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4화 – 종말의 서곡 4 : 재현
재현
준호와 아라는 미친 듯이 종이 횃불을 휘저으며 검은 물결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 냈다. 처음에는 가급적 그냥 돌파 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연희와 하겐, 그리고 수아까지 버려 두고 마냥 달아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까지 할 겨 를조차 없었다.
다행히 검은 물결은 불을 두려워해서인지 아까처럼 무시무시 한 힘으로 밀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일 초도 버티 지 못했을 것이다. 팔이 떨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잠시도 멈출 수 없었다.
검은 물결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발 딛고 선 땅을 제 외하고는 모든 곳이 음산하게 움직이는 검은 물결로 가득 차 있 었다. 그것들은 마치 준호와 아라를 희롱하듯 수없이 많은 얼굴 로 나타났다가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이 잔뜩 돋은 거대한 손이 나 가위, 칼 같은 모양으로 사방에서 찌르고 들어오려 했다.
종이가 다 타들어 가면 불을 옮겨 붙여야 했는데, 그때마다 사 방에서 검은 물결이 가늘게 찌르고 들어와 두 사람의 몸에 여기저기 상처를 냈다. 그리고 주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웅성거림과 고함 소리, 울음소리 같은 것들이 가득 차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저리 가! 저리 가! 이러지 마!”
아라는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불을 휘둘러 댔다. 준호는 소리 를 지르진 않았지만 아라보다 더 분주하게 불을 휘두르고 있었 다. 수아는 불안한 듯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종이 뭉치를 안고 넘어져 있었는데, 일어나기에 앞서 종이를 부지런히 아라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순식간에 종이 뭉치는 줄어들 었다.
급기야 아라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종이들을 사방에 마구 던졌다. 불붙은 종이가 날아간 한쪽 공간은 조금 비어 갔으나 아 라는 순식간에 빈손이 되었다. 그러자 그것들은 장난을 하듯 아 라를 마구 치고 지나가 아라는 삽시간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넘어져 버렸다.
주위는 알 수 없는 소음으로 가득 차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 다. 그러나 그것들은 치명타를 가하지 않고 아라를 가지고 놀듯 툭툭 치면서 몸을 이리저리 빙빙 돌렸다. 아라는 무서움도 잊을 정도로 화가 났다.
“좋아! 맘대로 해! 죽여! 죽여!”
아라는 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그때쯤 준호가 가진 종이도 떨어졌다. 준호는 눈을 감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면서 크게 외쳤다.
“이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 나만 죽여!”
아라와 준호, 둘 다 이제는 마지막 순간이 왔다고 체념했다. 그때 수아가 째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저리 가! 다들 가! 미워! 다들 가!”
그 순간 놀랍게도 주변의 검은 물결이 휙 뒤로 물러나면서 그 들을 중심으로 반구형의 빈 공간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속을 뚫 고 지나가는 기이한 소리가 있었다.
아라와 준호는 둘 다 이젠 죽었구나 생각하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이게・・・・・・ 무슨 소리지?”
준호가 중얼거리자 아라가 멍하니 말했다.
“울음소리야.”
그냥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기 울음소리였다. 그런 데 한두 명이 아닌, 수없이 많은 아기들이 울어 대는 합창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보통의 울음소리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처절 한, 듣기 어려운 울림이 그 안에 배어 있었다.
준호와 아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주변은 수없이 많은 작은 구멍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작은 구멍들이 모두 움찔 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그때 수아가 다시 외쳤다.
“너희도 나빠! 정말 나빠!”
“수・・・・・・ 수아야…………….’
아라는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며, 수아는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 말하는 거니?”
“아기, 아기들.”
“아기가 어디 있어?”
“아기가 많아.”
수아는 매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여기 전부”
그다음 순간 수아의 몸이 돌연 저쪽으로 밀려났다. 수아도 놀 라 비명을 질렀지만 아라가 수아를 잡을 틈조차 없었다. 수아는 순식간에 한쪽 벽을 뚫고 사라졌다. 그리고 사방의 벽은 다시 시 커떻게 닫혔고, 아까 나타났던 작은 구멍들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방의 벽은 둥글게 아라와 준호의 한 발자국까지 조여 들어온 다음 정지했다.
“뭐, 뭐지?”
준호가 외치는데, 불현듯 사방의 벽이 조여 들어왔다. 아라는 다시 놀라 비명을 질렀고, 준호는 쓰러져 있는 연희와 하겐을 막 아섰다.
불현듯 아라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준호는 남자라 감을 못 잡았는지 모르지만 아라에게는 감이 잡히는 것이 있었다. 아까 들었던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아라의 머릿속에서 정리되어 지나 갔다.
살해당한 인간……. 수십만……………. 다른 생각이 없는 동일한 의 식・・・・・・ . 그리고 연희가 말했던, 아기에게 잘해 주라던 말……………. 수아가 외쳤던 아기가 여기 많이 있다는 얘기…………. 그 생각을 하자 저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준・・・・・・ 준호야…………….”
“왜?”
“혹………… 혹시…………. 아까 이게 아기들 아냐?”
“뭐가 말야?”
“이거…………. 그리고 아까 검은 거…………. 아……………! 맞는 것 같 아. 어떡해……. 어떡해! 그게 수십만이 모인 거라고 했지? 맞 아! 그럼 이건 틀림없이 아기들이야!”
준호는 새파랗게 질린 아라의 얼굴을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기들이라고? 말도 안 돼.”
“왜・・・・・・ 왜?”
“아기들이 이렇게 끔찍한 짓을 할 리 없잖아! 그리고 어떻게 죽은 아기들의 영혼이 수십만씩 뭉쳐 다닐 수 있어? 그리고 아기들은 엄마를 좋아할 텐데, 왜 여자들을 참혹하게 죽인단 말야?
아기들이라면 남자는 죽여도 여자는 봐줘야지. 안 그래?”
그러나 아라는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안 그래・・・・・・ . 안 그럴 수 있어…………….”
“무슨 소리야?”
아라는 준호의 눈을 피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낙태 수술이….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
“뭐?”
“낙태 수술…………. 그래, 그거야…………. 난 들어 봤어. 칼을 넣어 서 태아들을 조각조각 자른대・・・・・・ . 칼을 넣으면 ・・・・・・ 닿지도 않 았는데도 태아들이 막 꿈틀거리면서 반대쪽으로 도망치려고 한 대…………. 그걸…… 그걸 산 채로 잘라서………… 한 조각씩 ・・・・・・ 꺼 내는…………… 꺼내는…”
아라의 말을 듣는 준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준호로서 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세, 세상에…….”
“난・・・・・・ 난 이제 이해가 가……………. 우리 ………… 우리 처지를 좀 봐. 그 애기들이랑 다를 것도 없어……………. 컴컴한 여기에 갇혀서 …………… 도망도 못 가고・・・・・・ 죽는 거야…………. 조각조각 나서 ・・・・・・ 나는 여자니까 더 조각조각 나겠지…………….”
“아냐, 그럴 리 없어!”
준호가 억지로 부정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칼을 들이댄 의사들을 미워해야지, 왜 여자를 미워 해? 여자 의사보다는 남자 의사가 훨씬 더 많잖아!”
아라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냐………… 아냐…………. 애기들도…………. 다…………… 다 안대. 엄마 배 속에서…………. 엄마가 자기를 죽이려고 결심한 걸・・・・・・ 아는 거야. 다 듣고…………… 무서워서…………… 사형수가 되는 거야.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못하고……………. 내가 아는 애들 중에도 그런 수술을 한 애들이 있어!”
그 말에 준호가 외쳤다.
“엄마 탓만이 아니잖아! 아빠는 뭐구! 또 그렇게 하라고 시키 는 건 딸을 싫어하는 시어머니 아냐? 또 저만 좋다고 마구 그런 짓 한 남자들이 더 나쁜 놈들 아냐! 그런데 왜…………….”
“애기가 다 아는 건 아니잖아. 엄마 배 속에 들어 있으니…………… 엄마가 생각하는 것만 느끼는 거지…………. 여자들만 불쌍해…………… 애기들도 불쌍하고……………!”
“하지만 어떻게 그런 아이가 수십만이나…………….”
부정하려고 소리치던 준호는 제 풀에 입을 닫았다. 준호로서 도 수십만이 무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준호는 세상 물정에 좀 어두운 편이지만 그 정도로 모르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는 낙태 수술이 자유다. 거기다가 미성년자들이 임신해서 마구 아기를 떼고 성생활은 점점 문란해져 아기 지우기를 밥 먹듯 하는 여자들도…………….
“맞아. 수십만이 아니라 수백만이라는 소리도 들었어. 그것도 일 년에만.’
준호는 차마 입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공허하 게 부르짖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 아기들은 어머 니의 자궁 속에서 피하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몸이 잘려 죽은 것 이다. 그런 아기가 수십만이 뭉쳐서 ………….
그리고 지금 준호와 아라가 갇혀 있는 이곳의 모습은 아기들 이 겪었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두 사람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아라와 준호는 서로 입 밖으로 채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상황을 도로…………?
다음 순간 준호의 눈에서 아라가 스르르 없어졌다. 그리고 아 라의 눈에서는 준호가 사라졌다. 둘은 제각기 다른 알지 못하는 공간 속에 갇힌 채였다. 방금 전에 옮겨졌지만 캄캄함 속이라 시 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연희는 머리를 부딪혀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의식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직접 눈을 뜨고 볼 수는 없었어도 귀는 열려 있었다. 물론 반쯤 몽롱한 상태였으나 귀와 감각으로 어느 정도 주변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검은 물결과 직접 부딪쳐 그 정체를 제일 먼저 알아낸 사람은 연희였다. 그러나 연희는 곧바로 정신을 잃어 말조차 할 수 없는 비몽사몽 상태가 되었다. 준호와 아라는 연희가 머리를 부딪혀 그렇게 된 거라 여겼지만 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검은 물결은 물리적인 힘 외에도 상대방을 환각 상태 비슷한 것으로 몰아넣는 힘이 있었다. 연희는 이미 그것과 직접적으로 손이 닿았을 때부터 현재의 준호나 아라가 처해 있는 상황에 빠 져 있었던 것이다.
연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원 자 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같이, 텅 빈 공간이었다. 분명 꼼짝달 싹도 할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는 몸이 움직였다. 하지만 몸이 움 직인다고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방 한 발자국 정도의 공간을 제외하면 시커먼 벽에 가로막 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은 몹시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다. 오른손에 들어 있는 부적의 힘에서 빛을 낼 수 있어야 하 는데, 그것도 되지 않았다. 그것도 보고 연희는 생각했다.
“이건 환상이구나…………. 아기들의 의식 속일까? 아니면 그 애 들이 만들어 낸 생각?’
연희는 퇴마사가 아니었지만 퇴마사들과 오랜 시간 같이 다니다 보니 그 정도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환상 속이라면 ・・・・・・ 대화도 될 거야.’
연희는 용기를 내어 아기들을 향해 말했다.
“내 말 들리니 너희들?”
순간 주변의 벽들이 웅성거리듯 잠시 흔들리다가 잠잠해졌다.
대답 같은 것은 없었다.
“너희들에 대해 알아 느낄 수 있었어…………….
그러나 역시 주위는 침묵뿐이었다.
“너희들은 왜 그러니? 무엇을 바라는 거지?”
주변이 약간 떨리면서 나직하게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전해져 왔다.
어머니의 뜻대로……..
어머니의 생각대로…………….
“어머니?”
연희가 묻자 주변은 다시 잠잠해졌다.
“너희 어머니가 누구지?”
우리 어머니……………
어머니……..
우릴 죽인 어머니가 아니야…………….
진짜 어머니………….
“진짜 어머니?”
연희는 아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되물어 본들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뭘 바라시는데?”
세상…….
이 세상……………
망해야 해…………….
없어져야 해……………
연희는 흠칫하고 놀랐다.
“어머니가 바라는 것이 …………… 이 세상의 종말?”
어머니가 바라셔…….
바라셔……………
세상이 어머니를 그렇게 만들었어…………….
연희는 상상외로 내용이 심각한 것 같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잠깐! 세상이라니? 어머니가 누구신데?”
어머니…………….
우리가 따르는 어머니………………
“너희의 어머니는 한 분일 리 없어. 너희가 이렇게 많은데, 너희의 어머니는 각각 다 다를거야!”
그건 어머니가 아냐…………….
절대 아냐………………
우리 몸을 만들었다고 어머니는 아냐……
그 몸도 도로 빼앗아 갔어…………….
우리와는 관계없어……………..
“그래서? 그래서 너희의 어머니들이 미워서 그러는 거야? 그래서 너희의 어머니들이 있는 세상을……………?”
아냐!
아냐…………. 그런 건 아냐………………
밉지만………… 그래서 그러는 건 아냐…….
“그럼 왜?”
어머니가 바라시니까…………….
진짜 어머니가…
우릴 받아 준…………….
진짜 어머니……………
연희는 혼란스러웠다. 이 가엾은 아이들의 영혼을 받아들여 주었다면 악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망하게 한다. 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렇다고 아기들의 영혼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걸까?
“어머니가…….. 너희의 진짜 어머니가 그렇게 시켰니?”
그건 아냐……………..
아냐, 아냐!
우리가 온 거야…… 그냥…….
연희는 좀 더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연희도 이 아 기들이 불쌍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희가 보기에 이 아기들은 분명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불쌍하다고 잘못 생 각하는 것까지 덮어 준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연희는 믿었다.
“너희는 불쌍해. 가엾어……………. 그러나………… 너희는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야.”
뭐가 잘못이란 거야?
왜 잘못이란 거지?
“너희가 불쌍하게 된 것은 분명히 어른들의 책임이 맞아. 그러 니 그 어른들이 만든 이 세상의 책임이기도 하지. 하지만…………. 어른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냐!
우린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지 않아……………
.우린 이미 오랫동안 세상을 돌아다녔어………………
세상 구석을 봐 왔어…………….
우리가 미워하는 건…… 이 세상이야……..
연희는 흠칫 놀랐다. 아기들이라서 단순히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아기들이 죽은 지 는 상당한 시일이 흐른 듯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면서 아기들 은 하나하나가 아닌, 전체로서의 의식과 생각을 지니게 된 것 같 았다. 물론 ‘진짜 어머니’의 생각이 반영된 것일 테지만.
“세상을 미워한다고……………?”
맞아……………. 우린 알아. 어른들도………….
그래, 어른들도 우리와 같았지……………
다 아기였어. 처음에는…………….
그런데…………….
그런데…………….
그 어른들이 우릴 없앴어…………….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귀찮다고…………….
걸리적거린다고……..
하지만 그 어른들도………….
아기였어…………….
그런데 왜 그랬을까?
우린・・・・・・・
우린…….
오래오래 생각했어…………….
아주 오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연희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이 아기들 앞에서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 어른들을 이렇게 만든 건 이 세상이야………….
죄는 이 세상에 있어…………….
세상이 모든 벌을 받아야 해………………
모두・・・・・・・
모두……
‘아아….’
연희는 하마터면 무심코 아기들의 의식에 동조할 뻔했다. 그 순간 연희의 눈앞에 낯익은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것은 오래전 리가 그녀에게 남겼던 염체의 빛이었다. 연희는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돌리려 애를 썼다.
‘그래・・・・・・ 그럴 수는 없어. 이 세상은・・・・・・ 세상은 그래도 아직은…….’
비록 이 세상이 죄악과 부패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여전히 연희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추억을 위해서라
도…………….
“안돼…………. 그래서는 안 돼.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우리도 알아…………….
잘못되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어머니의 뜻인걸……………
어머니의 뜻이야…………..
연희는 안간힘을 썼다.
“너희도 고통스럽지 않았니? 너희의 처지는 충분히 이해해. 하 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들에게 그런 죽음을 안겨 주는게 과 연 옳은 일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고통을 나눠 주는 게………….”
넌 몰라…………….
넌 아무것도 몰라・・・・・・・
우리는…………… 그들을 미워해서 죽인 게 아냐.
그런 게 아냐………
앞으로 그들이 범할 죄악에서………….
그들을 구하고
다가올 더 큰 고통에서……………
더 큰 분노에서…..
그들을 구한 거야……………
그 순간 연희는 뭔가 느껴졌다. 아기들의 모순을 발견한 것이다.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쳤다.
“거짓말!”
그 순간 목소리들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거짓말이 아냐..
아냐……
“그건 궤변이야! 너희는 증오심을 지니고 있어. 너희가 처했 던 처지는 가엾지만 지금 너희는 엉뚱한 곳으로 증오심을 전가 시키고 있어! 그리고 너희가 당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주려 하고 있어. 그건…… 그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너희 는・・・・・・ 너희는……”
연희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외쳤다.
“너희는 너희가 증오한다는 세상을 그대로 닮았어! 너희가 지 금 하려는 행동이 ………… 과연 너희를 죽게 한 그 행동과 뭐가 다르 지? 바보 같은 짓을 바보 같은 짓으로 갚으면 서로 없어지는 게 아니라 두 개의 바보 같은 짓이 될 뿐이야… 그리고…….. “
연희는 묵묵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불쌍해…………. 가엾게 죽은 것보다도…………… 스스로 타 락한 너희가 …………..”
문득 연희의 주변이 조용해졌다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웅성거 림으로 점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이 아기들은 모 두 공통의 생각으로 움직여 왔다. 그러나 연희의 말에 처음으로 분열이 일어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마음으로 대화를 해 왔던 터라 연희는 그들의 분 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십만이나 되는 아기들이 동시에 말하는 것 같아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엿들 을 수 없었다.
연희가 있던 공간의 빛은 점차 붉어지고 우르릉거리며 움직 였다. 그리고 연희 앞으로 무엇인가 무섭게 뻗어 나왔다. 연희를 해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연희는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렴・・・・・・ 그러나・・・・・・ 그러나 너희는 가엾어……………’
연희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무엇인가가 연희 앞에 나타나 연 희의 몸을 저쪽으로 떠밀었다. 연희는 깜짝 놀랐다.
그때 돌연 연희가 있는 곳이 밝아지면서 하겐의 모습이 드러 났다. 하겐의 머리 부근에서는 흰 후광 같은 것이 떠올라 내부를 밝게 비춰주고 있어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안은 현실이 아니라 의식 속의 세계일 텐데, 하겐이 어떻게 여기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하겐의 정신력 이 대단해서 과거 준후가 쓰던 동몽주(同夢呪)*와 비슷한 방법으 로 들어온 것인지도 몰랐다. 사방에서 은빛 나는 것들이 하겐과 연희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하겐은 정신없이 그것들을 쳐 내면서 연희를 보호하려고 애썼 다. 그러면서 하겐은 고함을 질렀다.
“안 돼! 너희는 틀렸어…………. 너희는………….”
다음 순간 하겐의 몸은 은빛 나는 물체에 퍽퍽 몸이 꿰뚫려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연희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하겐의 몸에서는 피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몸이 서서히 투명해질 뿐이 었다. 하겐은 점점 투명해지는 얼굴로 연희에게 소리를 쳤다.
“포기하면 안 되오! 여기는 의식 속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의지로……………. 의지로 버틴다면……….”
연희도 너무도 무서워 자신감을 잃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떻게……..”
하겐의 모습은 금세 희미해지더니 얼굴 윤곽만 아스라하게 남 았다. 하겐은 최후까지 소리를 질렀다.
“당신에게 달렸소! 이 애들은…… 이 애들은 당신을 없앰으 로써 세상을 엎으려고…………….”
“뭐라구요?”
“당신은・・・・・・ 결코 타락하거나……………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죽어서는…………….”
연희가 깜짝 놀라는데 하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사라 졌고, 사방에는 다시 암흑만 남았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 다. 사방에서 무엇인가 부딪치는 듯한 느낌이 자꾸 왔지만 직접 적으로 연희의 몸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도대체 뭐야……………. 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지……………?’
그 순간 사방에서 폭풍처럼 목소리가 밀어닥쳤다.
우리끼리 다투지 말자…………….
그래선 안 돼………….
시험이다……………..
시험해 보자…….
과연 저 여자의 말대로인지……………
*남의 꿈속을 구경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 주는 가상의 주문.
우리가 잘못이라면…………….
원망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우리와 같다면…………….
우리와 같이 원망한다면……….
우리가 옳아!!!
돌연 연희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준호는 몸을 떨었다. 불안해 몸부림을 쳐 보고 이리저리 뛰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분명히 알 수 있었 다. 도망갈 곳은 없다. 그리고 무엇인가 다가올 것이다. 자신의 몸을 조각조각 낼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아무리 몸을 비비 며 피하려 해도 피할 곳조차 없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것이 다 가와서………… 자신의 사지를 산 채로 잘라 내고 후벼 파서 꺼내려 고……..
준호의 눈에 저만치 하얗고 반짝거리는 무엇인가가 검은 벽을 뚫고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몸만큼이나 큰, 거대한….
준호는 헉 소리를 내면서 반대편 구석 벽으로 달라붙어 어떻 게든 피해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어느 틈에 자신의 팔다리가 커 다란 은빛 집게에 잡혀 있었다. 아니, 핀셋인가? 그리고 다가오 는 것은 메스. 아니면 거대한 가위………….
준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라도 어둠 속에 있었다. 불안하고 무섭기는 아라 역시 마찬 가지였다. 그러나 아라는 두려움보다 슬픔과 비통함에 빠져 있 었다. 아라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울었다.
‘왜 이렇게 되어야 하지? 왜 이런 일이 생기고 이런 결과로 풀려야만 하는 거지 …………? 그리고…………… 왜……………? 왜 하필 나 야…………? 왜 하필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해!’
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왜 우리한테 이러는 거야!”
그때 아라의 귀에 아주 나직한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부드러운 속삭임 같았지만 소름이 쫙 끼치는 소리였다.
세상은 없어져야 해…………….
이런 세상은 망해야 돼………….
없어지게 할 거야……
무너뜨릴 거야.
“그런데 ・・・・・・ 그런데 왜 하필 우리냐구!”
아라는 악을 썼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대신 웅얼거리는 목 소리가 수천, 수만으로 늘어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졌다. 귀로 들어와 고막을 울리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울리는 나지막 한 진동으로……………. 자신을 만든 사람, 자신을 키운 사람이 한숨 한 번 내쉬고 하는 소리.
지워야겠어…………….
할 수 없지……………. 떼야지……………
언제 생겼지? 나 참………….
쯧, 안됐지만 할 수 없지, 뭐………….
또 딸이야?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시어머니가 펄펄 뛰실 테니…………….
아라는 귀를 막았지만 애당초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니만치 막을 수가 없었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몸을 찢어 버릴 것처럼 고통스럽게…………. 아라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몸을 데굴데굴 굴 렀다.
***
차갑고 섬뜩한 칼날이 몸에 와 닿는 순간 준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준호는 준후를 떠올렸다.
‘사부라면 어떻게 할까?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준후라면 의연히 대처했으리라. 그러나 준호는 솔직히 무서웠다. 아무리 태연하려고 애써도 되 지 않았다.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너희가 당한 대로 돌려주고 싶으면 그렇게 해. 하지만……………난 무서워 ………. 나도 무섭다구! 이러면 ………… 이러면 나도 너희 만큼 아플거야!”
날카로운 것이 몸속으로 후비고 들어오는 순간 준호는 단말마 의 비명을 질렀다.
“아파…………!”
아라는 걷잡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무엇인가 소리치고 있었 다. 그러나 자신이 무슨 소리를 외치고 있는지조차 들리지 않았 다. 아라는 무서웠다. 아기든 뭐든 간에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존재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만약 입장이 바뀐다면 아라도 주 저 없이 같은 고통을 주고 싶어질 정도로…………. 그러나 아라는 울고 있었다.
그런 미움과 공포를 고스란히 똑같이 느끼면서 아라는 그와 동일할 정도로 슬프고 가엾고 불쌍해서 울었다. 조금의 가식이 나 거짓도 없이, 너무도 한탄스럽고 슬퍼서 아라는 엉엉 울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독한, 알 수 없는 것이 점점 차올라 아라를 그 속 으로 빠뜨려 갔다. 숨이 막히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갔다.
정신을 잃어 가는 두 사람의 뇌리에 누군가의 얼굴이 비쳤다. 그것은 어떤 여자의 얼굴이었다. 지극히 평범하게 생겼고 특별 히 곱지도, 밉지도 않으며 어찌 보면 우리나라 사람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외국인 같기도 한・・・ 우리들의 어머니야………….
우리 모두의 어머니야………………
이젠 이별이야…………. 우리는 떠나………….
떠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두 사람의 뇌리에는 이 말들이 수십만 번이나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