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6화 – 묵시록의 재현 6 : 백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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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5권 6화 – 묵시록의 재현 6 : 백호의 죽음


백호의 죽음

한참 동안 아무 말을 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현암은 허탈한 표 정으로 혼자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박 신부에게 말했다.

“이제 어쩌죠? 정말 오해를 풀 길이 없겠군요. 더구나 타보트까지 …….”

침울한 표정을 짓는 현암을 보며 승희가 톡 쏘아붙였다.

“타보트 같은 것에 신경 쓸 때야?”

승희의 말에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안나스만이 아니라 아녜스 수녀, 아니 이단 심판소도 타보트 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니 성의까지 준비해 왔지. 그래서 그들은 칼키파를 습격한 거야. 하여간 그들은 이제 징벌 자가 태어날 장소를 알아내려 할 거야.”

“하지만 그 말 몇 마디 가지고 어떻게?”

“그들은 교황청 산하에 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어.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낼 거야.’

“그것 가지고는 제대로 해석하지 못할 거라고!” 

승희의 말에 박 신부도 한 마디 거들었다.

“해석을 잘못하는 것도 문제가 되네. 저들은 이제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을 테니 ・・・・・・ 자칫 억울한 사람들이 다칠지도 몰라. 헤롯왕이 한 살배기 아기들을 몰살시켜 구세주의 출생을 막으려 한 것 같은 짓을 똑같이 하면 어떻게 하는가?”

“설마 ・・・・・・ 교황청에서요?”

승희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박 신부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교황청에서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지만, 문제는 다른 곳들일 세. 무색 화상도 아녜스 수녀와 합세한 것을 보면, 그들도 이번 일을 위해서, 즉 우리와 대적하기 위해서 힘을 합칠 거야. 더군다나……”

박신부가 암울한 생각에 말을 잇지 못하자 현암이 말했다. 

“이단 심판소와 용화교만이 아닙니다. 칼키파, 어새신, 검은 편지 결사, 성당 기사단. 검은 지하드………… 모두 우리에게 정예 가 몰살당했다고 여길 겁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서로를 적대시 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이번 일만큼은 그러지 않을 공산이 큽니 다. 더구나 그들이 징벌자가 태어날 장소를 알아내면…….” 

“가지 않으면 그만이잖아요!”

승희가 외치자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야 없지.”

“신부님! 생각해 보세요! 우린 지금 악마의 앞잡이라는 오해 를 뒤집어썼다고요! 더군다나 우리는 징벌자를 지켜서 무사히 낳게 하는 게 목적이잖아요. 그들이 그런 우리를 보면 뭐라고 하 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오해를 풀 방법이 없어요! 이번엔 정보 기관에게 쫓기는 것 이상이에요! 그곳에 간다면 정말로 죽으러 가는 것하고 다를 게 없다고요!”

“하지만 우리가 가지 않으면 징벌자는 그들에게 죽음을 당할 거야. 그리고 세상은……………”

“제기랄! 우리가 왜 항상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거죠? 좋아요! 그럼 다 쓸어버리죠!”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박 신부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해칠 수는 없잖니. 더구나 그들 중에는 악한 집단들도 있겠지만, 많은 수는 나름대로 세상을 구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데…………….”

“그럼 뭐예요? 우리 말고 세상을 구할 놈들이 그렇게 없다는 거예요? 왜? 대체 왜 우리만……!”

승희는 소리를 지르다가 이윽고 엉엉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내 중얼거렸다.

“이제 고작 나흘이라고요! 나흘밖에는 안 남았어요! 그동안 모두들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두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노리고 있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단 말이에요? 더군다나 상대를 봐주면서? 우리가 그럴 능력이 있다 고 보세요?”

준후 역시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일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그러니 모두들 그리로 가세요. 나는 가지 않겠어요.”

“무슨 소리냐? 너……………”

아까 한 말을 반복하는 게 아닐까 현암은 걱정했지만 다행히 준후는 다른 말을 했다.

“모두들 나를 노리고 있으니 나를 뒤쫓게 해 보겠어요. 어떻게든 되겠죠.”

그 말에 현암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무모한 짓일 뿐이야. 더구나 타보트 뒷면의 비밀까지 알아낸 바에 굳이 너를 뒤쫓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쪽은 사람 수가 많으니 패를 둘로 나누면 그만일 뿐이야. 앞을 가로막은 자 들이 수없이 많을 텐데 우리는 갈라져선 안 돼.”

준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준후는 괴로움 때문에 혼자 해동감 을 놓고 끙끙거렸는데, 이제 자신이 한 모든 일은 사태를 악 화시켰을 뿐이었다.

아녜스 수녀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해동감결」에서는 퇴마사 들 중 누군가 한 사람이 그 여자(자세히 나오지 않았으나 준후는 그 여자가 아녜스 수녀가 틀림없다고 믿었다)에게 죽는다고 되 어 있었다. 사실 준후가 지난번에 아녜스 수녀를 보자마자 그녀 를 죽이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도대체………… 나는…………. 모든 것을 내가 망쳤어. 나 혼자 앓다 가 결국 모두를 위험에 몰아넣었어! 내가 모두를 망쳤어!’

준후는 정말로 자살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모두가 위기에 빠진 상황이 되고 보니 그것도 무책임한 것 같아 서 준후는 애가 탈 뿐이었다.

한편, 현암이 승희를 다독거려서 부축해 일으키는데 박 신부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리 와보게, 현암군!”

박신부는 안나스에게 몸을 깊이 숙이고 있었다. 현암이 박신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뭡니까?”

“이 사람…… 아직 살아 있네.”

안나스는 살아 있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안나스가 아녜스 수녀의 일격을 맞고도 살아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안나스는 비록 주술력은 없지만 주술을 풀고 무효화 시키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이론가였으므로 그가 입은 옷 안 섶에는 많은 부적 문양이 있었다. 또한 아녜스 수녀도 몹시 지쳐 있었고 냉동이 풀리자마자 일격을 가했기 때문에 많은 힘이 들 어가지 않아 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죽지만 않았을 뿐, 안 나스의 상태는 위중하기 짝이 없었다.

박 신부와 현암은 그를 살려 보려고 애썼다. 박 신부는 기도력 을 넣었고 현암은 공력을 발휘하여 그의 몸을 임시로라도 치료 해 보려 했다. 실패의 우려가 많은 임시방편이었지만 그렇게라 도 하지 않으면 즉사할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둘이서 한참을 애쓰자 안나스는 조금 정신이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목숨을 살리려 했을 뿐, 그에게서 어떤 비밀 을 더 캐내려는 마음은 없었다.

안나스는 겨우 정신을 차리는 듯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보 는 즉시 금세라도 끊어질 듯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러자 박 신부가 평온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소.’

“뭐? 악마의 …………… 추종자들이 …………..”

안나스는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안나스를 쳐다보며 현암이 힘주어 말했다.

“당신을 속인 것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마 의 추종자가 아닙니다. 절대로.”

박 신부는 묵묵히 안나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약도 없었고 의료 기구도 하나 없었 다. 붕대마저도 없어 박 신부는 자신의 옷자락을 길게 찢어 낸 다음 현암의 도움을 받아 안나스의 몸을 감았다.

안나스는 고통에 겨운 듯 밭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더 이상 은 말도 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분노에 찬 눈빛 으로 박 신부를 바라보았다.

박신부는 안나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 고 오로지 치료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안나스는 갈비뼈가 모조 리 부러지다시피 한 엄청난 중상을 입었는데, 그 부러진 뼈끝이 폐나 심장 등을 자칫 건드리게 된다면 그 즉시 죽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부러진 뼈들을 바로잡는 데에 온 신경을 집 중한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세크메트의 눈을 내려놓고는 승희의 염력까지 동원하여 뼈를 맞추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현 암은 준후와의 싸움 때 약간 공력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직 누 워 있어야 하는 중상임에도 땀을 흘리며 옆에서 거들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승희는 박 신부가 땅에 내려놓은 세크메트의 눈을 품에 잘 갈무리해 두었다.

안나스는 힘겹게 눈을 뜨고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바 라보면서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자 박 신부는 안나스의 부러진 뼈를 대강 맞 추는 데 성공했다. 몹시 위험한 응급 치료였지만 그나마 위급 상 황은 넘긴 것 같았다. 박 신부가 보기에는, 이제 누군가가 안나 스를 병원으로 옮겨 치료하기만 하면 목숨은 구할 수 있을 듯싶 었다.

박신부는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됐소. 장담은 못하지만 고비는 넘겼소. 이제 병원으로 옮기기 만 하면 될 겁니다.”

안나스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을 텐데도 정신을 잃지 않고 지독스러울 정도로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 신부의 말을 듣고 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 봐야………… 소용없소…………… 나는…………… 나는 절대로……………” 

승희가 그 꼴을 보다 못해 한마디 쏘아붙였다.

“당신, 우리가 당신을 이용하려고 고쳐 준 줄 알아요? 원참.”

승희를 막아서며 묵묵히 일어선 현암이 박 신부를 재촉했다. 

“이제 가시지요, 신부님.”

승희는 화가 난 듯 먼저 저만치로 달려갔다. 그러자 박 신부가 현암에게 말했다.

“이 사람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상태에서 안나스까지 우리가 운반해 갈 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 부하들하고 마주치면 또 난리가 날 거고……………. 고비는 넘겼으니 그 이후는 알아서 하겠죠.”

그 말에 박신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안나스에게 말했다.

“속히 외과 치료를 제대로 받도록 하시오. 우리도 당신을 옮겨 줄 수는 없는 입장이니 …………….”

박 신부는 준후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안나스는 둥그 레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박 신부 일행은 이제 그를 염 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 박 신부와 현암 등의 모습을 보자 기운 이 빠지는지 안나스는 다시 축 늘어졌다.

문득 박 신부는 쓰러져 있는 또 다른 사람인 카르나에게 가 보 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사람은 상처가 없는데?”

그때였다. 부상자와 아이들을 남겨 두고 온 숲 쪽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왔다. 현암과 박 신부 등은 모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숲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반 교수의 총소리 같았다. 지금 이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데, 왜 이반 교수가 총을 쏜 것일까?

그 순간 음산한 목소리가 박 신부의 귀에 들려왔다.

“너희는 아직도・・・・・ 죽지 않았는가?”

분명 카르나의 목소리였다. 박 신부와 준후, 현암은 급히 카르 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 틈에 일어났는지 카르나가 꼿꼿 이 서서 그들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당신, 어째서?”

현암이 의아해하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 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카르나에 대해 의 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카르나는 분명 해밀튼의 보호 막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고반다까지도 목숨을 빼앗긴 무시무 시한 안개 속에서 카르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돌연 박신부가 외쳤다.

“물러서! 저건 카르나가 아냐!”

박신부가 안간힘을 다해 재빨리 오라를 끌어 올려 앞을 가렸다. 그러자 카르나가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눈치 하나는 빠르군.’

승희가 놀라 박 신부에게 물었다.

“그럼 누구죠?”

이내 박 신부가 긴장된 얼굴로 대꾸했다.

“저건………… 아무래도……………”

별안간 카르나가 어둡고 음산하면서도 장난기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런 오랜만이라 모두 나를 잊었나 보군. 기억 안나?” 

그 목소리는 확실히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기억을 떠올 려 보다가 현암은 돌연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 르게 중얼거렸다.

“아스타로트!”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스터를 조종하고 블랙 서클을 만들어 퇴마사들과 대적했던 악마 아스타로트였다. 이제 보니 카르나는 어느 틈엔가 아스타로트와 관계를 맺은 듯했다.

현암과 박 신부 등은 모두 긴장하며 그쪽을 노려보았다. 그런 데 갑자기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실망스럽네?”

그 또한 아스타로트에 못지않은 어두운 음성이었으나 요염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블랙 엔젤이었다. 승희와 준후가 그쪽을 노 려보았다. 어느새 백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여섯 장의 검은 날개를 퍼득거리는 블랙 엔젤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현암은 블랙 엔젤을 향해 외쳤다.

“또 왜 나타난 거냐?”

블랙 엔젤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되받았다.

“너희에게 빚을 받으러. 너희는…………… 최후까지 잘했어. 하지 만 너희는…………… 나를 실망시켰어.”

“네 엉터리 계획이 성공할 리 없지. 오히려 내 일까지 망쳤어.” 

아스타로트의 목소리였다. 블랙 엔젤이 날카롭게 되쏘았다.

“네 계획은 네 무능함 때문에 실패한 거야. 오히려 내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알아야 해.”

그러면서 블랙 엔젤은 가늘지만 날카로운 손톱이 돋은 손가락 을 들어 준후를 가리켰다.

“이건 왜 살아 있지? 너희는 예언도, 세상의 종말도 안중에 없 어? 정의의 용사들이?”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상이 구해지리 라고는 보지 않아!”

현암이 외쳤다. 현암과 박 신부, 준후 등 모두는 무섭게 긴장 하고 있었다. 보통 때라도 이 악마들을 인간의 힘으로 상대한다 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헌데 지금 퇴마사 일행은 힘 을 몹시 소모하고 부상을 입은 탓에 싸워 이긴다는 것이 그야말 로 불가능했다. 준후와 승희가 그나마 힘을 보존하고 있지만 역 부족일 것은 불을 보든 뻔한 일이었다.

블랙 엔젤이 커다랗게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저렇게까지 바보들이라고는 정말…”

“아, 이젠 싫증나지 않아? 이젠 괴롭히는 것도 지겨워지니 다른 장난감을 사용하는 게 낫지 않아? 왜 살려 두는 거지? 착한 척하는 놈들은 아직도 많은데.”

아스타로트가 블랙 엔젤을 힐책하자 블랙 엔젤이 발끈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넌 가만히 있어!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실패하면?”

“실패하지 않아!”

“하! 좋아, 좋아. 실패하면 네가 책임지면 되지, 뭐.”

아스타로트가 불만스러운 듯 사라져가자 카르나가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블랙 엔젤이 현암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이봐, 그렇게 잘하라고 뒤에서 도와주었는데 왜 일을 그르치는 거지?”

“네 도움 따위는 받은 적 없다.”

현암이 외치자 블랙 엔젤이 간드러지게 웃었다.

“비행기 안에서 이동시켜 주고, 맞아 죽지 않도록 항상 지켜주 고, 공력을 못 끌어 올릴 적에는 힘까지 불어 넣어 주었는데 모 른 척하기야? 그리고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민다?”

현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아까 준후와 싸울 적에 공력이 회복된 것은 자신의 기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블랙 엔젤의 힘이었던 것 같았다.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 멋대로 한 거지, 내가 너에게 사정한 적은 없다.”

“아이 참, 아직도 뻣뻣하네?”

느닷없이 블랙 엔젤이 왼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 에서 청홍검이 뻗어 나와 잡혔다. 그 청홍검은 블랙 엔젤이 비행 기 안에서 사람들을 옮겨 주는 대가로 가져간 것이니 그녀가 지 니고 있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내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블 랙 엔젤이 오른손을 다시 떨쳐 보이자, 거기에는 놀랍게도 세크 메트의 눈이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

현암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뜨자 블랙 엔젤이 웃으며 말했다. “이것 덕분에 너희 사정을 좀 알게 되었지. 그래서 두고 본 건 데. 너희가 정말 이 녀석을 그냥 둘 줄은 몰랐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길인데도 말야.”

그러면서 블랙 엔젤은 청홍검을 현암에게 내밀었다.

“내가 전에 말했지? 나는 이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 않는다고. 그러니 지금이라도 어서 해.”

“뭘 말인가?”

현암이 외치자 블랙 엔젤은 웃었다.

“저 꼬맹이를 없애.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니까?”

“절대! 절대 그럴 순 없다!”

현암이 완강하게 고개를 젓자 블랙 엔젤의 안색이 굳어졌다. 

“난 도움을 청하는 게 아냐. 너희를 도우려는 거지. 너희 일에 가급적 개입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지, 내가 저 꼬맹이를 어떻 게 못하는 게 아니야.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러면서 블랙 엔젤이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준후는 갑자기 온몸에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준후는 곧 수인을 맺고 진언을 외 워 그 힘에 저항했다.

그 모습을 보며 블랙 엔젤이 웃었다.

“제법이군. 그러나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번에는 블랙 엔젤이 오른손을 꽉 쥐자 준후는 항거하기 힘 든 무서운 힘이 자신을 쥐어짜는 것을 느꼈다. 준후는 땀을 줄줄 흘리면서 버티려고 애썼으나 이윽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풀썩 한쪽 무릎을 땅에 꿇었다. 박 신부가 그 광경을 보고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블랙 엔젤은 협박하듯 손가락을 빙빙 돌려 보 였다.

“이봐, 가짜 신부. 잘난 척하지 마.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저 녀석을 다져 버릴 테니까.”

“죽이려면 어서 죽여!”

준후가 악에 받쳐 외쳤지만 블랙 엔젤은 여전히 생글거렸다.

“누구 좋으라고?”

“대체 뭐 하는 거냐? 우리를 조롱할 생각이냐?”

현암이 외치자 블랙 엔젤이 깔깔거리며 현암에게 말했다.

“다 네 녀석 때문인 줄 알아.”

“뭐?”

“나는 이제껏 너처럼 뻣뻣한 녀석은 보지 못했거든. 네 녀석이

내 앞에 무릎 꿇고 내 말에 복종하는 꼴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 겠어.”

그러나 현암은 이를 갈면서 그대로 서 있었다. 블랙 엔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한 명 가지고는 부족해?”

블랙 엔젤이 손을 치켜 올리자 저만치 떨어져 있던 승희의 몸 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승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허공에서 허우 적거렸지만 조금도 저항할 수 없었다.

그때 현암은 재빨리 몸을 꺾으며 두 주먹을 내밀었다. 아까 준 후와 싸우려 했을 때 사용한 권풍이었다. 현암은 블랙 엔젤이 나 타나자 잠시 시간을 끌면서 암암리에 운기하여 그 힘을 주먹에 몰아 두었다가 블랙 엔젤이 준후와 승희에게 신경을 쓰는 틈을 타서 그것을 내쏜 것이다.

무서운 바람과 함께 ‘탄’ 자 결보다도 더 환한 빛 덩어리가 블 랙 엔젤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그 순간 박 신부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박 신부는 오라를 펼쳐 준후의 몸을 덮으며 정말로 있는 힘을 다하여 오라 줄을 세 가닥, 블랙 엔젤을 향해 내쏘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현암의 몸은 무지무지한 압력에 휘말려서 총알같이 뒤로 튕겨 나갔다. 현암이 내쏜 권풍이 그대로 돌아온 것이다. 현암의 몸은 이십여 미터나 날아간 다음에 땅에 떨어졌 으나 땅에 떨어진 다음에도 현암의 몸은 땅에 깊은 자국을 남기 면서 다시 십 미터나 미끄러져 나갔다.

“현암 군!”

승희가 비명을 지르면서 블랙 엔젤을 향해 염력을 내면서 현암에게 가려 했으나 허공에 몸이 뜬 채 단단하게 잡혀 있어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박 신부의 오라도 기이하게 빗나가 박 신 부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박 신부는 자신이 발출한 오라를 도 로 흡수하며 준후에게로 그 힘을 보냈다.

준후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질렀지만 간신히 블랙 엔젤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준후가 빠져나가고 박 신부가 힘을 쓰느라 잠시 멈칫하는 틈을 타서 블랙 엔젤은 재빨 리 박 신부의 곁으로 다가와 청홍검의 예리한 날을 박 신부의 목 에 갖다 댔다.

그와 동시에 승희를 구속하던 힘도 풀려 승희는 털썩 땅에 떨 어져 내렸다. 승희는 떨어지자마자 현암에게로 달려갔다. 현암 은 극도로 깊은 내상을 입은데다가 외상도 심각해서 거의 다 죽 어 가는 몰골이었다.

현암은 이를 악물고 승희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며 블랙엔젤을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블랙 엔젤이 현암을 보며 말했다.

“현암, 네가 저 녀석을 해치우지 않으면 내가 모두를 하나씩 죽여 주겠다. 늙은이부터 차례차례……… 아주 잘게 찢어 버리겠 어. 그걸 바라”

현암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이제야말로 죽는가보다 싶은 상황 이었지만 그래도 용을 쓰며 다시 공력을 끌어 올리려 했다. 그때 박 신부의 목소리가 현암의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현암군! 잠시만 시간을 끌어 주게!

현암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기민하게 외쳤다.

“잠깐! 잠깐 기다려!”

그 말에 블랙 엔젤이 배시시 웃었다.

“부탁인가?”

“그래, 부탁이다…………..”

“아무렴, 그래야지. 좋아. 뭐지?”

“아까 그 안개는…………? 그건 네가 불러낸 것이냐?”

“그렇다고 해야지.”

“말도 안 돼! 그 아기들이 말하는 어머니가 너라고?” 

그러자 블랙 엔젤이 현암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저 작은 녀석을 죽이면 내 가르쳐 주지.”

블랙 엔젤이 약간 틈을 보이자 박 신부는 승희에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승희야! 세크메트의 눈을! 염력으로!

승희는 박 신부의 말을 듣고 즉시 염력을 써서 자신의 품에 들 어 있는 세크메트의 눈을 박 신부에게로 날려 보냈다. 블랙 엔젤 은박 신부의 목에 칼을 대고 있었지만 잠시 현암에게 눈을 돌린 참이라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박 신부는 세크메트의 눈을 받아들자마자 즉각 눈을 감고 뭔 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갑자기 블랙 엔젤이 깜짝 놀라면서 부르짖었다.

“이 늙은이가!”

블랙 엔젤은 세크메트의 눈을 쥐고 있는 박 신부의 손을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박 신부는 재빨리 피했다. 화가 치민 블랙 엔젤 은 손에 들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집어 던졌다. 현암은 그 광 경을 보고 박 신부가 세크메트의 눈을 사용하여 블랙 엔젤의 생 각을 읽어 냈음을 눈치챘다.

블랙 엔젤은 몹시 화가 난 듯, 아까까지의 유들유들하던 태도 를 버리고 당장이라도 박 신부의 목을 내리치려는 듯했다.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박 신부가 외쳤다.

“너… 악마 따위가 인간을 해칠 수 있단 말인가?”

“어머? 그럼 내가 못한다고?”

블랙 엔젤이 소리치자 박 신부를 말했다.

“인간의 증오심과 분노에 기생하는 어둠의 존재들! 너희는 사 람의 눈을 현혹하고 이용하는 것뿐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다! 다른 사람은 현혹되더라도 나는 그렇지 않아!”

놀랍게도 세크메트의 눈은 사람이 아닌 것의 마음도 투시할 수 있었다. 박 신부는 블랙 엔젤의 마음과 잠깐 소통함으로써 오 랫동안 궁금하게 여겼던 악마의 비밀 중 한 가지를 알아낸 것이 다. 그는 오랫동안 악마가 어째서 인간에게 악을 행하며 공포를 안겨주는지 궁금했는데,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었다. 악마의 힘은 근원은 인간의 증오요, 분노, 공포였던 것이다. 인간들을 공포에 빠뜨리고 증오와 분노로 몰아넣으면 악마의 힘 은 그만큼 강대해졌다. 그러나 악마는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영 향을 끼칠 수 있지만, 인간사 전체를 좌우하거나 스스로의 의지 로 인간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세상은 이미 예전에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우주의 인과율 같은 대원칙 에 따른 것 같았다. 어쩌면 악마의 현신이란 것 자체가 정말 악 마가 아닌, 어떤 그림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으니 실제로 직접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악마들은 인간의 마음에 기생하고, 탐욕과 욕망을 미끼로 하여 인간의 감정에서 힘을 불려 나가 마침내 인간을 현혹시키고 자멸하게 하여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다!’

박 신부는 블랙 엔젤에 대항할 방법을 금방 찾아냈다. 그것은 악마에게조차도 절대 증오심을 품지 않고 힘을 쓰지 않는 길뿐 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악마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 서 인간이 증오심을 품도록 악마들은 계속 흉악한 모습과 악랄 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악마들이 성직자들을 무서워하는 근본도 그것에 있었다. 신의 이름도 이들을 겁나게 했지만 그보다 성직자들은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마음을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어 악마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악마를 힘으로 이기려는 행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방금 두 눈으로 확인했지만, 악마를 향한 증오와 분노는 고스란히 그 사람에게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박 신부는 한순간 번민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 해도, 현암 군이나 준후가 잘 이해했을까? 잘 이겨 낼 수 있을까?’

박신부의 번민하는 감정을 눈치챘는지 블랙 엔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너는 그러지 않는다고?”

그러자 박 신부는 마음을 굳혔다. 그는 돌연 몸에서 오라를 풀어 내리며 조용히 눈을 감고 온화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자 블랙 엔젤이 긴장하는 빛을 띠더니 박 신부에게 외쳤다.

“이 망할 늙은이! 이제는 다 필요 없다! 여기 있는 놈들을 모 조리 죽여 버리겠다!”

블랙 엔젤이 외치며 칼을 들어 올리자 모두는 아연 긴장했다. 현암은 무리하여 약한 공력이나마 쏘아 내려고 힘을 모았고, 준후도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다해 뇌전의 기운 을 블랙 엔젤에게 내쏘려 했으며 승희조차도 염력을 쏘아 내려 했다.

그 순간, 박신부가 추상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저항하지 말게! 아무 힘도 쓰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 지 말게! 어서!”

모두는 박 신부의 목소리에 잠시 움찔했다. 혹시나 박 신부가 자신을 희생하려는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뜻밖에도 박 신부의 표정은 무척 평온했다.

박 신부의 평온한 모습을 보며, 현암은 즉시 깨달았다. 현암의 힘은 좌선과 무아지경 상태에서의 공력 수행에 근본을 두고 있 으므로 그 몇 마디를 들음으로써 다행히 박 신부의 말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 악마는 허상과 같은 존재다. 신부님의 말이 맞아!’

현암 역시 곧바로 눈을 감고 부동심결의 무념무상 상태로 들어갔다.

준후도 박 신부의 말을 듣고는 문득 뇌전을 내쏘려던 것을 멈 추었다. 그러나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한 듯했다. 준후는 밀교 쪽의 수행을 했지만 쓰는 기술이나 수법이 잡다하여 오히려 잡 념이 많았다.

다시 박 신부가 외쳤다.

“증오심이 강할수록! 분노가 강할수록 악마들은 힘을 얻는다! 악마는 우리가 쓰는 힘과 우리가 품는 어두운 마음밖에 이용할 수 없어! 악마를 이기는 길은 힘에 있는 것이 아니야!”

박신부는 당장이라도 블랙 엔젤의 칼이 목으로 밀어닥칠 판인데도 개의치 않고 계속 소리쳤다.

그 말을 듣자 준후도 즉각 깨닫는 것이 있어서 외쳤다.

“맞아요!”

그러고 나서 준후는 곧바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승희는 번쩍이는 칼날이 박 신부의 주위를 맴돌자 아직 도 망설이는 듯 뒷걸음질만 했다. 박 신부가 다시 한번 외쳤다.

“승희야! 아하스 페르츠도, 고반다도 힘으로 물리칠 수 없었 다! 악마도 마찬가지야! 모든 힘을 풀어라. 이 칼은 내가 마음을 닫고 있는 한 절대 나를 내리치지 못한다!”

승희는 얼결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하다가 즉각 아무 생각이나 마구 해 대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승희는 정신 집중하는 데에 약해서, 마음을 비워야 할 경우에는 아무런 생각이나 마구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버릇이 있었다.

네 사람 모두 눈을 감자, 블랙 엔젤은 정말로 박 신부를 내리 치지 못했다. 이제 칼날이 몇 센티미터만 더 내려오면 예리하기 짝이 없는 청홍검의 날이 박 신부를 쪼개어 버릴 텐데도, 결국 그 몇 센티미터에서 멈추고 만 것이다.

이제 네 사람은 모두 눈을 감고 마음을 굳게 다잡고 있었으며 블랙 엔젤은 검을 들고 그 사이를 설치고 다녔다. 청홍검의 예리 한 검기는 눈을 뜨고 보지 않아도 휙휙 무섭게 스치고 지나가 주 변까지 싸늘하게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그 검날에 닿으면 어디 든지 베어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블랙 엔젤은 직접 청홍검을 내리치지는 않았지만 그야말로 일 밀리미터도 되지 않을 틈을 두고 칼을 무섭게 휘둘러 댔기 때문 에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였다가는 죽거나 크게 다칠 판이었다. 비록 힘으로 벌이는 싸움은 아니었지만 승희는 이번만큼 어려운 싸움을 겪은 적이 없었다.

누구도 동요하지 않고 잘 버텨 내자 블랙 엔젤이 이를 갈며 외쳤다.

“좋다! 이 빌어먹을 늙은이! 하지만 누가 이기나 어디 보자!”

그 순간,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사람의 눈앞에 갖가 지 영상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나머지 사람들이 칼을 맞고 끔찍 하게 죽어 가는 모습이었다. 현암에게는 승희가 난자당해 죽는 모습이 보였고, 준후에게는 박 신부가 승희에게는 현암이, 박 신부에게는 준후가 죽는 모습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하도 수많은 장면이 휙휙 지나가자 정신이 다 혼란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수양이 깊은 박 신부와 현암은 그래도 개의치 않고 잘 버텨냈으나 준후는 조금씩 흔들렸고, 승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을 뜨고 말았다.

“그렇군…….”

블랙 엔젤은 승희의 정신력이 가장 약한 것을 알고 음흉한 미 소를 띠었다. 순식간에 블랙 엔젤이 모습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현암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승희는 눈을 감고 싶었지만 눈이 감겨지지 않았다.

블랙 엔젤이 청홍검의 예리한 검 날을 현암의 입에 찔러 넣을 듯 겨누고 말했다.

“이봐, 아가씨. 이 남자가 죽어도 좋아?”

승희도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눈을 감고는 블 랙 엔젤의 말을 듣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블랙 엔젤이 현암을 노리는순간 승희의 마음은 이미 철렁 내려앉은 후였다.

블래 엔젤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 남자를 구하고 싶지 않아? 너는 이 남자를 많이 생각하고 있잖아?”

승희는 땀과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으나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눈은 감을 수 있었지만 귀는 막을 수 없었다.

블랙 엔젤이 다시 간지러울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부드럽게 승희에게 속삭였다.

“이 남자는 말야, 네가 준 망가진 라이터를 잃지 않으려고 목 숨을 걸었어.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속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운 남자라고. 그런 남자를 죽게 그냥 둘 거야, 응?”

승희는 견디기 힘들어서 억지로 외쳤다.

“현암 군의 마음에는 나 따윈 없어! 월향뿐이야!”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잘됐군. 이 남자 따위는 없어져도 그만 아니겠어? 나도 마음에 들지 않고 말야.”

승희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안 돼!”

그때 박 신부가 다시 준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승희야! 절대 넘어가지 마라! 악마는 결코 스스로 인간을 해 치지는 못한다! 네가 흔들리는 게 곧 현암 군을 해치는 게 된단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승희가 마음을 가다듬으려는데 블랙 엔젤이 깔깔 웃었다.

“그래, 좋다! 나는 꼼짝 않고 있는 너희들을 해칠 순 없지. 허나 그렇다고 내가 물러설 줄 알아?”

돌연 블랙 엔젤의 음산한 기운이 사그라지면서 목소리가 아스라이 울려왔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이 남자는 할 수 있지.”

승희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뜨고 보니, 블랙 엔젤의 모습이 백 호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백호는 여전히 청홍검을 들고 있 었는데, 얼굴은 홀린 듯이 멍한 표정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얼굴에는 블랙 엔젤의 모습도 번갈아 비춰지고 있어 반 정도 홀 린 상태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백호 씨….?”

승희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자 블랙 엔젤이 다시 승희에게 속삭여 댔다.

이봐…………. 이 남자는 할 거야. 너의 그 현암 군을 죽일 거라고. 나는 못해도 이 남자는 해. 틀림없어. 어때? 그래도 그냥 볼 거야?

“절대 그렇지 않아!”

승희가 거부하듯 외쳤지만 블랙 엔젤은 계속 간드러지게 속삭였다.

너는 몰라. 바보 같으니. 투시력을 지녔으면서 그리도 몰라? 이 남자 가 왜 지금껏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버려 가며 너희를 도왔는지 알아?

정의감? 사명감? 웃기지 마. 이 남자는 너를 좋아해. 너한테 푹 빠져 있다고! 그 때문에 이 남자는 지금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뭐…………..?”

승희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현암이 몰라주어 속상해했을 뿐이 지, 누군가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추호도 생 각한 적이 없었다. 승희의 놀라고도 당황한 마음을 읽은 듯 블랙 엔젤이 다시 속삭여 댔다.

이제 알았어? 이 남자는 실은 너의 그 현암 군을 미워하고 있다고! 너를 얻기 위해서 이 남자가 현암을 죽여 줄 거야. 어때? 마음에 드나? 네가 바란 게 이런 결과였나?

“아냐! 그런・・・・・・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이……………!”

여전히 백호는 반쯤 얼이 빠진 얼굴로 현암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승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 다. 그러나 막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자신이 어떻게든 작은 힘 을 쓰면 블랙 엔젤은 그것을 이용하여 현암을 죽일 것 같았다. 승희는 차마 몸을 움직이지는 못하고 소리를 쳤다.

“백호 씨! 제발!”

그 순간, 백호의 몸이 움찔했다. 그리고 한순간이나마 백호의 표정이 제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백호는 정신을 약간 차렸지 만, 자신이 왜 이곳에 서 있는지, 왜 손에 칼을 들고 현암 앞에 있 는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승희 씨……?”

백호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려 승희를 바라보는 순간, 백호의 손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청홍검을 높이 들어 올려 현암의 목덜미를 내리치려 했다.

“차라리 날 죽여!”

승희의 째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백호의 손은 아래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자신의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백호도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때 는 늦었다. 그 순간, 눈을 감은 현암의 몸에서 무엇인가가 번개 처럼 튀어나와 청홍검과 부딪쳤고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금 속의 파열음이 일순 사방을 가득 메웠다. 월향검이 튀어나와 청 홍검과 부딪친 것이다.

월향검은 귀기를 담고 있는 귀검이었지만, 청홍검은 오랜 세 월 내려온 검이자 비길 데가 없을 정도로 예리한 명검이었다. 과 거, 농담이었지만 승희는 월향검과 청홍검이 격돌한다면 어느 쪽이 이기겠느냐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현암은 월향검과 청홍검은 둘 다 자신의 손에 있으니 그 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승희가 자꾸 물어보자 월향검에 자신이 공력을 싣는다면 월향검이 강할 것이고, 공력을 싣지 않 은 상태라면 청홍검이 조금 예리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검의 예리함도 그렇지만, 월향검은 아직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적이 없고 역사도 기껏 몇백 년인 데 반해 청홍검은 이미 이 천 년 정도를 내려왔으며 수많은 사람의 피를 마신 터라 귀기 월향검보다도 강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면서 그런 농담은 불 길하니 이후에는 하지 말라고 엄숙하게 말한 적이 있는데, 이루 어질 수 없을 것 같던 그 농담이 실현되고 만 것이다.

“아……”

승희는 얼이 빠졌다. 비길 데 없는 두 개의 명검이 부딪힌 결 과는…………? 승희는 눈을 가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청홍검은 눈에 보일 정도로 검신이 떨며 진동했는데, 마치 부 러지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월향검은 청홍검과 부딪 힌 다음 힘없이 땅에 떨어져 버려, 아무래도 죽어 버렸거나 크게 망가진 것 같았다.

그 광경을 보고 승희는 눈물을 흘렸다. 월향검이 죽어 버린 것 같아서 슬프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월향의 마음을 따라 가지 못하는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승희는 연적이기도 한 월향 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월향검을 시기 할 정도로 속이 좁지도 않았다. 승희는 솔직하게 월향검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졌어. 월향.’

그 순간, 백호는 환각에서 일순 풀려나 정신을 차린 것 같아 보였다. 월향검과 청홍검이 격돌하면서 그의 몸속에 들어 있던 블랙 엔젤에게도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의 눈이 크게 확대되며 승희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승희에게 물었다.

“내가 조종되고 있었던 겁니까?”

승희는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백호를 바라보며 애원했다.

“제발…… 제발 현암 군을 해치지 말아요. 차라리 나를…………”

“그랬던 겁니까?”

그 순간, 백호의 얼굴에 다시 블랙 엔젤의 어두운 그림자가 비 치기 시작했다. 악마가 다시 백호를 지배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 나 백호는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로 크게 웃어 젖히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청홍검을 들어 자신의 목에 찔러 넣었다.

“으악!”

승희의 비명 소리는 백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이하고도 야릇한 귀기에 눌려 들리지 않았다. 그 귀기는 폭발하듯 백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면서 사방을 회오리치면서 맴돌았다. 그리고 이내 사방을 음울한 진동으로 가득 메웠다. 마치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결국에는 내가 이긴다! 나는 절대 지지 않는다! 너희는 절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그대로 행동하게 될 것 이다!

그러고는 어두운 암흑이 폭발하며 사방의 빛을 모조리 흡수하듯 무섭게 터져 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의 귀는 회오리치는 바람 소리와 뜻을 알 수 없는 무섭도록 많은 군중들 의 저주와 지껄임과 중얼거림으로 가득 찼다.

다음 순간, 귀기는 씻은 듯이 사라졌고 사방은 다시 적막을 되 찾았다.


눈을 감고 있던 사람들 중 준후가 제일 먼저 눈을 떴다. 박신 부와 현암과 준후는 모두 눈을 감은 채 삼매경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셋 중에 서 준후가 집중력이 조금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먼저 눈을 뜬 것 이다.

준후의 눈에 백호가 피를 쏟고 쓰러져 있는 것과 승희가 그 앞 에서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나……. 이게 어떻게 ………… 된……”

그러나 승희는 엉엉 소리 높여 울기만 할 뿐 말을 하지 못했 다. 준후는 현암과 박 신부를 깨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백호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백호의 상처는 치명상이어서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백호는 아직 눈을 뜨고 뭔가 말하고 싶은 듯, 피에 젖은 입술 을 조금씩 움직이려 했다. 준후는 슬프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곧 땅에 떨어진 두 개의 세크메트의 눈을 발견했다. 박 신부와 블랙 엔젤이 각각 떨어뜨린 것이었다. 준후가 급히 그것을 주워 백호의 힘없는 손에 쥐어 주자 곧 백호의 마음이 전달되어 왔다.

준후? 너구나…………….

백호는 죽어 가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또렷하고 밝았다. 준 후는 순간 백호와 함께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기억하며 더는 참 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가 말했다.

울 필요도 없다. 누구도…… 나야말로 바보였어. 남의 조종을 받 으면서도 그것을 몰랐다니…………. 아니, 몰랐던 건 아니야. 모르는 척했 지…………. 이제………… 이제야 모두 생각이 나는구나. 모두…….

백호는 원래가 타고난 법관이라 정의관과 질서관에 투철했으 며, 대단히 긍지가 높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다른 누군가의 노리개가 되어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행 동을 했다는 사실은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퇴마사들도 그런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 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도 백 호 스스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항 상 뭔가 위험하고 중요한 고비가 닥칠 적마다 자신은 의식을 잃 었고 무엇을 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뭔가 수상한 느낌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백호 는 애써 그런 사실을 잊으려 했다.

그가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블랙 엔젤의 영향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블랙 엔젤이 떠나 버리자 백호는 자신이 했던 모든 일들을 기억해 냈다. 그중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베드로 수사를 죽인 일이었다. 물론 자신이 그런 것 이 아니라 블랙 엔젤의 힘이었지만………………

아!

준후가 속으로 외치자 백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울 필요 없다. 모르고 한 것이라도 과실치사에 해당된단다. 나는 내 죗값을 받은 것뿐이다.

아니에요! 백호 아저씨! 아저씨 죄가 없어요! 아저씨 스스로가 잘 알 고 계시잖아요! 아저씨가 법관이었으면 그런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할 건가요?

준후가 속으로 외치자 백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가….?

희미하게 웃는 그의 웃음의 의미는 너무도 복잡하여 서로 마

음을 열어 둔 준후로서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잠시 후 백호가 물었다.

현암 씨는……? 무사한가?

현암 형뿐만 아니에요! 승희 누나도, 신부님도, 저도! 모두 아저씨가 구한 거예요! 모두!

내가……………? 허허…….

백호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준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이제야…………… 이제야 나는 세상에 뭔가를 한 거다……….. 그러면 내가 세상을 구한 거다. 어때? 백호…..? 잘했다. 그렇지? 너는 정말 잘했어… 그렇지……?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었다. 이제껏 알 지 못한 그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슬픔을 느끼며 준후는 뭐 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백호가 다시 준후에게 말했다.

현암 씨에게 전해 주렴. 그에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후는 재빨리 달려가 현암의 손에 세크메트의 눈을 쥐어 주었다. 현암은 무아지경의 상태였지만,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 금방 상황을 깨닫고 눈을 뜨면서 외쳤다. “백호 씨! 안 돼요!”

백호는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중얼거렸다.

현암 씨…………. 세상을 꼭 구하시오. 안 그러면 …………… 안 그러면 나는 개 죽음을 당한 겁니다…… 만약…… 만약 못한다면……. 승희 씨……. 승희 씨를 부탁…

백호 씨!

현암이 펑펑 눈물을 흘리자 백호는 평온하게 말했다.

현암 씨…………. 나를 동정하지 말아요. 나는・・・・・・ 나는 못난, 그리고 나 쁜 놈이었소. 내가 당신들을 도운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 그다음은 동정심, 정의감 때문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러나 내가 정말 당신들을 도우려 한 이유는…………….

백호는 힘겹게 말을 이어 가다가 쿨럭 하면서 피를 토했다. 현 암은 말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목이 꽉 메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백호는 다시 꺼져 가는 듯이 말을 전해 왔다.

그건 바로 ᆞᆞᆞᆞᆞᆞ 승희 씨 때문이었소……. 나는…… 나는…………… 승희 씨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미련 을…………. 나는…… 나는 나쁜 놈이고…. 바보요……..

아니오! 아닙니다! 당신이 정말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살아나서 쟁취하세요!

현암은 으흐흐 하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느껴 울었다. 백 호의 말이 이어졌다. 다정한 말투였으나 약간 쓸쓸함이 배어 있 었다.

나는・・・・・・ 나는 당신을 미워했고…… 질투했어요……. 그게 내 진심 이었소. 당신의 행동은 항상 옳았지만 승희 씨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것이 미웠지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돕는 것으로…………… 당 신에게 빚을 지우는 것으로……………. 허허……………. 내 나름대로의 복수였지 만………… 역시 나는…… 나는 모자라요. 이제 보니…… 당신・・・・・・ 당신 역시・・・・・・ 그 라이터 …………….

블랙 엔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잠시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나자 백호는 현암이 승희가 선물한 라이터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 또한 기억해 낸 것이다. 백호는 이제 안심이 되었는지 사뭇 평온했다.

복수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남자답게 덤비란 말입니다! 이런 식으 로………! 이런 식으로 짐을 지우지 말고 ・・・・・・ 제발 살아나서…………….

현암이 외쳤지만 백호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안심입니다…………….. 당신은 짐을 져야 해요……. 승희 씨에 게・・・・・・ 잘해 주세요・・・・・・・ 그것으로 그것만이 내가・・・・・・ . 그리고 가능 하다면…………… 세상도 구해 주고 말이오……………

그 말에 현암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여전히 흐르는 눈물을 주 체하지 못하면서도 단호히 말했다.

약속하겠습니다……

현암은 몸을 일으키며 굳은 얼굴로 세크메트의 눈을 승희에게 내밀었다. 승희는 슬피 울면서도 머뭇거릴 뿐 그것을 받지 않으 려 했다. 백호의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승희 옆에 다가온 박 신부가 그것을 받아 승희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그리고 박 신부는 조용히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에 백호와 승희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마음의 교감 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백 호는 정말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고, 승희도 쏟아지는 눈물 을 어느 정도 멈추며 조용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했을 것이라고 현암은 짐 작하며 힘겹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백호가 마지막 숨 을 거두는 순간, 승희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고 현암은 산이 떠나 갈 듯 긴 외침을 터뜨렸다. 공력이 실리지 않았지만 그 소리는 사자후보다도 더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아이들과 이반 교수, 바이올렛 등도 모두 블랙 엔젤의 제재가 풀리자 달려 내려와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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