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6화 –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6 : 유령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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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2권 6화 –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6 : 유령 기사


유령 기사

“저쪽이에요. 뭔가 느껴져요.”

준후의 말에 박 신부는 월터 보울에게 손짓을 하여 차를 멈추 라는 신호를 보냈다. 원래 짙은 안개 때문에 햇빛조차 잘 보이지 않긴 했지만 시간상 이미 해가 넘어간 뒤였다. 지긋지긋한 안개 때문에 주변의 정황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으나 저만치에서 느 껴지는 영기를 준후는 감지해 냈다.

세 명은 차에서 내려 준후가 가리키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우유 속에 들어가 있는 듯 앞이 보이지 않았고 안개 덩어리가 뭉 클거리며 손에 잡힐 것같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세 사람의 앞으 로 흩어져 갔다. 나지막한 관목과 풀들이 깔린 약간 경사진 비 탈길에 도착했을 때,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영기를 강하게 느 낀 준후가 일행을 정지시켰다.

“쉿!”

모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말발굽 소리였다. 그 소리는 조금 멀어지는 듯하다가 다시 이리로 다가오는지 커지기 시작했 다. 박 신부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십자가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박 신부의 품 안에서 또 하나의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 다. 아까 런던탑 안에서 날아다니는 무기들과 대적했을 때, 베케트의 채찍에서 떨어진 자그마한 십자가에서 나는 느낌 같았다.

어떤 진동이나 울림 같은 것이 십자가에서 울려 나왔다.

준후도 박 신부에게서 이상한 느낌이 전해 오는 것을 깨닫고 시 선을 돌려 보니 박신부가 베케트의 십자가를 꺼내 들고 있었다. 십자가는 저절로 어떤 소리와 같은 떨림을 발했다. 그것을 들 고 있는 박 신부의 기분이 상쾌해졌다. 기도에 빠져든 상태 같았 다. 별로 힘을 쓰지 않는데도 몸 주위에서 오라가 찬연히 빛났 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월터 보울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것은 오라 아닙니까? 정말 대단하시군요. 도대체 어떻게?”

박신부가 속삭였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나저나 저 쪽에서 유령 기사들이 다가오고 있어요. 우리도 저쪽으로 가 볼 까요?”

월터 보울은 여기까지는 전혀 무서움 없이 따라왔으나 막상 기사들의 유령을 직접 대하게 되자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준후의 천진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서는 부끄러웠던지 이내 그쪽으로 발걸음을 바삐 옮기기 시작했다.

준후도 만약을 대비하여 부적 뭉치를 꺼내어 손에 들었고, 박 신부도 미미한 떨림이 전해져 오는 베케트의 십자가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은 십자가를 양손에 꼭 쥐고 걸음을 옮겼다. 십자가를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유령들이 놀라 그냥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언뜻 들어도 꽤 많은 숫자 같았다.

준후가 주머니 속에 있는 세크메트의 눈을 생각해 냈다. 준후 는 승희의 도움을 받을까 하여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쥐었으나 반응이 없었다. 이미 승희는 피곤에 지쳐 일찌감치 곯아떨어져 있었다.

‘지금 이 광경을 승희 누나에게 보여 주고 싶었는데, 뭐, 괜찮겠지.’

준후는 세크메트의 눈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세크메트 의 눈이 편리한 소통 수단이기는 하지만 양쪽 다 그것을 손에 들 고 있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되질 않으니, 다음부터는 소통을 하 는 시간을 정해 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 문제 였다.

준후가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 박 신부에게 말 했다.

“신부님, 제 어깨에 손을 얹으세요. 그러면 신부님도 저들의 소리를 쉽게 들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들의 말이 마음으로만 전 달되는 것이라면 쉬운 일이겠지만, 만약 언어로 전달되는 것이 라면 저 혼자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까요.”

박신부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준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월터 보울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손짓을 했다. 월터 보울은 조심스럽게 준후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섬뜩해하며 손을 떼었다. 놀란 눈빛으로 준후와 몸에서 희미한 오라를 발하고 있는 박 신부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 들고는 준후의 어깨에 다시 손을 얹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드디어 어둑어둑한 가 운데서 거무스레한 형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준후가 부적 하나에 불을 붙이고 몸에 힘을 가하자, 박 신부는 그들이 영적으 로지르고 있는 소리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부르심이다. 모두 잠에서 깨어라! 잠에서 깨어라! 기사들이여, 모두 일어나라!

박 신부는 준후의 몸을 통해서 영적인 소리를 들으며 그 영들에게 소리를 쳤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인가?

말발굽 소리가 잠시 멎더니 조용해졌다. 대열이 그들 앞에 멈 추어 선 듯했다. 그들과 박 신부, 준후, 월터 보울 사이의 안개가 옅어져 갔다. 안개 막으로 둘러싸여 있는 가운데 길이 나 있는 것처럼, 유령 기사들과 일행 사이의 안개만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분명 전설대로 중세의 기사는 아니었다. 철판으로 손가락 끝 까지 싸인 갑옷을 입고 있거나 번쩍이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투구와 각자 필요한 무기를 지니고 있을 뿐이었 다. 현란한 색깔의 깃발들이 달린 창을 든 사람도 있었지만, 대 체적으로 그들의 갑옷은 검은색에 가까운 가슴받이뿐이었고, 팔 이나 다리에는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꽤 두터 워 보이는 짙은 색의 망토로 몸을 감싸고 있었으며 마구(馬具)도 중세의 것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오히려 그들이 걸치고 있는 옷 차림에선 고대의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박신부가 마음속으로 계속 외쳤다. 월터 보울도 박 신부가 마 음속으로 하는 얘기를 준후를 통해서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때 마다 두려운지 몸을 찔끔찔끔 떨었다. 심령술사이고 투시력- 이라기보다는 점술이라는 편이 오히려 맞을 듯했다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생생한 모습을 한 많은 유령들과 맞닥 뜨리는 것은 월터 보울로서는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 신부 는 월터 보울의 영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박신부가 말을 타고 있는 기사들을 향하여 다시 말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다행히도 그들의 소리는 고대어가 아닌 순수한 뜻의 울림으로 전달되어 왔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왕의 기사다. 명예로 서약한 충성스러운 왕의 기사들이다.

어느 왕의 기사냐?

박 신부의 말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선두의 건장한 유령 기사가 답했다.

위대하신 아더 왕의 기사이다.

아더왕이 당신들과 같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왕의 기사 중의 한 명일 뿐, 왕께서 어디 계시는지는 모른다.

그런가? 그런데 그대들은 왜 이곳을 떠도는가?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부름이지? 왕의 부름인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지 마라. 우리가 받은 명령을 지체할 수 없다. 

말을 마친 유령 기사는 앞으로 질주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박 신부는 그들과 더 얘기하기 위해서 급하게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명령인가? 무슨 목적으로 가는 것인가? 왜 죽은 자의 몸으로 모여서 무슨 일을 꾸미려 하는가?

유령기사는 대답하지 않고 말머리를 높이 쳐들었다. 서 있는 일행을 짓밟고 지나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월터 보울이 놀라서 준후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박 신부는 물러서지 않고 몸에서 기도력을 발하여 우우웅 하 는 소리와 함께 오라 막을 전개했다. 묘하게도 박 신부의 손에 쥐고 있던 베케트의 십자가에서 기도와 같은 느낌의 울림이 전 신에 퍼져 갔다. 기도 문구를 읊지 않았는데도 마음먹은 대로 오 라 막이 퍼졌다. 박 신부의 몸에서 퍼진 연녹색의 오라 막이 길 을 막자 다가오던 유령 기사들은 급하게 말머리를 위로 치켜 올 리면서 그 자리에 정지했다.

준후를 통해 유령 기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박 신부에게 들렸다. 

너희는 누구냐? 도대체 왜 우리의 앞길을 막는 것이냐? 당신이 사용 하고 있는 것은 성스러운 주의 힘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사악한 것에 의한 것인가?

박신부가 대답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당신들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어야 할 것이다.

유령기사가 노한 듯 소리를 질렀다.

하늘의 주님은 나의 왕의 주님이시기도 하다. 나는 하늘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겠지만, 지상에서는 주님의 가호를 받은 나의 왕의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나는 가야만 한다.

도대체 무엇을 하러 간단 말인가? 대답을 해 준다면 길을 비켜 줄 수도 있다.

왕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다!

고함과도 같고 비명과도 같은 큰 소리가 울리면서 유령 기사 는 말에 힘껏 박차를 가했다. 놀랍게도 유령 기사가 탄 말은 지 름이 약 삼 미터 정도로 둥글게 뻗쳐 있는 박 신부의 오라 막을 가볍게 뛰어넘었고, 다른 유령 기사들도 박 신부의 오라 막을 뛰 어넘었다. 준후는 유령 기사들이 자신을 뛰어넘자 눈살을 찌푸 리면서 허공에 부적 두 장을 날렸다. 머리 위를 마구 뛰어넘는 것이 기분 나빴기 때문이다. 허공을 날던 부적들은 저절로 불이 붙으면서 맨 뒤에 있던 기사에게 날아들었다. 이것을 본 박 신부 가 다급하게 준후를 말렸다.

“준후야, 적대적인 행위를 하면 안 돼!”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준후가 날려 보낸 두 장의 부적은 기사들에게 날아가지는 않았으나 기사들이 타고 있던 유령의 말 에 맞자 퍼져 없어졌다. 그러자 말들이 진저리를 치면서 그 자리 에 못 박힌 듯 꼼짝을 하지 않았고, 타고 있던 유령 기사들은 당 혹해했다. 선두에 서서 일행을 뛰어넘어 지나쳤던 우두머리가 뒤를 돌아보더니 영적인 고함을 질렀다.

사악한 마법! 너희는 역시 이교도들, 악마의 마법을 쓰는구나! 

준후가 기사가 말하는 뜻을 알아듣고는 화가 나서 외쳤다.

너희와 같지 않다고 모조리 악마냐?

박신부가 더 말을 이으려는 준후의 앞을 막아섰다.

우리의 말에 대답만 해다오. 왕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일인가를…………….

박 신부의 말에 기사와 우두머리는 대답도 않고 차고 있던 칼 을 서서히 빼 들었다. 이상하게도 앞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형체 가 없는 반투명의 유령인데 선두의 유령 기사가 뽑은 칼만은 희 미한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적인 힘이 담겨 있다는 뜻이 었다. 준후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앞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박 신 부의 옷자락을 잡았다.

“신부님, 조심하세요. 저 칼만은 단순한 환영이나 유령의 물건이 아니에요. 주술력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박 신부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고 물었다.

왕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박신부가 소리를 치며 마음속으로 기도성을 발하자, 박 신부 가 손에 들고 있던 베케트의 십자가와 박 신부의 기도력이 묘한 화음을 이루며 오라의 빛이 크게 밝아졌다. 맨 앞의 유령 기사의 우두머리 역시 주술력이 번뜩거리는 칼을 빼 들고 박 신부를 향 하여 달려오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움직이지 않고 침울한 눈빛 으로 기사를 노려보았다.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박 신부의 오라 막의 한 군데가 불룩하게 튀어나오더니 연녹색의 오라가 따로 하나로 뭉쳐서 유령 기사를 향하여 유성같이 날아갔다. 이런 일은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기사는 날아오는 연녹 색의 구체를 보고 놀란 듯 칼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부신 빛이 번쩍함과 동시에 유령 기사는 크게 충격 을 받은 듯 몸을 뒤로 휘청거렸다. 박 신부가 쏘아 보낸 오라의 구체는 사라져 버렸으나 유령 기사가 들고 있는 칼도 그 빛깔이 많이 엷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주술력끼리 부딪히면서 칼이 손 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다른 유령 기사들이 놀란 듯 웅성거렸다. 이러한 일은 지금까지의 박 신부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 다. 단순히 막을 치는 것만이 아니라 오라의 일부를 쏘아 공격도 할 수 있다니. 박 신부는 놀라면서도 내심 기뻤다. 박 신부는 다 시 한번 베케트의 십자가를 꼭 쥐면서 외쳤다.

왕의 영광을 위한다는 말이 대체 무엇이지?

유령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너는 도대체……………

그 유령 기사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서 달려가 기 시작했다. 다른 유령 기사들도 뒤를 따랐다. 준후의 술수에 걸려 말이 움직이지 못하는 두 기사만이 어쩔 줄을 모르고 뒤에 처지게 되었다. 준후가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수인을 두어 번 맺 어 주자 못 박힌 듯 굳어 있던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두 명의 유령 기사는 준후를 힐끗 바라보면서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그중 하나가 박 신부와 준후로부터 거리가 떨어지자 길게 소리쳤다.

왕이 다시 브리튼을 통일할 것이다. 우리의 왕국을 위하여 왕이 돌아오신다!

유령 기사들은 짙은 안개 속으로 꺼지듯이 사라졌다. 조금 더 붙잡아 둘 수도 있었으나 정확한 사정도 알지 못한 채 싸울 필 요는 없다는 생각에 박 신부는 더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준후의 생각도 비슷했다.

뒤로 저만치 떨어져서 이들의 대결을 보고 있던 월터 보울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리면서 다가왔다.

“도대체 그것은 어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어떻게 쓴 것 입니까? 유령보다도 당신들이 더 무섭습니다.”

박 신부는 조용히 오라 막을 거두었고 베케트의 십자가도 품 속으로 집어넣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왕이 다시 영 국을 통일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리고 왕이 돌아온다 니・・・・・・ . 그렇다면 그 왕은 혹시 아더 왕?”

월터 보울이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겠다는 듯 두서없이 몇 마 디 중얼거리다가 박 신부의 말에 동의했다.

“예, 맞는 것 같습니다. 아더 왕이 돌아온다고 믿는 사람은 아 직까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저 유령들은 아더 왕을 받들어 영 국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나타났다는 것입니까? 아더 왕이 그들을 불렀다는 걸까요?”

박신부가 말했다.

“그것까지는 아직 알 수 없지요. 날도 늦었고 우리가 목적했던 바는 이루었으니 현암 군 쪽에서 뭔가 알아낸 것이 있나 알아봅시다. 준후야, 승희와 소통이 되니?”

준후가 세크메트의 눈을 꺼내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었다.

“신부님, 앞으로는 세크메트의 눈으로 통신하는 시간을 정해 야 할 것 같아요.”

박 신부도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어둠이 깔린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간도 몹시 늦었고 장시간 여행을 해서 퍽 피곤한 것 같으니 그만 쉬자꾸나. 보울 씨, 근처에 쉴 만한 숙박 시설이 있습니까?” 

월터 보울이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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