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21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14 : 최후의 망설임
최후의 망설임
준후는 미친 것처럼 빗속을 뚫고 달렸다. 이제는 눈물조차 나 오지 않았다. 준후는 마치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벌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오로지 달리기만 했다. 나뭇가지에 얼굴과 몸이 긁혀도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아까 박 신부의 말을 듣고 가 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울렁거리며 들뜨기 시작했다.
‘모두 죽었어. 모두……………. 이제는 모두 죽었을 거야……….’
인간에게 쫓기고, 악마에게 쫓기고, 이제는 또 무엇에 쫓겨야 하는 것일까? 다시 한번 바이올렛이 비명을 지르면서 준후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우스운 꼴이겠군. 준후는 지독한 살의를 느꼈다. 전보다도 훨씬 더.
‘짓밟아 버리고 싶어. 으깨 버리고 싶어. 토막토막 내 버리고 싶어.’
준후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이상한 열기가 준후의 몸에 차올 랐다. 귓가에서 간질이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악 마들의 최후의 발악인지도 몰랐다. 그 유혹은 이제까지 험한 길 을 걸어온 준후로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 망할년을 죽여. 그 새끼도 같이’ 준후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면서 나무 한 그루를 정통으로 들이받았다. 준후는 튀어 나갔지만 무의식중에 균형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바이올렛이 다시 신경 거슬리는 비명을 질 러 대며 준후의 얼굴을 사정없이 잡아 뜯었다.
‘세상을 구하고 싶지 않아? 이유 없이 목숨을 버린 네 친구들 의 복수를 해 주고 싶지 않아?’
줄기차게 주변에서 번갯불이 번득였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나 무와 나무, 나무들, 덩굴과 덩굴, 덩굴들. 준후는 달리다가 문득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등에 업고 있는 악의에 가득 찬 덩어 리가 준후의 몸을 짓눌러 왔다. 그 시커먼 어둠과 분노와 악의와 저주가 속이 울렁거리면서 토할 것 같았다. 무릎을 꿇고 풀썩 주저앉아 토하려 했지만 속만 뒤집힐 듯 더욱 괴로워졌을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괴로워 벗어나고 싶어.’
갑자기 준후의 귀가 멍해지며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빗소리 바람 소리?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흑백으로 멍해지면서 준후의 머릿속도 꿈을 꾸는 듯이 몽롱해졌다. 영화를 보는 듯 편안한 기분이었다.
손이 덜덜 떨려 왔다. 그리고 느닷없이 움직이더니 땅에 쓰러 져 신음하는 바이올렛의 목덜미로 저절로 향했다. 그러자 배 속 이 조금 편해졌다.
“내가 한 게 아냐. 나는 몰라.”
준후는 누군가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손이 움직여 바이올렛의 목덜미를 감아쥐려고 했다. 즐거운 기분이었다.
‘나는 몰라.’
바이올렛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주변이 번갯불에 번 쩍이며 비추어졌다. 그 순간 준후는 격렬한 아픔을 느끼면서 손 을 놓아 버렸다. 번개 치는 소리와 함께 뭔가 낯익은 소리를 들 은 것 같았다. 무슨 소리였더라? 누군가의 비명 소리와도 같고, 외침과도 같은 소리.
준후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다시 쏟아지는 빗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이올렛이 캑캑거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준후는 깜짝 놀라 손을 들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손이 움 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손이 무서우리만큼 아팠다. 눈을 돌려 보 니 자신의 왼손에 낯익은 칼 한 자루가 꽂혀 땅에 손을 못 박아 두고 있었다. 현암이 던져 버린 금이 간 월향검이었다.
“월향검이……?”
준후가 놀라 멍하니 있는 순간, 월향검의 금이 커지며 쩍쩍 갈 라지더니 퍽 하고 깨어져서 없어졌다.
“뭐………… 뭐야?”
준후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서 보니 손 의 아픔도 사라졌고 상처도 없었다. 그렇다면 환각을 본 것인가? 어째서?
땅바닥에는 바이올렛이 마치 짐승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쏟 아지는 빗물 속에서도 그녀의 양수가 터지고 다리 사이에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시 그녀와 준후의 주변을 무 서운 바람이 쏴아 하고 쓸고 지나갔고 바이올렛은 비명을 지르 면서 아무것이라도 잡으려는 듯 손을 마구 뻗어 댔다.
준후는 급히 그녀의 손을 잡아 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힘이 엄청나 준후는 손가락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문득 주변 이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폭풍 때문에 대낮인데도 길이 어두웠 지만 이제는 아예 깜깜해지고 있었다.
‘일식이다.’
준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사방을 뒤덮었다. 그리고 어둠은 점점, 점점 깊어만 갔다. 조금만 더 있 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불현듯 현암과 박 신부, 승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더러운 여자를 위해서 모두가……………’
“그만둬! 그만두라구!”
준후는 머리칼을 잡혔고 한 움큼의 머리칼이 뜯겨 나갔다. 머 리 가죽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찔렸다. 육체 의 아픔도 컸지만, 바이올렛의 배 속에서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증오와 악의가 준후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죽어버려. 그게 싫으면 죽여!
“그만둬!”
준후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었고 박신부와 현암의 말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세상의 운명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도 괴로웠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 었다. 배 속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악의의 덩어리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 아기도 산모와 함께 고통을 느끼는지 아까보다 더더욱 무서운 악의와 저주를 뿜어내고 있었다.
‘틀렸어! 이 아기는 악마야. 세상을 망하게 할 거야! 나는 복수 를 해야 해! 복수를 해야 해!’
준후가 말하는 것도 아닌데 자신이 중얼거리는 것처럼 귓속이 울려왔다. 바이올렛의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끔찍한 그녀의 손 톱이 다시 준후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순간 배 속에서 양수 속을 둥둥 떠다니는 눈도 못 뜬 아기가 자신을 저주하며 추하게 일그 러진 웃음을 보였다. 세상은 망할 것이었다. 이 아기를 살려 두 면 세상은 망한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이제는 거의 확신했다. 그 러나 아기를 죽인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빙빙 도는 준후의 눈에 자그마한 하 나의 발이 나타났다. 바이올렛의 다리 사이로 작은 발이, 꼬물거 리며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아주 조금밖에 없던 빛마저도 완전히 사라지고 준후의 밝은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일식이 완전히 진행된 것이다.
“이대로는 안돼.”
괴로움에 못 이겨 무심코 내뻗은 준후의 손에 뾰족한 돌멩이 가 잡혔다. 준후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그 돌멩이를 높이 쳐 들었다. 순간 무서운 소리와 함께 근처에 세 번이나 연속으로 번 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져 나무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터져 나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