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5화 – 묵시록의 재현 5 : 실패한 연극
실패한 연극
아직 백호와 해밀튼, 황달지 교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 었다. 그리고 모조리 무너진 신전 터에 이반 교수와 성난큰곰 바이올렛과 윌리엄스 신부 등도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현암 과 박 신부는 거의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였지만, 그 외의 모든 사 람들은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깨우려 했다. 그러나 해밀튼은 너무나 기운을 쓴 탓에 일어나지 못했고, 성 난큰곰은 부상이 심했으며, 백호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일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로파무드는 마지막 순간에 고반다가 무슨 술수를 썼는지 온몸이 굳어져서 마치 시체 같았다. 맥박은 뛰고 있었으나 의식은 없는 듯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이반 교수와 바이올렛, 황달지 교수가 힘 을 합해 땅에 떨어져 있던 타보트 상자를 끌어냈다. 정말 우연 히, 이반 교수의 총기는 타보트 상자 밑에 깔려 있었던 탓에 온 전했다.
이반 교수는 총기를 살펴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곧 재무장을 했다.
윌리엄스 신부는 정신을 잃은 것 같진 않았지만 피를 너무 소 모하여 자꾸 기절했다가 눈을 뜨기를 반복했다. 뭔가 말하고 싶 은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아무튼 이반 교수가 정신을 수습하고 신전 밖에서 벌어졌던 일을 설명해 주자 그제야 모든 사람들은 프란체스코 주교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자리에 살아남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나스와 카르나였다.
안나스를 보고 준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안나스가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준호는 예전에 아기들의 영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에 분명 아기들의 영이 준호의 동료인 퇴마사들만은 죽이지 않은 줄로 알았다. 해밀튼은 마지막 순간 이들을 도왔으니 같은 편이 라 해 줄 만했다. 그런데 안나스는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준호는 아라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라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저기도 사람이 그냥 있잖아, 저기도.”
아라는 쓰러져 있는 카르나와 얼음 덩어리가 되어 있는 아녜 스 수녀와 루카 수사를 가리켰다. 그것을 보는 순간 준호는 해밀 튼의 보호막 속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남은 것일까 하고 궁 금했다. 그렇다 해도 카르나의 경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라는 준호의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준후의 안 위에만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대답을 해 준 것도 준호가 스스로의 몸을 방패 삼아 자신을 구했던 일 때문이 었다. 준호는 그런 아라의 기분을 눈치채고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한편, 박 신부는 윌리엄스 신부를 보고는 그가 뭔가를 애타게 말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급히 윌리엄스 신부의 마 음속으로 대화를 청했다.
윌리엄스 신부가 간간히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전해 왔다.
‘박 신부님…………. 저들은 알고…………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이오?
‘이단 심판소……………. 그리고 안나스・・・・・・ 그들은 타보트에 숨 겨진 비밀 때문에………… 이곳에…………… 온 겁니다……. 언뜻 들었 지만 분명합니다………….. 그러니 어서 ・・・・・・ 그것을……?’
그 말을 전하고 윌리엄스 신부는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이라기보다는 기절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박신부는 윌리엄스 신부를 편히 눕힌 후 중얼거렸다.
“타보트에 다른 비밀이 있다고?”
박신부는 곧 현암, 승희, 이반 교수 등과 함께 간단히 이 일에 대해 상의한 뒤 안나스에게 자초지종을 묻기로 했다. 승희는 바 이올렛, 아이들과 함께 부상자들을 돌보려고 저만치로 갔다.
이반 교수가 안나스를 깨웠다. 능력이 없던 탓에 큰 부상을 입 지 않았던 안나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이건……?”
안나스는 눈을 뜨자마자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반 교수가 총을 철컥 소리가 나게 장전하며 안나스에게 물었다.
“이제 당신이 이야기할 시간이오.”
안나스는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주위에는 오로지 퇴마사 일행들만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반 교수가 또다시 다그치자 그는 씹어뱉듯 말했다.
“적그리스도의 졸개들과는 할 말이 없다!”
그 말만 하고 안나스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안나스도 대단 한 자라 마음을 굳게 닫고 있어 이대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반 교수가 몇 번 더 다그쳤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않았다. 그렇다고 그에게 고문을 가할 수도 없었다.
현암은 눈짓으로 준후를 부르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자는 너를 두려워하는 것 같으니, 네가 말을 좀 하렴.”
“예?”
“너는 그냥 아무 말이나 하면 돼. 아주 엄숙하게 말야. 그리고 나머지는 나에게 맡겨”
준후는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곧 안나스 앞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어서 사실대로 말해요.”
준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암이 영어로 안나스에게 소리쳤다.
“말세에 임하실 분이 명하신다. 사실대로 말하라.”
준후는 영어에 서툴렀지만 현암의 말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당장은 뭐라고 할 수 없어 준후는 다시 안나 스에게 물었다.
“타보트에 대해 당신이 뭔가 아는 게 있다고 하던데요? 어서 말해 봐요.”
또다시 현암은 안나스를 쳐다보며 잔뜩 위협하듯 영어로 말 했다.
“지금 당장 타보트의 비밀에 대해 털어놓지 않는다면 유대인 들에게 아까처럼 그 안개를 보내시겠단다. 너의 ‘선택받은’ 종족 이 이 지상에서 남김없이 사라져 버려도 좋은가?”
그 말에 안나스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안나스는 비록 검 은 편지 결사를 주재하고 있고 세상을 뒤집으려는 야심을 가진 자였지만, 항상 스스로 랍비라고 칭했으며 자신의 동족인 유대 인들을 지극히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협박을 가하자 그 의 안색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준후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복잡한 영어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 이었다. 한편, 저만치에서 박 신부는 현암의 얼토당토않은 소리 를 들으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그런 ・・・・・・ “
마침내 안나스가 입을 열자 현암이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고 얼른 받았다.
“이봐, 네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아니 여기 말세에 임 하실 분이 모르실 것 같은가? 다만 조금 수고를 덜려는 것뿐인 데, 이 정도도 협조를 안 한다면 너희는 정말 쓸모없는 족속이 아니겠나? 이분의 힘은 아까의 몇십 배로 커지고 계시다. 뭐 그 렇다면, 지금 당장 유대인들 정도는 전멸시켜 버려야겠군.”
“헛소…….”
안나스는 노해서 외치려 했지만 다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확 실히 아까 본 그 무시무시한 안개는 가공할 만한 것이라, 순식 간에 수만 수십만 명도 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나스 역시 프 란체스코 주교처럼 준후가 적그리스도임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 었다. 순식간에 몇십 배로 힘이 커진다는 것은 믿기 어려웠지만, 안나스는 현암의 협박에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안 나스는 현암의 무지무지한 협박에도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현암은 몇 번 더 안나스를 다그치다가 느닷없이 준후에게 영 어로 말했다.
“할 수 없군요. 이런 녀석 때문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가시지요.”
그러고는 대뜸 안나스의 뒤통수를 퍽 내리쳤다. 힘없는 노인인 안나스는 곧바로 기절해 버렸다. 현암이 의외로 간단히 포기하자. 모두가 의아해했다.
“어찌하려고 그러시오?”
이반 교수가 묻자 현암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자가 쉽게 이야기할 리 없지요. 이건 일 단계에 불과합니 다. 제게 다 생각이 있어요.”
안나스가 정신을 차렸을 즈음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안나 스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야바와 율리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죽어 버린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잠시 슬피 눈물을 흘리 며 기도문을 읊었다.
다음 순간, 안나스의 눈에 타보트 상자가 들어왔다.
‘왜 저것을 놓아두고간거지?’
안나스는 의아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정말 아 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안나스는 신중하게 생각했다.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야!’
안나스는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타보트 상자에 대한 미련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오래전부터 저 물건을 얻으려고 얼 마나 갈망해 왔던가. 바로 그 물건이 눈앞에 떨어져 있는데 호기 심이 일지 않을 리 없었다. 안나스는 유혹을 이기려고 마음을 다 잡았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는데, 과거의 예언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나 안나스도 아직까지는 그 안의 예언 내용을 알지는 못 했다. 그렇다면 그 예언에 적그리스도를 막을 무엇인가가 있는 지도 모른다. 아까의 말을 생각하면, 적그리스도는 이제 유대인 들부터 전멸시킬지도 몰랐다. 시간이 없었다. 안나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렇다 내가 여기서 이것을 보지 않는다면 세상은 끝이다. 만 에 하나 함정이라고 해도 내가 입을 다물면 그만이다. 죽어도 입 을 열지 않으면 된다.’
드디어 안나스는 결심하고 조심스레 타보트 상자 쪽으로 갔 다. 안나스는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유대교 비전의 기도문을 읊 으며 타보트 상자에 복잡한 도형을 그렸다. 그것은 타보트의 힘 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도형이었으며, 이 도형을 그려야만 타 보트를 보아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안나스는 주술적인 능력은 없었지만, 이론으로는 거의 세계 제일이라 내세울 정도라서 타 보트의 힘을 분산시키는 도형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안나스는 신중하게 도형을 그린 뒤 다시 땅에 도형을 그렸다. 그리고 그 도형 한가운데에 앉아 아주 조심스럽게 타보트 상자 의 뚜껑을 열었다.
그 시각, 저만치 떨어진 숲 속에서 퇴마사 일행은 숨을 죽이 고승희의 얼굴을 초조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해밀튼과 카르나, 백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들도 모두 숲속으로 옮겨 온 터였다.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승희가 마침내 외쳤다.
“알았어요!”
“그래? 뭐지?”
현암이 들뜬 소리로 묻자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말했다.
“놀랍군요! 그건 모세의 예언이에요!”
“모세?”
박신부는 긴장하며 현암의 어깨를 꽉 잡았다.
이번 일은 모두 현암의 기지에 의한 것이었다. 안나스는 고문 을 하거나 죽인다 해도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누설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타보트를 보는 자는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으 니, 아무나 열 수도 없었다.
하지만 현암은 안나스가 타보트를 얻으러 왔다면, 그것으로부 터 몸을 지키는 방법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안나스에 게 잔뜩 겁을 준 다음 타보트 상자를 놓아두고 사라지면 안나스 가 반드시 그것을 열어 볼 것이라 확신했다.
현암이 알기로 안나스는 비록 지식은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주술 능력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승희의 투시를 막 을 능력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단 한 가지 현암이 조바심을 낸 것은 혹시라도 승희에게 투시력이 있다는 사실을 안나스가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안나스는 절대 타 보트를 열어 보지 않을 터였다.
그 때문에 현암은 일부러 안나스에게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말 로써 윽박질러 그가 마음을 읽는 투시에 대해 신경 쓰지 못하도 록 연막을 친 것이다. 그리고 그 작전은 보기 좋게 들어맞아, 안 나스는 타보트 상자를 열어 비밀의 예언을 읽었고 그것을 승희 에게 다시 읽히고 만 것이다.
“아아………… 이런…………. 이번에 닥치는 위기는…………… 인간들이 자초하는 것이래요. 바로…………… 바로 라미드 우프닉스의 주술 때 문에 ……!”
“뭐라고?”
“잠깐만요! 조용! 아……………. 모세는…………… 모세는 그 주술이 신 을 속이는 것이며 그 때문에 언젠가 파국을 맞을 것을 알았다 요…………. 그 반작용으로…………… 반작용으로…………….”
승희는 줄곧 말을 더듬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도 그녀에 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고는 한참 뒤에 승희가 입을 열었다.
“말세를 이끌 자가 태어난대요…………. 아! 우리가 전에 본 메소 포타미아의 점토판도 모세의 예언에 기초한 것 같아요! 모세는 그 아이가 태어날 날, 그 장소를 점쳤대요!”
“그게 언제지?”
현암이 참지 못하고 묻자 승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날짜를 구분하기 힘들어요. 유대교식으로 날짜가 씌어 있는 것 같아서……………. 아! 안나스가 그걸 환산해 보고 있어요! 세상 에! 나흘 후예요!”
“장소는?”
박신부가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승희에게 물었다. 승희 는 정신을 집중하느라 오만상을 쓰고 땀까지 주르륵 흘리며 더 듬거리며 말했다.
“모르는 장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땅…………… 동쪽 끝사 람들의 후예가 사는 땅…………… 이게 뭐야? 높은 산과 깊은 숲과 호 수……. 바퀴도 없고, 청동도 강철도 없는 곳・・・・・・?”
“그리고?”
현암이 묻자 승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다야.”
“뭐?”
현암과 박 신부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방금 전에 더듬거리며 한 말이 무슨 암호나 수수께끼 같아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더 없어? 안나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
그 순간, 승희가 갑자기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아악!”
“왜 그래?”
현암이 놀라서 승희에게 묻자 승희가 크게 눈을 뜨며 말했다.
“방금 안나스가…………! 쓰러졌어!”
“대체 누가 그랬지?”
“몰라!”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박 신부는 이반 교수와 바이올렛 에게 아이들과 부상자들을 지켜 달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리 고현암과 박 신부는 승희와 준후의 부축을 받으며 무너져 버린 신전 쪽으로 달려갔다. 승희의 투시력은 사백 미터 정도 안에서 만 가능했기 때문에 안나스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 었으나 그 길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신전 터에 도달하자 그들은 안나스를 쓰러뜨린 자가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아녜스 수녀?”
박신부가 외치자 현암이 이어서 외쳤다.
“무색 스님?”
그곳에는 쓰러져 피를 쏟고 있는 아녜스 수녀와 팔이 절단된 채 땅에 앉아 있는 루카 수사, 그리고 놀랍게도 무색 화상이 서 있었다. 아녜스 수녀와 루카 수사는 아까까지만 해도 얼음 덩어 리였기 때문에 퇴마사 일행은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실 아녜스 수녀는 처음에 냉기를 걸면서 그다음으로는 열기 의 원소력을 사용했는데, 그녀는 시간을 두고 원소력이 발동되 는 시한폭탄 같은 방법으로 열기의 주문을 걸었다. 그래서 비록 온몸이 얼어붙고 의식도 없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열기의 원소력이 발동되어 얼음을 녹이고 그녀와 루카 수사를 소생시킨 것이다.
그들은 퇴마사 일행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특히 준 후는 아녜스 수녀의 눈빛을 받자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짓이오?”
박신부가 다그치자 아녜스 수녀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박 신부, 아니, 미스터 박, 나는 당신을 그대로 믿으려 했는 데…………. 당신들은 도저히 구제될 길이 없어.”
문득 준후의 눈에 아녜스 수녀의 손이 이상한 낡은 천 같은 것 으로 감겨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러다가 열린 타보트 상자 안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외쳤다.
“어, 타보트가?”
아녜스 수녀는 ‘타보트’라는 말을 알아듣고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흥! 타보트는 교황청에서 접수하게 될 거야. 너희 손에 넘겨줄 순 없지.”
“하지만 타보트를 어떻게………………”
박신부가 중얼거리자 아녜스 수녀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내가 들고 있는 것이 보통 물건인 줄 알아? 이건 성의(聖衣)야.”
박신부는 깜짝 놀랐다. 성의는 그리스도가 입었던 옷으로 베 드로에 의해 로마로 옮겨진 이후론 행방이 묘연했다. 성의 정도 라면 타보트에게서 사람의 목숨을 보호해 줄 만했다. 그런데 그 것을 아녜스 수녀가 미리 준비를 해 가지고 왔다니… 그때 무색 화상이 앞으로 나섰다.
“당신들의 죄는 정말 깊고도 깊군그래. 이 수많은 사람들을 해쳤을 뿐만 아니라 말세를 이끌어 내려 하다니…………….”
“우리는…………!”
현암이 말하려는데 아녜스 수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우리를 죽이지 않은 게 너희의 실수다. 하지만 이제는 호락호락 당하지 않아!”
“모든 건 오해요! 이건…………….”
현암이 설명하려 하는데 무색 화상이 준엄하게 외쳤다.
“변명은 소용없다! 나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땅속에서 모두 들었다! 젊은이, 그렇게 보지 않았건만…….”
현암은 흙투성이가 된 무색의 옷을 보고 그가 살아난 이유를 알았다. 그는 땅속에 숨은 것이다. 그가 아녜스 수녀와 싸우다가 날아가 벽에 부딪혀 쓰러졌을 때, 그 옆에는 흙무더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아기들의 영혼이 덮쳐 오자 흙무더기 속으로 몸을 피해 살아난 것이었다.
그는 아까 현암이 안나스를 속이기 위해 윽박지르던 말을 모 두 들은 것 같았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오해는 풀기 어려웠다. 스스로 악의 하수인임을 소리 높여 외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나스는 왜 해쳤소?”
박신부가 아연한 목소리로 묻자 아녜스 수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이자가 비밀을 털어놓으려 했기 때문이지.”
잠자코 있던 루카 수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너희만 꾀를 부리고 우리는 장님인 줄 아는가? 너희가 숲 속 에 숨어 있는 것을 나는 알았다. 저 어리석은 안나스는 너희 일 당 중에 투시력을 지닌 자가 있다는 것을 잊었지만, 나는 잊지 않았어!”
루카 수사는 오감이 영민하고 두뇌 회전이 빨랐으며 어떤 순 간에도 냉정을 잃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안나 스가 타보트를 정신없이 읽어 내리는 광경을 보고는 곧 주변을 살펴 현암이 계획한 일을 눈치챈 것이다.
“어차피 이자는 악한 자였어. 주의 길에 반하는 자이니 지옥 불에 영원토록 탈 것이다. 아멘……”
아녜스 수녀는 중얼거리면서 성의로 싼 타보트를 품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고는 무색 화상에게 말했다.
“용화교의 스님, 어서 가 보세요. 이제 당신들과 적대할 이유는 없으니……”
그 말에 무색은 아녜스 수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박 신부와 현암, 준후 등은 아녜스 수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는 통에 무색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준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외쳤다.
“도대체 뭘 할 작정이야?”
“너희는…..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거야…………..!”
아녜스 수녀가 소리치자 현암이 나서며 말했다.
“당신들은…… 알고 있었단 말인가? 타보트에 숨겨진 내용 을?”
“그래. 주님께 맹세하건대, 너희들의 사악한 계획은 절대 성공 못할 거다! 저 녀석이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 만, 적어도 그에 버금가는 녀석이겠지? 너희는 그 하수인에다 위 선자들이고. 아무튼 너희가 바라는 일이 그대로 되지는 않을 거 야. 절대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테니까!”
듣다못한 박신부가 호통을 치듯 말했다.
“아녜스 수녀! 당신은 우리가 정말 악마의 하수인이라 믿는가?”
순간 아녜스 수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녜스 수녀는 지난번 박 신부가 목숨을 구해 주자 다시는 그와 적대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녜스 수녀는 표정을 바꾸어 냉랭하게 되물었다.
“프란체스코 주교님이 목숨을 버리며 하신 말씀을… 어떻 게 믿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박 신부는 그때서야 이 수녀가 주교에 대한 존경심만이 아니 라 남모르는 복잡한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 녀와 주교 사이라 사랑의 감정까지는 가지 않았다 해도, 남모르 는 동경의 대상은 넘어서는 것 같았다.
아녜스 수녀가 박 신부 일행을 악마의 일당이 아니라 믿는다 해도, 주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들에게 끝 까지 맞설 것 같다는 느낌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박 신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현암은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고 순리대로 일을 풀도록 하기 위 해 그러는 거야! 그리고 당신 말대로라면 적그리스도가 여럿이 되는 셈인데…………..”
그 말에 아녜스 수녀가 매섭게 웃으며 외쳤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서 모든 것 을 짐작했지. 과거부터 예언자들은 적그리스도가 여럿이라 했지. 그는 많은 분신을 거느리고 있으며 여러 곳에서 출몰할 것이 라고. 지금 하나가 있고 또 하나가 나중에 태어날 테니까. 그리 고 그 시간과 장소까지는 알 수 없었지. 허나 타보트가 내 손에 있고, 모세의 예언도 있어. 두고 봐. 적그리스도는 절대 태어나 지 못해!”
분노에 부르르 떨며 현암이 소리쳤다.
“그러면 태어나지도 않은 갓난아기를 죽인단 말인가? 그게 성직자가 할 행동인가?”
아녜스 수녀 역시 지지 않고 악을 썼다.
“세상을 암흑에 빠뜨릴 악마 같은 것은 절대 태어나게 할 수 없어!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절대 갈 수 없어! 타보트를 내놔!”
현암이 소리를 질렀지만, 현암과 박 신부는 도저히 아녜스 수 녀를 상대할 만한 상태가 되지 못했다. 그러자 준후가 대신 외쳤다.
“거기! 꽁무니 빼지 말고, 덤비려면 지금 덤벼!”
그러자 아녜스 수녀는 준후와 박 신부 둘을 상대한다면 자신 이 도무지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즉각 정령력 을 휘몰아서 자신의 몸을 허공에 띄웠다. 사실 아녜스 수녀는 준 후나 박 신부, 현암이 많이 다치고 지친 것을 눈치챘지만, 자신 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타보트를 무사히 가지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 임무가 있었기에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데에만 전력을 다했다.
준후가 재빨리 힐기보법을 사용하여 어떻게든 뒤쫓아가려고 했지만 순간 루카 수사가 소리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어서 가시오! 아녜스 수녀!”
그러면서 루카 수사는 뭔가를 내던지고는 미친 듯이 준후 쪽 으로 달려들었다. 순간 루카 수사가 던진 물건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하며 연기를 내뿜었다.
박 신부가 재빨리 준후를 감싸고 현암은 승희를 감쌌으나 다 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것은 연막탄이었다. 그리고 중상 을 입고 있던 루카 수사는 현암과 박 신부가 있는 곳까지 오지도 못한 채 기운이 다해 쓰러졌다.
현암이 놀라서 루카 수사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루카 수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오지 마라! 악의 사도!”
“이것 보시오! 나는…………….”
그러나 루카 수사는 현암의 말을 듣지도 않고 소리 높여 외쳤다.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그러더니 그는 현암이 어찌할 틈도 주지 않고 품에서 작은 단 도를 꺼내 심장을 찔러 자살해 버렸다. 현암과 박 신부 등은 놀라 혀를 찼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연기가 바람에 실려 사라졌을 무렵, 아녜스 수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안나스의 시체와 텅 빈 타보트 상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준후가 어떻게든 쫓아가 보려고 힐기보법을 쓰려는데 박 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틀렸다. 그만두려무나………….”
“하지만…….”
“가브리엘 수사가 빠져나갔으니, 어차피 마찬가지다. 아하스 페르츠가 정신을 차렸고 모세의 예언도 알았으니 타보트도 우리 에겐 쓸모가 없어. 다만 남은 것은 뒷일뿐인데………….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