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대성인의 죽음 (1965년 인도-파키스탄 2차 전쟁 직후) : 2화 – 진군
진군
갑작스러운 휴전을 맞이해 어딘가 풀이 죽어 있었던 인도의 군 부대가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대규모의 인원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최고의 화력을 지닌 중장비와 항공기들까지 동원됐다. 물론 그에 실릴 폭탄 및 장비도 선별돼 외부에 티나지 않게 속속 이동했다.
목적지는 카슈미르, 인도가 파티스탄 영토 일부를 점령해 인도 영토로 굳어진 카슈미르 지역 중에서도 최북단인 사람이 거의 살 지 않는 고원 지대였다. 다만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댄 전선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황량한 곳이었다. 군사적으로 볼 때는 국경도 아 니고, 전략적인 가치도 전술적인 의미도 전혀 없었다. 인도 북부 군 사령부에서는 단순한 기동 훈련이라고 홀리듯 공표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운반하고 있는 장비나 폭약 등은 절대 연습 용이 아니었다. 최강의 위력을 가진 화력들이 한곳을 향해 집중되 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조종할 인도 군부대 또한 정예 중의 정 예였다. 전투력만으로도 정예라 할 수 있을뿐더러, 힌두교에 대한 신앙심이 투철한 자들로 신중하게 선발됐다. 이슬람에 대한 증오 와 분노가 가득 배어 있는 자들로만. 물론 그것은 어쁘랭띠가 북 부군 사령관에게 주문한 내용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께서 악마를 제거하는데 굳이 다른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성의가 중요한 것이지요. 일종의 공물이라 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과 파괴를 담은 현대 무기에 당신들의 증오, 그 악마에 대한 적의를 가득 담아 날려 보내는 거지요. 그것 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을 푸는 방법이고, 이 버림받은 전쟁에 보이지 않는 종지부를 찍는 숨겨진 역사의 한 장이 될 겁니다.”
“그 악마 놈이 어디 있는지는 아시나요?”
“물론입니다. 정확한 지점을 알고 있습니다.”
“놈이 우리 땅에 숨어 있었다니 정말 화가 나는군요. 허나 그가 어디로 도망치지는 않을까요?”
“그러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까?”
“왜 그러한지는 설명할 필요 없다고 봅니다. 설명해 줘도 이해 하기 어려울 테니, 그냥 다르마의 길이라 여기고 따르십시오.”
“예.”
그렇게 인도 군부를 이끈 뒤 어쁘랭띠는 키르모비치 대령, 바바 지와 함께 목적지를 향해 따로 출발했다. 군이 준비를 갖출 때까 지는 기다려야 했기에 그들은 소를 타고 천천히 이동했다.
소는 힌두교의 상징이기도 하며, 인도에서는 비록 농사에 사용 하고 있지만 상당히 숭배하는 편이다.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 중 하나인 크리슈나가 소몰이를 위해 소를 타고 다녔다는 이야 기가 전해진 이래로 성자나 수행자 중에는 소를 타고 이동하는 이 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수행자들과 함께 이동 중인 소비에트 연방 출신 키르모 비치 대령은 답답했다. 느릿느릿한 소 등에 타고 움직이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비교적 추운 소비에트 연방에서 살아온 그로서는 인도의 작열하는 더위를 견디기도 힘들었고 수행자들의 느린 템포는 더더욱 적응하기 힘들었다. 대령은 조금 가다가 아예 소 등에서 내려 어쁘랭띠의 옆에 서서 걸었다. 덥고 힘들기는 하지만 느릿느릿한 소 등 위에서 파리와 졸음을 참으며 멍하니 있기보다 는 이 편이 나았다.
어쁘랭띠는 흔들리는 소 등 위에서도 고삐를 잡지 않은 채 마치 마술처럼 소 등에 딱 붙은 듯 요가의 정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 눈 을 뜨지 않고 입도 열지 않았다. 물론 바바지도 마찬가지였다. 그 런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어쁘랭띠를 향해 키르모비치 대령 이 말했다.
‘그자 하나를 잡는데 이 정도의 화력을 동원하는 것은 좀 너무 한 것 아닙니까? 인도 측에서도 군비의 낭비고…………….”
키르모비치 대령은 어쁘랭띠가 너무 일을 크게 벌였다고 생각 하는 모양이었다. 그 말에 어쁘랭띠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떠서 결 눈으로 키르모비치 대령을 보며 픽 웃었다. 그리고 대령에게 조용 히 말했다.
“인도군의 전 화력을 쏟아붓는다 해도 그자의 머리털 한 올 건 드리지 못할 테지요.”
“뭐라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됩니다. 그는 나보다 강하니까요.”
“아니, 당신의 능력이 대단한 것은 알겠지만…… 어떻게 인간이 그런 힘과 방어력을 가질 수 있습니까?”
키르모비치 대령이 놀라 반문하자 어쁘랭띠는 눈을 감으며 웃었다.
“힘과 관련된 것이 아니지요. 물리적인 힘은 그에게 어떠한 타 격도 가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곡선처럼 구부러져서 그를 피해 흘러가게 될 테니까요.”
“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줄은 알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도대체가 믿어지지가…………….”
“당신의 머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당 신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니까요.”
어쁘랭띠가 조용히 말하자 키르모비치 대령은 불만스러운 듯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이리 큰일을 벌여야 하는 겁니까? 사람들을 저렇 게 많이 동원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말하려 했는데, 어쁘랭띠는 눈을 뜨며 조용히 키르 모비치 대령의 말을 끊었다.
“필요가 있지요 당연히 있지요. 저들이 가진 화력이 중요한 것 이 아니라, 저들이 무기에 실어 보내는 적개심 때문이지요.”
“뭐, 뭐요? 무기에 적개심을 실어 보낸다? 그게 무슨 상관………….. “
“상관이 있지요. 그것이야말로 정말 저들의 마음을 보이는 것일 테니까요. 그자는 예민하니까, 그것을 더더욱 잘 느낄 겁니다. 그 리고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인도군의 무기가 쏟아붓는 화력 이 아니라 그때 인도군이 같이 보내는 미움과 증오의 마음입니다.
그게 바로 그자를 흔들리게 만들어 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를 넘어뜨릴 수 없어요.”
어쁘랭띠가 차분하게 말하자 키르모비치 대령은 믿어지지 않는 듯 말했다.
“아니, 당신과 저분까지 함께 오셨는데 모자란단 말입니까? 그 래도 그런 도움을 받아야 될 정도로…………..”
“아, 당연하지요. 당신은 그자의 이름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아 직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나 보군요. 하긴, 당신은 공산주의자지, 종교의 신자가 아니니까.”
키르모비치 대령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도저히 믿어 지지 않는다는 듯 풀이 죽은 태도로 어쁘랭띠의 옆에서 멀어져 소 등을 따라 걷기만 했다.
어쁘랭띠는 다시 눈을 감은 뒤 요가 자세를 취했고 그 뒤에 앉 아 있던 바바지라 불리는 노인은 그들의 대화에 한마디도 하지 않 고 역시 눈을 감은 채 소 등에 걸터앉아 이동할 뿐이었다.
열차와 트럭, 그리고 항공기와 헬기까지 동원돼 인도 전역으로 부터 온 병력과 장비가 갖가지 수단으로 이동하는 사이, 그것과는 전혀 보조가 맞지 않게 전진하던 그들은 인도 북부 외곽의 어느 산간 마을에 도달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진 다음이라. 키르모비치 대령은 민가의 불빛을 발견하자 반가운 미소를 띠었다. 하루 종일 걸은 참이라 몹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은 저기서 쉬어 가는 게 어떨까요?”
키르모비치 대령이 어쁘띠에게 슬쩍 묻자 여전히 꼼짝도 하 지 않고 요가 자세를 취하고 있던 어쁘랭띠가 조용히 말했다.
“요기(수행자)는 쉴 필요가 없습니다.”
“허나 나는 요기가 아닙니다. 좀 자야겠어요. 또 아무래도 밤에 이동하는 건……..”
어쁘랭띠가 약간 눈을 뜨며 살짝 웃었다.
“무엇이 두렵다는 말인가요? 세상에 요기를 두렵게 할 존재는 아무것도 없는데요. 단 하나 있다면…………….”
어쁘랭띠가 그답지 않게 살짝 말문을 흐리는 사이, 저만치에서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번쩍이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차들이 다 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키르모비치 대령이 돌아보자 어쁘랭띠는 탄식하듯 말했다.
“아하, 번잡해지는군요. 수행자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 로 이런 번잡함이지요.”
어쁘랭띠가 예언처럼 한 말은 그대로 적중했다. 여섯 대에 달하 는 차량이 다가왔는데, 가까이서 보니 모두가 장갑차와 지프 등의 군용차들이었다. 그들은 인도 북부군 사령관이 어쁘랭 일행을 생각해 보낸 호위 겸 수송대였다.
호위 겸 수송대를 인솔하는 대장은 아직 청년 티를 벗지 못한 늠름하고 퍽 잘생긴 청년 대위였다. 그는 어쁘랭띠 앞에 지프차를 몰고 다가와 급히 내리더니 군대식 경례를 먼저 하고 다시 힌두교 식의 경의를 표하는 인사를 깊이 올렸다. 대위는 말했다.
“호위대장으로 임명된 나막 대위입니다. 바바지님과 어쁘랭띠님을 직접 이렇게 뵙게 되니, 정말 제 영혼이 구함을 받는 것 같고 삼생의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독실한 청년이로군요.”
어쁘랭띠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나막 대위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크샤트리아(카스트 제도의 귀족과 무사 계급)의 율법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려 하고 있습니다.”
“오, 믿음이 깊은 청년이군요. 좋아요. 크샤트리아의 전사로 이 번 전쟁에도 전공을 많이 세웠겠군요.”
“용맹함을 드러내는 것이 크샤트리아의 길이니까요. 요즘 젊은 청년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자도 많지만, 저희 집안은 몹시 오래 된 신앙을 가진 집안입니다.”
“그랬군요”
“이슬람 놈들을 잡는데 성자님들의 힘까지 빌리게 되다니, 정말 송구스러워서 뭐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동하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저희가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나막 대위가 한 치도 빈틈없이 말하자 어쁘랭띠는 고개만 까딱 하더니 뒤에 따라오고 있던 바바지의 눈치를 보았다. 이들이 따라 붙어도 되겠느냐는 눈빛이었다. 사실 이들의 목적은 좀 애매했다. 인도 수상도 해친 이슬람 악마들이 성자인 바바지와 어쁘랭띠를 노릴지도 모른다 염려해 파견한 것인지, 그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는 그들의 느린 이동을 조금이 라도 재촉하기 위해 보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그들을 무조건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니 내치기도 곤란했다.
바바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 한 번 떼지 않은 채 무심한 눈빛으로 소 등에 올라타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키르모비 치 대령이 나막 대위에게 말했다.
“글쎄, 차량으로 이동하는 편이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나와 저분은 소를 탈 겁니다.”
어쁘랭띠가 키르모비치 대령의 말을 자르듯 말했다. 키르모비 치 대령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뭐라고 대꾸는 하지 못했 다. 대령은 대꾸나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자신이 타고 있던 소를 버리고 나막 대위의 지프차에 말도 없이 올라탔다. 나막 대위의 자리였다. 허나 나막 대위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 주 조심스럽고 경건한 표정으로 큰 영광이라도 된다는 듯이 키르 모비치 대령 대신 어쁘랭띠의 곁에서 걷기 시작했다.
수행자들이 이동하자, 그 주변을 장갑차들이 에워싸고 소의 걸 음걸이에 맞춰 아주 천천히 이동했다. 그렇게 조금 이동하다가 어 쁘랭띠가 문득 호기심이 생긴다는 듯 나막 대위에게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러 가는지는 알고 있나요?”
나막 대위는 딱 잘라서 군인처럼 말했다.
“명령받은 대로 할 뿐입니다. 성자님들의 목적을 저 따위가 알리도 없고, 알 필요도 없겠지요. 도구로 부려 주시기만 해도 삼생 의 영광입니다.”
“그런가요? 좋은 마음가짐이군요.”
나막 대위는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해 영 거슬립니다. 이슬람 놈들을 조금이라도 더 없애 버렸어야 하는데……………”
“그렇지요. 이슬람과의 싸움은 이미 천 년에 달하니까요. 대위 는 엘리트인 것 같으니. 물론 알고 있겠지요?”
나막 대위는 어쁘랭띠의 말에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 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지요.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저희 집안에 항상 전승돼 온 가르침인걸요.”
“맞아요. 무굴 제국이 인도를 뒤엎어서 사악한 이슬람의 가르침 으로 신성한 힌두교를 억눌렀던 것이 거의 천 년에 가깝지요. 천 년 동안 억눌려 온 힌두교가 이제는 인도에 다시 빛을 발하게 됐 는데, 영국의 지배를 받는 사이 이슬람 사람들은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를 세워 버렸지요. 허나 대위의 마음속에는 갈등이 없나요? 그들도 원래 같은 땅에 살던 사람들이었는데요.”
그러자 나막 대위는 단언하듯 말했다.
“감히 제 뜻대로 답을 드리자면, 생각하는 것이 다른 이상 혈통이나 민족은 문제가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그런가요?”
어쁘랭띠가 조용히 되묻자, 나막 대위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특히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저들이 거부하니 그 외에 혈통 이니 인권이니 민족이니 하는 문제는 전부 극히 하찮은 것에 불과 해집니다. 종교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말고는 무엇보다 큰 차 이지요.”
“종교만이 아니지요. 환경, 가치, 이념, 소속감・・・・・・ 그 어떤 것만 으로도 인간은 누구보다 쉽게 갈라설 수 있는 존재지요. 또 원래 그것이 자연적인 일이기도 하고요. 용납할 수 없는 자들은, 물론 소수여야겠지만, 항상 존재하는 거예요.”
나막 대위는 어쁘랭띠의 말을 듣고 조금 의아해했으나 다시 득 의의 눈빛을 띠었다. 다소 위험해 보이는 미소가 어렸다.
“성자님의 의견이 오히려 저와 통하는 바가 있어서 저는 몹시 기쁩니다. 성자님께서는 저를 나무랄 것으로 지레짐작했거든요.”
“나도 힌두교를 숭배하고, 또 세상을 생각하고 있어요. 모두가 잘 지내는 꿈같은 낙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건 공상에서나 얻어지는 것이고, 나는 일개 요기일 뿐이죠. 이슬람과 의 불화는 천 년을 넘게 쌓아 온 업보이니 그 깊은 갈등을 어떻게 단순한 평화나 조화 같은 허울 좋은 말로 달랠 수 있겠어요? 그러 나 대위, 우리의 힌두교도 4세기경 굽타 왕조에 의해 브라만교에 서 변화됐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뭐,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만, 브라만교는 원시 종교에 가깝지 않습니까? 그리고 힌두교와 아주 많이 다르지도 않은…….”
“충분해요. 알고 있으면 됐어요.”
어쁘랭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쁘랭띠는 나막 대위와 의 대화를 중단하려는 듯 입을 다물면서 건너편 지프차에 피곤한 듯 몸을 실은 키르모비치 대령을 바라보았다. 어쁘랭띠의 시선이 잠시 키르모비치 대령을 향하자 나막 대위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 쪽으로 돌아갔다. 어쁘랭띠는 말했다.
“수행자들은 괜찮겠지만, 쉬어 가야만 할 사람도 있는 것 같군요.”
그의 말에 나막 대위가 얼른 답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민가로 가시겠습니까?”
“아니에요. 구태여 민가로 가고 싶지는 않군요. 들판이나 마을 이나 요기에게는 똑같아요. 그러니 번잡하지 않게 야영을 하는 편 을 택하지요.”
나막 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우리 이동도 비밀리에 이뤄지는 편이 낫습니다. 불편함 을 참아주신다 하시니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어쁘랭띠는 가만히 웃고 말았다. 그렇게 나막 대위의 지휘를 받 은 인도병들이 곧 야영용 텐트를 치는 사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던 민가에서 무슨 일인가 싶어서인지 몇 사람씩 구경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군대가 호위하는 인물이 요기 차림을 한 것을 누군가 확인했는지, 조금 있다가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삼삼오오 손에 공물로 바칠 뭔가를 들고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이곳은 목적지인 카슈미르 지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인도 북 부 지방으로 파키스탄과의 이번 2차 전쟁도 그랬지만, 1차 전쟁 때도 전화가 이 지방을 한번 휩쓸고 지나갔기에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을 버리지 않고 남아 있 는 주민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순박하고, 힌두교를 믿는 마음이 강했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환경 직후라 더더욱 뭔가를 갈 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고, 도회 물을 먹지 않았기에 신앙심이 더더욱 강한지도 모른다. 하물며 군의 호위까지 받을 정도로 대단 한 요기가 이런 척박한 고장에 모습을 보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 다. 군이 수행할 정도이니 저 요기들은 분명 대단할 존재일 것이 며 성자들일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렇다면 힌두교를 믿는 입장 에서 성자의 축복을 받는 일을 놓칠 수 없었다. 성자의 축복은 어 떤 윤회의 굴레보다 강하고 카르마의 연결고리를 좋은 쪽으로 풀 수 있는, 거의 최상의 은총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넉넉하지 않은 생활 속에서도 공물로 바 칠기이나 쌀, 꽃으로 만든 화환 등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성의 를 보일 공물들을 들고 은총을 간구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4 인도에서 주로 생식하는 소젖으로 만든 일종의 버터이다. 인도 음식에서는 거의 필수품이며 수행자들에게도 공물로 많이 바쳐진다.
이렇게 예상외로 주민들이 관심을 가지자 경호를 책임진 나막 대위는 당황했다. 그는 주민들이 어떻게든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 고 부하들을 독려했으나 자신 또한 힌두교를 믿는 입장이었고, 자 신만이 아니라 부하들 모두가 힌두교의 열성적인 신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무엇을 갈구하는지 모를 수 없었고 그 점이 마음 에 걸렸다. 더구나 성자인 어쁘랭띠나 바바지님이 사람들을 내몰 리도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꾸 주민들이 모여들자 그것을 본 어쁘랭띠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결국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다.
언뜻 보기에도 요기임이 분명한 차림의 어쁘띠다. 거기에 군 계급장을 달고 있는 나막 대위가 더할 수 없는 공손한 태도를 취 하자, 마을 주민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성자일 것이라 믿었고 그런 믿음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거칠고 때 묻은 손을 안타깝게 내밀며 은총을 갈구했다. 어쁘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손을 일일이 잡아 주며 머 리 위에 잠시 손을 얹고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축 주었다. 신선한 강인 갠지스강에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래도 성자가 직접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감격했다.
나막 대위나 부하들도 은근히 부러운 듯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 았고, 실제로 대위의 부하 중 몇몇은 자기들도 끼어서 은총을 받 아 볼까 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훈련받은 군인이기에 애써서 그런 욕구를 참아내는 것 같았다.
좁은 시골 마을일수록 소문은 더 빠르게 전파되는 법이다. 소문 은 금방 퍼져 어디서 그렇게 많이 모여들었는지 이 일대 숨어 지 내던 사람들까지 모두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거의 수 백 명이 어쁘랭띠의 축언을 받았다. 그동안 어쁘랭띠는 내내 아무 말 없이 담담한 태도로 축원하는 자세만 계속해서 취했다. 다만 바바지는 막사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주민들은 바바지에 대해서 는 알지 못했지만 나막 대위는 생각했다.
‘바바님까지 모습을 보이신다면 이슬람 악마가 알아챌지도 모르지. 또 어쁘랭띠의 축원으로도 충분할 테고, 그렇기에 어쁘랭 띠께서 계시는 것이니, 이 정도로 충분하겠지. 주민 여러분, 당신 들 정말 운이 좋았소. 그야말로 삼생의 영광이오’
어쁘랭띠가 거의 모든 주민의 축언을 해 주고 나자 시간은 이미 늦어져 으슥한 밤에 가까워졌다. 마지막 남은 한 노인에게 축언이 행해지자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옆을 지킨 나막 대위가 어쁘 랭띠에게 속삭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성자시여.”
어쁘랭띠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한마디만 했다.
“나는 성자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어쁘랭띠는 몸을 돌려서 차분히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에는 어느새 나막 대위의 부하들이 테이블을 펼쳐 놓고 저녁 식사를 차려 둔 채였다. 군용인 야전 음식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성의껏 차린 것이 분명한 테이블이었다.
물론 바바지는 한쪽 구석에 앉아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조 용히 요가 자세를 취한 채 석상처럼 앉아 있었고, 테이블에는 키 르모비치 대령이 혼자 앉아서 자기 몫의 식기와 포크를 들고 있었 다. 그러나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먹지도 않고 계속 흩뜨리며 불 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쁘띠가 들어오자 키르모비치 대령이 불만스러운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도대체가 인도 음식이란! 이건 뭐, 포크로 집히지도 않고!”
어쁘랭띠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인도 음식은 손을 사용하는 겁니다. 포크 같은 쇠붙이를 쓰는 것이 아니지요.”
“그건 당신네들 사정이고, 아무튼 나는…….”
키르모비치 대령은 곧 보기도 싫다는 듯, 음식 접시를 내려놓고 다시 그 접시 위에 쇠로 된 포크를 거칠게 꽂아 넣었다. 그리고 아 예 보기도 싫은지 접시를 저쪽으로 밀고 난’만 집어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어쁘랭띠는 그 옆에 마주 앉았는데, 물론 그의 앞에도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 차린 식사들이 놓여 있었지만 거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5 인도인들이 주로 먹는 일종의 납작한 빵이다.
그 대신 식사 전 손을 씻도록 준비된 물에만 간단하게 손을 담 가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관습대로 간단하게 손을 씻어 내리는 게 아니라 은근히 힘을 주어서 박박 문지르듯 손을 닦았다. 그러 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집어서 손을 여러 번 문지르듯이 닦고 닦고 또 닦았다. 문질러서 광을 내듯이 계속 손을 닦는 것을 멍하니 보며 키르모비치 대령이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군대를 잔뜩 동원한다면 당신의 능력을 볼 기회 가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키르모비치 대령의 말에 어쁘랭띠는 고개를 갸웃하며 키르모비 치 대령을 바라보았다. 왼손에 든 냅킨으로 오른손을 박박 문질러 대면서.
“무슨 뜻이지요?”
키르모비치 대령이 설명하듯 말했다.
“아니, 이렇게 현대 군의 화력을 그자에게 퍼붓는다면 당신이 무슨 능력을 보여 주고 할 것 없이 그자는 가루가 돼 버릴지도 모 르지 않습니까?”
“내 말을 믿지 않는군요.”
“아니, 믿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군의 화력이 아무 소용도 없다니,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잖습니까.”
“내 말을 믿지 않는 당신과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네요.”
어쁘랭띠가 한숨이라도 쉴 듯 말하자 키르모비치 대령은 고개. 를 저으며 말했다.
“아,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습니까. 난 믿지 않는다 말하지 않 았습니다. 다만 믿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진정한 힘・・・・・・ 이전에 보여 준 힘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당신이 말했었지 요. 그런 힘을 보고 싶을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물론 당신과의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고요.”
“믿지 못하면서도 보고 싶다고요? 보아야만 믿을 수 있다는 건가요?”
어쁘띠는 아주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항상 평온하고 담담하 던 그 얼굴에 자만심 또는 경멸감 같은 감정이 드러나 보였다.
“당신의 눈이 얼마나 많은 걸 볼 수 있다고 생각하죠? 당신이 전혀 인지도 못 하는 세상이 얼마나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지 당신 은 알아챌 능력도, 그럴 마음도 전혀 없는 것 같군요.”
어쁘랭띠가 다소 싸늘하게 이야기하자 키르모비치 대령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나는 당신의 종교 강의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정말 관심이 있는 것은 당신의 능력일 뿐이지.”
“이미 이야기했을 텐데요? 저런 무기 같은 것으로는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고.”
“아. 뭐, 아까 당신이 설명했었지. 물론 내가 확실히 이해가 간다 는 뜻은 아닙니다. 허나 두 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하게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나는 당신의 능력을 보고 싶고 그로 인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싶을 뿐이니까. 서로 이해가 일치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어쁘띠는 경멸감을 감추지 않은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닦던 냽킨을 테이블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그것을 보고 키르모비치 대령이 말했다.
‘식사는 안 하십니까? 물론 내 입맛에는 맞지 않지만 당신 입맛에는 맞을까 하는데. 인도의 음식이니.”
인도의 음식이란 말에 강한 경멸감이 포함된 것 같았지만 어쁘랭띠는 담담히 웃어넘겼다.
“이미 무슨 음식을 섭취할 단계는 지났습니다.”
“아, 정말이지……..”
키르모비치 대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려다가 넌지시 말했다.
“한데 왜 그리 손을 씻으십니까?”
어쁘랭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키르모비치 대령도 기분이 상한 듯 천막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제 여기 좀 치워 주게! 식사 끝났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나막은 정중하면서도 군인다운 태도로 천 막으로 들어섰다. 키르모비치 대령이 아무렇게나 슬리핑 백을 둘둘 감고 자고 있다가 나막 대위가 들어오는 기척을 알아채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어쁘랭띠와 바바지는 전날부터 마치 지구가 끝날 때까지 그런 자세로 있을 것같이 바위처럼 묘한 요가 자세를 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막 대위가 조심스레 말했다.
“출발 준비를 해도 되겠습니까?”
“편한 대로 하시지요.”
어쁘랭띠가 조용히 말하자 키르모비치 대령은 그래도 군인답게 불평하지 않고 곧장 몸을 일으켰다. 물론 KGB에서 파견된 위치를 티라도 내려는 듯, 거만하게 침구 정돈 같은 것은 하지도 않고 뒷 짐을 진 채 그냥 천막을 나섰다. 어차피 옷도 벗지 않고 원래 차림 그대로 잔 터라 몇 번 옷매무새를 바로잡았을 뿐, 옷을 갈아입지 도 않았다. 여기는 야전이고, 요기들 옆에 있으면서 옷을 갈아입 거나 몸단장을 하는 것 자체가 더 어색해 보일지도 몰랐다.
일행이 천막을 걷고 출발 준비를 하려는데, 마을 사람들이 또다 시 몰려들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출발을 방해 받 기 싫어 나막 대위가 부하들을 풀어 주민들을 한쪽으로 밀어 넣었 다. 그렇게 다시 바바지와 어쁘랭띠는 소 등에 올랐고, 그 주위를 지프차와 무기가 장착된 군용 장갑차들로 빈틈없이 에워싼 미묘 한진군이 재개됐다. 한두 시간 정도 길을 가 마을이 있던 곳에서 한참 멀어졌을 때였다.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던 바바지가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무슨 휘파람을 부는 것인지,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조 금 의아해했다. 그렇게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었고 중간에 끊기기 도 했지만 바바지는 꽤나 오랫동안 멈추지 않고 가느다란 휘파람 을 불러댔다.
물론 나막 대위는 정통 크샤트리아식 교육을 받은 대로, 브라 만 계급이 하는 일에 어떤 토를 달거나 간섭도 하지 않고 나름대 로 뜻이 있겠거니 하며 묻지도 않은 채 넘어갔다. 사실 휘파람을 부는 일 정도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그들의 여행은 계속됐다.