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26화 – 아스타로트의 약속 4 – 지하 이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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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3권 26화 – 아스타로트의 약속 4 – 지하 이층에서


지하 이층에서

지하 이층으로 내려간 현암의 눈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지하 이층은 불이 꺼져 있었고 반대편, 그러니까 지하 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만 불이 켜져 있어서 실루엣만이 현암의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도 키가 상당히 크고 덩치가 우람한 남자였는데, 머리에 삐죽한 것이 두 개 튀어나와 있는 것 이 특이했다. 현암은 숨을 모아서 긴장을 풀지 않으며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연희가 조용히 말했다.

“승희 씨가 우리가 가는 길을 낱낱이 알려 주고 있어요.”

박신부가 고개를 갸웃했다.

“투시가 된다고? 연희 양?”

“글쎄요. 제가 세크메트의 눈을 들고 있어서 그것을 통해서 보는 모양이에요. 저 앞에 있는 남자는 무척 강한 자 같다는군요. 현암 씨, 조심해요.”

준후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다지 사악한 것 같지는 않지만…………… 힘이 무척…….”

“아까 그 남자일까?”

“그럴지도요.”

현암은 준후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덩치 큰 남 자의 앞으로 다가섰다. 아까 괴력을 보인 남자가 틀림없었다. 덩 치 큰 남자는 석고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더니 현암이 가까이 다 가오자 안쪽의 불을 켰다. 실내가 환해졌다. 주변은 놀랍게도 이 상한 인디언들의 벽화와 조각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현암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도 똑똑히 현암의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는 인디언인 듯 얼굴에 물감으로 몇 개의 선을 그었고 머리 에 삐죽하게 깃털 장식을 꽂고 있었다. 굳건해 보이는 남자의 얼 굴은 바위 같은 인상을 한 채 번뜩이는 눈이 현암을 향하고 있었 다. 남자의 상체는 울퉁불퉁하게 근육이 튀어나와 강철로 만들 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넌 누구냐?”

현암이 말하자 남자의 마음이 현암에게 전해 왔다.

자네가 현암인가?

이 남자도 예전에 코제트가 썼던 술수를 익힌 것이 분명했다.

남의 말을 알아듣고 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직접 전달하는 능력.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뒤에 있는 박 신부와 준후 그리고 연희의 모습을 힐끗 보고는 다시 말을 전달했다.

마스터는 아래층에 있다. 내려가기를 원하나?

현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인디언은 뒤에 있는 연희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 여인과 아이도 싸우는가? 나는 여자와 싸우고 싶지 않다. 저들은 피해 있게 하라.

연희의 마음속에도 남자의 말이 전달되었는지 연희가 눈을 매섭게 뜨면서 말했다.

“나도 같이 가겠어요.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게도 꼭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요.”

연희는 말을 끝내고는 목에 걸고 다니던 낡고 닳은 작은 구리 십자가를 손에 쥐었다. 인디언은 쓸쓸히 고개를 저으면서 중얼 거렸다.

나 성난큰곰이 여자와 싸워야 한다고? 그럴 수는 없다. 내 비록 이곳을 지키는 몸이지만……………

성난큰곰이라는 인디언은 우울한 표정을 짓더니 현암에게 생각을 전했다.

저들은 지나가게 해 주겠다. 하지만 너는 보내 줄 수 없다. 나도 내 임무는 있으니………

의외의 제안이었다. 여자나 아이와 싸우기 싫어서 그냥 보내 준다니………….

현암은 남자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 오는 기운이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강했고 사악 하거나 요사스러운 느낌도 없었다. 뭐라고 할까. 오히려 심지가 곧고 굳건한 인상을 준다고 할까. 이자는 거짓말을 할 사람 같지 는 않았다. 현암은 히루바바가 생각났다. 그리고 성난큰곰이라 는 남자가 제안한 것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이 남자를 맡는다면 박 신부와 준후 둘은 마스터를 직접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편이 낫지 않을까? 셋이 합심하여 이자와 싸운다면 이길 수 있는 확률은 높아지겠지만 그보다는 빨리 마스터를 잡는 편이 더 나 을 것 같았다. 현암이 말했다.

“어서 가요. 여기는 저에게 맡기고, 신부님과 준후, 둘의 힘이 면 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을 거예요. 이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가세요. 어서요!”

박 신부는 제안을 듣고 머뭇거렸지만 현암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입을 열었다.

“당신도 블랙서클의 일원인가?”

남자는 굳건히 선 채 미미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블랙서클이 어떤 곳인지 당신은 잘 알고 있지? 그런데도 당신은 블랙서클을 도와서 우리와 싸울 생각인가?”

인디언은 흐려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했다. 퇴마사들의 마음속 에 전달된 인디언의 말은 뜻밖이었다.

나는 마스터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 그런 은혜로 마스터의 목숨을 지켜 주어야 한다. 이게 전부다.

“무슨 말인가?”

마스터가 악한지 선한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너희는 너희의 행 동이 선한지 악한지 항상 판별할 수 있는가? 마스터의 말에도 분명 일 리는 있다. 분명히 이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 있고, 바로잡을 필요가 있 다. 바로 우리, 바로 이 세상 때문에 우리의 선조는 모조리 말살되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평온한 지배자였던 인디언은 탐욕스러운 백인에 의하여 지금은 보호 구역에서 쓸쓸히 삶 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에 블랙서클에서 이용하려고 했 던 켈트족이나 아프리카의 도곤족, 그 외에 퇴마사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많은 민족들처럼 이번에는 인디언마저 이용하고자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인디언, 성난큰곰도 그들을 이용하여 자기 민족의 비운을 풀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박 신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고 있나?” 

인디언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다만 한마디 만이 마음속으로 전달되었다.

그들이 나를 이용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그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백인들은 그러한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일단 알게 된 이후에는 그 방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현암이 블랙서클의 정확한 내용과 마스터의 진정한 정체에 대 해서 물으려고 하자 인디언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고 개를 저으면서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싸워야 한다. 나는 싸우기 위해서, 그리고 너희를 막기 위해서 이 앞에 선 것이다. 그러니 싸우자. 물론 현암…… 너 말이다. 네가 이 기면 대답을 해 주겠다. 너희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인디언은 질문을 딱 잘라 버리고는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양손으로 크게 원을 그렸다. 현암은 몸에 기운을 모았다. 뒤에 있던 박 신부와 준후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암이 뒤 를 돌아보고 말했다.

“어서 가세요. 마스터를 잡아요. 저도 곧 따라가겠습니다.”

박 신부는 생각해 보았다. 인디언 주술사가 퇴마사들이 들어 오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걸 보면, 마스터도 퇴마사들이 이곳으 로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마스터가 더 대 비할 시간을 갖기 전에, 인디언 주술사를 현암에게 맡기고 마스터에게로 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신부는 준후와 연희에게 말없이 눈짓을 했다. 그렇다고 나 가는 척하다가 기습을 할 만큼 비열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상대의 순수한 호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연희는 머뭇거리다가 현암에게 말했다.

“빨리 내려오세요.”

현암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디언의 몸 주위 에서 강한 기운이 일었다. 박 신부와 준후, 연희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성난큰곰이 다시 현암의 마음속에 뜻을 전달해 왔다. 

이제 됐군. 지금쯤이면 여자와 노인 그리고 아이는 무사히 밑으로 내 려갔겠지.

그들의 능력은 강하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들의 능력을 믿는다.

나도 그들의 몸에서 뭔가 느낄 수 있었다.

인디언 주술사, 그러니까 성난큰곰이 처음으로 얼굴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내 평생 힘없는 여자나 노인, 어린아이와는 싸워 본 적이 없 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지.

현암은 쓸쓸히 웃어 보였다. 지난번 히루바바와 싸우고 난 뒤, 이렇게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을 다시 만나다니, 뜻밖이었다. 현암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고 올바른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자들과도 싸운 일이 많다.

성난큰곰은 얼굴에 씩하고 미소를 띠었다.

너도 강한 자로군. 너 같은 자와 일대일로 싸워 보고 싶었다. 이건 전사로서의 순수한 욕망이다.

성난큰곰의 말을 듣고 현암은 기분이 씁쓸했다.

욕망이라고? 나에겐 강자가 되거나 남을 이기고 싶다는 욕망은 없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그만두고 싶다. 그러나 블랙서클 같은 자들이 있기 때문에 계속 싸울 수밖에 없고……………..

그런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 우리는 싸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싸워야 한다. 너는 싸우기 싫다고 하지만, 난 싸워야만 하니 까. 자, 그러면 준비해라.

현암은 기공력을 오른손에 집중했다. 승희는 투시력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 알고 있는 듯, 현암에게 힘을 보내왔다. 예전에 드라큘라 성에서 ‘탄’ 자결을 한 번 쓰고는 내력이 다 해 쓰러진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승희가 힘을 보내 주고 있었 기 때문에 처음부터 ‘탄’ 자결을 써 보기로 했다. 현암은 조용히 오른손에 공력을 모아 갔고, 인디언 주술사는 팔을 하늘에 벌린 자세에서 힘을 모으고 있었다. 인디언 주술사의 몸 주변에 먹구 름 같은 것이 꾸물꾸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현암이 화답하자 성난큰곰은 기운을 모두 끌어모았는지 하늘에 대고 울부짖으면서 양손을 쳐들었다. 땅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땅뿐만이 아니라 벽과 천장도 흔들리면서 살아 있는 것처럼 꿈지럭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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