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10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3 : 징벌자의 어머니
징벌자의 어머니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현암이나 박 신부는 징벌 자의 어머니가 바이올렛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다. 아기들의 영혼을 다루는 그 ‘어머니’일 것이라는 짐작은 했 지만…………….
“어, 어떻게 그럴수가…………!”
승희는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의 악마가 말한 걸 들어 보면 분명해요. 사실 진짜 검은 바이올렛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세 명의 하수인 격 인 분신을 데리고 있는데, 모두 검은 머리에 보랏빛 눈을 가진 여자들이죠. 대개 진짜 검은 바이올렛은 절대 나타나는 일이 없 고 그 세 명의 분신만이 나타나요. 마녀 협회를 이끄는 것은 그 세 사람이어서 보통 사람들은 그중 한 명이 진짜 바이올렛이라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바이올렛이 대화에 참여하자 그 대화는 자연스레 영어로 진행 되었고 준후는 거의 입을 다물었다. 준후는 승희가 조금씩 말을 번역해 들려주어서 간신히 이야기의 진행을 파악하는 정도였다. 준후는 속으로 영어를 좀 더 잘 배워 둘걸 하는 후회를 많이 했다. 연희가 있을 때는 그녀의 통역이 워낙 능숙하여 거의 불편 을 느끼지 않았지만 연희가 없자 의사소통이 몹시 힘들었다. 영어로 대화가 진행되자 저만치에 떨어져 있던 황달지 교수가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면 과거에 교황청에 나타났던 바이올렛도 진짜가 아니란말이오?”
박신부가 묻자 바이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예전에 ・・・ 이반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님이 당신을 구해냈다고 하던데…………… 그때의 바이올렛도 진짜가 아니었다는거요?”
“물론이에요.”
현암이 물었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나는 원래 마녀 협회에서 꽤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고요. 지금 마녀 협회는 그들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갔지만, 나에게는 옛 동 료들이 많아요! 적어도 그때 …………… 회의에서 탄핵당하기 전에 나 는 검은 바이올렛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잘 들어맞아요. 생각해 봐요. 아스타로트가 말했던 힌트.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자가 누구죠? 아하스 페르츠와 고반 다는 모두 모습을 드러냈고 이단 심판소, 검은 편지 결사, 칼키 파에다가 성당 기사단 등등이 거의 전멸해 버렸어요. 가야바나 율리아 같은 자들은 세상에 전혀 알려진 적도 없었다고요. 그런 데 누가 남은 거죠? 그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또 누가 있겠어요?”
바이올렛이 흥분했는지 기관총처럼 말을 하다가 말을 끊고 머 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또 한 가지………… 증거가 있어요. 분명 검은 바이올렛은 임신중이었어요. 이제 거의 낳을 때가 되었을 거예요.”
“임신?”
박신부가 묻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다급한 목소리로 현암이 물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솔직히 …………… 나는 회의에서 검은 바이올렛을 물러나게 하려 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워낙에 무서운 여자였고 마녀 협회의 백 마녀들 중에는 세 분신 중 한 명조차 당해 낼 자가 없었죠. 세 분 신은 금기를 깨고 무서운 흑마술을 사용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좀 치사한 방법이지만 힘으로는 못 당하니까 약점을 잡으려고 뒷조사를 한 거예요.”
“임신한 사실이 무슨 약점이 됩니까?”
“일단 그녀는 남자들에 의해 속박당하고 억눌려 온 여자들의 기세를 펼치자는 슬로건을 걸었어요. 그런 여자가 실은 남자와 정을 통해서 임신했다면………… 분명 흑색선전이 될 거 아니겠어 요?”
현암이나 준후는 조금 얼굴빛을 흐렸다. 이들은 그러한 모략 이나 술수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진 것 이다. 그러나 승희와 박 신부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요? 그걸 이용했나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더군요. 검은 바이올 렛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모양이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남자들 을 증오하게 되고, 직접 행동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소식이더군요. 그래서 그런 선전은 하지 않았죠. 사실・・・・・・ 그런 이야기를 했으면 아마 회의 때 하수인이 나를 박살 내 버렸을 거예요.”
승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되지 않네요.”
“뭐가요?”
“검은 바이올렛이 그토록 무서운 여자인데, 세상에 어떤 작자 가 그녀에게 임신을 시키겠어요?”
“그거야 모르죠. 방심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일을 겪은 이후에 증오심과 분노로 인해 전생의 기억을 깨닫고 지금의 힘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죠.
박신부는 눈을 감은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현암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면 그 진짜 바이올렛이 어디 있는지도 아시나요?”
“그걸 알면 내가 지금껏 말 안 했겠어요? 전혀 몰라요! 그녀는 어딘가 깊숙한 곳에 숨어 버렸어요. 그 장소는 지구의 어디일 수 도 있죠. 짐작 가는 곳은 전혀 없어요.”
“그녀의 얼굴은요?”
“그걸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유일하게 세 하수인들만은 알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아는 사람도 없는데 왜 숨었을까요?”
“그거야 당연하죠! 아기를 낳을 때가 되어 가니까 그러는 거겠죠!”
“그렇다면 그녀도 자신의 아이가 징벌자 혹은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요?”
현암이 캐묻자 승희가 중얼거렸다.
“악마가 친히 보호하는 판인데 그 정도 계시를 못 받았을라고.”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바이올렛이 말했다.
“어쨌든 어서 그녀를 찾아야 해요. 그녀를 찾을 방법이 없을까요?”
“단서는 몇 가지 있습니다.”
현암이 손가락을 꼽으며 계속 말했다.
“우선 타보트의 내용이 있지요. 물론 너무 막연해서 해석할 수 는 없지만요.”
“막연해도 너무 막연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동쪽 끝의 후예 가 어쩌고……………. 거기다가 뭐라고 했지? 청동도 강철도 없는 곳? 그런 데가 어디 있어?”
“나도 전혀 감이 안 잡혀. 무슨 비유 같은데, 무슨 비유인지 알 수가 없단 말야. 어쨌든 그건 중요한 내용일 거야. 그리고 한 가 지 더 추가하자면 전에 잠깐 보았던 토트의 예언석 내용 정도. 라미드 우프닉스만이 징벌자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는 거 말야.”
“『해동감결은?”
승희가 묻자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없는 셈 치자고. 아무튼 이게 다야.”
현암의 말이 끝났는데도 바이올렛은 현암이 말을 더 해 주기를 바라는 듯이 현암의 입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윽고 물었다.
“그걸 가지고 어떻게 찾아요?”
그 말에 현암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때 잠자코 있던 박 신부가 한마디 했다.
“한 가지 더 있네. 우리와 피로 이어져 있다는 것.”
“그건 「해동감결」 내용이 아닌가요?”
“그렇지만도 않네. 내가 직접 들은・・・・・・ 아니, 관두세. 하여튼 그 사실도 잊으면 안 되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도대체 징벌자의 어머니를 어떻게 하 면 찾을 수 있을지는 막막했다. 모두 머리를 모아 기를 쓰며 이 런저런 추측을 했지만 말도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승희는 몇 번이나 반복하여 타보트의 내용을 외워서 들려주었 는데 나중에는 화가 나서 거의 악을 썼다.
“도대체 그런 장소가 어디 있어? 그리고 무슨 비유인지도 전 혀 모르겠고 말야.”
승희가 다시 타보트에 씌어 있던 내용을 읊고 나서 신경질을 내자 준후도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라미드우프닉스만이 어머니를 알아볼 수 있다고 하는데……………. 듣기로는 모든 어른 라미드우프닉스는 죽었다고 했 잖아요…………… 그렇다면 남은 것은 연희 누나 혼자뿐인데……… 이 제는 연락도 안 되고………….”
그 말을 듣자 승희는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렇다면 뭐야… 백호 씨는 왜 죽었고…………… 다른 사람들은 대체 왜……………..
그러다 보니 자연히 슬픔과 화가 치밀어 올라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벽을 한 대 후려쳤다. 벽이 움푹 들어가며 방이 쩡 하니 울리자 박 신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바심 내지 말게. 연희 양이 살아 있다면 연락할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오해가 겹쳐서 ……………”
“오해는 풀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 박 신부는 미소를 지었다. 박 신부의 차분한 태도에 세 사람은 조금 힘을 얻었지만 타보트의 예언의 내용을 알 길이 없어 갑갑했다.
박신부가 차근차근 말했다.
“안나스도 분명 우리와 비슷한 정보만을 가지고 있었네. 그러 나 그는 우리와 똑같이 타보트의 내용만을 보았는데도 그 장소를 알아냈어. 그러니 우리도 알 수 있을 걸세. 너무 조바심 내지말고 잘 생각해 보세.”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황달지 교수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 말이죠…………….”
모두 기분이 극도로 상한 터라 황달지 교수를 보려고조차 하 지 않았다. 그러나 박 신부만은 황달지 교수를 부드러운 시선으 로 바라보았다. 그에 힘을 얻었는지 황달지 교수가 주저주저하 며 입을 열었다.
“저・・・・・・ 혹시라도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하는 게 들려서요…………….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닙니다………………. 너무 뭐라고는 하지 마십시오……………..”
황달지 교수는 아하스 페르츠에게도 덤벼들 정도로 성질이 있 었지만 평상시에는 말 한마디 잘 못 할 정도로 조심성 많고 얌전 한 성격이기도 했다. 거의 이중인격에 가깝다고 박 신부는 생각 하면서 미소 지으며 별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는 일행 아닙니까? 더군다나 도와주시 려 하는 건데 왜 뭐라 하겠습니까?”
황달지 교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원래 보통 사람일 뿐이라…………… 이런 일에 전부터 엮이 기는 했지만…………… 저는 여러 번 목숨을 구원받았습니다. 그래 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군요. 감히 제가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황 교수가 더듬거리자 현암이 포기한 듯한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냥 말씀하세요.”
그러나 황 교수의 다음 말이 떨어지자 모든 사람의 눈이 번뜩 커졌다.
“전・・・・・・ 그 장소가 어딘지…………… 알 것 같습니다만…………….”
“예?”
“예?”
“뭐라구요?”
승희와 현암, 바이올렛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러자 황 교수는 깜짝 놀라 잠시 말을 더듬거렸다.
“예? 예…………… 정말입니다. 고민하시는 것을 들으니 짐작이 되어서 …….”
“그게 어디죠?”
바이올렛이 외치자 현암이 좀 더 침착하게 말했다.
“일단 말씀부터 들어 보죠.”
“예…………….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장소는 남미입니다. 안데 스 산맥 부근의, 그중에서도…………… 페루일 것 같습니다만…….”
“페루?”
승희가 의심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바이올렛이나 현암도 고개를 갸웃했다. 예상보다 너무도 동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빛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자, 황 교수는 자신의 학자적 기질을 발휘하여 열심히 설명했다.
“타보트에서 가리키는 장소는 분명히 아메리카 대륙, 그것도 남미입니다. 그건 분명해요. 모세가 타보트에 예언을 적었다고 했죠? 당시 중동 사람들에게 아메리카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땅 이었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것입니다. 바퀴도, 청동 도, 말도 없다는 말…….”
“그건 비유가 아닐까요?”
“아닙니다. 남미 문명은 분명 고도로 발달했지만, 바퀴가 없 었습니다. 몰랐다기보다는 사용하지 않은 편이 가깝지만요. 그 리고 그들은 금속 문명을 잊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순수하게 존 재하는 금과 은을 제외하고는 어떤 금속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이 없다는 점에서 남미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납 니다. 북미 인디언들은 말을 많이 사용했지만, 남미 인디언들에 게는 말이 없었습니다. 십오 세기 이후 유럽 열강들이 남미를 침 략할 때, 남미 인디언들이 말을 탄 사람을 보고 다리 여섯에 머 리 둘이 달린 괴수라고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까요.”
바이올렛이 손뼉을 쳤다.
“맞아요! 맞아! 모세는 투시해서 장소를 묘사한 것뿐이니 시 대는 좀 뒤섞일 수도 있어요. 투시는 원래 두서없이 이루어지니까요.”
그렇게 설명을 듣고 나자 현암이나 승희도 차츰 몰입하게 되었다. 그래도 현암은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페루죠?”
“그건 안데스 문명 중에서 산과 호수와 강이 겹쳐지는 지형 이 있는 곳은 페루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저도 우연히 조사하 면서 발견한 것인데, 흥미로운 지형이었고 문명 형태가 다르게 발달되어 있어서 기억에 남았던 겁니다. 그런데 ・・・・・・ 그 타보트 에 씌어 있다는 장소는 그 장소를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죠…………. 안데스 문명권, 그중에서도…………… …………… 그러니까 지도로 보 면…………….”
황 교수는 승희가 가져온 자신의 짐을 급히 뒤져 낡아서 꼬질 꼬질해진 아주 커다란 지도를 꺼냈다. 그 지도는 오랫동안 사용 했던 것 같았는데 꽤 많은 낙서가 씌어 있었다. 그 지도를 펴 들 고 황 교수는 지도 위에 낙서가 많이 된 부분에 십자 표시 하나 를 그렸다.
“여길 겁니다!”
그 지도는 상당히 큰 축적으로 표시된 것이라 그 근방을 찾아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주변에는 도시나 촌락, 길의 표시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오지입니까?”
“인디오들만이 사는 곳이죠. 원래 남미는 지금도 오지가 많습니다.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거나 전혀 받지 못한 장소가 많은데, 여기도 그중 한 곳입니다.”
“그런데 왜 검은 바이올렛이 여기로 가서 아기를 낳으려는 걸까요?”
현암이 중얼거리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간단해요! 아마도 검은 바이올렛은 거기 출신일 거예요! 친정에서 아기를 낳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요? 더구나 태어난 곳이 이렇게 오지라면 몸을 숨기기에도 좋고 말이죠!”
그에 승희도 한마디 거들었다.
“징벌자의 탄생은 예사롭지 않은 일일 테고 악마 같은 것들까 지 관여하고 있을 테니 …………… 가급적 사람이 많이 있는 도시 같은 곳은 좋지 않겠죠. 정말 그럴 것 같군요.”
그러나 현암은 마지막까지 차분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어요. 모세의 타 보트 예언도 그렇고 신부님의 말씀도 그렇고……………. 징벌자는 우 리 민족의 피가 섞인 상태로 태어나야 해요. 그런데 …………… 페루의 오지라고 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지 않은가요?”
현암의 질문에 황달지 교수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어째서죠?”
“승희 양, 지난번 내가 들려준 이야기 기억하나요? 내 연구는 용봉문화의 원류 추적입니다. 당신들, 동이족의 일부가 아메리 카 대륙에 흩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승희는 한 번 그 이야기를 가볍게 흘려들은 적이 있었지만 다 른 사람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 황 교수는 침을 튀기면서 자신 의 이론을 다시 늘어놓았다.
원래 인디언은 빙하기 때 동이족 중 일부가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정착하게 된 것이 원류이며, 이후 은나라가 멸망할 때 구이(九夷)가 항해하여 중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후 흩어 져서 각기 북미 인디언 문화와 잉카,마야, 아즈텍 등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 이론의 요지였다.
“그 증거로 남미는 새를 숭상하는 봉 문화권입니다. 전부가 그 렇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지역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의 교류나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설혹 구이 의 정착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베링 해협을 건너간 존재는 틀림 없이 동북아 민족이니까요. 북미 인디언들과 남미 인디오들의 상투나 댕기와 비슷한 결발과 편두의 습성, 그리고…………….”
“아니, 학술적인 건 학자들에게나 맡기죠. 아무튼 정말 감사합 니다.”
황 교수의 말이 끝없이 길어질 것 같자 현암은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어쨌든 지금껏 갈 곳이 없어 동행하며 거의 짐 덩어리에 가까웠던 황 교수가 마지막에 이런 의외의 정보를 안겨 줄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승희는 아직도 믿을까 말까 하는 눈치였지만 박 신부는 기쁘게 말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해석되는 듯하군. 그 장소가 틀림없네. 느낌이 좋아!”
“그럼 ・・・・・・ 그 장소는 알았다 해도 어떻게 바이올렛을 찾죠? 무슨 보물도 아닌 사람인데, 지도에 표시된 점만 가지고는 찾을 수 없잖습니까?”
황 교수가 다시 말했다.
“지도상으로는 한 점이지만, 실제로는 꽤 넓은 지역입니다. 제 법 규모가 큰 인디오 마을이 있다고 들었는데 ・・・・・・ 문명과 거의 관계없이 옛 생활 방식을 고수하는 부족이라 찾아내기도 쉽지 않고…………… 사람 수도 무척 많을 겁니다. 더구나 외부인을 꺼리고요….”
“아이들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으니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현암의 말에 승희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 찾기가 그리 쉬운 게 아니지. 찾는 건 내 전문이라 말하 는 건데 얼굴을 안다고 찾을 수 있는 건 아냐. 그 사람이 어디 깊 숙한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면 어쩔 거야? 집집마다 모조리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자 박 신부도 말했다.
“연희 양도 그녀의 얼굴을 같이 보았다고 들었네. 더구나 라미 드우프닉스이기도 하니, 연희 양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찾 을 수 있을 걸세.”
“연희 양이 ……?”
바이올렛이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퇴마사 들은 지금까지 바이올렛에게 연희가 라미드 우프닉스라는 사실 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여기까지 같이 온 마당에 더 숨길 것은 없다고 여겨 누구도 그 사실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어쨌든 시간이 없네. 지금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아주 먼 길을 가야 하네. 일단 시간 내로 안데스 산맥까지는 가는 것 조차 큰일인데, 연희 양까지 찾아볼 시간이 과연 있을까?”
“다 내 잘못……..”
준후가 또 중얼거리자 현암이 조금 화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 좀 해라! 이미 지난 일이야! 그리고 네가 그런 수를 안 썼다면 연희 씨는 분명 고반다나 아하스 페르츠 같은 자들에게 큰 봉변을 당했을 거야. 만약 연희 씨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자들은 모조리 연희 씨만 노렸을 텐데, 과연 무사할 수 있었겠 니? 너는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연희 씨를 보호한 큰 공로가 있는 거야!”
그러고 나서 현암이 박 신부에게 물었다.
“그러면 두 패로 나뉠까요?”
그 말에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 좋지 않을 듯하네. 우리는 지금 기진맥진한 상태 고, 우리를 노리는 자들은 너무도 많네. 적어도 우리는 나뉘어서 는 안 돼. 일단 시간이 모자라더라도 최대한 빨리 연희 양을 찾 아보세.”
준후가 머리를 긁적이자 현암이 말했다.
“내가 찾아보죠. 아무래도 도인들이니 내가 이야기하는 게 잘 통할 겁니다.”
그러자 승희는 빽 소리를 질렀다.
“그 몸을 해 가지고 어딜 돌아다닌다고 그래!”
현암은 승희가 소리 지르자 약간 주눅이 든 듯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준호가 뭔가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할게요. 난 그동안 별로 한 일이 없어요. 그러니 내가 할게요.”
준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그래도 준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연희 누나는 도인들과 있을 텐데, 나는 이미 그 사람들하고 만난 적도 있고, 전후 사정을 잘 아니까 내가 적임이에요. 제발 요…….”
그러면서 준호는 준후를 향해 말을 이었다.
“나는 사부를 믿지 않고 내 눈을 더 믿었어. 어떻게든………… 어 떻게든 속죄를 하고 싶어. 제발 시켜 줘. 제발 뭐라도 나에게 시 켜 줘야…………. 안 그러면 …………… 안 그러면 …………….”
그러자 박 신부가 입을 열었다.
“네 마음은 알겠다. 그러나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된다. 시간이 별로 없거든. 우리는 연희 양을 찾아내지 못해도 출발해야만 한 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도인들이라 찾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무슨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니?”
그 말에 준호가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요! 저에게 맡겨 주세요! 제 생각으로는 하루 이틀 내로 연락이 될 거예요! 그러니 일단 병원에서 쉬고만 계세요.”
“어떤 방법이지?”
“사실 간단해요. 물론 저는 이곳 말도 못하고 지리도 모르니 돌아다닐 수 없어요. 그러니 그 사람들이 저를 찾아오게 만들면 되죠.”
“찾아오게 만든다고?”
“예. 그 도인들은 지금 사부를 찾고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사부와 비슷하다고 하니까……………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서 좀 튀는 행동을 하고 기다리고만 있으면 그 사람들은 곧 나를 찾아낼 거 예요. 안 그래도 그 사람들 또한 사부를 찾아 헤매고 있을 테고, 우리가 묵은 호텔 정도는 파악했을 거예요. 그러면 연락이 될 수 있죠.”
“더구나 그 사람들이 사부나 현암 형 등을 보면 의심하고 피하 거나 공격할지도 모르지만, 나를 보면 그렇게 안 할 거예요. 어 때요. 그렇죠?”
“하지만 너 혼자서는 불안하다…………….”
현암이 말하자 박 신부가 웃으며 현암의 말을 끊고 황 교수를 쳐다보았다.
“좋습니다. 그러면 황 교수님?”
“예?”
“교수님께 부탁드립니다. 준호를 도와서 연희 양을 찾는 걸 좀 도와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알려져서 ……………..”
“좋습니다.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야죠!”
황달지 교수가 쾌히 승낙하자 박 신부가 덧붙였다.
“그리고 준호야, 혹시 모르니 아라와 수아도 함께 가도록 해라.”
“그래야 하나요?”
“그게 좋을 거다. 그리고 말인데, 그 사람들이 네 이야기를 잘 납득하면 우선 연희 양을 여기로 오게 하고, 그다음에 이 편지를 그들에게 전해 주렴. 알겠니?”
그러면서 박 신부는 급히 메모지에 뭔가를 한참 적은 후 잘 접 어서 봉투에 넣은 다음 준호에게 주었다. 준호가 공손히 그 편지 를 받아 들자 박 신부가 다시 한번 당부했다.
“절대 그걸 먼저 열어 보면 안 된다. 알겠니?”
“물론이죠. 맹세할게요!”
준호는 황 교수와 함께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라와 수아를 데리러 여자 병동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박 신부는 한숨을 쉬었다.
“잘되어야 할 텐데…………….”
“그 편지는 뭐였나요?”
승희가 박 신부에게 묻자 박 신부는 빙긋이 웃었다.
“뭐 ・・・・・・ 별건 아니다. 아이들이 뭐라고 하든 그들을 꼭 붙잡고 그대로 우리나라로 돌아가 달라는 내용이었지.”
“예?”
승희가 놀라자 박 신부가 말했다.
“그러면 이런 위험한 일에 아이들을 더 끼어들게 해야겠느냐?
이제는 우리가 알아서 해야만 해.”
“동감입니다. 앞으로는…………… 설혹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저 아이들이 우리가 하던 일을 이어주겠지요.”
현암도 오랜만에 감상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외쳤다.
“약한 소리들 말아요! 꼭 죽으러 가는 사람들처럼! 뭐하는 거 예요? 악마 부스러기들이 있다고 그게 무섭다는 건가요?”
그 말에 박 신부까지도 조금 쑥스러운 듯 웃으며 알았다는 시 늉을 했다. 바이올렛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에게도 시간을 좀 주세요. 나는 아녜스 수녀를 설득해 볼게 요. 그리고 안 되면 그 무색인지 하는 땡초라도, 그들도 아직 여 기를 떠나지는 않았을 거예요.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
좀 의외의 말이라 현암과 박 신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을 설득한다고요? 그렇게 될까요?”
“안 될 이유가 없죠. 우린 이제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잖아요?”
“공통의 목적이라뇨?”
박신부가 되묻자 바이올렛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러면……. 설마, 설마…. 정말 검은 바이올렛을 도와줄 생각인가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린 그 때문에 여기까지 온…….”
“뭐라고요? 당신들 이야기는 잘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상대는 검은 바이올렛이라고요! 그 마녀를! 그 악마를 돕는 게 정말 세상을 구하는 길이 될 것 같아요? 예?”
바이올렛이 완강히 떠들었다. 바이올렛도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그들의 의견에 동감했지만, 이번 징벌자의 어머니가 검은 바 이올렛이라는 말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했다.
현암과 박 신부는 그래도 바이올렛을 설득해 보려 했지만 바 이올렛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외쳤다.
“말도 안 돼요! 나는 당신들을 존경하고………… 친한 친구로 여 기지만…………! 이것만은 안 돼요! 당신들은 틀렸어요! 구원받을 수 없는 악을 보호하다뇨! 그런 것으로 어떻게 세상이 구해지나 요? 이론은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 이에요!”
“그렇지 않소!”
“아니에요! 당신들은 지금 무언가에 홀렸어요! 검은 바이올 렛을 그냥 두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녀가 가진 힘을 직접 보셨죠? 아하스 페르츠보다도, 고반다보다도 그녀가 훨씬 더 무서워요! 그런 그녀를 보호하는 게 세상을 구하는 길이라고 요?”
“검은 바이올렛을 그냥 두자는 게 아닙니다. 그녀는 죗값을 치러야 하지만, 최소한 그녀가 낳을 아기는 보호해야 한다는 겁 니다.”
“그 아기는 악마의 씨앗일지도 몰라요! 아아……………. 안 돼! 안 돼! 당신들은 당신들 때문에 이미 여러 사람이 죽었어! 그 잘난 이론 때문에 여러 명이 죽었는데도! 당신들은……………! 당신들이야말로 악마들이야!”
바이올렛은 외치다가 그만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승희와 현암은 힘이라도 써서 바이올렛을 잡을까 했으나 지금까지의 인 연이 떠올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박 신부는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괜찮을까요?”
승희가 걱정스러운 듯이 묻자 박 신부는 대꾸했다.
“할 수 없지. 그냥 스스로 생각하게 두자꾸나.”
현암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준후는 일말의 불안감이 드 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연희도, 바이올렛도 돌아오지 않았다. 박 신부는 마침내 결심한 듯, 승희에게 말했다.
“할 수 없는 것 같군. 승희야, 혹시 그 시타 교수라는 사람, 아 직도 있는지 봐주겠니?”
“그 사람은 왜요?”
“부탁할 게 있어서 말이다.”
승희는 그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갔다가 곧 시타 교수를 데리고 왔다. 시타 교수는 여동생처럼 여기는 로파무드가 걱정이 되어 늦은 시간까지 집에 가지 않고 병동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시타 교수를 보자 박 신부가 정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초면에 부탁해서 죄송스럽습니다만…..”
“죄송이라뇨? 천만의 말씀. 말씀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시타 교수는 이미 로파무드와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퇴마사들 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서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비록 생김새 는 낯설고 흉악해 보였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믿을 수 있는 사람 같아서 박 신부는 안심하고 말했다.
“로파무드 양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 연희 양 이 여기를 방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연희 양을 만나게 되면 저 에게 연락을 취해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박 신부는 위성전화 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 위성전 화는 과거 백호에게서 받은 것이었는데, 지난번 고반다를 만나 러 갈 적에는 휴대하지 않아 무사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시타 교수가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걸 아시면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냥 전화번호만 일러 주 십시오. 그리고 ・・・・・・ 로파무드 양은 아마 근일 내로 정신을 차릴 겁니다. 몸이 아픈 것은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고 나서 박 신부는 시타 교수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한 뒤 그를 내보냈다. 시타 교수가 밖으로 나가자 박 신부가 현암에게 말했다.
“가야 하지 않겠는가?”
현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죠. 아무래도 바이올렛이 불안합니다. 혹시라도 바이올렛이 아녜스 수녀와 한편이라도 된다면…………….”
승희는 그 말을 듣고 외쳤다.
“바이올렛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요! 그녀는 우리가 갈 장소도 알잖아요! 어서 어떻게든 그녀를 저지하는 편이 안전할 것 같은데요?”
준후도 맞장구쳤다.
“맞아요. 뭐 해치지는 않더라도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하는게…”
허나 박 신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마음이 떠났다면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그녀를 해칠 수도 없고, 끌고 다닐 수도 없지 않겠니? 더구나 바이올렛의 입 을 막는다 해도 아녜스 수녀나 무색 화상 등이 그 장소를 못 찾 을 만큼 무능하다고는 보이지 않는구나. 그들은 이제 타보트까 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박 신부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현암과 준후, 승희를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제 막바지에 와 있네. 솔직한 심정으로, 자네들은 전부 보내고 나 혼자 가고 싶은 마음뿐일세.”
이내 현암이 짧게 되받았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같이 갈 겁니다.”
“저도요!”
현암에 이어 승희도 외쳤다. 준후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결 심한 듯, 굳게 입을 다물고 눈을 빛냈다.
그런 세 사람을 보고 박 신부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같이 가야겠지…………. 하지만………… 하지만 말일세. 이번만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될 거라 여기네. 만약 우리를 막아서 는 무리들이 악마들뿐이라면 차라리 나을 테지만, 이단 심판소 나 용화나 다른 사람들은 결코 악인들이 아닐세. 우리와 의견 을 달리할 뿐이지.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해치거나 상처를 입혀 서도 안 되네……………. 결국………… 우리는 절대로 이길 수도 없고 이 겨서도 안 되는 싸움을 하러 가는 걸세………. 오로지 설득할 수 있을 때까지 설득해 보고, 그것도 안 되면 되는 데까지 막아 내 고 또 막아 내는 수밖에는 없어. 솔직히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보네 ………….”
그 말에 현암이 단호히 말했다.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가려 가며 할 거면 처음부터 이런 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옳다고 믿으니까 행동하는 겁니다.”
“솔직히 이번에는 나도 자신이 없군. 정말 위험할 수도 있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겠지요.”
현암의 말에 승희는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승희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하지만 생각보다는 너무 빨리 왔네.”
그러나 현암은 승희의 말을 듣지 못하고 다시 덧붙였다.
“사실 신부님이 아까 하신 말씀, 공감은 합니다. 한 명의 억울 한 아기를 위한 일도 값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솔직히, 그런 기 분으로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과거 도혜 선사님의 유지도 들은 바 있고, 한빈 거사님의 말씀도 들은 바 있습니다. 제 개인 적인 일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분들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칫 잘못될 수 있는 세상을 구해야만 합 니다. 지금 물러설 순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박 신부는 현암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곧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선동자가 아니니 내 말대로 하기만을 바라지도 않아. 그 러나 고맙네……………”
현암 역시 박 신부를 강하게 빛나지만 미소 머금은 눈빛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신부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껏 헛되이 떠돌고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승희가 샐쭉거리며 나섰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유언 남기듯 말할 건 없잖아요!”
그러고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난 좀 무서워요. 그래도 지금 빠질 만큼 나는 뻔뻔스럽지 못하거든요.”
준후는 승희의 말을 듣고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난 잘못한 것이 너무 많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해야겠죠.”
그러다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아직도 해동감을 믿어요. 비록 많은 부분이 잘못되 었다지만, 그 감결에도 근본적으로는 세상을 구하라고 되어 있 었어요. 그것만은 믿고 따를까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저지른 많 은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그 말에 현암이 웃으며 준후의 어깨를 탁 쳤고, 박 신부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잘못은 없단다.”
차라리 저 혼자 가겠어요. 저 혼자 희생하는 게 낫죠. 나는 별로 다친 데도 없고, 또…….”
박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현암이 나섰다.
“모두 같이 가자. 한 사람이 희생하는 것보다 넷이 힘을 합하는 게 더 나을 거야. 아니, 희생이라는 단어, 이젠 지긋지긋하다. 더 이상 그런 말은 적어도 우리 사이에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가자꾸나. 내 옷 짐이나 좀 챙겨 주렴.”
박신부가 몸을 일으켰다. 승희는 얼른 박 신부를 부축해 일으 킨 다음 짐을 챙겨 들었고 현암이 몸을 일으키자 준후가 현암을 부축했다. 현암은 짐을 챙기다가 청홍검이 있는 것을 보고 씁쓸 히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아라에게 물려주라고 했던 것인데, 아 라를 한국으로 따돌려 보낸다고 했으니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줬다가 금방 뺏는군. 이거 욕먹겠는데……………..”
현암은 청홍검을 자신의 가방에 찔러 넣으며 말끝을 흐렸다.
“페루까지 비행기를 알아봐야겠는데…………. 굉장히 오래 걸릴 거예요. 다치신 몸으로 어떻게 그 긴 거리를…………….”
승희가 걱정하자 박 신부는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앉아 가는 건데 못 갈 이유가 뭐 있겠니? 내 염려는 말거라.”
현암도 온몸이 쑤셔 왔지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오래 앉아 있으면 되레 좋지 뭐. 공력이나 닦으면 돼.”
“어디로 가지?”
“일단 공항으로 가자. 그 수밖에는 없잖아?”
“글쎄 ・・・・・・・”
이야기를 나누며 네 사람은 조용히 병원을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