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18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11 : 현암의 고백
현암의 고백
바이올렛은 무섭게 번개가 내리꽂히는 속에서 산고의 고통에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러나 출산의 때가 임박해 올수록 그녀의 배 에서 풍겨 나오는 어둠의 기운은 점점 짙어만 갔다. 이제 준후만 이 아니라 현암도 당황해서 초조하게 박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이건…… 이건 정말……………..”
승희가 울면서 부르짖었다.
“저것 때문에…………! 저런 아이 때문에 모두들 목숨을 버렸단 말야?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구!”
승희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준후가 현암에게 물었다.
“현암 형, 어떻게 생각해요?”
현암이 이를 뿌드득 갈며 대답했다.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순간 준후가 싸늘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난………… 난…………… 저 여자를 죽일 거예요. 저 아기도…”
준후의 말에 현암은 준후를 무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건 안 된다.”
“왜죠? 예?”
준후가 전에 없이 대들자 현암이 말했다.
“아직은…………… 아직은 모른다.”
“여기까지 와 놓고 뭘 모른다는 거죠? 예?”
“블랙 엔젤의 속임수일지도 몰라. 아니… 그것 자체가 속임수였나? 아냐…………. 나는 모르겠어.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이건 속임수 따위가 아니에요! 저…………… 저 녀석은 악마의 자식!”
그 순간, 준후는 눈에서 불이 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몸 을 휘청거리다가 넘어졌다. 따귀를 맞은 것이다. 준후를 때린 것 은 현암이 아니라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박 신부였다. 준후는 맞 은 것에 대해 항변하지는 않았으나 무서운 눈길로 동굴 안을 쏘 아보았다.
박신부가 준후에게 말했다.
“사과해라.”
“뭐라고요?”
준후가 되묻자 박 신부는 다시 한번 천천히 말했다.
“저 아기에게 사과해라. 너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어.”
“하지만…………….”
준후가 조금 수그러들며 말끝을 흐리자 박 신부는 차분히 타일렀다.
“저 아이의 마음이 어둠에 차 있고, 무서운 것은 나도 안다. 하 지만……………. 하지만 저 아기를 해칠 수는 없어. 저 아기는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 누구도 아직은 저 아이를 비난할 수 없어…………….. “
그러면서 박 신부는 넘어진 준후를 일으켜 세웠다.
“준후야, 나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고 믿는 다. 저 아기의 마음도 정해진 것은 아닐 거야. 저 아기의 마음이 어둠에 물들어 있다면, 그것은 저 아기가 속했던 환경 탓이고 궁 극적으로는 지금의 세상 탓이다. 그것을 욕할 것이 아니라 바로 잡아주어야만 하는 거야…………….”
“신부님…………….”
준후가 울먹이자 박 신부는 준후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현암에게 말했다.
“현암 군.”
“……?”
“준후를 잘 타일러 주게나. 나는 출산을 도와야 할 것 같네.”
그 말에는 준후가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문득 박 신부가 멈칫하고는 현암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이야기했던가?”
“예?”
“월향검 이야기 말이네. 안나스가 죽기 전에 말해 주었다네. 월향검을 해방시키는 방법이 있다고.”
의외로 현암은 약간 심드렁하게 되받았다.
“그랬습니까?”
현암을 보며 박 신부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건 저주가 아니라네. 저주는 이미 끝났고,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월향검은 해방될 거라는군. 혹시나 싶어서 말해 두는 걸 세.”
이윽고 박 신부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 현암은 잠시 월향검 을 만지작거리면서 준후와 함께 숲을 거닐었다. 비와 바람은 여 전히 몰아쳤지만 너무 오랫동안 빗속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현암 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동굴에서 꽤 떨어 진 곳까지 와서야 현암이 나뭇등걸에 앉았고 준후가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현암은 준후에게 말했다.
“준후야, 마음을 가라앉혀라. 신부님의 말이 맞다. 우리는 힘 이 아닌 마음으로 싸워야 해. 그것이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유일 한길이다. 저 아이를 미워해서는 안 돼…………….”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걸 어떡해요. 만약…………… 만약 우리가 틀렸으면…………….”
“틀리지 않을 거야. 신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 말에 어느 정도 불안감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준후는 놓치지 않았다.
“형도……?”
“나는 다르다. 신부님처럼 확신도 없지만, 너처럼 흥분하고 싶 지도 않아. 나는 이렇게 믿는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솔직히 세상이 망할 수 도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세상이 망하는 것은 결과다. 아직 결과를 놓고 행동할 수는 없어. 세상을 구한 다고 옳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잘못이야.”
“하지만 세상이 망해 버리면……………”
“옳은 일을 했는데도 세상이 망한다면…………… 그건 세상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어. 만약 그렇다면 그런 세상은 망해 버리 는 게 나을지도 몰라.”
현암이 뜻밖의 말을 하자 언제 따라왔는지 승희가 옆에서 불쑥 나타났다.
“나는 이놈의 세상, 지긋지긋해. 차라리 망해 버렸으면 좋겠 어. 정말 솔직한 심정이야…………….”
현암은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준후도 조금 마음이 풀렸다.
“형은 역시 정의파군요. 약간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그런가?”
그때 저만치에서 휘르르 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현암은 깜짝 놀라 준후를 떠밀어 내고는 승희의 옷자락을 잡고 몸을 굴렸다. 그다음 순간, 현암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무엇인가가요 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작은 소구경 로켓 이나 유탄 같았다. 그 뒤를 이어 우박 같은 총소리가 들려왔고 여기저기 나무가 쓰러지며 총알구멍이 뚫렸다.
“제길!”
현암이 몸을 휘청거렸다. 준후가 놀라서 현암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현암은 손을 저으며 준후에게 소리쳤다.
“어서 가!”
“안돼요!”
그와 동시에 넘어졌던 승희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현암에게 달려왔다.
“현암군!”
“승희야! 어서 가!”
“안돼! 안가!”
“준후야!”
현암이 준후를 부르자 준후는 급히 부적들을 있는 대로 꺼내 숲 쪽을 향해 던졌다. 너무 급하게 던져서 만부원진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부적들 모두 불이 붙어서 사방으로 쏘아져 날아 갔다. 그러나 억수같은 비 때문에 부적들은 도중에서 힘을 잃고 꺼져 버렸다. 준후는 다시 리매를 불러냈다. 준후가 모든 힘을 다 썼기 때문에 나타난 리매는 다섯 마리였다. 그들이 쿵쾅거리며 숲으로 달려가는 틈을 타서 준후는 재빨리 현암 곁으로 갔다.
“현암 형! 다쳤어요?”
그러자 현암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헛소리. 무적 현암이라고 들어봤니? 내가 다칠 것 같아?”
그때 리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면서 두 마리의 리매가 동시 에 사라져 가는 느낌이 왔다. 총을 빗발같이 쏘아댄다 해도 리 매를 이렇게 금방 죽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필경 저편에도 무서 운 주술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
“아녜스 수녀!”
준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자들이라면 몰라도 그녀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더구나 저쪽은 완전무장한 많은 부하들 까지 있지 않은가?
그때 현암이 준후에게 말했다.
“잘되었군. 나는 그 여자가 얼마나 센지 한번 봐야겠다. 아직 나만 그 여자와 겨루어 보지 못했잖아.”
“예?”
준후가 화들짝 놀라자 현암은 준후에게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나는 지금, 막 천정개혈대법의 구 단계 관문을 뚫었다. 이제 누가 버텨 낼 수 있는지 한번 보겠다.”
“예?”
준후는 현암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전에 듣기로는 천정개혈대법의 구 단계는 절대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다 고 들은 것 같았는데…………. 현암이 말을 이어 나갔다.
“너도 저 총알 속에서는 당해 낼 수 없다. 어서 신부님과 승희……”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승희가 현암의 뺨을 철썩 때렸다.
“난 안가!”
승희는 처연한 눈빛으로 현암을 바라보았다. 현암도 승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쏟아지는 비와 총알 속에서 눈 한번 깜 박이지 않고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현암이 천 천히 금이 간 월향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검집을 쓰다 듬으며 말했다.
“나는………… 사실 알고 있었어. 월향이 나와 마음이 통하게 된 이후부터………… 저주는 이미 풀렸고 월향은 언제든지 해방될 수 있다는 걸. 그런데 ・・・・・・ 나는…………….”
“괜찮아, 괜찮아. 현암 군…….”
승희는 월향검을 보자 울 듯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차분하 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승희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같이만 있어 줘, 응?”
현암이 월향검을 들고 말했다.
“월향, 미안하다. 이제는 작별이야. 나는…………… 나는…………… 더이 상할 말이 없어…….”
순간 월향검에서 긴 신음 소리 같은 것이 나면서 뭔가 희고 반 쯤 투명한 것이 나왔다. 그것은 여자의 모습이었는데 준후와 승 희, 둘 다 그녀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그녀의 면모를 자 세히 보기도 전에 월향은 쓸쓸한 미소를 승희에게 보내고는 천 천히 사라져 버렸다.
현암은 월향검을 높이 들어 저만치 있는 벼랑으로 던져 버렸 다. 그러고 나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음 생에서 만나자……………..”
“형!”
준후는 현암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가장 중요한 싸움 을 앞둔 때가 아닌가? 그런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무기를 버 린다는 것은…………. 그때 승희의 밝은 눈빛을 보고는 준후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섬광이 스치듯 현암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강한 방법으로 현암은 승희에게 지금껏 하지 못한 무언의 말을 한 것이다.
현암이 표정을 바꾸면서 준후에게 전에 없이 강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준후야, 내 말을 잘 들어라. 나는 지금껏 너에게 단 한 번도 부탁을 해 본 적이 없다. 알고 있니?”
“아……………. 그건…….”
현암의 눈은 빛났고 얼굴엔 엄숙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는 천 천히, 긴장했거나 화가 났을 때 내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또박 또박준후에게 말했다.
“지금 처음으로 부탁을 하겠다. 너는 최대한 빨리, 신부님을 모시고 이곳을 피해라. 여기는 내가 맡는다. 다시 돌아오는 바보 짓은 하지 마라. 알았지?”
“형!”
“두 번 말하지 않겠다.”
현암은 두 번 심호흡을 한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순간 현암 의 몸에서 아찔하리만치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준후로서 도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강하면서도 조금의 사악함도 없 는 기운이었다.
준후는 그만 그 기운에 압도당해 주춤 뒤로 물러섰다. 준후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지만 쏟아지는 비 에 젖어 어느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었다.
“형・・・・・・ 죽지 마. 응? 절대로!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응?”
잠시 말이 없던 승희가 입을 열었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현암 군은 염려 마. 알았어?”
준후는 승희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승희 누나도…… 제발…………… 다시 만나요……. 예?”
현암이 눈을 감은 채 무겁게 말했다.
“승희는 내가 지킬 거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제 끼어들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준 후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래도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는 현암 과 승희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할 수 없이 준후는 박 신부가 있는 동굴 쪽으로 달려갔다. 총 알이 쏟아졌지만 힐기보법을 응용하여 준후는 눈부시게 달려갔 다. 준후는 달리는 중에 승희가 마지막으로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신부님을 잘 부탁해…………!”
준후가 사라지고 나자 현암이 웃으며 승희를 바라보았다. 그 의 머리 위를 총알이 핑 스치고 지나가자 승희가 피식 웃었다.
“고마워.”
“미안해.”
“솔직히 말하면….. 나 벌써 두 방 맞았어.”
그 말에 현암도 쓴웃음을 지으며 되받았다.
“나도 파편을 좀 맞았어.”
어느새 빗물에 흠뻑 젖은 승희의 옷은 어깨부터 서서히 붉은 기운이 번져 가고 있었고, 현암이 앉아 있는 곳 주변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말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걸……………”
승희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마지막인지도 몰라.”
현암의 말에 승희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좋아. 이제는 시원해. 정말로.”
현암은 조용히 총알이 쏟아지고 있는 저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저자들은 어떻게든 막아봐야겠지?”
“하하…………. 이번에도 저자들을 해치는 방법은 쓸 수 없겠지? 그냥 막아내고 또 막아 내고 막아내야지? 우리는 어떻게 되더 라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싸움. 사실 지겨워.”
승희가 웃으며 투덜대자 현암은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마지막까지도……………..”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승희가 되받았다.
“상관없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란걸 알았거든.”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로 동시에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준후는 달리면서 울었다. 현암이 외치는 사자후의 엄청난 울 림도 들렸고 우박 같은 총소리와 포 소리, 아녜스 수녀의 외치는 소리와 주술의 느낌들이 마구잡이로 들려왔다. 준후는 듣지 않 으려고 애쓰면서 달렸다. 달리면서 준후는 외쳤다.
“거짓말쟁이!”
준후는 현암이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준후야, 천정개혈대법 구 단계는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인간의 몸은 그만한 힘을 버티기에는 너 무 약하거든. 아마 그걸 쓰면 폭탄같이 자신과 주변을 한꺼번에 날려 버리게 될 거야. 위력……? ‘탄’ 자결의 천 배가량 될까?
“거짓말쟁이!”
준후는 귀를 막고 눈까지 감고 뛰었다. 행여나 보일지도 모르 는 섬광과 무서운 폭음을 막기 위해서 ‘탄’ 자결의 천 배나 된다 는 폭발음이 행여라도 들릴까 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