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3화 – 종말의 서곡 3 : 고립
고립
어떻게 올라갔는지도 모르게 계단을 오르자 네 사람 모두 숨 이 턱 끝에 닿았다. 연희도 계단을 올라가면서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일단 어느 빈 병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숨을 돌린 뒤 연희가 물었다.
“준호구나……. 어떻게…… 어떻게 알고 왔지?”
준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말하자면 좀 길어요. 오늘 혹시 사부가 없나 하고 배에 갔거든요.”
“배?”
“아지트 말이에요.”
“아, 응. 그런데?”
“그런데 그 근처에 수상한 사람이 얼씬거리는 것 같았어요. 아까 그 남자 말이에요. 나는 좀 겁이 나서 가만 보고 있었는 데……………. 배에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까 어디론가 가는 것 같았 어요. 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망설이는데…………….”
“그런데?”
“신부님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얼른 이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 셔서 온 거예요. 근데 신부님은 어디 계세요?”
“신부님?”
아라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끝을 올렸다. 신부님이 라면 박 신부를 말하는 것 같은데, 박 신부가 도대체 어디에 있 단 말인가? 그러나 그 말을 듣자 연희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 면서 말했다.
“그랬구나. 정령들이 한 거야.”
“정령들요?”
궁금해하는 두 사람에게 연희는 수아를 보호하는 정령들이 사 람의 모습을 흉내 내어 나타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 다. 연희는 지난번에 그런 일을 겪은 뒤라 짐작이 되었다. 정령 들은 의문의 남자가 수아를 강제로 데려가려 하자 남자를 막으 려 했지만 남자의 능력이 대단해 막을 수 없었다.
그러자 정령들은 그나마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준호에게 나타난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외국이나 지방으로 가 버 려 데려오려야 데려올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검은 물결 같은 거. 그 안개 비슷한 게 병원을 덮고 있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지?”
“물결? 안개? 몰라, 난 그냥 들어왔는데?”
“그냥 들어와? 문이 열렸어?”
“응.”
준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대답하자 연희와 아라는 놀라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의사나 환자 같은 사람들도 있었어?”
“아뇨, 아무도 없던데요.”
“문도 안 잠겨 있었고?”
“전혀요.”
그 말을 들은 연희는 급히 몸을 일으키다 몸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띵해져 비틀거렸다. 아라가 얼른 부축하려 했으나 연희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러면 어서 나가자. 여긴 지옥이나 마찬가지야.”
“근데 검은 물결이란 게 뭐예요?”
준호가 궁금해하자 아라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안보는 게 나아.”
네 사람은 다시 일어섰다. 준호가 연희를 부축하려 하자 아라는 준호를 밀어내고 수아를 준호에게 떠넘겼다. 준호는 아라의 행동이 너무 쌀쌀맞아 조금 화가 난 듯 말했다. “난 목숨을 걸고 도와주러 왔는데, 왜 이래?”
“그건 고맙지만 난 너 싫어. 좀 떨어져 줘.”
연희가 듣기에도 아라는 조금 지나칠 정도로 쏘아붙였다. 그 러나 준호는 대꾸하지 않고 그냥 입을 꾹 다문 채 수아를 안아 들고 아라를 뒤따라갔다. 병실에서 나와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 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문득 툭 하면서 병원 내의 전기가 모두 나가 암흑천지가 되었다.
네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지만 아무도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연희는 부축하는 아라의 손을 떼어 내고 앞장서서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 외에는 온통 암흑 이었다. 손으로 벽을 더듬어 가며 계단이 있는 곳까지 왔으나 계 단 밑은 마치 검은 구멍처럼 캄캄하기만 했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니 아까의 남자가 또다시 나타나지 않을 까아라는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이번에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근데……… 아까그놈은 뭐지? 언니, 그놈이 다시 나타나면……… 언니, 그 검은 것도 없어졌다는데 여기 그냥 숨어 있자. 응?”
아라가 말하자 연희도 용기가 나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글쎄.”
그때 준호에게 안겨 있던 수아가 외쳤다.
“안돼! 난 싫어! 여기 무서워! 무서워!”
연희가 재빨리 수아의 입을 손가락으로 막으며 말했다.
“쉿! 쉿! 수아야, 착하지? 어둡다고 걱정하지 마.”
수아는 계속 얼굴을 흔들어 대다가 연희의 손가락을 떼고는 말했다.
“어두워서 그런 거 아냐. 여기 …………… 뭐가 있어! 너무 많이 ……………무서워, 잉.”
“뭐가 있다구 그래?”
“많아. 많아. 너무너무 많아……………! 무서워!”
수아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다른 세 사람은 머리털이 쭈뼛 솟 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박 신부도, 현암도, 준후도, 승희 도 옆에 없었다. 보통 사람에 비해 뭔가 특별한 네 사람이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 빠지고 보니 정말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아라는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덜덜 떨었고, 준호도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 같았지만 흰 한복 소매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캄캄했다. 게다가 사람의 인기척조차 없는 흰 벽 으로 가득 찬 병원. 수아의 말대로 무엇인가 튀어나와도 전혀 이 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 남자도 지금쯤 정신을 차리고 그들 을 찾아다닐지 몰랐다. 그리고 아까 보았던 검은 물결 같은 것이 다시 들이닥친다면?
연희는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이를 악 물고 참았지만 아라나 준호나 수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연희는 서둘러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판단해 보려고 애 썼다.
그때였다. 저만치 복도 끝에서 아주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난, 난 정말…….”
“쉿!”
아라가 왈칵 두려움을 느끼는 듯 말하자 연희는 급히 아라의 입을 막았다. 그런 연희의 손도 촉촉이 젖어 있었다. 연희는 모 든 신경을 귀에다 집중했다. 병원 복도는 양쪽 끝에 비상계단이 있었다. 그런데 저쪽 계단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발소 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수가 늘어나는 것 같았다. 하 나・・・・・・ 둘…… 그러다가 대여섯 명, 다시 수십, 수백 명의 웅성 거리는 듯한 발소리가 되었다. 수없이 많은 무엇인가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듯했다.
수아가 다시 끙끙거리며 연희를 재촉했다. 겉으로 보기에 수 아는 평범한 아이였고, 정령들이 섬기는 것 외에는 특별한 능력 이 없다고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정령들의 여왕이니만큼 남다른 예감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을까?
“수아야 저게 뭐지? 혹시 정령 같은 거 아냐?”
아라가 묻자 연희는 재빨리 아라에게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수아 본인은 정령이나 무엇이건 간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수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난 몰라. 정령이 뭐야?”
“아냐……………. 아무것도. 어쨌든 저게 뭐건 간에 …………… 우린 여기 있어서는 안 돼!”
연희는 결단을 내리고 아라와 준호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조 금씩 더듬으며 시커먼 심연 같은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 마 바깥의 희미한 불빛이 창문으로 비쳐 복도는 보였지만 비상 계단은 완전한 암흑 속이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작은 발소리는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 다. 비록 하나하나는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수백, 수천을 헤아리 는소리였으며 마치 물결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네 사람은 감히 입을 열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죽을힘을 다해 어두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사이의 시간 은 그야말로 수십 년 같았다.
마지막 계단을 내딛고 나자 병원 정문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그러나 문 쪽을 본 순간 연희를 비롯한 모두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병원 문 앞에는 아까의 의사와 간호사, 환자 등등이 모두 한데 엉켜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죽은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가 시체 같아 보였다. 으스름한 달빛 아래 쓰러 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누구도 선뜻 발걸음을 옮길 수 없 었다.
그러나 연희의 귀에는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있었다. 연 희의 본능은 그것이 더 위험할 것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것은 무수한 숫자인 듯, 이제는 발소리가 아니라 파도치는 듯한 소리 를 내며 다가왔다. 아까의 검은 물결, 수아를 지키던 정령들조차 막아내지 못한 검은 물결을 생각하자 연희는 몸을 추슬렀다.
“가자. 어서!”
연희가 떨리는 손으로 준호에게서 수아를 받아 들며 말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참으려고 애쓰던 아라가 주저앉았다.
“나, 난 못가………….. 난…… 난…….”
아라는 아래턱을 덜덜 떨면서 간신히 말했다. 준호는 주저앉 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 상태였다. 그러나 연희에게 안긴 수아 는 어서 연희에게 가자는 듯 연신 뒤를 바라보며 연희의 어깨를 두들겼다. 수아를 안아 든 연희 역시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 여 죽을힘을 다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 들은 모두 죽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라가 움직이지 못한 채 울먹이며 부르자 연희는 작지만 단호하게 외쳤다.
“빨리 와, 아라야!”
“못・・・・・・ 못 가겠어……………”
“아라야, 어서! 준후는 이보다 훨씬 심한 경우도 다 겪어 냈어! 이까짓 걸로 주저앉으면 어떡해!”
준후를 들먹이자 역시 효과가 있었다. 그러자 준호도 용기를 내어 아라를 잡아끌면서 재촉했다.
“빨리!”
그 말을 듣자아라는 조금 기운이 나는 듯 억지로 몸을 일으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희는 초조한 마음으로 두 사람과 문 중간 쯤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벌 떡벌떡 몸을 일으켜 연희와 수아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악!”
아라가 가장 먼저 기겁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연희도 몹시 놀 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재빨리 몸을 돌려 달려드는 사람 한명을 발로 차 냈다. 준호도 놀라서 연희에게 달려들려는 사람 한 명의 다리를 걸어 다시 넘어뜨렸다.
그러나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연희와 수아를 향해 십 여 개나 되는 손들과 초점이 풀린 번득거리는 눈동자들이 다가 들었다. 그때까지 떨고만 있던 수아가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누가 좀 도와줘요!”
갑자기 휙 하는 바람이 일면서 연희의 주변에 둘러섰던 사람 들이 와르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냥 넘어진 것이 아니라 아 예 원형으로 둥글게 멀찌감치 밀려나 버렸다. 수아가 소리를 치 자마자 그렇게 된 것으로 보아 정령들의 힘이 분명했다.
연희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문으로 뛰어들었다. 몸으로 문을 깨고서라도 나갈 각오였지만 그다지 두껍지 않은 얄팍한 유리문 은 마치 철벽같아 연희는 호된 충격만 받았다. 하마터면 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문이!”
준호가 아라를 끌고 연희에게 달려오면서 외쳤다.
“내가 올 때는 안 그랬는데!”
그때 아라가 중얼거렸다.
“근데………… 밖이 왜 저래?”
연희나 준호 모두 문이나 문 안의 살벌한 광경에만 관심이 있 던 터라 문밖이 훤히 보이는데도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었다. 유리문 밖의 모습은 정말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분 명 이곳이 조금 변두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내에 있는 병원인 데, 바깥 광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먹물 같은 것이 공 기를 꽉 메우고 있는 것처럼 창문이며 유리문 등이 모두 시커멓 기만 했다.
“아까 그거야! 병원을 완전히 덮어 쌌어!”
연희가 다급하게 외치는데, 넘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꾸물꾸물 기계처럼 몸을 일으켰다. 할 수 없이 연희는 준호와 아라를 부르 고수아를 안고서 계단쪽으로 향했다.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계단 위쪽에서 누군가 소리치며 달려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라서 보니 수아를 데려가려 했던 남자였다.
“엄마!”
그 남자를 보자 아라가 제일 먼저 기겁을 했다. 비록 네 사람 이지만 그와 맞서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연희는 몸을 돌려 정문 쪽으로 향했지만 그쪽에서는 무엇에 홀렸는지, 아니면 조종 을 받는 것인지 모를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떡해요!”
준호가 외치자 연희는 이를 꽉 물고 말했다.
“차라리 이쪽이 나아! 닥치는 대로 밀어 버리고 통과하자!”
연희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 사이로 달려 나갔다. 그러면서 두세 명을 치고 차서 넘어뜨리기까지 했 다. 준호는 헐렁헐렁한 택견 동작을 응용해 사람들의 손을 용케 피하면서 빠져나갔다. 아라는 준호의 뒤에 붙어 따라갔다. 그러 면서 아라도 두어 명의 손을 쳐내면서 간신히 빠져나갔다.
그때 뒤에서 남자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영어로 하는 소리라 아라와 준호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연희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연희는 놀라서 하마터면 그 자리에 멈춰 설 뻔했다. 천만 뜻밖에도 남자는 제발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도・・・・・・ 도와줘요! 제발!”
그 소리가 너무도 애절하게 들려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을 간 신히 헤치고 나온 다음 연희는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놀 랍게도 꼭두각시가 된 사람들이 남자를 공격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 사람들을 뿌리치려 애썼으나 아까 준호와 아라에게 공격당한 것 말고도 어디에서 다쳤는지 팔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 그대로라면 사람들에게 당하고 말 것 같았다. 아라가 달려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있는 연 희에게 외쳤다.
“언니, 뭐 해!”
“저 사람이……………”
아라가 다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속임수면 어떡해?”
“아냐, 그대로 두면 위험해!”
아라도 연희처럼 그때까지 저 남자가 이 모든 기현상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설령 그렇 다고 해도 자신들을 공격했던 자가 아닌가?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연희가 망설이는 사이 남자는 드디어 기운을 잃은 듯 쓰러져 사람들 속으로 파묻혀 갔다. 그때 준호가 말도 없이 휙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남자를 끌어내려고 꼭두각시가 된 사람들과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그것을 본 연희도 가만있을 수 없어서 아라에게 수아를 얼른 맡긴 다음 같이 달려들었다. 이에 아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뭐 해, 언니! 그냥 내버려 둬!”
하지만 연희와 준호가 그 남자를 구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 이자 아라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혼자 남은 수아는 잠시 겁에 질린 듯 그 광경을 보다가 다시 잉잉 울기 시작했다.
수아가 울음을 터뜨리자 갑자기 강한 기운이 휘몰아치면서 연 희 등과 뒤엉켜 싸우던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뒤로 나가떨어졌 다. 또다시 정령들이 도움을 준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 쪽 계단 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내려와!”
아라가 고함을 지르면서 먼저 빠져나와 수아를 안았다.
“그 사람 내버려 둬!”
“그냥 죽게 둘 순 없잖아!”
아라가 악을 쓰자 연희도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어떻게………….”
연희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아라에게 말했다.
“신부님도, 현암 씨도, 준후도, 누구라도 이 사람을 그냥 버려 두지는 않을 거야. 어떤 상황이라도 말야.”
그 말에 아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에도 계단참에서 웅성 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주변에 기분 나쁜 공기가 가득 찼 다. 아라는 발을 굴렀으나 연희와 준호는 그 남자를 결사적으로 질질 끌며 간신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라는 초조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까 내려온 계단은 그 이상한 것들이 가득할 것 같았고, 남자가 내려온 반대편 계단에 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문은 철벽같 이 잠겨 있었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어디로 가?”
연희가 외쳤다.
“아래로! 아래로라도 가!”
“거기로 가면 더 갈 데가………………”
“거기 말고는 갈 데가 없어!”
연희와 준호가 남자를 끌고 나오자 아라도 얼른 수아를 다부 지게 고쳐 안았다. 그리고 계단 아래로 마구 달음질쳐 내려갔다. 그 남자는 팔과 다리와 어깨까지 온통 상처투성이라 피로 범벅 이었다. 뭔가에 쥐어뜯기거나 물린 것 같은 작은 상처들이 수도 없어서 준호의 흰 한복과 연희의 옷은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지하로 내려가자 아주 튼튼한 철문이 보였다. 아라가 그 문을 열고 연희와 준호는 남자를 끌면서 간신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 때 계단이 갑자기 시커먼 기운으로 가득 차는 것이 보였다.
아라는 끔찍해서 문을 쾅 닫아 버렸고, 연희와 준호도 문에 달 라붙어 필사적으로 문의 고리들을 잠갔다. 문은 몹시 튼튼했고, 빗장도 여러 개라 믿음직했다.
문을 닫고 나자 지하실 내부는 빛 한 점 없는 암흑 속이 되었 다. 아라는 주위가 너무 어두워 불안한 마음에 조요경을 꺼냈다. 조요경은 여전히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눈 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연희와 준후의 얼굴을 대강 알아볼 수 있 게 되었다.
“도대체 이 지하실은 뭐 하는 곳일까?”
아라가 중얼거리다가 문득 시체실 같은 곳은 아닐까 싶어 진저리를 쳤다.
‘아냐, 아냐. 아닐 거야. 시체도 없잖아? 으음.’
검은 물결도 무서웠지만 시체실도 못지않게 무서웠다. 아라는 그런 잡념을 거두려고 연희에게 말을 건넸다.
“이젠…… 이젠 어떻게 하지?”
연희는 몹시 초조한 얼굴이었지만 나름대로 침착해지려 애쓰고 있었다. 연희는 일단 수아를 안아들고 말했다.
“수아야, 언니 부탁 하나 들어줄래?”
수아는 너무 무서운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흑흑 울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뭔데?”
“여기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주세요. 해 보렴, 응?”
연희는 예전에 박 신부가 했던 것처럼 정령들의 힘을 빌리려 고 말한 것이었고, 수아는 순순히 그렇게 말했다. 연희는 빗장들 을 다시 만져 보았다. 신기하게도 빗장들은 마치 용접된 것처럼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연희는 전에 눈으로 확인한 바 있 었지만 정령들의 힘은 과연 대단했다. 그런데 그 정령들이 어쩌 지 못하는 검은 물결 같은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버틸 수 있을까? 달리 방법이 없으니.’
그사이 준호가 어떻게 지압이라도 했는지 남자가 신음 소리와 함께 서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남자가 일어나자 아라는 찔끔 해서 뒤로 돌아앉았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연희에게 말 했다.
“날 구해준 게 당신이오?”
“아뇨. 여기 아이들도 도와주었어요.”
남자는 조금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특히 아라와 눈 이 마주치자 남자는 무심코 아직도 부어 있는 얼굴을 슬쩍 어루 만져보았다. 아라는 찔끔해서 준호 뒤로 한 발짝 물러섰으나 남자는 곧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아라의 손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조요경을 희한하 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남자는 상처가 상당히 심한 듯 신음하고 있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평온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아 자제심이 극도로 강한 사람 같았다. 아직 밖에서 별다 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자 연희는 안심을 하고 남자에게 물 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이름은?”
“왜 묻소?”
연희는 남자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다소 딱딱한 악센트를 느끼 고는 독일어로 물었다. 아무래도 남자가 모국어에 더 익숙할 것 이고, 혹시라도 아라나 준호가 학교에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알 아들으면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길까 염려된 때문이었다.
“독일인인가요?”
“그렇소. 독일어도 할 줄 아오?”
“예.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왜 저 아이를 데려가려고 했죠?
당신은 왜 여기 나타난 거죠?”
“말할 수 없소.”
“지금도 저 아이를 데려갈 생각인가요?”
연희가 차갑게 묻자 남자는 눈을 빛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소. 일단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요.”
“그러면 또 저 아이를 데려가려 할 건가요? 여기서 빠져나간 다음에는?”
남자는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내가 왜 그러겠소. 아깐 뭔가 오해가 있었을 뿐이오.”
남자는 조금 딱딱하게 말했으나 오히려 가식이 없어서 거짓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연희가 다시 물었다.
“당신도 검은 지하드나 칼키파 같은 곳의 사람인가요?”
남자는 놀랐다는 듯 연희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당신은 그 이름을 어떻게 아시오?”
“저 아이와 같이 있으려니,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더군요.”
“그렇군. 그렇다면 당신은 팍 신부나 리헤남, 장주누와 아는 사이요?”
“좀 알죠.”
“역시・・・・・・ 당신도 기이한 능력이 있더군. 더구나 당신은…”
남자는 무엇인가 말할 것처럼 연희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짓고 말을 멈추었다.
“뭐죠?”
“아니오,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은 이야기요.”
연희는 궁금했으나 그냥 자신이 더 궁금해하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당신이 검은 지하드나 칼키파가 아니라면 혹시 성당 기사단원인가요?”
“성당 기사단에 대해서도 알고 있소? 흠.”
남자는 조금 생각을 하는 것 같았으나 말을 하지는 않았다. 연 희가 다시 말했다.
“잘 들으세요. 우린 여기 꼼짝없이 갇혔고, 어떻게 될지 몰라 요. 하지만 당신도 보통 사람은 아니니 이럴 때는 어떻게든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중 일은 어떻든 간에 당장 떼죽음을 당하면 아무 소용없잖아요. 그렇죠?”
“맞는 말이오.”
“그런데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 해도, 아까 우리를 공격했는데 도 불구하고 목숨까지 구해 줬는데 자신의 정체조차 전혀 밝히 지 않는 사람과 서로 의지할 마음이 들까요? 그쪽은 다 알고 있 는 모양인데, 이쪽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연희가 조목조목 따지자 남자는 부끄러운 듯했으나 그래도 정 체를 밝히지 않았다.
“그것만은 밝힐 수 없소. 그러나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힘을 합하겠소. 맹세하겠소. 나는 칼 하겐이라는 사람이 고, 이것이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전부요.”
“하지만 하겐 씨, 당신은 왜 이 아이를 노렸던 거죠? 그걸 설명하지 않는 한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할 수 없다는 듯이 하겐이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겠소. 나는 원래 저 아이에게는 관심이 없소.”
“뭐라구요? 그럼 왜?”
“내가 한국, 그것도 여기 온 목적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요. 리헤남이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가 내가 원하는 것일 뿐, 저 아이의 존재는 알지도 못했소.”
“무엇인가라면….? 혹시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왔다는 점토 판?”
“당신도 알고 있군. 당신은 아무래도 그들과 상당히 가까운 관 계인 것 같은데?”
“잘 아는 사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점토판을 찾는 걸 보면 성당 기사단원이 분명한 것 같은데요?”
“아니오. 내가 어디의 사람인지 밝힐 수는 없지만 성당 기사단 원은 아니오. 좌우간 나는 그들이 사는 곳을 방문했지만 그들을 만날 수 없었소. 한참을 기다려 보았지만 올 것 같지 않더군. 그 렇다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내가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이오? 그 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나는 몹시 곤란해지고, 또 다른 일도 있기 때문에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판이었소.”
“점토판을 빼앗으러 온 것인가요?”
“아니오.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가능하면 그것을 우리 에게 넘겨 달라는 말을 하러 온 것이지, 싸우러 온 것은 아니오. 솔직히 나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니까.”
“그들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군요.”
“동양의 옛 가르침에 이런 말이 있지 않소? 적을 알고 나를 알 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다 이긴다는.”
“백 번 다 이긴다는 게 아니고 백 번 싸워도 위태해지지 않는 다는 거죠. 아무튼 좋아요. 계속해 보세요.”
“그러다가 나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소. 여기, 서울에 이 상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던 거요.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 소. 그들은 이러한 영적인 이상 현상을 퇴치하는 일을 주로 하 니, 마침 서울에서 나타난 이런 현상을 놓칠 리 없을 것이다. 영 적인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에 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 라고 말이오.”
남자의 말은 사실같이 느껴졌지만 연희는 그래도 불안해 준호 를 불렀다.
“준호야, 여기 이 남자가 아까 아지트에 갔던 게 확실하니?”
“예.”
“거기서 뭔가 난폭한 짓은 하지 않았니? 안을 뒤진다거나.”
“아뇨, 그러지는 않았어요. 그냥 한참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 리다가 뭔가 깊이 생각을 하더니 이 병원으로 향한 거예요. 나는 수상해서 조용히 뒤를 따라오다가 병원 입구에서 신부님을 만나서 들어오게 된 거구요.”
“그래, 알았다.”
연희가 다시 남자에게 말했다.
“좋아요. 그런데 왜 다짜고짜 저 아이를 데려가려고 했죠?”
“내가 처음 병원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이상한 기운이 그렇게까 지 강하지 않았소. 그러나 병원에 들어오니 그 기운은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소. 나는 이 안에 있는 누군가가 영적인 힘을 사용하 고 있는 것이라고 봤소. 그 힘이 너무 강해졌다고 느끼고 보니, 이미 나갈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거요.
나는 당황했소. 그래서 이건 일종의 함정이며, 저 검은 안개는 누군가가 불러낸 것이 틀림없다고 여긴 거요. 그러던 중 당신들 을 만났는데, 당신들에게서는 영적인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소. 특히 저 아이……………. 저 아이는 그야말로.”
하겐이 수아를 보며 말하자 연희는 하겐의 말을 잘랐다.
“됐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가 저 검은 것을 불러냈다고 믿 은 거군요?”
“그렇소, 나도 살아야 하니까. 처음에는 그런 짓을 하는 당신 들을 모조리 혼내 줄 생각이었지만 당신을 보니 그럴 사람 같지 는 않더군. 그래서 이 일은 당신들이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고, 저 아이의 잠재된 힘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 같다고 추측했소. 그래서 저 아이를 데려가려고 했던 거요.’
“만약 그랬다면, 저 아이를 데려가서 어쩌려고 했는데요?”
연희의 말에 하겐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만약 저 아이가 이런 큰일을 벌이는 거라면 그냥 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소.’
“당신은 어떻게………
“하지만 할 수 없소. 저 아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다치게 된 다면 어쩔 거요? 나는 그런 일을 당한 경험이 몇 번 있소.”
“아무리 그래도 아이를……………. 그러고도 죽어서 천당에 갈 것 같아요?”
그 말에 하겐은 슬픈 듯 중얼거렸다.
“이미 지옥 불에 탈 각오는 되어 있소. 그렇지 않았으면 이런 일에 뛰어들지도 않았지.”
연희는 하겐의 사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하겐의 생각 이 틀린 것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세상은 하겐이 말 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그리 고 그 희생을 치르기 위한 또 다른 희생. 죄로 죄를 덮는 악순환의 연속. 그 때문에 세상이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그건 옳은 길이 아니에요. 현암 씨나 신부님이라면 그런 식으로 처리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방법이 어디 있겠소?”
“있어요. 항상!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언제나 옳은 해결책 은 존재하죠.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찾지 못하고, 나름대로 정 리해서 어서 끝내 버리려고만 해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한다고 그것이 옳은 것이 되는 건 아니에요.”
“비현실적인 이야기일 뿐이오. 그런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잖소. 그 전에 모두가 피해를 볼 텐데.”
“아뇨. 그 사람들은 그런 방법을 찾아내고야 맙니다. 내가 그 사람들과 친한 이유는 그들에게 신기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에 요. 그건…….”
그러나 하겐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좋소. 그러나 여기서는 그만합시다. 지금은 논쟁을 벌일 때가 아니지 않소?”
그 말에 연희도 이야기를 멈추었다. 하겐은 곧 표정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좌우간 이게 전부요. 나도 당신들에게 호되게 당했으니 벌을 받았다고 이해해 주시오. 이제 오해는 풀 렸소?”
하겐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신이 왜 그 점토판을 원하는지, 당신이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는 밝힐 수 없나요?”
“나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니 몰아붙이지는 말아 주시기 바라오.”
더 몰아붙인들 하겐이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아 연희는 살짝 한 숨을 쉬며 화제를 돌렸다.
“할 수 없군요. 그런데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다치게 했죠? 당신은 꽤 강한 것 같던데.”
하겐은 연희를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검은 안개……. 엑토플라즘 (Ectoplasm)*의 일종인지, 염체의 일종인지는 모르지만 지독하더군.”
“역시 그건 당신이 불러낸 것이 아니었군요.”
남자는 조금 쑥스러운 듯 씩 웃어 보였다.
“당연히 내가 아니오. 아까까지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불러낸 줄 알았소.”
“당연히 우리도 아니에요. 우리도 그것 때문에 갇힌 거라구요.” 그러면서 문득 무슨 생각이 들어 연희는 불안해졌다.
“그런데 ・・・・・・ 당신, 아까 위층에서 정신 나간 사람들에게 붙들렸죠?”
“그랬소.”
*영체
물질의 형태를 띠어 나타난 것. 실례를 보면, 보통 우윳빛 심령이 에 꿈틀거리는 부정형의 형태를 지닌 물질로 스스로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고 의 사 표현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위의 사람들을 정신 나가게 만든 것은 누구죠. 하겐 씨?”
하겐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당신들이 그런 것 아니오?”
“우리가 왜 그러겠어요!”
우리는 그럴 능력도 없다고 하려다가 연희는 재빨리 말을 삼 켰다. 아직 하겐을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 자신들이 무능력하다 고 공연히 실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직접 겨뤄 본 하겐도 대강은 눈치챘겠지만.
하겐은 곰곰이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우리 말고 다른 자도 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그자가 저 검은 안개를 불러낸 것 아닐까요?”
하겐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 하지만 저 안개는 너무도 강력하오. 만약 염체나 에너지의 일종이라면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내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힘이오. 그렇다고 엑토플라즘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특성 이 다르고, 무슨 부유령의 집단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꼭 집단이 라고 보기에도 그렇고……………”
말하다 말고 하겐은 몸서리가 쳐지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 다. 그러나 연희는 하겐이 몸소 그 검은 안개를 겪어 보았고, 뭔 가짚이는 것이 있는 것 같아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저 검은 안개는 누가 불러낸 거죠? 그 정체는 뭐고요?”
“나도 모르오.”
연희는 지치지 않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짐작 가는 것도 없나요?”
하겐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말했다.
“저것과 비슷한 것은 보지 못했소. 일종의 부유령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무슨 말이죠?”
“저 검은 안개의 모습이나 느낌을 놓고 볼 때는 부유령과 흡사하오. 그러나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요.”
“왜 그렇죠?”
“부유령 하나가 저렇게 클 수 있소?”
“그러면 집단이 아닐까요? 하겐 씨도 아까 저것이 부유령의 집단이 아닐까 했잖아요?”
하겐은 고개를 저었다.
“부유령이 왜 부유령의 상태가 되는지 알고 있소? 강한 충격 이나 사념의 장애를 받아서 그렇게 되는 거요. 그렇다면 부유령 에는 그 영이 지닌 사념이 느껴져야 하는데, 저것은 그런 강한 사념이 느껴지지가 않소. 더군다나 저것이 집단이라고 한다면 각 부유령들의 사념이 모두 한데 엉켜 그야말로 머리가 깨질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법인데,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거요. 텅 빈 것같이 말이오.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소.”
“만약 인간의 영이 아니라 동물령이나 정령이라면?”
하겐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동물령이라도 사념의 정도는 더 심하면 심했지. 이렇게 약할리 없소. 그리고…….”
하겐은 슬쩍 수아 쪽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정령이라면 저 꼬마에게 덤빌 이유가 없지 않소?”
하겐이 아직도 수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자 연희는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이를 노릴 건가요?”
“그건 아니오. 좌우간 그냥 그렇다는 것뿐이오. 좌우간.”
하겐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며 다소 불안한 듯 사방을 찬 찬히 둘러보았다.
“여기 피신한 것이 잘한 일 같지는 않소. 당장은 어쩔 수 없었는지 모르지만.”
그러면서 하겐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연희가 하겐을 바라 보자 하겐이 연희에게 말했다.
“가급적 빨리 여기서 나갑시다. 여긴 피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오.”
그러나 밖으로 나가는 게 겁나서 연희는 하겐에게 물었다.
“왜요?”
“뭔지는 몰라도 저것들은 어둡고 밀폐된 곳을 찾아다니는 것 같소. 여기야말로 언뜻 보기에 숨기 좋은 장소일 것 같아도 어둡 고 밀폐된 장소가 아니오?”
“어떻게 알죠?”
하겐은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인상은 좀 험상궂고 덩 치는 큰 사람이었지만 미소를 지으니 아무리 보아도 악한 같지 는 않다고 연희는 생각했다.
“아까 나도 그런 데 숨었기 때문에 아오. 덕분에 이 꼴이 되었지.”
“하지만…………….”
하겐은 연희가 우물쭈물하면서 일어나려 하지 않자 말했다.
“힘을 합치자고 하지 않았소? 아까 당신들과도 겨뤄 봤지만 당신들이나 나나, 저것의 상대가 되지 못한단 말이오.”
그러면서 하겐은 자신의 양손을 펴서 연희에게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연희가 조금 더 눈을 크게 뜨고 보니 거기에는 언뜻 보아서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가 늘고 촘촘히 새겨진 복잡한 문양이 있었다.
“내 왼손에는 정령을 물리치는 어둠의 부호가 새겨져 있고, 오 른손에는 악령을 물리치는 빛의 부호가 있소. 지금껏 내가 이것 으로 물리치지 못한 영은 없었소. 하지만 저것들은 이것조차 듣지 않는단 말이오. 당신들 각각이 뭔가 재주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저것들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못할 거란 말이오.”
되짚어 보니 아까 연희의 오른손에 새겨진 준후의 부적의 힘 과 충돌한 것은 남자의 왼손에 새겨진 어둠의 부호였던 모양이 었다.
만약 준후가 연희의 왼손에 부적을 새겨 주었거나 남자가 왼 손에 빛의 부적을 새겼다면 아까 남자를 쓰러뜨릴 수 없었을 것 이다. 그랬다면 남자가 수아를 잡아갔을 것이고, 그렇다면 아까 남자가 당할 때 수아도 당했을지도………….
“그것이 이 근처에 있기는 하지만 다행히 아직은 좀 멀리 있는 것 같소. 지금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늦을지도 모릅니다. 서두르 시오!”
연희는 조금 멍한 상태에서 상념에 잠겼다가 하겐이 재촉하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차, 내가 뭐 하는 거야. 그나저나 어쩌지? 이 남자를 믿어 야하나 말아야 하나……………..’
연희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결국 하겐을 잠시 믿어 보기로 마 음먹었다. 아라와 준호와 수아는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로 하 겐과 연희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불안한 듯 바라보다가 연 희가 하겐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궁금해했다. 먼저 아라가 물었다.
“근데 언니? 저 사람………… 뭐라고 하는 거야?”
“우선 힘을 합해야지. 일단 밖으로 나가자는데.”
그 말을 듣고 준호와 수아는 선선히 몸을 일으켰지만 아라는 펄쩍 뛰었다.
“언니 미쳤어? 밖이 훨씬…….”
“저 사람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결국 하겐을 필두로 연희와 준호, 아라와 수아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섰다.
복도는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복도를 나서서 그들은 조심스 럽게 정문 쪽으로 향했다. 기껏해야 조요경에서 나오는 빛이 전 부여서 사오 미터 정도까지밖에 보이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조금 걸어가다 보니 저만치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어 렴풋이 보였다. 아까와 같은 광경이라 연희 등은 모두 긴장했다. 그러나 하겐은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조금 절뚝거리면서 걸어 갔다.
“저 사람들……………”
연희가 하겐에게 말하려 하자 하겐이 짧게 말했다.
“저들은 전부 죽었소. 시체들일 뿐이오. 아이들이 못 보게 하시오.”
그 말에 연희는 얼굴이 해쓱해졌다. 물론 아까처럼 이성을 잃 고 덤비는 것보다 나을지는 몰라도 시체들이 즐비한 곳을 걷기는 싫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불쌍하기도 했고…… 시체 주변에 낭자한 핏자국과 붉은 덩어리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와 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연희가 걸음을 멈추자 아라가 물었다.
“뭐라그러는 거야, 언니? 저 사람들 어떻게 해?”
“저 사람들・・・・・・ 전부 죽었대. 수아가 못 보게 눈 가리고. 너희 도 가급적 보지 마.”
기겁을 한 아라는 수아가 보지 못하도록 꼭 껴안은 채 준호의 뒷덜미를 잡고 걸어갔다. 준호는 뭐라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여전히 고집스러워 보일 만큼 입을 꾹 다문 채 연희를 뒤따라 걸 어갔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상황 은 더 비참하고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체들은 그들이 조금 전까지 움직이던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 로 엉망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고, 아예 박살이 나서 흩어져 버린 시체도 있는 듯했다. 연희는 너무나 끔찍한 광경에 욕지기가 치 밀었으나 간신히 참고는 아이들이 보지 않도록 다시 주의를 주 었다.
그런데 하겐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들을 여기저기 뒤적거리 면서 뭔가를 살피고 있었다.
“뭐 하는 거죠?”
연희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참으며 하겐에게 묻자 그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뭐가 말이에요?”
“이 시체들을 좀 보시오. 뭔가 이상하다고 여겨지지 않소? 왜 남자들만……………?”
그러고 보니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은 남자뿐이었다. 연희는 이상해서 물었다.
“왜 남자들만 죽은 거죠? 간호사 같은 여자들도 있었는데.”
하겐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들만 죽은 게 아니오. 여자들도 죽었는데, 여자들은 형체도 없이 찢겼소.’
“어….. 어떻게………….”
“나는 아까 그것에 한 번 휩싸였소. 나는 주술적으로 충분히 보호를 했고 상당히 단련된 몸인데도 즉사할 뻔했소. 그 검은 것 은 보통 사람이었다면 갈가리 찢겨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 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소.”
“그래도 설마…………. 남자들의 시체가 그냥 남은 이유는 뭐죠?”
“나도 이해가 되지 않소. 남자들의 몸이 특별히 더 단단해서 그 런 것 같지는 않은데. 여자들은 완전히 가루가 된 것 같군…………… 맞소. 시체의 파편을 보니 여자들이 맞군그래.”
그 말을 듣고 나자 사방에 흩어진 붉은 것들이 갑자기 확대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연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우억우억 욕지기를 했다. 하겐은 그런 연희에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분명 이 사람들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았소. 그런데 이 사람들 의 상태로 봐서는 아까 그 검은 것에 당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을 조종한 자도 그 검은 것에 대해서 역시 모른다는 건가?”
하겐은 혼잣말처럼 이야기했으나 연희는 욕지기를 참으려 애 쓰는 와중에도 그 말을 모두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정문 쪽도 희 미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겐은 복도 모퉁이에서 조심 스럽게 정문 쪽을 들여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보시오. 이상하군. 시체들이 문 쪽으로 일종의 원을 그리고 있지 않소?”
정문 부근에는 대여섯 구의 시체가 더 있었는데, 이 병원에 원 래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복도에서 죽은 사 람 외에는 모두 정문에 모여서 죽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하겐의 말대로 그 시체들은 정문을 중심으로 일종의 원 같은 것을 구성 하고 있다가 죽은 듯 보였다.
그 광경을 보며 하겐이 다시 말했다.
“아무래도 사람들을 조종한 주술사도 그 검은 것을 무서워해 서 자신이 조종하는 인간으로 일종의 벽을 친 것 같소. 그리고 빠져나간건지도……. 그나저나 왜 이리 어둡지?”
하겐은 조심스럽게 정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정문 밖이 간신히 보일 만한 자리에서 하겐은 우뚝 멈추어 섰다.
“오지 마시오!”
안 그래도 겁을 먹고 있던 연희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준호도 멈추었다. 주변을 보기 싫어서 준호 의 옷자락만 잡고 따라오던 아라는 준호의 등에 부딪히고 나서 야 멈추어 섰다. 그 와중에도 아라는 눈을 뜨지 않았다.
“뭐죠?”
“우린 나갈 수 없소. 아아…….”
“왜 그러는 거예요? 문이 잠겨 있나요?”
“아니오, 지금 문은 열려 있소. 그러나.”
하겐이 막 뭐라고 더 말하려는 순간 정문 쪽에서 검은 물결이 왈칵 밀어닥쳤다. 정문 유리가 박살 나자 하겐은 즉시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연희도 얼른 뒤돌아 달렸고, 준호와 아라도 달 렸다. 그때서야 눈을 뜬 아라는 주변의 시체들을 보고 입을 딱 벌렸으나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맨 뒤에 있던 아라와 준호가 이번에는 가장 앞서 달리고 있었다.
“어서!”
하겐이 뒤에서 소리쳤다. 언뜻 연희가 돌아보니 하겐은 뒤에 서서 양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요?”
아라가 외치자 연희가 독일어로 소리쳤다. 그러자 하겐은 손가락을 튕겨서 빛 같은 것을 사방에 뿌리면서 외쳤다.
“할수 없소! 아까 그 지하실로 돌아가요!”
그때 막 검은 물결이 밀어닥쳤다. 하겐은 조금씩 뒷걸음질하 면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들이닥치던 검은 물결은 하겐이 쳐 놓은 일종의 주술막에 걸려 잠시 지체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 고 하겐도 죽을힘을 다해 연희를 뒤따라 달렸다. 달리 도망칠 곳 이 없자 준호와 아라는 자연스레 지하실로 다시 뛰어들었고, 연 희와 하겐도 그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실로 하겐이 뛰어드는 순간 연희는 문 앞에 대기하고 있 다가 재빨리 문을 닫았다. 문을 잠근 다음 다시 수아를 어르고 윽박지르다시피 해서 문을 보강한 연희와 하겐 등은 헉헉거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하겐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연희보다 훨씬 더 힘겨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금 숨을 가다듬자마자 하겐은 문밖의 동정을 살피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소. 오 년 만에 처음 써먹는 강력한 주문인데도.”
하겐은 씁쓸히 웃어 보였다.
“도로 갇혀 버렸군. 아무래도 끝장인 것 같소.”
그 말을 듣자 연희는 암담한 기분이 되었다. 아이들을 쳐다보자 더더욱 암담한 기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희는 억지로 그런 기분을 떨쳐 버리려고 말을 꺼냈다.
“안 돼요.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하겐이 말했다.
“아무리 전기가 나갔어도 주변이 왜 이리 어두운지 모르겠소? 저 빌어먹을 것이 이 건물을 온통 에워싸고 있소. 제길! 문을 잠 근건 저 검은 것이 한 짓이 아니오! 분명히 정령들이 한걸 거요.”
“정령들이? 어째서?”
연희가 이상해서 묻자 하겐이 화가 난 듯 씩씩거렸다.
“멍청한 것들이지! 바깥이 위험하기 때문에 제 딴에는 사람 들………… 아니, 저 아이를 도우려고 한 걸 거요. 밖에 한 발자국만 디디면 금방 그 여자 꼴이 될 테니 말이오.”
“그 여자라뇨?”
“하라치. 검은 지하드에서 온 하라치 말이오. 난 그 여자를 알 고 있지. 상당한 주술사인데도…………….”
하겐은 이제는 다 틀렸다 싶어서 몹시 화가 난 것 같아 보였 다. 연희도 각오하는 심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라도 연희는 하겐을 진정시켜 보려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흥분하지 말아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죠? 하라치는 누 구고, 아까 왜 문밖을 못 보게 했죠?”
하겐은 씩씩거리다가 연희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고 아이들을 보더니 한숨을 한 번 깊이 내쉬었다.
“하라치는 검은 지하드의 여자 주술사요. 그녀도 이 병원에 왔던 모양이오.”
“그녀가 대체 왜요?”
“난들 어떻게 알겠소? 하지만 아마도 그녀는 저 아이를 노리 고 온 모양인데.”
검은 지하드 소속의 인물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연희 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요?”
“이 병원에 있던 사람들을 조종한 것은 그 여자의 짓이 분명하 오. 그 여자는 흑주술에 상당히 능한 편이오. 사람들 눈에 잘 띄 는 편도 아니고 말이오. 하지만 저 검은 것의 상대는 못 되지. 아 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거요. 그래서 아마 그 여자도 공포에 질 렸겠지. 아까 당신들과 내가 싸운 것처럼 그 여자도 나름대로 자 위책을 강구하려고 사람들을 조종하는 주술을 쓴 걸 거요. 그건 아무리 검은 지하드라도 함부로 쓸 수 없는 사악한 짓이거든.”
“그랬나요?”
“좌우간 그녀도 도망칠 생각을 한 게 분명하오. 사람들을 방패 막이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한 거겠지. 정문과 복도의 시체들 이 그 증거요. 그래서 그녀는 일단 정문을 나서는 데 성공한 모 양이지만.”
“그런데요?”
“그녀는 죽었소. 아주 토막토막 잘게 나뉘어서 보기 좋게 진열 되어 있더군. 정문 앞에 말이오. 나도 시체를 여러 번 보았지만 절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꼴이오.”
이미 끔찍한 광경을 여러 차례 본 연희였지만 그 말에는 소름이 돋았다.
“그럼 그건 누가 한 짓일까요?”
“그 빌어먹을 검은 것이 아니면 뭐겠소? 그건 뭔가를 꾸미고 있소! 오……………. 신이여, 저렇게 엄청난 것이 어떻게 인간 세상에 돌아다니는 건지.”
하겐은 다시 흥분했다. 연희도 불안해서 금방이라도 미쳐 버 릴 것 같았다. 그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신부님이나 현암 씨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렇게 포기했을까? 아냐 그렇지 않아. 침착………… 침착해야 해……………. 그러면 뭘 하 지? 내가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잖아…………. 그러면………… 그 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연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보려고 애썼다. 일단 중요한 것은 박식해 보이는 하겐이나 검은 지하드의 주술사도 그 검은 것이 어떤 존재인지 정체조차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래. 일단 그게 뭔지 알아내야 해. 그리고 그게 왜 사람들을 해치고 날뛰는 것인지 알아야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어.
연희는 하겐에게 물었다.
“저 검은 것은 대체 뭘까요, 예? 일단 뭔지 알아야 대처할 길도 생길 수 있을 거 아니에요?”
하겐이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나라고 그런 생각을 안 한 줄 아시오? 하지만 모르겠소! 사람 인 것 같은데, 또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또 수천, 수만・・・・・・ 아니, 수십만인 것 같은데 의식은 하나뿐이고. 도대체 그런 것이 어떻 게 생긴단 말이오?”
“잠깐만요. 그것은 여자들을 더 미워하지 않나요? 그게 무슨 단서는 안 될까요?”
“여자를 미워한다고 갈가리 찢어 버리고 해부하고 싶어 한단 말이오? 더군다나 저토록 끔찍한 악의와 적대감에 가득 찬 그런 존재가 어떻게 수십만씩 있을 수가 있소? 더구나 자신이 살해당 한 정도의 원한이 아니라면 저 정도의 악의를 풍기지는 않소! 지 옥문이 열린 게 아니고서야 그런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모일 수 있단 말이오? 조금 아까 다시 느낀 건데, 저건 분명 하나의 존재 가 아니오! 수십만이 넘어 보이는 집합체 같단 말이오. 말도 안되지!”
“왜 말도 안 되죠? 수십만의 집합체도 생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흥분 때문에 두 사람의 언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당신, 바보요? 저게 인간 영의 집합체라고 합시다. 여자를 미 워하고 갈가리 찢고 싶어 하는 변태가 어떻게 수십만이나 있을 수 있소? 그리고 저게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 수십만의 의식이 똑 같이 통일될 수 있단 말이오? 개성이 저렇게 없고, 아는 게 그토 록 없는 영혼이 있을 수 있겠소?”
“그럼 인간이 아닌가 보죠!”
“인간이 아닌 존재가 어떻게 저렇게 강한 영력을 낸단 말이 오? 모기나 개미 떼라면 수천억이 모여도 저렇게는 안 돼!”
“그럼 대체 뭐예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나도 모르오! 모르니 미치겠단 거 아니오!”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시피 하자 준호와 아라는 아 까 검은 것이 덮쳤을 때보다 더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더구나 그 대화조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라 아이들은 더 더욱 불안해했다.
결국 그 상황을 깬 것은 수아였다. 수아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연희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언니 모야…… 싸우지 마……………. 앙…….”
연희는 얼른 수아를 안고 다독거렸다.
“미안해. 미안……………. 정말 미안해……………. 언니가 잘못했어…………”
그것을 보고 하겐도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어졌다. 하겐은 묵묵히 서 있다가 연희에게 말했다.
“미안하오. 내가 못난 꼴을 보였군. 아이들에게도 미안하다고 해 주시오.”
하겐이 중얼중얼하자 연희도 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 다. 아라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에 연희는 억지로 눈물을 훔치고 준호와 아라를 보고 말했다.
“포기하지 마. 응? 절대 포기하면 안 돼. 알았니? 우리 같이 궁 리해 볼까?”
연희는 준호와 아라에게 하겐과 나눈 대화를 들려주고 뭐 감 이 잡히는 게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라는 원래 그쪽에 무 지한 편이었고, 준호도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연희도 꼭 답을 구한다기보다는 아이들에게 무슨 생각이라도 하게 해서 무 서움을 덜고 포기하지 않도록 말한 것이었다.
둘은 자못 심각하게 고민에 잠겼으나 감이 잡히는 것이 없었 다. 아무것도 모를 수아까지 뭔가 궁리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연희는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져 아무것도 아 닌 것처럼 하젠에게 슬쩍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되더라도 아이들은 구하도록 해 봐요. 예?”
그러자 하겐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안 되오. 만에 하나 아이들은 포기하더라도 당신은 반드시 살아야만 하오. 알아들었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제정신이에요?”
“분명 제정신이오.”
“그런데 왜…………?”
하겐은 더욱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들으시오. 나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소. 나도 이래봬도 남자고, 아이와 여자가 우선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소. 굳이 따지 면 아이들이 위겠지만 당신은 안 되오. 당신은 반드시 살아남아 야만 해요.”
“왜………… 어째서…..?”
“그 이유는 말할 수 없소, 절대로. 좌우간 당신은 죽으면 안 되 오. 절대로 말이오!”
“미쳤나요? 내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아니, 설혹 내가 무슨 존재일지라도 아이들보다는…………….”
그때 문 저편에서 와글와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가까이 에 있던 하겐이 크게 소리쳤다.
“조심!”
다음 순간 정령들의 힘으로 수호까지 한 두꺼운 철문이 쾅 소 리와 함께 깨져 활짝 열렸다. 철문의 커다란 파편이 날아와 하마 터면 앞장서 있던 하겐이 맞을 뻔했으나 하겐은 간신히 그것을 피했다. 그러나 곧 틈도 주지 않고 시커먼 기운이 문을 통해 마 구 밀려들었다. 하겐은 비명을 지르며 피하려 했으나 금세 그 기 운에 휩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서워!”
수아가 고함을 치자 연희 일행 앞으로 희뿌연 빛줄기 같은 것 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이닥치던 검은 물 결 같은 것이 그 빛줄기 같은 반투명한 장벽에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장벽이 밀려서 뒤로 쑤욱 늘어났고, 연희는 아이들을 몸으 로 감싼 채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벽과 천장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는 듯 흔들리면서 돌가루 같 은 것이 마구 떨어졌다. 연희가 공포에 질려 눈을 떠 보니 희뿌 연 장벽은 연희에게 닿을 정도로 늘어나 있었지만 그래도 간신 히 버티고는 있었다.
정령들이 결사적으로 수아를 보호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벽의 여기저기가 밀어붙이는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터져서 구 멍이 날 것 같아 보였다.
갑자기 하겐의 몸이 그 투명한 벽에 퍽 소리와 함께 불쑥 들이 밀어졌다. 연희는 코앞에 피투성이의 얼굴이 들이밀어지자 그만 까무러칠 듯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안 그래도 하겐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는데, 지금은 얼굴에 피가 나고 있어서 더더욱 보기가 끔찍했다. 아라와 수아도 비명을 질렀다.
수아가 동요하자 벽은 휘청하면서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출렁거렸다. 두 힘의 가운데에 낀 하겐은 튕겨 나가 저만치 쓰러 져 버렸다. 아무래도 벽의 힘이 검은 기운을 이겨 내지 못하는지 벽의 한쪽 구석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준호가 말했다.
“제기랄! 모르겠다! 이거나……………!”
준호는 어쩔 줄 모르면서도 이를 악물고 그곳으로 오행의 불길을 내쏘았다. 위력적이진 않았지만 검은 물결은 주춤했고 밀어붙이던 기세도 조금 둔해지는 것 같았다. 예상 밖의 일이었 다. 연희가 재빨리 그것을 보고 외쳤다.
“불! 준호야, 불을!”
연희는 하겐이 저 검은 물결은 어둡고 밀폐된 곳을 좋아한다 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그 반대되는 불을 싫어할 것 은 당연한 이치였다.
“불? 그럼 화염진의 부적이 있어!”
준호는 어리둥절하고 있다가 재빨리 소매에서 부적 뭉치들을 우르르 꺼냈다. 일부는 준호가 만든 것이었지만 아직까지 준호 는 부적을 자유자재로 만들 정도의 솜씨가 없었기 때문에 상당 수는 준후에게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화염진의 부적이 있다는 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손이 떨려 부적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잠시 주춤하던 검은 물결이 또다시 밀려들어 벽 의 한구석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엄마!”
아라가 있는 쪽의 벽이 터져 나가려 하자 아라는 깜짝 놀랐으 나 이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들고 있던 조요경을 그쪽으로 들이 밀었다. 물론 조요경은 불을 내뿜는 물건이 아니었지만 최소한 빛이 나는 물건이기는 했다. 그러자 역시 그 부분의 검은 물결이 조금 주춤하면서 벽이 다시 스르르 메워졌다.
그때부터는 정신이 없었다. 연희는 오른손의 빛을 극도로 내 서 벽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구멍에 들이댔고, 아라도 조요경 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정말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준호는 그때까지도 화염진의 부적을 찾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 연희 앞에 또 하나의 틈이 벌어지자 연희는 그곳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런데 그냥 들이댄 것이 아니라 조금 냉정을 잃 고 지나치게 팔을 뻗은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육중하 게 밀어내는 힘의 감촉이 느껴져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연희는 화들짝 놀라 얼른 손을 떼었다.
연희가 그쪽으로 눈을 돌린 순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난 느낌이 손을 통해 연희의 마음으로 전달되었다. 라미드 우프 닉스인 연희에게는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심연의 눈이 있었 으므로 하겐 같은 술사도 알지 못한 그 존재와 접촉하는 순간 그 것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나를 미워하고 있어! 아니, 나만이 아니라. 이건・・・・・・ 이건!’
연희가 충격을 받고 잠시 멍해진 순간 검은 기운이 연희를 왈 칵 무서운 힘으로 밀어 버렸다. 연희는 밀려나면서 벽에 머리를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기절하고 말았다.
“언니!”
아라가 소리쳤으나 연희를 부축할 수는 없었다. 당장이 급한 지라 아라는 재빨리 그 구멍으로 조요경을 들이밀었다. 그러면 서 아라는 꾸물거리는 준호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이 등신아! 뭐 해!”
준호는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부적들을 마구 파헤치다가 간신히 화염진의 부적을 찾아냈다. 그리고 너무 급한 나머지 연 희와 아라에게 비키라는 소리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수인을 맺으면서 화염진의 부적을 사용했다. 벽 주변을 따라 무서운 불 길이 확 일어나면서 사방으로 둥글게 번져 원을 그렸다.
아라는 미처 경고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불길이 번져 나오자 기겁하면서도 불길을 무릅쓰고 연희의 쓰러진 몸을 잡아끌었다. 간신히 피하기는 했지만 연희가 팔을 약간 데이고 아라의 머리 가 조금 그슬렸다. 커다란 불길이 훨훨 솟구쳐 방 안이 환해지자 검은 물결은 움찔하면서 썰물처럼 뒤로 빠져나갔고, 그와 더불 어 반투명한 빛의 벽도 사라졌다.
준호는 화염진의 부적을 쥔 순간부터 그때까지 숨도 쉬지 못하고 있다가 비로소 푸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런 준호의 뒤통 수를 아라가 딱 소리 나게 후려갈겼다.
“이 밥통이! 누굴 태워 죽일 작정이야?”
“그럼 주술은 뭐 없어?”
“아까 봤잖아. 오행술밖엔………. 난 아직 워낙 약해서.”
아라가 준호를 원망스런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약한 게 자랑이냐? 준후 오빠라면……”
준호는 화가 나는 듯 언성을 높였다.
“내가 사부보다 약한 건 당연하잖아! 그러니 …………….”
그러다가 준호는 말끝을 누그러뜨렸다.
“좌우간 어떻게든 해 봐야지. 안 그러면 아까 그 남자처럼 죽을 거야.”
피투성이가 되었던 하겐의 얼굴이 떠올라 아라는 몸서리를 쳤 다. 당장은 불길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해 야 할까? 연희까지 기절해 버린 상태에서 막막하기만 했다. 아이 치고는 상당히 담담하게 지금까지 잘 버티던 수아도 연희가 기 절하고 나자 징징거리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떡해. 언니 죽으면 어떡해.”
수아가 울자 아라도 눈물이 글썽글썽해져 수아를 끌어안았다. 그것을 보던 준호는 입술을 깨물면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 고 뭔가 결심한 듯 아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여기서 나가자.”
“뭐?”
“이 불길은 오래 못가. 이것만 꺼지면 아까 같은 일이 또 벌어질 거야. 그러면 그때는 정말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
“그러면? 언니도 기절했는데 언니를 업고 뛰어서 도망이라도 다니리?”
“아까는 우리가 문만 생각해서 그랬는데, 꼭 문으로만 나가란 법은 없어. 정 안 되면 뛰어내리기라도 해야지.”
그러자 아라는 준호가 멍청하다 싶어 악을 썼다.
“문이 그냥 잠긴 게 아니잖아! 저것이 문도 안 열리게 어떻게 힘을 쓴 게 분명하다구! 창문은 열릴 것 같아?”
그러나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한 군데 있을지도 몰라. 아까 그게 문 부수고 들어온 거 봤지? 그러면 그게 들어올 때도 창문을 열고 들어오진 않았을 거 아냐. 저게 부수고 들어온 창문을 찾으면 되는 거야!”
그럴듯한 소리였지만 아라는 곧 고개를 저었다.
“저건 내 방 창문으로 들어왔어. 거긴 오층이라구. 거기서 뛰어내리면 성할 것 같아?”
“오층 정도라면 잘 뛰어내리면 죽지는 않아!”
아라는 기가 막힌 듯 준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는 그럴지 몰라도 이 애는 어떻게? 집어 던지니? 기절한 연희 언니는 어떻게 하구? 오층에서 집어 던질 거야?”
준호의 말문이 막히자 아라는 홧김에 준호에게 마구 퍼부어 댔다. 혀 수술을 한 것도 개의치 않았다. 입원하고 난 뒤 처음으로 마음껏 지껄이는 것 같아 시원하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넌 도대체 머리가 있는 거야? 두개골 속에 뼈만 꽉 찬 거아 냐? 넌 정말 모자라도 너무 모자라. 준후 오빠가 어쩌다 너 같은 걸 그냥 두는지 몰라. 도대체가…………”
아라가 마구 욕을 해댔으나 준호는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조개껍질처럼 버티고만 있었다. 그러자 아라도 조금 미 안해져 하던 욕을 멈추고 말했다.
“어쨌든…… 흠. 미안. 신경이 좀 날카로워져서.”
준호가 불쑥 물었다.
“너, 우리 사부 좋아하지?”
느닷없는 말이라 아라는 말문이 탁 막혀 버렸다.
“무, 무슨 소리야? 난데없이…………..?”
“말끝마다 사부를 들먹이는데…………… 뭐, 네 자유 의지이기는 하지만 언감생심, 꿈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물론 여기서 살아 나간 다음의 얘기이기는 하지만.”
“뭐? 이게 별소리를 다 해? 네가 뭘 안다고 나불거리냐, 응?”
준호는 아라를 외면한 채 말했다.
“사부는 그런 마음 조금도 없어. 나는 알아.”
“너 지금 나한테 욕먹었다고 복수하는거야? 왜 악담을 해, 응?”
아라가 대들자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고 나자 준호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가지?”
“네가 알아서 해! 그 잘난 사부에게 배운 게 정말 없어?”
“모르겠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무섭고……………..”
“정말 웃기네! 강아지처럼 사부 사부 하고 졸졸 따라다니더니, 막상 일이 닥치니까 꼼짝도 못하는 거야? 넌 이것밖에 안 돼?”
준호가 얼굴이 붉어지면서 시무룩한 표정이 되자 아라는 계속 준호를 닦달했다.
“우리 꼴을 좀 봐. 지금 꼼짝도 못하고 있는 이 꼴이란! 너희 사부는 지금까지 이런 일을 수도 없이 이겨 왔는데…………. 넌, 넌 뭐야!”
“나도 방법을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다구! 하지만!”
“애만 쓰면 뭐해! 이 등신아!”
“너는 뭐가 나아서!”
준호가 더 참지 못하고 대들자 아라는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눈꼬리를 치켜떴다. 그때 아라의 품에 있던 수아가 입을 여는 바람에 둘의 대화는 끊겨 버렸다.
“언니……. 저쪽에 아저씨 소리.”
“응? 누구?”
아닌 게 아니라 저쪽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라 는 무서워서 깜짝 놀랐다. 준호가 그 소리를 듣더니 아라에게 말 했다.
“아까 그 외국 남자인 것 같아. 죽지 않았나 봐.”
준호가 일어나자 아라는 놀라서 소리쳤다.
“어떻게 하려구?”
“밖에 두면 죽을 거야. 이리로 끌어들여야지.”
“불을 끄려구?”
“일부분만 끄는 방법도 있어. 죽게 그냥 둘 순 없잖아.”
준호는 뭐라고 중얼중얼 수인을 짚고 진언을 외웠다. 그러자 불로 된 고리의 한 귀퉁이가 꺼졌고, 준호는 그리로 나아가 쓰러 진 채 신음하는 하겐을 끌고 왔다. 아라는 하겐이 무서웠지만 그 렇다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게 놔두는 것도 못할 일이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겐은 거의 죽어 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아까 엄청난 기운 사이에 휩싸였기 때문에 여기저기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상 처를 입은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머리를 부딪힌 연희가 신음 소리를 내면서 몸을 조금 움직였다. 아라는 ‘언니, 언니’ 하고 불렀으나 연희는 눈조 차 뜨지 못했다.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킨 것 같았다. 연희는 뭐라 고 자꾸 말을 하려고 했다. 아라가 급히 연희의 입에 귀를 갖다대 자마자 연희는 다시 아득하게 정신을 잃어버렸다.
“뭐지? 방금 연희 누나가 뭐라고 했어?”
준호가 묻자 아라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기들한테 잘해 주라는 것 같아. 아마 나하고 저 아저씨 착 각했나 봐. 불쌍한 언니……………”
그때 다시 바깥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준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라도 기겁하며 수아를 꽉 끌어안고 쓰러져 있는 연희에게 매달렸다. 아까보다 더 무서 웠다.
“아이구…………..! 어떡해!”
아라가 발을 구르자 준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쪽 구석으 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약품을 담은 듯한 빈 상자들이 쌓여 있 었다. 준호는 그것들을 마구 끌고 와 계단 쪽에 쌓았다. 화염진의 부적도 다 써 버렸으니 직접 불을 지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을 듯 했다.
“불! 성냥이나 라이터 없어?”
준호가 외치자 아라는 답답해서 다시 발을 굴렀다.
“밥통아! 불이 어딨어! 있으면 아까 꺼냈지!”
그러다가 아라가 좋은 생각을 해냈다.
“오행술은 뒀다 뭐해!”
그러자 준호는 아 하면서 급히 수인을 맺었다. 그사이에도 바 깥에서 술렁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다. 금방이라도 깨어 진문을 통해 들이닥칠 것 같았다. 마침내 준호가 수인을 맺으면 서 손가락을 퉁기자 조그마한 불줄기 하나가 상자 쪽으로 뻗어나갔다.
“야호! 너 정말.”
아라가 환호성을 질렀다. 환상적인 준후의 술수와 비교해 준 호의 주술을 탐탁지 않게 보던 아라의 눈에도 지금 이 작은 불줄 기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불줄기는 상자에 옮겨 붙지 않 고 금방 꺼져 버렸다. 지하실에 쌓여 있던 상자라 습기가 차 있 던 탓이었다. 아라는 대뜸 짜증이 났다.
“……밥통! 어서…………!”
아라는 외치면서 급히 상자 더미로 달려들어 두꺼운 판지 조 각의 껍질을 벗겨 냈다. 그러는 사이 복도와 계단이 우릉우릉 흔 들리면서 검은 물결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아라는 미친 듯이 종이를 찢으며 비명을 질렀다.
“어서!”
다음 순간 준호가 뿜어낸 불줄기는 아라의 손에 들린 종잇조 각에 멋지게 옮겨 붙었다. 곧 박스 더미에도 불이 붙어 활활 타 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이 일어나자 다가오던 검은 기운은 불길 의 빛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듯,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됐다!”
아라는 기뻤으나 준호는 박스 더미가 얼마 가지 못한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상자는 상당히 많았지만 상자를 태우자 지하 실에 연기가 차올랐기 때문이다. 공기가 잘 순환되지 않는 곳이라 지하실은 금방 매캐한 냄새로 가득 찼다.
아라는 수아를 안고 불 뒤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그사이 준호 는 입술을 깨물고 뭔가를 궁리하더니 갑자기 쓰러져 있던 하겐 에게로 달려갔다.
“아……………. 왓츠…… 왓츠 위 머스트……….!”
준호는 혀가 돌아가지도 않는 영어로 하겐에게 자초지종을 설 명하려는 것 같았다. 일단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었으니 다소 박 식해 보이는 하겐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겐 은 준호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자 의아해하는 표정만 지을 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구! 답답해!”
아라도 답답한 나머지 되지도 않는 단어, 맞지도 않는 단어를 소리소리 지르면서 끼어들었다. 손짓 발짓이 다 나오고 온갖 흉 내를 다 내 가면서 둘은 필사적으로 하겐에게 저것들이 불을 두 려워한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난리를 쳤다.
연기와 불똥이 가득한 지하실에서 콜록거리며 두 아이가 쇼에 가까운 동작을 해 대는 것은 남이 보면 웃을 일이었지만 그들에 게는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한참 지나자 하겐은 비 로소 알아들은 듯이 보였다.
“오……………. 마인 고트…………….”
“알아들었나요? 두유・・・・・・ 두유 언더스탠? 그럼…………… 그다음 어떻게 해야지?”
“방법이 없냐고 물어봐!”
“방법……. 하우 메쏘드……………. 아이고 모르겠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구 해 봐! 얼른!”
“뭐라고…………… 뭐라고 해야지?”
“나도 몰라! 네가 나보다 더 배웠잖아!”
“왓…… 왓 위아 두잉 나우…………….?”
준호가 간신히 묻자 하겐은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말 했다기보다는 준호는 이렇게 알아들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저것이 불을 피한다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준호는 하겐이 말하자 내심 부르짖었다.
‘맞아! 횃불이라도 만들어 들고 휘저으면 나갈 수 있을지도 모 르겠다!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지?’
준호가 내심 쾌재를 부르는데 하겐은 연희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그 말을 준호는 이렇게 알아들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몹시 중요하다. 죽어서는 안 된다. 너는 남 자니까…………… 무슨 일이 있든 이 여자를 지켜 주어라. 세상의 흥 망성쇠와도 관련이 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너에게 내 모든 힘을 주겠다……………”
“하지만 어떻게 밖에 나간다고 해도 그게 쫓아온다면 어떻게……?”
“나도 모른다.”
“저걸 물리칠 방법은 없나요?”
“모르겠다…… 없는 것 같다…….”
“방법이・・・・・・ 없다구요?”
준호가 자기도 모르게 외치자 아라도 외쳤다.
“뭐? 그럼 끝장이란 말야?”
아라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리는 것을 보고 준호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일단은 불을 이용해 밖으로 나갈 순 있을 거 야. 그러면 어떻게든…………….”
그때 하겐이 갑자기 준호의 손목을 무서운 힘으로 꽉 움켜쥐 었다. 준호가 놀라서 손을 빼려 했으나 이미 다 죽어 가는 하겐 은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준호의 손을 꽉 쥐더니 자신의 손바닥을 갖다 댔다. 따끔따끔하고 화끈한 느낌이 손바닥에 전 해져 준호는 깜짝 놀랐으나 여전히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하겐은 준호의 손을 놓아 주었고, 준호는 손바닥이 얼 얼한 느낌에 영문을 모른 채 멀뚱히 하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아라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그 광경을 보고 만있었다.
하겐이 다시 힘없이 손을 뻗어 준호의 다른 손목을 잡고 한 번더 그런 행동을 되풀이하자 이번에는 차갑고 저릿저릿한 느낌이 준호의 손에 전해졌다.
그러고 나자 하겐은 무척이나 힘들었던 듯, 푸욱 한숨을 내쉬 고 뭐라고 독일어로 말했으나 준호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 었다. 준호는 무의식적으로 하겐의 기운이 거의 빠져나감을 느 낄 수 있었다.
“이 사람…………… 죽으려나 봐. 근데 나한테 뭘 한거지?”
준호가 멍하니 말하자 아라는 측은한 듯 잠시 하겐을 바라보 았지만 곧 주위를 둘러보며 울상을 지었다.
“큰일이야. 불이 꺼져 가.”
그러는 와중에 하겐은 자꾸 손을 저으면서 준호에게 연희를 데리고 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괜찮다는 듯 연달아 손을 저었다. 준호는 측은하기는 했지만 하겐의 당부가 워낙 엄 숙하게 여겨져 연희를 들쳐 업었다.
연희의 체중이 그렇게 많이 나가는 편은 아니었지만 키가 커 서준호는 거동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여기에 더해 준호는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박스 종이를 왼팔 겨드랑이에 끼워 넣고, 오른 손으로는 불붙은 종이를 들었다. 아라도 수아를 안은 채 종이를 들 수 있는 데까지 들었지만 한 팔로는 많은 종이를 들 수 없었 다. 그러자 수아가 말했다.
“나도 지고 갈게. 나도 뛸 수 있어.”
“안 돼. 수아야, 위험해!”
“아냐, 아냐. 괜찮아, 나도 할 수 있어. 나도 도울게.”
수아가 조그마한 손으로 종이를 쥐자 아라는 차라리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바지의 벨트를 풀어 수아에게 한쪽 끝을 꼭 잡고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오른손으로 불 붙은 큰 박스 종이를 하나 들고, 왼팔로 종이를 들 수 있는 데까 지 들었다.
준호는 연희를 업고 있었기 때문에 아라보다 종이를 훨씬 적 게 들 수밖에 없었다. 준호는 안 되는 영어로 하겐에게도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하겐은 완전히 탈진한 듯 말이 없었다. 손에 든 종이가 타들어 가자 아라가 재촉했다.
“안 갈 거야?”
“그럼………… 이 사람은 놓고 가야 하나?”
“할 수 없잖아. 너무 커서 지고 갈 수도 없어. 여기 그냥 있으면 전멸인데.”
“하지만…………….”
“언니 업고 갈 수 있겠어?”
“여차하면 뛸 수도 있으니 염려 마.”
아라도 종이 짐을 들쳐 안고 몸을 일으켰다. 하겐은 쓰러진 주 제에 미소까지 억지로 지어 보이며 어서 가라고 그들을 자꾸 재 촉했다. 그것이 멀리 간 것 같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걸음이 좀체 떨어지지 않았으나 결국 준호와 아라는 조심스럽 게 지하실을 나섰다. 아라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억지로 참고 앞장섰다. 손이 자유로운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되기 때 문이었다.
“정 안 되면 종이에 불을 붙여 뛰면서 하나씩 던지자.”
이렇게 말하고아라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자 아 라는 달리다시피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아라의 마음은 무거워져 갔다. 이래야 하는 걸까? 이래도 되는 걸까?
천행으로 정문 부근까지 왔는데도 검은 기운은 기척조차 없었다.
‘정말 운이 좋은가 봐. 그런데 …………..?’
아라가 짓눌러오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자신도 모르게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니 준호가 저만치 뒤에 이미 멈춰 서 있 었다. 아라는 뒤를 돌아보고 준호와 눈이 마주치자 힘없이 씩 웃 었다. 수아는 입을 다물고 뒤에 서 있었지만 수아도 무언으로 같 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 아저씨도 데리고 가자. 안 그러면…………… 매일 꿈에 나올 것 같아.”
아라가 멋쩍은 듯 말을 꺼내자 준호도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가 연희 누나 업을 수 있어?”
“죽기 살기로 업어야지, 뭐.”
맨날 아옹다옹하던 둘은 처음으로 무언중에 의견의 일치를 본 셈이었다.
“알았어. 넌 여기서 기다려.”
준호는 연희를 복도에 살짝 내려놓고 지하실로 달려갔다. 물 론 하겐을 데리러 가기 위해서였다. 아라는 불안하게 주변을 둘 러보았다. 그나마 있던 준호가 안 보인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마 음이 무거울 줄은 정말 몰랐다.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몇 년이 지난 것 같았다. 그사이 손에 든 종이가 다 타들어 가 얼 른 다른 종이로 옮겨 붙이는데, 저만치 뭔가가 보였다. 언뜻 보 니 환자를 옮길 때 쓰는 바퀴 달린 침대였다.
“맞아! 이거야, 이거!”
아라가 뛸 듯이 기뻐하면서 무서운 것조차 잊고 날듯이 달려 서 침대를 끌어오자 준호도 숨이 턱에 닿아서 올라와 있었다. 하 겐은 덩치가 크고 무거웠기 때문에 끌어오기가 힘들었던 것이 다. 준호도 아라가 끌어온 바퀴 달린 침대를 보고 좋은 생각을 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아라는 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왜 이리 조용하지?”
“글쎄. 안이 문제가 아니라 밖이 문제야. 잘못하면…….”
준호는 차마 조각조각 날 거라는 말까지 하지는 못했다. 아라도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준호는 연희와 하겐을 침대에 싣고아라까지 태운 다음 종이를 조금 더 실었다.
아라는 앞에서 양손에 불을 들고 준호는 침대를 밀면서 앞으 로 나가기 시작했다. 정문까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왔지만 정문 밖은 먹장같이 깜깜하기만 했다.
준호는 잠시 침대를 멈추고 앞에 있는 아라에게 물었다.
“각오했어?”
그 말에 아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응! 수아야 우리 나간다. 너는 눈 꽉 감아. 알았지?”
“알았어.”
두 사람은 같이 침대를 힘껏 밀었다. 수아가 앞에 타고 있었기 때문인지, 정령들의 힘이 풀려서인지 정문은 별 저항 없이 스르 르 밀렸다. 그 순간 준호와 아라는 있는 힘을 다해 손에 든 종이 횃불을 사방으로 위협하듯 휘둘러 댔다. 그러나 한참을 밀고 간 것 같은데도 어둠은 없어지지 않았다.
문득 준호가 고함을 질렀다.
“이게… 이게 전부 다!”
바깥이 단순한 어둠 속일 것이라고는 여기지는 않았지만 바깥 의 공간 전부가 검은 물결로 가득 차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아 니, 그들은 바깥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검은 물결 한가운데로 들 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캄캄함 속에서 무엇인가에 걸려 바퀴 달린 침대는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