서 아래로!”

잠시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검은 것이 언제 다시 덮칠지 몰랐다. 연희는 아라를 재촉하면서 아예 몸을 날려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렸다. 아라는 급히 서두르느라 발을 헛디뎠고, 그때마다 연희 가 밑에서 받쳐 주며 계속 달려갔다.

일층까지 내려가자 사람들이 꽤 많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일부는 환자들이었고, 일부는 간호사와 의사 등 병 원 직원들이었다.

이 병원은 박 신부가 잘 아는 친구가 운영하는 작은 병원이라 절대적으로 비밀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퇴마사들이 다쳤 을 때는 이곳을 이용하곤 했다. 작은 병원인데다 시간도 늦은 터 라 병원 안의 사람이라고 해 봤자 환자 서너 명과 간호사 서너 명, 의사 한 명과 수위, 기타 직원 두 명이 전부였다.

그곳은 놀란 사람들의 목소리로 마치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러웠다.

“뭐죠? 뭡니까?”

“무슨 일이 난 거예요? 전쟁이 난 겁니까?”

“테러 아냐 이거?”

환자들은 간호사와 의사를 붙잡고 떠들어 댔지만 연희도 뭐가 뭔지 모르는 판에 의사나 간호사가 상황을 알 리 없었다. 사람들 이 앞을 가로막은 채 웅성거리고만 있자 연희가 소리쳤다. 

“일단 밖으로 나갑시다! 다들 나가요!”

그러자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외쳤다.

“나갈 수가 있어야 나가죠!”

“예?”

“문이…………! 뭐가 끼었는지 꼼짝도 안 해요!”

남자 두어 명이 끙끙거리면서 병원 현관의 유리문에 달라붙어 힘을 쓰고 있었으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연희는 조금 전 병실문도 그랬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럼 갇힌 건가?”

다른 환자들은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모여들었지만 연희와 같 이 내려온 의사와 간호사들은 기이한 현상을 직접 본지라 얼굴 이 하얗게 질린 채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간호사 두 명이 곁에 있던 수납 테이블을 밀어내자마자 의사가 철제 의자를 번쩍 집어 들고는 유리문을 향해 내던졌다. 그러나 유리문은 깨지지 않았다. 두꺼운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의자만 휘청하니 찌그러졌을 뿐 유리문은 흔들리지도 않았다. “뭐야, 이거? 방탄유리야?”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라는 걱정스런 눈 빛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분명 영적 현상이었다. 조금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문을 막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연희는 울고 있는 수아를 달래면서 한편으로 오른손에 힘을 주다가 마음을 돌렸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지금처럼 웅성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묘기(?)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아라가 쥐고 있던 조요경에서 다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라가 울먹이 며 외쳤다.

“또!”

병실 창문 앞이 어두워지면서 검은 물결 같은 것이 다시 모여 드는 낌새가 보였다. 연희는 사람들에게 어서 물러나라고 소리 치고는 아라와 수아를 끌고 급히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어디 한 곳도 안전한 데가 없는 판이었지만 형체도 없고, 정체도 모르 는 검은 물결과 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층을 올라가니 꽤 튼튼해 보이는 철문이 보였다. 무슨 수술 실 같았다. 일단 여기가 낫겠다고 여긴 연희는 그리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그곳은 창문이 하나도 없고, 출입구가 문 하나뿐이 라 오히려 버티기 쉬울 것 같았다. 도망치지 못할 바에야 최대한 안전한 곳이 나을 듯싶었다.

수아를 내려놓고 연희는 닥치는 대로 주변의 물건들을 쌓아 문을 막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런 상황에서 수아는 언제 울음 을 그쳤는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뭐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안심해, 안심…………!”

“근데 언니는 왜 울어? 울지 마.”

아라가 수아를 달랜다고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다가서자 수아가 말했다. 수아는 사태를 깨닫지 못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인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아가 아라의 등을 톡톡 두들겼다. 아라는 기가 막히 고 자존심도 좀 상했지만 성질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연희는 더 이상 문 앞에 쌓을 것이 없자 수아와 아라를 끌고 구석에 앉힌 다음 자신이 그 앞을 막아서듯 버티고 섰다. 연희는 몹시 긴장해 있었고, 아라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이나 시간이 흘렀는데도 밖은 조용하고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희는 이상하게 여겨져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조용한걸?”

그러나 아라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아라는 아직도 환 하게 빛을 발하는 조요경을 연희에게 내밀어 보이며 고개를 저 었다.

“아직 있어. 그것도 가까이에.”

연희는 그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서워…….”

아라가 중얼거렸다.

“준후 오빠도…………… 아무도 없는데…..”

연희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현암이나 신부님이나 준후나 하다못해 승희라도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지금은 연락조차 취할 수 없는 상태였다. 비록 그들이 이 장소에 없고 금방 달려올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이렇게까지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아라는 제법 당찬 아이였으나 아라로서도 준후나 누가 부근 에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기괴하고도 거대한 존재와 마주친 것 은 처음이었다. 연희는 수많은 일을 겪었지만 자신의 능력은 거 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공포감이 엄 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아라가 연희에게 물었다.

“그게 ・・・・・・ 뭘까?”

서 있던 연희가 앉으면서 대답했다.

“모르겠어. 그게 뭐든 간에 이상해.”

“뭐가?”

“아까 말야. 왜 막혔던 문이 갑자기 열렸을까? 문이 안 열렸다면 우린 꼼짝없이 그것한테 잡혔을 텐데.”

“응.”

아라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불쑥 말했다.

“근데 아까…………… 유리 조각은…… 어떻게 된 거지?”

아라는 아직 발음이 좀 어눌했지만 제법 길게 말하자 연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모르겠어. 유리 조각을 덮어썼다면 우린 모두……………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때 연희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탕탕 두드리는 바람에 연희는 그만 그 생각을 접 어둘 수밖에 없었다. 탕탕 소리가 들리자 아라는 흠칫 놀랐지만 연희는 침착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가지 마, 언니!”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희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까 그게 문을 두드리지는 않을 거야. 아마 사람이겠지.” 연희는 문에 나 있는 작은 창문으로 바깥을 살폈다. 언뜻 보니 아까 같이 도망쳤던 의사와 간호사들인 것 같았다. 그것을 확인 한 다음 연희는 문을 열었다.

“지금 도대체…

연희가 더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손을 뻗 어 연희의 옷자락을 잡았다. 깜짝 놀란 연희가 먼저 의사의 팔을 비틀어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나 이번엔 간호사들이 매달 리는 바람에 연희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 언뜻 보인 그들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언니!”

아라가 뛰어오면서 간호사 한 명을 발로 찼다. 그사이에 연희 는 곧 놀란 정신을 가다듬고 또 한 명의 간호사를 밀쳐내며 일어 섰다. 방금 집어 던진 의사가 어느 틈에 다시 일어나 연희의 뒷덜미를 잡으려 했다. 보통 사람이 그렇게 가차 없이 집어 던져졌으면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텐데, 그들은 충격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아라는 안간힘을 쓰면서 간호사들을 마구 퍽퍽 때렸지만 그 들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 아라의 양팔을 잡았다. 일단 잡 히고 나자 무술 실력이 좀 있는 아라로서도 어른의 힘을 이겨 낼 수 없었다.

그것을 보고 연희가 다시 간호사 한 명을 집어 던지는 순간의 사가 달려가 수아를 번쩍 안아들었다.

“수아야!”

연희는 순간적으로 눈에서 불이 번쩍 튀는 것 같았다. 연희는 다짜고짜 몸을 날려 의사의 등을 호되게 걷어찼다. 하지만 의사 는 몸을 휘청거리면서도 수아를 끝내 놓지 않고 비틀거리며 문 밖으로 달음질치려 했다.

연희가 자세를 가다듬고 의사를 잡으려 하는데, 이번에는 뒤 에서 간호사가 쇠 쟁반으로 연희의 머리를 내리쳤다. 땡 하는 소 리와 함께 연희가 비틀거리면서 넘어지자 아라는 몹시 놀랐다. 죽을힘을 다해 자신을 잡고 있는 간호사의 손에서 간신히 벗 어난 아라는 비틀거리는 연희를 끌고 구석으로 물러섰다. 그사이 의사는 수아를 안고 문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이 왈칵 열리면서 의사의 몸이 허공에 붕 뜨더니 털썩 땅에 처박혔다.

“누구……?”

놀란 아라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연희의 눈에 수아를 받 아 안은 낯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아니었는 데, 키가 무척 크고 건장했으며 눈매가 날카로웠다. 그 남자는 몸을 날려 연희와 아라의 앞에 서 있던 간호사 두 명을 한 손으 로 한 명씩 잡아 가볍게 휙휙 던져 버렸다.

맞아도 아픔을 모르던 간호사들이 그 남자의 손에 닿자마자 전혀 기운조차 쓰지 못하고 기절해 버리는 듯했다. 그 사람은 뚜 벅뚜벅 두 사람 앞으로 걸어와 연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연희가 머뭇머뭇 묻자 남자는 간단히 영어로 말했다. “위험해요, 위험, 당신은 위험한 일에 말려서는 안 됩니다.” 남자는 미소를 지으면서 연희를 일으켜 주려는 듯 내민 손을 흔들어 재촉했다. 일단 연희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남 자는 깜짝 놀라면서 연희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연희도 찌 릿한 느낌을 받았다. 연희의 손에 심어져 있던 부적의 힘이 그 남자의 힘과 충돌을 일으킨 것 같았다. 남자도 상당한 수준의 영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죠?”

연희의 물음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수아를 안은 채 뒤로 돌 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멀뚱히 있던 수아가 갑자기 으앙 울기 시작했다. 연희가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그 애를 내려놓아요!”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제 이 아이에 대해서는 잊으시오.”

연희와 아라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연희는 곧 남자에게 달 려들었고, 아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요경을 꽉 쥐고 눈을 감았 다. 순간 뚜벅뚜벅 걸어가던 남자가 비틀거렸다. 남자의 발에 뭔 가 걸린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한쪽 손을 휙 내둘렀 다. 허공에서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이 펑펑 터져 나갔다. 남자의 등 을 향해 달려들던 연희는 그 모습에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정령들이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수아는 정령들의 여왕 같은 존재라고 했 다. 보이지 않게 수아를 지켜 주는 것은 정령들이었다. 아까 유 리 조각이 날아오는 것을 막아 주고, 문을 열리게 해 주었던 것 이 정령들의 힘인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이 남자의 앞을 가로 막은 것도 정령들임이 분명했다. 지난번 박 신부와 함께 보았던 정령들의 힘은 가공할 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남자는 얼마나 강한지 그런 정령들의 힘을 먼지라 도 털어 버리는 것처럼 툭툭 떨쳐 냈다. 아무튼 수아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지난번의 아랍인과 마찬가지로 이 남자도 수아의 힘을 노리는 자임이 분명했으니까.

연희는 남자가 보이지 않는 정령들을 상대하는 사이, 있는 힘 을 다해 남자의 등줄기 한복판을 노리며 주먹을 뻗었다. 만만치 않은 연희의 주먹이 등줄기 한복판에 명중하자 남자도 휘청거렸 다. 그러나 남자는 넘어지지 않고 화난 눈으로 휙 뒤를 돌아보면 서 외쳤다.

“까불지 마!”

남자는 휙 몸을 돌리며 연희의 뺨을 찰싹 후려쳤는데, 어찌나 기운이 셌던지 연희는 그만 눈앞이 캄캄해져 순간 벽에 몸이 부 딪혔다. 그것을 본 아라는 조요경을 붙들고 애를 쓰다가 그만두 고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법 멋지게 날아차기를 시도했지 만아라도 남자의 손바닥 한 방에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계집애가 감히 대들다니!”

그 와중에도 정령들이 수없이 달라붙는 듯 남자는 계속 손을 휘둘러 댔다. 정령들은 남자의 손에 의해 수없이 터져 나가면서 도 끈덕지게 달려드는 듯했다. 연희는 눈앞이 캄캄했지만 포기 할 수 없었다. 다시 주먹을 쥐고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막 손을 뻗는 순간 연희는 아까 오른손의 부적의 힘과 남자의 힘이 충돌 을 일으켰던 것이 기억났다. 남자의 손바닥이 날아드는 순간 연 희는 손을 펴 남자의 손바닥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찰싹 맞추었 고, 동시에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기운을 내뿜었다.

“아앗!”

효과가 있었다. 준후의 부적에서 비롯된 기운과 남자의 힘은 상충되는 듯 연희의 기운이 밀려들자 남자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물론 고통을 받는 것은 남자만이 아니었다. 연희도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이라도 쓰지 않으면 남자를 물리칠 수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자……………!

연희는 눈앞이 아릿아릿해지고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지 독한 고통을 버텨 내려고 애를 썼다. 그때 아라가 저만치 떨어져 있던 아까 연희가 맞았던 쇠 쟁반을 집어 들고 달려들어 남자의 머리를 인정사정없이 갈겨 댔다.

남자와 연희는 마치 자석의 극이 붙고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상태였기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덕분에 아라는 꼼짝도 못 하는 남자의 머리를 마치 이불 털듯 무자비하게 두들겨 팰 수 있 었다.

쾅쾅 소리를 내면서 쇠 쟁반이 원래의 형체를 잃을 정도로 찌 그러졌으나 남자는 수아를 놓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남자의 얼굴이 퉁퉁 붓고 코피가 터졌지만 눈에는 오히려 노기가 치밀 어 올라 더욱 무서워졌다. 때리는 아라가 더 지칠판이었다.

다시 한 대를 치는데, 손에서 힘이 빠져 이미 우그러질 대로 우그러든 쇠 쟁반이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아라가 헉헉대면서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아라를 없애 버릴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아라는 너무 겁이 난 나머지 손가락을 세워 남자의 눈 주위를 확 할퀴어 버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근근이 버티던 남자가 비명 을 지르며 수아를 놓아 버렸다.

아무리 강건한 사람이라도 눈을 긁히고 버틸 수는 없었다. 남 자가 쓰러지자 연희의 손도 풀렸다. 연희는 그동안의 고통이 너 무지독했던지 핑그르르 돌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아라가 깜짝 놀라 보니 연희는 얼마나 심한 고통을 참았는지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수아도 연희가 걱정되는지 연희에게 달라붙었다.

“언닛! 어서!”

아라는 연희를 잡아끌었으나 연희는 꼼짝도 할 수 없는 것 같 았다. 아라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연희를 끌고 갈 기운이 없었 다. 그렇다고 혼자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아라는 연희를 흔들었지 만 연희는 희미한 신음 소리만 낼 뿐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의 식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넘어졌던 남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라의 눈에 들어왔다.

“악!”

아라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남자를 때리려고 뭔가 잡히는 것이 없는지 손을 휘저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급한 나머지 주먹으로라도 남자를 쳐서 기절시키려 하는데, 어느새 자신의 손목은 남자의 억센 손아귀에 덜컥 잡혀 있었다.

남자는 잔뜩 얻어맞아 퉁퉁 부은 얼굴에 무서운 눈을 하고는 아라의 손목을 잡은 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가 되자 아라는 꼼짝달싹할수 없었다.

남자는 아라를 무서운 눈으로 보면서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어 댔다. 욕지거리를 하는 것 같았으나 아라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수아의 겁먹은 눈동자의 동공이 커다 랗게 확대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야말로 정말 죽었구나 싶 었다. 그 순간 남자가 별안간 몸을 움찔하면서 아라를 놓쳤다. 아라는 땅에 쿵 떨어지면서도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주위 를 둘러보았다. 쓰러지지 않고 몸을 휙 돌린 남자의 등에는 불에 탄 자국이 있었다. 그러더니 저쪽에서 조금 가느다란 불길이 획 휙 날아들었다. 저만치를 보니 복도 저편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 았다.

“준후 오……!”

엉겁결에 아라는 입을 열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언뜻 보 고는 잠시 준후로 착각했지만, 그 사람은 준후가 아니라 준호였 다. 예전의 준후와는 비슷한 모습이었으나 지금의 준후는 훨씬 커버렸으니까.

준호는 오만상을 다 쓰면서 있는 힘을 다해 오행술을 부려 불길을 쑥쑥 손에서 뿜어내고 있었다. 남자는 조금 놀란 것 같았으 나 곧 정신을 가다듬은 듯 겁도 없이 손으로 준후의 불길을 퍽퍽 받아 내 옆으로 쳐 내 버렸다.

몇 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준호가 준후의 지도를 받아 오행술 을 이만큼 사용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아쉽게도 위력 은 너무도 약했다. 준호는 기를 쓰고 불길을 두어 번 더 쏘아댔 지만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준호를 비웃듯 불길을 쳐 내면서 준 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준호가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거야! 얼른 도망가!”

“어디로?”

“아무튼 어서! 아이구!”

준호는 이제 한계에 달한 것 같았다. 하지만 도망을 치려고 해 도 도망칠 곳이 없었고, 도망칠 여건도 되지 못했다. 아라는 수 아의 겁먹은 큰 눈망울과 쓰러진 채 신음하는 연희를 바라보았 다. 이번에는 아라 쪽에서 독기가 살아났다.

“너 죽고 나 죽자!”

아라는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면서 남자의 다리를 노리고 달려 들었다. 아라가 몸을 날려 남자의 다리에 부딪치자 의외로 거대 한 체구의 남자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벽에 호되게 머리를 찧었다. 그때 준호가 쏘아 낸 오행술의 불길 한 줄기가 하필 남자의 머리카락에 맞아 불이 붙었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데굴데굴 굴렸고, 그 틈을 타 준호는 아라와 연희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어서!”

다짜고짜 준호는 연희를 부축해 어깨에 메면서 외쳤다. 연희 는 여전히 몽롱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몸을 일으켰다. 아라도 수 아를 번쩍 들어 안고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어 그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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