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19화 – 그들은 모두를 미워하라 했다 5 : 대치
대치
“내 부하들을, 저놈들이! 저놈들이!”
멜바싸 대령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멜바싸 대령과 옥신각신하 기는 했었어도 많은 병사들이 죽은 것을 대령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준후나 승희의 말대로 병력을 정지시켰더라도 지 금 준후와 박 신부가 수호하고 있는 두 대의 탱크 외에는 보호받 을 수 없었을 테니까. 멜바싸 대령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 있는 운전병과 포병을 밀어내고 직접 탱크를 몰아 도곤족이 있 는 곳으로 밀어붙였다. 그 광경을 본 백호가 얼빠진 듯 투시경에 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탱크가 전진하기 시작하자 소리를 쳤다.
“뭐 하는 거요!”
“저놈들! 모두 죽여 버린다!”
멜바싸 대령이 악을 쓰면서 탱크의 조종간을 잡아당기려는 순간, 탱크가 우르릉 하면서 거칠게 떨었다.
“으윽!”
박 신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승희의 힘을 받아서 고통의 음파를 막아 내고는 있었지만, 힘에 겨운 것 같았다.
백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어쩌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 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무장도 갖추지 않은 도곤족은 음파 외에 는 별 힘이 없을 것이고, 박 신부나 준후에 의해 음파 공격에서 보호받는다면 두 대의 탱크만 가지고도 쓸어버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과연 멜바싸 대령의 그런 행동에 퇴마사들이 동의할지가 의문이었다.
박 신부는 탱크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뜨더니 멜바싸 대령을 쳐다보았다. 멜바싸 대령은 히루바바의 음파에 의해 탱크가 흔들리자 조종간을 놓고는 이번에는 탱크의 포좌 조종간 을 잡았다.
“뭘 하려는 겁니까?”
박신부가 소리를 치자 멜바싸 대령이 이를 갈듯이 외쳤다.
“저놈들을 그냥 둘 수 없소! 유산탄 세 방이면 놈들도 끝이오!” 포수가 포탄 하나를 집어 포 안에 집어넣으려는 것을 박 신부가 막았다.
“안됩니다! 저들이 어째서 그러는지를 알아야………….”
“앉아서 당하라는 말이오!”
멜바싸 대령이 고함을 치며 포탄을 장전했고, 탱크의 포탑이 소리를 내며 옆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기도력을 발 하는 중이어서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백호는 입술을 깨물고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탱크의 해치를 뭔가가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윽! 이건 뭐야!”
백호가 놀라서 투시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해치를 주먹으로 탕탕 두들기는 사람은 현암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백호가 해치를 열어 주자 현암은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 고 멜바싸 대령에게 소리를 쳤다.
“포를 쏴서는 안 됩니다!”
백호가 재빨리 현암의 말을 옮겨 주자 멜바싸 대령도 음파를 헤치고 현암이 이쪽 탱크로 건너온 것이 희한했던지 눈을 크게 뜨고 해치 바깥쪽을 향하여 목을 내밀었다.
“우리가 공격한다면 히루바바는 뒤쪽 두 대의 장갑차를 공격 할 겁니다! 멈춰요!”
멜바싸 대령이 백호의 통역을 듣고는 눈을 크게 떴다. 멜바싸 대령은 전방을 투시경으로 들여다보았다. 과연 히루바바는 기 등등한 기세로 뒤쪽의 장갑차들을 향해 숨을 내뿜으며 소리를 지를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현암이 말했다.
“탱크를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그럼 히루바바는 뒤쪽의 장갑차들을 공격할 것이고 거기 타고 있는 병사들은 전멸합니다!”
“그, 그렇지만…….”
멜바싸 대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백호가 간파했다. 포탄이 날아가 터지기까지는 채 0.5초도 걸리지 않는다. 멜바싸 대 령은 선수를 칠까 고민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백호도 특전 부대 출신답게 머릿속에서 확률을 계산해 보고 있었다. 불행한 것은 아직 탱크의 포구가 히루바바를 향해 회전하지 않은 상태 였기에 지금은 쏘아 보아야 몇몇 정도만 해치울 수 있을 뿐이었 다. 재장전하고 포구를 돌려서 히루바바에게 직격탄을 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대략 삼초. 그러나 그 시간이면 히루바바는 고통 의 음파를 내쏘아 장갑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충분히 몰살시 킬 수 있을 것이다. 백호는 초조하게 멜바싸 대령의 눈치를 살폈 다. 대령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포를 발사한다면……. 백호가 멜 바싸 대령에게 말했다.
“당신은 지휘관이고 적을 무찌를 의무도 있지만, 부하들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도 있소. 그렇지 않은가요?”
대령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맞은편에 있는 히루바바 와 도곤족도 긴장한 것 같았다. 여태껏 엄청난 위력을 보인 음파 공격을 막아 내리라고는 그들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더군다나 그런 방어의 주술을 쓰는 사람들이 막강한 화력을 지닌 탱크에 타고서 탱크 자체를 방어할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곤족은 계속 우 하는 울림을 내면서 산개하기 시작했다. 히 루바바 역시 금방이라도 음파를 발할 기세로 위협하는 듯했지만 조금씩 자리를 옮겨 포가 향한 각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탱크 위에 서 있던 현암은 일단 대령이 포를 발사하지 않은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양측 모두 어쩔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들 어간 셈이었다. 멜바싸 대령이 포를 쏘면 히루바바는 분명 뒤쪽 에 있는 두 대의 장갑차를 공격할 것이고 그 안에 타고 있는 이 십여 명의 병사들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할 것이다. 히루바바의 음파를 박 신부와 준후가 각각 방어할 수 있기 때문에 히루바바 가 먼저 장갑차에 타고 있는 병사들을 해치운다면 멜바싸 대령 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히루바바를 비롯한 도곤족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아무리 박 신부나 준후가 말린다 하더라도 이쪽의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히루바바와 도곤족을 위해 스스로 방어를 풀지 않을 것이라고 멜바싸 대령은 생각할 테니 까. 그러나 지금 당장 히루바바를 해치울 수도 없었다. 세 명의 승정 중 마지막 남은 히루바바까지 죽어 버리면 블랙서클의 마 스터와 총수에 대해서는 알아낼 길이 막막해지게 된다.
‘원 참, 무슨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지?’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을 끈다면 멜바싸 대령과의 통신이 두절된 것을 깨닫고 구원 부대가 증파되어 올지도 모 른다. 도곤족도 인간인 이상 긴 시간 이렇게 음파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 먼저 박 신부의 기도력이 떨어지거나 준후의 부적들이 효력을 다할지도 모른다.
현암은 좌우의 탱크를 살펴보았다. 아직까지는 준후의 부적들 도 건재하게 살아 있는 불덩이들처럼 탱크의 주위를 돌고 있었 고, 현암이 타고 있는 탱크는 박 신부가 뿜어내는 오라가 스며들 어서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현암은 히루바바가 무슨 생각을 하 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대주술사이기도 하고 블랙서클의 승정이 기도 하지만 도곤족의 리더이기도 한 만큼, 히루바바도 대책 없이 그냥 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멜바싸 대령이 영어로 현암에게 물었다.
“당신, 음파를 헤치고 옆 탱크로 갈 수 있소? 무전이 되질 않 으니 당신이 내 명령을 전해 준다면 두 대의 탱크로 동시에 저들 의 리더를 겨냥하면 어떨까요?”
현암은 고개를 저었고 백호도 현암의 생각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대령에게 말했다.
“탱크의 포탑을 조금이라도 돌린다면 저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무전도 되지 않는데 두 대의 탱크로 동시에 공격한다는 게 쉽지는 않을 거요.”
백호가 말을 마치자마자 저쪽에서 히루바바가 고함을 치는 것이 들려왔다. 현암의 사자후만큼이나 큰 목소리였다. 그런데 무 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호는 대령을 쳐다보았으 나 멜바싸 대령도 고개를 저었다.
“저건 상가입니다. 도곤족의 말이죠. 불행히도 저도 상가 는 할 줄 모릅니다.”
“병사들 중에 혹시?”
“없어요. 몇 명 그쪽 출신이 있었는데 다 죽고 말았습니다.”
히루바바는 재촉하듯이 고함을 쳤다. 멜바싸 대령은 이를 갈았다.
“저렇게 소리 지르는 사이 놈을 날려 버리면 어떨까요?”
백호는 고개를 저으며 대령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포탑을 아무리 빨리 돌리더라도 사람이 말하는 속도보다 빠를 것 같습니까?”
현암은 히루바바의 고함을 듣고는 반대편 탱크를 바라보았다.
그쪽 탱크의 해치를 열고 연희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연희 씨! 저자가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어요?”
“현암 씨!”
연희는 준후의 부적 속에서 보호를 받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나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린 채로 소리쳤다.
“잘은 몰라요. 비행기 안에서 몇 개의 단어를 본 것 외에는요. 상가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현암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 보니 긴 비행기 여행 동 안 연희는 내내 자그마한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알 고 보니 도곤족의 언어인 상어를 공부하는 것이었나 보다. 그 러나 단 십여 시간. 길게 잡아 이십 시간 만에 하나의 언어를 알 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익혔다는 것이 현암으로서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연희는 히루바바의 이야기 중 알아들을 수 있는 몇 마디 를 전달해 주었다.
“탱크를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뒤쪽의 병사들을 죽이겠대요.”
“병사들을 해치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전해 주세요.”
“긴 말은 아직 힘들어요. 그냥 병사들을 죽이면 이쪽도 쏜다고 하죠.”
연희가 힘을 다해서 가냘픈 소리를 질렀다. 히루바바는 경계 의 자세를 늦추지 않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협상을 하자는 것 같아요. 지금 싸우게 되면 둘 다 죽으니까 협상을……..”
“협상을요?”
현암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탱크 안에 있는 멜바싸 대령을 쳐 다보았다. 연희의 이야기를 현암이 백호에게, 그리고 백호가 멜 바싸 대령에게 전했다. 멜바싸 대령도 당장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어서 난감해하던 차에 히루바바가 어떤 제안을 하는지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세하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 대표 한 사람을……… 어?”
“왜 그러세요. 연희 씨?”
“백인이나 흑인과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대요. 우리와 이야기 하고 싶다는군요.”
“예?”
“틀림없어요. 히루바바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 우리중 하나와 이야기하재요.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