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3화 –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3 : 런던탑의 고함 소리
런던탑의 고함 소리
윌리엄스 신부에게 별다른 말은 듣지 못했지만 런던탑 부근에 택시가 도착하자 일행은 안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낌새를 알아챈 것은 준후였다. “이상한 비명 소리가 들리는군요. 신음 소리 같기도 하고, 고함소리 같기도 하고………….”
승희가 준후에게 세크메트의 눈을 쥐고 소리를 들어 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크메트의 눈을 승희가 쥐고 준후를 통 해들은 런던탑의 소리를 해석했다.
“주를 믿는 자는 속지 말라. 두 왕은 없는 법이다’ 이런 말이 되풀이되고 있어요. 또 ‘왕이 오실 것이다. 왕이 오실 것이다’라 는 말도 아주 강하게 느껴져요.”
차는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차가 런던탑 주변에 도착하자 경 비병들이 런던탑을 둘러싸고 관광객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있었다. 특히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런던탑 내에 서 가장 유명하고, 무기 박물관이 있는 화이트타워였다. 경비원 들에게 제지당하자 윌리엄스 신부는 입구 근처에서 누군가를 불 렀다. 그 사람은 윌리엄스 신부가 부르는 소리를 듣더니 이쪽으 로 와서는 윌리엄스 신부와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박 신부가 말했다.
“저 사람은 나도 약간 안면이 있는 사람이야. 윌리엄스 신부의 친구이기도 하고 심령과학자이기도 한 사람이지.”
“저 사람도 심령과학자예요?”
“응, 영국 심령학회의 회원이라고 알고 있어. 투시력도 꽤 있 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지. 이름은 월터 보울이라고 하네.” 두 사람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월터 보울이 경비병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자 길을 비켜 주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퇴마사 들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윌리엄스 신부가 나직하게 퇴 마사들에게 말했다.
“지금 안에는 허가 없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답니다. 그야말 로 난리가 났어요.”
“난리라니요? 무슨 난리이지요?”
윌리엄스 신부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곳은 중세와 고대의 무기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습네다.”
“그런데 그 무기들이 어떻게 됐다는 거죠?”
“살아있는 것처럼 날뛰고 있다고 합니다.”
일행은 놀랐다. 무기들이 조종하는 사람 없이 날뛰고 있다는 사실은 강력한 영적 에너지가 깃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 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승희가 눈을 감 고 손가락을 머리에 댄 채 한동안 탑 내부에서 울려오는 소리들 을 읽어 내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 어요. 아니 세 가지, 네 가지…………… 종잡을 수가 없네요.” “뭐라고 하는 소리 같니 승희야?”
“아까 들은 것과 비슷해요. ‘주를 믿는 자는 경계할지어다’라거 나 ‘왕은 둘이 아니다’, ‘왕은 돌아오실 것이다’ 등등, 뭐라고 하는 지 억양도 거세고 뒤죽박죽이어서 내용을 잘 알 수가 없어요.”
이번에는 박 신부가 내부의 기운을 투시하고 있는 준후에게 고개를 돌렸다. 원래 승희는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속이나 말하 는 것, 즉 생각하는 것을 읽어 내는 데에 능했고 준후는 영적인 기운이나 이미 죽은 영의 상태를 알아내는 데 능했다. 준후가 파 악한 탑 내의 기운도 승희가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서너 개의 기운이 얽혀서 싸우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중 한 가지의 기운이 압도적으로 세다고 했다.
“다른 기운들은 모두 그 기운에 눌리고 있네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일행이 그렇게 투시하고 있는 와중에도 런던탑 바깥쪽에는 비 명 소리와 아우성 같은 것이 뒤섞여 몰아치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런던탑으로 모여들었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비병들은 구경꾼을 몰아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짙은 안개는 런던 시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가끔씩 번개가 번쩍번쩍 안개를 뚫고 비쳤다. 비가 쏟아지려는 모양이었다. 윌 리엄스 신부도 나름대로 투시를 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마이 갓…………….”
퇴마사 일행은 런던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두어 명의 부상 자가 상처를 싸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허공에서 휘둘려지는 무 기들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쇼크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박 신부는 그중 한 사람 에게 영어로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그 사람은 더듬거리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으나 말하려는 뜻은 박 신부에게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벽에 걸려 있던 칼이며 도끼 같은 무기들이 허공에 떠서 날아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근처에서 정리를 하고 있던 사람들 에게 상처를 냈어요. 성호를 몇 번이나 그었는데도 무기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요. 이건 악마의 장난…………… 아이고!”
박신부가 현암에게 물었다.
“자넨 어떻게 생각하는가? 월향검처럼 무기들에 혼이 깃들어 서 조종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혼이 깃들었다기보다는, 아마 어떠한 염력이나 초능력으로 조종당해 움직였을 가능성이 많지요. 제가 올라가서 살펴볼 테니 천천히 뒤따라오십시오. 힘이 모자라면 부르겠습니다.”
“아니야. 나도 같이 가야 할 것 같네.”
“제가 제일 날쌔잖아요. 저 정도는 날아와도 피할 수 있어요.” 현암이 재빨리 계단을 뛰어 올라가자 뒤에서 윌리엄스 신부가 외쳤다.
“현암 씨, 무기들을 부수지 마십시오. 그것은 모두 문화재로……..
윌리엄스 신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암은 이미 위층에 도착했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월향 검을 쓸까 생각해 보았지만 공연히 그런 곳에 월향을 쓰고 싶지 않았다. 월향은 길이가 너무 짧고, 검기를 발해서 긴 무기들을 치다가는 모두 다 박살이 나 버릴 것이었다. 보통 무기로 제압하 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무기는 이미 현암 주변에 많았다. 문화재이기는 했지만…………….
“문화재라…… 죄송합니다. 소중한 건지는 알지만 저부터 살고 싶네요. 눈에는 눈, 귀에는 귀, 문화재에는 문화재.”
현암은 중얼거리면서 옆에 세워진 갑옷 입은 기사가 들고 있는 커다란 도끼 창을 빼 들었다.
“잠시, 실례.”
현암은 묵직한 도끼 창을 들고 무기끼리 싸움을 벌이고 있는 듯 챙챙 소리가 나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준후가 현암의 뒤를 따 랐고, 박 신부와 윌리엄스 신부 그리고 월터 보울이 뒤를 따랐 다. 승희는 여자를 무시한다고 좀 삐치기는 했지만 맨 뒤에 쳐져서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현암이 뛰어든 위층에서는 믿기 어려 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비원의 과장대로 박물관 내의 모든 무기가 싸움을 벌이는 것은 아니지만, 편이 갈린 것처럼 대략 십여 개가 허공에 뜬 채 맞부딪히고 있었다. 한 번 부딪힐 때마다 승희가 들었던 그 소리가 났다.
주를 믿는 자는 경계할지어다. 속지 말라. 왕은 둘이 아니다.
꼭 돌아오신다. 왕은 반드시 돌아오신다.
현암 일행이 올라온 것도 모르는 듯 무기들은 허공에서 열심히 부딪히고 있었다.
현암은 기합을 발하며 손에 삼성(三)의 공력을 넣어 도끼 창 을 크게 휘둘렀다. 공력이 깃든 도끼 창과 부딪힌 무기 중 몇 개는 땅에 처박혔고, 몇 개는 허공에서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찾았 다. 현암은 공력을 모아 사자후의 함성을 질렀다. 어떤 힘에 의 해서 조종되고 있는지는 몰라도, 무기들을 조종하는 힘에 충격 을 주기 위해서였다. 어헝 하는 소리가 전시장 내부에 울려 퍼지 자 벽에 걸려 있던 갑옷이며 투구 들이 떨어져 내려 아래쪽 대포 들과 부딪히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밑에서 계단을 올라가던 윌리엄스 신부는 쨍그랑 소리가 더욱 심해지자 찔끔했다.
“아이코, 현암군이 뭘 하는 거죠?”
박신부가 대답했다.
“알 수 없지요. 일단은 맡겨 둡시다. 믿을 수 있는 친구니까요.”
박 신부는 대답하면서 느긋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사자후의 함성이 효력이 있었던 듯, 무기들은 허공에서 툭툭 떨어지거나, 몇은 떨면서 떠 있었다. 잠깐 사이 두어 개의 무기들이 재빨리 나머지의 무기들을 쳐 땅에 떨어뜨렸다. 일단 무기들의 싸우는 소리가 없어지자 괴성도 사라졌다.
준후가 투시를 해 보자 아까 느꼈던 가장 강하고 선한 기운이 지금 허공에 떠 있는 무기들에서 느껴졌다.
“현암 형, 잘됐네요. 저 기운이 아까 얘기한 좋은 편 같다는 기운이에요.”
윌리엄스 신부와 박 신부도 계단을 지나 방에 도달했다. 윌리 엄스 신부는 허공에 떠 있는 무기들을 보자 인상을 찌푸리더니 땅에 있는 무기들로 눈을 돌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박 신부는 만약을 대비해 몸에 기도력을 집중하여 오라 막을 희미하게 폈 다. 그 광경을 보자 갑자기 허공에 떠 있는 무기들이 부르르 떨 더니 박 신부에게 말하는 듯 소리를 냈다. 박 신부는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주의 사도, 주의 사도. 주의 힘을 받은 자가 이 일을 막아야 한다. 모 든 것은 드루이드로부터, 드루이드로부터……………
박 신부의 마음속에 들려오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박 신부는 의아했다. 자신의 몸에서 발하는 기도력을 보고 무기들을 조종 하던 주인이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인 줄은 알 수 있었으나, 그 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정체가 궁금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나는 캔터베리의 대주교, 베케트………….
박 신부의 마음속에 울려오는 소리가 약해지더니 허공에 떠 있 던 무기 하나는 원래 걸려 있었던 벽으로 돌아가고, 다른 하나는 박 신부의 앞에 툭 하고 떨어졌다. 플레일이라고 하는 납추가 달 린 줄이 여러 개인 채찍이었다. 영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받으라…………….
박 신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천천히 손을 뻗어 플레일을 손 에 들었다. 그러자 플레일의 뒷부분에 숨겨져 있던 자그마한 십자가 하나가 분리된 듯 쏙 빠져나왔다. 옆에서 윌리엄스 신부가 말했다.
“그건 전시된 유물인데 왜 박 신부님에게로 가는 겁네까? 허허 허. 사연이 있나본데, 잠시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박신부는 고개를 끄덕하면서 윌리엄스 신부에게 플레일을 넘 겨주었다. 꽤 묵직했고, 한쪽 구석에는 라틴어로 씌어 있었다. ‘주의 명에 의해 주의 권능으로 적을 물리쳐라’라는 단순한 문 구였다. 윌리엄스 신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베케트의 영이 박 신부에게 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을 함부로 내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박 신부는 분리되어 나 온 작은 십자가를 윌리엄스 신부에게 보여 주었고, 윌리엄스 신 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윙크를 했다. 플레일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니 없어진 표도 나지 않을 것이고,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어 서 베케트의 영이 박 신부에게 넘겨준 걸 보면 가지고 있어도 괜 찮지 않겠냐는 의미 같았다.
그때까지 뒤에서 보고만 있던 월터 보울이 앞으로 나섰다. 월 터보울은 땅에 떨어져 있는 무기들을 다시 한번 관찰해 보았고, 현암은 자기가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박 신부, 준후, 승희, 윌리 엄스 신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저쪽에서 월터 보울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방은 비교적 고대의 무기와 갑옷, 그리고 중세 이후의 대 포 등이 진열되어 있는 곳이죠. 벽에 걸려 있는 것은 대부분 기원이 불분명한 시대의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종족이 사용했던 무기들이 구분되어 있는 곳이죠. 켈트족, 색슨인, 노르만인, 데인인…….”
영국 역사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준후는 승희가 월터 보울의 말을 통역해 주는데도 눈을 크게 뜨고만 있었다. 승희가 준후를 위해 간략하게 덧붙였다.
“영국은 원래 여러 종족이 섞여 있는 나라란다. 맨 처음에는 이베리아인이 영국 땅에 있었는데 켈트족이 이베리아인을 거의 전멸시키고 영국을 점령했지. 그다음에 켈트족은 로마인에 의해 정벌당해서 로마화되었고, 그 이후에 색슨족의 침입을 받아 지 금의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에이러 지방으로 밀려났단다. 그 후 에 데인인의 침략이 있었고 다시 노르만인의 정벌이 있었지. 그 래서 지금의 영국은 앵글로색슨 계열이 주종을 이루고 있긴 하 지만, 여러 민족의 혼성체라고 볼 수 있단다.”
다 알 수는 없었으나 승희의 설명에 준후는 영국의 여러 종족 들에 대해서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이 나라도 오랫동안 전 쟁이 끊이질 않았고 여러 종족에게 번갈아 점령당하는 바람에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