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16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9 : 최후의 시련
최후의 시련
“믿을 수 없소!”
하겐이 돌연 소리쳤다.
해밀튼의 안색이 복잡하게 변했지만 하겐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의 이야기는 너무도 황당하오. 믿을 수 없소.”
“그러나 사실이오.”
“증거를 대시오. 그렇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소. 당신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거대한 가설일 뿐이오. 증거가 있지 않 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소.”
“어떤 증거를 제시하려고 하오?”
어새신의 우두머리 제47대 하산이 물었다.
“증거가 있기는 하오?”
무색 화상이 물었다.
“그 말을 입증할 증거는 있느냐?”
현현이로가 묻자 준호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있어요!”
로파무드도 말했다.
“그건 바로……………..”
황달지 교수도 말했다.
“당신들 편의 손에 있소.”
해밀튼은 조용히 대답했다.
“타보트요. 아녜스 수녀의 손에 있는 타보트를 조사해 보시오.”
하겐이 눈을 크게 뜨자 해밀튼이 계속 말했다.
“만약 내 말이 옳다면, 아녜스 수녀의 손에 있는 타보트의 글 귀는 새겨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거요. 고반다가 위조한 것 이니까 말이오. 그것만 확인한다면 모든 것은 명백하게 드러날거요.”
하겐은 그 말을 듣고 급히 파치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뭐라고요?”
아녜스 수녀는 헬기 안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어서 조사해 주시오. 타보트를 직접 볼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만, 당신들은 성의를 지니고 있으니, 타보트의 힘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알 거요. 이건 중대한 문제요!”
그녀는 지금 무색 화상과 무선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곳 에서도 무선 전화기가 계속 울려 왔다. 하겐도 현현이로도, 어 새신의 수령인 47대 하산과 칼키파의 리더도 계속 연락을 취하 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 이외에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또 다 른 그룹들도 그 무선을 자연스럽게 듣고는 아녜스 수녀에게 줄 기차게 재촉했다.
아녜스 수녀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초조한 안색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바이올렛의 얼굴도 심각했다. 안내자로 앉 아 있던 그녀의 귀에도 상대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옆에 앉아 있던 깡마른 노인이 이미 리시버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리시버 너머의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아녜스 수녀에게 말했다.
“어서 헬기를 내리게 하시오. 안 그래도 이 폭풍 속을 헬기로 뚫고 나간다는 건 무리였소.”
“아닙니다. 이건 전천후 헬기라서……”
아녜스 수녀가 변명하듯 말하자 그는 다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어서 아무 데나 내리게 하시오. 그리고 말한 것처럼 타보트를 확인해 봅시다.”
마지못해 아녜스 수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종사에게 지시 하자 조종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리 전천후 헬기라고 해도 조종사로서는 이 폭풍 속을 뚫고 간다는 것이 마음에 들리 없었다.
곧 헬기 편대는 적당한 공터를 찾아 굉음 소리와 함께 착륙했 다. 그리고 그 남자는 헬기가 내리자마자 비를 맞으며 바로 땅에 내려섰다. 아녜스 수녀도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세 명의 직속 사제들에게 흰 천으로 싼 보따리를 우산을 받 쳐 가져오게 했다.
그것은 교황청 기적인정국에서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타보트의 힘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자였다. 그 안에는 물론 ‘문제의 타보트가 보관되어 있었다.
아녜스 수녀는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랐고 세 명의 직속 사 제가 그 주변을 둘러싸 다른 사람들이 일절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아녜스 수녀, 와서 같이 확인합시다.”
“주교님…….”
그 사람은 프란체스코 주교의 뒤를 이어 새로 이단 심판소의 장이 된 라파엘 주교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돋보기를 꺼내 상자 의 유리 너머로 타보트 뒷면의 글귀를 들여다보고는 한숨을 쉬 었다.
“당신 같은 꼼꼼한 사람이 처음부터 이런 것을 보지 못했을 리 가 없는데…………….”
아녜스 수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보트 뒷면에 새겨진 글씨는 치밀했지만, 그것이 수천 년 전에 새겨진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흠이 몇 군데에 있었던 것이다.
“아녜스 수녀,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해 보시오.”
아녜스 수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교는 역정을 냈다.
“어서 타보트를 확인해 보시오. 나는 애당초 이런 일을 벌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소. 하지만 마누엘 대주교님이 너무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끼어들게 된 거요. 그 사실은 아시지요?”
“예…….”
“마누엘 대주교는 아무래도 너무 과격했소. 이전 프란체스코 주교와는 궁합이 맞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오. 그분은………… 그분은 정말 문제가 있군. 광신은 교황 성하께서도 결코 바라시 는 길이 아니오.”
“하지만 주교님……..”
“지금 이단 심판소의 장은 나요.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전권이 있는 것도 나요. 아직 상황을 판단할 수 없어 당신에게 일임했지 만,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군.”
라파엘 주교는 아녜스 수녀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오. 당신은 동료들의 죽음 때문에 개인적인 복수를 하려는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그런 일은 용납 될 수 없소. 아마도 이번 일은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
라파엘 주교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라파엘 주교 가 서 있는 곳에 불덩이와 함께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 버렸기 때 문이다. 라파엘 주교와 세 명의 직속 사제들은 불에 타면서 튕겨 날아가 버렸고 아녜스 수녀도 옷자락에 불이 붙은 채 데굴데굴 굴렀다.
폭풍을 동반한 비가 내려 바닥에 물이 흥건했지만 아녜스 수 녀의 몸에 붙은 불은 잘 꺼지지 않았다. 군인들 몇이 소화기를 꺼내어 뿌린 후에야 아녜스 수녀의 몸에 붙은 불이 꺼졌는데, 그녀의 옷은 검게 그을리고 머리칼까지도 타 버린데다가 부상이 심한 것 같아 보였다.
다른 교황청 사람들이 놀라서 달려오자 아녜스 수녀가 소리쳤다.
“그들이오! 악마들이!”
사람들은 몹시 놀랐다. 교황청 내에서는 허락받지 않은 사람 에게는 절대 타보트를 볼 수 없게 했기 때문에 주교 주변에는 일 부러 아무도 가지 않았고 직속 사제 세 사람만이 가 있었다.
폭발이 일어난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까만 해도 악마 들의 공격으로 헬기 두 대가 떨어진 바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 말 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주교와 사제들에게 물으려 해도, 확인해 보니 그들은 모두 즉사한 후였다.
이전의 이단심판소의 주교와 가디언들은 아녜스 수녀를 제외 하고 거의 죽었고, 지금 있는 사람들은 아녜스 수녀가 새로 요청 하여 모은 사람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아녜스 수녀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아는 사람도 설마 아녜스 수녀 가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어 그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아녜스 수녀가 외쳤다.
“그들이 공격해 왔소! 그냥 둘 수 없어요! 모두 출발합시다!
주교님도 그런 명령을 내게 내리신 바 있어요!”
“하지만 주교님이 안 계신 지금…………”
“수녀님도 부상을 입었는데…………….”
몇 사람이 불안한 듯 아녜스 수녀를 바라보았지만, 온통 그을 려 무섭게 보이는 얼굴로 아녜스 수녀가 완강하게 외쳤다. “내가 책임집니다. 지금 이 일을 인계받은 사람은 나뿐입니다. 내가 책임질 테니 원래대로 출발합시다! 어서요! 시간이 없습니 다! 일식은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어요!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아녜스 수녀는 언뜻 타보트 상자 쪽을 보았다. 그 상자는 산 산조각으로 박살 난 것 같았고, 몇 사람이 타보트를 생각해 내고 놀라서 발을 굴렀지만 아녜스 수녀는 이제 틀렸다면서 그들을 헬기로 몰았다.
불구덩이 속의 타보트를 힐끔 보며 아녜스 수녀는 생각했다. ‘타보트 따위 없어지는 것이 나아..
타보트를 구한다면 그 뒷면의 글귀가 발각될 것이다. 비록 중요한 성물이었지만 아녜스 수녀는 그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
었다.
다시 헬기의 시동이 걸리고, 아녜스 수녀는 조종사에게 외쳤다.
“어서 가세요.”
그때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당신・・・・・・ . 그렇다면 ・・・・・・ 당신이야말로…………..”
아녜스 수녀가 돌아보니, 바이올렛의 겁먹은 눈이 보였다. 그녀는 아녜스 수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챈 것이다. 아녜스 수 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바이올렛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나는 특별한 힘은 없지만…………… 약간의 능력은 있어. 그런 것 만은 알 수 있어. 그런 것만은. 당신은・・・・・・ 당신은 도대체 왜 그 러는 거야? 무얼 위해서? 혹시……………”
아녜스 수녀의 공허한 눈빛에서 바이올렛은 진실을 깨달았다. 아녜스 수녀는 이제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나 악마들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프란체스코 주교를 이성(性)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그와 비슷한 연애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주교는 죽었고, 그녀로서는 이제 세상의 종말이나 그 녀의 신앙보다도 그가 남긴 유지를 이어받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프란체스코 주교의 말이야말로 옳다고, 그의 말을 그대로 지켜야만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녀의 신앙은 가톨릭을 위한 것 이 아니라 가톨릭을 믿는 프란체스코 주교를 향한 것이었다. 어 떤 것도 그녀 앞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신……………”
바이올렛은 순간 가슴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렇다면 퇴마사들이 옳았단 말인가? 자신은 세상을 위해서 배신까지 감수했는데……………. 모두를 배신하고, 죽 음에 이르게까지 만들었는데………….
그 순간, 아녜스 수녀는 마지막 남은 양심의 굴레를 벗어던졌 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뾰족하게 소리를 질렀다.
“바로 너구나! 이 마녀!”
“아…… 아냐! 너는…………….”
바이올렛이 채 뭐라 항변하기도 전에 아녜스 수녀는 좌석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며 무섭게 바이올렛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헬 기는 이륙하여 상당한 고도로 떠올라 있었다. 아녜스 수녀는 발 악하는 바이올렛을 쥐고 약간의 원소력을 발동하여 그녀를 헬기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바이올렛은 저항하지 못하고 찢어지는 듯 한 비명을 지르면서 땅으로 거꾸로 떨어져 버렸다.
“무슨 일입니까?”
조종사가 놀라서 돌아보자 아녜스 수녀가 눈을 번득이며 대꾸했다.
“아무 일도 아니오. 마녀 하나가 숨어들었거든.”
조종사는 그녀의 눈빛에 질려서 입을 다물었다. 이 수녀는 정말로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조종사는 입을 다물었지만 속 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마녀가 정말 있다면 그건 이 여자일 거야. 정말 말세 야, 말세’
아녜스 수녀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봐도 이 건 미친 짓이었다. 용서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용서받을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다만……………..”
그녀는 프란체스코 주교를 기억해 냈다. 마녀로 불려서 부모 를 죽게 만들고 마을에서 쫓겨나 죽어 가던 자신을 발견하여 받 아들여 주고, 수녀원에 넣어 주고, 이제껏 키워 준 그 사람. 그리 고 그가 그 무서운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기 직전 처참하게 부 르짖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녜스 수녀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한번 옹골지게 다잡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틀리지 않아요. 절대 틀리지 않을 거예요.’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아녜스 수녀는 참아 냈다. 마음을 독 하게 먹어야 했다. 주교의 명에 따라 사람을 죽일 때도 그녀는 항상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주교의 말이 우선이었다. 신에 대 한 신앙심보다 주교에 대한 신앙심이 우선이었다. 지금도 자신 이 결코 틀리지 않으리라고, 그래서 자신은 순교자가 될 것이고, 프란체스코 주교의 말대로 세상을 구하고야 말 것이라고 아녜스 수녀는 자신을 타일렀다.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아직까지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무전기의 수화기를 듣고 냉랭하게 말했다.
“타보트는 위조가 아닙니다. 모두 예정대로 진행하시오.”
갑자기 시끄럽던 수화기들이 모조리 조용해졌다. 아녜스 수녀 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당했소. 주교님도 방금 악마들에게 돌아 가셨소. 이제 시간이 없으니 어서 진행하고, 앞을 가로막는 자들 은 모조리 죽여 버리시오.”
악마는 바로 너야. 아녜스 수녀의 마음속에서 양심의 소리가 말했지만 이제는 작고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가브리엘 수사는 이마에 한 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 헬기 안에 힘없이 기대앉아 있었다. 그는 방금 성난큰곰이라는 부상 입은 거한을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것은 순전히 동정심 때문 이었다. 아녜스 수녀는 그 남자가 부상 때문에 이번 일에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를 은밀히 죽이라고 가브리엘 수사에게 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 수사는 차마 그를 죽 일 수 없었다. 부상당해 움직이기도 힘든 자를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징벌을 받기로 하고, 조금 전 혼란을 틈 타 그를 풀어 주었다. 나중에 책임질 일이 두려웠지만, 방금 아 녜스 수녀가 바이올렛을 헬기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것을 본 그 는 이제 확신하게 되었다.
‘아녜스 수녀는 미쳤어. 나는 이 일에 끼지 않겠다.’
가브리엘 수사는 결심했다. 그리고 자신이 타고 있는 헬기의 조종사에게 말했다.
“기수를 돌려 주시오. 나는 가지 않겠소.”
“예?”
가브리엘 수사는 아녜스 수녀와 함께 남은 생존자였기 때문에 아녜스 수녀의 권한이 커짐과 동시에 그의 권한도 덩달아 커져 있었다. 그는 씁쓸히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결정을 내릴 수 없소. 나는 돌아가서, 교 황성하께 모든 전말을 보고해야겠소.”
“직접 말입니까?”
“그렇소, 직접.”
말하면서 가브리엘 수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성난큰곰에게서 아까 들은, 이반이라는 남자의 냉혹하면서도 어딘가 마음이 끌 리는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조카와 너무도 비슷했다고 말했 던 남자. 물론 그에게 정은 없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을 망치려 는 악인이 단순한 복수심 때문에 죽어 가는 순간에 악마의 부하 인 괴물에게 두 토막이 나면서까지 입안에 총을 쏘아 함께 죽을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 단순한 복수심 때문일까? 그와 함께 장 렬히 죽어갔다는 성공회 사제도 정말 세상의 종말을 바라는 악인일 수 있을까? 복수심은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 댄 핑계일 뿐 이었다. 자신들이 남기 위한 핑계.
‘정말 악한 짓은 지금 우리가 하는 짓이야. 아녜스 수녀는 미쳤어.’
그러나 지금의 가브리엘 수사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막을 힘 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정도, 그리고 일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진상을 밝혀내는 일 정도 였다.
연희는 조용히 돌로 된 지하실의 복도를 마치 예전에 와 보기 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 지 않았고, 일행 역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들 중 현 암만은 뭔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하실 복도는 예상보다 매우 깔끔했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양쪽 벽에는 작은 기름등잔들이 꽂혀 있어서 그렇게 어 둡지도 않았다. 한참을 걸어 몇 굽이를 돌아서자 한 개의 방이 나타났고, 연희는 그 문을 천천히 밀었다.
대뜸 현암이 연희가 문을 여는 것을 제지하고 자신이 먼저 들 어가려 했지만, 연희는 현암에게 미소만 한 번 지어 보이고는 문 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수수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되 어 있는 방이었다. 그 중앙에는 한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방금 잠에서 깬 듯한 얼굴의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에 수수한 얼굴의 여인. 만삭이 된 배에 손을 얹고 있는 여인. 준호와 아라와 연희가 아기들과의 교감 속에서 보았던 그 여자였다.
연희가 조심스레 스페인어로 여자에게 말을 걸었지만, 여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연희는 다시 말을 바 꾸어 몇 가지의 말을 해 보다가 이윽고 아주 기이한 발음의 말로 여자와 대화를 시작했다.
이번에 연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통역하여 들려주지 않았고 혼자 이야기를 했는데, 갑자기 승희가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승희는 긴장한 나머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세크메트의 눈 한쪽을 무의식중에 꼭 쥐고 있었는데, 그리로 연희의 마음속이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그 때문에 승희는 마야 토착어로 이야기 하는 연희와 여자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여자의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당신이 라미드 우프닉스?
그러나 연희의 대답은 더더욱 놀라웠다.
맞아요. 당신이 바이올렛?
바이올렛이 아니에요. 그건 내 이름을 영어로 바꾸어 부른 것일 뿐이죠. 결국…….오고야 말았군요……..
그래요. 당신은 어서 여기를 피해야 해요. 위험할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속지 않아요. 더 이상 속아서 사람들을 해치고 싶지 않아요. 배속의 아기가 보고 있어요. 내 아기에게 죄 짓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러더니 그녀가 이내 덧붙였다.
당신은 죽을 거예요. 당신을 보자마자 그 일을 하랬어요. 당신을 죽이랬어요.
누가요?
나를 지켜 주던 그녀들이 그녀들은 어디 갔죠? 당신들이 해쳤나요? 그녀들은 당신을 지켜 주지 않아요. 당신을 해치려 한 것은 바로 그 녀들이에요. 그들은 악마예요.
믿을 수 없어요!
믿지 않아도 할 수 없어요. 당신은…….
당신은 왜 죽지 않죠? 나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라미드 우프닉스뿐 이에요. 그리고 라미드 우프닉스는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면 그 자리에 서 죽어요. 그런데 ・・・・・・ 그런데 당신은 왜………….
승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펄쩍 뛰면서 여자를 후려치려고 했 다. 연희를 죽게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승희가 미처 행동하기 도 전에 연희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에요……….……
승희는 너무도 놀라서 비틀거리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연희가 조용히 돌아서서 승희를 보고 말했다.
“미안해, 승희야, 미안해요, 모두들 ………….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지금 이때를 위해서……………. “
현암, 준후가 모두 놀라 멍하니 있는데 승희가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 연희 언니!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응?”
연희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실을 알고 싶었어. 그래서 ………… 이걸…….”
그러면서 연희는 손을 펴서 세크메트의 눈을 내밀어 승희의 손 에 쥐어 주었다. 세크메트의 눈을 내려다보며 승희가 울먹였다.
“이걸・・・・・・ 이걸 언제! 내가 보관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비행기에서 깨어나자마자 이걸 가졌어요. 승희가 꿈을 꾸고 있더군요. 어떻게 하면 나를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를 구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꿈을…………. 그래서 이걸 가졌고・・・・・・ 알게 되었지. 모두들 미안해요. 모두에게 걱정을 끼쳤어요….”
“하… 하지만…………… 연희 누나는 살아 있잖아요!”
•준후가 외치자 연희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사람 덕분이야. 그들이 도와주었어……………..”
준후뿐만 아니라 현암조차도 도저히 연희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라니…….?”
현암이 묻자 연희는 미소를 지었다.
“기억 안나요? 내가 생각했던 사람・・・・・・ 그리고 그 친구들………….이미 죽은 사람들 말이에요………….”
현암은 앗 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리의 영혼이? 그리고 친구들이라면…………… 블랙 서클에서 해방되었던 과거의 승정들?
“정말・・・・・・ 정말 그랬단 말인가요?”
현암은 연희가 최면 상태처럼 움직일 때부터 어딘가 그 느낌 이 낯익다는 인상을 받았다. 퇴마사들 중에서 리를 만나 본 것은 현암뿐이었는데 그 느낌은 바로 그의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래요. 그들은 모두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들의 영혼을 구제 해 주어서. 그리고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해 주어서………….”
“하지만………… 어떻게 ……………?”
준후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기억 안 나니, 준후야? 그들 중에는 미라를 다루는 고대주술 사도 있었고, 좀비를 다루는 사람도 있었지. 그들이 힘을 합치면, 내 영혼을 조금 더 몸에 붙잡아 두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 정도 는 할 수 있어. 사악한 주술일 수도 있지만, 잘만 쓰면 좋은 것이 기도 해. 덕분에 여러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니까…………”
그제야 현암과 준후는 연희가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 다. 준후는 갑자기 으왁 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현암은 어깨를 떨며 주르륵 굵은 눈물을 흘렸다. 박 신부는 조용히 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올리며 말했다.
“고맙네, 연희 양……. 덕분에 …………… 덕분에 ……………”
“신부님은 알고 계셨나요?”
현암이 외치듯 묻자 박 신부는 슬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늦은 다음이었네………….”
준후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소리쳤다.
“이게………… 이게 뭐야! 연희 누나! 죽지 마요! 죽으면 안 돼!”
고개를 저으며 연희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준후야. 하지만 모두가 정해진 일이야. 과거 판첸 라마가 나에게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 있지. 마지막 날에, 사람이 지만 사람 아닌 자가 동행해야 한다고…………. 그게 나였어. 지금 의 나……………..”
“연희 씨!”
현암이 목이 꽉 멘 소리로 외쳤고, 승희는 엉엉 울면서 연희를 붙잡고 매달렸다.
“언니! 언니! 가지 마! 가지 마!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울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야! 나 때문이야! 나 때문!”
“아냐, 승희야, 다 내 호기심 때문인걸. 그리고・・・・・・ 그리고 나는 행복해. 이제야 나는 자유로워졌어. 만났어. 이제는 함께 있을 거야………….”
연희의 몸 주위로 리가 남겼던 염체들이 반짝거리며 나타나 주위를 장식하듯 빛났다.
“이제 모든 것을 부탁해요. 나는…… 이제 더 이상은・・・・・・ 같 이 있을 수 없어요……………. 하지만・・・・・・ 울지 마세요, 슬퍼하지 마 세요…………. 나는 내가 원하던 것을 얻었어요. 여러분도…… 여 러분도 모두 원하시는 것을 얻기 바라요………………”
연희는 최후의 눈을 감으며 승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승희야, 네 행복을 찾으렴.”
그러고는 현암에게 말했다.
“현암 씨, 먼 곳을 보지 마세요………….”
끝으로 연희는 준후와 박 신부를 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준후야, 안녕. 신부님, 안녕, 여러분들 덕에 저는 지금껏 뜻있 게 살아왔어요. 그리고・・・・・・ 그리고 이제는 그를 만났고… 행 복해요. 이제는…………… 이제는 정말로・・・・・・ 안녕…………….”
연희 주변의 작은 염체들이 다시 한번 눈부시게 빛나다가 꺼 지자 연희의 몸도 그 자리에 천천히 쓰러져 갔다.
승희와 준후는 미친 것처럼 울부짖었고, 현암은 장승처럼 똑 바로 서서 어깨를 조금씩 들먹였으며 박 신부는 기도를 하면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백호가 죽었을 때나 윌리엄스 신부 등이 죽은 것을 알았을 때도 괴로웠지만, 연희의 죽음은 모두에게 또그리고…………… 그를 다시 만났어. 이제는 함께 있을 거야………….”
연희의 몸 주위로 리가 남겼던 염체들이 반짝거리며 나타나 주위를 장식하듯 빛났다.
“이제 모든 것을 부탁해요. 나는…… 이제 더 이상은・・・・・・ 같 이 있을 수 없어요……………. 하지만・・・・・・ 울지 마세요, 슬퍼하지 마 세요…………. 나는 내가 원하던 것을 얻었어요. 여러분도…… 여 러분도 모두 원하시는 것을 얻기 바라요………………”
연희는 최후의 눈을 감으며 승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승희야, 네 행복을 찾으렴.”
그러고는 현암에게 말했다.
“현암 씨, 먼 곳을 보지 마세요………….”
끝으로 연희는 준후와 박 신부를 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준후야, 안녕. 신부님, 안녕, 여러분들 덕에 저는 지금껏 뜻있 게 살아왔어요. 그리고・・・・・・ 그리고 이제는 그를 만났고… 행 복해요. 이제는…………… 이제는 정말로・・・・・・ 안녕…………….”
연희 주변의 작은 염체들이 다시 한번 눈부시게 빛나다가 꺼 지자 연희의 몸도 그 자리에 천천히 쓰러져 갔다.
승희와 준후는 미친 것처럼 울부짖었고, 현암은 장승처럼 똑 바로 서서 어깨를 조금씩 들먹였으며 박 신부는 기도를 하면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백호가 죽었을 때나 윌리엄스 신부 등이 죽은 것을 알았을 때도 괴로웠지만, 연희의 죽음은 모두에게 또한 남달랐다. 모두가 슬픔을 억제할 수 없었다.
별안간 승희가 미친 듯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 위의 바이올렛을 보며 소리쳤다.
“너…………! 네가 죽인 거야! 네가…………… 네가…………….”
박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다. 승희야, 그녀는 그러려 했지만, 연희 양은 그녀가 죽인 것이 아냐.”
현암도 눈물을 흘리면서도 침착하려 애쓰며 덧붙였다.
“블랙 엔젤의 최후의 계략이었을지도 몰라. 연희 씨를 앞세워 이곳으로 올 줄 알고……………. 바이올렛의 입에서 라미드 우프닉스 의 말을 꺼내도록 만들었을 거야.”
생각해 보면 무서운 음모였다. 퇴마사들이 물론 바이올렛을 죽일 생각은 없다 해도, 급히 말문을 막으려면 힘을 쓸 수도 있 다. 그런데 바이올렛은 임산부라, 자칫하면 작은 충격에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설령 때늦게 바이올렛을 건드리지 않더라도 연희가 죽게 되면 분노한 퇴마사들이 무심코 손을 휘두를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 로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이었는데, 정말로 뜻밖의 방법으로 그 함정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일이 끝난 것 같 지 않았다.
차가운 표정으로 퇴마사들을 바라보고 있던 바이올렛이 작은 소리로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준후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저 여자! 주문을 외워요!”
현암도 박 신부도 놀랐지만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바이 올렛은 임신한 상태였으니 약하게라도 후려칠 수 없었고, 놀라 게도 할 수 없었다. 실로 눈을 번히 뜨고 당해야 할 판이었다.
“그거야!”
승희가 부르짖었다. 주변의 공기가 이상한 울림으로 떨려 온 것이다. 웅웅 하는 기이한 울림, 아기들의 영혼이 나타나는 조짐 이었다. 그 느낌이 전해져 오자 네 사람은 긴장했다. 아무리 강 한 주술 능력으로도 그 아기들의 영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박 신부가 굳은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마음 굳게들 먹게.”
현암이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말했다.
“도망칩시다. 일단 이런 좁은 곳은 벗어나야 합니다.”
박 신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준후가 눈부 시게 빠른 힐기보법을 사용하여 바이올렛의 뒤로 돌아가서 그녀 를 다짜고짜 들쳐 업었다. 바이올렛은 의외로 심각한 저항을 별 반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박 신부는 조바심을 냈다.
“조심해라! 조심! 조심!”
아기들의 수많은 영혼이 밀려오는 듯, 벌써 돌 벽이 떨렸고 바 닥까지 우르릉거리며 기분 나쁘게 흔들렸다. 준후가 앙탈하는 바이올렛을 들쳐 업자 현암이 겉옷을 벗어 그녀의 등에 씌웠고 승희가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그러고 나서 박 신부는 오라 막 을 최대로 펼치면서 뒤를 엄호했다.
지하실의 복도를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돌 벽이 와르르 무너 지면서 아기들의 영혼이 밀어닥쳤다. 박 신부는 눈을 감고 전력 을 다해 오라를 발했고 그러자 아기들의 영혼도 잠시 주춤하며 뒤로 밀려났다.
“어서 달려! 어서!”
박신부가 뒤에서 외치자 현암은 준후의 어깨를 탁 한 번 치고 는 다시 뒤로 달려가서 박 신부를 들쳐 업고 뛰었다. 며칠 조섭 을 했지만 현암이나 박 신부는 아직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 였다.
현암은 무리해서라도 공력을 써서 달릴 수 있었지만 박 신부 가 다리를 저는 것은 오래된 일이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빠 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아기들의 영혼은 그들의 ‘어 머니’인 바이올렛이 다칠까 봐서인지 무모한 공격은 하지 않아 박신부도 오라 막으로 그럭저럭 막아낼 수 있었다.
“어서 출구로!”
준후가 날듯이 달려 복도를 벗어나 출구로 나가는 순간, 준후는 눈앞이 아찔할 만큼 강한 빛을 받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 았다. 이어서 승희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준후를 떠받쳤다. 다음 순간, 우두두 하는 소리와 함께 준후가 있던 곳의 돌에 수 십 개의 구멍이 뚫리며 돌가루와 파편이 분분히 날았다.
준후는 넘어지면서도 애써 바이올렛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하 려 했지만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마자 연이어 박 신부를 들쳐 업은 현암이 마치 공처럼 문에서 튀 어나왔고 그 뒤를 이어 예의 무시무시한 아기들의 영혼이 밀물 처럼 쏟아져 나왔다.
현암은 너무 급한 나머지 달리지 못하고 박 신부와 함께 데굴 데굴 굴렀고 영혼들은 그 위로 곧바로 날아왔다. 준후는 이제 끝 장이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엎드려!”
다시 승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몸 을 낮추며 바이올렛의 몸을 감쌌다. 곧이어 요란한 폭음이 터지 면서 사방에 불덩이와 불씨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방금 출 입구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빛을 비추고 총을 쏜 것은 헬리콥터 였는데, 그 헬리콥터가 폭발한 것이다.
“누가…………?”
넘어져서 죽는가 보다 했던 현암이 의아해 고개를 들어 보니, 아기들의 영이 마치 검고 커다란 원생동물처럼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하늘을 주름잡으며 또 다른 헬기를 공격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퇴마사들보다도 이자들이 더더욱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곧이어 두 번째의 헬기 뒷부분이 아기들 영의 공격을 받자 삽 시간에 믹서에 갈린 것처럼 부스러져 없어졌고 헬기는 빙빙 돌 며 추락했다. 헬기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마구 뛰어내렸다.
헬기의 고도가 그리 높지 않아 사람들은 균형을 잃고 땅에 처 박혔지만 죽을 정도의 부상은 입지 않았다. 아기들의 영은 그 사 람들을 향해 뻗어 나가려고 했다.
그것을 본 박신부가 뛰쳐나갔다.
“안 돼!”
박 신부는 오라 줄을 쏟아 내어 아슬아슬하게 몇 명의 사람들 을 밀어냈다. 아무리 그들이 적이라지만 전과 같은 참극이 되풀 이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승희가 피를 흘리며 일어났다. 승희는 기관포 총탄에 스 쳐서 한쪽 팔이 뼈까지 드러날 정도로 찢어져 있었는데도 그때 까지 그런 상처를 입은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현암군! 월향검을 줘! 어서!”
현암이 거의 무의식중에 월향검을 던지자 월향검이 날아가 승 희의 손에 잡혔다. 승희는 준후를 밀어내고 바이올렛에게 달려가서는 그녀의 목에 칼을 대고 손에 연희가 다시 돌려준 세크메트의 눈을 쥐어 주었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중지시켜!”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너는…………….
“어서 중지시켜! 아무도 해치지 못하게 해! 어서!”
내가 목숨을 아까워 할 것 같아? 나는・・・・・・ 아……………. 나는 절대 …………….
바이올렛은 비로소 해산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이제 부터 몇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바이올렛은 고통에 겨 워 승희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어서 아기들의 영혼을 불러! 너는・・・・・・ 너는 배 속의 아기에 게 부끄럽지도 않아? 사람을 죽이는 걸 꼭 아기에게 보여 줘야겠 어? 응?”
승희는 바이올렛에게 마구 외쳐댔다. 퇴마사나 마녀 협회의 입장에서 벗어난, 같은 여자로서였다.
그러다가 승희는 칼을 거두고 말했다.
“난 네가 미워. 하지만 우린 너를 해치지 않아. 해치려면 벌써 했지. 그러니 제발 ・・・・・・ 그만둬. 우리 말을 들어 줘. 응?”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 마음이 열리자 바이올렛도 승희가 자신 을 해치지 않을 것을 안 듯했다. 이윽고 바이올렛은 뭐라고 중얼 중얼 주문을 외웠고 아기들의 영혼은 다시 돌아와 그들 앞을 막 아섰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 틈을 타서 박 신부는 옷자락을 찢어 승희의 상처를 일단 싸매 주었다. 승희는 그제야 고통을 느끼는지 인상을 쓰다가 현암 에게 말했다.
“현암군, 나 잘했어?”
현암은 승희를 바라보다가 점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비에 머 리와 옷이 흠뻑 젖고 상처까지 입어 파랗게 질린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의 승희가 이상하게도 현암의 눈에는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 다. 현암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 준후가 말했다.
“저기 아녜스 수녀가 있어요……………. 모두들 실패한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죠?”
박 신부는 한숨을 쉬며 되받았다.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어쨌든 시간을 끄는 것이 중요하다.”
그사이 아녜스 수녀와 일행이 헬기에서 모두 뛰어내렸다. 헬 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지 다시 떠나가 버렸다. 무장 헬기들 이 모두 파괴되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아기들의 영을 중간에 두고는 섣불리 다가설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준후가 바이올렛을 업자 퇴마사들은 조심스럽게 반대쪽으로 도망쳐 갔다. 아녜스 수녀 등은 이를 갈았지만 아기 들의 영이 앞을 막고 있는 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만 된다면 문제가 없겠군요.”
준후는 이대로만 된다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승희 는 바이올렛이 측은한지 숲 속으로 가는 동안 그녀의 이야기를 했다.
“불쌍한 여자야. 오지에서 아무것도 모르며 자랐는데………… 어 느 날 마을 사람들이 모조리 쫓겨났어. 그들이 살던 곳이 뭔가 로 지정되었는지 쫓겨나게 된 거야. 그녀의 아버지는 저항했지 만…………… 결국에는 당하고 말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이들은 인디오고, 인디오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어. 특히 과거에는 더더욱. 허울만 좋은 법률로 보호한다고 하지만, 이들 에게는 인권이 없어. 악한 자들이 손을 대도 하소연할 길이 없는 거야. 결국 아버지는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 가족들도 강제로 끌 려가고…………. 그녀 역시 처참하게 당했어. 여러 명에게…………”
“흠.”
현암이 한숨을 내쉬자 승희는 바이올렛의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그때 그녀는 맹세를 한 거야. 이런 세상은 망해 버리라고. 차 라리 망해 버리라고…………. 그때 그녀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지. 분명 블랙 엔젤이었을 거야. 그리고 세 여자가 그녀를 거두었지. 그때부터 그녀는 기이한 힘을 지니게 되었고 세 여자의 말을 따 르게 되었어. 하지만 그녀는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 아직 정말 로 누구를 죽였다거나 하는 느낌이 없어. 지금은 오로지 마음속 에 미움밖에 남지 않았지만, 원래 나쁜 여자는 아니었어. 가엾게 도……………..”
그때 바이올렛이 계속 소리를 지르며 고통스러워하다 손에 쥔 세크메트의 눈을 떨어뜨렸다. 승희가 그것을 다시 집어 쥐어 주 려다가 바이올렛이 그럴 상태가 아닌 것을 보고는 현암에게 주 었다.
지금으로서는 바이올렛의 고통을 줄여 줄 별다른 방법이 없 었다. 준후는 그녀가 고통에 못 이겨 어깻죽지를 거의 다 할퀴 어 놓는 것도 참아야 했다. 더구나 비는 그치기는커녕 약간 잠잠 해졌던 바람마저 더더욱 매섭게 불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바 이올렛과 아기, 둘 다 위험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박신부가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이대로 너무 비를 맞으면 산모와 아기 둘 다 위험 해. 어디 비바람을 피할 장소를 찾아야겠다.”
이제는 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쳐 가까이서 이야기할 때에도 귀에 대고 소리를 질러야 겨우 들릴 정도였다. 그 말을 듣고 현암 과 승희는 비바람을 피할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저기!”
승희가 한 지점을 가리켰다. 투시력으로 동굴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그 동굴은 짐승이 살던 곳인 듯, 좁고 침침했으며 냄새 가 났지만 적어도 비바람 몰아치지 않았다. 그러나 매우 좁아 모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승희가 간신히 바이올렛 옆에 있을 수 있었을 뿐, 나머지 세 사람은 동굴 밖에서 계속 비바람을 맞아야 했다.
“이대로 아기가 태어나면…………… 모두 끝나는 건가요?”
준후가 묻자 박 신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럴 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진 모르지…..”
사실 준후는 내심 몹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다른 예언들 이 악마의 조작이었던 것은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해동감결만 은 아직도 준후의 마음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만은 놀랄 정도로 정확히 모든 일을 예측했고 그 예언의 내용도 악마 가 어떻게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도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해동감결에서 당부한 바를 어겼다. 과연 그 대로 괜찮을까? 준후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비록 박 신부와 현암 때문에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준후의 마음에는 불안감이 커져 갔다.
준후는 더 참지 못하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저 아이가…… 정말로 징벌자라면 어쩌죠……………? 우리는 해동감결을 어겼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로 옳은 것일까요?”
“너 또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현암이 화를 내려 하자 박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무고한 아이를 지키는 것이 왜 잘못되었단 말이냐?”
준후는 애써 용기를 내어 되받았다.
“나는…………… 나는 느낄 수 있어요. 신부님, 신부님은 느끼지 못 하나요? 예? 정말 내가 잘못 느끼는 건가요?”
준후가 외치자 박 신부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현암은 준후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물었다.
“무슨 소리냐? 뭘 느낀다는 거야?”
준후는 입술을 바르르 떨다가 쏘아 대듯 말했다.
“저 아기……………. 배 속에 있는 아기…………. 정말 저 아기가 우리 가 생각한 대로 죄 없고 순진한 아기라면…………… 대체 이 느낌은 뭐죠? 이 어두운 느낌은요?”
“어두운 느낌이라고?”
현암이 놀라서 다시 묻자 준후가 떨면서 대답했다.
“어두운 느낌…………. 저 아기는 분명 ………… 분명 제대로 된 아기 가 아니에요. 우리가 짐작한 대로의 아기라면 어떻게… 어떻 게 배 속에서부터 저렇게 음침하고 어두운 기운을 내뿜을 수 있 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현암도 아까부터 온몸이 몹시 떨리고 음습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은 비바람을 맞아서 그런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준후는 이제 흥분을 이기지 못해 소리쳤다.
“예? 신부님! 왜 말씀이 없으시죠? 왜 아니라고 하지 못하시는 거죠? 예?”
그러나 박 신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현암은 너 무도 놀라서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급히 동굴 안으로 뛰 어 들어갔다. 동굴 안을 보던 현암은 깜짝 놀랐다. 동굴 안에는 음습하고 검은 기운이 가득했고 그 가운데 승희가 쓰러져 있었 다. 바이올렛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뒹굴고 있었으 니 바이올렛의 짓은 아니었다.
현암은 깜짝 놀라 승희를 끌고 나오려는데 문득 현암의 귓가에 소리가 들려왔다.
미워.
현암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일행 외에 아무도 보 이지 않았다. 오로지 바이올렛만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뿐이었 다. 바이올렛이 혀를 깨물 것 같아 현암은 급히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입에 악물리려 했다. 그런데 현암의 손이 바이올렛의 몸에 닿자 날카로운 바늘 끝 같은 느낌이 전해져 왔다.
손대지 마!
현암은 깜짝 놀라 바이올렛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그 악의에 찬, 뾰족한 부르짖음은 현암의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죽여 버릴 거야…… 모두! 모두!
현암은 너무도 놀라고 두려워서 급히 승희를 끌고 밖으로 달 려 나갔다. 준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현암은 눈을 크게 뜨고 준후에게 물 었다.
“준후야・・・・・・ 혹시 네가 말한 게…..”
“현암 형, 들었어요?”
현암이 고개를 끄덕이자 준후는 아래턱을 덜덜 떨며 말했다.
“나는…………… 그녀를 업고 가는 내내………… 그 아기의 부르짖음 을 들었어요. 어떻게…………… 아기가…………… 갓난아기가……………. 모두 를 죽인다고 하고 있어요. 악의에 가득 차서는…………….”
준후가 떨면서 이야기하는데 멀리서 번개가 번쩍였다. 승희가 비를 맞자 악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서는 현암에게 매달렸다.
현암군! 현암 군?”
“괜찮아, 승희야, 괜찮아.”
현암이 승희를 감싸 주자 승희는 흑흑 울었다.
“무서워! 무서워! 저 안에 …………… 누군가가 있어! 누군가가! 아냐. 그건 아기야! 아기가……………!”
“겁내지 마.”
“아냐 난 느꼈어! 느꼈다구! 바이올렛의 배에 손을 대는 순간・・・・・・ 아기가 외쳤어! 나에게 외쳤어! 나에게 손댄 놈은 죽여 버린다고!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진정해! 진정하라구!”
현암이 승희에게 고함지르듯 말하자 승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신부님・・・・・・ 신부님! 우리가 틀렸어요. 저 애는………….. 저애 는…………. 난 느꼈어요. 저 애는 세상에 복수를 하려고 해요. 내 말을 믿어야 해요! 난 투시력이 있어요! 저 애는 배 속에 있는 어린 아기가! 세상을 망하게 할 궁리를 하고 있단 말이에요!”
승희가 소리를 지르는데 번개가 번쩍 내리꽂히더니 날카로운 빛이 사방을 감쌌다.
준후가 천천히 박 신부 앞으로 다가갔다.
“신부님, 저 아기는…………… 악마예요! 악마의 자식이에요. 우리가 틀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