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10화 – 왈라키아의 밤 10 : 비밀
비밀
그라쉬가 안내하는 대로 이반 교수와 현암은 미로 속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현암은 큰 소리로 연희와 승희 를 계속 불러 댔고, 공력이 실린 목소리는 미로 안을 쩌렁쩌렁 하게 울리면서 멀리 퍼져 나갔다. 미로 안에서 사람들을 찾으려 면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적들이 들으면 위치가 노출되겠지만……………. 구석에 앉아서 승희의 이상한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연희가 자신들을 찾고 있는 현암의 목소리를 들었다. 연희는 반 가운 생각에 승희를 툭툭 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승희는 세 크메트의 눈을 잡은 채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은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몸 안에서 이상한 기운이 뻗치고 있었다.
“엇! 승희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이건……”
연희가 말을 잇기도 전에 승희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조금 전까지의 승희가 아니었다. 다행이긴 했지만, 갑자기 태도가 돌 변하자 오히려 걱정스런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승희는 아무 말 도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연희를 쳐다보더니 손짓을 했다.
“가요. 현암 씨가 저쪽으로 가고 있군요.”
연희는 승희의 말투까지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현암 씨라니……. 연희는 승희를 따라갔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 도 발목을 심하게 절뚝거렸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 연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발목을 치료해 주었다고는 해 도 금방 통증이 가라앉을 수 있을까 의아했지만 승희는 틈도 주 지 않고 미로 안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 보니 현암이 그라쉬를 등에 업고 이반 교수와 함께 오는 모습이 연희의 눈에 들어왔다.
“아! 현암 씨, 무사했군요. 그런데 그라쉬는………………”
현암도 연희와 승희의 얼굴을 보자 반가운 얼굴이었다.
“그라쉬는 우리에게 협조하기로 했어요.”
“다행이군요. 승희도 괜찮아진 것 같아요.”
합류한 일행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연희는 이반 교수에게 그라쉬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현암은 승희의 옆모습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승희의 모습은 오히려 평소보다도 태연하고 평안해 보였으나 이상하게도 얼굴이 평상시보다 훨씬 붉어 보였다.
‘램프의 불빛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아까의 충격 때문일까?’
현암은 요리조리 생각을 해 보았지만 간신히 제정신으로 돌아 온 승희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등 뒤에서는 그라쉬가 낮은 목 소리로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다.
“왼쪽. 그리고 그다음에서는 오른쪽…….”
이반 교수가 앞장서 그라쉬의 지시대로 방향을 잡았고, 현암 과 승희, 그리고 연희가 뒤를 따라갔다.
준후가 기합 소리와 함께 손을 휘젓자 맹렬한 바람의 기운 이 일어났다. 흡혈귀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몰아내려면 바람 의 기운을 쓰는 것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윌리엄스 신부를 필 두로 한 다른 흡혈귀들도 그에 질세라 고함을 치면서 입에서 계 속 썩은 냄새를 내뿜고 있었으나, 준후가 뿜어내는 바람에 산산히 흩어져 버렸다. 흡혈귀들이 준후에게 밀리는 것을 보고는 코 제트가 또다시 소리를 지르자 토굴의 반대쪽 통로에서 사람들이 와르르 몰려나왔다. 흡혈귀 같지는 않았지만 코제트에게 길들여 진 사람들인 듯했다. 역시 정상적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저마 다 몽둥이며 농기구 같은 것을 하나씩 들고 나와서 준후에게로 뛰어가는 모습이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박 신부는 코제트와 대적하면서 그 모습을 보고 소리를 쳤다.
“준후야! 저건 마을 사람들이야!”
준후는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 강력한 힘을 받아서인지 몸 안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몸이 감당하지 못하니 힘을 바깥으로 뿜 어내야 했다.
‘이럴 수가! 승희 누나도 이렇게 큰 힘을 보내 준 적은 없었는 데…………. 그것도 직접 주는 것이 아니고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서 라니…………. 이 세크메트의 눈에 이런 능력까지 있었단 말인가?’
준후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마을 사람들을 향하여 바람의 기운을 내뿜었다. 사람들은 한쪽으로 몰려 와르르 넘어 졌으나 금방 일어나 준후에게로 다시 다가왔다. 사람들은 한결 같이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한 눈에 초점 없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코제트의 술수로 최면 상태에 빠져 있구나. 저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묶어 둘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준후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축축하게 젖은 돌 천장을 보고 퍼 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 이 정도로 기운이 충만하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분석술이다!’
분석술은 밀교의 술수는 아니다. 과거에 도가 계열인 허허자에게서 부적술을 배우면서 같이 배웠던 술수. 돌을 부스러지게 만드는 희한한 종류의 술수라서 그동안 특별히 써먹을 일이 없 었다. 힘의 소모가 심한 술수였지만 지금 상태로 봐서는 가능할 지도 몰랐다. 준후는 발을 구름과 동시에 바람의 기운을 내뿜어 서 집요하게 달려드는 흡혈귀들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세워 넘어 뜨리고는, 달려오는 마을 사람들을 향하여 회오리바람의 기운 을 내뿜었다. 사람들이 좁은 통로 저쪽으로 밀려서 와그르르 넘어지자 준후는 손에 수인을 짚으면서 천장을 향하여 희뿌연 기 운을 내쏘았다. 그러자 천장의 돌들이 금세라도 푸석푸석해져서 바스라질 것 같았다. 그쪽을 향해 강렬한 뇌전 한 방을 더 쏘자 천장의 돌들이 모래알처럼 바스러지더니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 에 통로가 막혀 버렸다. 위쪽으로 공간이 조금 남아 사람들의 얼 굴은 보였지만 그 틈 사이로 헤집고 들어오기는 힘들 것 같았다. 저편에서 농기구로 돌 부스러기를 파헤치려고 애를 쓰는 것 같 았지만, 한참은 버틸 수 있을 듯 보였다.
‘야! 이것도 되는구나. 힘만 있으면! 헤헤헤……..
준후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흡혈귀를 향하여 몸을 돌렸다. 박 신부는 공간 이동을 해 가면서 연신 자신을 후려치고 있는 코제트에게 별다른 반격을 가하지 않고 최대한 몸을 웅크려 방 어 자세를 취한 채 힘을 아끼고 있었다. 공간 이동술만 막을 수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코제트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코제트의 술수가 정말 저 반지에서 나오는 것일까?’
코제트가 휘둘러 대는 채찍은 장벽처럼 박 신부의 앞을 가리 고 있어서 그리로 접근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쩐다? 준후도 흡혈귀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박 신부는 코제트의 공격을 튕겨 내며 준후에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준후야! 현암군을 불러 봐! 현암 군이 있어야 될 것 같아!”
준후는 박 신부의 말을 듣고 양손을 교차시키면서 쓰고 있던 수인을 한 손으로만 돌리고 한 손으로 세크메트의 눈을 꺼내서 손에 쥐었다. 그러나 세크메트의 눈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고! 이런 계속 좀 들고 있을 것이지.”
그때 토굴의 한 통로에서 사람들이 와르르 몰려 들어왔다. 준후가 쳐다보고는 반가움에 소리를 질렀다.
“현암 형! 승희 누나! 연희 누나! 왔군요!”
코제트는 현암과 일행이 토굴 안으로 밀려드는 것을 보고 놀 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더군다나 현암의 등 뒤에 있는 그라쉬를 보고는 분노의 고함을 질러 댔다. 연희가 현암의 뒤에 숨듯이 서 서 현암에게 말했다.
“그라쉬를 보고 욕하고 있어요. 왜 이들을 도와서 여기까지 끌고 온 거냐고요.”
그라쉬는 지지 않고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코제트를 향하여 뭐라고 소리를 질러 댔다. 그라쉬의 말이 너무 빨라서 연희조차 도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승희가 평소 같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 저 여자를 좋아했나 봐.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 주려 했지. 그것이 악한 짓이라 해도.”
“그런데 그렇다면 왜 주술에?”
“저 사람은 원하지 않았지만 코제트의 술수에 동조해서 쉽게 주술에 걸린 거야. 뭐든 해 주고 싶었기에 받아들였고 그다음부 터는 제정신도 아니었던 거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악한 짓인 걸 알면서도…….”
승희는 이상하게 현암에게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그게 말야, 정말 좋아하면 누구나 그렇게 되는 거야. 목숨도 걸 정도니까.”
“아니, 그래도….”
현암이 뭐라고 하려 하자 승희가 고개를 돌린 채 언성을 높여 말했다. 화난 목소리 같았다.
“그랬는데 아까 이쪽과 싸우면서 본래의 정신을 되찾게 되었 어. 게다가 친구가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좋아하던 감정이 증오로 바뀐 거야.”
현암은 승희가 어떻게 저런 것을 세세히 다 알고 설명해 주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미르챠, 그라쉬와 싸울 때 승희는 곁에 있 지도 않았는데, 투시력으로 그라쉬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지금 승희는 자신을 보고 현암 군이라고 하지 않고, 이쪽이라고 하고 있다. 난데없이 이쪽은 뭐야? 승희의 말투가 왜 이렇게 바뀌었 지? 고개는 왜 돌리고, 뺨은 저리 붉게 변해 있는 걸까? 맞았나? 한쪽에 서 있던 이반 교수가 준후 쪽으로 달려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윌리엄스 신부님. 그런데 어떻게 흡혈귀, 흡혈귀의 모 습으로…………….”
준후가 코제트의 술수 때문에 변해 버렸다고 외쳤고, 연희가 그 내용을 들려주었다. 이반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으뜸가는 흡혈귀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현암과 내가 잡은 것은 진짜 흡혈귀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현암의 등에서 그라쉬가 펄쩍 뛰어내리더니 몸을 꿈틀거리면 서 코제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라쉬는 화난 듯 뭐라고 고함 을 지르다가 다시 울먹이더니 뭔가 간곡히 바라는 듯한 표정으 로 코제트에게 기어 갔다. 코제트는 그런 모습을 보고 박 신부 를 공격하던 것도 잊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순간 숨 막히 는 정적이 흘렀고 아무도 상대를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 가 코제트와 그라쉬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쳐다보고 있었다. 연희가 뒤에서 현암에게 속삭였다.
“뭔지는 모르지만 저 그라쉬라는 사람도 정말 불쌍해요. 어쩌다가 코제트를 좋아하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순순히 술수에 말려든 모양이군요.”
“지금 그라쉬가 뭐라고 하고 있지요?”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주었는데도 왜 그러는 거냐고요. 처음 보았을 때처럼 한 번 웃어 준다면, 한 번 웃어만 준다면.”
그라쉬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연희가 현암과 일행에게 말해 주었다.
“모든 걸 해 줄 수 있었는데 왜 그랬느냐고. 자신은 생전 처음 관심이라는 것을 받아 보았고 코제트가 아무리 나쁘고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고 해도 뭐든지 해 줄 수가 있대요. 그래서 이곳에 머물기를 원했던 것이고 그녀를 도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기까 지……. 자신은 코제트를 사랑하고 있지만 코제트가 자신을 좋 아해 주기까지 바라지는 않는다고. 다만 한 번이라도 예전에 보여 주었던 그런 웃음, 미소를…………….”
현암은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코제트가 애당초에 이 마을을 본거지로 삼게 된 계기는 코제트가 그라쉬에게 친밀 한 태도를 보여 준 것이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코제트 정도 되는 주술사라면 그러지 않고서도 자신의 술수로 이곳을 손아귀에 넣 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모든 것이 애초부터 코제트의 계획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눈치만 비상하게 발달되고 비뚤어진 심정을 가진 그라쉬의 마음을 저토록 풀리게 한 것이 과연 면밀한 계획만으로 가능했을까? 현암은 고개를 가 로저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악의 화신이 되어 버린 코제트의 마음 한구석에도 따뜻한 마음은 남아 있었던 것인가? 역시 아니 다. 그랬다면 장애인들을 비참하게 흡혈귀로 만들어 버리는 짓 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라쉬가 처음부터 속고 있었 다는 말인가? 도대체 분간이 되지 않았다.
코제트는 그라쉬의 말을 듣다가 허공에 대고 깔깔깔 큰 소리 로 웃고는 매서운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저주 섞 인 을씨년스러운 말은 직접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의미가 전달되었다.
호호호, 그래. 너희는 모두 나를 악마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래, 나는 악마고 마녀다. 그런 나에게 무슨 따뜻한 심정이라도 기대하고 있단 말 인가? 나에게 그런 것은 없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가지려고 해도 너희가 나를 가질 수 없게 몰아붙였지. 그래. 나는 그런 것은 가지고 있 지 못한 악마고 마귀다. 그러니………….
코제트는 잠시 헐떡거리더니 사나운 얼굴이 되었다. 몸 주위 에서 시커먼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났다.
그러니・・・・・・ 죽어라.
코제트가 휘감아 돌린 채찍은 애처로운 눈길로 코제트를 바라보고 있던 그라쉬를 향해 날아갔다. 현암과 박 신부가 손쓸 사이도 없이 코제트는 그라쉬를 채찍으로 휘감아서 허공에다 내던져 버렸다. 그라쉬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다가 천 장에 부딪히고 한쪽 구석에 머리를 처박혔다.
“헉! 저럴 수가…..”
“아니, 저런!”
현암이 이를 악물었고 박 신부도 짙은 신음 소리를 냈다. 연 희는 눈을 가리고 있었고, 승희만이 아무 표정 없이 담담하게 코 제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나는……
코제트의 말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그래,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나는 힘을 얻었어. 증오, 사람들의 증오 때문에 나는…..
현암이 서서히 월향검을 빼 들었고 박 신부도 기도력을 집중 하여 오라를 크게 펼쳤다. 그런데 갑자기 승희가 앞으로 뚜벅뚜 벅 걸어 나갔다. 승희라면 으레 뒤에서 힘을 전달해 주고 싸움에 는 직접 가담하지 않는다. 그런 승희가 돌연히 앞으로 걸어 나가자 현암과 박 신부는 놀라서 주춤했다. 승희는 평소답지 않은 이 상한 목소리로 코제트에게 말했다.
“너에 대해서 알고 있다. 너의 그 증오라는 것. 그것이 무엇 때문에 비롯되었고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코제트는 살기 등등한 눈으로 승희를 쳐다보더니 가소롭다는 듯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아바타라(Avatara, 化身)……. 그 정도의 신력(神)으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것도 몸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것을………. 너는 마음을 짚어 내는 능력이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내 마음속도 짚어 낼 수 있겠군. 그래, 네가 일전에 아스타로트의 방어를 깨부순 것을 잊고 있었군.
현암은 입술을 깨물었다. 승희의 몸 안에 있던 애염명왕의 힘 이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아까 반착란 상 태에 빠져 있던 승희가 조용해진 것이며, 얼굴이 붉게 변한 것, 말투가 달라진 것도 이상했다. 애염명왕, 붉은 몸을 가진 신!
“다 볼 수 있다. 너의 어린 시절…………. 너는 금발 머리의 여자 아이를 무서워하지? 그리고 불을 두려워하지?”
“그만!”
코제트가 소리를 쳤으나 승희는 조금도 막힘 없이 이상한 목 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장애인들에게 잠시나마 따뜻한 마음을 보였다는 것, 그것 또한 너의 위선이었어. 너는 어렸을 적에 타고난 이상한 능력 때문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어. 부모에게조차 따돌림을 받았지. 그러다가 동생이 태어났고….. 나이가 어렸던 너는 질투심을 감출 수 없었어. 아마 장애가 있는 아이였겠지? 그런데 너의 부모가 그 애한테만 애정을 쏟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
코제트는 주춤하다가 다시 얼굴에 독기를 띠며 싸늘하게 말을 전했다.
얼마든지 더 해 봐라. 그런 소리 듣는다고 내가 약해질 것 같으냐?
승희는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듯했다. 정신 착란 상태가 되어 위기에 처하자 몸속에 있던 애염명왕의 힘이 승희를 지키기 위해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힘은 승희의 몸 안에서만 돌고 있는 듯했고, 지금은 승희의 투시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내용을 일러 주는 것 같았다. 승희는 코제트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구박을 해도 귀엽게 달라붙는 동생이 날이 갈수록 미워 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러던 어느 날, 너는 결국 집에 일부러 불 을 질렀지. 동생이 자고 있는 방부터…………….”
연희가 몸을 흠칫했다.
“동생의 방에 불을 질러서 없애 버리면 부모님의 마음이 너에 게 향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어. 그래, 보인다. 네가 아스타로트의 방어로 마음의 벽을 쌓아도, 마음을 가리려고 해도 소용없어. 그래서 동생의 방에 불을 지르고 빠져 나오려고 했을 때 누가 뒤에서 너를 불렀지. 바로 네 동생이었 어. 불에 이글이글 타들어 가서 온몸이 불덩어리가 된 네 동생. 네 눈엔 금발 머리에 불이 붙은 모습이 희한하게도 아름다워 보였겠지.”
그, 그만!
“그래도 네 동생은 너를 애타게 불렀어.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자기를 구해 달라고. 그리고 활활 불이 붙은 채 달 려와서 아무것도 모르고 너에게 매달렸지. 그때 네 몸에도 불이 붙었어. 그렇지 않나? 동생은 활활 타서 녹아들어 가는 얼굴로 살려 달라고 절규했어. 너는 어떻게 했지? 선택을 했어. 너의 모 든 건 그때 정해진 거야. 너는 그런 동생을 구해 주기는커녕 오 히려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지. 그때 네 얼굴 또한 만 신창이가 되어 버렸고……………..”
현암이나 박 신부나 그 외 모든 사람들, 하다못해 준후와 이반 교수까지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승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코 제트의 얼굴이 망가져 버렸다는 건 무슨 이야기인가? 흡혈귀들 도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주춤거리면서 선뜻 달려들지 못했고, 그런 주위 상황은 아랑곳없다는 듯 승희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래. 너는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했지만 너의 부모는 네가 동 생을 해쳤다는 사실을 눈치챘지. 아니, 그것보다도 네 얼굴이 그 렇게 망가진 이상, 더 이상 사람들을 보고 살 수 없다 여겼겠지. 맞아! 결국 너는 집을 나왔고 세상에서 구박받고 미움을 받으면 서도 그것을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외모가 흉악하기 때 문이라 여겼지. 모든 것을 세상에 대한 미움으로만 돌렸어. 그러다가 너의 능력 때문에 블랙서클에 발탁되었고.”
“그래!”
코제트가 토굴 안이 쨍하고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를 쳤다. 코 제트는 금세라도 폭발할 것 같은 차가운 기운을 전신에서 뿜어 내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얼음장 같은 미소 가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코제트의 표정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코제트는 화가 치밀어서인지 입을 열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다. 잘도 지껄여 대는군. 나를 화나게 했어. 정말로 화나게 했어. 더 이상 너희를…………… 더 이상 내버려 둘수…………. “
박신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소리쳤다.
“코제트!”
코제트는 못 들은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처음에는 울 먹이는 소리로 말을 시작하다가 점차 흥분한 높은 목소리로 말 을 이어갔다.
“내가 내가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너희는 생각해 본 적 이 있나? 난・・・・・・ 난 말이지. 모두가 미워. 나 자신이 밉고, 아무 런 관계도 없는 너희까지도 모두가 미워. 모든 인간이, 온 세상이 미워.”
승희가 간절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증오는 증오만을 낳는 거야!”
그러나 코제트는 승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미워 미워! 나도, 나도 이제는 어쩔 수 없어. 호호호. 그래, 모두 다 온 세상이 불에 타 버렸으면 좋겠다. 그래! 불, 불, 바로 불이야. 응? 후후후. 무서운 불・・・・・・ 멀린의 용의 불. 나를 태우고 그리고・・・・・・ 호호홋!”
코제트는 양손을 길게 뻗으며 고함을 질렀다. 여지껏 코제트 는 불과 관련된 술수를 한 번도 쓰지 않았지만, 코제트가 하늘을 향해 외치면서 소리를 치자 주변에서 불덩어리가 회오리바람처 럼 용트림을 하고, 코제트를 중심으로 맴을 돌며 점점 커져 나가 는 것이었다. 코제트는 엄청난 술수를 쓰면서도 조용하게, 아이 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소름이 쭉 끼칠 만큼 다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모두 죽어………. 응? 모두 죽어!”
얼굴이 붉게 상기된 승희, 아니, 애염명왕의 화신은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가엾은 여인………….”
코제트가 불덩어리로 이루어진 회오리바람을 허공에 돌리자 그 기세는 맴을 돌 때마다 커졌고 크기 또한 어마어마해져 갔다. 저편에서 이반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를 비롯한 흡혈귀들까지 얼 굴을 가리며 뒤로 주춤거리고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현암이 망연히 서 있는 승희를 뒤로 끌어냈고 박 신부가 오라 막을 펴서 앞을 가렸으나 맹렬한 열기는 오라 막 뒤편까지 전달되어 사람 들은 눈과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저쪽에서 준후가 외쳤다.
“힘을 합해요! 제게 힘을!”
준후가 소리를 치면서 현암과 박 신부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 다. 윌리엄스 신부를 비롯한 흡혈귀들이 정신을 차린 듯 준후의 뒤를 쫓으려 했으나 이반 교수가 번쩍거리는 십자가를 들고 그 들을 제지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성수가 담긴 물총을 쏘아댔다. 성수를 맞은 흡혈귀들은 뜨거운 용암이나 산(酸)을 맞은 것처 럼 피부에서 연기가 나더니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 러났다. 박 신부와 현암이 남아 있던 힘을 모아서 준후에게 밀어 넣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승희의, 아니 애염명왕의 목소 리가 들렸다.
“힘을 합해요. 그러나 저 여인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저 여 인이 일으키는 것은 증오의 힘…………. 그러나…………”
말을 잇던 승희는 맥이 풀린 듯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꼭 쥔 채로 털썩 주저앉았다. 현암과 박 신부는 준후의 얼굴을 쳐다보 았다. 증오와 고통의 힘이라……………. 어린 준후의 눈은 맑았다. 준 후는 현암과 박 신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듯했 다.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서부터 승희의, 아니 애염명왕 의 기운이 밀어닥쳤고 거기에 박 신부와 현암이 힘을 합했다. 승희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 나와서 뒤로 주욱 밀렸고, 연희는 엉겁결에 승희를 잡으려다 같이 뒤로 밀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