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10화 –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10 : 스톤헨지의 결투
스톤헨지의 결투
윌리엄스 신부의 차 속에서 승희는 눈을 감고 투시를 시작했 다. 뒷자리에서는 연희가 세크메트의 눈을 가지고 현암 옆에 앉 았다. 승희는 눈을 감고 양손 집게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른 채 입을 열었다.
“아까의 그 폭주족 두목, 지금 부하들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있 어. 변변치 못한 것들이라고. 별로 시간이 없대.”
현암은 초조하게 승희가 투시한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무슨 시간이 없다는 거지?”
“코제트, 코제트와 만날 시간인데 이름이 같은 자를 찾기가 어
려운가봐! 음, 안절부절못하고 있어.”
“방향은 어느 쪽입니까, 승희 양?”
윌리엄스 신부가 묻자 승희는 왼쪽을 가리켰다.
“왼쪽요?”
윌리엄스 신부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승희가 투시력으로 짚어 낼 수 있는 것은 거리와 방향일 뿐, 그 이상으로 자세한 것까지는 어려웠다. 곧 윌리엄스 신부는 차를 출발시켰고 현암은 공력을 모으면서 승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이럴 수가!”
승희가 눈을 감은 채 외쳤다. 현암이 물었다.
“왜 그래, 승희야?”
“이 폭주족 두목 놈……………. 이럴 수가…………….”
“무슨 말이야?”
“이놈・・・・・・지금 이름의 철자가 E로 시작하는 제물을 구할 시간이 없으니까 자기 부하 중 한 명을 데려가려고 꿍꿍이를 품고 있어.”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지금 부하들을 인솔해서 떠나자고 하는군. 그래, 코제트와 만 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가려는 모양이야. 거기서 중대한 일이 있 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직접 가야 할 것 같다고.”
“음, 그래? 거기가 어딘데?”
승희가 고개를 흔들더니 눈을 번쩍 떴다.
“스톤헨지? 가만, 그놈 말이 시간이 없다고 그랬지? 그리고 직접 가야 한다고. 그렇다면 코제트가 마지막 제물을 바치려고 하는 곳이 스톤헨지가 아닐까?”
연희가 말했다.
“틀림없을 거 같네요. 그 문구를 생각해 봐요. ‘숲을 비추는 태양이 큰 돌 위에 밝게 비칠 때 제물을 바치면 왕의 소원이 이루어지리라. 그들은 스톤헨지에서 마지막 제물을 바치려는 모양이에요.”
“왕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제물을 바친단 말인가? 도대체 왕의 소원이 뭐기에…………. 사람을 잡아서 제물을 바친다면 분명 히 좋은 소원은 아닐 텐데.”
승희가 현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현암이 다시 중얼거렸다. “스톤헨지에서 마지막 싸움이 벌어지게 되겠군. 윌리엄스 신 부님, 경찰과 연락이 됩니까?”
“네. 물론이지요.”
“경찰들에게 그 부근에서 대기하라고 하세요. 주술력을 가진 자에게 직접 경찰을 투입시키는 건 무리니, 일단 우리가 가서 제 압하고 나서 경찰에 넘기는 것이 순서일 것 같군요. 그렇지 않아 요?”
윌리엄스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아무리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도 사람일 테니 까요. 경찰들과 싸운다면 경찰들도 피해를 입고 그들도 사살되 겠지요. 그건 너무…….”
현암이 씩 웃었다.
“그들이 사살될까요? 제가 보기에는 경찰들이 전멸될 가능성이 더 큰데요.”
윌리엄스 신부가 멍한 표정을 짓자 연희가 나섰다.
“아무튼 사태가 빨리 수습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해야해요. 그런데 그들이 정말 놀라운 술수들을 지니고 있다면 현암 씨 혼자의 힘만으로는 힘들지 않을까요?”
승희도 말했다.
“그래. 박 신부님과 준후의 도움도 필요할 거야.”
현암이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매우 위험할 것 같은데……….”
승희가 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위험한 일일수록 같이 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
현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 그들은 같은 배를 탄 처 지였다. 이런 마당에 위험이니, 남을 아껴준다느니 하는 생각은 오히려 아집일지도 몰랐다.
이야기를 들은 윌리엄스 신부는 스톤헨지를 향해 차를 돌렸 다. 폭주족 두목도 방금 출발했다고 승희가 말했으니 두 그룹이 스톤헨지에 도착하는 시간은 비슷할 것이고, 그렇게 하면 그들 의 음모를 스톤헨지에서 낱낱이 밝혀낸 뒤에 막을 수 있을 것 같 았다.
차가 달리는 중에 연희가 쥐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서 준후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신부님, 알아냈어요. 스톤헨지 틀림없이 스톤헨지예요.”
“스톤헨지라고? 무슨 말이지?”
“현암 형, 승희 누나, 연희 누나, 그리고 윌리엄스 신부님이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곳에서 마지막 제물이 바쳐질 거래요. 그 걸 막아야 한대요.”
“자, 자, 준후야, 차근차근 얘기해 보렴.”
준후가 발을 동동 굴렀다.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어요. 현암 형 일행은 벌써 출발을 했 다구요. 정 궁금하시면 신부님이 세크메트의 눈을 들고 계세요. 금방 알 수 있을 것 아니에요.”
“나는 웬만하면 그 힘을 빌리고 싶지 않구나. 그건….. “아이고, 말할 시간이 없으니 어서 받아요.”
준후는 반강제로 박 신부의 손에 세크메트의 눈을 들려 주었 다. 그러자 연희의 마음을 통해서 저쪽의 상황이 순식간에 박 신 부에게 전달되어 왔다. 박 신부는 다 듣고 난 후 세크메트의 눈 을 징그러운 벌레라도 되는 듯이 준후에게 던졌다. 그러고는 쑥 스러웠던지 얼른 고개를 돌려 월터 보울에게 말했다.
“어서 스톤헨지로 가야겠습니다.”
준후와 박 신부의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던 월터 보울이 의아한 듯 말했다.
“스톤헨지요? 왜 갑자기…………….”
“빨리 가야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가면서 말씀드리지요. 가능 하면 경찰이든 심령학회든, 힘이 닿는 곳에 연락을 해서 스톤헨 지 주위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수상한 사람들을 검거하라고 말해 주십시오. 그러나 절대 우리가 신호를 보내기 전에 움직이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저를 믿으십시오.”
박신부가 확신에 차서 말하자 몸에 약하나마 오라가 비쳤다. 월터 보울도 약간의 투시력은 있는 사람이었다. 박 신부가 이렇 게 신중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야, 세크메트의 눈을 계속 들고 있으렴. 연희 양과 그렇 게 약속했단다.”
“예? 그러면 신부님은 세크메트의 눈으로 연희 누나하고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군요. 그런 것은 사용 안 한다고…….”
“자, 자. 시간이 없단다. 어서 가자.”
박 신부는 웃음 띤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드루이드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솟았다. 이번 일은 왠지 모르게 위 험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승희는 눈을 감은 채 폭주족이 향하고 있는 위치를 짚어 가고 있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처음에는 곧바로 스톤헨지로 가려 고 했다. 그러나 현암이 그보다는 폭주족 뒤를 따라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차는 승희가 투시를 하면서 폭주족들 이 가는 쪽으로 달렸다. 승희의 투시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주변의 장애물이나 막힌 길까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몇 번을 막 다른 길에 부딪혀서 돌아가기를 반복했지만 일행은 결국 괴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트럭을 따라잡았다. 승희가 그 차를 향해 손 가락질을 했다.
“저 차가 틀림없니?”
“응, 폭주족이 모두 이동하고 있어.”
“음・・・・・・ 모두? 몇 명이나 되는지 대강 알아볼 수 없어?”
승희가 눈을 감고는 투시를 했다.
“제기랄, 되게 많군. 사오십 명 정도 돼.”
“사오십 명이라.”
현암이 입술을 깨물었다. 박 신부나 준후도 없는 상태에서 단 신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대적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곳에 죽치고 있을 블랙서클의 코제트라 는 여자와 드루이드들이었다.
박 신부와 준후가 같이 있어서 힘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상대 가 될지 안 될지 모르는데…………. 윌리엄스 신부가 걱정스러운 말 투로 말했다.
“먼저 경찰에 요청을 해서 폭주족부터 잡아 가두게 하면 어떨 까요?”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주술사들이 눈치를 채고 달아나 버릴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폭주족 몇 명을 잡게 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찾을 수 없어요. 드루이드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왕이 무슨 명령을 내 린다는 것인지, 또 그들이 찾으려 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 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이번 일은 헛된 것이나 다름이 없지요.’
“예,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너무 위험하지 않습 니까? 우리 넷이서 사오십 명의 폭주족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래도 해 봐야지요. 해 보지 않고서는 결과를 속단할 수 없 지 않습니까?”
윌리엄스 신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차는 평평한 초원 지대로 접어들었다. 선사 시대 유적지인 스톤헨지에서 얼마 떨 어지지 않은 곳까지 도달한 것이다.
주변은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폭주족들이 차에서 무리를 지어 내려서 스톤헨지의 벌판으로 나아가는 것을 볼 때까지는 그래도 주변이 좀 보였는데, 길을 벗어나 초원으로 들어가자 점점 안개가 짙어졌다. 안개 속을 뚫고 서서히 빗방울 이 몸을 적셨다. 소나기나 폭우가 아니고, 스며들듯이 내리는 안개비였다.
원래 스톤헨지 부근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꽤 잦은 곳이었지
만, 안개가 짙게 낀데다가 비까지 내리자 관광객들은 모두 떠난 뒤였다. 차에서 내린 현암 일행은 폭주족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몸을 숨겼다.
연희는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솟은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나타 날 때마다 몸을 흠칫거렸는데 그럴 때마다 목에 건 구리 십자가 를 쓰다듬었다. 윌리엄스 신부도 장난스럽던 얼굴에 긴장된 기 색이 역력했다. 앞장선 현암이 만약을 대비해 조금씩 공력을 돌 리면서 가고 있었다. 바로 뒤에서는 승희가 중간 중간 폭주족이 지나간 길들을 투시하면서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느덧 일행은 커다란 돌들이 큰 원을 이루며 배열되어 있는 돌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멈추어 서서 투시를 하고 있던 승희의 안색이 변했다.
“잠깐! 기습이에요! 폭주족들이….”
승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개에 가려진 돌 뒤에 몸을 숨 기고 있던 폭주족들이 현암 일행에게 덮쳐들었다. 폭주족들은 저마다 흉기를 들고 기괴한 고함 소리를 질러 댔다. 놈들은 아까 부터 현암이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스톤헨 지의 안개 속에 들어가자 승희가 놈들의 방향만을 읽어 내다가 기습을 당한 것이었다.
현암은 몸을 날려 자신에게 쏟아지는 흉기들을 피하면서 승희 에게 달려드는 놈 하나를 발로 차 밀어 버렸다. 윌리엄스 신부도 재빠르게 몸을 피했고, 놀랍게도 연희는 기습을 당하자 기합 소 리와 함께 한 녀석을 둘러메쳐서 다른 쪽에서 달려오던 놈에게 로 던져 버렸다. 반사적으로 동작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꽤 실력 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놈들의 수는 많았고 뒤에 섰던 놈들 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돌! 돌을 등져!”
현암이 소리쳤다.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면 현암 자신과 무술 을 할 줄 아는 연희면 몰라도 승희와 윌리엄스 신부는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현암이 공력을 모으면서 사자후를 뿜어내자 귀가 멍멍해지면서 충격이 왔다. 폭주족도 충격을 받아 몇몇은 무기를 땅에 떨어뜨리고 비틀거렸으며, 나머지도 주춤거리고 달 려들던 동작을 멈추었다. 그 틈을 타서 현암이 연희와 승희를 잡 아 돌 쪽으로 밀어냈다. 윌리엄스 신부는 영력이 있어서인지 사 자후의 일갈에 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현암은 한 녀석이 떨어뜨린 기다란 쇠파이프를 집어 들고 윌리엄스 신부를 급히 끌어당긴 후, 그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현암이 방어할 범위는 너무 넓었다. 정신을 차린 폭주 족들은 현암이 두려웠던지, 스멀스멀 주변을 에워싸고 이쪽저쪽 에서 정신없이 소리를 질러 댔다. 교란시키려는 것 같았다. 이삼십 명 정도 되는 놈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휙휙 무기를 휘두르며 협박하니 아무리 현암이라도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왼쪽에 서 두어 놈이 달려드는 낌새에 현암이 몸을 돌리자 오른쪽에서 괴성을 지르면서 다른 놈들이 달려들었다. 연희가 기합 소리와 함께 한 놈의 목덜미를 쳐서 거꾸러뜨렸으나 다른 놈이 승희의 팔을 잡고 끌었다.
“놔! 놔! 인마!”
승희가 반항하자 폭주족은 몽둥이를 치켜들었다가 윌리엄스 신부가 몸을 굴려 다리를 거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 넘 어졌다. 팔에 손자국이 벌겋게 난 승희가 핏대를 세우며 놈의 입 을 걷어찼고 연희는 다른 한 놈의 다리를 걸어 재빨리 넘어뜨렸 다. 폭주족 하나가 넘어져 뒹굴자 다른 놈들도 멈칫하며 달려들 지 못하고 눈치를 보았다.
예상외로 세 사람이 분전하자 현암은 힘을 얻어 들고 있는 쇠 파이프에 공력을 모았다. 태극기공 십팔자 구결 중의 ‘투’ 자결 이었다. 현암은 일부러 느린 속도로 쇠파이프를 휘둘러서 앞쪽 의 몽둥이를 든 놈에게 파이프를 밀어냈다. 그래야 놈이 피하지 않고 현암의 의도대로 쇠파이프를 막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었 다. 놈은 몽둥이로 현암의 쇠파이프를 여유 있게 막았으나 파이 프 끝에서 운용되는 공력에 의해 커억 하는 비명 소리를 질렀다. 현암은 때를 놓치지 않고 공력의 운행을 ‘흡’ 자결로 바꾸었다.
그러자 놈의 늘어진 몸은 마치 자석에 쇠가 붙듯 파이프 쪽에 바싹 다가와 붙었고 현암은 공력을 극도로 올리면서 힘을 모아 놈의 몸을 파이프 끝에 매단 채 휘둘렀다.
“으아!”
파이프 끝에 달라붙은 놈은 공력이 전달되자 감전된 개구리 처럼 사지를 바짝 폈고, 현암이 엄청난 힘으로 놈을 들어 사방에 휘두르자 현암 가까이에 있던 예닐곱 명이나 되는 폭주족들이 우르르 한쪽으로 넘어졌다. 내친김에 현암은 공력을 ‘발’ 자로 바꾸었다. 폭주족들의 몸에 공력이 터져 나가자 놈들은 대포에 장전된 포탄이 날아가듯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십여 미터나 구르 듯이 밀려 나갔다. 공력을 꽤 소비해서 숨이 가빠진 현암의 눈에 한 놈이 총을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현암은 다른 생각을 할 겨 를도 없이 왼팔을 뻗었고 월향검이 귀곡성을 지르면서 날았다. 꺄아아악!
총을 꺼내어 현암을 겨누던 폭주족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비명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번쩍하더니 손에 쥔 권총이 두 조각이 나 버렸고, 반대편에 있던 한 놈의 모히칸 머리 윗부분이 잘려 나가 머리카락이 얼굴로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았기 때 문이다. 월향이 검기를 품고 날면 어지간한 금속을 두부처럼 잘 라 낸다는 것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허공을 날던 월향이 은 빛 호선을 그리면서 방향을 바꾸니 서너 명의 폭주족들이 들고 있던 무기들이 손잡이 부분만 남기고 땅에 와르르 떨어져 내렸 다. 현암은 틈을 주지 않고 넋 나간 듯이 보이는 한 놈을 번쩍 들 어 멍하니 서 있는 다른 놈들을 향해 던졌다. 공격을 마친 현암 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한 놈이 유리병으로 현암의 머리를 내 리쳤다. 퍽 하면서 병이 깨지고 선혈이 튀었다.
“악! 현암군!”
승희가 소리를 쳤고 연희가 뛰어들어 현암을 내리친 놈의 머 리를 잡고 돌에다 있는 힘껏 박치기를 시켰다. 쿵 소리가 나더니 놈은 기절해 납작하게 뻗어 버렸다.
“현암군, 힘내!”
승희는 자신을 방어해 달라는 듯, 윌리엄스 신부에게 눈짓을 하고 그 자리에 앉아 현암에게 힘을 보냈다. 현암의 머리는 공력 이 미치지 못해 큰 충격을 받았으나 승희가 보내 주는 힘이 솟구 쳐 오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쏟아지는 비 속에서 머리에 피를 흘리고 눈썹을 곤두세운 현암의 모습을 보고 흉포한 폭주족들마 저도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현암은 사자의 울음 같은 분노의 소 리를 지르며 아직 십여 명이나 남은 폭주족 사이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스톤헨지 부근으로 벼락이 떨어지면서 굉음이 났다. 곧이어 이상한 소리가 울려왔다. 소리에 정신이 팔린 듯, 윌리엄 스 신부가 한눈을 팔다가 한 놈이 내리친 체인에 어깨를 맞았다. 비에 젖은 검은 사제복이 부욱 찢어지며 윌리엄스 신부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신부가 쓰러지자 폭주족 하나가 자리에 앉아 정신을 모으고 있는 승희에게 달려들었고, 이를 본 연희가 달려가 려다가 발을 헛디뎌서 다른 한 놈에게 양팔을 잡혀 버렸다.
“놔! 이 짐승 같은…….”
연희의 팔을 한 놈이 잡고 있는 사이 다른 한 놈이 나이프를 폈다. 윌리엄스 신부가 놈의 발목을 잡았으나 오히려 놈의 발에 차여서 나뒹굴었다. 그때였다. 연희의 목에 걸고 있던 구리 십자 가에서 푸른 염체가 파란빛을 발하며 뛰쳐나왔다.
“으아아악!”
염체는 놈의 눈 주위에 달라붙었다. 놈은 칼을 떨어뜨리고 비 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염체가 놈의 눈을 찌른 것이다. 그사이 연희는 자신을 잡았던 놈을 업어치기로 메다꽂고, 뾰족 한 굽으로 어깻죽지를 힘껏 밟았다. 놈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 르다가 늘어졌다. 염체는 연희의 십자가로 돌아왔다. 연희가 십 자가를 어루만지고는 쓰러진 놈들을 걷어차면서 내뱉듯 말했다.
“신사는 못 되는 놈들이니 예의를 바라지 마라!”
현암은 열 명이나 되는 놈들을 인정사정없이 때려눕혀 버렸 다. 삼십 명에 달하던 폭주족들은 이십여 명 이상이 쓰러지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쳐서 서 있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윌리엄스 신부가 쓰러진 채로 멍하니 연희를 쳐다보았다. 연희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고 윌리엄스 신부는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승 희가 눈을 떴다. 빗속에서 격투를 하느라 다들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연희는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느라 애쓰고 있었다. 현암 의 머리에서 흐르던 피는 멎은 듯했지만 난전을 치르느라 옷이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얼굴도 좀 부어올랐다. 승희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현암은 긴장된 표정으로 소 리 내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승희도 놀라서 귀를 기울였다. 안 개와 빗소리를 뚫고 기괴한 울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윌리엄스 신부의 안색이 파래졌다.
“이건 뭔가…… 주술, 주술에 의한……..”
승희가 재빨리 손가락을 머리에 짚고 투시를 행하려 했으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기괴한 울림에 화답하듯이, 멀리서 다시 울 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고, 빗소리 말고도 푸드득거리는 소리 가 울렸다.
“이, 이게 뭐죠?”
연희가 놀란 듯 말했다. 현암은 이를 악문 채 열심히 귀를 기 울였다. 울음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 소리는 어느 한 곳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리고 저쪽에서 화답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며, 사방을 에워싼 것처럼 울음소 리들은 안개 속에서 메아리쳤다. 희미한 수선거림이 짙은 안개 너머에서 점차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저, 저거!”
안개 너머에서 불빛을 본 승희가 소리쳤다. 윌리엄스 신부도 신음을 냈다. 연희는 차분히 서 있었고, 현암은 고개를 흔들어 얼굴의 물기를 털어내고 심호흡을 했다.
사방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들…………. 현암의 입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 돌 위로 올라가! 어서!”
안개를 뚫고 울음소리들이 점차 커졌다. 그림자들은 부산하 게 안개 속을 돌아다녔고 희미한 불빛들도 더더욱 활발하게 움 직이기 시작했다. 현암은 일단 승희를 돌 위로 던지듯이 올렸다. 키가 큰 연희는 빠른 몸놀림으로 껑충 뛰어 돌 위로 올라섰으나, 키가 작은 윌리엄스 신부는 돌 위에 손이 닿지 않았다. 현암이 윌리엄스 신부를 위로 올려 주려 하는데 안개 속에서 일제히 울 음소리가 진동하면서 검은 그림자들이 내달려 왔다. 악령의 사 도처럼 눈을 번뜩거리는 들개들이었다.
“현암군!”
승희와 연희는 소리를 지르며 윌리엄스 신부를 잡아 위로 끌 어 올렸다. 현암에게 두 마리의 들개가 덮쳐들었지만 현암이 오 른팔을 휘두르자 깨갱 하고 땅에 처박혀 뒹굴었다. 그러나 현암 의 소매도 주욱 찢겨 나갔다. 들개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사방에서 짖어 대며 돌 주위로 몰려들었다. 현암이 기합을 넣으며 허공을 박차고 돌 위로 뛰어올랐다. 몇 마리의 개들이 눈을 번뜩이며 뛰어오르는 현암의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윌리엄스 신부가 허공에서 균형을 잃을 뻔한 현암을 간신히 잡아 올렸고, 승희와 연희는 현암의 다리를 물고 늘어진 개들을 발로 차서 떨 어뜨렸다.
“으악! 이걸 어떻게 해. 현암군!”
개들은 주술력에 의해 조종되어서인지 더 맹렬한 것 같았다. 개들은 눈을 번뜩거리면서 사람의 키보다 훨씬 높은 바위 위로 뛰어 올라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놀랄 만큼 점프력이 좋았다. 솟 구쳐 올라온 개들은 이빨을 딱딱거리며 발톱으로 정신없이 돌을 긁어댔다. 돌 위로 몸을 피한 네 사람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정신 없이 개들을 발로 차서 떨구어 냈으나, 개들은 지치지도 않고 돌 위로 달려들었다.
몰려든 개들은 언뜻 보기에도 수백 마리는 될 것 같았다. 그리 고 점점 더 기를 써서 위로 솟구쳐 오르며 돌 위로 피신해 있는 네 사람을 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개 한 마리 한 마리를 상대하자면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이렇게 많은 개들을 네 명이 상대했다간 순식간에 뼈만 남을 것이 분명했다. 현암으로서도 돌 위로 피해 있는 것 말고는 특별한 타개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솟구치며 점프를 하는 개들은 점점 더 높이 올라 돌 위로 곧바로 뛰어오를 듯이 보였다. 덩치가 커 보이는 들개 한 마리가 돌 위로 뛰어오르려는 것을 현암이 발로 차 버리자 나가떨어졌 다. 그러나 다른 개들도 뛰어 올라왔고 이제는 윌리엄스 신부나 승희, 연희까지도 갖은 수를 써서 개들을 발로 밀쳐 내고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데 하늘에서 푸드덕거리 는 소리가 들렸다. 승희가 위를 올려다보다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하느님 맙소사. 아니! 이건 또 뭐야.”
연희가 정신없이 개를 발로 밀어내다가 하늘을 보고 외쳤다. “독수리!”
안개 속에서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들 기 시작했다. 독수리들이었다. 독수리들도 분명히 어떤 주술에 의하여 공격하는 것 같았다. 독수리들의 발톱이 날카롭게 내리 꽂히자 승희와 연희는 금세 몇 군데 상처를 입었다. 현암이 팔에 공력을 넣어 크게 휘둘러서 달려드는 독수리를 후려갈겨 땅에 처박자 독수리는 금방 개들에게 찢겨 깃털 뭉치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독수리들은 굉장히 많았고, 날개가 솟지 않은 이상, 하늘 을 날며 기습적으로 공격을 하는 독수리에 대처할 뾰족한 방법 이 없었다. 더군다나 개들까지 위로 뛰어오르며 발악을 하고 있 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현암이 독한 마음을 먹고 하늘을 향해 월향검을 쏘았다. 월향 은 귀곡성을 울리며 솟구쳐 오르더니 독수리 세 마리를 꿰뚫고, 방향을 바꾸어 또 한 마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월향만으로는 턱 도 없는 일이었다. 독수리들은 까맣게 몰려들어서 하늘을 뒤덮 을 정도였다. 독수리들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개들도 한두 마리씩 돌 위로 기어 올라와 윌리엄스 신부와 현암에게 덤벼들 었다. 이미 모두 몇 군데씩 물리고 할퀸 상처가 있었고, 자칫 이 러다가 정신을 잃고 돌에서 굴러떨어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개들의 이빨 아래서 갈기갈기 조각이 날 것 같았다.
한참 동안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부르는 소리 와 함께 불길이 확 하고 날아들었다. 윌리엄스 신부가 놀라서 기 겁을 했다. 그러나 낯익은 불길을 보자 현암과 승희는 반가운 표 정을 지었다.
“준후가 왔나 봐, 현암 군!”
뒤를 이어 안개를 뚫고 파란색 구체가 하늘을 나는 독수리들 을 맞추어서 떨어뜨렸다. 저것은 현암이나 승희, 연희, 윌리엄스 신부도 처음 보는 수법이었다. 승희가 희한한 듯 중얼거렸다.
“저게 대체 뭐지?”
연희는 미소를 지었다.
“몰라. 하여간 우리를 도와주고 있잖아.”
저쪽에서 준후의 목소리인 듯한 앙칼진 기합 소리가 들리면서 긴 불줄기가 두 가닥 뻗어 나와 현암 일행이 몸을 숨기고 있는 바위 주변을 불로 에워쌌다. 돌 주위에 새카맣게 붙어 있던 들개들은 불기둥이 일자 주술이 풀려 제정신이 돌아온 듯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독수리 떼들도 푸른 구체를 맞고 비틀거리다가 제정신이 든 듯 방향을 잡아 하 나둘 날아갔다.
안개 저편에서 준후와 박 신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다들 괜찮아요?”
“그래. 준후야.”
승희가 박 신부의 우람한 체구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때맞춰 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자네들의 연락을 받고 급히 캐드베리에서 오는 길이라네. 세 크메트의 눈이 아무 반응도 없어서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 닌가 싶어 과속을 좀 했지. 덕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군.”
박신부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들 힘든 일들을 겪었던 것처 럼 보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나 있었 고, 옷들도 찢어지고 더러워진데다 특히 현암은 머리가 깨진 채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저런, 빨리 치료를 해야 할 것 같네.”
박신부가 머리에 난 상처를 보려 하자 현암이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급해요. 저 안쪽에서는 드루이드들과 코제트가 마지막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빨리 가야 해요.”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
“우리가 여기서 지체하는 동안 이미 폭주족의 일부는 코제트 에게 갔을지도 몰라요.”
연희가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현암 일행을 습격한 폭주 족 일당은 삼십 명 정도였고, 애당초 승희가 차 안에서 집어낸 수는 사오십 명이었다. 일부가 현암 일행을 상대하는 동안, 나머 지는 드루이드들 또는 코제트에게 갔을지도 몰랐다.
일행이 걸음을 옮기려는데 들개 떼들을 미처 피하지 못해 전 신이 갈기갈기 찢긴 폭주족들의 시체가 보였다. 연희와 승희는 눈을 돌렸으나 박 신부가 묵념을 올렸고, 준후도 나지막하게 불 호를 읊으면서 합장을 했다.
그때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렸다. 승희가 재빨리 투시를 해 보 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이에요. 윌리엄스 신부님이나 월터 보울 씨의 연락을 받 고 온 모양이에요.”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에 있던 윌리엄스 신부와 월 터보울에게 말했다.
“삼십 분 정도만 경찰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 주십시오. 지금 상황에서 경찰과 드루이드들이 부딪히면 오히려 일을 그르 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윌리엄스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고 월터 보울은 아직까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만 크게 뜨고 의아해하고 있었다. 윌리엄스 신 부가 월터 보울을 잡아끌고는 경찰들 쪽으로 갔다. 가면서 윌리 엄스 신부가 한마디 했다.
“삼십 분입니다. 삼십 분 동안 처리하지 못하면 그때는 경찰이 드루이드들을 덮치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폭주족도 여러 명 남아 있으니 조심하세요.”
일행은 승희가 투시를 읽어 내는 방향으로 안개 속을 뚫고 걸 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승희가 한쪽 방향을 가리키자 준후도 눈 을 감고 집중을 해 보더니 나직한 탄성을 울렸다.
“영기가 짙어요. 산 너머 산이라더니. 이번에는 주술적인 방어가 있는 것 같아요.”
“주술적인 방어라면 어떤 것이지?”
“환영의 진 같아요. 제가 앞장설게요. 절대 놀라시면 안 돼요.”
준후의 인도에 따라 일행은 커다란 돌무더기 주변으로 돌아갔 다. 어두운 안개 속에서 뭔가가 움찔하고 움직이는 듯하자 승희 가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현암이 말했다.
“놀라지 마. 환영이건 아니건, 이쪽으로 덤벼들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없잖아?”
어두운 그림자가 휙 하고 연희의 얼굴 앞을 지나가자 연희는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무서움에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여기저기서 휙휙 스쳐 지나갔으나, 맨 앞 의 준후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현암 과 박 신부도 별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연희와 승희는 그때마다 들개들과 독수리들이 생각나서 섬뜩섬뜩 몸을 움츠리 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눈앞에 숲이 나타났다. 분명 여기는 스톤헨지인데…………. 여기 에는 숲이 없고 잔디로 이루어진 넓은 초원만 있을 뿐인데…………. 일행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준후가 말했다.
“저리로 들어가면 많이 따가울 텐데.”
준후가 뒤를 돌아보면서 웃고는 가시덤불 속으로 성큼 발걸음 을 옮겼다. 박 신부도 뒤를 따랐고, 현암도 안으로 들어갔다. 승 희는 아무래도 두려운 듯 연희를 돌아보았다. 연희도 떨떠름하 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결국 둘은 눈을 감고 동시에 가시 덤불 속으로 발을 옮겼다.
가시덤불을 통과했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가시나 가지에 걸리지 않았다. 느낌조차 없었다.
‘준후가 환영이라고 한 말이 맞기는 맞는가 보네.’
가시덤불을 나오면서 동시에 눈을 뜬 연희와 승희의 앞에 박 신부와 현암, 그리고 준후가 말을 잃은 듯이 멍하니 서 있었다. 희한하게도, 환영의 숲 안은 안개가 전혀 끼어 있지 않았고 나 무도 없었으며 커다란 돌기둥만 몇 개 서 있었다. 그리고 돌기둥을 에워싸듯 일고여덟 명의 희고 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둘러 서 있었다. 그들은 퇴마사 일행이 방어를 뚫고 안으로 들어온 것 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들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들의 옷에는 전번에 현암과 승희가 박물관에서 마주쳤던 영들처럼 룬 문자가 씌어 있었다. 그러나 박 신부와 현암, 그리고 준후가 말 을 잃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드루이드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에 수십 명에 달하는 폭주 족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날카로운 칼에 상처를 입 은 듯, 몸을 흥건히 적신 피는 냇물같이 흘러내렸다. 그 앞에는 몇 명의 폭주족들이 마비에 걸린 것처럼 뻣뻣이 서 있었고, 그들 의 주위를 짧은 흰옷을 입은 자들이 대여섯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칼로 폭주족의 배를 긋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폭주족은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가 배가 그어져서 안의 것 들이 우르르 쏟아진 후에야 몸을 부르르 떨며 감전된 개구리처 럼 땅에 쓰러졌다. 드루이드들은 몸을 파르르 떠는 폭주족의 시 체를 유심히 바라보았고 경련이 멎자 한 명이 손짓을 했다. 그러 자 다른 두 명의 드루이드가 피가 줄줄 흐르는 시체를 들어 시체 더미 속으로 내던졌다. 온통 피에 젖은 손으로 칼을 들고 있던 드루이드는 다음 폭주족에게 다가가 서슴없이 목을 그어 버렸다. “그만둬!”
날카로운 소리를 지른 사람은 준후였고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간 사람은 현암이었다. 박 신부도 몸에서 베케트의 십자가와 함께 오라를 일으키고는 여러 개의 구체를 내쏘며 돌진하였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드루이드들은 몸을 움찔하면서 뒤를 돌아보 았다. 그들의 얼굴은 기다란 후드로 덮여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유하게! 유하게!”
칼질을 하고 시체를 내던지던 짧은 흰옷을 입은 자들이 우르 르 달려 나왔다. 현암은 피하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공력을 모았 다. 연희가 소리쳤다.
“유하게스는 드루이드의 의식을 돕는 심부름꾼에 불과해요! 그들보다 긴 옷의 승려들을!”
현암이 칼을 들고 덮쳐 오는 맨 앞의 놈을 볼링공처럼 그대로 몸으로 튕겨 내면서 공력을 집중한 오른손으로 오성(成)의 공 력을 넣어 배에다 힘껏 꽂아 넣었다. 놈은 양팔을 십자 모양으로 배를 가렸으나, 현암의 주먹이 작렬하자 팔에서 우두둑 하는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뒤로 튕겨 날아갔다. 뒤에서 달려오던 다른 한 놈의 유하게스가 놈과 충돌하면서 뒤로 밀려났다. 평소 사람에게 주술을 쓰지는 않는 준후가 노여움에 불타올라 크게 두 걸음을 방위에 따라 딛고 수인을 맺으면서 소리쳤다.
“땅이여!”
준후의 앞에서 땅이 우지직 소리를 내면서 마치 지진에 의해 갈라지듯이 좌아악 갈라져 나갔다. 땅의 갈라진 틈은 드루이드 들 앞으로 나아가다가 다시 둘로 갈라져서 주위를 빙글 돌아 하 나로 합쳐졌다. 승희는 준후가 엄청난 힘을 쓰고 있음을 느끼고 힘을 밀어 보냈다. 준후의 몸이 움찔하더니 또다시 한 발을 내디 디며 소리쳤다.
“불!”
땅의 갈라진 틈바구니로부터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화산이 폭 발하듯, 땅에서 솟아 나온 불길은 제트기의 배기 화염처럼 힘차 게 드루이드들을 둘러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드루이드 중 한 명이 기다란 소맷자락을 펄럭이자 불길이 팍 소리를 내면서 꺼져 버렸다. 준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엥?”
다른 드루이드들이 한데 모여들어 동시에 소매를 휘두르자 땅 에 냇물처럼 흐르던 폭주족들의 피가 살아 있는 것처럼 솟아 어 지럽게 흩어지더니 퇴마사들에게 날아들었다.
“야아아앗!”
박신부가 고함을 치자 오라가 크게 부풀었다. 박 신부의 몸을 둘러싼 것만큼이나 커다란 오라의 구체가 달려드는 핏방울들과 맞부딪혔다. 허공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핏방울들과 오라의 구체는 한데 엉켜서 산산이 흩어져 버렸고, 현암이 몸을 날려 준 후가 일으킨 불길이 꺼진 틈으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그때까지 손을 쓰지 않고 있던 한 명의 드루이드가 현암을 향하여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현암의 몸이 허공에서 굳은 것처럼 덜컥 정지했다.
“현암 형!”
준후가 수인을 바꿔서 뇌전을 날렸다. 지금 준후에게 저 드루 이드들은 악령이나 저주받을 존재일 뿐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 다. 한 명의 드루이드가 몸을 날려 현암에게 다가가려다가 준후 가 날린 뇌전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자 준후의 불길을 꼈던 드루 이드가 소매를 휘둘렀다.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자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땅에서 미친바람이 일어나고 풀잎들 이 와르르 섞여 날아왔다. 날아오는 풀잎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 아 보이자 박 신부가 앞으로 나섰다. 박 신부의 오라가 뚜렷이 밝아지면서 바람에 날려 오던 풀잎들이 오라에 맞아 팍팍 소리 를 내면서 가루가 되었다.
박 신부는 힘에 겨운 듯 걸음에 힘이 없었다. 그러나 적들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었다가 마비된 현암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몸 을 움직여야 했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드루이드가 바람을 일으 키면서 박 신부의 앞을 막았다. 승희는 털썩 주저앉아 무념무상 의 경지로 안간힘을 다해 셋 모두에게 힘을 보냈다.
“에에에잇!”
준후가 소리를 치면서 양손을 폈다. 준후의 한 손에는 인드라의 뇌전이 지지직 소리를 냈고, 다른 손에는 화신(아그니)의 불길이 시뻘겋게 뭉쳐져 갔다.
“야아아앗!”
앙칼지게 소리치며 달려 나가는 준후의 앞을 드루이드들이 막 았다. 당황하는 것을 보니 이들은 하급의 능력자 같았다. 그러나 수가 많았다.
“투아하 데 다나안! 투아하 데 다나한! 루그스피어!”
줄지어 선 드루이드들은 서로의 어깨를 치면서 입을 모아 소 리쳤다. 그들 중의 맨 앞에 선 자가 허공에 팔을 뻗자 날카로운 번개 같은 것이 창 모양으로 변하더니 준후에게 향했다.
“어쭈, 이것들이!”
준후도 지지 않고 양손에서 뇌전과 아그니의 불길을 동시에 내쏘았다. 세 갈래의 힘이 부딪히자 허공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 쩍하면서 불꽃과 스파크를 동시에 튀겼다. 팔을 뻗어 주술을 내 쏘던 준후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렸다.
“이크, 이런!”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창과 같은 모양의 붉은 번개가 준후에게 날아들었다. 준후는 재빨리 허리에서 호리병박을 꺼냈다. 언제 부터 달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준후는 힘이 밀리자 주술을 흡수 하여 담아두는 힘을 지닌 호리병박을 꺼내 든 것이다. 드루이드 들이 쏘아 낸 붉은 번개는 호리병박 속으로 흘러들었고 준후는 그 충격으로 뒤로 주저앉아 좌악 밀려 나갔다.
박 신부와 지팡이를 든 드루이드는 엄청난 격돌을 벌이고 있 었다. 박 신부의 오라의 빛은 베케트의 십자가의 기도와 합쳐져 현란한 연녹색으로 달아올랐고, 드루이드도 땅으로부터 미친 듯 한 바람과 풀잎들, 그리고 이제는 돌덩어리들까지도 박 신부에 게 마구 쏘아대고 있었다. 박 신부도 지지 않고 오라의 구체를 빗발같이 쏘아댔다. 얻은 지 하루밖에 안 되었고 이제 겨우 세 번째 발휘하는 술수이지만 퍽 능숙해진 듯, 자유롭게 오라 구체 를 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허공에서 두 힘이 충돌하여 돌이며 이파리 같은 것들이 먼지가 되어 두 사람의 뒤로 흩날렸다.
박 신부와 준후, 그리고 전력을 다해 힘을 보내고 있는 승희가 필사적으로 분투하고 있는데 현암은 아직도 드루이드가 내민 손 에 의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현암이 왼손에 차고 있던 월향검도 하필 현암의 손끝이 현암의 몸 쪽을 향하고 있는 바람 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드루이드는 손바닥을 그대로 펼친 채 다른 손으로 단검을 빼 들었다. 연희가 소리치면서 현암 쪽으로 달려갔다.
“현암 씨! 어서 몸을!”
현암은 비록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의식은 멀쩡했다. 지금 이 드루이드가 쓰고 있는 주술은 박물관 안에서 드루이 드의 영들이 사용했던 마비 주술의 일종 같았다. 그러나 위력은 훨씬 강해서 현암이 손끝으로 공력을 모아 몸을 풀려고 해도 제 대로 되지 않았다. 후드로 덮여서 보이지 않는 드루이드의 얼굴 에서 한 줄기 희미한 빛이 번쩍였다. 외눈의 악신 발로르의 힘일 까? 현암은 단검을 빼 드는 놈의 행동을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으 나 그래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연희가 십자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소리쳤다.
“현암 씨를 구해줘!”
십자가 안에 있던 조그마한 염체가 현암의 몸으로 날아들었 다. 염체는 현암의 등을 퍽 하고 쳤으나 몸은 그래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바닥을 펼친 채 드루이드는 음산하게 웃으면서 단검을 허공 에 크게 휘둘렀다. 연희가 급한 김에 돌 하나를 집어 던지자 요 행히 놈의 몸에 맞았다. 놈은 화가 난 듯 현암을 향한 손바닥을 그대로 두고 연희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연희의 몸도 빳빳 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드루이드가 음산한 웃음 소리를 내면서 단검을 휘두르려는데 현암의 왼손이 번쩍 들렸 다. 자극을 주어도 현암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알아낸 듯, 푸 른 염체가 월향검이 꽂혀 있는 현암의 왼손을 들어 올린 것이다.
월향검이 귀곡성을 날카롭게 울리며 기다렸다는 듯이 제비처럼 쏘아져 나갔고, 드루이드의 손목이 번쩍하더니 벌리고 있던 손 이 분리되어 땅에 털썩 떨어졌다.
“으아아악!”
드루이드는 경악하며 단검을 떨어뜨리고 깨끗이 잘려 나간 자 신의 왼쪽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현암이 마비에서 풀려나 자 공력을 모은 오른손 손바닥으로 놈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인 정사정없이 팔성(八成)의 공력을 모은 일격이었다. 놈의 몸이 가 랑잎처럼 허공을 날아서 폭주족의 시체 더미에 처박혔다. 젖혀 진 후드로 드러난 놈의 얼굴, 한쪽 눈이 없는 파리한 안색의 이 먹은 노인네였다.
준후가 영차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무리를 지은 드루이드들 은 자신의 번개를 꼬마가 호리병박으로 받아내자 화가 난 듯 일 제히 고함을 지르며 다시 붉은 창 모양의 번개를 쏘았다. 번개의 힘에 정면으로 맞서기 힘들다는 것을 눈치챈 준후는 머리를 굴 렸다. 준후가 재빨리 호리병박을 드루이드 쪽으로 향하여 허공 에 던지자, 아까 잡아 두었던 붉은 번개가 호리병박에서 튀어 나가 방금 드루이드들이 쏘아 낸 번개와 맞부딪쳤다. 때를 맞춰서 준후는 인드라의 뇌전을 양손에 가득 실어서 공을 던지듯이 드 루이드들에게 쏘았다.
양쪽에서 날아든 루그의 창이 번뜩이는 폭발을 일으키면서 굉음과 함께 소멸되자 드루이드들은 놀라 신음을 흘렸고 준후가 쏜 흰 뇌전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드루이드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악!”
“크악!”
준후의 뇌전은 드루이드들을 맞히지는 않았다. 힘을 한껏 끌 어 올린 뇌전에 직접 맞는다면 즉사하거나 의식을 잃을 수도 있 지만 준후는 그 대신 맨 앞의 드루이드 바로 발밑에 떨어뜨렸다. 그 충격만으로도 놈들은 감전이 된 듯, 거품을 물고 온몸에 경련 을 일으키면서 우르르 쓰러져 버렸다.
박 신부는 고함을 지르면서 드루이드를 밀어붙였다. 처음에는 비슷비슷해 보였지만, 대결이 길어지자 순수한 힘을 지닌 박 신 부 쪽이 유리했다. 박 신부가 앞으로 힘을 쓰면서 전진하자, 맞 서고 있던 드루이드가 휘청하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박신 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쳤다.
“주의 분노!”
박 신부의 오라가 폭발처럼 번져 나가면서 균형을 잃었던 드 루이드의 몸이 뒤로 밀렸다. 놈은 충격을 받은 듯, 아까 현암이 처박아버린 드루이드의 곁에 쓰러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이전에 사교의 무리들과 대적할 때에 비해 많은 일들을 겪고 수련을 해 온 퇴마사 일행의 힘은 훨씬 커져 있었다. 박 신부는 베케트의 십자가를 얻었으며, 준후는 밀교 선도 무속의 힘을 하 나로 엮었고, 현암은 태극기공의 내력 운용에 더욱 능숙해졌다. 자연력을 숭상하던 드루이드의 위력도 놀랄 만한 것이었지만, 퇴마사들의 힘이 그들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남아 있는 유하게스들은 정신을 회복한 현암이 어느새 깨끗하 게 땅에 눕혀 버렸고, 이제 제대로 된 힘으로 서 있는 드루이드는 하나도 없었다. 마비에서 풀려난 몇몇 살아남은 폭주족들은 마치 자신들의 눈으로 본 것이 이 세상의 일이 아닌 것처럼, 맥이 풀려서 다리를 후들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준후가 달려왔고, 박 신부도 오라를 조금 약하게 한 채 폭주족 들의 시체 더미가 있는 곳으로 왔다. 현암은 시체 더미 속에 처 박힌 외눈의 노인에게 걸어갔다. 그 드루이드는 엄청난 타격을 받은 듯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지팡이를 쥔 드 루이드가 박 신부의 오라에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고 넘어져 있 었다. 마비에서 풀려난 연희와 승희도 모였다.
현암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외눈의 드루이드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놈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신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뒤에서 연희가 통역해 주었다.
“믿을 수 없다. 우리를 능가하는 힘을 지닌 자가 있다니. 그러나 켈트인은 굴하지 않는다. 드루이드의 힘은 영원하다.”
외눈의 노인은 입가에 선혈을 흘리며 숨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면서 시체 더미에서 빠져나오려 애썼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로 범벅이 된 모습이 비참해 보였다. 그러나 왼손마저 잘려 피 가 분수처럼 솟는 상황에서는 빠져나오는 일마저도 쉽지 않은 것 같았다. 현암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네 손으로 죽게 한 사람들이다. 더러운가? 아니면 무서운가?”
박신부는 어느새 시체 더미 앞에 서서 양손을 마주하고 기도 를 올리고 있었다. 힘을 많이 쓴 듯 파리해진 얼굴에 한 줄기 눈 물이 흘러내렸고, 뒤에서는 준후도 침울하게 박 신부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현암이 그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지었다.
“얼마나 중요한 일을 꾸몄기에…………. 무슨 거창한 일들을 한다 고 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지?”
외눈의 드루이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박 신부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행동에 어느 정도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었 다.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선한 마음이 든 것일까? 그러나 현암 은 북받쳐 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이런 짓을 했지? 켈트족의 영광 과거의 복수를 위해서?”
외눈의 드루이드가 뭐라고 중얼거렸고 다시 연희가 그 말을 옮겨 주었다.
“말살당한 드루이드의 슬픔은 이보다 더하다네요. 고대의 로 마인, 그리고 모든 외국인을 증오한대요. 그래서 켈트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 열세 명의 제물을……………. 아직 마지막 하나는 선택 하지 못했지만.”
“열세 명? 여기 수없이 죽어 있는 자들은 생명이 아닌가?”
“그들은 단지 길일과 적당한 시간을 택하기 위해 점을 치는 데 에 쓰인 제물일 뿐이래요. 쓰레기들이고.”
“제물?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 아무리 악인이라도 엄연히 사람이다!”
현암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외눈의 드루이드는 헐떡이며 고개 를 숙였다. 현암은 승희와 연희가 눈짓을 하자 화를 조금 가라앉 혔다. 마지막 제물을 바치지 못했다면 놈들의 계획은 이제 완전 히 무산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현암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라틴 계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외국과 연관이 있는 관리들을 희생시켰나? 비비안의 힘을 코제트에게 심어 주려고…….”
연희가 현암의 말을 옮겨 주자 드루이드는 놀란 듯한 얼굴이 되었다. 뒤에서 드루이드의 마음을 살피고 있던 승희가 그 이유 를 한 번에 읽어 냈다.
“어엇! 저자는 멀린의 후예인 에드거…………. 그런데 저자는 비 비안의 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단지 열세 명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힘을 얻어 켈트족의 고대의 힘을 찾으려고, 멀린의 힘을…………..”
“뭐?”
현암도 놀랐고 승희와 연희도 놀랐다. 분명 그들의 판단으로 는 코제트에게 비비안의 주술력을 되살려 주기 위하여 열세 명 의 제물을 바치려 한 것일 터인데. 멀린의 힘을 찾으려는 것이라 니. 그들은 이미 멀린의 힘을 빌려 유령 기사들을 깨워서 캐드베 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연희 씨! 그자에게 유령 기사에 대해서는 알고 있느냐고 물어봐요. 어서!”
연희가 빠르게 말을 하자 외눈의 드루이드의 표정은 더더욱 당혹감을 띠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승희가 채 드루이드가 말 을 하기도 전에 방어를 풀고 있는 놈의 마음을 읽어 내고는 소리 를 질렀다.
“유령 기사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게 뭐죠? 우리가 잘못 짚은 건가요?”
현암을 비롯한 모두는 놀라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드루이 드들이 모든 일을 꾸몄다고 생각했는데.
일행이 멍해진 틈을 타서 한 드루이드가 번개같이 일어나며 지팡이를 내던졌다. 외눈의 드루이드 옆에 죽은 듯 쓰러져 있던 자였다. 현암이 무언가 일이 잘못되는 듯한 느낌을 받고 고함을 질렀다.
“피해!”
날아오는 지팡이를 현암이 주먹으로 맞받아치자 폭탄처럼 작 렬하며 불덩어리가 터져 나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연희와 승희 는 몸을 엎드렸고, 박 신부와 준후마저도 그 기세에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현암은 충격으로 뒤로 날아가 땅에 털썩 쓰러져 버렸다.
잠시 후 격렬한 불기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놀라운 광 경이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박 신부와 대결하던 드루이드가 흰 두건을 뒤로 넘겨서 얼굴을 드러냈다. 짧게 틀어 올린 금발 머리 에 싸늘한 미소를 띤 그 여자는………….
“코제트!”
승희의 마음속으로 갑자기 코제트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보들…………. 너희가 졌다. 모두가 내 손에 놀아난 것이지. 이 외눈박 이 멍청이는 고지식하게 멀린의 힘을 얻어 준다니까 내게 드루이드의 저주의 주술을 일러 주고 켈트족의 영광인지 하는 거지 같은 것을 위해 애써 달라고 했지. 호호호.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다.
코제트라는 여자도 승희 못지않은 투시력과 정신 능력을 지 니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자 죽은 듯이 기 다리며 투시력으로 그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기회를 잡아 기습을 한 것이다. 현암은 마법 지팡이와 부딪히면서 타격을 입고 쓰러 져 있었고, 박 신부와 준후조차도 불기운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 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승희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네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 이 요망하고 지독한………….
호호호. 바보 같은 놈들! 너희는 모두 죽어 마땅하다. 지금 좋은 생각 이 떠올랐어. 마지막 제물로는 여기 에드거를 쓰면 좋을 것 같군. 그러 면 비비안과 멀린의 힘은 나에게로 모아진다. 그리고 멀린의 영으로 브 리튼 전국에서 유령 기사들을 일으킬 것이다. 브리튼은 유령의 땅이 될 것이다. 호호호.
승희는 경악했다. 저 코제트라는 여자는 그야말로 치밀한 술 수를 부려서 이젠 영국 땅 전체를 유령으로 황폐화시키려고 한 다. 그를 위해 드루이드들을 이용했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간계 를 꾸민 것이다.
코제트는 힘을 잃고 꼼짝 못한 채 경악에 차 있는 외눈의 노인 에드거의 머리카락을 재빨리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에드거의 첫 글자는 E였다.
‘현암군, 신부님, 준후야, 어서! 어서!’
승희는 최후의 기력을 모아 세 사람에게 힘을 보냈다. 그러나 현암은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몸을 일으킨 준 후가 멈추라고 소리를 질렀고 박 신부도 오라를 일으키고 있었 다. 그러나 코제트는 날카로운 단검으로 비명을 질러 대는 에드 거의 목을 주저없이 잘라 버렸다.
“으아아악!”
참혹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자 연희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코제트가 재빨리 잘라 낸 에드거의 머리를 허공에 던지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주문을 읊자 에드거 잘린 머리는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었고 시커먼 구름 같은 것이 뭉클거리며 피어나기 시작했다.
“막아!”
박신부가 고함 소리와 함께 오라의 구체를 쏘자 검은 구름들 이 우르르 밀려났고 코제트도 몇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코제트는 계속 주문을 읊었다. 준후가 부적들을 던지자 코제트 가 일으킨 검은 구름 주변에 불덩어리들이 솟구쳐 작렬하면서 코제트의 몸이 붕 떠서 뒤로 넘어갔다. 그럼에도 코제트는 멈추 지 않다가 이내 주문을 다 읊었는지 깔깔거리고 웃었다. 웃음소 리가 울려 퍼지자 박 신부와 준후, 승희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 쳤다. 의식이 완료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안돼!”
준후가 소리를 지르면서 손에서 불덩이를 내뿜었으나 코제트 도 손을 벌리고 검은 구름을 맞받아 쏘았다. 두 개의 기운은 허 공에서 부딪히면서 격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 틈을 놓지 않고 하얀 물체가 귀곡성을 지르며 제비처럼 코제트에게 날아들었다.
“아아악!”
코제트의 날카롭고 긴 비명 소리가 들리자 뭉클거리면서 일어 나던 검은 구름이 주춤했다. 월향검이 날아간 것이다. 승희가 뒤를 돌아보니 현암이 헐떡이며 눈을 부릅뜨고 서서 월향검을 받 아 드는 것이 보였다. 검은 구름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면서 사방을 메웠고, 일행은 갑자기 바람이 심해지자 눈을 뜨지 못하 고 얼굴을 가렸다. 구름 속에서 코제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독한 것들……………. 그러나 별수 없을 것이다. 죽은 자들을 모두 깨우라는 명령은 이미 떨어졌다. 이제는 눈을 크게 뜨고, 브리 튼이 죽은 자들의 나라가 되는 광경을 보게 되리라! 호호호호.”
“이 악랄한! 블랙서클의 마녀!”
현암이 소리를 지르면서 월향검에 검기를 잔뜩 실어 구름 속 으로 던지자 월향의 귀곡성과 비명 소리가 섞여서 울렸다. 박신 부도 오라의 구체를 구름 속으로 쏘았고, 준후도 뇌전을 날렸다. 검은 구름 속에서 빛 같은 것이 번쩍하면서 요란한 폭음이 울리 다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퇴마사들은 이를 악물고 서서히 사라져 가는 구름 속을 살펴보았다. 코제트가 있던 자리에는 몇 방울의 핏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요녀(妖) 코제트가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거기에 떨어진 핏방 울들이 코제트의 것인지 에드거의 잘린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죽은 것 아닐까요?”
준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승희가 정신을 잃고 넘어진 연희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도망쳤어.”
현암은 입술을 악물고 말없이 서 있었고 박 신부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군. 우리는 저들의 마지막 의식을 막지 못했어. 유령 기사들은 계속 나타날 거야.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이…………. 이 일을 어찌한다지?”
일행이 묵묵히 서 있는 사이, 아까 윌리엄스 신부와 약속한 삼 십 분의 시간이 지났는지 안개를 뚫고 경찰들이 다가오는 기척 이 들렸다. 의식이 벌어지던 장소 일대에 둘러쳐진 환영도 사라 져 버렸고, 이곳의 일은 경찰들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았다. 일행 은 그대로 주저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는 슬며시 몸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