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23화 – 하르마게돈 17 : 무너진 지하실 안에서
무너진 지하실 안에서
굉음과 함께 출구가 무너져 내렸다. 아까 아하스 페르츠의 주 술로 인해 무너진 것은 부분적이라 밖에서 금방 치우고 들어올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출구 부분이 송두리째 무너져 중장비를 동원하지 않고는 치우기가 힘들 듯했다.
아까 아하스 페르츠가 부수고 들어온 천장 구멍마저도 이번 진동으로 인해 무너져 막혀 버렸다. 안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출구가 무너지자 급히 흩어져 몸을 피했다가 진동이 가라앉자 뿌연 먼지 속에 다시 고 개를 쳐들었다.
“다들 괜찮은가요?”
박 신부의 음성이 실내를 울렸다.
가장 먼저 현암이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먼지가 대강 가라앉았을 즈음, 지하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목소리로 서로를 확인했다. 폭발의 충격 때문인지 지하실의 불 까지도 모조리 꺼져 실내는 몹시 어두웠다.
박신부는 다리가 불편한데다 준호, 아라와 수아 등의 아이들 과 황달지 교수 등을 오라 막으로 감싸고 오느라 출구에 도달하 지 못했다. 백호와 현암 역시, 비록 정신이 들었다고는 해도 부 상을 입어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마하딥을 부축하느라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승희는 현암의 주변을 떠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 에 나갈 수 없었다.
준후는 고반다와 아하스 페르츠가 굴러 떨어진 지하실 계단을 경계하고 있어 나가지 못했고, 로파무드도 나가지 않고 준후 근 처에 있었다. 아마 로파무드는 고반다를 극도로 증오한 나머지 그를 어떻게 할 생각으로 뒤쳐진 듯했다.
“어떻게 된 거죠? 성당 기사단원들이 폭파한 걸까요?”
현암이 묻자 박 신부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틀림없이 아까 가브리엘 수사가 발파 장치를 빼앗은 것 같았는데………….”
그때 승희가 말했다.
“큰일이군요. 타보트는요?”
그 말에 준후가 담담히 되받았다.
“우리 쪽만 두 편으로 갈라졌군요.”
불현듯 뭔가가 번뜩하면서 승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거대한 칼 한자루였다. 현암이 승희를 와락 밀쳐 내 승희는 간신히 그 칼 을 피했다. 칼날이 돌 벽에 부딪혀 불똥이 튀는 순간 번뜩이는 불 빛에 그 칼을 누가 휘둘렀는지 언뜻 눈에 들어왔다. 키건이었다.
“키건! 당신……!”
승희가 놀라서 외치자 키건이 음산한 목소리로 웃었다.
“흐흐흐……. 어떠냐? 어둠의 고통이 ………….”
현암은 지금 공력이 전무한 상태라 키건 같은 자와 맞붙어 싸운다 해도 전혀 승산이 없었다. 현암은 승희를 끌어당겨 앞을 막 아서며 박 신부를 불렀다.
“신부님! 이 안에 키건이 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도 아직 많이 있다.”
승희가 뭐라 대꾸하려 하자 현암이 급히 승희의 입을 막았다.
그러면서 다급하게 속삭였다.
“저 친구는 네 목소리를 듣고 공격하는 거야. 그러니 말하면 안돼.”
박 신부의 목소리가 담담히 울려왔다.
“여기서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지. 당신, 아직도 남을 해칠 생 각만 하는 건가?”
“흥! 나는 문이 부서지려 할 때 일부러 안으로 뛰어들었다. 빠 져나갈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그러지 않았을 거다. 자, 모두 하나 씩 없애 주겠다!”
그에 로파무드가 앙칼지게 외쳤다.
“너 혼자 우리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키건이 다시 음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 여기는 암흑 속이다. 너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나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지. 너희 모두 죽은 목숨이다!”
키건은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하실 안이 환해졌다. 사방에서 불이 밝혀진 것이다.
준후가 야명부를 써서 불을 밝혔고, 박 신부의 오라도 환한 빛 을 내어 주변을 밝혔다. 로파무드도 뭔가 주술을 썼는지 간디바 에서 빛이 나왔고, 수아가 어두워 무섭다고 했는지 수아 주변에 정 체를 알 수 없는 도깨비불 같은 것들이 휘돌아 사방을 비췄다. 정 령들의 힘인 듯했다. 지하실 안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밝아졌다. 현암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가련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안됐군.”
“무슨 헛소리냐? 너희들………… 불을 가지고 있는 거냐?”
키건이 커다랗게 외쳤다. 보아하니, 지하에 있는 성당 기사단 사람들은 모두 시체가 되었고, 키건만 유일하게 살아남았을 뿐 이었다. 키건의 판단은 재빨랐지만 그것은 일상적인 상황에서나 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상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능력들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니까.
“칼을 내려놓게.”
박신부가 오라를 크게 뻗쳐 키건을 감싸자 키건은 온몸을 부 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얼른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어차피 너희는 모두 죽는다. 곧 있으면 주인님이 올라오실 것 이다!”
그 말에 박 신부와 현암 등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확실히 큰 문제였다. 고반다는 현재 준후의 말을 듣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아하스 페르츠가 만약 고반다를 물리치고 올라온다면 도망칠 길 조차 없는 셈이었다.
퇴마사들의 능력이 대단하다지만 결코 아하스 페르츠의 터럭 한 올도 건드릴 수 없었고, 퇴로가 막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언 젠가 아하스 페르츠의 손에 죽을 확률이 높았다.
그때 준후가 말했다.
“아하스 페르츠라고 해도 절대적으로 무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걸?”
“무슨 헛소리!”
“우리가 비록 그를 어쩌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도 우리를 꼭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거야. 나는 이미 그의 손아귀에서 한 번 벗어난 적이 있지.”
준후의 그 말을 들었는지 지하실에서 아하스 페르츠의 목소리가 무시무시하게 울려왔다.
“두 번은 안 될 거다!”
준후가 냉소하며 되받았다.
“하지만 너도 올라오려면 며칠은 걸릴걸?”
준후의 말대로 아하스 페르츠는 고반다에게 붙들려서 올라오 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아하스 페르츠는 어떤 자도 해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자였으며, 고반다 또한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오라 막을 지닌 자였다.
비록 아하스 페르츠의 주술력이 막강하고, 고반다가 아무 폭 력도 쓸 수 없다고 했지만 그 대신 고반다는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었다. 만약 준후의 말대로 고반다가 아하스 페르츠를 물고 늘어져 주기만 한다면 며칠 동안은 아닐지라도 당분간 아하스 페르츠는 꼼짝하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현암은 상황을 그렇게 정리하자 마음이 약간 느긋해졌다.
“결국 둘의 승부는 누가 더 굶주림을 잘 참느냐에 달렸군그래.”
농담 섞인 말을 한마디 던지고 현암과 박 신부는 동시에 준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너…………..”
준후는 자신이 어떻게 몇 마디 말로 고반다를 움직였는지 현암과 박 신부가 물어볼 줄 알았다. 그러나 박 신부와 현암은 영 의외의 말을 던졌다.
“돌아왔구나. 반갑다.”
박 신부의 말이었다.
“얼굴 잊어버릴 뻔했다.”
현암의 말이었다. 두 사람의 따스한 표정을 접하자, 계속 냉담 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준후의 얼굴이 일순 눈물이라도 쏟을 듯 변 했다가 이내 냉랭한 표정으로 다시 바뀌었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듯, 준후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도요……. 그러나 상황이 별로 좋지 않군요.”
그때 승희는 무척 반가운 듯 웃는 표정이었지만 일부러 험하게 말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같으니. 난 하나도 안 반갑다.”
승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건이 고함을 지르면서 거칠게 칼을 휘두르며 돌진해 들어왔다. 그러나 박 신부가 묵묵히 눈을 감자 키건은 박 신부의 오라를 뚫지 못하고 밀려 넘어져 버렸다. 키건은 다시 일어나 돌진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박신부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시오.”
그래도 키건은 또다시 일어나 돌진하려는 듯하다가 문득 걸음 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멍하니 뭔가를 생각하는 듯이 서 있었다.
“싸우지 맙시다.”
박신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던 키건 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들고 있던 칼을 자신의 목으로 갖다 대려 했다. 자신이 믿었던 암흑도, 아하스 페르츠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절망해 버린 것이다.
박 신부는 급히 오라를 뻗쳐 그를 제지하려 했으나 그보다 누 군가가 먼저 뛰어들어 그의 팔을 쳐냈다. 승희였다. 물론 키건 은 거인이고 힘이 엄청난지라 승희가 전력으로 부딪친다 해도 그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살을 시도하는 마당 이라 번민하는 감정 때문에 약간 힘이 빠져 있어 승희는 간신히 그의 팔을 쳐 낼 수 있었다.
“이봐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승희는 놀란 마음을 진정하지 못해 숨을 헐떡거리며 키건에게 물었다. 키건은 자신의 팔을 쳐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승희 라는 것에 놀라 말을 더듬었다.
“네가 왜……………?”
승희가 툭툭 털고 일어나며 되받았다.
“그러게 말야. 내가 왜 그랬지?”
그러면서도 승희는 키건 옆에서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 암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월향검을 꺼 내려 했으나 박 신부가 조용히 현암에게 말했다.
“승희에게 맡겨 두세.”
“하지만……………..”
현암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박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개입하면 승희는 마음의 짐을 덜지 못할 걸세.”
그때 키건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더듬거리며 물었다.
“너는 내 눈을 멀게 해 놓고…………… 나를 희롱하는 건가?”
키건의 말에 화가 난 승희가 꽥 소리쳤다.
“그런 소리하지 말아요! 그 일 때문에 난 하루도 편하게 잔 날이 없다고요!”
“난 너에게 복수해야 해!”
키건이 칼을 휘두르려 하자 승희는 몸을 옆으로 살짝 피했다.
그러나 둘 다 내려치려는 시늉과 피하려는 시늉만 했을 뿐, 실제로는 그리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승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칼쓰는 걸 멈추죠?”
그와 동시에 키건도 물었다.
“왜 피하지 않지?”
승희는 한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대꾸했다.
“난 정말 후회하고 있어요. 그때 당신은 날 많이 봐줬죠. 난당 신 마음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명예를 존중하고 긍지가 높은 기사였지요.”
아무 대꾸 없이 키건은 장승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당신은 내가 여자라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요. 나를 해칠 마음 이 없었던 거죠. 하지만 나는 당신을 속이고 기습해서 눈을 멀게 만들었어요.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게냐?”
“내가 당신에게 미안함을 느낀 건, 내가 당신 마음을 이용했 기 때문이지, 당신 눈을 멀게 한 일로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은 그 이후로 상대가 여자든 힘없어 보이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당신은 분명 눈이 멀었을 때 그렇게 맹세했고, 그 순간 사람이 변했어요! 그렇죠? 그때부터 나는 당신이 이렇게 변해 버릴 줄 알고 있었어요! 그 사실 때문에 내가 괴로운 거라 고요!”
승희의 말에 키건이 허탈하게 되받았다.
“눈이 없어진 것 때문에 내가 변한 게 아니다. 네가 나를 조롱했기 때문에 변한 거야. 왜 나를 조롱했지? 그리고 왜 지금도 날 조롱하는거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승희가 말했다.
“나는 당신을 조롱한 적 없어요.”
“너는 나를 소경으로 만들어 놓고, 나를 죽이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다. 그것이야말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네 그 잘난 염력으 로 왜 심장을 찌르지 않았는가? 왜 뇌를 찌르지 않았는가? 그 순 간부터 나는 명예라고는 남지 않은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그 말을 듣고 승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해치겠어요?”
“흥! 그렇다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 그러면 내 손에 순순히 죽겠느냐?”
키건의 말이 너무 황당해 승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기는 싫어요, 키건. 나는 잘 알아요. 지금 당신의 마음은 활짝 열려 있으니까요. 당신은 지금 내 손에 죽으려는 거죠? 당 신은 나를 죽이거나, 당신이 죽어야만 당신 명예가 지켜진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승희가 말끝을 흐리자 키건이 악을 썼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내 명예에 대해 뭘 아느냐?”
승희는 주저하는 기색 없이 되받았다.
“당신이 중개하여 성당 기사단 단장과 난 의사소통을 하게 되 었죠. 그때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단장은 물론 해밀튼이었겠죠? 그리고 당신은 그를 받들고 있었고요. 그 런 당신이 지금은…….”
그 말을 끊으며 키건이 외쳤다.
“어차피 같은 분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나는…………….나는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을 알아버렸다!”
그때 현암이 외쳤다.
“같은 사람이 아니오!”
승희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당신도 해밀튼과 아하스 페르츠를 동일 인물로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죠? 그런데 당신은・・・・・・ 그때부터 해밀튼을 배신하고 아하스 페르츠를 받들기 시작했어요. 당신은………….. 스스로 타락 함으로써 죽음을 당할 날이 오기만을 바란 거예요. 정상적인 방 법으로는 우리가 당신을 결코 죽이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말 이죠.”
이를 부드득 갈며 키건이 욕을 해댔다.
“이 뻔뻔한 여자! 감히 남의 마음을…..!”
“뭐라고 욕을 해도 달게 받아들이죠. 아무튼 당신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죽음만이 명예를 되찾아 준다니! 그건 바보 같 은 생각일 뿐이에요! 본심은 악인이 아닌데, 당신은 일부러 비뚤 어져 악인을 섬기고 악인이 되어 버렸어요! 그거야말로 불명예 스러운 일이 아니고 뭐겠어요!”
어느덧 승희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현암도 눈물이 배어 나오려 했다. 승희는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탓에 남보다 훨씬 큰 죄의 무게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키건의 눈을 멀게한 사실보다. 그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에 죄책감 이 더욱 큰 것이 분명했다.
현암은 승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승희의 가장 강한 능력이 오히려 그 마음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승희만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힘에는 무게가 있고 그 대가가 따르게 되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왜 모두 는 힘을 추구하는 걸까……………..’
한동안 말이 없던 키건이 이윽고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발………… 어서 손을 써라.”
“당신을 해치란 말인가요?”
키건이 고개를 끄덕이자 승희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그럴 순 없어요!”
“나를 위하든, 동정하든 다 괜찮다! 하지만 나를 죽여라! 네가 하지 않겠다면 네 친구들에게라도 부탁해라!”
“우린 누구도 죽이지 않아요! 누구도 죽인 적이 없고요!”
그 말을 듣고 키건이 미친 듯 껄껄 웃었다.
“너희가…………?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승희가 정색을 하며 되받았다.
“정말이에요. 난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요. 나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키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믿을 수 없다…..”
“사실이에요!”
또다시 키건은 자기 목을 찌르려 했다. 그때 박 신부가 한숨을 쉬면서 오라를 펼쳐 키건의 칼을 밀어냈다.
계속되는 방해에 짜증이 났는지 키건이 벌컥 화를 냈다.
“죽지도 못하게 하다니! 나를 계속 조롱할 셈인가?”
박신부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당신을 조롱하려 한 적 없소.’
“그럼 나에게 뭘 원하는 거지?”
“한 가지 원하는 게 있소.”
“뭐냐?”
“당신이 살아가는 걸 원할 뿐이오.”
박 신부의 말에 키건이 소리쳤다.
“믿을 수 없어! 나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어차피 모두 서로 죽이고 죽을 것이다!”
갑자기 키건이 흥분했다. 그는 입에 거품을 뿜으며 미친 듯 떠 들어 댔다. 키건은 본디 심지가 굳고 고집이 대단했다. 그러나 승희의 말대로, 눈을 잃은 후에 세상을 극도로 비관하게 되었고, 빗나간 명예심 때문에 폭주하여 아하스 페르츠에게 투신하게 되 었다.
그러다 이 자리에서 승희의 말과 박 신부의 거짓 없는 목소리를 듣고는 마음속의 회한이 불거져 결국 착란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박 신부와 승희, 현암 등은 그를 어떻게 해 보려 했지만, 키건 이 미친 듯 날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어 어찌할 수가 없 었다. 키건은 거인인데다 힘이 엄청났기 때문에 그를 달랠 방법 이 없었다. 그렇다고 오라력이나 주술력을 사용할 수도 없으니 그저 두고 볼 수밖에.
“나도 죽을 테지만 너희도 살아 나갈 수 없다! 아니, 이 세상 인간들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제 곧 종말의 때가 온다! 하르마게돈이 온다!”
그때 승희가 눈을 크게 뜨며 더듬거렸다.
“이 사람은…………! 이 사람은 알고 보니………………”
“뭐지?”
현암이 묻자 승희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꼭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만이 아니에요. 공포가∙∙∙∙∙”
“공포?”
“하르마게돈의 공포! 이 사람은…… 이 사람은 뭔가 알고 있어요!”
바로 그 순간 지하실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며 바닥 한쪽 구석이 움푹 꺼져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 한쪽으로 물러섰고, 박 신부와 현암은 키건을 밀어내어 한쪽으로 몸을 피하게 했다. 아마도 고반다와 아하스 페르츠의 싸움이 지하실을 무너뜨린 것 같았다.
놀라서 몸을 피하던 준후 옆에 불현듯 고반다가 나타났다. 무척 순식간의 일이라 모두 놀라기만 할 뿐, 어떤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다.
고반다가 재빨리 준후의 팔목을 낚아채며 소리쳤다.
“어서 말해라!”
“당신・・・・・・ 아하스 페르츠를 물리쳤나요?”
“어서 말해! 마지막 라미드 우프닉스에 대해!”
고반다의 말에 현암과 박 신부, 승희는 깜짝 놀랐다. 준후는 도대체 고반다에게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일단 준후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서 박 신부는 급히 오라 막을 펼쳤고, 현암 은월향검을 던졌으며 승희는 염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승희의 염력은 고반다의 몸을 둘러싼 오라 막을 전혀 뚫고 들어갈 수 없었으며, 박 신부의 오라 막도 튕기고 말았다. 월향검 역시 공력이 실려 있지 않은 터라 간단하게 오라 막에 밀 려 버렸다.
준후는 잡힌 손목이 몹시 아픈 듯했지만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준 후의 얼굴은 순식간에 해쓱해지며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준후가 말을 하지 않자 고반다는 분통을 터뜨렸다. 왜 그런지 그의 얼굴은 마치 악마같이 일그러져 무시무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서 말을 해! 라미드 우프닉스는 어디에 있느냐!”
“이젠 없어…….”
“무슨 소리냐? 그녀는 아직 분명히 남아 있어! 카르나가 분명 그녀를 보았다!”
준후는 비웃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건 이미 예전의 일이지.”
그때 무너져 내린 바닥의 한쪽 돌무더기가 움찔거리다가 이 내 폭발하듯 사방에 흩어졌다. 그곳에서 아하스 페르츠가 서서 히 모습을 드러냈다. 박 신부는 몹시 놀랐다. 그들이 몰려 서 있 던 장소는 아까 박 신부가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러 들어갔던 방 문 앞이었다.
박신부는 급히 아이들과 황달지 교수 등을 방에 밀어 넣고 그 앞을 몸으로 막아섰다. 곧이어 현암과 승희가 그 옆에 섰고 백호 와로파무드가 다른 편에 섰다.
중상을 입은 마하딥은 겨우 정신이 든 상태였지만 의외의 사 태에 놀라 급히 키건 옆에 가서 섰다.
고반다는 아하스 페르츠가 나온 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준후를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준후가 다급하게 고반다에게 다시 서툰 영어로 외쳤다.
“어서 저자를 막아!”
“싫다면?”
고반다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준후는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고반다가 무슨 수를 쓴 것 같았다. 준후는 고통이 얼마 나 심했는지 마치 전기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온몸에 경련 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순간, 박 신부와 현암이 동시에 고반다를 향해 달려들었다. 현암은 월향검을 빼 들고 있었고 박 신부는 오라 막을 펼쳐 냄과 동시에 오라 구체를 무섭게 내쏘았다.
그러나 박 신부의 오라는 고반다의 오라와 부딪혀 서로를 밀 어내지 못했고 오라 구체도 고반다를 조금 움찔거리게 했을 뿐, 그를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현암 역시 월향검으로 고반다의 손목을 내리쳤지만 공력이 실 리지 않은 월향검은 결국 고반다의 오라 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고반다가 팔에 얼얼한 충격을 느꼈는지 아니면 반사적 으로 그랬는지 준후를 잡고 있는 손가락에 일순 힘이 빠졌다. 현암은 그 틈을 타 재빨리 준후의 몸을 힘껏 뒤로 잡아당겼다. 준후의 옷소매가 찌익 찢어지는 순간 현암은 준후를 안고 데굴 데굴 굴러서 박 신부 쪽으로 피했다.
고반다는 준후를 다시 잡으려 했지만 박 신부가 그 앞을 막아서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때 아하스 페르츠가 고반다에게 말했다.
“형편없는 작자로군. 저런 것들에게 속다니.”
고반다는 아하스 페르츠를 노려보았으나 뭐라고 받아치지는 못했다.
다시 아하스 페르츠가 입을 열었다.
“저들이 네가 바라는 것을 들어줄 것 같은가. 위선자?”
그 말을 듣는 순간 고반다는 준후를 무서운 눈매로 노려보았 다. 그 눈빛을 보자 박 신부와 현암 등은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지금 퇴마사들이 모두 힘을 합해도 아하스 페 르츠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인데, 고반다까지 덤벼든다면 상황은 절망적이나 다름없었다.
박신부가 현암에게 재빨리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고반다를 좀 맡아 주게. 그리고 승희에게 모두를 피신 시키라고 하게.”
현암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은 공력이 없는 상태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러죠.”
돌연 아하스 페르츠가 고반다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가. 지금 저놈들을 도망치게 놔두면 많이 번거로워질 텐 데? 어차피 우리끼리는 승부를 낼 수 없으니, 지금은 함께 저놈들을 없애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마치 모두가 똑똑히 들으라는 듯 대놓고 영어로 지껄이는 아하스 페르츠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빛이 모두 굳어졌다.
박신부가 승희와 백호에게 말했다.
“승희야! 백호 군! 어떤 수를 써서라도 벽을 뚫고 달아나게.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하지만 어떻게…………..”
로파무드가 간디바를 꺼내면서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해 보죠.”
로파무드가 무너진 출구 앞에서 중얼중얼 진언을 외우자 박 신부는 백호와 승희를 보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모두 부탁하네.”
“현암군! 나도 같이………………”
승희가 끼어들려 하자 현암이 딱 잘라 말했다.
“있으면 방해만 돼.”
“하지만…………….”
승희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멈칫하는 순간, 고반다와 아하스페르츠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박신부와 현암은 동시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