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13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6 : 잘못된 예언
잘못된 예언
“고맙습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한 현암이 맨 처음 입 밖으로 낸 말이었 다. 그 말에 아하스 페르츠, 아니 해밀튼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별 말씀을.”
박 신부는 몹시 기력이 빠졌는지 아직도 기절 상태였고 승희 도 어지러워 의자에 푹 파묻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준후는 연희 에게 가서 눈물을 흘리며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연 희를 도인들 손에 넘겼던 일을 사과하는 모양이었다.
현암은 비행기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준호와 아라, 수아 그 리고 황달지 교수, 시타 교수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로파무드를 비롯하여 해밀튼과 조종사가 탑승자의 전부였다. 탑승자에 비해 비행기가 상당히 큰 편이라 자리가 많이 남았다.
“이 비행기 ……………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까?”
현암이 묻자 해밀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 전용기요. 추가 연료 탱크가 있어서 지구 반대쪽이라도 한 번에 갈 수 있소.”
“비행기가 여러 대 있네요. 당신, 정말 부자군요.”
조금 기운을 차린 듯, 별생각 없이 꺼낸 승희의 말에 해밀튼이 고지식하게 대꾸했다.
“오랜 세월을 살다 보면, 돈은 얼마든지 생기는 법이오. 쓸 만 해 보이는 물건을 발견하고, 그걸 그냥 지니고만 있으면 되지. 한 삼사백 년 지나면 무서울 정도로 값이 오르거든. 은행을 이용 하는 방법도 있고. 뭐, 은행이 없는 시절에도 비슷한 것은 있었 으니까.”
“은행요?”
“일 달러를 연리 오 퍼센트로 삼백 년만 맡겨 두면 얼마가 되 는지 아시오?”
“모르겠는데요?”
“대강 이백이십칠만 달러가 되지. 백 달러라면 이억 이천칠백 만달러가 되고, 물론 한 구좌에 그만큼 오래 넣어 둘 수 없으니 몇 년 단위로 계좌를 바꿔야 하지만.”
그 말에 현암이 웃었다.
“당신이 예전에 천오백만 달러를 그토록 쉽게 제시한 것도 이 상하지 않군요. 당신에게는 삼백 년 전 칠 달러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듣자 해밀튼은 가볍게 웃어 보였고 현암도 싱겁게 웃었다.
“좌우간 좋은 방법이군요. 하지만 나는 삼백 년을 기다릴 수없거든요.”
“나에게 시간은 처치 곤란할 정도로 많으니까. 그건 그렇고……..”
해밀튼은 본론을 꺼내려는 듯 현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뭘 할 거요?”
“뭘 하다뇨? 남미로 가야죠.”
“남미?”
“예. 페루로 가야 합니다.”
“거긴 무슨 일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었소?”
“아닙니다. 일을 끝내야죠.”
현암의 말에 해밀튼은 눈을 약간 찡그려 보였다.
“역시………………”
“예?”
“나는 지금 아하스 페르츠가 아니오. 그렇다고 해밀튼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해밀튼에 가깝소. 그러니 나 를 해밀튼이라 불러 주시오. 나에게 이제는 복수심이나 증오는 거의 남지 않았소. 모든 것이 당신들 덕분이지.”
현암은 해밀튼이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조금 어리둥절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내가 타보트를 얻으려 한 것은 아하스 페르츠를 없애기 위함 이었고……. 비록 타보트를 손에 넣지는 못했지만 이제 아하스 페르츠는 없어졌소. 나는 당신들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거요. 그래서 달려온 것이오. 허나……..”
현암은 해밀튼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보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이 아직도 악마들 편을 든다면 나는 당신들을 저지해야만 하오……………”
“우리는 악마들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현암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에 놀라 다시 잠을 청하려던 승희가 번쩍 눈을 떴고 아이들과 준후, 연희 등도 이쪽을 바라보 았다.
그러나 해밀튼은 단호히 말했다.
“당신들은 속고 있소.”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이건……”
해밀튼은 현암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약간 언성을 높였다.
“나는 이제 아하스 페르츠의 기억을 공유하게 되었소. 처음에 는 너무 의외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어 약간 당혹스러웠지만, 좀 더 생각해 보니 금방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소. 전에 아하스 페르츠가 당신을 비행기 안에서 죽이려 했을 때, 악마가 나타났 소. 그 때문에 아하스 페르츠는 당신을 죽이는 것을 많이 꺼려하 게 되었으며, 결국 악마가 당신을 구해 주었소. 또 칼키파의 신 전 아래에서 아기들의 영혼이 습격해 왔을 때는 나조차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소. 그때 아기들의 영혼을 물러가게 한 것은 악마인 블랙 엔젤이었소.”
“아닙니다! 그때 아기들의 영혼을 물러가게 한 것은 저 아이들입니다.”
현암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해밀튼은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들 덕분에 영혼들이 금방 우리를 덮치지는 않았지. 그 러나 저 아이들을 설득하고 있을 때도 영혼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소. 하지만 그들은 결국 물러갔고, 그들을 물러가게 만든 것은 바로 블랙 엔젤의 힘이었소.”
‘그렇다면 블랙 엔젤이 바이올렛이란 말인가?’
현암은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채 그 말을 묻기도 전에 해 밀튼이 말했다.
“악마들은 당신들을 이용하고 있소. 하지만 당신들은 나쁜 사 람이 아니며, 나는 당신들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소. 당신들은 지금 계획하고 있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적그리 스도의 탄생을 악마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소. 그래서 악마들은 당신들에게 최후의 힘을 짜내게 하여, 그를 보호하기 위해 당신 들을 이용하고 있는 거요.”
“우리가 무슨 큰 힘이 있다고 우리를 이용하려 하겠습니까?”
“아니오. 악마들의 힘은 강하지만, 많은 사람들과 신앙의 힘 앞에는 이길 수 없소. 더구나 악마들이 직접적으로 인간의 일에 관여하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소. 그래서 그 들은 인간들을 이용하지. 나도 그랬고, 고반다도 그랬으며 바이 올렛도 결국 그 범주 안에 있소. 이제는 당신들도 그렇소. 당신 들의 힘도 강하지만, 무엇보다 당신들의 의지가 사람들의 기를 꺾는 거요.”
“의지가……?”
“그렇소. 당신들은 악인들이 아니오. 오히려 눈물이 날 만큼 의인들이라 할 수 있소. 당신만 하더라도 과거의 나……… 아하스 페르츠 같은 괴물도 따뜻한 시각으로 보아 주었고, 이후에도 그 런 마음을 버리지 않았소. 그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 신들을 해칠 수는 없을 것 같소. 그리고 그런 것은 다른 사람들 에게도 해당되겠지. 당신들은 인덕이 있소. 그것은 악마들로서 는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오. 그런 당신들을 조종하여 적그리 스도를 보호하게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절반은 그들 편이 된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현암은 당장 변명하지 않고 조용히 해밀튼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현암의 표정을 보며 해밀튼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결론을 말하자면, 현재 당신들은 위험한 상태요. 하 지만 난 이단심판소건, 다른 어떤 자들이건 당신들에게 손을 대 거나 해치지 못하게 해 줄 것이오. 그러나 당신들도 이 비행기 안에서 더 이상 밖으로 나갈 수 없소. 일이 모두 끝나는 나흘 동안 당신들은 이 안에 있어야 하며, 내가 절대 당신들을 내보내주지 않을 거요.
저 조종사는 절대적으로 내 말만 듣는 사람이며, 만에 하나 내 가 당신들에게 제압당하면 그대로 탈출하거나 자살해 버릴 거 요. 적그리스도 문제에서는 이제 손을 떼시오. 아마 수많은 자들 이 몰려갈 테니 알아서 제대로 처리가 될 거요.”
“어떻게 그런 사실들을 알았죠?”
“나는 아직 성당 기사단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소. 그 리고 그중에는 이단 심판소와 줄이 닿는 사람도 있고 말이오. 아 녜스 수녀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는 자들 중에서도 나와 통하는 자들이 몇몇 있소. 나에게 비밀이란 없다오.”
승희는 아까 현암이 소리 지를 때부터 눈을 떠서 해밀튼의 이 야기를 듣고 있었다. 승희는 거의 낙담하고 있었다. 어떻게 벗어 날 수 있겠는가? 지금 일행의 상태로는 해밀튼을 물리칠 수 없거 니와 물리친다 해도 조종사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끝장이지 않는가?
그때 저만치에서 준후가 외쳤다.
“그래선 안 돼요!”
그와 동시에 연희가 앞으로 나서자 해밀튼은 현암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가씨가 계시니 이야기하기가 불편하군.”
그 말을 듣는 순간 연희는 불쾌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있으면 왜 이야기를 못한다는 거죠? 항상!”
연희는 사실 특별히 준후를 나무라지 않았으나 내심 상당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다른 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 일에 는 모든 사람들이 연희를 따돌리려는 낌새가 있음을 그녀도 진 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왜 이번 일에서만은 내 앞에서 그 어떤 종류의 깊은 이야기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왜 이번 일에서만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빼돌려 안전한 장소에 두려고 하는 것일까? 연희는 답답해서 견 딜 수 없던 차에 해밀튼의 말을 듣자 곤두섰던 신경이 폭발해 버 린 것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일단 저와 우리 일행을 이렇게 그 위기 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에는 고맙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왜 나만 구하신 거죠?”
연희가 무섭도록 빠르고 능숙한 말로 쏘아붙이자 해밀튼은 조금 당혹해했다.
“무슨 소리요?”
“저는 아까 아녜스 수녀와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어요. 거기 서 당신은 나를 구했죠. 그런데…………… 왜 성난큰곰은 구하지 않은 거죠?”
결정적인 순간에 공항의 유리창을 깨트리고 튀어나가 연희를 구해낸 것은 바로 해밀튼이었다. 현암이나 박 신부나 준후라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능력자들의 사이에서 사람을 구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아이들과 황달지 교수에게 안전한 길을 일러 주고, 그들 을 추격하는 수많은 무리들의 무서운 공격을 한 몸으로 받아 넘 긴 것도 해밀튼이었다. 그러나 해밀튼은 그때 연희를 구했지, 중 상으로 쓰러져 있는 성난큰곰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연 희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럴 여력이 없었소.”
“그건 말이 되지 않아요. 그때는 나와 성난큰곰, 두 사람 다 적 들의 가운데 있었어요. 그리고 보통의 경우라면 당연히 중상을 입은 성난큰곰을 먼저 구할 거예요. 나는 그때 아녜스 수녀에게 계속 손목이 잡혀 있었고 성난큰곰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상태 로 땅에 쓰러져 있었어요. 그를 구하는 것이 나를 구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을 테죠. 그런데 당신은 나부터 구해 냈어요.”
“여자를 먼저 구하는 게 순서요. 더구나 더 위험한 처지에 있 었으니 말이오.”
해밀튼은 궁색한 대답을 했지만 연희는 고개를 저었다.
“더 위험하다고요? 성난큰곰은 숨이 끊기기 직전이었어요. 좋 아요. 아무튼 당신이 성난큰곰을 못 보았다고는 하지 않겠죠? 그 건 부정할 수 없겠죠?”
“그렇소.”
“그렇다면 당신이 아녜스 수녀를 밀치고 나를 구해 냈을 때, 손을 한 번만 더 뻗으면 그도 구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 신은 그대로 아이들이 달아난 방향으로 달려가 버렸어요. 왜 그 를 버렸죠?”
해밀튼은 의외의 질문에 당혹해하면서도 수천 년을 살아온 사 람답게 금세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그는・・・・・・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오. 아무리 나라도, 거기 모 인 수많은 자들을 혼자 당해 낼 수는 없지 않소? 움직임이 느려 지면 잡힐 것 같아서…………….”
그럴듯한 변명이었지만 연희는 납득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 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알기에 당신은, 현암 씨보다도 강한 사 람이에요. 보통 사람이라면 몰라도 당신만 한 사람이 그만한 무 게를 이겨내지 못할 리 없어요. 해밀튼 씨, 소모적인 대화는 그 만두죠.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당신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해밀튼은 뭐라 부정하려 애썼지만 연희는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어요. 준후는 주술 막 안으로 들어가면 서도 굳이 나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때리기까지 했어요. 아이들까지 데리고 들어가면서 말이에요! 왜 그래야 했지?”
연희가 날카롭게 외치면서 준후를 바라보자 준후의 얼굴은 하 얗게 질렸다. 준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연희는 이번에는 현 암과 승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승희야, 난 너도 믿었어. 친동생같이 생각했어. 하지만 너는 이번 일이 시작되자마자 세크메트의 눈을 받아 갔고, 내내 나에 게 한마디도 해 주지 않았어.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어떻게 진 행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떤 어려움이 있다는 이야 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다른 때에는 그런 적이 없었는 데…………. 도대체 왜 그런 거니, 응?”
승희도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연희는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결국………… 결국 모든 게 나 때문이니? 나 때문에 세상이 흐트러지는 거야? 세상이 망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 언니!”
승희가 다급하게 말했으나 연희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게 아니면 대체 뭐야! 그것밖에………… 그것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
연희는 원래 온화하고 참을성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 런 사람이 폭발하면 후유증이 더 큰 법이라 연희는 거의 패닉 상 태에 빠져든 것 같았다. 하지만 해밀튼까지를 포함한 상황을 알고 있는 모두는 속이 타서 미칠 지경이었음에도 무어라 변명의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황달지 교수, 시타 교수 등은 상황을 몰랐기 때문에 멍하니 연 희를 바라만 보았다. 아라는 연희가 불쌍하다고 여겨서 뭔가 말 하려 했으나 준호가 잡았다. 적어도 지금은 끼어들 상황 같지 않 아서였다.
현암이 굳은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연희 씨, 미안합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세요. 이번 일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모든 게 연희 씨를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서라고요? 난 그런 것 필요 없어요! 나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왜 불안한 겁니까? 연희 씨. 결코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 다. 그러나 알지 말아야 할 것도…………….”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연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연희에게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진실이라구요!”
현암도 버럭 화가 치밀어서 마주 보고 소리를 쳤다.
“당신에게는 알려 줄 수 없는 게 단 한 가지 있는데, 그게 바로 진실이오!”
현암이 소리를 치자 비행기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급기야 연 희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현암은 몹시 당황해 화를 풀고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 씨, 당신은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것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마세요.”
연희는 흐느끼면서 간신히 말했다.
“나는・・・・・・ 나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나 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죠? 그 것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얼마나………… 얼마나 불안한 지 알아요? 성난큰곰이 …………… 그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데………… 그는 구원받지 못했어요. 나 때문에…………… 내가 그렇지 않았다면 ・・・・・・ 그가 여기 있을 텐데 ・・・・・・ 그건 ・・・・・・ 그건……. “
그때 승희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얼른 연희를 부축했다.
고개를 들어 연희가 준후를 보고 말했다.
“준후야, 날 기절시킬 수 있니?”
“예?”
“차라리 그러고 싶어. 난 아무것도 모르는 게 좋다면서? 하지만・・・・・・ 너무 신경이 쓰여.”
그러자 해밀튼이 일어섰다.
“수면제를 드리겠소.”
해밀튼은 기내의 한 벽장에서 병 하나를 꺼내 약 몇 알을 털어 손에 들고 연희 앞으로 걸어갔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내 생각이 짧았던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죄송합니다. 당신에게는 너무도 불안한 일이었겠지요. 그러나…………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연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더요? 나흘 동안?”
해밀튼은 연희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만약 성난큰곰이 지금까지 죽지 않았다면, 내가 무슨 수를 써 서라도 그를 구해 내겠소. 바티칸을 초토화시키는 한이 있어도 말이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해밀튼이 내미는 약을 연희가 힘없이 받으려는 순간, 누군가 가 해밀튼의 손을 탁 뿌리쳤다. 준후였다. 바닥에 흩어지는 약을 힐끔 노려보다가 준후가 연희의 앞을 막아섰다.
“난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준후가 서툰 영어로 말했다. 그 말에 해밀튼은 침울한 안색으 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연희와 승희를 비롯해 모두가 놀랐지 만 전혀 개의치 않고 준후가 날카롭게 말했다.
“연희 누나, 눈을 감아요.”
준후는 연희가 눈을 채 감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수인을 짚으 며 연희의 머리 위에 원 하나를 그렸다. 이내 연희는 힘없이 눈 을 감고 쓰러졌다. 그리고 승희가 얼른 연희의 몸을 받아 안아 뒤쪽의 칸막이가 쳐진 곳으로 옮겼다.
해밀튼은 잠시 침울하게 서 있다가 땅에 떨어진 약을 주웠다.
준후가 재빨리 그중 한 개의 알약을 집어 들었다.
해밀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나를 정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이것을 먹겠네.’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준후는 현암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형! 왜 바보같이 그냥 있는 거예요? 해밀튼 씨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도 세상을 구하는 데에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다구요.”
“무슨 소리니?”
“형! 지금 어른이 된 라미드 우프닉스는 해밀튼 씨가 다 죽였 고, 이제 연희 누나 한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구요. 그리고 해 밀튼 씨가 저걸 먹어도 해밀튼 씨는 죽지 않아요. 그는 아하스 페르츠니까요.”
해밀튼은 준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준후의 완강한 모습 에 분위기는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현암 의 얼굴을 보았다. 현암이 준후의 말을 그대로 전해 주자 해밀튼 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오. 맞소, 내가 그런 짓을 했소. 하지 만 내가 직접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니오. 알다시피 내가 라미드 우프닉스를 건드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 그래서 그 비밀을 알 고서 라미드 우프닉스를 수호하는 내 부하들은 상황이 위험해지면 즉시 보호하던 라미드 우프닉스들을 모두 죽이도록 되어 있 었소.”
현암이 눈살을 찌푸리자 해밀튼은 천천히 말했다.
“변명할 생각은 없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정도 뿐이었소. 나는 내 안에 잠든 아하스 페르츠가 다시 깨어나면 제 일 먼저 그들을 죽이려 할 것이라는 걸 알았소. 그래서 ……………. “그렇다면 연희 씨를 제외한 라미드 우프닉스 모두가 죽은 건가요?”
“전원이라고는 할 수 없소. 그러나 나는 알려진 라미드우프닉 스는 거의 다 파악하고 있었소. 그리고 알려진 사람 중 지금 남 은 사람은 저 아가씨뿐이오. 나머지 사람들은 아기로 다시 태어 나려 하거나 태어났겠지. 혹 몇몇이 더 있을지 몰라도 그건 아무 도 모를거라 생각하오.”
“당신은 대체 어떻게……………..”
현암이 화를 내려는데 갑자기 박 신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탈 진해 쓰러져 있던 박 신부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잠깐만・・・・・・ 우선은 이야기를 들어 보세나.”
박신부가 말하자 현암과 준후 모두 입을 다물었다. 박 신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해밀튼에게 물었다.
“기내에 다른 별실이 있습니까?”
“있소. 아까 연희 씨가 간 별실도 그렇고, 그 뒤쪽에 또 다른 공간이 있소.”
박신부가 준후를 쳐다보았다.
“준후야, 네가 아이들을 데리고 그리로 좀 가 있어 주겠니?”
준후는 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박 신부 의 말이라 아이들을 데리고 비행기 뒤쪽으로 갔다. 곧이어 황달 지 교수도 눈치 빠르게 시타 교수를 끌고 준후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 박 신부와 현암, 그리고 해밀튼만이 남게 되었다. 먼저 박신부가 입을 열었다.
“우리를 정말 못 가게 할 생각이십니까?”
“그렇소. 첫째로 당신들이 악마들의 계획을 방조하게 놔둘 수 없고, 둘째로는 당신들의 안전을 위해서요. 당신들이 그곳에 간 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거요.”
박 신부는 무겁게 한숨을 쉬더니 잠시 작은 소리로 기도를 했 다. 그러고는 해밀튼에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 합니다.”
“당신들은 갈 수 없소.”
“왜 갈 수 없다는 겁니까? 어째서 우리가 악마들의 계획을 방조한다는 거죠?”
“내가 아하스 페르츠에서 지금의 나로 돌아오게 된 직후부터 줄곧 생각해 보았고, 몇 가지 결론을 얻었소. 징벌자는 제거되어 야만 하며, 그래야 한다는 증거는 많이 있소.”
“하지만…………….”
현암이 뭐라 말하려 하자 박 신부가 조용히 현암을 만류하고 대신 말했다.
“지금 우리가 말해 봐야 당신은 듣지 않겠지요?”
“미안하지만 그럴 것 같소.”
“우리가 당신을 이길 수도 없겠지요?”
“이긴다 해도, 비행기 조종법을 모른다면 죽음을 자초할 뿐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암이 발끈했다. 박 신부는 성질을 내려는 현암을 말리며 조용히 뭔가 고민해 본 다음 입을 열었다.
“일단 이야기를 좀 나누어 보십시다. 아직 분명하지 않은 사실 이 몇 가지 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숨길 생각은 없소. 당신이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드릴 수 있소.”
“감사합니다. 일단 라미드 우프닉스의 주술에 대해 알고 싶습 니다. 그리고 아하스 페르츠의 계획에 대해서도…………….”
그러자 해밀튼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이제야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소. 라미드 우프 닉스의 주술……………. 모든 것의 시작은 여기서 비롯된 거요. 인간 을 멸망시키지 않으려고 인간이 만든 것이 결국은 인간의 목을 조이는 셈이니까.”
현암은 해밀튼을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박 신부는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모든 것을 안다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아시게 되었죠?”
“나는 지금껏 아하스 페르츠가 무엇을 바랐는지 몰랐지만, 이 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뭐, 구태여 말하자면 그도 나의 일부였지 만, 이제 그의 인격은 없어진 것 같으니 타인처럼 이야기하겠소.”
“아하스 페르츠가 바라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세상의 종말이 오기를 바랐소. 그래서 자신을 이 지경으 로 만든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그가 바라 는 일이었소. 하지만 말세가 저절로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몹 시도 지루한 일이었지. 그것은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소.
그래서 그는 말세를 앞당길 방법을 찾으려 했지. 물론 그의 힘 을 동원하면 전쟁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으로 인간이 멸망하지는 않으리라고 그는 봤소. 인간 스스로의 어리 석음과 그들 스스로가 쌓아 온 큰 죄악이 있어야만 인간의 말세 가 도래하는 것이며, 그때 그리스도가 재림할 테니까 말이오. 그 러기 위해 그는 라미드 우프닉스의 주술을 이용하기로 생각한 거요.”
“그 주술에 대해서는 대략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그러 나 이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라미드 우프닉스를 죽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으니 그건 끝난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소. 나도 아직 모르던 비밀이 있었소.”
“그게 뭔가요?”
“아하스 페르츠나 고반다는 스스로 움직인 것이 아니오. 그들 은 모두 악마의 힘을 받았고, 그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소. 그리고 내 짐작이 맞다면, 바이올렛 역시 그러할 거요.”
박 신부와 현암은 뜻밖의 새로운 사실을 듣자 놀란 눈으로 잠 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바이올렛이 그렇다는 것은 예측했지만, 아하스 페르츠나 고반다는 각각 개인적인 목적으로 말세가 오기 를 바랐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해밀튼은 두 사람의 놀란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아하스 페르츠는 그리스도를 상대하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 았소. 사실 악마가 미리부터 그것을 계획했는지도 모르지. 그리 고 바이올렛은 말할 것도 없고, 고반다 역시 악마의 부하나 마찬 가지였소.”
“하지만 고반다의 오라는 너무나도 순수했소. 그가 악마와 손 을 잡았다는 건……”
박신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아하스 페르츠가 이내 되받았다.
“내가 알기로, 고반다의 몸을 둘러싼 오라는 고반다의 것이 아니오.”
“그러면……?”
“그것은 인도 성자들의 영혼의 정수를 담은 힘이오. 그리고 아 마도 당신들이 바바지라 부르던 사람의 힘도 포함되어 있을 거 요. 그 오라는 고반다를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고 반다에게서 세상을 보호하기 위해 쳐진 것이오. 그는 오라 막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고반다의 정체는…”
“지금과 비슷한 위기가 오래전에 있었소. 구태여 그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오만, 그는 오십 년 전에 악마 들의 사주를 받아 세상에 보이지 않는 위협을 가하려 했소. 그리 고 그때도 지금의 당신들처럼, 세상을 종말로 몰고 갈 수도 있었 던 위기를 막아낸 사람들이 있었고, 고반다는 그 사람들의 희생 으로 오라 막에 갇혀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오.”
“보이지 않는 위협이라니…………….”
현암이 약간 어깨를 움찔하며 중얼거리자 해밀튼은 조용히 말했다.
“그 오라가 없었다면 당신들 전부와 내가 합세했어도 고반다 를 당해 낼 수 없었을 거요. 하지만 그는 오라에 갇힌 다음에도 그 오라의 광채를 빙자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고 많은 사 람들을 타락시켰소. 내가 알기로 그는 바바지의 수제자 한 사람 을 타락시켜서 세상을 뒤엎을 음모를 꾸미게 은연중에 조작한 것으로 알고 있소.”
“바바지의 수제자? 그렇다면 혹시…”
“그렇소. 당신들이 상대했던 자, 블랙 서클을 만들었던 마스터 요. 나도 그의 진짜 이름은 모르오만.”
“그랬군요.”
현암은 한참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전에 고반다와 대적했을 때 가졌던 모든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바바지 님이 마지막 순간에 고반다와 대면했을 때, 스스로 사라지신 것 또한……?”
“그렇소. 아마도 고반다를 둘러친 오라 막을 보강하는 의미 였겠지. 아무리 고반다의 영향으로 타락했다고는 하나 마스터 의 행동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여기고 그런 길을 갔을 수도 있고.”
“허나 그 때문에 고반다는 사람들의 믿음을 얻게 되어 칼키파 의 세력이 커졌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고반다가 만약 스스로의 힘으로 과거의 속박에서 벗 어날 수 있었다면 피해는 더 컸을 거요. 고반다가 바바지를 직접 만나러 간 것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오. 아마도 고반다 스스 로 그 막 안에서 힘을 키워 그것을 바바지의 눈앞에서 깨뜨리려 했을지도 모르지. 바바지는 그 사실을 눈치채고 그를 가둔 오라를 보강하여 그가 날뛰는 것을 막았고 말이오.”
현암은 그제야 바바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고개를 끄 덕였다. 그때 박 신부가 화제를 돌렸다.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당신은 악마들의 계획을 안다고 했는데, 그건 뭡니까?”
해밀튼은 짧게 한숨을 내쉬다가 입을 열었다.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흘렀소만,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단도 직입적으로 말해, 악마들은 모든 힘을 다해 징벌자의 탄생을 지 키려 하고 있소. 그들은 징벌자의 탄생이 예언가들에 의해 알려 졌다는 것도 알고 있고, 다름 아닌 라미드 우프닉스 주술의 영향 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그 때문에 악마들은 나나 고반다 등을 시켜 가능하면 라미드 우프닉스를 죽이도록 하여 말세를 앞당기 려 했소. 그리고 꼭 말세를 앞당기지는 못하더라도 라미드 우프 닉스를 없애는 것은 필요했소.”
“어째서죠?”
“라미드 우프닉스는 심연의 눈을 지녔으며, 그 때문에 징벌자 의 탄생을 미리 알아볼 수 있다고 하오. 그러니 징벌자를 보호하 려면 라미드우프닉스가 없어져야 하는 거요.”
“그러나 지금 라미드우프닉스는 연희 씨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잖습니까? 그 말대로라면, 우리 외의 다른 사람들은 라미드 우프닉스를 찾지 못할 텐데요?”
현암이 지적하자 해밀튼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다른 방법을 쓸 거요. 라미드우프닉스가 없어도 징벌자를 찾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다른 방법이라고요? 그런 방법이 있나요?”
“몇 가지가 있을 수 있소. 그리고 악마들은 우리로 하여금 만 약 라미드 우프닉스를 죽이지 못한다면 일을 방해할지도 모를 강력한 능력자나 주술사들을 해치라고 했소.”
“주술사나 능력자가 징벌자의 탄생을 꿰뚫어 볼 것이기 때문에?”
“그렇소. 나는 그 의도를 알기 때문에 당신들의 생각에 절대 동조할 수 없는 거요.”
현암과 박 신부는 해밀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인가가 잘 못되었다고 느꼈다. 뭐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너무나도 짧은 시간 사이에 벌어져서 아직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 다. 특히 자신들이 악마들의 계획에 동조한다는 것만은 절대 동 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변명이 될 지 잘 알 수 없어 적이 불안했다.
그런 심정으로 먼저 박 신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악마들의 생각에 동조한다면 왜 악마들이 우 리를 해치려 했겠소? 그 때문에 우리들의 동료들 중 여럿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지 않겠소?”
박 신부가 그간 있었던 일과 더불어 당시의 정황을 이야기하 자 해밀튼은 잠자코 듣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렇게 해석이 가능하오. 당신들은 그때까지 마녀 협회 의 바이올렛이 징벌자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그것을 알게 되면 당신들이 변심할 것으로 아스타로트는 본 거요. 블랙 엔젤은 당신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겠지만 말이오.”
“하지만 블랙 엔젤도 우리를 해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 에 백호 씨가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번에는 현암이 나섰다. 그 말에 해밀튼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순간적인 일이오. 아니, 모르지. 블랙 엔젤은 자신의 마 음을 읽혔기 때문에 당신들에게 분노한 것인지도…………….”
해밀튼이 이야기하는 사이 뒤칸에 있던 준후와 승희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준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틀렸어요.”
승희가 해밀튼에게 준후의 말을 번역해 주기 시작했다. 연희 만큼 능숙한 통역자가 아니라서 자신의 감정이 섞여 들어갔지만 그래도 의사 전달은 되었다.
“준후 말에 의하면 해밀튼 씨, 당신이 틀렸대요.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 있는 구절 말이에요. 기억하나요?”
“물론 기억하지. 나와 프렌체스코 주교가 그것을 복사하여 수 많은 자들에게 뿌리게 했으니까.”
그러면서 해밀튼은 그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틀리지 않고 줄줄 읊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으며 흥한 것은 모두 망하는 법. 인간의 세상도 이와 같으니 없어지는 것도 순간일지라.
과거의 홍수가 그러했으며 이후에도 느닷없이 세상은 사라진다.
세상이 사라지는 것도 섭리이지만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도 섭리일 터.
있는 힘을 다해 그 시기를 늦추고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록을 남기노라.
볼 눈이 있는 자는 보고, 기억할 수 있는 자는 기억하라.
홍수가 세상을 한 번 망하게 하였지만 같은 일이 두 번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이 끝나려 할 때, 고대의 주술이 셋에 의해 깨어지고
이를 막는 자, 막지 않으려는 자, 동방의 땅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리라.
그러나 잊지 말라. 잊지 말고 기억하라.
세상의 위기를 가져오는 자는 아직 배 속에 있으며,
그 어미 백만의 눈과 백만의 손을 가진 여인은
먼 동방의 후손이 몰락한 땅 귀퉁이에서
해가 사라지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노라.”
해밀튼의 말이 끝나자 준후가 열띤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점토판의 마지막 부분은 틀림없이 바이올렛을 말하는 거죠. 백만의 눈과 백만의 손을 가진 여인이란 것은 수백만 아기들 영 을 다루는 것을 말하는 것일 테니까요. 근데 백만이라고 번역한 게 맞나요?”
준후가 묻자 해밀튼이 여유 있게 되받았다.
“그건 많다는 뜻이다. 메소포타미아는 육십진법을 썼고, 본문 은 육십을 네 번 곱한 숫자다. 즉, 실제로 환산하면 천이백구십 육만이지만 육십이 두 번이면 큰 것이고 세 번이면 아주 큰, 네 번이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를 일컫는다.”
그러나 준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동방의 후손들이 몰락한 땅 귀퉁이……………. 이것도 남 미가 틀림없어요. 그리고 이제 나흘 남은・・・・・・ 아니, 이제 사흘 인가요? 일식은 해가 사라지는 것임에 틀림없죠. 그렇다면 이 점 토판의 예언은 모두 그대로 맞는다는 이야기일 테죠?”
“당연히 그럴 테지.”
해밀튼이 고개를 끄덕이자 준후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과 맞지 않는 것이 있어요. 잘 보세요. 세상 이 끝나려 할 때, 고대의 주술이 셋에 의해 깨어지고 이를 막는 자 막지 않으려는 자, 동방의 땅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리라. 그렇죠?”
“그게 왜 맞지 않는다는 거냐?”
“그 싸움이 벌어진 곳은요?”
“그 싸움은 인도에서 이미 벌어지지 않았나? 인도는 메소포타 미아에서 볼 때는 동방이니 틀리지 않았지.”
“그렇다면 셋은요?”
“그건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 너와 신부님이나 현암 씨일 수 도 있고, 나와 고반다를 위시한 악마들의 일파와 반대편 일파 너희 일행의 세 파로 볼 수도 있다만, 아무튼 해석할 수 없는 부 분은 아니지.”
“그럼 고대의 주술이란 게 뭐죠?”
“라미드 우프닉스를 둘러싼 거겠지.”
“그렇지 않아요. 예언자는 분명 고대의 주술이 깨어진다고 했 어요. 그러나 라미드 우프닉스의 주술은 아직 깨어지지 않았잖 아요.”
“하지만 예언이란 것을 문맥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는 법이다. 라미드우프닉스의 주술은 원래 세상을 구하려던 것인데 오히려 세상을 해치는 것이 되었으니 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어.”
해밀튼의 해석을 듣고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군요. 그렇다면 이 예언은 전혀 틀린 바가 없군요.”
“그렇지. 네가 보기에도 일목요연하지 않으냐?”
“바로 그게 문제예요. 제 생각에, 이것은 진짜가 아닌 것 같아요.”
“무슨 소리냐?”
“이건 예언 같지가 않아요. 나는 『해동감을 주로 해석해 왔 기 때문에, 예언서가 어떤 것인지 대강 알아요. 예언은 미래를 앞질러 말하는 것이라서 이렇게 명확할 수 없으며, 아는 내용이 라도 불투명하고 불분명하게 적게 마련이죠. 그러나 이건…………… 마치 광고를 한 것 같아요. 절대로 예언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어요!”
준후는 절실하게 말했지만 해밀튼은 준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예언이 명확하면 그만이지. 이런 식이 어디 있고 저런 식이 어디 있느냐?”
해밀튼이 딱 잘라 말하자 준후는 이번에는 호소하듯 현암과 박신부를 향해 말했다.
“신부님! 현암 형! 나는 그토록 믿었던 『해동감결마저도 버 렸어요. 지금 우리가 왜 예언에 연연해야 하죠? 그 예언이 틀리지 않았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예?”
그 말을 듣고 박 신부와 현암은 둘 다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먼저 현암이 해밀튼을 보고 외쳤다.
“그렇습니다! 그 예언석! 그 내용이야말로……………!”
그와 거의 동시에 박 신부도 해밀튼을 향해 외쳤다.
“타보트의 뒷면에 새겨진 글……………. 모세가 남겼다는 그 글은……!”
둘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각기 다른 점에 착안했 지만 둘 다 동시에 거의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해밀튼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