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7화 – 왈라키아의 밤 7 : 그라쉬와 코제트
그라쉬와 코제트
현암은 연희의 입에서 코제트의 이름이 나오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코제트?”
“예. 코제트의 명령대로 현암 씨를 해치지 못해서 유감이라는 군요.”
“그럼 이자도 코제트의 하수인인가?”
현암은 침울한 얼굴로 넘어져 있는 난쟁이를 가만히 쳐다보았 다. 난쟁이는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었는지 상처나 흉터 자 국도 없이 팔다리 부분이 약간씩 불룩불룩하게 나와 있을 뿐이 었고, 다른 부분은 정상적으로 보였다. 얼굴은 꽤 잘생긴 편이었 다. 연희가 그의 모습을 보더니 현암에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 사람은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증후군의 희생자인 게 틀림없어요.”
“탈리도마이드라구요? 그건 뭐죠?”
“글쎄요. 저도 직접 보기는 처음이에요. 60년대 유럽에 퍼졌다 는 일종의 공해병이죠. 약품에 의해서 생겨났다는 설도 있고 공 해 때문이라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그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의 2세는 저 사람처럼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답니다.”
“정말인가요? 끔찍하군요.”
넘어져 있던 난쟁이는 놀란 현암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두 사 람을 향해 뭐라고 떠들어 댔다. 그 말을 들은 연희의 얼굴이 붉 어졌다.
“뭐라고 떠드는 거죠?”
“탈라도마이드라는 말을 알아듣고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있”어요.”
“정확하게뭐라고 그러는데요?”
연희는 조금 주저하는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애초부터 막돼먹은 병신이다. 그래서 너희 같은 연놈들이 미워, 모조리 밉다구. 뭐 우리 식으로 옮기면 그런 뜻 이에요.”
현암은 말문이 막혔다. 이자가 비정상적인 육체를 갖고 태어 난 것은 측은하고 안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면식 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이토록 증오심을 가지고 욕을 퍼붓다 니. 비뚤어져도 한참 비뚤어진 게 아닌가. 현암은 잠시 생각하다가 연희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연희 씨.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이 친구에게 그대로 전해 주세요. 알았죠? 뉘앙스까지 거의 그대로 전달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겠죠?”
“예? 의미만 전달되면 되는 게 아닌가요?”
“좀 심한 말이 나올지도 몰라서 그럽니다. 아무튼 해 주세요.”
“예, 알았어요. 그다지 능통하진 않지만 노력해 보죠.”
연희는 난쟁이에게 말을 건넸다. 아마도 현암이 지금부터 이 야기를 할 테니 잘 들으라는 뜻 같았다. 난쟁이는 허리 힘으로 꿈틀거리며 일어나서 거인의 옆에 기대어 앉더니 눈을 감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귀를 막고 싶었을 테지만 손이 없으니 귀를 막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현암은 그자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이름이 뭐지?”
난쟁이는 콧방귀를 끼면서 뭐라 중얼거렸고 그 소리를 들은 연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서 뭐하느냐고 그러는데요?”
“한 번 더 물어봐요. 저 거인의 이름은 미르챠 같던데… 네 이름은 뭐냐고요.”
연희가 좀 강경한 말투로 몇 번이고 묻자 그는 눈을 뜨고는 잠시 현암을 노려보다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라쉬.”
그라쉬가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 같았다. 현암은 나직한 목소 리로 그라쉬라는 난쟁이에게 말했다.
“미르챠는 죽은 게 아니야. 잠시 기절을 했을 뿐이지. 맥을 짚어 보면…….”
현암은 말하다가 연희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그래도 그라쉬는 팔다리가 없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증 오하고 있는데 맥을 짚어 볼 수가 없지 않은가.’
현암은 그 말을 통역하지 말라고 한 뒤, 그라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서 미르챠의 손목을 짚어 보았다. 미르챠는 ‘탄’ 자 결의 강한 충격을 받고 쓰러져 있기는 하지만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신을 차리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이자는 죽은 것이 아니야. 잠시 기절했을 뿐이지.”
현암은 연희가 통역을 끝내는 것을 기다렸다가 미르챠의 손목 을 들어 그라쉬의 뺨에 갖다 댔다. 그라쉬도 처음에는 현암이 다 가오자 몸을 비틀어 피하려 하다가 미르챠의 맥박이 뛰고 있는 것을 느끼고는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라쉬의 눈에서 살기 가 한결 누그러졌다. 현암은 그런 그라쉬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 보다가 말했다.
“왜 다짜고짜로 나한테 덤볐지?”
그라쉬는 한동안 눈을 껌벅거리면서 분노가 덜 풀린 듯한 눈길로 현암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까와는 또 다른 굵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연희가 그 말을 현 암에게 옮겨 주었다.
“너를 죽여 버리려고 했어. 코제트가 그러라고 해서・・・・・・ 그 래서 미르챠와 같이 왔는데…………. 미르챠를 쓰러뜨리다니! 너는 인간도 아니다. 무슨 마술을 부린 거냐. 하고 말하고 있어요.”
“마술이라구? 그러는 너는 희한한 재주를 피우지 않았나? 그 나저나 왜 코제트의 명령을 듣지?”
그라쉬는 현암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자 지지 않 으려는 듯 마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현암의 눈을 피하려 했다. 저자가 왜 갑자기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왜 코제트를 도와서 나를 공격한 거지? 코제트는 좋은 사람 이 아니야. 그걸 모르고 있었나?”
“그래,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그라쉬는 홧김에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닫았다. 현암은 일단 말문이 터진 이상 말을 시키면 시킬수록 더욱더 많은 대답을 들 을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집요하게 말을 시켰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코제트를 돕는거지? 너는 원래부터 코제트의 부하가 아니었나?”
“부하라니? 난 누구의 부하도 아니다. 나는 이 마을의 대표자야. 미르챠와 내가 마을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음. 마을을 지킨다고?”
현암은 생각에 잠겼다. 드라큘라 성 안으로 직접 미르챠와 그 라쉬가 잠입한 것을 보면, 지금 그라쉬가 말하고 있는 마을이란 박 신부와 준후 그리고 이반 교수가 수상쩍다며 조사해 보기 위 해서 내려갔던 마을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성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
“혹시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너희는 명색이 마을의 대표자인데 코제트의 명령을 따른 것이라면……. 혹시 마을 사람들 전체가 코제트를 돕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 모두 다. 모두가 그녀를 돕고 있다! 이젠 홀가분한가? 우리 마을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지? 너는 한 번도 마을에 얼굴 을 내비치지 않았는데?”
“우리 일행 몇 명이 그 마을을 조사하러 갔다.”
“그렇다면…… 하하하.”
그라쉬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나는 실패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실패하지 않을 거야. 나를 이겼다고 좋아할 건 없다. 조금 있으면 너희 모두 코제트가 원하는 대로 될 테니까!”
“코제트가 원하는 대로? 그건 무슨 소리지?”
“너희 모두가 죽어 넘어지는 것! 그것도 그냥 죽어서는 안 된다. 가장 처참하고 잔혹하게, 증오의 불길을 가득 담고 죽어야 된다고 코제트는 말했다.”
“증오의 불길을 담는다고?”
“그래야 꺼내 쓸 수 있는 힘이 많아지니까! 그래서… 아, 아니 이런……….”
그라쉬는 성격이 거칠어서인지 아니면 잡혔다는 수치감 때문 에서인지 말을 함부로 하는 것 같았고, 하지 말아야 될 말을 무 심코 내뱉고 후회하는 것 같았다. 현암이 그라쉬에게 물었다.
“증오를 가득 담아야 힘을 꺼내 쓴다니? 도대체 무슨 말이지?” “나는 모른다. 그건 코제트가 알아서 할 일이다.”
현암은 몇 번 더 물어보았으나 그라쉬의 태도는 완강했다. 현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그라쉬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코제트를 왜 그렇게 따르지? 왜 마을 전체가 코제트를 따르게 되었나?”
그라쉬는 큰 소리로 웃었다.
“저 마을이 어떤 마을인지 아는가? 저주받은 마을이다. 너희 같은 놈들은 버젓이 살고 있겠지만 우리는…………….”
현암이 그라쉬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하자 그라쉬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마치 현암에게 말을 하는 것이 크나큰 복수나 되는 양, 억눌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겠지. 드라큘라가 살았던 곳이야. 드 라큘라가 어떤 인간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드라큘라의 이야기가 나오자 연희가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아무런 의견도 섞지 않고 그라쉬의 말을 그대로 현암에게 전해 주었다. 현암은 연희가 왜 몸을 움찔했을까 궁금했지만, 그것보 다는 그라쉬의 말에 더욱더 흥미가 끌렸기 때문에 곧 잊고 그라 쉬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드라큘라는 악마였어. 많은 사람들이 드라큘라를 미워했지. 드라큘라는 이곳에서 수없이 많은 학살을 저질렀고 결국은 그 보답으로 온 가족이 잔혹하게 죽음을 당했을 뿐 아니라, 자신도 결국 전쟁중에 목숨을 잃었지. 그러나 그자는 그것도 모자라 죽 어서도 마을에 저주를 걸었고, 우리 마을은 결국 저주받은 마을 이 되어 버렸어!”
“어떻게?”
“하하하, 내 모습이 보이지? 여기 미르챠의 모습도 보이지? 이게 너희가 말하는 정상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같이 백치! 뇌성마비! 팔다리가 없는 흉한 몰골들! 우리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그랬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격리되어 우리끼리만 살아왔고 바깥에서 버젓하게 나다 니는 너희 같은 놈들을 모조리 증오해! 그래! 모조리 죽여 버릴 거야! 코제트가 말했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원한다고, 분노하고 증오하고 억눌려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힘을 준다고 했어! 그래서 그랬는데………. 이 망할 놈, 미르챠를 쓰러뜨리다니, 넌 인간도 아냐 넌 악마야.”
그라쉬는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항상 등에 업혀서 다닐 정도 로 미르챠와는 무척이나 가까웠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거 인 미르챠는 눈의 검은자위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선천적으로 장 님이었던 것이 분명했고, 말도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러나 힘은 센 미르챠의 어깨 위에 팔다리 가 없지만 사물은 똑바로 분간할 수 있는 그라쉬가 앉아서 둘은 하나처럼 행동을 해 왔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미르챠가 쓰러 지자 그라쉬가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은 십분 이해가 갔다. 현암 은 거인 미르챠가 입고 있었던 철갑옷을 살펴보았다. 이상한 도 형들이 새겨져 있는 갑옷 역시 코제트가 준 것이 틀림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 갑옷도 코제트가 준 것인가?”
“그렇다! 그는 우리에게 힘을 주었지. 갑옷, 무기, 주문. 그리고 무엇보다도 힘! 우리가 원했던・・・・・・ 그……….”
“힘이라고?”
“그래. 바로 그 힘. 그것 때문에 우리는……”
“힘이 생겨서 좋은가?”
느닷없이 던져진 현암의 질문에 그라쉬는 황당하다는 듯 말이 없었다. 현암은 그라쉬가 생각을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라쉬는 어딘가 이상했다. 눈은 여전히 증오로 불타고 있었지만 얼굴 표 정은 아니었다. 미르챠를 그토록 생각하고 있는데도 눈에는 그 런 표정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공허한 눈, 증오만이 불타고 일 체의 다른 감정은 하나도 없는 듯한 눈.
저자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뭔가 에 의해 정신을 억압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지금 충격으로 머 릿속이 온통 혼돈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라쉬는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르는지 두서없이 중얼거리다가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섞어서 혼잣말처럼 흘렸다. 연희는 말을 한 구절 한 구절씩 현암에게 재빠르게 알려 주어 그라쉬의 기분까지도 그대로 현암이 느낄 수 있게끔 최선 을 다하고 있었다.
“코제트, 코제트가 말했는데…………. 아무도 이길 수 없을 거라 고. 미르챠는 정말・・・・・・ 그래서 그것 때문에 혀까지……… 그랬는 데도 지다니..”
현암이 혀라는 소리를 듣고 연희에게 손짓을 했다.
“잠깐! 연희 씨? 방금 저 친구가 ‘혀’라고 그랬나요?”
“예, 분명히 ‘혀까지’라고 했어요.”
현암은 굳은 얼굴로 거인 미르챠의 얼굴 쪽으로 가서 입을 벌 리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거인 미르의 혀는 잘려 나가고 없었다. 검붉은 흉터 자국을 보고 현암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미르의 혀를 자른 게 누구지?”
그라쉬는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다가 현암이 추궁을 하자 내뱉듯이 말했다.
“코제트에게 준 거다. 힘을 얻기 위해서………….”
“뭐라고? 힘을 얻기 위해 혀를 잘라줘 버렸다고?”
“그래!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
“뭐, 뭐야? 너는 미르챠와 친한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짓을 시켰지?”
“대신 미르챠는 강해졌잖아. 엄청난 힘을 얻었고, 고통이 없으 면 힘을 얻을 수가 없다. 고통의 대가로만 얻을 수 있는 게 힘이 야. 미르챠는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천하무적이었어. 그런데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현암은 한참 동안이나 씩씩거렸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 다가 성질이 폭발하는지 손을 쳐들고 그라쉬를 때리려 했다. 그 라쉬는 현암의 손에 맞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는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러나 현암은 들었던 손을 천천 히 내리고, 경멸 어린 눈초리로 그라쉬를 쳐다보았다. 그라쉬는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붉어지면서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분명 정상적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극도의 혼돈 상태에 빠져 있는 미치기 직전과 비슷한 상태의 음성이라고 할까?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야. 왜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바보 같은 놈! 너는 네가 한 일이 옳다고 생각하나?”
현암은 화가 치밀어서 말조차 더듬고 있었다. 그라쉬가 한 말 이 사실이라면 그 마을에는 정신이 모자란 사람들만 있을 것이 고, 팔다리는 없지만 온전한 정신인 이자가 마을의 리더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자가 자기와 가장 친한 친구인 미르챠 마저도 혀를 잘라서 힘을 얻게끔 유도했다면, 다른 마을 사람들 은 어떻게 되었을까.
코제트는 악독한 여자였다. 한국에서는 내전을 일으킬 음모 를 꾸몄고, 영국에서는 별다른 큰 목적도 아닌, 길일을 정한다는 명목하에 많은 폭주족을 토막토막 잘라 살해했다. 스톤헨지에서 거의 잡힐 뻔한 최후의 순간에도 자기와 같은 편인 에드거의 머 리를 잘라 제물로 바침으로써 비비안의 힘을 얻기까지 했다. 그 런 코제트가 그라쉬를 이용했다면, 하물며 그라쉬와 가장 가까 운 미르챠도 이런 꼴이 되었는데 그 이외의 지능 없는 마을 사람 들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현암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 앉힐 수가 없었다. 현암은 아까까지의 동정 어린 잔잔한 눈이 아 닌 불이 번쩍이는 듯한 매서운 눈으로 그라쉬를 쳐다보고 조용 하고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라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연희마저도 몸을 떨 정도로 현암의 분위기는 으슬하게 변해 있 었다.
“그러면………… 너……”
현암이 아주 느릿느릿하게 손가락을 쳐들어서 그라쉬를 가리 켰고, 그라쉬는 총부리가 자신을 겨냥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 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짓을 했지?”
그라쉬는 우물거리며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암은 결코 소리를 치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는 낮 아지고 차분해졌다. 현암의 화내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 던 연희는 과연 저것이 현암이 내는 목소리인가 의심스러웠다. 현암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맹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고, 그라쉬는 그 기운에 짓눌렸는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서………… 대답해…………..”
그라쉬는 호랑이 앞의 강아지처럼 갑자기 으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부르르 떨었다. 현암이 그라쉬를 가리켰던 손가락을 천 천히 코앞에까지 들이밀자 그라쉬는 갑자기 눈물과 콧물까지 내 쏟으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라쉬의 얼굴엔 경련이 일었고 목이 막힌 듯 컥컥거리더니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라쉬 가 미친 듯이 지껄여 대는 소리를 연희가 현암에게 옮겨 주었다.
“때리지만 말아 달래요. 한 대만 치면 자기는 죽는다고. 뭐든 지다 말한대요!”
“어서 이야기하라고 해요.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으스러뜨려 버리겠다고.”
현암은 옆에 있던 굵직한 나무 막대 하나를 손아귀에 쥐고 그 라쉬의 코앞에 들이민 다음 기공력을 모아서 쥐었다. 꽤 단단해 보이던 나무 막대는 우지직 소리가 났다. 현암의 손가락이 깊숙 이 파고들었다. 현암이 기공력을 올리자 나무 막대는 그대로 세 토막으로 터져 나갔고, 현암이 손안의 나뭇조각을 던져 버리자 엄청난 힘으로 압축된 나무토막은 마치 쇳조각처럼 쨍그렁 소리 를 내며 돌바닥에서 튀어 올랐다. 그 모습을 본 그라쉬는 부들부 들 떨었다. 현암은 나직이 말했다.
“똑바로 얘기해. 코제트가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 그건・・・・・・ 코제트는 전설을 이용해서………….”
“전설? 드라큘라의?”
“그, 그래, 드라큘라. 그리고 흡혈귀…………. 그래서 흡혈귀 들, 흡혈귀들을…………. 어디선가 흙을 담은 관을 가져오고 그걸 로・・・・・・ “
“흙을 담은 관? 자세히 이야기해. 그래서?”
“마………… 마을………… 마을 사람들은 이미 반 이상이 흡혈귀, 흡혈귀로 변해서
“뭐야?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에게도 할 말은 있어. 그들이 원했던 거야. 그들이………..”
“무슨 말이야. 흡혈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도 안 돼! 거짓말 하지 마!”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니었어. 코제트가 말했어. 일단 그렇 게 되고 난 후에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다고…………. 우리에게 보 여 줬어. 그 힘이란 걸 너희는 몰라. 두 팔 두 다리가 성한 사람 들. 머리가 똑똑하게 굴러간다고 믿는 놈들은 하나도 몰라. 고통 을 느끼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다리병신도 멀쩡하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걸, 두 팔이 없어도 마음대로 물건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너희는 생각이라도 해 봤어? 사지 없이 너희가 살아 본 적 있냐고? 너희가 만약 ………… 너희도 그랬다면………….”
“그래도 그건 잘못이야!”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고통스러웠어. 바깥세상 이라는 곳도 한번 나가 보고 싶었는데……. 그러나………… 그러지 못했지. 언제나 외부 사람들은 우리에게 동정 섞인 선물 나부랭 이나 안겨 주고 위선에 찬 미소만 지었지. 그러고는 구더기 보듯 벌레 보듯 더러워하고 무서워하고 징그러워하면서 우리를 피했어. 구더기가 된 기분을 알아? 그런 입장에 처하면서도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거려야 하는 우리의 생활을 겪어 봤어? 거기서 해방 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 봐! 흡혈귀, 흡혈귀가 뭐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이성을 상실했다고? 애당초 우리에 게 이성 같은 것이 있기나 했나? 반벙어리에 사람 얼굴 하나 제 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 진다는 것이지? 지금이 훨씬 편해. 그들은 절뚝거리지도 않고, 거치적거려서 넘어지지도 않고…………. 더 이상. 더 이상은……………. 그러면 됐지. 뭘 바라는 거야…………. 뭘!”
현암은 어느새 분노의 기색이 사라지고 잔잔한 슬픈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현암은 그라쉬의 말이 끝나자 조용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스스로를 속이지 마. 그라쉬.”
현암은 그라쉬가 본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 실을 알고 있었다. 그라쉬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고 원래 생 각은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 강하게 배어 있었다. 왜 스스로를 부정하고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일까?
“그라쉬, 네가 하는 말은 그럴듯하지만 말이 안 돼. 너는 지금 남이 써 준 대사 같은 말만 흥얼대고 있어. 도대체 왜 그랬지? 진 짜 이유가 뭐야?”
“난, 나는 정말…….”
“왜 그랬지. 그라쉬?”
현암은 말을 하면서 승희를 떠올렸다. 승희가 있었으면 그라 쉬가 왜 그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그 런데 불행히도 지금 승희는 곁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 일에 만 몰두한 나머지 승희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현암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연희와 같이 있어야 되는데, 왜 연희 혼자만 내 려온 것일까? 그러나 현암은 잠시 승희 생각을 접어 두기로 했다. 그라쉬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고 그런 그라쉬의 말을 연희가 계속 옮겨 주었다.
“코제트, 난 그 여자를 이해할 수 있어. 그 여자, 그 여자도 불 쌍한 여자고…………. 뭐든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글 쎄,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그 여자를 도울 수 있으면 뭐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건 도대체………….”
그라쉬가 코제트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하자 그라쉬의 얼굴은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갔다. 얼굴 색깔이 희어졌다가 파래졌다가 하면서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현암은 그 라쉬에게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라쉬는 중지하지 않았 다. 계속 이상한 헛소리만 늘어놓으면서 태도가 점점 이상해졌 다. 몸을 덜덜 떨더니 이상하게 비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연희도 더 이상은 그라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노라고 현암에게 말 했다. 그라쉬는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라쉬의 그런 모습을 보고 현암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코제트가 그라쉬와 마을 사람들에게 술수를 부린 것은 아닐 까? 예전에 세크메트의 대주술이라는 환영술까지는 안 되더라 도, 일종의 최면술 비슷한 주술을 써서 사람들을 현혹시켜 자기 편으로 만든 것은・・・・・・ . 그런데 그렇다면 이자는 왜 이렇게 괴로 워하는 거지?
그라쉬는 입에서 거품을 품으며 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현암 은 보다 못해서 그라쉬를 붙들고 따귀를 때리면서 호통을 쳤다.
“정신 차려!”
그라쉬의 눈이 제대로 돌아온 것 같았으나 여전히 몸을 덜덜 떨었고, 무슨 발작에 걸린 것처럼 흐느끼면서 눈물과 콧물과 침 을 쏟아 냈다. 현암은 그런 그라쉬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자신의 상태 역시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라쉬의 등에 손을 짚고 기공력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현암이 몇 분 동안 그라쉬의 몸에 공력을 돌려 주자 그라쉬의 몸 안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느낌이 왔다. 그러자 그라쉬는 움찔하고 그 자리에 푹 늘어져 버리 고 말았다.
뭔가 술수를 부리기는 부려 놨군! 이 지독한……..
잠시 후 그라쉬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고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그라쉬가 정신을 차리고 말을 꺼냈을 때 그의 목소리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냐는데요. 현암 씨?”
“필경 이자는 코제트의 술수에 걸려 있었던 것이 분명해요. 이젠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그라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휘휘 저으며 고통스러운 듯이 말했다.
“너, 너희는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아…………. 나를 그냥 내 버려 둬, 나를 제발 생각 좀 해 봐야 되겠어. 제발, 미르챠랑 같 이 있게 해 줘.”
“내버려 두라고? 지금도 제정신이 아니란 말인가?”
“글쎄, 모르겠어. 정신이 드는 것 같아. 내가 왜 이랬지? 아니 기억은 나는데 이상해. 그동안은 뭔가가 이상했어. 날 내버려 둬.”
그라쉬가 신음 소리를 내며 중얼거리는 사이에 넘어져 있던 거인 미르챠도 끙 하는 소리를 내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 르챠가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연희가 흠칫 놀라서 뒤로 몇 걸음 을 물러섰고, 현암은 가만히 미르챠를 보고 있다가 그의 몸을 덮 고 있던 망가진 강철 갑옷을 오른손으로 떼어 냈다. 미르챠가 몸 을 일으키자 현암의 왼쪽 팔목에 꽂혀 있던 월향검이 바르르 떨 었다. 현암은 월향검을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타이르고 미르챠의 손을 보았다. 월향검이 난리를 쳤던 미르챠의 손안은 뼈가 보일 정도로 해어져 있었다. 현암이 미르챠의 손을 보고 동정하는 태 도를 보이자 그라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놔둬! 미르는 내가 보살펴줄 거야. 그리고 네 이름은 뭐지?”
“나 말인가?”
“그래. 너, 너 말이야.”
“나는 현암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왔지.”
그라쉬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러나 과거 자신이 했던 일들 모두 다 기억을 못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과거의 행동이 꼭 코제트의 주술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인 데. 그라쉬는 종알거리며 떠들어 댔다.
“음. 그래. 너희 일행은 모두 거기서 왔나? 뭐하러 여기까지. 아니지. 코제트를 쫓아왔나 보군. 그래, 너희라면 이길 수 있을 지도 몰라. 그 여자가 가진 엄청난 힘에……. 아, 머리가 아파.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기억은 나는데……………. 도대체 꿈속 같 아, 모든 게 꿈이었을까? 다만……………..”
이상하게도 그라쉬의 눈에 짙은 서글픔이 서려 있었다. 그동 안 코제트에게 이용당했다는 것도 모두 기억이 나는 모양인데, 왜 그라쉬는 분노나 후회의 기색이 없이 서글픔만을 느끼고 있 는 것일까? 그라쉬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아무튼 미안하게 됐다. 이제 더 이상 너희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우린 마을로 가서 그간의 일을 수습하고 상처도 치료해야 겠어. 우릴 보내 주겠나?”
현암은 그라쉬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발작에서 깨어난 듯한 그라쉬는 상당히 침착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그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어떻게 보면 현암으로서도 그라쉬와 미르 챠가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어디에 묶어 둘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을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가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성안에 코제트가 숨어 있는 게 분명한가? 그리고 코 제트가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인지 말해 줄 수는 없어?”
“그건 안 돼. 아까 내가 그 말을 하려다가 이상하게 된 것 같 아. 미안해. 차마 그 말은 나로서도 할 수가 없어. 어쨌든 코제트 코제트는 내 손으로 결말을…………. 왜 그녀는………………”
그라쉬는 허공을 응시하며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그라쉬가 왜 저러는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현암은 더 이상 붙들고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현암은 연희에게 물었다.
“그런데 승희는 어디에 있나요?”
“승희요? 앗! 그러게요. 현암 씨가 승희와 같이 있지 않았어 요? 비밀 통로에 같이 들어온 게 아니었나요?”
“예? 비밀 통로요? 내가 비밀 통로로 왔다는 건 어떻게 알았 죠? 승희는 저와 같이 오지 않았는데요. 연희 씨와 같이 있지 않 았어요?”
“아니에요. 난 승희도 현암 씨가 들어온 벽난로 뒤의 비밀 통로로 간 줄 알았는데…………. 앗! 가만.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방에는 다른 비밀 통로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그 통로로 내려간 것일까?”
“다른 통로요? 승희 혼자 떨어졌다는 말인가요?”
“예, 그런 것 같아요. 어머나! 그렇다면 이 일을…………….”
현암은 그라쉬에게 눈을 돌렸다.
“이 성안에 비밀 통로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 줄 수 있나? 길 안내라도…………….”
“그건 나도 모른다. 내가 만든 통로밖에는………………”
“만든 통로?”
“코제트의 부탁을 받고 안 그래도 복잡한 성안의 구석구석에 더욱더 복잡하고 미묘한 장치를 설치해 놓았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나가는 길이라면 간단하지 않은가? 온 길을 되 짚어서 나가면・・・・・・”
“아니, 됐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현암은 그라쉬에게 최후로 한 마디만을 던지고는 자리를 뜨기로 작정했다.
“아까의 네 이야기는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결코 세상을 그런 눈으로만 보면 안 돼. 스스로 생각을 해 봐. 스스로 생각하면 더 잘 알 수 있을 텐데.”
그라쉬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현암에게 등을 돌린 채 미르챠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미르챠는 정말로 지능이 없는 것인지 심 하게 다쳐서인지 동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현암은 연희와 함께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비밀 통로를 되짚어서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