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1화 –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1 :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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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2권 1화 –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1 : 안개


프롤로그: 안개

새벽안개가 짙었다. 가까운 풍경조차도 거의 보이지 않게 만 드는 짙은 안개는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우울하게 일그러뜨렸 다. 짙은 안개야 원래 영국에서는 흔했지만, 동틀 시간이 지났는 데도 안개는 가지 않았다. 바로 주변의 사물들까지 아스라하게 윤곽만 보일 정도로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그러나 부지런한 농부와 양치기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개 속을 헤치면서 하루 의 일과를 이어 나갈 생각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오늘따라 안개는 여느 때보다 더더욱 짙어 마치 무슨 연기나 우윳빛 장막을 친 것 같았다. 흔하지 않은 일이라 다들 이상하게 여겼다. 그럼에도 농부들은 삼삼오오 집에서 나와 각자의 농지와 방목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파란 풀들과 나지막한 관목들로 둘러싸인 캐드베리의 구릉에 나 있는 좁다란 오솔길로 자연스럽게 모여서 잘 보이지 않는 속에서도 가볍게 담소를 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이상하게 모두가 기분이 울적하면서도 들뜬 듯했다. 오늘처럼 짙은 안개는 근래에 보기 드물어서인지도 몰랐다. 나이 먹은 농부가 걸음을 옮기다 말고 말했다.

“오늘은 참 안개가 짙군. 옛날에는 이런 안개를 ‘용의 입김’이라고 했지.”

뒤쪽의 한 양치기가 눈을 크게 떴다.

“용의 입김이라구요?”

나이 먹은 농부는 계속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손자인 듯한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흥 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멀린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하여 용을 불러 입김을 토해 내 게 했다는 전설이 있지. 바로 그런 안개 같아. 이런 날이면………….” 나이 먹은 농부가 말을 이으려는데 중간에서 손자가 물었다. 

“멀린이 누구예요?”

늙은 농부가 슬며시 미소를 짓고는 다정스레 말했다.

“옛날옛날 오랜 옛날에 이 땅을 지키던 아주 위대한 왕이 있었단다.”

“아! 아더 왕 말이군요!”

“그래. 멀린은 아더 왕을 섬기던 대마법사지.”

꼬마는 고개를 끄덕였고 늙은 농부는 웃으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다가 농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걸음을 멈 추고 긴장된 표정으로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것도 모자라 굳은 표정으로 귀를 곤두세우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뒤에서 따라오던 양치기가 말했다.

“왜 그러세요?”

“쉿, 뭔가 이상해.”

“하하. 이런 초원에 무슨.”

늙은 농부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이면 그분이 나타나실지 몰라. 놀라지 말게.” 뒤쪽의 젊은 양치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양치기는 뒤를 따라 오던 젊은 동료 양치기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늙은 농부가 좀 이상하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늙은 농부는 뒤에서 떠드는 소리 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멈춘 채 신경을 곤두세워 귀를 기울였다. 아이도 뭔가 들리는지 눈을 크게 떴다.

“어! 할아버지, 말발굽 소리………….”

꼬마가 중얼거렸다. 농부는 손을 휘저어 조용히 하라는 제스 처를 한 다음,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캐드베리 일대에서 말을 키우는 집 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꼬마가 말한 대로 먼 곳에서부터 말발 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의 말이 오는 소리였다.

“아니, 웬 말들이!”

농부가 급히 뒤쪽을 돌아보며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 술에 갖다 댔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커지며 희미하게 쨍그랑쨍 그랑 하는 소리도 같이 들렸다. 농부의 눈이 큼지막해지더니 재 빨리 뒤쪽을 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길을 비켜야하네! 그분이야!”

뒤쪽의 농부들과 양치기들도 영문을 모르는 채 늙은 농부를 쳐다보았다. 늙은 농부가 길을 비키면서 재촉했다.

“어서 어서! 길에서 물러나서 저쪽으로 피하게. 어서!” 

말발굽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늙은 농부의 태도도 이상했 고, 또 짙은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무섭기도 하여 그들은 늙은 농부의 말대로 산 구릉에 있는 관목 더미 뒤쪽으로 올라갔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안개 너머로 거뭇거뭇한 형 체가 나타났다. 관목 뒤에서 농부가 손자에게 말했다.

“왕이시다. 고개를 숙이렴.”

말발굽 소리가 천천히 눈앞으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안개 속 이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른어른한 검은 그림자들이 보 였다. 그들은 놀랍게도 말을 탄 기사들이었다. 백마를 타고 붉은 망토에 투구를 쓴 사람을 필두로 해서, 그 뒤에 수십 명의 말을 탄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모두 이 시대의 복색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고, 갖가지 옛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 다. 창을 든 사람도 있었고, 활을 든 사람, 거대한 양손 검을 등에 맨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맨 앞의 백마를 탄 사람을 묵묵히 따 르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며 그들의 자취가 보이지 않게 되자 공포에 질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젊은 양치기가 비로소 중얼 거렸다.

“저, 저것이 무엇일까요? 왜 저런 차림으로……………”

늙은 농부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면서 성호를 그었다.

“왕과 기사들의 유령일세.”

“예? 뭐라구요? 그럼 지금 지나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유령이란 말입니까?”

농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시네. 안개가 짙게 끼는 날이면 나타나시지.”

“세, 세상에……. 전 처음 봐요!”

양치기들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아이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늙은 농부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오늘은 왜 저리도 거창한 행렬을 이끌고 나타나셨는지 모르겠군. 중요한 일이 생긴 걸까?”

늙은 농부가 중얼거리는 사이에도 안개는 짙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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