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15화 – 가장 논리적인 남자

랜덤 이미지

퇴마록 세계편 2권 15화 – 가장 논리적인 남자


나는 논리적인 사람이다.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일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다 고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세 상의 모든 일에는 엄격한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대로 굴러가는 법이고 거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법칙에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법칙이 아니지 않은가? 모 든 현상은 법칙 내에서만 이해되어야 하고 법칙이라는 것은 영 원불변한 것이며 확고부동한 것이라는 게 나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내가 과학자라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 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보다 약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 지, 무슨 이론에 대해서 특별히 밝다거나 수학을 잘하는 것도 아 니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나는 어디까지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고 반이성적인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생각이 다시 한번 확고해진 것은 얼마 전에 겪었 던 이상한 사건 때문이다.


그 이상한 사건이라는 것은 기실 알고 보면 나의 사고에 있어 서 그다지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자 가장 비합리적인 소산의 하나, 그러니까 내 마음에 들 지 않는 종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요사이 꾸고 있는 악몽이다. 꿈이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실현되지 못하 니까 머릿속으로나마 마음대로 상상해 버리는 일종의 공상 상태 와 흡사하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에게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나는 원망스럽기까지 하 다.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고를 한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 는 내 자신이 밤이 되어 눈을 감고 잠이 들면 쓸데없는 허무맹 랑한 상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 하고 그런 꿈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싫다. 그러한 것은 나는 바라 지 않는다. 정말 싫다.

여하튼 내가 싫어하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계속 이상한 꿈을 꾸고 있다. 도대체 너무도 괴이하고 이상해서 뭐라고 언급하는 것조차 쑥스러운 꿈. 매일 꾸는 꿈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밤이 온다. 나는 어느 때처럼 침대에 누워 있다. 창밖에는 달이 떠 있고 어슴푸레한 기운이 알게 모르게 사방을 둘러싸고 있 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등뼈가 뒤틀리는 듯한 아픔이 전해 온다. 그러면 나는 눈을 감은 채 몸을 더듬어 본다. 무언가 잡힌다. 내 손등에 북실북실한 털이 나 있다. 놀란 나는 눈을 감은 채 얼굴을 더듬어 본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결코 사실일 리가 없다는 것을 내가 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멀쩡하던 얼굴에 털이 수북하게 돋아난다는 것은 비논리적인 것이지. 이성에 반하는 것이야.’ 

그러면 나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 다. 절대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고 애써 다짐하면서 다시 눈을 감는 것이다. 그러나 내 주변에서 점점 더 기분 나쁜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근처에서 자꾸만 괴이한 일이 벌어진다 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는 이성적이기도 하지만 또한 타인을 존 중할 줄 아는 미덕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이웃 사람들과 인 사 나누는 것을 절대 꺼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이 자꾸만 이유 없이 나에 대해 쑥덕거릴 때는 영 기분이 좋지 않다. 당신이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내가 꾸고 있는 꿈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판에, 이웃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털북숭이 괴물의 그림자를 보았다느니, 동네에 기르던 개나 새들이 미친 듯 짖어 대며 가끔 갈기갈 기 찢긴 채 피투성이 사체로 발견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그들에게 “그런 일들이 도대체 나와 어떤 논리적 연관성이 있느냐”라고 최대한 정중하고 합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내가 객 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하여 과학적인 설명을 해 줄라치면, 그들 은 항상 머리가 아프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슬금슬금 피해 버린다.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려 들지도 않고, 합리적으로 증 거를 제시하며 이야기하는 내 말을 무시하다니. 논리적인 면이 라고는 모순에 쓰려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나의 꿈은 틀림없이 머리털이 곤두서도록 비과학적이고 불합 리적인 이웃사람들-동물과 흡사한 그들의 생활 양상이나 에게까지 암암리에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 분명하다. 어차피 그들은 합리적인 면은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들이라, 달빛에 비 친 나무 그림자나 날아가는 쓰레기 봉지만 보아도 유령입네 괴 물입네 하며 소란을 피우는 존재니까. 우습지도 않다. 과학의 힘 으로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인간이 지구 외 행성까지 달이 행성 맞는지 모르겠다.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찾아봐야 할 것이다-진출한 20세기 과학의 시대에 유령이니 괴물이니 하는 소리를 떠들다니 창피하지도 않은가? 하하하.

개나 새는 어차피 이성이나 논리가 없고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일 뿐이다. 짖거나 말거나 죽거나 말거나, 고매한 인간의 이성으로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인간이 해야 할 일들이 너 무 많지 않은가.


그러나 지극히 논리적인 나로서도 카프너 씨를 알게 된 것은 개연성을 찾기 힘든 우연에 의한 것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프너 씨는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는 모두 앞뒤가 맞으며 대상에 대한 훌륭한 논리적 태도와 과학 적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나와 그는 우연히 술집에서 만났지 만ᅳ현재 나의 논리적 수련은 알콜의 화학적 작용을 이길 만큼 의 경지에는 올라 있지 않다. 가일층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오며 그가 나에게 한마디 던진 순간부 터 나는 그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면모를 알 수 있었다. 

“무슨 연구라도 하고 있는 얼굴이로군.”

언뜻 보아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도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더구나 가설을 실제의 행동으로 나타낼 만큼 논리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복잡한 계 산에서 정확한 답이 나오는 것처럼 만족스러운 일이다. 나는 최 대한 합리적으로 대답하려 애썼다.

“어떻게 아셨는지 추론 과정을 일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말을 꺼내 놓고 당황했다. 경험적으로 볼 때, 내가 합리 적인 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웃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대면부터 나에 대한 것을 정확하게 추론해 낼 수 있는 카프너 씨 같은 사람이라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것이라 생각 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곧 사실로 입증되었다.

“우스운 친구로군.”

카프너 씨가 우습다고 한 것은 분명 지적 쾌락을 의미하는 것 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국 나는 물질적인 면술값 계산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성적인 카프너 씨와 더욱 논리적 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이야기는 소위 형이상학 적인 분야로 넘어갔고, 나의 독창적인 견해 얼마나 독창적인 지는 좀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ᅳ에 대해 카프너 씨는 많은 관 심을 보였다.

나의 견해는 간단하다. 인간은 각종의 자연 발생적 단백질 분 자들이 무수한 시간을 거치며 교묘하게 융합됨으로써 만들어진 유기체에 불과하며, 인간의 죽음은 자동차가 고장 나 주저앉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카프너 씨도 그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가 말했다.

“고장 난 자동차는 고치면 다시 움직이지. 그렇다면…. 죽은 인간도 못 걸어 다닐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은 분자 단위의 부속품으로 이루어진 거의 무한에 가까운 – 물 론 무한은 아닐 것이다. 내 계산으로는 0이 스무 개만 늘어서면 될 듯한 단위 같은데 조합을 가진 물건이라 수리하자면 상당한 힘이 들 것이다. 하긴 그 정도로 복잡하니까 창조적이고 논리정연한 생각을 도출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 이야기는 주제를 바꾸어 신과 영혼의 존재로 넘어가게 되었다.

“신은 없습니다. 나약한 자들이나 그런 것을 믿지요. 영혼이요? 나를 그런 바보로 의심하려 하는 시도조차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카프너 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프너 씨만큼 나에게 호의 적인 반응을 보여 준 사람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내 말에 반응을 보인다는 건 그의 두뇌가 적어도, 아니, 최대한 봐주면 내 수준 정도는 발달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카프너 씨는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나에게 물었다.

“자네는 정말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믿지 않는가? 그런 것들이 두렵지 않은가?”

정말이지 솔직히 말해서 그 순간 나는 실망할 뻔했다. 나를 그 렇게밖에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비논리적이기는 하지만 화를 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순수 논리적인 태도 로 고개를 가로저어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카프너 씨는 만면 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프너 씨가 상당히 마음 에 들어 한 것 같다는 인상이 물론 논리적인 것이 아니기에 백퍼센트 믿는 것은 아니지만-나를 흐뭇하게 했다. 아니 흐뭇이라니? 지적인 도취 상태? 차라리 지적인 충족 상태라고 하는 것 이 합리적일 것 같다.

카프너 씨는 대단히 기분이 좋았던지 내 주머니 사정도 고려 하지 않고 연거푸 건배를 청했다. 카프너 씨는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상당히 유망한 건설 회사에서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한 적 이 있는 사람이라 했다. 엔지니어라. 과학자만은 못하지만 그 또 한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요하는 직업이 아니겠는가? 나는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나의 재능을 의 심하는 바는 아니다. 내가 진학 시험에 번번이 떨어진 이유는 시 험관들이 비합리적인 문제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그런 정확 한 지식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는 없지만, 과학적 열의와 사고방 식만은 내 생활의 중심 모토로 삼고 싶으며 여태껏 그렇게 살아 오고 있다. 내가 살아온 과거를 하나하나 되짚어 보아도 어긋난 부분이 발견되지 않는다.

나는 카프너 씨를 존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카프너 씨는 나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며 자신도 나의 태도에 대해 깊은 공 감과 이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고방식을 어떤 일이 있어도 버리지 말라고 웃으면서 점잖게 충고까지 해 주었다. 웃음이 약간 서늘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 또한 지적인 만족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카프너 씨는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작은 책 한 권을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과거에 별로 빛을 보지 못한 어느 유명한 철학자가 자신의 사상을 고대어로 적은 것을 편집해서 수록한 것이네. 자 네는 박식하니까 아스타로트어에 대해서도 정통할 거라는 생각이 드네만, 내 말이 맞는가?”

내가 단 하나 후회하는 것은 솔직하게 아스타로트어를 모른다 고 말하지 않은 점이다. 솔직히 그런 언어가 있는지조차 몰랐지 만 나는 그때 책을 받기만 했을 뿐, 대답을 하지도 않았고 고개 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비합리 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아니다.

“자주 읽고 뜻을 음미하게나. 자네처럼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조금 비과학적인 사고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철학자는 보름달 달빛 아래에서 그 책의 구절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네. 자 네도 읽어 보면 그의 사상이 달과 많은 연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네.”

그래, 나라고 못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모르는 언어라도 어차 피사람이 만들어 내고 생각했던 것이니 읽다 보면 뜻이 전달되 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만은 확실히 동감의 뜻이었으 니 비합리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다-조그마하고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책을 받아 힐끗 보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대화가 조금 더 지속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금발 머리를 한 멋진 아가씨가 카프너 씨를 부르는 바람에 지적 회합은 그것 으로 끝났다. 그 아가씨는 정말 멋지게 생긴 여자였는데 어쩌다 가 카프너 씨 같은 중늙은이와 그리 친밀해졌는지 의구심이 일 었다. 지적인 능력이 매력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나 보다. 카프 너 씨는 여자의 부름에 즉각 몸을 일으키면서 나에게 전화번호 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쾌히 응낙하며 언제든지 연락 해줄 것을 당부했다.


지금 내 앞에는 아스타로트어로 쓰인 철학자의 책이 놓여 있 다. 이미 수십 번이나 훑어봤건만 거기에 나오는 이상한 도형들 은 문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괴이했다. 그나마 각 글자 밑에 발 음 기호가 적혀 있어서 몇 번 읽어 볼 수는 있었다. 보름달 아래 에서도 읽어 보았지만 별다른 감흥을 느끼거나 뜻이 전달되지는 않았다. 기왕이면 뜻까지 독일어로 풀어 놓았으면 이해할 수 있었으련만.

모든 언어는 그 자체의 음에서는 뜻을 찾기가 어렵다. 물론 감 정적인 감정이란 말을 쓰다니 실수!-뉘앙스를 느낄 수는 있 겠지만 합리적인 말의 뜻을 음만 가지고 알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같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에 게 있어서도 그러한 일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결국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보름달 아래에서 예의 그 아스타로트어로 이루어진 글자들을 읽으며 철학자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분에 빠져드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끔 그러고 있는 나를 사람들이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주문을 외우는 것이냐고 나에게 음산한 빈정거림을 던지곤 한다. 그러나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다. 주문은 무슨 놈의 주문이란 말인가? 내가 그 런 허무맹랑한 것을 추종할 만큼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사람 으로 보인단 말인가?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무지와 비논리적인 사고를 증명하기에는 충분하다.

‘주문이라니. 원 세상에!’

나와 비슷한 사고를 지녔던 지고무상한 철학자와 비슷한 행동 을 취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빈정거리다니. 어쨌거나 그 글을 읽으면 가끔 가다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지적 희열의 또 다른 면모가 아닐까 싶다. 어떤 것이냐 하 면, 간혹 주위의 사물들이 붉은빛으로 보인다. 그리고 갑자기 땅 속이나 하늘에서 알 수 없는 소리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 려오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수련이 부족한 탓이다. 원래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한 현상은 아직 남아 있는 감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들이 발산되는 것이라 생 각하고, 싹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논증이 되지 않는 이상 환상 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기로 한 것이다.

나는 아까 털북숭이로 변하는 꿈을 자주 꾼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것과 비슷한 감정의 발로일 것이다. 아마 철학자를 점점 닮아 간 나머지 나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그러한 비감성적인 사 고가 밖으로 뛰쳐나와서 없어지기 전의 최후의 발악 정도에 불과하겠지. 솔직히 말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으슬하기는 하 지만 무섭지는 않다. 논리적으로 무서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러나 불빛 같은 것이 내 주변에서 맴돌 때는 좀 으슬해지는 건 사실이고, 특히 달을 보면 가끔 참을 수 없이 이상한 기분을 느 낀다. 뭐라고 할까? 애절하다고도 할 수 있고 절실하다고도 할 수 있는, 또한 난데없이 밖으로 뛰어나와 마구 달리고도 싶은 그 런 느낌 말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하여튼 그런 식으로 나는 꽤 오랜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인가 한번은 대단히 흉한 꿈을 꾼 적도 있다.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이상하게도 한밤중에 텅 빈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그때도 보름 달이 떠 있었고 무슨 이유에선지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허리 를 숙이고 걸었던 모양이다. 평소의 눈높이에서 반 정도? 아니, 그 이하였던 것 같다. 시야가 낮았다. 갑자기 어떤 사람의 모습 이 보였다. 조금 늙은, 할머니는 채 못 되었고 아주머니라고 하 기에는 나이가 든 여자였는데 그 사람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 서 한쪽 방향, 그러니까 내가 걸어온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 었다. 뭐가 있기에 그럴까 하고 나는 몇 번이나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이상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자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것을 본 듯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내가 이상하게 보인단 말인가? 혹시 내가 예의 털북숭이 모습 인지도 모르지만…………. 아니, 어차피 꿈인데 뭐 어떠랴! 나는 여 자를 돕기 위해 가까이 갔다. 그러나 여자는 내가 다가서자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듯,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내던지고 달 음질치는 것이었다. 정신병으로 인한 발작이나 모종의 정신병적 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여자를 도울 마음으로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다른 기 분도 들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흉악한 일이지만 글 쎄 뭐랄까, 닭구이를 먹을 때 양다리를 잡고 쫙 찢는 것 같은 그 런…………. 여하간 나는 여자의 손목을 잡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내가 손목을 잡자 입에 거품을 물며 발악하듯이 몸을 뒤 틀어 댔다. 물론 닭구이 생각이 나긴 났지만 그렇게 발버둥치는 닭구이를 생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내심 뜨끔했다. 나는 손목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그 여자는 기듯이 굴러서 사라져 버 렸다. 그다음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것도 또한 고약한 꿈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을에 괴물이 나온다는 소문만 무성해졌을 뿐. 하긴, 꿈 때문에 생활이 달라질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차피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꿈속의 일인데, 굳이 달라 진 점을 들자면 그런 꿈을 꾸고 나서부터 식탁에 올라온 닭구이 를 볼 때면 이상하리만치 뇌리에 박혀 있는 그 여자의 얼굴을 떠 올리게 되었고, 무의식적으로 식탁에 올라온 닭구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일까? 나는 그 이후로 닭구이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밝은 보름달이 산마루에 걸쳐서 뜨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때의 전화 가 진짜였는지 아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논리적인 두뇌로 아 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날 정말로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인지 없 었던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가 섞여서 일어났는지는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어쨌든 실제 있었던 일이건 나의 상상이건 흉악한 꿈이었을 뿐이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서 잊히지 않는다. 기억력이 좋은 게 이럴 땐 골치 아프다니까! 나 는 왜 이렇게 머리가 좋은 것일까? 머리가 좋아도 탈이야!

밝게 뜬 보름달을 보니 마음이 뭉클거리며 이상한 감정이 들어서 그 책이나 한번 읽을까 하고 생각하던 참에 카프너 씨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반가웠다. 나의 논리적인 사고를 이해해 주 는 몇 안 되는 지적인 친구에게서 연락을 받는다는 것은 논리적 으로 생각을 해도 기쁜 일이었다. 지적 교류를 기뻐하는 것이니 합리적이지 않은가! 카프너 씨가 말했다.

“자네, 요새 내가 준 책은 잘 읽고 있나?”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실제로도 그랬으니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없다. 물론 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카프너 씨는 웃음이 섞인 말로 물었다.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겠나?”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안 했다기보다는 못했다고 보는 것 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카프너 씨의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하긴 그래.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그래서 말일세. 내가 한 가 지 도움을 주지. 자네 맨 뒤 페이지를 보았나?”

책을 넘겨 보았다. 그 책은 이상한 도형과 함께 발음 기호들이 씌어 있었고, 도형이 대부분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책의 맨 뒤쪽 페이지에 있는 몇 개의 그림만은 발음 기호가 씌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부분까지는 읽지 못하고 있었다. 카프너 씨의 목소리 가 들렸다.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도형들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궁금 하지 않은가? 나도 어제서야 겨우 알아냈지. 마지막 페이지에 씌 어 있는 글자의 발음을 자네한테 가르쳐 주겠네.”

물론 기쁜 일이었다. 카프너 씨의 헌신적이고 호의적인 제의를 거절할 논리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즉시 펜을 꺼내서 카프너 씨가 한 자씩 또박또박 불러 주는 대로 알맞게 적어 넣었다.

“그리고 말일세. 보름달 아래에서 책을 읽게나. 그러면 훨씬 기분이 좋아질 거야. 하하하.”

카프너 씨는 한바탕 껄껄 웃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 글을 읽 은 다음에 기분을 전화로 말해 보라는 이야기인지 말라는 이야 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여태껏 나는 카프너 씨의 전화번호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가 실수하고 있는 것이 아 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카프너 씨의 제의가 여전히 호의적 이라는 생각에 나는 책을 들고 보름달 아래로 갔다. 보름달이 밝 게 비치는 정원에는 마침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나는 카프너 씨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분명히 사실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빛 아 래로 내가 책을 들고 나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머릿속에서는 기억이 또렷하지만 그게 꿈이나 상상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많 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는 바이다. 왜냐하면 나는 평소 밤에 잠 을 자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자정에 임박 한 시간이었고, 그 시간에 내가 침대에 누워서 카프너 씨가 제의 한 대로 보름달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꿈을 꾸고 있었을지도 모 른다는 것이다-나의 추리력은 역시 쓸 만하다 어쨌거나 내 기억- 상상력을 곁들인 터무니없고 불합리한 기억에 의하 면 나는 책을 들고 보름달 아래로 갔다. 그리고 책에 있는 글자 들을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끓어오르 는 듯했다. 중간쯤 읽어 갈 때에 몸에서 뭔가가 윙윙거리며 도는 듯했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 전신에 야릇한 기분이 감돌았다. 뭐라고 할까? 자유롭다고나 할까? 아무한테도 제약을 받지 않 는 느낌이라고 할까? 시속 삼백 킬로로 스포츠카를 몰고 아우토 반을, 그것도 빠르게 질주하는 다른 차들을 더 빠른 속도로 정신 없이 추월해 지나가는 기분 말이다. 나는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내가 차를 몰고 아우토반을 달린 적은 없지만 논리적인 사 고에 근거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넘어가기 바란다 – 마 지막 페이지를 다 읽었을 때 그때의 일을 나는 분명히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흉악한 상상력에 기인한… 아! 이 말 자주 써서 지루하다! 앞으로는 생략하겠다! – 참으로 이상한 일을 겪었던 것이다.

꿈에서만 반복되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지금은 분명 그 것을 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허리가 서서히 굽고 있었다. 손에는 털이 수북히 돋아나고 있었 다. 엉겁결에 얼굴을 만져 보았지만 얼굴에도 털이 수북하게 돋 아나고 귀는 뾰족하게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입술이 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으로 더듬거리며 만져 보았다. 그랬더니 짐 승처럼 길고 날카로운 이빨이 입 주변에 자라나고 있었다. 손으 로 만지고 있는데도 계속 자라나서 커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배는 조금 나왔지만 허리는 날씬해지고 키가 커지면서 등이 약간 굽는 듯한, 그러니까 구부정한 거인의 자세처럼 몸이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안에서는 뭔가가 터질 듯이 끓고 있었다. 달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매력적이었고 정신없이 달려 가서 아무것이라도 붙잡고 산산이 부숴 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 절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질렀 다. 하늘을 보고 길게 소리를 지르자 마치 늑대의 울음 같은 소 리가 들렸다. 으….. 그 끔찍함이여! 그 모습,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조금은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잠시 후 들리지는 않았지만 뭔가가 느껴지는 듯했다. 아 니, 들리진 않았으나 분명히 들렸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 나. 마음속에서 들렸다고 하면 맞을까?

이런 것이었다. 나와 같은 늑대 인간의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 려 퍼졌고,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마음속에 울려왔다.

광장으로 와, 어서!

왜 갑자기 여자의 말소리가 마음속에 울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으려 했다. 그런데 내 마음과 는 무관하게 내 다리는 어느덧 여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내 주변으로 나무며 가로등, 불 꺼진 창들과 인적 없는 건 물들이 휙휙 지나쳐 갔다. 놀라운 속도였다. 내가 평소에 이렇게 달리기를 빨리 할 수 있었다면 어린 시절에 만날 놀림을 받지 않 아도 되었을 것을. 하여튼 빨리 달렸다.

놀라운 속력으로 광장에 들어선 나는 삼 미터 정도의 높이의 담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광장 안으로 들어가자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곳에 카프너 씨가 있는 게 아닌가! 전에 술집에서 언 뜻 보았던 금발 머리의 여자도 있었다. 둘의 주변을 십여 마리의 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카프너 씨와 그 여자를 괴물들의 손아귀에서 구하려 앞으로 발그러니까 당시에는 뒷 발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ᅳ을 내디디려 했으나 그들도 나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늑대 인 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지! 이건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 그래, 이것은 꿈속이고 꿈속에서는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내버려 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 내가 늑대 인간이라면 그 역할을 차분히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 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어차피 비논리적인 일에 빠져든 바 에야 그냥 논리적인 사고로 냉정히 달관하면 되는 것이다. 비논 리적인 일들이 어떤 일을 하던 간에 그게 무슨 상관이냐.

나는 십여 마리의 늑대 인간들에 섞여서 헐떡거리고 있었고 나지막이 으르렁대며 카프너 씨와 금발 머리 여자를 바라보았다. 카프너 씨가 간혹 나지막한 목소리로 금발 머리 여자와 말을 주고받았다. 무슨 말인지 외국어로 하는 것 같아서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가끔 가다가 코제트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 아 여자의 이름이 코제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제트는 냉 정한 목소리로 주위에 둘러선 늑대 인간들에게 말했다.

“조금 있으면 다섯 명의 손님이 온다. 너희에게 주려고 준비한 제물이다. 우리와는 닮지 않은 동양인이다. 명심해라. 절대로 되돌려 보내지 말고 너희 마음대로 처리해라.”

울음소리와 같은 아우성이 사방에 메아리쳤고, 미친 듯이 기 뻐하는 기괴한 고함 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도대체 무슨 일 인지. 꿈이라고 해도 이렇게 기가 막힌 꿈을 꿀 수 있을 줄 몰랐 다. 나는 논리적이기 때문에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공포 영화를 한 편 정도는 봐도 괜찮 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제트라는 여자가 말을 끝내고 카프너 씨가 다시 이상한 휘 파람 소리를 내면서 손을 사방으로 젓자 주위에 모여 있던 십여 마리의 괴물, 그러니까 늑대 인간들은 각각 알맞은 장소로 이동 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나도 명령에 따라 좁다란 스탠드 뒤쪽 에 몸을 숨겼다는 사실이다. 왜 내 몸이 카프너 씨의 휘파람 소 리와 구령에 따랐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꿈속이었으니까 가능하다고 믿으면 그만이겠지. 가끔 비논리적인 면도 쓸모가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도 그때 그 일은 왠지 역겹다. 하여간 그런 자세로 우리는 선물 로 주어진다는 다섯 명의 인간들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분명 기 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바 아니었지만, 자 꾸만 머릿속에 닭구이가 떠올라서 흡족한 기분과 역겨운 기분이 교차했다.

그때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는지 약간 기억이 난다. 갈기갈기 찢어진 닭구이. 아니, 닭구이가 아니었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만 차라리 생닭을 찢는 것이 더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뜨거운 피가 솟구쳐 나오 는, 그리고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키는…………… 아! 그러고 보면 닭 보다 조금 큰 것이………… 그렇지! 조금 큰 것보다는 아주 큰, 그렇 다고 코끼리나 킹콩 같은 것은 너무 크니까 찢기가 힘들 것이고. 사람 정도면 알맞은 크기일 텐데.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선물로 바쳐진 다섯 명의 제물은 합당했 다. 그들은 동양인이라고 했다. 나는 동양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 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긴 그러니까 과거에 히틀러가 유태인들 도 없애 버리려 했던 것 아닌가. 잔인한 일이라고 떠들기는 하지 만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건 별개의 문제이 고, 난 그때 다섯 명의 사람이 들어오길 참으로 기대했던 것 같 다. 지금 생각하면 비논리적이기 그지없지만 아마 다른 십여 명의 늑대 인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서 빨리………….

피가 솟구치고 경련이 일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에 와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그것은 꿈속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속에서 상상으로 벌이는 일이 뭐가 죄가 되겠는가. 안 그런가?

한참 지나자 갑자기 긴장감이 광장을 감싸 안았다. 광장은 우 리마을 한가운데 있었는데 운동장으로도 쓰이는 곳이라 높다 란 담으로 둘러싸여서 아까 내가 뛰어 넘은 담이 바로 그 담이 다-이런 한밤중에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바깥에선 하나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어느덧 광장 한구석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아주 먼 거리라 평소 같으면 거기까지 절대 볼 수 없었 을 텐데, 그때의 내 눈은 무섭게 발달해 있었던 모양이다.

보름달 아래서 천천히 들어오고 있는 사람들. 우리의 목표물 이었다. 맨 앞에 서 있는 청년이 손에 번쩍거리는 것을 들고 있 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뒤를 따 라두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중 한 사람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아멘!

동양인이라 해도 사제복을 입은 사람을 건드린다는 것은 잠시 나마 나를 망설이게………… 아니지! 논리적으로 보면 종교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바로 뒤에 조그만 꼬마아이가 들어왔다. 희고 나풀거 리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느 나라 옷인지는 잘 모르겠다. 희한 하고 편해 보이는 옷이었다. 그 뒤를 따라 보통 키의 여자와 상 당히 키가 크고 머리가 긴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둘 다 상당한 미인인 듯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기에 미인이라 는 거지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다. 가능한 한 빨리 달려들어서 찢어 버리고 싶은 생각만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 었다. 여자 쪽이 좀 더 감촉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꿈속이 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 평상시에 어떻게 내가 그런 생각 을 했겠는가.

나를 비롯한 늑대 인간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몸을 숨기고 그 들이 가까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저쪽에서 카프 너 씨와 코제트라고 했던가, 여하튼 금발 머리 여자가 걸어 나왔 다. 다섯 명의 동양인도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자 두 명 을 가운데 두고 세 명의 남자가 둥글게 섰다. 군대가 진을 치고 방비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빈틈이 없어 보였다. 신부의 몸에 서 푸른빛이 일어나더니 둥그런 막이 생겨 다섯 명 모두를 둘러 쌌다. 꼬마의 손에서는 불길이 번쩍거리더니 전기 같은 것이 감 돌았고 어릴 적에 만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그런 요상한 꿈을 다 꾸게 청년의 손에서도 반짝거리는 것이 길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에 질세라 코제트의 주변에는 검은 구름이 일어나고 있었고, 나의 호프 카프너 씨 주변에선 회색 안개가 감돌고 있었다.

우리는 귀를 곤두세우고 카프너 씨의 휘파람 소리만을 기다렸 다. 그런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저들이 떠들 때마다 긴 머리의 키 큰 여자가 독일어로 통역해 주었다. 그들 과 카프너 씨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멀리 있는 내 귀에도 신기할 정도로 잘 들려왔다. 청각이 평소보다 몇십 배나 발달한 것 같았 다. 물론 꿈속이니까.

“지난번 세크메트의 저주를 한국에 퍼부으려 했던 일 잊지 않고 있다. 분명히 너희 소행이 맞지? 미스터 카프너?”

세크메트? 한국?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러나 카프너 씨는 큰 소리로 웃었다.

“용케 빠져나갔더군. 그러나 너희는 우리 상대가 되지 못해. 겁 없이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게로군. 지금 저 승사자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하나?”

동양인 청년이 카프너 씨의 말에 화가 난 듯 뭐라 소리를 질렀 고, 머리 긴 여자가 그 말을 받아 옮겨 주었다.

“누가 저승사자가 될지는 대봐야 알지. 너희도 오늘은 도망치지 못한다.”

카프너 씨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꼬마가 경고하듯이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으나 내용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카프너 씨의 휘파람 소리를 듣자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몸속에서 끓어올라 총알같이 공중을 날아서 꿈 이라서 가능했겠지만 분명 거의 날고 있었다. 거의 십 미터 이상 을 날았으니까 광장 중앙에 있는 다섯 명을 향해 덮쳐들었기 때문이다. 나뿐이 아니라 부근에 숨어 있던 다른 늑대 인간도 마 찬가지였다. 내가 아무래도 다른 늑대 인간보다는 빨랐던 것 같 다. 난 애당초부터 두 여자들을 점찍었으니까.

몸을 날리는데 눈앞에 뭔가 번쩍하고 푸른빛이 보이더니 쾅 하는 울림과 함께 땅바닥에 나자빠졌다. 날 밀어낸 것은 신부에 게서 뿜어져 나온 알 수 없는 빛이었다. 단순한 빛인 줄 알았는 데 지금 생각해 보니 돌보다도 더 단단했다. 난 화가 나서 손톱 을 곤두세웠다. 놀랍게도 손에서 기다란 손톱이 쭉 빠져나왔다. 내 생각대로 되는 꿈이라………….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다른 늑대 인간들이 손톱을 곤두세워 푸른 막을 잡아 뜯 으려 했다. 옆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검은 구름이 다섯 명의 동양인에게 밀려들고 있었다. 막 안쪽을 언뜻 보니 어느새 꼬마와 청년은 밖으로 뛰어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신부가 여자들을 감싸듯 서서 십자가를 들고 있었으며, 키가 작고 당차 보 이는 여자는 주저앉아 있었다.

뭘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키가 큰 여자는 신부의 등을 맞대고 서서 불안한 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그녀 손에 쥐어진 작은 십자가에서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어딘가 좀 이상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설에 나올 법한 동방의 악마 들이겠지. 파란 막을 쥐어뜯으면서 옆을 보니 청년과 꼬마는 어 느새 늑대 인간들 서넛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사방에서 퍼퍽 소리가 들리고 번쩍번쩍한 것이 휙휙 나돌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공상 과학 영화도 비논 리적이어서 잘 보지는 않았지만 그때 본 광경들은 그런 영화보 다도 훨씬 놀라웠다.

청년은 내가 생각한 동양 사람들처럼 희한한 무술 동작을 취 하지는 않았지만 몸놀림이 무척 빨랐고 특히 오른팔을 잘 이용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본 것도 내 눈과 귀가 무척 밝아졌 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어찌 생생하게 다 볼 수 있으랴. 그러니 이런 것을 기억하는 사실도 내가 꿈을 꾸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좌우간 청년은 신기하게도 오른손 으로 달려드는 늑대 인간들의 발톱과 이빨질을 막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늑대 인간들을 응원했다. 그런데 그놈들은 병신같이 이빨에 힘 하나 없는지 내민 손 하나도 변변히 물지 못하고, 물 었다가 놓고 물었다가 놓고 하기를 반복했다. 개중 약하게 보이 는 놈은 팔을 물기만 해도 충격을 받은 것처럼 뒤로 나자빠지기 일쑤였다.

‘바보 같은 것들’

청년이 입고 있던 검정색 옷은 오른쪽 팔 부분이 너덜너덜해 졌지만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청년은 왼손에 번쩍거리는 것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서 길게 빛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동작을 자세히 살펴보니 청년은 길게 뿜어져 나온 것을 위협 하듯 휘두르기만 할 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모양 도 <스타워즈>에서 보았던 광선검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왜 늑 대 인간에게 휘두르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청년은 당황한 듯 동양인 꼬마와 말을 주고받으면서 늑대 인간을 주먹으로 치거나 손바닥으로 밀어낼 뿐이었다.

동양인은 신비스런 면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 청년의 힘도 대단했다. 나보다 이삼십 센티나 큰, 그러니까 그 청년보다 큰 늑대 인간도 청년의 주먹 한 방이면 저 만치 나가떨어졌다가 시간이 지나서야 으르렁거리며 일어서곤 했다.

꼬마의 경우에 있어선 한결 더 희한한 술수를 부리고 있었다. 한쪽 손에서 무슨 화염 방사기처럼 불을 뿜었다. 그러나 꼬마 역 시 청년과 마찬가지로 늑대 인간을 공격하기 위해 겨냥하는 게 아니라 접근을 하지 못하게만 하는 듯 보였다. 꼬마가 허공에 뿌 린 종잇조각은 공중에서 구형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꼬마를 보호 했다.

늑대 인간이 좌우에서 돌고 있는 종잇조각에 손을 댈라 치면 예외 없이 폭발과 불기둥이 일어나면서 덮쳐들던 늑대 인간들이 저만치 나가떨어지는 것이었다.

꼬마는 계속 불덩어리를 날려서 코제트가 뿜어내는 검은 구 름을 허공에서 맞히고 있었다. 내가 저 동양인과 붙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역시 나는 논리적이어서 덕을 많이 본 다-나는 잠시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다가 주변에 있던 다른 늑 대 인간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신부가 늑 대 인간에게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라틴어였던 것 같았다. 나 도 라틴어는 약간은 알아들을 수 있다- 힘을 쓰자 신부를 둘러 싸고 있던 녹색 빛이 사방으로 세포 분열을 하듯 펑펑 하고 작은 덩어리로 쪼개져 덤벼드는 늑대 인간에게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맞은 늑대 인간은 권투 선수의 주먹을 맞기라도 한 듯 비틀거렸다. 또 주춤거리거나 쓰러지는 늑대 인간도 있었다.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신부를 향해 발톱을 세우 고 공격하려는 순간, 이상한 빛 덩어리가 나한테 덮쳐들어 퍽 하 는 충격과 함께 잠시 눈앞이 아찔해졌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 내가 약해진 것은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꿈속의 게임이고 게임이라면 무조건 이겨야 했다. 

‘게임이건 뭐건 어서 달려가서 저것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려 야지!’

그것이 내 임무이고 목표고 사명인 것이 분명했다. 한참 동안이나 빛 덩어리들과 씨름하고 있는데 한쪽에서 머리 긴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카프너 씨가 회색 구름을 몰고 저쪽에서 다가서고 있었는데 언제 준비했는지 기다란 칼을 들고 있었다. 언뜻 보니 양손으로 휘두르는 굉장히 큰 칼이었는데 그는 칼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신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신난다. 역시 내 친구는 꿈속에서도 믿음직하군!

그러나 카프너 씨가 칼을 휘둘러 세 사람을 반 토막 내려는 찰 나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면서 번쩍거리는 것이 휙 하고 내 앞을 스쳐 갔다. 단지 스쳐 지나간 것이었는데도 서늘 한 기운이 느껴졌다. 작은 단검 같았는데 카프너 씨의 거대한 칼 에 두려운 기색도 음, 칼이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ᅳ 없이 제비처럼 부딪쳤다.

작은 칼과 카프너 씨의 큰 칼이 서로 부딪치자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폭음에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뭔가가 사방으로 흩어지 더니 카프너 씨가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카프 너 씨가 휘두른 커다란 칼은 손잡이만 남기고 완전히 형체가 없 어져 버렸고, 작은 칼은 허공에 떠 있었다. 그 칼도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조금 비실댔다. 아까처럼 빨리 날지는 못하고 있었고 반짝거리는 서늘한 느낌도 많이 약해져 있었다.

저쪽에 있던 청년이 뭐라고 소리치며 손을 뻗자 작은 칼은 청 년에게로 날아갔다. 카프너 씨는 충격이 컸는지 넘어지던 힘을 이기지 못해 데굴데굴 구르다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카프너 씨를 돕기 위해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거의 오미 터 이상 허공을 날아서 카프너 씨 옆으로 성큼 다가갔다.

카프너 씨는 얼굴이 검게 변해서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 었다. 기도를 올리며 파란빛을 뿜어내던 신부가 그 순간 하늘을 쳐다보면서 큰 소리로 무언가를 읊었다. 그러자 신부의 몸을 둘 러싸고 있던 파란빛이 번쩍하면서 색이 진해지더니 사방으로 조 그만 빛 덩어리들이 안개처럼 흩어져 나갔다. 신부의 주변을 둘 러싸고 있던 늑대 인간들이 빛에 휩쓸려 와르르 넘어졌고, 나도 충격을 받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런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었다.

‘내가 지금 왜 카프너 씨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 왜 그들이 지령하는 대로 따라야 하지?’

갑자기 그런 의문이 솟아올랐다.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논리 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나는 자유로운 존재였고, 모든 것을 내 마 음대로 하면 되는 사람이었다. 내가 카프너 씨의 말을 들을 필요 가 없다면 힘들여서 저 동양인들과 싸울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 가 아무것이나 잡고 쥐어뜯으면 그만인데. 그렇다면 손쉬운 상대부터…………. 문득 밑에 쓰러져 있는 카프너 씨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카프너 씨의 얼굴은 검게 질린 채 정신을 잃고 헉헉거 리며 기운이 빠졌는지 신음 소리를 뱉어 내고 있었다.

카프너 씨가 기운이 빠진 듯 손에서 힘을 풀자 그때까지 쥐고 있던 부서진 칼의 손잡이 부분이 아래로 털썩하고 떨어졌다. 칼 의 한쪽 구석에는 발뭉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발뭉? 어디서 들은 이름 같은데. 혹시 전설에 나오던 지크프리트가 쓰던? 미 처 생각을 정리할 사이도 없이 갑자기 주변의 상황이 변하기 시 작했다. 늑대 인간들이 싸우는 것을 멈추고 슬슬 피하는 것이었 다.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먹잇감은 아니었지 만 좌우간 손쉬운 사냥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카프너 씨에게로 뒷 걸음을 쳤다. 내가 선수를 칠까 생각하는 중인데 신부의 뒤에 숨 어 있던 머리 긴 여자가 검은 구름을 휘몰아 싸우고 있는 코제트 를 향하여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너희의 술수는 다 깨졌다. 카프너가 쓰러지고 발뭉 검도 두 동강이 났으니 늑대 인간들은 더 이상 너의 말을 듣지 않을 거야. 코제트! 너도 별수 없다. 이제 항복해라.”

말을 하는 사이에도 귀찮은 늑대 인간에게 해방된 청년과 꼬 마는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코제트를 향해 다가갔지만 코제트는 굽히지 않고 검은 구름을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쪽을 자세히 보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늑대 인간들은 싸워서 이기지 못할 강한 목표보다 자기의 손으로 찢을 수 있는 목표를 찾 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하나둘 카프너 씨에게 다가들었다. 신부 뒤에 있던 머 리 긴 여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고 신부가 쓰러진 카프너 씨를 돌 •아보면서 빛 덩어리들을 쏘았다. 십여 마리의 늑대 인간 중 다섯 마리가 우르르 넘어졌으나, 나머지 다섯 마리는 카프너 씨에게 로 덮쳐들었다. 나는 아직 카프너 씨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남 아 있었는지 그에게 손을 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카프 너 씨의 몸이 늑대 인간들에 의해 갈가리 찢기는 것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고백해야겠다.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 지만ᅳ사실 피곤하고 힘이 없어서 그런 것도 같았다- 기분이 좋고 지금 생각하면 약간 속이 뒤틀리는 듯하지만-스릴 있 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신부는 분명히 카프 너의 적이었는데도 늑대 인간들을 막기 위해 힘을 쏟았다는 사 실이다. 그러나 거리가 멀었고 신부가 쏘아 대는 일격은 넘어졌 던 늑대 인간들이 다시 몸을 일으키는 데 부딪혀서 무산되고 말았다.

카프너 씨는 내가 보는 앞에서 순식간에 갈가리 분해되었다. 카프너 씨가 고통에 찬 비명 소리를 질렀지만 그 비명 소리도 만족에 찬 늑대 인간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나 역시 그 광경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고 헉헉거리며 기 분 좋은 울부짖음을 토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갈가리 찢긴 카프너 씨의 몸 주변에 갑자기 검은색 기류가 맴을 돌며 나타난 것이다. 나를 포함한 늑대 인간들은 알 수 없는 기운에 이상한 낌새를 느 끼고 으르렁거리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 기류는 빙글빙 글 돌면서 이 미터 정도의 크기로 커지더니 카프너 씨의 찢긴 몸 뚱이를 흡수해 버렸다. 비록 꿈이었고 늑대 인간이라는 기분 좋 고 난폭한 껍질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광경만은 무서 웠다. 카프너 씨의 육체가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조리 빨려 들어가자 검은 소용돌이는 어느 순간엔가 사라져 버렸고 저만치 에서 신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블랙서클!”


나는 재미있는 광경이 사라지자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선 또 다시 엄청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년은 아까의 번쩍거리 던 칼을 쓰진 않았지만 재빠른 몸놀림으로 주먹을 휘둘러 댔고, 그럴 때마다 희한하게 코제트가 쏘아 대는 검은 구름들은 그 자체가 무슨 생명체이기라도 한 것처럼 퍽퍽 사라져 버렸다. 청년 은 확실한 걸음걸이로 계속 코제트에게 다가섰다.

청년의 뒤쪽에 있는 꼬마도 여전히 힘이 막강했다. 이상한 종 잇조각들을 구처럼 만들어 조종하는 듯했는데, 종잇조각으로 이 루어진 빙글빙글 도는 커다란 구는 가장 큰 줄기의 검은 구름 과 부딪혀 요란한 불꽃을 튀기면서 앞으로 나가거나 뒤로 밀리 거니 하고 있었다. 두 명이라 그런지 동양인들이 더 유리해 보였 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코제트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 았다. 그들은 어찌 되었든 간에 나나 다른 늑대 인간들이 건드리 기엔 너무 강한 존재들이었다. 둘 중에 하나가 넘어진다면 그때 는 또다시 그 기분 좋은, 뭐랄까? 그러니까 피와 찢어지는 감촉 을…….

그러나 우리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쪽에 잠시 넋을 잃고 있자 다른 늑대 인간들의 고통에 찬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신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신부는 노여운 소리를 지르면서 번쩍거리는 은 십자가를 들고서 늑대 인간들을 후려치 고 있었다. 내 평생 그렇게 사나운 표정을 한 신부는 처음 보았 다. 아무래도 카프너 씨의 죽음에 분노하는 듯했는데, 적이 죽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화를 내다니 배은망덕한 늙은이 다. 좌우간 힘은 좋아서 한 방 맞을 때마다 이상하게 늑대 인간들 은 아무 힘 없이 픽픽 쓰러졌다. 신부가 들고 있는 은 십자가는 언 뜻 보기에도 무시무시 당시에 왜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보였는 지 지금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하게 보였고, 푸른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에 맞은 늑대 인간은 고통스런 비명 소리를 내지르다가 그 자리에서 힘을 잃고 데굴데굴 구르기 일쑤였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오금이 저려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 다. 어느새 신부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나에게 십자가를 들 이밀려는 순간, 옆에 다른 늑대 인간의 기습을 받았다. 그러나 신부는 여유 있게 몸에서 푸른빛을 펼쳐 공격을 막아냈고, 신부 를 공격하던 늑대 인간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져 버렸다.

신부는 하필이면 내 아래턱 부분을 은 십자가로 갈겼다. 화끈 한 충격이 느껴지며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쓰러지는 내 눈에 언뜻 보인 것은 검은 구름을 일으키던 코제트와 동양인들의 싸 움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순간이었다. 꼬마의 종잇조각들로 이루어진 빙글빙글 도는 구체는 코제트의 검은 구름을 거의 다 없애버린 것 같았고, 청년은 코제트에게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까지 다가갔다. 청년이 주먹을 꾹 쥐더니 마지막 일격을 날리 려는 듯 손을 높이 쳐들었다. 바로 그 순간에 깔깔거리는 웃음소 리가 들리더니 코제트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 렸고, 청년과 꼬마는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누가 내 몸을 더듬는 느낌에 눈을 떴다. 눈을 떠 보니 쓰러져 있는 한쪽에서 손을 희한하게 교차시키며 땀을 흘리는 동양인 꼬마의 모습이 보였고, 저만치 신부와 두 명의 여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두 명의 대화는 내가 알아들 을 수 없는 말이라 무슨 뜻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간간이 영어인 듯한난 영어도 약간 한다-단어들은 알아들을 수 있 었는데 코제트라거나 텔레포트라거나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텔레포트?’

자세히는 모르지만 코제트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것은 텔 레포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꿈이지만 참으로 희한하고 재미있는 꿈이었다. 황당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꿈이 깰 때도 되 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누워 있는데, 저만치에 아까 그 청년이 한 사람을 둘러메는 것이 보였다. 걸치고 있던 옷차림을 보니 아 까 내 옆에서 넘어졌던 늑대 인간이 분명했다.

늑대 인간은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이제는 정상적이고 평범 한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청년은 그 늑대, 아니, 사람 을 등에 둘러멘 채 멀어져 갔다. 뭘 어쩌려는 것인지…………. 그리 고 다른 늑대 인간들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사 람의 모습으로 돌아왔겠지? 늑대 인간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동양인 청년이 적당한 곳으로 옮겨 놓았나 보다. 나는 나지막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내 손을 힐끗 보았다. 그런데 내 손은 여전히 털북숭이었다. 목소리, 아니, 울음소리도………….

‘아니, 다른사람은 다 제대로 돌아왔는데 나는 왜 이래?’

속으로 무심코 불평을 하던 내 귀에 눈을 감고 땀을 뻘뻘 흘리 며 손으로 희한한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는 꼬마의 말이 들렸다. 그러나 전혀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단지 눈만 크게 뜨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머 리 긴 여자가 꼬마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불현듯 묘한 생각이 들었다.

‘저 꼬마놈이나 여자를 잡아서…………… 아니, 아니지.’

그런 짓을 시도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카프너 씨와 코제트, 그리고 십여 명의 늑대 인간들이 한꺼번에 덤벼도 상대 가 안 되었는데, 이럴 때는 잠자코 그들의 말에 따르는 것이 합 리적이었다. 머리 긴 여자가 다가오더니 유창한 독일어로 나에 게 꼬마의 말을 옮겨 주었다.

“당신은 왜 이리도 지독히 주문이 걸려서 풀리지 않죠? 도대 체 평상시에 어떻게 산 거냐며 준후가 불평하네요.”

준후 준후가 누구지? 아마도 동양인 꼬마의 이름인가 보다. 이름도 이상하네. 어떻게 그런 이름을 달고 살아갈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해서 늑대 인간이 되는 주문을 익혔는지 가르쳐 달라 는군요. 솔직하게 말하세요. 우리는 당신들과 싸우기는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지금은 당신을 도우려는 거예요. 당신이 죄 없이 이용당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여자의 눈은 굉장히 컸고 시원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여자의 눈을 본 순간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뒤에 있는 눈꼬리가 위로 올라간 여자가 뭐라고 말을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머리 긴 여자는 내가 옛날에 카프너 씨에게 책을 받은 것하며 보름달 아래서 책을 읽었던 일 등등을 소상하게 말해 주었다. 아무한테 도 말하지 않은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속으로 무척 놀랐지 만, 그때는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어차피 꿈속이니 까. 구태여 더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나는 여자가 빼 놓은 몇 가지 사실마저도 말해 주었다.

신부의 십자가에 아래턱을 얻어맞아서인지 내 얼굴, 그러니 까 입 주위만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것 같았다. 발음은 제대로 되었으니까. 그 여자는 다시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꼬마 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꼬마는 고개를 거듭 끄덕거리더니 다짜고짜 주머니를 뒤졌다.

‘아니! 이거 뭐 하는 짓이야?’

꼬마는 카프너 씨가 내게 주었던 책을 꺼냈다. 책을 머리 긴 여자에게 보여 주자 그 여자는 내용을 꼬마에게 가르쳐 주는 듯 했고, 그러자 꼬마는 뭔가 알아낸 듯 무릎을 탁 치더니 새로운 손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배배 꼬이는 것이 우습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으나, 꼬마가 사람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 다. 어쨌거나 꼬마가 몇 번 이상한 짓을 하자 다시 짜르르 하면서 감전된 느낌이 몸에 돌았다. 더불어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한동안 그런 기분에 빠져 있던 내게 점점 기운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기운을 찾자마자 손을 세심히 살펴 보았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렇게 마무리까지 꼼꼼 하게 지어 주는 꿈은 처음 꾸지만 그것 또한 내가 논리적이고 합 리적인 사람이란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느 틈엔가 늑대 인간들을 둘러메고 어디론가로 간 청년이 다가오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머리 긴 여자가 그 말을 통역해서 들려주었다. 통역하는 과정까지 생각하는 것은 번거롭기 때문에 그 동양인 청년과 내가 직접 이야기한 것으로 생각하고 내용을 옮겨 보면 이렇다.

“당신이 평상시 어떻게 지냈던 사람인지 알 것 같군요. 당신은 영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으십니까?”

“절대로 안 믿습니다. 나는 절대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과 학적인 판단에 의거하여 추론을 해내는…………….”

청년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이런 비논 리적인 놈 같으니라고.

“알겠어요. 그래서 당신에게는 주문이 더 지독하게 씌어서 준후의 수법으로도 잘 풀리지 않았군요. 여보세요. 잘 들어 두세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외부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요. 예를 들면 병에 걸리면 면역성이 생 기게 되고 주위의 환경이 나쁘면 거기에 적응하도록 돼 있어요. 당신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말입니다. 이런 영적인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스스로 논리적이라 너무 믿은 나머지 그런 힘을 상실해 버렸어요.” 

지금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약간은 논리적 인 이야기 같긴 한데 근거가 부족하고 정당한 사실성과 논증의 여부가 결핍………….

“물론 세상에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의 사람들은 전혀 겪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무시해선 안 됩니 다. 신경을 지나치게 쓰거나 몰두할 필요는 물론 없겠지만 자기 눈에 보이지 않거나 알지 못한다 해서 그런 일들을 논리나 과학 이라는 미명 아래, 마음대로 단정을 내리고 함부로 평가하는 것 은 오히려 더욱 비논리적인 일이 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 기에 과학이나 논리가 전 세계 아니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글쎄, 논리는 논리이기 때문에 논리이고, 진리는 진리이기 때 문에 진리 아닌가? 어쨌거나 저자는 지독한 궤변론자가 틀림없 군. 나는 어디까지나 합리적이고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사람일 뿐이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몇 마디 했다. 물론 이 친구의 힘이 굉장히 셀 것 같았지만 그 순간만은 한 대 얻어맞더라도 참을 수 없었다.

“궤변을 논하지 맙시다. 당신이 말하는 건 궤변일 뿐이오.” 

내 말이 끝나자 청년은 껄껄껄 웃었다.

“궤변이라구요? 그게 당신이 말하는 논리적인 태도입니까?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궤변이고 억설이라 이거군요. 당 신의 말을 들으니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군요. 물론 당 신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결코 좋아할 순 없을 것 같군요. 아무튼 앞으로는 주의하십시오.”

나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조심하고 말 게 뭐가 있습니까? 이건 꿈입니다. 나는 꿈을 꾸 고 있는 것뿐이고 당신들은 내 꿈속에 나타난 사람들일 뿐이에 요. 이제 난 잠에서 깨고 싶어요. 그만사라져 주시겠어요?”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머리 긴 여자나 꼬마도 이상하게도 우습다는 듯한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청년이 말했다.

“꿈이라구요? 당신은 이게 전부 꿈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이렇게 커다랗게 눈을 뜨고 있는데도요?”

“꿈이라고 생각하고 말구요. 당연하지요!”

꿈이 틀림없다. 꿈속에 있는 존재들이야말로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어서 자신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려는 건 아닐까? 이렇게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취 할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태도이다. 나는 소리쳤다. 

“당신들은 논리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볼 때 말이 되지 않는 행 동을 했고, 나는 그걸 믿을 수 없어요. 내 논리에 지배되지 않는 만큼 당신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겁니다. 아셨어요? 그럼, 나는 다시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겠어요. 안녕. 환영, 아니 신기루님들.” 

말을 마치고 눈을 감으려는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청년은 뒤로 돌아서더니 배를 움켜잡고 껄껄껄 웃어 대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머리 긴 여자나 동양인 꼬마, 저만치에 있는 신부와 머리가 짧고 인상이 날카롭게 생긴 여자도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저작 자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나?

‘저런 비합리적인 것들……………. 나의 논리적이고 고매한 이야기 를 웃음으로 흘려 버려? 에라 이…………..?’

청년이 머리 긴 여자에게 뭐라고 주문하자 그 여자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다만 내가 말한 것만은 절대 잊지 마세요. 자신의 믿음과 같지 않다고 해도 세상에는 다양한 진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구요. 세상에서 가장 논리적이신 선생님.”

청년은 나에게 정중하게 깍듯이 인사를 해 보였다. 뒤쪽에 있 던 꼬마는 이젠 뒤로 넘어갈 듯이 웃고 있었다. 도대체 이건…………. 다 미친놈들이 아닌가? 아니, 합리적으로 말을 해야 했는데. 그 들 중에는 여자도 있었으니까. 좌우간 저작자들이 무슨 짓을 하 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청년이 말했다.

“그러면 꿈에서 깨어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약간 거칠어도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으니 이해하십시오. 그럼.”

꿈에서 깨어나게 해 주겠다더니 놈은 다짜고짜 아래턱에 강펀 치를 날렸고 나는 몸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꿈을 꾼 다음 날 아침, 내 집 앞뜰에서 였다. 전날의 모든 일은 꿈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만은 분 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광장이 아닌 앞뜰에 엎어져 있겠 는가-그 동양 청년이 나를 지고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꿈속 의 인물이었으니까 나는 아마 어젯밤 카프너 씨의 전화를 받 고 보름달 밑에서 책을 보러 나왔다가 무슨 이유에선가 넘어진 것이 분명하다. 넘어지면서 심하게 굴러서 정신을 잃었을 것이 다. 몸이 아직도 욱신거리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간밤에 광장에서 이상한 짐승이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는 후에 들었지만, 그것은 개나 들고양이 들이 그곳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였을 테고………….

그때 내가 꾼 꿈에 대해선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아주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일이었으니까. 너무 비논리적이 기에 나는 그 일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논거에 맞지 않는 일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는 없는 법. 절대 믿을 수 없다.

카프너 씨에게선 그 이후로 연락을 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카프너 씨가 준 책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하여튼 지금까지 내 눈에 띄지 않고 있다-꿈속에서 그 꼬마가 책을 가져갔던 것이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그건 분명히 꿈속에서의 일이니 신뢰할 수 없는 일이고-아마 보름달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가 넘어져 서 의식을 잃는 순간, 동네 도둑고양이들이 책을 물고가 갈기갈기 찢어 버린 것이 틀림없다고 힘겹게 추론해 냈다.

카프너 씨의 지적인 우정의 소산인 그 책을 잃어버렸다는 것 이 가슴이 아프지만, 사고였으니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카프너 씨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 이다. 하도 소식이 없기에 카프너 씨가 옛날에 다녔다던 건설 회 사를 힘들게 찾아가 보았지만 실종되었다는 말만 들었다. 약간 비논리적인 일이 있긴 있었나 보다. 카프너 씨같이 합리적인 사 람이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리는 없는데.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나는 그 일을 깡그리 잊기로 했다.

여태까지 내가 살던 대로 사는 것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더 이상 내가 카프너 씨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동양 청년의 말은 분명 꿈속에서 들려온 것이긴 하지만 어렴 풋이 기억이 난다. 그 친구 말이 맞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 냐고? 그것은 내 논리에서 어긋나니까. 나는 항상 논리적이고 합 리적이고 이 세상에서는 내 말밖에 옳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 청년이 진실을 말하기는 했다. 내가 세상 에서 가장 논리적인 남자라고 한 것 말이다. 그 기억 하나만은 이따금씩 나를 흐뭇하게 만든다. 그 기억 덕분에 내가 이 장황하 고 비논리적인 기억을 글자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꿈속의 일이 었지만 흐뭇하지 않은가? 하하하.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