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5화 – 종말의 서곡 5 :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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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3권 5화 – 종말의 서곡 5 : 의문


의문

무엇인가 자신을 툭툭 건드리는 느낌에 준호는 몸을 꿈틀했 다. 매일같이 당연하게만 여겼던 몸의 감각이 새롭고 신기하게 여겨졌다. 준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내가 살았나 죽었나?’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수아였다. 수아가 조금 멍한 얼굴로 준호를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수・・・・・・아야?””

준호는 수아의 얼굴을 보자 아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준호 는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코앞에 아라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연희도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준호는 급히 아라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라는 준호와 달리 벌 떡 몸을 일으켰다. 아라나 준호나 아까 불을 붙여 던졌던 종이의 재를 뒤집어써 얼굴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는데 아라의 얼굴은 눈물 자국 때문에 더더욱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너 ・・・・・・ 살아 있었구나.”

준호는 다행이다 싶어 오히려 멍해 있는데, 아라는 부스스 눈 을 뜨자마자 멋쩍은 목소리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라의 볼에 다시 한 줄기 눈물이 훑고 지나가는 것을 준호는 보았다. 

“너도・・・・・・ 다행이야…….”

둘은 잠시 그렇게 있다가 연희를 살폈다. 연희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수아가 대신 대답했다.

“여기 누워 있던 아저씨? 조금 아까 일어나서 그냥 가 버렸어.”

“그냥? 죽은 거 아니구?”

“아냐. 누가 죽어? 그냥 걸어갔어……”

“그래 ・・・・・・?”

준호는 차라리 잘된 것 같아서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병원 마 당은 자신들이 아까 집어 던진, 타다 남은 종이와 재로 그득했 다. 그리고 눈을 돌려 보니 병원은 한참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아마도 아까 지하실에서 붙인 불이 번진 것 같았다. 준호는 큰일났다 싶어 몸을 일으키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 아니……. 차라리 이편이 나을지도…………… 어차피 다 죽었는데…………’

사람들이 불구경을 하려는지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모여들고 있었다. 당혹스러워진 준호는 얼른 아라를 부추겨 수아를 안게 한 다음 연희를 들쳐 업고 그곳에서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불이 난 곳에서 빠져나온 아이들이려니 여기고 길을 비켜 주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얼떨떨함과 창피함에 둘은 걸음 을 잽싸게 놀렸다. 그리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도망치 듯 피한 다음에야 숨을 돌렸다.

그때 아라가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준호는 아라가 왜 우 는지 묻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준호는 슬픔보 다 앞서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이게………… 이게 뭐야…………. 그렇게 죽은 애들인가…………. 그래 서 또 사람들을 죽인 거고? 이게 뭐야! 뭐냐구! 이게 세상이 돌 아가는 꼴이야?’

이렇게 노여워하다가 준호는 화가 치밀어 냅다 소리를 질러 버렸다.

“제기랄! 이딴 놈의 세상 콱 망해 버렷!”

생각할수록 끝도 없이 분통이 터질 따름이었다. 준호는 평소답지 않게 소리소리 지르면서 주변의 담벼락을 마구 걷어찼다. 아라는 계속 훌쩍훌쩍 울기만 할 뿐이었다. 수아는 아무것도 모 르는 듯 조금은 멍한, 그러나 어찌 보면 무척 많은 것을 아는 듯 기묘한 표정으로 나이답지 않게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라가 어느덧 울음을 그쳤다. 그때쯤 준호도 어느 정도 마음 을 가라앉히고 잠잠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 가아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근데………… 어떻게 된 거지?”

“뭐가?”

“우리가 본 거… 다 환상이었나?”

“글쎄”

준호는 조금 생각하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다는 아닐 거야…………. 사람들이 죽은 것은 정말인 것 같아……………. 병원 안에서 일어난 일은 진짜고…………… 병원에서 나오고나서부터만…………….”

아라가 불쑥 물었다.

“너도 그 소리 들었니? 우리들의 어머니………….”

준호도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너도 봤어?”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수십만의 낙태당한 아기들의 어머니가 한 사람일 수 있지?”

아라의 질문에 준호가 말했다.

“혹시………… 그 사람이 그 아기들의 영혼을 한데 모은 사람은 아닐까?”

“음, 그런데 그 영혼들이 왜 하필 우리가 있는 이곳에 온 거지? 왜 여기서 사고를 친 걸까?”

“글쎄 말야. 물어볼걸…………….”

아라는 준호가 너무나 고지식하게 대꾸하자 피식 웃었다. 그 때가 뭘 묻고 어쩌고 할 상황이었던가?

“혹시 ・・・・・・ 그게 수아와 무슨………….”

준호가 무심코 말하려 하자 아라가 문득 말을 잘랐다. 수아는 아직 아이에 불과했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라는 이번에 목숨을 걸고 수아를 구해 내면 서 수아에게 친동생이나 딸(아직 가져 본 적은 없지만) 이상 가 는 정을 느끼게 되었다.

“수아, 너는 어떤 일을 겪었니?”

“나?”

수아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아는 대답했다.

“난 몰라. 아까 눈뜨고 나니까 바깥이었어. 언니랑 오빠도 거기 있었구. 그래서 나는 계속 거기 앉아 있었는걸?”

“넌 아무것도 본 거 없어?”

“?”

수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라는 다시 물었다. 그러나 머릿속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까 아기들이라고 네가 그랬잖아.”

“나 안 그랬는데?”

“응? 아까 네가 아기들 많다고……………..”

“몰라. 난 그냥 아까 언니랑 자다가・・・・・・ 일어나니 바깥이었어.”

“그렇지만・・・・・・”

“난 아무것도 몰라………………”

수아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아라는 도대체 뭐가 뭔지 갈피 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준호는 그 말을 듣고 혹시나 싶었다. 혹시 그렇다면 아까까지 수아로 알고 같이 다닌 그 아이는 수아 가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수아가 정령들의 여왕이라는 것을 준호는 들어서 알고 있었 다. 그리고 정령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는 것도. 그렇다면 혹시 수아는 아라나 연희도 알지 못하는 사 이에 벌써 정령들에 의해 바꿔치기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언제?

‘시간은 있었어. 아까 그 남자나 내가 들어갔을 때 병원 문이 닫히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아까의 무서운 경험은 전부 정령들이 대신 떠맡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왕님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수아의 입을 빌려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은 정령들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달리 보면 지금의 수아가 혹시 가짜 수아인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스쳤다.

‘아니, 그건 지나쳐. 그렇다면 수아가 나이답지 않게 모든 것 을 꿰뚫고 있어서 입을 다문 것은 아닐까? 태아에 불과한 아기들 도 그런 기억을 다 가지고 있고 판단을 할 줄 안다는데, 수아가 어리다고 그런 것을 꼭 못한다고만은…………….’

그런 생각을 하자 수아가 무섭게 여겨졌다. 그러나 다시 보니 수아는 그냥 그 나이 또래의 천진하고 조금은 조용한 아이일 뿐 이었다.

‘아니, 아니, 내가 대체 무슨 망상을 하고 있는 거야?’

준호는 서둘러 생각을 돌렸으나 머릿속을 떠도는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아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죽지 않았을까? 아까 그 아기들은 분명 증 오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는데, 우리도 비교적 어려서 어른들과 는 다르다고 여기고 살려 준 것일까? 아니면 그 아기들이 보기만큼 악하지는 않다는 것인가? 그럴지도 몰라. 아기들은 죽고 사는 것도 모를지도……………. 그냥 당한 일이고 그게 싫으니까 똑같이 해 주는 건지도………….

아냐, 그렇다면 사람들을 들이받아서 박살 낸 건? 아니, 아니 그것도 너무 많이 모여 힘이 강해져 그런 것인지도 몰라. 아니, 그렇다면 그 애들이 잘한 거란 말야? 그건 아닌데! 아이고, 머리 아파. 모르겠다. 모르겠어!’

둘은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야, 밥통? 머리 아프지?”

아라가 돌연 심술궂게 묻자 준호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뭔 가 불만스런 듯한 표정으로 아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라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어쨌든 우린 살았고, 그것들은 없어졌잖아?

우리 다른 병원이나 찾아가자. 연희 언니가 걱정돼.”

준호는 여전히 그 특유의 태도로 우물우물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우린 결코 잘한 게 아냐. 사람들도 너무 많이 죽 었고, 사부라면 이렇게는 안 했을….”

“너 지금 꼭 그래야 하니? 그나저나 네 손바닥에 그 아저씨가 힘쓴 건 대체 뭐야? 뭔지 알기나 해? 써먹지도 못했잖아.”

“난들 알아? 알겠어, 아무튼 가자. 모르는 건 나중에 사부한테 물어보지, 뭘.”

그러자 수아가 불쑥 말했다. 

“나 배고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았지만 준호와 아라는 수아의 한 마디에 그만 떨치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겨우 하루 사이에 서로가 어느새 예전보다 조금 어른이 된 것 같 아 보인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준호나 아라나 수아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뒤편의 그늘에서 칼 하겐은 골목 어귀로 걸어가는 아이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몸과 정신이 모두 만신창이가 되어 완전히 회복되려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그러나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들이 아니었더라면 …………… 모든 게 끝날 뻔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두 꼬마가 정령들의 결사적인 도움을 받아(그들의 힘만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침대를 밀 어 병원 문을 나선 순간 실제로 아기들의 영혼은 물리적으로 그 들을 다시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더더욱 무서운 정신의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이다.

하겐은 육체적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유체 이탈 상태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상대가 수십만의 아기들이 뭉친 군집령이라는 것을 알고 어떻게든 연희를 구해 내려 했으나 수십만이나 되는 아기들의 영이 뭉친 힘은 자신의 힘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아기들의 정신이 흐트러졌을 때 연희가 있는 곳으로 잠시 뛰어든 것뿐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밀 려나 버렸지만.

그때 내가 한 판단은・・・・・・ 옳았구나…………….

하겐은 눈 큰 여자가 라미드 우프닉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다. 라미드 우프닉스는 신의 분노 앞에서 인간을 정 당화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라미드 우프닉스가 만약 인간의 손 에 의해 죽는다면 다른 라미드 우프닉스가 태어나게 되므로 문 제는 없다.

그러나 라미드 우프닉스가 스스로 타락하거나, 인간이 아닌 존재에 의해 죽게 되면 그를 대치할 새로운 라미드 우프닉스는 나오지 않는다. 반면 라미드 우프닉스가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알게 되면 그녀를 대치할 다른 존재가 탄생한다.

사실 하겐은 마지막 순간에 연희를 구하기 위해서만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연희를 자신의 손으로 없애려고 의식 안으로 뛰 어든 것이었다. 연희를 없애는 것은 힘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이었다. 그녀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만 알려 주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녀를 둘러 싸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이다. 어떤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슬픈 그림자를 꿰뚫어 보았을 때 하겐은 도저히 그녀를 없앨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하겐은 나름대로 세상을 거는 도박을 한 셈이고 연희에 게 격려만 남긴 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연희와 두 아이 는 아기들의 시험을 이겨 냈고, 아기들의 영혼은 비로소 뿔뿔이 흩어져 갔다.

“하지만 나답지 않았어.”

하겐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중얼거렸다. 마지막 순간 그 는 아무래도 무엇인가에 홀렸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했다. 홀렸 다기보다는 너무도 강렬한 연민과 간청의 눈길에 지고 말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내가 다른 자에게 홀리다니……………. 마지막 순간에 냉정하지 못했어.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해…………….”

하겐은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손을 펴 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능력을 전해 주지 말 것을…………. 아아, 이게 무슨 꼴이람. 목적한 물건을 얻기는커녕 구경도 해 보지 못하고. 더구나 가진 능력마저 깎여서 돌아가는 신세라니. 천하의 하겐 이 이 무슨…….”

한탄하고 있었으나 하겐의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전 세계를 판돈으로 도박을 걸었고, 비록 얻은 것은 없었지만 이겼으니 말이다.

“아니, 얻은 것이 있지……………..”

하겐은 연희와 세 아이의 얼굴,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연희의 의식 뒤에서 잠깐 모습을 보였던 슬픈 표정의 남자 얼굴을 떠올리며 어두운 골목길 쪽으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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