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3화 – 묵시록의 재현 3 : 징벌자 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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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5권 3화 – 묵시록의 재현 3 : 징벌자 준후


징벌자 준후

현암과 박 신부, 승희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은 마치 천둥이 머리 위에 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준후야!”

“너 미쳤니?”

박 신부와 승희가 놀라서 외치는데 현암은 말조차 하지 못하고 아연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휘청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해밀튼 역시 놀라서 소리쳤다.

“이보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지금은 장난칠 때가…………….”

그때 프란체스코 주교가 외쳤다.

“네가? 네가 어떻게? 적그리스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없애야 해!”

안나스도 외쳤다.

“예언이 틀릴 리 없다!”

그러자 준후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지도 않는 예언을 잘도 믿고 있군.”

그러고는 이를 악물며 덧붙였다.

“곧 때가 된다.”

“뭐?”

“뭐라고?”

“무슨 소리………?”

프란체스코 주교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놀라며 반문했다.

다시 한번 준후가 힘겹게 말했다.

“내 힘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뒤늦게 현암이 외쳤다.

“장준후! 너・・・・・・ 대체……!”

준후는 현암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난 살아남을 거야.”

“무・・・・・・ 무슨 소리야?”

돌연 준후가 악을 썼다.

“살아남도록 해. 알아서들 살아남도록 해! 종말이야! 종말의 시작이야!”

“도대체 너는……………!”

현암과 승희가 동시에 준후에게 다가가며 외치는데 문득 이상 한 느낌이 모든 사람들을 엄습해 왔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이 하고도 불길한 느낌이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느낌에 모든 사람 들은 모골이 송연해져 입을 다물었다. 박 신부와 해밀튼마저도 몸이 떨려 왔다.

그때 구석에 있던 수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

난데없이 들려온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는 모든 사람의 등 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준호가 덜덜 떨며 급히 수아를 달래려 했지만 수아는 준호의 손길을 뿌리치며 울부짖었다.

“모두 죽어! 모두 죽어!”

승희는 급히 수아의 마음을 투시했다. 수아의 마음을 투시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승희의 마음 속에 비추어졌다.

“이건………!”

승희는 너무도 놀라서 새파랗게 질려 이내 비틀거리며 현암에 게로 몸을 기댔다.

“모두……………! 모두가……………!”

승희의 마음속에 비추어진 광경은 놀랍기 이를 데 없었다. 승 희는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기기묘묘한 형체의 존재들을 보았 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수아의 마음속에는 보였 고, 그것을 승희가 읽어 낸 것이다.

정령들이었다. 무수한 정령들이 주술 막 밖에서 주술 막을 지 키면서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대부분이 죽어 가며 쫓기고 있었 다. 상대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몇만, 몇천만, 아니 몇억에 달 하는지도 몰랐다. 몇억에 달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형체 들이 주술 막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수아를 지키려는 정령들의 결사적인 저지는 지금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모든 정령이 수아를 지키려고 몰려갔던 탓에 얼마 동안 성난큰곰도 정령력을 쓸 수 없었고, 수아의 주변 에도 정령력이 발동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이게 다 뭐야!”

승희가 공포에 가득 찬 소리를 질렀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지하 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웅성웅성하는 울림을 느끼기 시작했 다. 작지만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를, 사방을 가득 메우는 울림이 었다. 그 울림은 표현하기 힘들 만큼 적의와 살의로 가득 차 있 었다. 게다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 느껴졌다. 아하 스페르츠의 막대한 힘조차 벌레만도 못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 는 거대한 힘이.

“도망쳐!”

죽지 않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해밀튼의 공포에 가득 찬 목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울림과 압박 하는 기운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모든 사람들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보호하는 술수를 펼치면서 본능적으로 등을 맞대고 한가 운데로 모여들었다. 안나스와 프란체스코 주교조차도 자신도 모 르게 박 신부, 현암 등과 등을 맞댔다.

다음 순간, 신전 사방의 벽들이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아니, 무너졌다기보다는 통째로 사라져서 없어졌다고 하는 편이 정확 했다. 한 곳이 부서져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벽의 모든 부 분이 동시에 부서지며 먼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검고 무시무시한, 살아 있는 안개 같은 것이 사방에서 해일처럼 사람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이건・・・・・・!’

아무도 그것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박 신부의 오라가 잠시 동안 그들을 막았지만 아하스 페르츠의 주술을 버티어 내는 것보다 열 배는 힘들었다. 현암이 휘둘러 대는 월향검에도 그 정체 모를 안개는 조금도 베이지 않았다. 아녜스 수녀가 미친 듯 냉기와 열 기를 쏘아 대도 안개 같은 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각이 예민한 루카 수사가 비명을 질렀다.

“모두・・・・・・ 모두 죽고 있어!”

아까 벌어졌던 혈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밖에 쓰러져 있었다. 칼키파와 성당 기사단, 이단 심판소와 검은 편지 결사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지만, 대부분은 부상을 입고 쓰러진 정도 였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 남김없이 죽음을 당하기 시작했다. 형 언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죽음들.

루카 수사는 그들이 질러 대는 비명과 고통에 가득한 부르짖 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르마게돈이다! 하르마게돈!”

정신을 잃었던 키건이 미친 듯 외쳐 대는 소리와 단말마의 비 명이 동시에 들렸다. 그는 여전히 모든 주술을 막는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채 삼초도 안 되는 사이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 참상은 그야 말로 각자가 상상했던 하르마게돈보다도 훨씬 더 참혹했다. 지하실 안뿐만이 아니라, 주술 막 안으로 모여들었던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조리 떼죽음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생각 을 할 틈조차 없었다.

“모두 가운데로!”

해밀튼이 외쳤다. 박 신부를 비롯한 모두의 힘은 그 거대한 힘 앞에 오 초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들을 잠시나마 지탱하 게 해 준 것은 해밀튼이었다. 주술을 사용했다가는 다시 아하스 페르츠의 인격이 나타날지 몰랐지만, 지금은 다른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보호막을 쳤는데 그 힘은 실로 놀라 워서 잠시나마 모두를 덮어 그 무시무시한 안개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그 막은 투명하여 밖이 보였다. 물론 검게 휘몰아치 는 안개 같은 것 때문에 코앞밖에는 볼 수 없었지만. 별안간 승희가 비명을 질렀다.

“준후가! 그리고 아이들이 없어!”

너무도 창졸간의 일이어서 준후와 준호, 아라와 수아는 해밀 튼의 보호막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황달지 교수와 백호, 마하딥 등도 들어오지 못했다. 쓰러져 있던 카르나와 고반 다도 들어올 수 없었다.

모두 이를 악물었지만, 지금 그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박 신부가 무모하게 뛰쳐나가려 했지만 현암이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어떻게 좀……!”

해밀튼이 폭포처럼 땀을 쏟으며 힘겨운 듯 외쳤다. 해밀튼, 즉 아하스 페르츠가 이천 년간 쌓아 온 주술력은 실로 어마어마하 여 누구도 상대할 수 없었지만 이 무서운 안개에는 도무지 버텨 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때 프란체스코 주교가 소리쳤다.

“적그리스도다! 그 아이야말로 적그리스도!”

주교는 반쯤 미친 것 같았다. 실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자 는 적그리스도 말고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주교가 미친 듯 외쳐 댔다.

“너희 위선자들! 너희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 나는 차라리 순교하겠다!”

아녜스 수녀가 주교를 잡았다. 거리낌 없던 그녀로서도 지금 은 무력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주교를 잡 아끌고 오려 했지만 주교는 길길이 날뛰며 외쳤다.

“형제들이여! 아녜스 수녀여! 적그리스도를 없애시오! 세상을 정화하시오! 신의 의지로 오는 멸망이라면 받아들이겠지만 이것 은………… 이것은…………!”

“주교님!”

루카 수사도 주교를 붙들었고 가브리엘 수사도 그를 붙잡았지만주교는 계속 외쳤다.

“잊지 마시오! 모든 힘을 다해! 바티칸의 모든 힘을 모아!”

그러다가 별안간 주교는 자신을 잡고 있는 아녜스 수녀의 손 을 꽉 깨물었다. 주교의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고 예상치 못했던 터라 아녜스 수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놓았다.

대뜸 주교는 있는 힘을 다해 해밀튼의 보호막 밖으로 몸을 날 렸다. 루카 수사가 그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으아악!”

보호막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주교의 몸은 믹서로 갈린 것 처럼 그대로 피 안개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를 잡으려 내뻗은 루카 수사의 팔도 순식간에 갈린 듯 없어졌다.

루카 수사는 찢어질 듯 비명을 외치면서도 주교의 이름을 불 렀다. 가브리엘 수사가 울면서 루카 수사를 안으로 잡아당겼다. 루카 수사는 기절하여 축 늘어져 버렸다.

그때 누군가가 피투성이가 된 채 보호막으로 다가와 미친 듯 막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그 앞에 있던 승희가 비명을 질렀다.

고반다였다. 그는 거의 힘을 잃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런 그가 미친 듯 보호막을 문질러 대며 소리를 질렀지만 역시 무기 력했다. 마침내 그도 힘이 다한 듯, 전신이 찢어져 나가면서 승희의 눈앞에서 조각조각 분해되어 피 안개로 변해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코앞에서 본 승희는 무서운 나머지 그만 기절해 버 렸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절망했다. 최강자 중 하나인 고반다 마저도 속절없이 분해되어 죽어 버리는 판국이니 해밀튼이 더 버티지 못하면 모두 죽는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은……!”

해밀튼이 괴로운 듯 외치자 가브리엘 수사와 아녜스 수녀는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현암은 이를 악물고 박 신부와 승 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외쳤다.

“준후가 이럴 리 없어! 이건……………! 이건…………..!”

다음 순간, 해밀튼조차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보 호막이 사라지자 검은 안개는 삽시간에 모든 사람들을 뒤덮었고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최후의 순간에 가브리엘 수사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 고가 마비될 정도의 공포 속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살길이었 다. 해밀튼의 보호막이 붕괴되는 순간,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 의 장기인 무화 능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무서움을 이기지 못해 눈을 감고 밖으로 내달렸다. 무 화 능력을 사용하면 벽이나 어떤 물체도 통과할 수 있었으므로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그 무시무시한 안개도 천만다행으로 무화된 그를 건드리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그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리고 기운이 빠져서 더 이상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때까지 달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해 무화 능력이 사라지는 순간, 그는 어딘가의 벽을 들 이받고 넘어져 기절하고 말았다.


아녜스 수녀도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방법을 썼다. 그녀의 원 소력에는 냉기를 다루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그 능력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의 몸을 꽁꽁 얼린 것이다. 나중에 소생할 수 있을지, 꽁꽁 언 몸이라 해도 그 안개의 무서운 힘에 버티어 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떠오르는 방법이 그것밖 에 없었다. 몸이 얼면 아픔이나 공포도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 이다.

해밀튼의 보호막이 붕괴되는 순간, 그녀는 루카 수사의 몸을 얼리고 곧바로 자신의 몸을 얼리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세 계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방법도 택할 수 없었다. 거대한 안개는 모든 것을 휩쓸어 부숴 버렸고 칼키파의 본거지였던 신 전은 완전히 붕괴되어 지하실까지 드러난 허허벌판이 되었다. 부서진 신전의 벽과 지붕과 바닥은 모두 가루가 되어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바람에 날아갔다. 그리고 칼키파의 본거지를 습격한 수많은 사람들의 육신과 그들이 지니고 온 장비들도 모조리 갈가리 분해되어 먼지구름에 휘말려 날아가, 남은 것은 허허벌판뿐이었다.

주변에 있던 집들도 완전히 지붕이 날아가서 앙상한 기둥과 몇몇 허물어진 벽만이 남았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싸웠던 산비 탈은 이제 사막처럼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가브리엘 수사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약간 몸을 움직여 보고는 그다지 상한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천천 히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수십 명에 달하던 이단 심판소의 형제 들은 물론, 수백 명에 달하던 검은 편지 결사의 용병들, 그보다 많았던 성당 기사단원들,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많았던 칼키파 의 신도들과 주술사들이 모조리 죽음을 당했고 시체조차 남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흘린 피만이 사방을 붉게 물들여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성직자인 그에게 이러한 광경은 시체가 널린 참상보다도 더욱 끔찍했고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은 끝이다…. 주여 …………… 이것이 정말………… 정말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까?”

가브리엘 수사는 울부짖었다. 이 무시무시한 안개가 밀려들면 세상은 종말이었다. 어떤 무기도, 어떤 힘도 이것 앞에는 대적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주술 능력을 지닌 자들도 순식간 에 전멸한 터에 누가 이것을 당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어떤 대도 시도, 어떤 국가도 이것의 습격을 받으면 한 시간도 견디지 못하 고 전멸하리라………….

가브리엘 수사는 오열하다 문득 한 지점을 보고 경악하여 주 저앉은 채 화다닥 몸을 뒤로 젖혔다. 건물이란 건물은 형태를 알 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조리 부서져 사방이 탁 트였다.

그중 아까까지 신전이 있던 곳에 깊이 파인 거대한 사각형 구 멍이 보였다. 신전 전체가 지하실까지 파여 날아가 커다란 사각 형 구멍만이 남은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 몇 명의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것도 온전한 모습으로!

“저………… 저들은….?”

가브리엘 수사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죽 음을 당했는데 죽지 않은 자들이 있다니. 프란체스코 주교가 최 후의 순간에 앞서 묵시록에 나온 자들이라 부르짖었던 바로 그 들이 아닌가.

용이라 불린 해밀튼, 짐승이라 불린 현암, 거짓 선지자라 불린 박신부, 바빌론의 탕녀로 불린 승희가 신전 자리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 옆에는 루카 수사와 아녜스 수녀의 얼어붙은 모습도 있었 지만 가브리엘 수사는 얼음 덩어리가 된 그들이 사람이라고 생 각지 않았다. 그리고 신전 자리 앞쪽에는 몇몇 사람들이 쓰러진 채 뒹굴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죽지 않은 듯했다. 그들은 놀랍게 도 아까 자신들이 쓰러뜨린 퇴마사들의 동료들, 즉 이반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 바이올렛과 성난큰곰이었다.

‘정말・・・・・・ 정말 저들이구나…………. 저들이 이 힘을 불러낸 거 야…………. 저들이 정말 적그리스도의 사도들이었구나…..?’

가브리엘 수사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프란체스코 주교의 말을 듣고 나서도 가브리엘 수사는 그때까지 그의 말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 엄청난 일을 겪고, 또 저들이 살아남은 것을 보자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는 이들이 적그리스도 일행이 분명하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보 였다.

아까 자기 스스로 말세에 임할 자라고 부르짖은 동양의 소년, 준후가 신전 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세 명의 아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자들처럼 정신을 잃지도, 넘어지지 도 않았다. 그저 한데 모여 가만히 서 있었는데, 아까 자신들을 습격한 검은 안개가 그들의 머리 위에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거 대한 깔때기 모양의 덩어리가 되어 떠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다른 몇몇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으나 가브리엘 수사는 그것까지 주의 깊게 보지는 못했다. 본능적인 공포와 분노가 그의 몸을 휩쌌다.

‘저들이야말로 말세를 오게 하는 자들이다! 적그리스도! 악의 사도들이다! 세상은 이제 끝이다!’

가브리엘 수사는 죽어 간 주교와 가디언들, 그리고 많은 형제 들을 생각하며 분노와 증오로 몸을 덜덜 떨면서 다시 달렸다. 주 술 막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공포와 절망과 분노에 휩싸여 속으로 계속 외쳤다.

‘알려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저들을 없애야만 한다! 교황청의 힘을, 아니 누구의 힘이라도 빌려서! 핵무기라도 써야 한다!’


퇴마사 일행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은 퇴마사 일행만이 아니었다. 카르나도 쓰러진 채 있었고, 안나스 도 죽지 않았다. 아녜스 수녀와 루카 수사도 온몸이 얼어붙어 의 식은 잃고 있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그들을 구한 것은 의외 의 인물이었다.

‘그래서는 안 돼. 더 이상 ………… 그러지 마…………….’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아라도 말했다.

‘우리를 믿어……………’

수아는 말없이 슬픈 얼굴로 거대한 검은 깔때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 세 명은 전혀 알 수 없는, 이미지의 존재와 접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검은 안개는 퇴마사들이 없을 때 아라가 입원한 병원에 나 타났던 그 검은 안개였다. 불행한 죽음을 당한 아기들의 영이 그 정체였다. 물론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컸지만 영 중 몇몇이 아라와 준호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들의 친구들 을 해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아기들의 영 중 모두가 그들을 살려 두려 하는 것은 아 니었다. 가브리엘 수사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회오리치는 깔때 기 속에서는 아기들의 영혼들끼리 치열한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 었다.

안 돼! 어머니의 명령이야!

이들은 달라!

이 사실을 전할 한 명을 남기는 것 외에는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을 절대 살려 두어서는 안 돼!

다른 자들은 살려 둘 수 없지만, 이 아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야! 

사실 준후는 아까 했던 자신의 말과는 달리 아무런 힘을 쓸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세 명의 아이들은 준후에게 설명할 틈도 없이 있는 힘을 다해 아기들의 영을 설득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만난 적 있는 아기들의 영이 논쟁에서 진다면, 모두가 끝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연, 아기들의 영이 논쟁을 멈추고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

알았어요! 어머니!

어머니!

순식간에 그들이 이루었던 거대한 깔때기가 허공 속으로 흩어져 없어졌다.

준호와 아라, 수아는 모두 한숨을 내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준호가 중얼거리자 아라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인형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도 무섭고 질려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준후가 아라에게 물었다.

“아라야, 그들의 어머니가 누구지?”

아라가 멍하니 준후의 얼굴을 쳐다보자 갑자기 준호가 외쳤다.

“말하지 마!”

준호는 아라의 앞을 막아서며 준후를 노려보았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준후가 준호에게 물었다.

“왜 그러지? 내 말을 안 들을거야?”

그러자 준호는 이를 꽉 깨물며 주술 문양이 있는 양 손바닥을 펴며 단호히 대꾸했다.

“그래!”

“왜지?”

“사부를 믿을 수 없어!”

순간 준후는 슬픈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누가 나를 믿을 수 있겠어? 나도 나 자신을 믿을 수 없는데 ・・・・・・ . “

그 말을 들은 준호가 약간 미안한 마음에 긴장이 느슨해진 순 간, 준후는 힐기보법을 사용하여 벼락같이 준호 곁으로 달려와 서 준호를 내리쳤다.

“…….”

준호의 눈이 분노로 번득이며 준후 향하는 순간, 준후가 다 시 한번 팔꿈치로 준호를 내리치자 준호는 기절해서 넘어져 버 렸다.

“오빠!”

아라가 놀라서 외치자 준후가 다시 물었다.

“아라야…………. 너는 내 말을 들을 거지?”

대뜸 준후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아라가 눈물을 글썽이며 찔끔거리자 준후가 집요하게 물었다.

“말해 봐. 아기들이 말한 어머니가 누구지?”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수아가 눈을 빛내면서 아라에게 매달렸다.

“오빠 나빠! 오빠 틀려!”

“닥쳐!”

준후가 버럭 소리쳤다. 그때 준후 뒤에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준후, 모든 걸 설명해 봐………….”

현암의 목소리였다. 현암은 비록 공력을 잃었고 부상도 심했 지만, 엄청나게 강한 정신력으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이다. 현암의 목소리가 들리자 준후는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중얼거렸다.

“잘됐어…….”

별안간 준후가 양손으로 동시에 아라와 수아를 인정사정없이 내리쳤다. 아라는 설마 준후가 자신을 때릴까 생각하고 있던 참 이라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속절없이 쓰러졌다. 수아 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보고 현암은 순간 움찔했다.

“너 변했구나…………..”

현암의 목소리는 몹시 낮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이는 현암이 극도로 분노했다는 증거였다.

준후는 뒤돌아 현암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용케 살았네?” 

현암이 버럭 외쳤다.

“장준후!”

현암이 소리를 지르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산비탈에 그의 목소리가 윙윙 울리며 메아리쳤다.

현암이 물었다.

“네가…………… 모두를 죽인 거냐? 네가 그 이상한 것을 부른 거냐?”

현암은 물론이고 아라와 준호, 수아를 제외한 누구도 그 검은 안개가 지난번 아이들이 만났던 것임을 짐작할 수 없었다.

더구나 준호와 아라, 수아가 모두 기절한 지금, 누구도 그 사실을 현암에게 말해 줄 수 없었다.

그 말에 준후가 멈칫하면서 대꾸했다.

“내가 부른 건 아냐. 하지만 곧 내가 부를 수 있게 될 거야.”

“어머니가 누구지?”

“나도 몰라.”

“그 어머니가 이것을 불렀고, 너는 그 힘을 빼앗으려고 그것을 물은 거냐?”

“잘 알면서 묻는군.”

그러면서 준후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현암에게 말했다.

“한 번 살려 줬으니 이제 모든 건 끝이야. 더 살고 싶으면 나에게 복종해.”

현암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준후는 여전히 꼿꼿이 선 채 대답하지 않았다.

현암은 온몸이 떨려 오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너 ・・・・・・ 아까 한 말이・・・・・・ 정말이냐?”

“무슨 말?”

준후는 심드렁하게 되물었으나 그의 어조에는 야릇한 떨림이 있었다.

현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숨기는 거지?”

이에 맞서 준후도 소리를 질렀다.

“숨기는 거? 많지! 아주 많지! 형은 상상도 못할 거야!”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며 주먹을 쥐었으나 애써 평 정을 되찾았다.

“준후야! 왜 숨기는 거지? 네가 이러는 건 대체 무슨 이유에서 지? 어쨌든지 나는 너를 믿는다. 그러니 …………”

“나를 믿어? 흥!”

준후는 뒷짐을 지고 현암에게 등을 보이며 쏘아붙이듯 덧붙였다.

“난 이제 과거의 내가 아냐. 수백 명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 않을 수 있다구. 그런 나를 믿어?” 

“준후야!”

현암은 안타까움과 울화가 범벅이 되어 복잡한 감정으로 다시 소리쳤다.

“너는…………… 대체 왜 그러는 거니? 왜 나에게까지 숨기는 거지? 응?”

그러자 준후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의 어깨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말에 현암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부르짖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수백 명을 죽였다 해도 나는 널 믿어! 다만…………… 다만…………….”

“난 많은 사람을 죽여 왔어. 형은 모를걸?”

“뭐라고?”

“이단 심판소에서 왜 불을 켜고 나를 찾는지 알아? 신부님도 알걸 가디언의 우두머리인 베드로 수사를 누가 죽였는지?”

“뭐라고? 대체 왜?”

현암이 경악하여 부르짖자 준후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말했다.

“일일이 말하기도 귀찮아. 정말 나를 귀찮게 하는군.’

“장준후!”

대꾸도 하지 않고 준후는 여전히 현암에게 등을 돌린 채 넘어져 있던 준호를 발길로 찼다.

그 발길질에 준호가 정신이 들어 현암과 후를 번갈아 보더니 현암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현암 형! 사부는……………! 사부는 변했어요!”

“뭐?”

준호는 비로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자 미친 듯이 소리쳤다.

“현암 형! 사부는…………. 사부를 막아줘요! 사부를……………!”

“도대체 뭐냐? 응?”

준호가 울면서 외쳤다.

“사부가……………! 사부가 연희 누나를……!”

“뭐? 연희 씨를 어쨌다고?”

준호는 엉엉 울면서 이내 부르짖었다.

죽였어요!”

“연희 씨가…………… 죽었다고?”

현암의 눈이 공허하게 커졌다. 그때 악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막 정신을 차린 승희였다. 승희 옆에는 박 신부도 있었다. 승희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허망함으로 가득 찼고, 박 신부의 얼굴은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도대체 언제 ……………”

준호가 더욱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며 준후를 향해 소리쳤다.

“사부! 사부! 왜 그랬어요! 왜? 왜? 왜?”

그러다가 다시 현암에게 매달리며 외쳤다.

“형! 사부를……………! 사부를 원래대로 돌려 줘요! 사부를 돌려줘요!”

준호의 목소리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등에 오싹 소름 을 돋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준후가 연희를 죽였단 말인가?

“난 믿을 수 없….어…………… 대체 언제 …………….”

현암이 더듬거리자 준호가 고개를 마구 저으며 외쳤다. 

“나는…………… 나는 봤어요! 나도 믿을 수…… 없어……………. 하지 만…………… 사부! 사부는 어째서……!”

그 순간 준후는 남몰래 슬쩍 옷소매로 얼굴을 훔치고는 천천 히 뒤로 돌아섰다. 준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것같이 보였으나 잠시 머뭇거릴 뿐 아무 말도 입 밖 으로 내지 못했다. 후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준후가 고개를 들었을 때, 준후의 얼굴은 평온한 표정 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히려 약간 조소에 가까운 웃음기마저 보 였다.

“그래. 내가 그랬어.”

“왜?”

승희가 악을 쓰자 준후는 천천히 대꾸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을 얻을 수 없으니까.”

현암이 주먹을 불끈 쥐며 앞으로 나섰다.

“세상을……………?”

“그래! 연희 누나는 라미드 우프닉스야! 지금 세상에 단 하나 남은 라미드우프닉스! 모두가 누나를 노렸어! 아하스 페르츠도! 고반다! 연희 누나가 그들 손에 죽으면 세상이 망가져. 그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냐…………. 그래서 차라리 내 손으로…..!” 

라미드우프닉스가 천수를 다하거나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알 경우, 그리고 인간의 손에 의해서 죽은 경우 라미드 우프닉스는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것에 의해 라미 드우프닉스가 죽음을 당하면 주술은 깨어지고 세상은 끝장이 난다는 예언도 있었다.

아하스 페르츠와 고반다 모두 정상적인 인간이라 볼 수 없으 니 확실히 상황이 위험하기는 했다. 하지만 준후는 세상을 구한 다기보다는 세상을 얻기 위해 그랬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가? 

“너 따위가 무슨 세상을 얻어? 이 못돼 먹은 자식아!”

승희가 악을 쓰자 준후가 말끝에 힘을 주며 말했다.

“가능해. 나는 이제 질렸어. 착한 척하고 살려면 너무도 많은 것을 손해 봐. 왜 그렇게 살아야 하지? 왜 있는 힘을 마음껏 쓰고 살면 안 되지? 내가 분명 강한데, 이젠 어떤 놈도 내 상대가 안되고, 세상을 얻을 기회가 왔는데! 왜 약한 자들 눈치를 보며, 개 같이 숨어서 뒤나 닦아주며 살아야 하냔 말야!”

“너 ………….”

현암의 눈초리가 살벌하게 변했다. 현암이 천천히 준후에게 걸어가자 준후는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나 준후는 안간힘을 쓰 며 현암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려 하는 것 같 았다.

현암은 너무도 분노한 나머지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 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현암은 천천히 다가가 다가 느닷없이 준후의 뺨을 후려쳤다.

현암이 공력이 없는 탓에 준후는 고개만 휙 돌렸을 뿐, 전혀 끄떡도 없었다. 현암에게 공력이 있고 자제심을 잃은 상태라면 준후를 크게 다치게 했을 터였다. 현암에게 맞고 난 후 준후는 현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때리지 마.”

그러나 현암은 다시 한번 준후의 다른 쪽 뺨을 후려쳤다. 준후 는 입술이 찢어졌는지 핏 하며 피를 뱉어 내고는 현암에게 씹어 뱉듯이 말했다.

“때리지 마. 그래 봐야 아프지도 않아.”

현암은 그 말을 내뱉는 준후의 눈초리를 보고 주먹을 머리 높이 들어 올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현암을 잡고 늘어졌다.

어느새 다시 정신을 차린 아라였다.

아라는 온통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현암에게 사정했다. 아라는 설움이 북받치는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빨 때리지 마요! 오빨 때리지 ……..”

그러나 현암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아라를 밀어낸 다음 준후에게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대뜸 박 신부가 현암의 팔을 막았다.

“그만하게, 현암 군.”

그래도 현암은 거의 기계처럼 다시 팔을 놀리려 했다. 순간 박 신부가 현암을 밀어내며 호통을 쳤다.

“정신 차리게!”

현암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왔는지 그 자리에 우뚝 멈추 어섰다. 그러나 현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전혀 몸을 움직 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현암은 장승처럼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 다. 승희 역시 너무도 경악한 나머지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박신부가 준엄한 어조로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야, 그 말이 사실이냐?’

준후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코웃음을 흥 하고 쳤다. 그때 준호가 외쳤다.

“사부! 나는 이제 사부와는 모르는 사람이야! 아니, 너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야! 너는………… 너는 우리 모두를 배신하고……………. 또, 또…………….”

준호는 노기 가득 찬 목소리로 외치다가 그만 주저앉아 대성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박 신부도 준호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 신부는 순간 현기증이 일어 몸을 가 누지 못해 휘청거렸다.

힘겹게 승희가 입을 열었다.

“준후야, 어서 말해. 사실이 아니라고……………. 거짓말이라고 해…………. 너는…………… 너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잖아…………..”

그러나 준후는 꼿꼿이 고개를 들고 서 있을 뿐, 입을 열지 않 았다. 승희가 간곡하게 말했다.

“내가 왜 너를 몰라? 너와 같이 죽을 뻔한 게 몇 번인데! 네 가・・・・・・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는……………..”

준후는 비웃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승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 너는…………… 정말 변했구나!”

“아냐! 아냐! 언니!”

승희가 소리치자 아라는 미친 듯이 울면서 승희에게 가서 매달렸다.

휘청거리던 박 신부가 최후의 힘을 짜내는 듯 비통한 목소리 로 준후에게 말했다.

“준후야, 우리가…………. 우리가 하고자 했던 일은 결코…………..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너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어째…….”

준후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어요. 말세와 혼돈. 그리고 내로라하던 모든 주술사들은 없어졌어요. 우리 독무대예요. 더구나 아까의 힘만 우리 손에 넣으면……………. 그때는 모든 것이 우리 마음대로 죠. 핵무기에 비할 바가 아니에요.”

“너 악마에 홀렸냐? 신부님! 어떻게 좀……………..”

승희가 소리치자 박 신부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믿을 수 없지만………… 준후는 절대 홀리지 않았어. 지극히 정상이야…”

“믿을 수 없어!”

승희가 또다시 소리치자 준후가 담담히 되받았다.

“나는 컸어요. 그걸 잊지 않았겠죠?”

“헛소리! 네 말은 삼류 만화에서나 나오는 소리일 뿐이야! 너는……………!”

“세상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처럼 비굴하게 개같 이 살지는 않아도 될 테지.”

별안간 현암이 미친 듯 고개를 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만해! 나는………… 믿을 수 없어! 너는 대체 무슨 생각 으로 그런 소리를 해 대는 거야. 응?”

준후가 딱 자르듯 대꾸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뿐이야. 우린 잘못 생각해 온 거였어. 나는 이제 내 길을 갈 거야.”

“네 길?”

“내가 살려면 어떻게든 남을 해치지 않을 수 없겠지. 나는 더이상 이런 위선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거야. 더 이상은.”

현암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위선・・・・・・ 이라고……………?”

준후는 돌연 독기 품은 어조로 외쳤다.

“그래, 위선. 나는 누구도 해칠 수 있어. 내가 살기 위해선!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말야!”

한 호흡 쉬고 준후가 다시 외쳤다.

“지금 신부님과 형에게 남은 게 뭐지? 그 빌어먹을 징벌자를 찾아내서 어떡할 거지? 그를 살려 내려 할 거 아냐? 그러느니 차 라리 내가 대신하겠어. 내가 징벌자가 되어 우리를 배신해 온 세 상을 징벌하고, 세상을 지배하겠어!”

준후가 악을 쓰자 현암이 되받아 소리쳤다.

“미친자식!”

“이대로면 우린 망해. 설혹 세상을 구하더라도 우리는 죽어! 나는 죽고 싶지 않아.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면 나는 누구도 죽일 수 있어! 세상이 망해도 상관없어!”

더 이상 참지 못한 승희가 소리를 꽥 질렀다.

“그건 ・・・・・・ 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거냐?”

“내가 살아야 모두가 살아. 나는 절대 죽지 않을 거야. 앞으로 나는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내가 살 수 있다면 여기 있는 사람을 다 죽이더라도 난 살아남을 거라고!”

그때 준호가 외쳤다.

“한빈 거사님이란 노인도 사부가 죽였지?”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암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잠 시 후, 현암의 얼굴이 갑자기 십 년은 넘게 늙어 버린 것처럼 변 했다.

현암은 멍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그분이 그럴 리 없어. 네까짓 게…………… 그분을..”

다시 준호가 외쳤다.

“나는 봤어요! 한국에서부터 사람들이 사부를 쫓아왔다구요! 현현파라는 사람들과 오의파라는 사람들 모두가 사부, 아니 장 준후가 범인이라면서……………. 그리고 잡으러 온 사람들을 사부는 모두…….”

현암은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현암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더니 한 되가 넘어 보일 듯한 피를 울컥 토해 냈다. 현암의 옷이 피로 홍건히 젖고 바닥에까지 검은 피가 흘러넘쳤다. 그와 동시에 박 신부가 아찔함을 이기지 못해 정신을 잃고 쓰러 졌다.

승희는 현암을 부축해야 할지 박 신부를 부축해야 할지 갈피 를 잡지 못하다가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했다. 사태가 너무 심 각하여 아라는 마구 울면서 준후에게 달려가 매달리려 했지만 준후는 매몰차게 아라를 걷어차버렸다.

“저리 꺼져! 귀찮아!”

그때였다. 현암이 길게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공력이 충만해서 주위에 있는 모두의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현암은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더니 준후에게 다가갔다.

“장준후, 나는 널 용서할 수 없다.”

“날 어떻게 하려고?”

“너는・・・・・・ 너는 글러먹었다. 나는 지금・・・・・・ 지금 너무도…………….. 나는 절대 너를…………… 너를 용서할 수 없어 …………….”

현암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단전을 후려갈겼다. 공력을 연 마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혈은 단전의 기해혈이었다. 그곳 을 잘못 얻어맞으면 무서운 고통은 물론 모든 공력을 상실한다. 하지만 현암은 기를 쓰고 두 번, 세 번 단전을 내리쳤다.

현암이 이렇게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공력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지금 현암은 천정개혈대법 팔 단계의 휴지기에 들 어가 있었기에 공력이 없었다. 그러나 현암의 추측으로는, 공력 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 단전 깊숙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서 억지로라도 공력을 끌어내기 위해 단전에 충격을 준 것이다. 그것이 성공했는지,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현암의 단전에서 피 어올랐다.

현암은 다시 한번 길게 소리를 지르면서 오른손을 내뻗었다. 순간 준후의 오른편의 땅바닥이 움푹한 자 깊이로 파였다. 그러 나 현암의 주먹은 준후와 몇 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극도의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단전에 가한 충격이 숨어 있는 공력을 일깨웠 는지 아무튼 현암은 공력을 다시 쓸 수 있게 되었고, 전설상에나 나오는 권풍(風)을 뿜어낼 정도가 된 것이다.

하지만 현암의 공력은 천정개혈대법의 팔 단계에서 아직 완성 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지금 이렇게 공력을 쓰는 것은 대단한 무리였다. 그래서 현암은 주먹질을 한 번 하고 난 다음 이내 목 구멍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 다. 현암은 다시 피를 울컥 뱉어 낸 뒤 준후에게 말했다.

“이대로라면 너는 새로운 마스터나 악마 따위가 될 게 분명해. 나는 너를 그냥 둘 수 없다.”

현암이 다시 왼손을 뻗자 준후의 왼편 땅이 깊게 파였다. 현암은 또 한번 피를 뱉어 낸 후 덧붙였다.

“이제 우리 인연은 끝이다.”

“날 죽일 거야?”

준후가 약간 서글픈 듯, 그러나 여전히 조롱 섞인 말투로 현암 에게 물었다. 현암은 마음이 쓰라려 울고만 싶었지만 힘겹게 눈 물을 삼키면서 대답 대신 양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준후의 양쪽 땅이 아까보다도 더 깊게 파였다.

“덤벼라. 더 이상은 봐주지 않겠다.”

현암이 간신히 말하자 준후가 현암에게 물었다.

“날 죽일 수 있을까?”

별안간 준후는 부적 한 뭉치를 잡아 허공에 휙 뿌렸다. 부적들 은 만부원진의 모습으로 구체를 형성해 준후의 주위를 돌며 준 후를 보호했고, 준후의 양손에서는 뇌전과 멸겁화의 기운이 동 시에 맺혀 갔다. 과거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 었다.

현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공력을 끌어 올려 양손에 모아갔다. 그러는 동안 현암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푸르 러지기를 대여섯 번이나 반복했으며, 현암으로부터는 심상치 않 은 진동이 주위로 번져 나갔다. 일순간 현암의 코에서 피가 터 져 나왔지만 현암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이윽고 양 주먹에서 는 ‘탄’ 자 결보다도 더욱 밝아 보이는 구체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이한 진동이 사방을 가득 메워 이제 그 근방 은 누가 소리를 지르더라도 들리지 않는 기이한 공간이 되어 버 렸다. 승희의 말도, 울음소리도 더 이상 현암에게는 들리지 않았 다. 하지만 그 구체는 현암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듯, 현암의 얼굴은 눈에 띌 정도로 파리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승희가 외쳤다. 

“그만해! 현암군! 그러다가 죽어!”

하지만 현암은 담담히 고개를 저어 피하라는 시늉만 해 보일 뿐이었다. 승희는 현암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현암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기운 때문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안 돼! 그만해! 준후야! 현암 군!”

승희가 악을 썼다. 승희는 알 수 있었다. 현암은 슬픔과 고통 때문에 준후를 죽일 뿐만 아니라 자신도 준후 손에 죽으려는 것 이다. 그래서 현암은 월향검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몸으로 부 딪치려고 하는 것이다.

손에 맺힌 구체가 너무도 찬란한 빛을 내뿜어 이제 현암의 모 습은 그에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준후의 손에 맺힌 두 가닥의 기운도 무시무시하기는 그에 못지않았다.

두 사람은 이제 필생의 전력을 기울여서 정면충돌할 판이었는 데, 그 둘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사이에 또 다른 빛덩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쓰러져 있던 박 신부의 몸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박 신부는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려 사태를 파악하고는 오라 막을 펼친 것이다.

그러면서 박 신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박 신부는 잠시 비행기 안에서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거짓말 처럼, 그때의 꿈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박 신부도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

‘이래도 되는건가……………’

박 신부는 고통스러운 나머지, 반백이었던 머리가 순식간에 흰색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보자 현암은 자신도 모 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박 신부의 음성이 현암에게 울려왔다.

현암군, 그만하게. 이래서는 안 되네………….

그러나 현암은 이를 악물었다.

‘신부님, 용서하십시오. 저는……………..’

안 되네, 현암 군……

현암이 갑자기 오른편으로 빙글 몸을 굴렸다. 박 신부의 오라 를 피해 준후를 치려는 것이다. 준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기 보법을 이용해서 순간적으로 위치를 옮겼다. 그러자 박 신부는 다시 있는 힘을 다해 오라를 뻗어 내 두 사람 사이를 막았다.

이제 준후나 현암 둘 중 한 명이라도 힘을 쏟아 내기만 하면 세 사람의 힘이 충돌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끼인 박 신부마저도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소리를 지르던 승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까무러쳤다.

그때 세 사람 사이에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 아라였다.

“그만둬요! 준후 오빠! 오빠가 그런 게 아냐!”

아라는 다급하게 뭔가를 꺼내 세 사람의 사이에 던졌다. 그것 을 보자 준후의 안색이 싹 변하더니 뒤로 주춤 물러섰다. 준후의 수첩이었다. 전에 아하스 페르츠와 대적하다가 떨어뜨린 것인데 준후는 설마 아라가 수첩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아라가 외쳤다.

“저걸 보면 알 수 있어요! 오빠는…………! 오빠는 지금 모든 걸 덮어쓰고 자기가 죽으려는 거야!”

예기치 못한 일이 터지자 당황한 준후가 급히 외쳤다.

“바보 같은 계집애야! 너는 지금…………!”

두 눈을 크게 뜨고 아라는 준후를 보며 악을 썼다.

“안 돼! 안 돼! 그건 안 돼!”

그러고는 박 신부를 향해 외쳤다.

“저걸 보세요! 난 뭔지 모르지만, 저건 예언서를 번역한 거예요! 준후 오빠는 저대로 하려고……………! 저대로 죽으려 하는 거라 고요!”

순간 현암과 박 신부는 둘 다 움찔하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현암의 손에서 빛이 사그라지면서 현암의 표정이 정상적으로 돌 아왔다.

준후 역시 모든 기운을 거두고 수첩을 주우려 했다. 그러나 그 보다 앞서 아라가 준후를 막아서자 준후는 아라를 향해 뇌전의 줄기를 내었다.

그 순간 아라 앞으로 준호가 뛰어들었다. 준호는 아라가 위험 해지자 몸을 내던져 그녀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손을 내밀자마자 준후의 뇌전이 준호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 어갔다가 다른 쪽 손바닥으로 나와 허공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물론 준호는 그 충격으로 데굴데굴 굴렀지만 아라는 무사했다. 준후는 두 아이들을 노려보며 악을 썼다.

“이 바보들! 세상을! 세상을 망하게 할 참이야!”

그때는 이미 박 신부가 수첩을 집어 들어 펴 본 뒤였다. 박 신 부는 기운을 너무 쓴 탓에 몇 번 휘청거렸지만, 준후는 수첩을 박신부의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었다.

준후는 낙담한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아라를 향해 외쳤다.

“너 ・・・・・・ 너는….”

준후는 다시 한번 아라, 네가 세상을 망하게 했다고 외치려다 가 그 말을 삼켜 버렸다. 돌연 지금까지 꾹꾹 억누르고 있었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급기야 준후는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른 채 마구 떠들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현암 형! 신부님, 모두・・・・・・ 모두 미안해요!”

박 신부는 준후의 수첩을 한참 동안 보더니 해쓱한 낯빛으로 현암에게 수첩을 건넸다. 현암 역시 그것을 급히 받아 펼쳐 보았 다. 현암의 낯빛도 조금 파리해졌지만 이내 박 신부에게 말했다. “제가 정말 실수할 뻔했군요. 신부님, 죄송합니다.”

“아닐세. 다만…………… 준후가 지금까지 얼마나………….”

현암은 수첩을 박 신부에게 건네주고 뚜벅뚜벅 걸어가 울고 있 는 준후를 번쩍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 . 넌 나쁜 녀석이다. 알아?”

현암은 준후를 꽉 안고 등을 몇 번 두드려 주었다. 승희는 어 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눈을 크게 뜨고 박 신부에게로 다가 갔다.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수첩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스스로 징벌자가 되어라. 그래야 세상을 보호하리라.

가장 친한 사람의 손에 대신 죽어야 세상이 살리라. 

그러나 그대의 길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으리니,

그의 손에 죽기 위해 모든 죄를 긁어모아야 하리라……….

“『해동감결?”

승희가 눈을 크게 뜨며 박 신부에게 묻자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구나…………. 준후 녀석・・・・・・ 이것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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