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22화 – 아라크노이드 7 : 거미의 행동
거미의 행동
한참을 생각한 끝에 현암은 마침내 입을 열어 생각한 것을 이 야기하기 시작했다. 현암의 얼굴이 밝은 것으로 보아 뭔가 단서 를 잡은 모양이었다.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것부터 생각해 봐야 해. 승희의 그림 으로 그 남자의 얼굴 윤곽은 알아냈어. 그리고 프로그래머였다는 것, 또 어느 암 환자에 대해서 아주 뿌리 깊은 복수심을 가지 고 있는 것까지. 이건 내 생각인데, 그 사람이 죽은 지는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 않아. 기껏해야 일 년 미만일 것 같아.”
승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원한령이긴 하지만 여태껏 우리가 상대했던 것처럼 그렇게 강하진 않아. 다만 머리는 훨씬 좋은 것 같아. 그러니까 미셸이 란 남자의 꿈에 나타나 압박해서 이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 프 로그램을 만들었겠지. 아마 꿈속에서 미셸에게 프로그램에 대해 많이 가르쳐 주었을 거야. 내 생각으로는 미셸이란 사람이 프로 그램을 만든 것이 거의 확실해. 또 레오라는 사람은 BBS 운영자 였으니 미셸의 얘기를 듣고 BBS에 프로그램을 올려 주는 역할 을 했을 거고. 그리고 정신이 이상해진 미셸은 레오를 죽였을 거 야. 거미가 먹이를 구하는 것처럼 말야. 아마 거미의 흉내를 내 서 레오를 꽁꽁 묶었을 것이고, 착란을 일으켜서 아무에게나 덤 벼든 거겠지. 거미는 본래 닥치는 대로 먹이를 잡잖아?” “그런데 일 년이란 건 어떻게 나온 거야?”
“원래 죽을 정도의 진단이 내려진 환자라면 말기암이겠지. 병 원도 포기할 정도의 말기암 환자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해 짧으면 삼개월, 길어야 일 년 정도.”
박신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흠, 일리가 있어. 다음은?”
“원한령은 그 암 환자에 대해 조사를 많이 했거나 잘 알고 있 었을뿐더러 입원해 있던 병원의 시스템 구조에도 빠삭한 사람 이었을 겁니다. 바이러스를 만든 것을 보면 그 환자의 진료 기 록 등이 보관되고 있는 컴퓨터가 네트워크와 맞물려 있다는 것 도 자세히 알지 않나 생각됩니다. 때문에 바이러스로 그 네트워크를 파괴시키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바이러 스를 이용해서 암 환자를 해칠 수 있는 것은 그 방법뿐이에요.” “그다음은?”
“이제부터는 발로 뛰어야 합니다. 암 환자를 수용하는 병원을 찾아내는 거죠. 그리고 리스트를 만든 다음, 대용량의 컴퓨터 네 트워크가 있어 외부의 네트워크와 수시로 연결되는 병원이나 센 터 기관을 추려 내는 거예요. 그 기관들을 찾아가서 승희가 그린 그림을 보여 주는 거죠. 그곳에서 근무를 했거나 연관이 많았던 사람들 중에 사망한 사람이 있었는지 말이죠.”
“그건 또 어떻게 생각해 냈지?”
“아무리 프로그래머라 해도 자기와 전혀 관계없는 병원이 어 떤 식으로 컴퓨터 네트워크와 맞물려 있는지, 그 시스템이 외부 와 연결되어 침투가 가능한지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원 한령은 애당초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 면 그곳에 근무했던 사람일 가능성이 높지요. 그렇지 않나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옳아. 일리가 있어.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서 알아보도록 하세.”
일행이 몸을 막 일으키는데 뒤에서 다급한 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큰일 났어요.”
“예? 뭐가요?”
“지금 백신 프로그램의 완성을 위해 틈틈이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중이었는데요.”
“잠깐 잠깐! 그 모니터링 프로그램이란 게 뭐죠?”
“예, 그건 지금 퍼져 나가고 있는 바이러스의 상황을 자동으로 감시할 수 있게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에요. 어떤 목적에선지 모 르겠지만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를 맨 처음 만든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죠. 그런데.”
“그런데요?”
“지금 방금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돌리다가 그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교통국 컴퓨터에 들어간 것을 알았어요.”
“교통국 컴퓨터요? 이거 큰일이군. 모든 열차와 전동차의 운 행에 지장이 심할 텐데. 테제베(TGV)도 물론이고, 자동 제어되 는 신호등도 영향을 받게 될 텐데.”
“흠!”
“엉뚱한 곳으로 바이러스가 번져 나가는군.”
연희가 급히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선 긴급 보도로 테제 베를 비롯한 모든 열차 운행이 컴퓨터 고장으로 중단되었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한사람이 만든 바이러스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하다니…………….”
연희가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나서 혜영이 다시 말했다.
“한 사람이 만들었는지 여러 사람이 같이 만들었는지는 몰라 도 정말 엄청난 프로그램이에요. 저도 이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가능할 줄은 몰랐어요. 이건 일종의 게임과 비슷한데.”
“게임요?”
“예. 일종의 라이프 게임과 비슷한 원리예요. 라이프 게임에서 스스로를 복제하는 패턴이 있는데 그것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이 바이러스는 네트워크가 종적인 관계가 아니라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잠깐잠깐!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 주세요.”
승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현암과 박 신부는 승희에게 그러지 말라고 눈짓을 했으나 혜영은 순순히 승희의 말에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원래 시스템들은 종적인 관계로 되어 있어요. 그러 니까 메인 밑에 서버가 있고, 그 밑에 터미널들이 있는 식이죠. 시스템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일 때는 위에서부터 차근 차근 바이러스를 퇴치해 가면 큰 문제 없어요. 그러나 횡적인 관 계에선 달라요. 모든 컴퓨터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네 트워크상에서 교신을 하게 되죠. 이 바이러스의 특징은 네트워 크상의 구조를 먼저 파악해서 일종의 자동 코드를 생성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네트워크로 되어 있는 컴퓨터들의 상황을 유전자처럼 알아내어 계속 번져 나가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거죠.”
“맙소사! 그럼, 생명을 가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네요.”
“생명까지는 아니지만 충실히 자기 복제를 하는 거죠. 일단 유 전자 코드가 만들어지면 이 바이러스는 놀랍게도 각 시스템에 있는 메모리 속에 자신들의 유전자를 집어넣고, 다른 시스템 여 건을 알아내어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요. 그러니 보통 방법으론 도저히 잡을 수 없어요. 지워도 자꾸자꾸 생겨나니까요.”
“메모리가 장치되어 있는 것은 컴퓨터 본체만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컴퓨터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실지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메모리가 들어 있는 것은 컴퓨터만이 아니랍니다. 컴퓨터 메인 메모리도 중요하지만 비디오 카드에도 별도의 메모리가 들어 있고, 시간을 기록하는 클록에도 메모리가 있어요. 프린터에도 수 메가씩 메모리가 있고, 키보드에도 메모리가 따로 부착되어 있는 종류도 있어요. 또 모든 호스트와 주 변 장치 속에 유전자 코드가 들어갈 수 있고, 어느 일부에서라도 거미의 유전자 코드가 들어 있기만 하다면 그 프로그램은 어디 서든지 살아나게 돼요.”
“그렇지만 유전자 코드란 것이 금방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잖 아요. 사람의 유전자만큼은 아니어도 그 정도 내용을 담고 있으 려면 길이가 엄청날 텐데요.”
“아니에요. 이 유전자 코드란 것은 시스템의 하드웨어 사양과 자기들이 침투할 수 있는 경로만을 기록한 거예요. 그러나 그 하 드웨어의 종류들은 단순히 몇 바이트씩의 기호로만 된 것이고, 상세한 데이터는 엄마 거미가 모조리 가지고 있어요. 따라서 엄 마 거미 프로그램은 그 크기가 굉장히 커질 수밖에 없죠. 이용 가능한 모든 하드웨어의 자료들이 거기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엄마 거미를 죽이면 유전자 코드도 소용이 없어지 는 것 아닙니까?”
“아뇨. 그 때문에 기록들은 삼중 사중으로 중복되어 사방에 분 산된 채 퍼져 있어요. 어느 하나를 파괴한다 해도 다른 곳에서 카피해서 시스템으로 데이터를 옮기기 때문에 정말 잡기가 어려 워요. 이것을 잡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는데.”
“어떤 방법이죠?”
“모든 시스템의 전원을 일시에 차단시키는 거예요. 그다음, 시 스템이 다른 네트워크와 물리지 않도록 독립된 상태에서 하나하 나 잡아가는 방법이죠.”
“아이고 맙소사!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퍼져 있는 네트워 크에 연결된 컴퓨터만 해도 몇만 대는 될 거예요. 그걸 언제 하 나하나씩 잡는단 말이죠?”
“이거 으슬하군. 컴퓨터 안에서 눈에 안 보이게 그런 바이러스 가 설치고 있다니 이건 영보다 더 무섭군요. 근데 혜영 씨가 만든다는 그 백신 프로그램은 상태가 어떻죠?”
“지금 수동식 백신 프로그램은 완성된 상태예요. 그렇지만 이것을 작동시킬 여유조차 없을 것 같네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저도 바이러스를 만들어야겠어요.”
“바이러스를 만든다구요?”
“백혈구 바이러스 같은 거죠. 쉽게 말하면 기존의 바이러스가 있는 시스템을 뚫고 들어가서 그 바이러스를 죽이는 바이러스 말이에요. 바이러스를 죽인 다음엔 스스로 분해해서 자폭하게 되어 있죠.”
“그렇지만 그것을 만들면 또 컴퓨터가…………….”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만든 바이러스는 악성이 아니니까 염려 없어요. 기술적인 것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그건 그렇고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아까 원한령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
“뭔데요?”
“모니터링에서 이상한 게 보였어요. 모니터링 프로그램에서는 현재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퍼져 있는 시스템들의 상태가 나 타나는데, 하나 이상한 점이 있어요.”
“뭐죠?”
“거미 바이러스들은 퍼져 나가긴 하지만 유독 한 군데를 향하여 집중적으로 몰려들고 있어요. 이런 현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이에요. 그 네트워크가 특별히 연결이 잦은 것도 아니거든요. 네 트워크의 연결이 많지 않은 곳이라면 상식적으로 그쪽엔 바이러 스가 적게 퍼져야 해요. 근데 이건 마치 의도한 것처럼 집중적으 로 몰려들고 있고 제가 볼 땐 경악, 아니 공포에 가깝습니다. 프 로그램 코드만으로는 그런 목적을 갖게 할 수 없어요. 바이러스 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희도 알 수 없지요. 어떤 원한 관계에 의해서 원한령의 사 주를 받고 바이러스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크지만, 그렇다고 프로그램 자체가 원한령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어요. 어떻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글쎄요. 전 프로그램에 대 해선 알아도 영에 대해선 알지 못해요. 솔직히 무서워 죽겠구요.” “그건 이해해요. 저희가 있으니 염려 마시고 짚이는 것이 있으 면 말씀해 주세요.”
혜영은 한참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경우로 생각할 수 있지요. 즉 난수 배열 말이에요.”
“난수 배열이요?”
“네.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엔 어떤 경우에나 난수 배열이 들어가요. 랜덤 넘버라고 하는 것인데, 즉 선택을 의미하는 거죠.”
“선택이라구요?”
“예를 들어 제가 거미 바이러스라 생각해 봅시다. 제가 있는 컴퓨터와 연결된 컴퓨터는 여섯 대가 있어요. 1부터 6까지요. 그 랬을 때 어느 컴퓨터에 가장 먼저 침입을 할 것인가는 선택을 해 야 해요. 아무리 창의성 프로그램이라 해도 실제로는 스스로 선 택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부닥칠 경우는 난수를 이용하 도록 프로그래밍을 하지요. 즉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 예요. 즉 1번이 나오면 1번 컴퓨터로 가는 것이고 4번이 나오면 4번 컴퓨터로 가죠. 이것과 비슷한 루틴이 저 바이러스 코드 중 에 있는 것 같더군요. 혹시 그 난수 배열에 그 원한령이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가능할 수 있어요.”
준후가 말했다.
“저도 얼마 전에 실험을 해 봤어요. 어느 잡지에선가 그런 내 용을 본 기억도 나구요. 컴퓨터의 난수 배열에 대해 사람의 정신 력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죠. 해 보니까 내가 마 음먹은 숫자가 난수 배열에서 더 많이 나오게 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바이러스에 깃들어 있다는 원한령이 난수 배열을 계속 조작하여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말 이지? 그렇다면 원한령은 바이러스를 무기 삼아 자신이 원한을 가지고 있는 시스템을 파괴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몰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런데 혜영 씨, 깜박 잊고 물어보지 않았는데 그 바이러스가 집중적으로 모이는 곳이 어디죠?”
“바로 국립 암 연구 센터예요.”
“암 연구 센터?”
현암이 소리를 쳤다.
“틀림없어!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군. 바로 그곳 환자 중에 원한령에게 원한을 산 사람이 있을 거야. 그래서 바이러스는 원 한령의 조종을 받아 그쪽으로 침투를 하는 것이 분명하고, 한시 가 급하군. 혜영 씨 어때요? 지금 그 컴퓨터는 바이러스에게 침 투당해 있는 상태인가요?”
“주변 장치 쪽은 거의 장악되었어요. 그리고 조금 있으면 거미 바이러스가 완전히 장악할 것 같아요. 그러나 신기하게도 꽤 오 래 버티는군요. 유능한 프로그래머가 방어를 해서 침입을 막고 있나 봐요.”
“방어요? 무슨 방어요?”
“시스템은 해커들이나 바이러스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어떤 수단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그걸 방어한다고 표현하죠.”
“거의 전쟁이네.”
“그런데 그곳의 위치는 어디죠?”
“삼사십 분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해요.”
“삼사십 분이라. 이거 서둘러야겠군.”
박신부가 큰 체구를 벌떡 일으켜 재빨리 밖으로 나오면서 소리쳤다.
“다들 같이 가자구. 이런 경험은 처음이지만 어쨌든 그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일행의 행동에 혜영이 얼떨떨한 듯 말했다.
“경찰에 연락을 하는 것이 어떤가요?”
승희가 혜영을 쓸쓸한 눈으로 한번 쳐다보았다.
“경찰에요? 컴퓨터 바이러스 이야기만 나와도 경찰은 골치 아 파할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원한령이 들어 있다는 소리를 해 보세요. 누가 믿어 주나.”
혜영이 살짝 중얼거렸다.
“하긴 저도 전혀 믿어지지 않아요.”
긴 소리를 할 것 없이 일행은 혜영의 집을 나와서 차에 분승해 서 올라탔다. 혜영이 잠시 꾸물거리더니 노트북 컴퓨터 하나를 들고 헐떡거리면서 나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차에 올라탄 채,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몰려가고 있다는 국립 암센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